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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약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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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깨닳음으로 만나게 되길 기원합니다. 2006/01/18 22: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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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그러길 苦待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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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5사 중국 역대 왕들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 그 밖에 연표(年表)·계보(系譜) 또는 제도를 기록한 지(志, 또는 書) 등을 포함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왕(武王) 때까지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 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왕(乾隆王)은 이에 더하여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내어 24사 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 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2006/01/20 18:3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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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 2. 한서 3. 후한서 4. 삼국지 5. 진서(晉書) 唐 房玄齡(방현령) 등 6. 송서(宋書) 梁 沈約(심약) 7. 남제서(南齊書) 梁 蕭子顯(소자현) 8. 양서(梁書) 唐 姚思廉(요사렴) 9. 진서(陳書) 唐 姚思廉 10. 위서(魏書) 北齊 魏收(위수) 11. 북제서(北齊書) 唐 李百藥(이백약) 12. 주서(周書) 唐 令狐德棻(영호덕분) 陳叔達(진숙달) 庾儉(유검) 등 13. 남사(南史) 唐 李延壽(이연수) 14. 북사(北史) 唐 李延壽 15. 수서(隋書) 唐 魏徵(위징) 16. 구당서(舊唐書) 後晉 劉昫(유후 劉煦?) 등 17. 신당서(新唐書) 宋 歐陽修(구양수) 宋祁(송기) 등 18. 구오대사(舊五代史) 宋 薛居正(설거정) 등 19. 신오대사(新五代史) 宋 歐陽修 20. 송사(宋史) 元 托克托(톡토) 등 21. 요사(遼史) 元 托克托 등 22. 금사(金史) 元 托克托 등 23. 원사(元史) 明 宋濂(송렴) 등 24. 명사(明史) 淸 張廷玉(장옥정) 등 25. 신원사(新元史) 中華民國 柯劭忞(커샤오민) ** 청사고(淸史稿) 中華民國 柯劭忞(커샤오민) 趙爾巽(짜오얼쑨) 등 2006/01/20 18:3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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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Rome] 중부의 아펜니노산맥[길이 1,400km. 너비 40∼200km. 평균 해발고도 1,000~2,000m. 최고봉은 몬테코르노산(2,914m)이다. 서쪽 끝은 알프스산맥에서 갈라져 해안 알프스를 이루며, 반도의 중축을 형성하면서 남동으로 뻗다가 시칠리아섬에서 아프리카의 아틀라스산맥과 이어진다. 산체는 주로 제3기의 습곡산맥이며 많은 화산이 있다. 화산활동은 나폴리 부근이 가장 활발하고, 베수비오산(山)은 오늘날도 활발한 활동을 계속한다. 이 산맥은 반도를 앞 ·뒤 사면으로 갈라놓으며, 주맥이 아드리아해(海)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산맥의 양쪽이 대조적이다. 산맥의 아드리아해 쪽은 일반적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구릉이 바다 가까이까지 육박해 있다. 티레니아해(海) 쪽은 긴 하천이 많고 분지와 종곡(縱谷)이 발달해 있으며, 밝고 온난하여 예로부터 문화와 산업이 발전하였다. 산맥 중부의 토스카나와 마레마에서는 철 ·구리 ·주석 등이 산출되며, 이탈리아의 주요 광산지대를 이룬다. 산맥을 횡단하는 아펜닌 터널은 길이 18,519 m의 세계 제3위의 긴 터널로 로마와 밀라노를 잇는 철도간선이 통과한다. 서쪽의 피렌체에서 프라토를 거쳐 동쪽의 볼로냐 방면으로 빠져나간다.]에서 발원하는 테베레강(江) 하류에 면하며 주로 홍적대지로 이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시의 중심부이며 또 로마가 기원한 티베리나섬 부근은 테베레강 하구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다. 시민은 거의 시의 행정영역 안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시역을 넘어선 도시권의 발전은 별로 볼 수가 없다. 로마시의 행정영역에는 해안의 리도디로마, 국제공항이 있는 피우미치노 및 아직 택지화가 진척되지 않고 로마 평원의 자취가 있는 서부의 구릉지대가 포함되어 있다. 테베레강의 지류 아니에네강이 합류하는 근처에서 기원하였으며 현재의 시가지는 높이 20∼80m의 구릉지대에 펼쳐져 있다. 시역의 동부에서는 알바노 화산군의 용암을 볼 수 있고 또 리도디로마·오스티아·피우미치노 등은 테베레강 하구부의 충적평야에 위치한다. 기후는 중부 이탈리아의 티레니아해(海) 쪽으로 나타나는 공통적인 지중해성기후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나 겨울에는 발칸반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의 영향을 받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연평균기온 15.5℃, 연강수량 750mm이며, 강수량은 9∼12월에 많아 11월 강수량이 100mm가 넘지만 7월에는 15mm이며, 해에 따라서 변동이 심하다. 봄부터 여름에 걸쳐 시로코(sirocco)의 영향을 받을 때에는 기온이 상승하여 무덥다. 2006/01/27 09: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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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Pompeii] 지금은 내륙(內陸)이 되었으나, 당시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남동쪽, 사르누스강(江)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비옥한 캄파니아 평야의 관문에 해당하여 농업 ·상업 중심지로 번창하였으며, 제정(帝政)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들이 들어선 피서 ·피한의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폼페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으며, 처음에는 오스키인(人)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BC 470∼BC 424년경에는 에트루리아인(人)이 차지하였고, 그 뒤 BC 80년까지는 삼니트인들이 도시를 지배하였다. 그동안 남부 이탈리아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한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특히 BC 3세기 중반부터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이 발굴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후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 BC 91∼BC 88) 때에는 동맹시 쪽에 가담하였으므로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의 공격에 굴복,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부터 급격히 로마화(化)하였다. 제정로마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는 2만∼5만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인구의 계절적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에서는 대폭발이 있기 이전인 63년 2월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전보다 훨씬 훌륭한 도시로 재건되었으나,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m 두께의 화산력(火山礫)과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렸다. 당시의 분화상황은 소(小)플리니우스가 실감있게 전해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참화를 면했으나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분화가 멎은 뒤 재보(財寶)를 발굴한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잊혀졌다. 16세기 말부터 소규모 발굴이 시작되고 1748년부터 본격 발굴에 착수하여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었으며,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되었다.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품은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가급적 현지에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전성기에 갑자기 멸망하였으므로, 당시 로마 도시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그것들은 상당히 쾌락적이고 현세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2006/01/27 09: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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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Madrid]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며, 만사나레스강(江)에 임한다. 면적은 607㎢이다.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연강수량 419mm로 건조하다. 기온의 일교차가 크며 겨울 평균 기온은 -1℃∼7℃, 여름은 15℃∼30℃이다. 에스파냐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산업도시로서의 중요성도 크며, 도로·철도 및 항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인구상으로는 유럽 제4의 대도시이다. 마드리드는 10세기경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페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舊)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에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2006/01/27 09:1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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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문 북쪽을 동서로 활처럼 휘어 뻗은 호세안토니오가(街)와 동쪽으로 뻗은 알칼라가에는 은행 ·호텔 ·클럽과 고급상점들이 집결하여 중심 상점가를 이룬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프라도가(街)가 뻗고, 그 동쪽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가는 다시 레코르테스 ·카스티야 ·헤네랄리시모 등 여러 거리로 이어져 관공서와 고급주택지를 이룬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의 철도 개통을 전후해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에스파냐 정부가 내전에 의한 파괴의 복구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 ·항공기 ·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 ·제지 ·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정보산업으로서 출판 ·인쇄업종도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전해 왔다. 마드리드의 발전 속도는 인구증가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875년 35만, 1910년 60만, 1930년 95만, 1950년 163만으로 계속 증가하고, 1981년에는 319만 명으로 바르셀로나를 능가하였다. 예전에 시주변이었던 동쪽의 유명한 레티로 공원과 북서쪽의 대학은 시에 포함되었고, 서쪽 교외에 있던 카사데감포 대공원도 지금은 시에 접한다. 교통기관으로는 지하철 ·노면전차 ·시내버스 ·트롤리버스 등이 있으며, 북역 ·남역 ·델리시아스역에서 국내 각지로 향하는 철도가 사방으로 뻗었다. 남쪽 교외의 바라하스에는 공항이 있다. 1738∼1764년에 건설된 왕궁은 높이 30 m의 건물로, 방이 1,800여 개나 되고, 내부는 고야의 그림, 티에폴로의 벽화, 많은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었다. 왕궁에 부속된 왕립 무기고는 갑옷과 무기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은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자랑하는 미술관으로, 1819년 에스파냐왕실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에스파냐 ·플랑드르 ·이탈리아의 그림이 많으며, 특히 에스파냐 3대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은 최고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 데르 바이덴의 《십자가 하강》, 보시의 《일락의 낙원》, 티치아노의 《음악을 즐기는 비너스》, 엘 그레코의 《오순절(五旬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 성(城)의 항복》 《궁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나체의 마하》 등 수없이 많다 2006/01/27 09:1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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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 [Iberia Pen.] 면적 약 58만㎢이다. 유럽 제2의 큰 반도이며, 너비 14㎞의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 마주한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2개국이 분할해 있는데, 대부분은 ‘메세타’라고 불리는 해발고도 600∼700m의 고지이다. 메세타는 전체적으로 서쪽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하천이 대서양 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흐름이 빨라 교통로로 이용할 만한 것이 적다. 메세타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뻗쳐 있는 과다라마산맥은 몇몇 산지가 모인 것으로, 그 북쪽은 카스티야라비에하(구 카스티야)이고, 남쪽은 카스티야라누에바(신 카스티야)이다. 양쪽이 모두 연간 강수량이 300∼500㎜밖에 되지 않는 건조한 지역이며, 조방적인 목양이 행해진다. 돈키호테의 무대인 신카스티야 동부의 라만차는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은 중앙부의 아네토산이 최고봉이며, 그 동쪽에 조그만 독립국 안도라가 있다. 피레네산맥의 서쪽에 이어져 있는 산지는 칸타브리아산맥으로 대서양 연안에 임하는 곳은 많은 후미를 이루고 있는데, 이 후미를 리아라고 부르는 데서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들 산지 및 북서안에는 연간 1,000㎜나 그 이상의 강우가 있으며, 서유럽 및 알프스와 비슷한 식생(植生)이 전개되고 임업이 성하다. 피레네와 메세타 사이는 아라곤 저지이고, 메세타와 남쪽의 시에라네바다산맥 사이는 안달루시아 지방이다. 양쪽 모두 개발의 역사가 오래되며, 특히 후자는 이슬람풍의 특색이 진하게 남아 있다. 시에라네바다의 서쪽 끝은 지브롤터이며, 그 대안(對岸)에는 세우타가 있다. 자연조건과 역사를 반영하여 이베리아 반도는 대체로 1차산업에 치우쳐 있으며 공업 등의 개발은 뒤떨어진 편이다. 과수·곡물 재배가 농업의 중심이지만, 지중해 연안 등지에는 벼농사 지대가 있다. 대서양 연안에서는 어업과 제염(製鹽)도 행해지고 있으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예로부터 유명한 광물자원도 철광석과 수은을 제외하고는 채굴량이 많지 않다. 2006/01/27 09:1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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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인 [Moors] 711년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아랍계(系) 이슬람교도의 명칭. 마우레인 또는 모르인이라고도 한다. 사하라 사막 서부의 모리타니로부터 모로코에 걸쳐 살며, 아라비아인 ·베르베르인 ·흑인의 혼혈로 구성된다. 그 기원은 남방설(南方說)보다는 북방설(北方說)이 유력한데, 일찍이 11세기에 북아프리카에서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나 18세기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인종 ·언어적으로는 니그로보다는 아랍 요소가 더 강하다. 유목을 생업으로 삼고, 자존심이 강하며 용감하지만, 연대감은 비교적 약하다. 무어인이란 인종학적인 명칭이 아니므로 북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이슬람교도에게도 적용되며, 필리핀에도 모르족이라고 불려지는 종족이 있는 등 무어인의 개념은 명확하지가 않다. 2006/01/27 09:1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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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Toledo] 에스파냐 톨레도주(州)의 주도(州都). 인구 5만. 수도 마드리드 남서쪽 70km 지점에 위치하는 관광도시이다. 타호강[Tajo R, 포르투갈어로는 테주(Tejo)라고 하며, 타구스강이라고도 한다. 길이 1,007km. 유역면적 8만km2. 에스파냐 카스티야라누에바의 쿠엥카 산지의 해발고도 1,600m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톨레도를 거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부근에서 삼각강(三角江)을 이루면서 대서양으로 유입한다. 급류가 협곡을 깎아 상류에서는 심한 침식현상을 볼 수 있으며 주운(舟運)은 하구에서 90km 떨어진 포르투갈의 산타렘까지만 가능하다. 유역에서의 강수량은 적지만 홍수가 자주 일어난다. 에스파냐에서는 1960년 이후 수력발전 ·관개 ·유량 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19개의 댐을 축조하고, 포르투갈령 에스트렐라 산지에서 발원하는 지류 제제레강에도 수력발전소를 세웠다. 1966년 리스본 근교에 건설한 살라자르교(橋)는 유럽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다.]연안에 있으며 역사·미술적으로는 마드리드를 능가하기도 한다. BC 2세기에 로마의 식민도시가 되었고 8∼11세기에 고트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이어 이슬람 세력의 침입 이후에는 톨레도 왕국의 수도로서 상공업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무기 생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카스티야 왕국의 문화·정치의 중심지로서 더욱 발전하였다. 1560년 펠리페 2세의 마드리드 천도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3세기의 고딕식 성당, 무어풍(風)의 왕궁과 성벽, 유대교회 등 이색 건조물이 많다. 박물관에는 E.그레코, 고야, 반 다이크 등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레코의 집은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톨레도의 검(劍)’은 지금도 유명하며 섬유·도기 등의 경공업이 이루어진다. 또 주변에서 산출하는 양·말 등의 가축, 곡물·포도주·과일 등의 농산물과 광산물의 집산지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2006/01/27 09:2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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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Lisbon] 인구 55만.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의 삼각 하구 우안(右岸)에 위치한다.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 굴지의 양항(良港)이기도 하다. 일찍이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 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해일로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인 건조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동부의 알파마 지구에는 성(聖)조지성(城)이, 서부의 벨렘 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렘의 탑, 바스코 다 가마를 기념한 고딕양식의 수도원 및 아주다 궁전(현재의 외무성)·박물관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고, 1290년에 창립된 대학이 있다.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중앙부는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지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어 상업·행정기관이 이곳에 집중한다.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 서부는 신 시가지이고 또 최근의 시가지 확장은 북부로 펼쳐 나가고 있다. 독·부두 등 항만시설은 테주강 우안을 따라 30km에 걸치고, 그 북동부에 곡물·냉장창고 및 시멘트·정유·철강·코르크제품 등 공장이 자리한다. 어항은 벨렘 서쪽에, 대서양 각지를 잇는 여객항은 시 중심부에 위치하나, 1966년에 테주강에 가로놓인 현수교(懸垂橋:2.3km)가 완공되어 강의 좌안(左岸)에도 철강·화학·조선 등 대공장이 건설되어 발전하고 있다. 유럽공동체(EC)는 1994년도의 유럽문화도시로 이곳을 지정했다. 2006/01/27 09:2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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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 [Germania] 로마 제정기(帝政期)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초기작품. 지리서. 저자 타키투스. 98년 간행되었다. 게르만인(人)의 풍속·관습·사회를 간결한 필치로 기술한 46장(章)으로 된 단편(短篇)이다. 여행자의 보고와 문학적 자료를 토대로 한 라인강 이동과 도나우강 이북의 독일 지지(地誌)인데, 라틴어로 된 지리적 ·민족학적 작품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저서이다. 고대 게르만 민족의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2006/01/27 09:3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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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Alps]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에 걸쳐 있다. 독일어로 알펜(Alpen), 프랑스어로는 알프(Alps), 이탈리아어로는 알피(Alpi)라고 한다. 산을 뜻하는 켈트어 alb, alp 또는 백색을 뜻하는 라틴어가 어원인데, ‘희고 높은 산’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오스트레일리아알프스·일본알프스와 같이 각국의 산맥 중에도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여 높은 산맥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 산계는 지중해 가까이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뻗은 다음 활 모양을 이루며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지역은 히말라야까지 계속되는 지구의 지질적 약선부(弱線部)에 해당하며, 제3기에 일어난 대규모 조산운동으로 생긴 습곡산맥이다. 장소에 따라 습곡·조산의 강도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평균해발고도는 2,500m이다. 최고봉은 몽블랑(4,807m)으로 히말라야산맥·안데스산맥에 비하면 고도가 떨어지지만, 정상부에는 빙하가 발달해 있어 알레치빙하(길이 16.5km), 메르드글라스빙하, 고르너빙하 등이 있다. 빙식을 당한 침봉군(針峰群), 삼림한계 위에 있는 초원(alp), 호수 등과 함께 아름다운 고산 풍경을 이루어 등산·관광객이 많이 모여든다. 유럽의 큰 하천인 라인·론·도나우(상류의 인강)·포강 등은 알프스에서 발원한다. 알프스는 유럽 중남부에 장벽처럼 우뚝 솟아 있으며, 피레네산맥과 함께 북쪽의 유럽대평원과 남쪽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기후적·문화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특히 지중해 연안에서는 강수량이 적은 지중해성 기후의 생성요인 구실을 한다. 문화적·민족적으로 북쪽과 남쪽의 교류를 방해해 왔는데, 지금은 도로와 철도가 많이 뚫려 있다. 특히 프랑스∼이탈리아의 몽스니(길이 1만 2233m), 스위스∼이탈리아의 생플롱(2만 44m), 생고타르(1만 4990m) 등의 고개에서는 긴 터널을 통해 국제열차가 다니고 있다. 도로는 이들 고개 외에 생베르나르(프랑스∼이탈리아)·그랑생베르나르·슈플뤼겐·마로야(스위스∼이탈리아)·브레너·탈비스(오스트리아∼이탈리아)가 있다. 2006/01/27 09:3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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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Switzerland] 유럽 중앙부에 있는 나라. 위치 유럽 중부 내륙, 면적 4만 1284㎢, 인구 733만 6000명, 인구밀도 177.7명/㎢(2003), 수도 베른, 정체 연방공화제, 공용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레토-로만어, 통화 스위스 프랑(Swiss Franc:Sw F), 환율 1.39Sw F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3만 8330$(2003), 나라꽃 에델바이스, 면적은 4만 1284㎢, 인구는 733만 6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177.7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헬베티카 동맹(confederation Helvetica)이다. 수도는 베른이고, 언어는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레토-로만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북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리히텐슈타인, 오스트리아, 남쪽으로 이탈리아, 서쪽으로 프랑스에 접한다. 2006/01/27 09:3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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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日本, Japan] 위치 동북 아시아, 면적 37만 7873㎢, 인구 1억 2754만 6000명(2003), 인구밀도 337.5명/㎢(2003), 수도 도쿄, 정체 입헌군주제, 공용어 일본어, 통화 엔(¥), 환율 116.74¥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3만 5610$(2003), 일본어로는 '니혼' 또는 '닛폰'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한서(漢書)에서 수서(隋書)까지 '왜(倭)' 또는 '왜국(倭國)'으로 기록하여 왔으며, 한국에서도 일찍이 그렇게 불러 왔다. 북쪽으로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의 소야[宗谷]해협 및 북동쪽의 네무로[根室]해협을 끼고 러시아의 사할린 및 쿠릴열도 남단의 구나시리섬과 대하며, 남쪽으로는 난세이[南西]제도가 타이완[臺灣] 근해까지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동해(東海)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Primorskij Kraj) 및 한국과 대하는데,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쓰시마섬[對馬島]은 부산에서 50km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등이 산재하면서 태평양에 면한다. 2006/01/27 09:4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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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神道] 일본 민족 사이에서 발생한 고유의 민족신앙. 대륙에서 건너간 불법(佛法) 외에 일본에 본래부터 있던 신앙·의례(儀禮)를 가리키며, 유신도(惟神道)·신교(神敎)·덕교(德敎)·대도(大道)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내용에 따라 신사신도(神社神道)·교파(敎派)신도·국가(國家)신도·황실(皇室)신도·학파(學派)신도 등으로 나눈다. 그 중 신사신도와 교파신도는 제사(祭祀)중심과 교법(敎法)중심에 따른 분류인데, 신사신도란 씨족신(氏族神)과 고장의 수호신을 비롯하여 전국의 신사를 중심으로 그 제사의례를 포함한 신앙조직을 가리키며, 교파신도란 교의(敎義)를 세워 교단을 조직한 신도교파의 총칭이다. 신사신도가 민간적인 것이었다면 국가신도는 국가의 비호 아래 국교적(國敎的)인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또한 황실신도는 왕족릉(王族陵)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며, 학파신도란 신도의 이론을 수립한 집단을 가리킨다. 신도에는 특별한 교전(敎典)은 없지만 일본열도의 기후풍토 속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해 오는 동안 특색 있는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2006/01/27 10:3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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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神社參拜]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Shintoism) 사원(寺院)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한국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신사는 1910년 전에는 일본 거류민들을 위해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하였지만,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 ·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단 사립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의 실제 시행은 보류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대륙침략을 재개한 일제는,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분열되었으며,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폐교되고 일부는 ‘순응’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皇民化)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어가자, 이제 그 강요의 마수를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뻗치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기독교계도 이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고비로 굴복하여 급격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어느 교파에나 있었다. 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여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하여 각급학교 등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2006/01/27 10:34: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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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摩尼山] 위치 인천 강화군 화도면, 높이 469.4m, 문화재 정수사법당(보물 161), 장곶돈대(인천기념물 19), 참성단(사적136),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69.4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種徽)가 지은 《수산집 修山集》에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주변에 문화유적지가 많아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고 있다. 1977년 3월 산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2006/01/27 11:5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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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塹星壇] 사적 제136호, 지정연도 1964, 소재지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시대 상고시대, 크기 면적 5,593㎡, 상단방형 1변 길이 1.98m, 하단원형 지름 4.5m, 종류 제천지(祭天地), 사적 제136호. 1964년 지정.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세전되어 온다. 면적은 5,593m2이며, 상단 방형(方形) 1변의 길이는 1.98m, 하단원형의 지름은 4.5m. 자연의 산석(山石)을 다듬어 반듯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쌓았고, 돌과 돌 사이의 사춤에 아무 접착제도 바르지 않았다. 자연석들에 의지하여 둥글게 쌓은 하원단(下圓壇)과 네모 반듯하게 쌓은 상방단(上方壇)의 이중으로 구성하고, 상방단 동쪽면에는 21계단의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는데,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에 중수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마니산이 그만큼 정결하며 장엄하고 뛰어난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강도(江都:江華)는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로 되어 있고 문물이 발달하였으며, 마니(摩利)·혈구(穴口) 등 하늘과의 인연이 깊다고 예로부터 일러 왔다. 또 개국신화(開國神話)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桓雄)의 권속이므로 결국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방(方)과 원(圓)은 천지의 의형(擬形)이며 조화가 모두 거기서 일어나는 것으로 옛날 사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참성단의 원과 방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에 두고 설치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2006/01/27 11:5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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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天皇] 일본의 역대 군주에 대한 칭호. 원래는 중국에서 쓰던 말로, 만물을 지배하는 황제라는 뜻이다.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는 중국에서 당나라 고종(高宗)이 천황이라 칭한 외에는 예가 없다. ‘천황’이란 일종의 지위를 가리키는 경우와, 그 지위에 있는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元首)로서 절대적인 통치권(정치 대권)과 통수권(군사 대권)을 한몸에 장악하고 행사하였으나, 현재의 헌법에서는 “일본국 및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2006/01/27 11:5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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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元曉, 617~686.3.30] 신라 때의 승려. 별칭 아명 설서당 ·설신당, 소성거사 ·복성거사, 활동분야 종교, 주요저서 《무애가》《대혜도경종요》《법화경종요》, 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신당(新幢)이다. 압량(押梁:慶山郡)에서 태어났다.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元曉宗 ·芬皇宗 ·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 《무애가(無 歌)》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강론, 존경을 받았다. 그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범강경보살(梵綱經菩薩)》 《계본사기(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판량비론(判量比論)》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이 있다. 2006/01/27 11:5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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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樞機卿, cardinal] 가톨릭교회에서 행정을 맡아 보는 최고위의 성직자. 로마교황이 지명하는 최고 고문으로서 교황청의 각 성성(聖省), 관청의 장관 등의 요직을 맡아보며, 교황선거권을 행사한다. 추기경단은 대개 주교급 ·사제급 추기경들로 구성된다. 어원은 라틴어의 카르데(carde:경첩 ·사북의 뜻)에서 온 것이다. ‘주요점’이라는 뜻에서 바뀌어 원로원을 가리키게 되어, 추기경은 ‘교황의 원로원 의원’이라고도 일컫는다.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추기경회의(Consistorium)를 구성하며, 교황이 죽으면 사후 15일 이내에 전 추기경들이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교황 선출회의를 열고 새 교황을 선출한다. 교황은 추기경 중에서 선출되는 것이 관례이다. 추기경은 1962년 교황 요한 23세의 특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교 중에서 선출되었는데, 1586년 이래 70명이던 것을 100명으로, 1970년에 바울로 6세가 다시 130명으로 증원했다. 또 1991년에 22명이 추가되어 총 163명이다. 1969년에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에 선임됨으로써 동양에서는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2006/01/27 12:4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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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景福宮]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2006/0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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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원 [禁苑] 후원(後苑)·북원(北苑)·비원(秘苑)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곳에 금원이 생긴 것은 1406년(태종 6) 4월의 일로서, 창덕궁에 많은 전각(殿閣)을 창건한 후에 대궐 후원에다 화려한 선온정(鮮溫亭)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향(宴享)과 관등놀이 등의 유연(遊宴)을 베풀어 오늘의 금원을 이루었다. 또한 지형과 산록(山麓)의 지세에 따라 각양각색의 집을 짓고, 연못을 파서 금수(禽獻)를 놓아 길러 정취를 더하게 하였다. 건물도 평면을 4각에서 6각의 다각(多角)으로 하고 지붕도 기와지붕·초가지붕·수피(樹皮)지붕 등 형태나 수법이 다양하여 순한국식 건축양식과 조경(造景)양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창덕궁 [昌德宮]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6/01/27 12:5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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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德壽宮]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6만 1500㎡.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讓位)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定宗)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태종(太宗)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이라 하였다.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婷)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그의 재위(在位) 2,3년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기 전의 건축보다 더 훌륭한 법궁(法宮)을 이룩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 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006/01/27 12:5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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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615년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배알하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후 영조(英祖)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60년이 3번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1일 세손(후의 正祖)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高宗)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또한 공역(工役)을 일으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1896년(건양 1)에는 공역의 준공이 있었고, 그해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 태후(太后)·태자비(太子妃)는 경운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열성어진(列聖御眞)과 명성왕후의 빈전(嬪殿)도 경복궁에서 옮겼다. 2006/01/27 12:5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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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石窟庵]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石窟寺刹).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刱)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6/01/27 12:5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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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佛國寺]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2006/01/27 13:0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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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金大城, 700~774]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그는 경주 모량리(牟梁里)의 가난한 집 여자 경조(慶祖)에게서 태어나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하나를 보시(布施)하면 만배의 이익을 얻는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품팔이하여 마련한 밭을 시주하고, 얼마 뒤에 죽었다.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서, 전세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다 살았다. 그는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사냥 중에 곰을 잡고 나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자기를 죽인 것을 원망하고 환생하여 대성을 잡아먹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대성이 용서를 청하자 곰이 자기를 위하여 절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김대성은 깨달은 바가 있어 사냥을 중단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웠다 한다. 이 설화는 당시 신라인에게 불교의 업보윤회사상(業報輪廻思想)이 많이 받아들여진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來世)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2006/01/27 13:0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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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紫禁城]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놓았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당당한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좌경(左京)에 많은 건물이 있다.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2006/01/27 13: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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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秦始皇陵]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사기》 <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로, 현재는 지상의 흔적이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6/01/27 13:3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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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敦煌(돈황), Dunhuang]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허강[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있다. 란저우[蘭州]와의 거리는 1,137km, 둔황석굴[敦煌石窟]과는 25km 거리이다. 연평균기온 9.4℃, 연평균강수량 32.9mm이다. 타림분지 동쪽 변두리를 복쪽으로 흐르는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위먼관[玉門關]·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屯田兵)과 한인(漢人)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타림분지의 한 오아시스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凉:400∼421)이 둔황을 국도(國都)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도 융성하여 첸포동[千佛洞]으로 불리는 유명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이 시작되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僔)에 의하여 시작된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은, 그 뒤 북위(北魏)·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5대(五代)·송(宋)·원(元)에 이르는 1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뒤, 둔황은 북량(北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 즉 톈산남로[天山南路]와 톈산북로[天山北路]가 차지하는 교통상의 중요성이 바뀌어, 남로에 대신하여 북로가 중요성을 더해가자, 둔황은 그 번영을 북동쪽의 상락현(常樂縣:지금의 安西縣 부근)에 빼앗기고, 명칭도 과주(瓜州)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對)서역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대(唐代)에는 다시 사주(沙州)로 고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방어 및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2006/01/27 13:3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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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말에는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을 받게 되었다. 한때 독립하여 금산국(金山國)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西夏)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둔황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 뒤, 원대(元代)에 사주로(沙州路)의 치소(治所)가 되고, 명대(明代)에 사주위(沙州衛)가 되었으나 그 벽지화(僻地化)는 피할 수 없었으며, 또 과거의 불교 사찰이나 석굴사원도 쇠미해져서 청말(淸末)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둔황 모가오굴[敦煌莫高窟]을 찾았을 때는 도사(道士)와 몇 사람의 라마중만이 살았다고 한다. 1987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1900년 석굴사원의 석굴군(石窟群) 중의 하나인 둔황 모가오굴에서 2만 점의 고문헌(古文獻)·회화류(繪畵類)가 발견되어, 그것이 1907년 및 1908년에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등에 의하여 반출됨으로써, 세계의 동양학 및 불교미술 연구에 기여하였다. 간쑤성의 목화산출기지이며, 석유·금·전력·화학·식유(食油)가공 등 소규모의 공업과 주변에서 나는 밀·잡곡·대마(大麻)·유채 등의 농산물을 산출한다. 란신철도[蘭新鐵道:蘭州∼烏魯木齊]가 북쪽으로 지나며, 215·313·112국도는 티베트·칭하이[靑海] 등 성·자치구와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80개의 소학교와 14개의 중학교가 있다. 오늘날 둔황에는 후이족[回族]의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으며, 지금은 석굴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다.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둔황석굴, 웨야천[月牙泉], 위먼관, 양관 등이 유명하다. 2006/01/27 13:3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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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中國, China] 위치 아시아 동부, 면적 957만 2900㎢, 인구 12억 8889만 2000명(2003), 인구밀도 134.6명/㎢(2003), 수도 베이징, 정체 공화제, 공용어 중국어, 통화 위안(Y), 환율 8.28Y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890$(2003), 나라꽃 매화나무,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이다. 수도는 베이징[北京]이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국토 범역은 북위 4˚ 31'에서부터 북위 53˚ 52'까지 남북 5,500km, 동경 135˚ 2'인 우수리강(江)과 헤이룽강의 합류점에서부터 파미르고원까지 동서 5,200km에 달한다. 북동쪽으로 한국·러시아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남서쪽은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은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은 몽골·러시아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루는데 그 국경선의 총길이는 2만 280km에 달한다. 중국 또는 중화라는 국명은 3,000년 전 서주(西周)에서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중(中)은 중심이라는 뜻이고 화(華)는 문화라는 뜻으로, 세계의 중심 또는 문화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2006/01/27 13:4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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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강석굴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서쪽 15km, 우저우강[武州江] 북안에 있는 사암(砂岩)의 낭떠러지에 조영(造營)된 중국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 전체길이는 동서로 약 1km에 이르며 석굴의 총수는 42개이다. 동쪽 언덕에 제1∼4동(洞), 중앙 언덕에 제5∼13동, 서쪽 언덕에 제14∼42동이 있다. 북위(北魏)의 역사서 《위서(魏書)》의 〈석로지(釋老志)〉에 따르면, 사문통(沙門統:종교장관) 담요(曇曜)가 당시 문성제(文成帝)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담요 오굴(五窟)'이라고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가 이때에 만들어진 석굴로, 460년대 초에 조영된 것이다. 윈강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양식은, 제20동의 노좌대불(露座大佛:높이 14m), 제19동의 대불(높이 약 17m)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彫像)에 초기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치졸하지만 소박한 면과 선으로 구성된 서방 양식이 풍부한 작풍이다. 담요 이후는 전통과 외래 양식이 혼합되면서 다양해졌다. 이 석굴의 융성기는 486년 전후였는데, 이 무렵의 불상은 중국 고대의 복제(服制)를 모방하였다. 신체보다도 복제 표현에 유의하여 조각하였고, 얼굴은 길며 매우 신비롭다. 북위불(北魏佛) 또는 육조불(六朝佛)이라 하여 후에 하나의 조상 기준이 된 것도 이 무렵의 불상이다. 이 석굴은 북위의 문화사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중앙 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를 만들어낸 아시아 문화 생성의 자취를 입증해 주는 중요한 유구(遺構)라고 할 수 있다. 2006/01/27 13:4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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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퉁(大同) 중국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있는 도시. 면적 1만 4000㎢, 인구 266만 명(1998)이다. 중국 산시성 북쪽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접하며, 외장성(外長城) 안쪽에 위치한다. 타이위안[太原]과의 거리는 350km이다. 연평균기온 6.3℃, 연평균강수량 400mm이다. 예로부터 유목민족에 대한 방위거점이 되었으며, 398∼494년에 걸친 약 100년 동안 북위(北魏)의 국도가 되었다. 다퉁의 지명은 요(遼)·금(金)나라 때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가 된 데서 유래하며, 북위·요·금나라 때는 중국 베이팡지구[北方地區]의 소수민족인 한족(漢族)과의 정치·경제·문화교류의 중심지였다. 명(明)나라 때에는 구변진(九邊鎭)의 하나로 북변(北邊) 굴지의 군사도시가 되었는데, 시가지를 둘러싼 주위 7km의 성벽은 명나라 초에 구축된 것이다. 청(淸)나라 때는 네이멍구와 서역(西域)의 무역집산지로 알려졌으며, 1949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징바오[京包]철도와 퉁푸[同蒲]철도의 교차지로서, 허베이[河北]·산시 2성(省)과 네이멍구자치구를 잇는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내외(內外) 2장성(長城)의 중간에 자리하며, 부근 일대는 밀·조·수수 등의 농경 및 목양(牧羊) 지대를 이룬다. 평균 해발고도 1,000∼1,500m인 산에는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석탄바다(煤海)’라는 별칭이 있었다. 남서부의 커우취안[口泉]에는 대탄전이 있어 시멘트·비료·제분·착유(搾油), 농기구 제조 등 공업이 성하다. 특히 1956년 건설된 커우취안의 시멘트 공장은 중국 제1의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퉁광무국[大同鑛務局]·다퉁제2발전소·다퉁시멘트공장 등 정부가 운영하는 대기업들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윈강석굴[雲岡石窟]·화옌사[華嚴寺]·샨화사[善化寺]·주룽비[九龍壁]가 있으며, 시 동쪽에는 화산군(火山群)이 있다. 시내에는 샤화옌사[下華嚴寺]·푸언사[普恩寺] 등의 고찰이 있고, 시 서쪽 약 17km 지점에 있는 윈강석굴은 북위시대 불교예술의 보고(寶庫)이다. 2006/01/27 13:4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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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55개의 소수민족 중국의 민족구성은 최대민족인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한족은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며 한족 외의 민족을 동화(同化)시켜왔으나 소수민족은 지금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을 고수해오고 있다. 중국은 공산혁명 이후에도 소수민족의 전통에 대한 보호책으로 자치구(自治區)나 자치주(自治州)를 설정하여 각 민족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정책은 또 한편으로는 이들 민족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킴으로써 한족의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는 양자의 성격을 가진다. 소수민족들은 지역적으로 일정한 분포 양상을 보이는데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서는 좡족[莊族]·만족[滿族]·후이족[回族]·먀오족[苗族]·위구르족[維吾爾族]·이족[彛族]·투자족[土家族]·몽골족[蒙古族] 등이 있고, 한민족(韓民族)인 조선족(朝鮮族)은 약 192만 명으로 14번째로 많고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하며 주로 둥베이[東北] 3성인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등에 분포한다. 2006/01/27 13:5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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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 [國際主義, internationalism] 근대 국제사회에서 개별국가의 이해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국가간의 협조·연대(連帶)·통일을 지향하는 사상이나 운동. 국제주의는 국가·민족을 전제로 하여 국제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로마 교황의 교권(敎權)으로 뒷받침된 중세 유럽의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보편주의)이나 각 개인을 단위로 하여 세계질서를 구상하는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세계주의)과는 구별된다. 국제주의라는 관념은 14∼15세기경에 나타나 17∼18세기에 크게 제고(提高)되었다. 즉, 중상주의(重商主義) 시대의 모든 국가간의 분쟁이나 전쟁이 국제조직화에의 관심을 환기시켜 유럽 국가체계 내부에서의 국제연맹적 조직·상설의회·국제중재재판·국제군 등의 제 구상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국제주의 사상은 절대군주 상호간의 관계를 기조로 하여 국제질서를 구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정치적 기반도 좁았고, 실효성도 미흡한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J.J.루소, I.칸트, J.벤담 등의 사상에 나타난 국제주의는 구시대의 그것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지녔다. 루소와 칸트는 절대군주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고 전제(專制)의 타파, 입헌적 개혁을 국제통일의 필요조건으로 본 점에서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구제(救濟)의 이론을 여론에 의하여 창출해 낸 최초의 사상가’로 일컬어지는 벤담은 식민지 해방·비밀외교 폐지·군비철폐·중재재판소 설치 등 여러 안을 제기, 그것들을 여론의 힘과 결부시키려고 생각한 점에서 자유주의적인 국제주의 사상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815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창으로 결성된 신성동맹(神聖同盟)은 국제주의와는 이질(異質)의 중세적 보편제국에서 그 원형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도 추찰(推察)될 수 있듯이, 유럽 제국의 변혁을 두려워한 봉건적·반동적인 국제주의의 체제로서, 결과적으로는 부르주아혁명·민족혁명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세기에서의 국제주의의 새로운 두 조류, 즉 부르주아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신성동맹에 대한 반항으로서, 후에는 자본의 팽창적 내셔널리즘(nationalism)에 대항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2006/01/27 14:0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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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주의 [普遍主義, universalism] 보편자(또는 전체)를 개별자(또는 개인)보다 상위에 두고, 개별자는 보편자와의 관계에서만 그 존재이유와 의의를 가진다고 하는 입장. 개체주의 또는 개인주의와 상대되는 말이다. 여러 의미로 쓰이는 개념으로, 참의 존재는 이데아라고 하여 현상 세계는 존재와 비존재의 혼합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 플라톤은 보편주의의 입장에 있다 하겠고, 개별적 존재야말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주의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R.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은 I.칸트의 의식 일반에 계승되고, G.W.F.헤겔에 의해 역사발전의 주체인 정신으로 이어졌으나, 헤겔은 보편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비해 칸트의 흐름을 잇는 M.베버는 주관에 의한 구성으로써 인식이 성립된다고 하는 구성설의 입장을 취하며, 또한 주관이 자신의 근거로 삼는 궁극적 가치가 역사적으로 변화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인에 따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2006/01/27 14:0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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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全體主義, totalitarianism]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전체주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인데, 당초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체제하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칭하게 되어 반(反)공산주의 슬로건으로 전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체주의에 대한 정의나 속성에 관해서 확정된 정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전체주의는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서의 전체주의는 부분에 대한 전체의 선행성과 우월성을 주장한다. 즉, 전체주의란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여 집권자의 정치권력이 국민의 정치생활은 물론, 경제·사회·문화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통제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전체주의에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양자를 일괄적으로 규정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양자는 그 이데올로기의 기원에 있어서나 그 사회적 배경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전체주의의 발생원인을 획일적으로 해명하기는 어려우나, 그 지배형태에서 전체주의적 특징을 찾아낼 수는 있다. 전체주의체제의 특징을 규명하려는 연구는 1954년 C.J.프리드리히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그는 전체주의를 정치적 지배의 특수한 형태라고 규정하고,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예로 들어 양자의 공통점을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브르제진스키와의 공저(共著) 《Totalitarian Dictatorship and Autocracy》에서 전체주의적 독재를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들과 결부된 정치사회의 발전형태로 다루어 그 특징을 ① 인류의 완벽하고 최종적인 사회를 제시하고, 기존사회를 과격하게 배척하며, 세계정복을 계획하는 공적(公的) 이데올로기, ②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관료제에 입각하거나 국가관료제와 융합된 과두적이고도 계서적(階序的)인 대중정당, ③ 사회·국가 및 정당을 통제하는 비밀경찰, ④ 여론의 조작을 위한 모든 매스미디어의 독점, ⑤ 무장된 저항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무기의 독점, ⑥ 경제의 중앙집권적인 통제는 물론, 모든 경제단체와 결사들의 관료주의적인 획일화라고 규정하였다. 즉, 현대 기술의 발달을 통하여 통제의 전체성이 확보되고 있는 정치체제를 전체주의 정치체제라고 봄으로써 전통적인 절대군주의 지배나 전제정치체제(專制政治體制) 또는 기타 독재형태와 구별하였다. 2006/01/27 14:1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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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통합주의 [世界統合主義, globalism] 세계를 하나의 인간사회 시스템으로 파악하고, 그 시스템을 통해서 인류의 평화, 경제적 복지, 사회적 정의, 환경과의 조화 등의 실현을 꾀하려는 주장. 이 주장은 '우주선 지구호'라고 하듯 지구공동체의식의 세계적 확대를 배경으로 하여 1970년대 이후 대두되었다. 이전에도 신기능주의라고 불리는 통합이론 속에 이와 같은 주장의 전신(前身)을 볼 수 있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 다음 일련의 상황이 계기가 되어 주의 주장으로 확립되었다. 즉, 교통·통신기관의 발달에 의해서, 세계의 축소와 초국경적 교류가 한층 빈번해진 일, 초국가적·탈국가적인 국제주체에 의한 세계적인 경제적·사회적 상호교류가 전개되어 온 일, 세계적 규모로서의 상호의존이 심화된 일, 그리고 환경파괴에 의한 지구의 멸망과 핵의 위협 등 인류공통의 위기의식이 고조된 일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위기의식의 고조는 국가가 가지는 문제해결기능의 저하를 인식시키고, '지구정치(global politics)' 성립의 필요성을 통감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정치에 대한 통치능력에의 의문이나 국가가 가진 이해조정기능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 등, 국가 중심적인 입장을 취하는 쪽으로부터의 비판이 있다. 2006/01/27 14:2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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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Pax Romana] BC1세기 말 제정(帝政)을 수립한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부터 5현제(五賢帝) 시대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평화. 로마의 평화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異民族)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 ·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都市)가 번영하여 전국민은 평화를 구가했다. 로마의 평화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異民族)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 ·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都市)가 번영하여 전국민은 평화를 구가했다. 코스모폴리터니즘 [cosmopolitanism] 인류(人類) 전체를 하나의 세계의 시민으로 보는 입장.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의 kosmos(세계)와 politē s(시민)의 합성어로,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 혹은 ‘세계주의’ 등으로 번역된다. 국가에 특유한 가치라든가 편견(偏見) 등을 부정하려고 하는 사상 또는 하나의 세계국가를 적극적 원리로 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스’가 붕괴되어 가고 있던 BC 4세기 그리스에서,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는 스스로 코스모폴리테스(kosmopolites:세계를 고국으로 삼는 사람)라 자칭하며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고 자주독립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이 자세는 그 후의 헬레니즘세계의 사상, 특히 스토아학파의 사상의 기조(基調)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신의 섭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우주국가가 세속적 국가(世俗的國家)를 규율하는 원리라 하고, 칸트는 국제법을 중시하여 그 최후적 이상(最後的理想)으로서의 국제국가를 역설하고 있다. 코스모폴리터니즘은 국가주의를 초월한다는 점에서는 ‘인터내셔널리즘(국제주의)’과 공통이지만, 각 민족이나 국민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그리고 세계시민주의자를 ‘코스모폴리탄’이라 하는데, 이 말은 현재 광의(廣義)의 국제인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사상이나 행동반경이 국제적인 넓이를 가진 사람, 또는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예컨대 수개 국어를 구사하며 세계 각지를 자주 여행하고, 수개국의 국적을 가진, 그런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2006/01/27 14:2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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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론 [統合理論, unification theory] 국가간의 갈등해소 및 경제적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평화전략 이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으로 인한 서구 여러 나라들의 단결, 유럽경제공동체·유럽석탄철강공동체 등 초국가적인 현상이 나타나면서 등장한 이론이다. 각국의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함께 잘 살 수 있는 제도나 체계를 자발적으로 만들자는 인식에서 나왔다.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미트라니(D.Mitrany), 하스(Ernst B.Hass), 도이치(K.Deutsh), 에치오니(A.Etzioni), 린드버그(Leon N.Lindberg), 나이(Joseph S.Nye,Jr.) 등이 있다. 하스는 통합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으로 통합 당사국들의 정치엘리트 가치관이 본질적으로 같으면서도 다원적이어야 할 것, 정치적인 안정이 이루어져 있어야 할 것, 경제수준이 비슷하고 천연자원에 대해 상호보완적 관계이어야 할 것, 군사력 수준이 서로 비슷해야 할 것 등을 들었다. 여기에 지리적으로 가깝고, 통합 상대국이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통합 당사국의 정치집단 및 국민들이 우호적이면 통합이 더 잘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개별적인 국가차원에서 보면 복지·사회발전·체제안정의 수준이 높을수록, 강한 군사력 및 경제력이 높을수록, 관료의 능력이 높을수록 통합이 이루어지기 쉽다. 유형은 4가지가 있다. ① 연방주의:헌법적 조치를 통한 공식적인 통합을 강조하는 통합전략이론이다. 세계적 차원이 아닌 지역차원의 통합을 강조하는 것으로, 국가권력을 초국가공동체에 이양할 것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비현실적인 이론이며, 사회심리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② 기능주의:복지 등 비정치적인 부분에서 정책적인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권력 등 정치분야의 기관통합 또는 사회심리적인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통합전략이론이다. 이 이론은 비정치적인 기술적 차원의 협력이 점차 정치적인 협력으로 발전하고, 정치적인 협력은 자연스럽게 초국가적인 공동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분기가설(分岐假說)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회복지가 향상되었을 때 나타나는 국가적인 충성심이 국제적인 충성심으로 발전한다는 논리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③ 신기능주의:높은 수준의 정책통합을 이루는 동시에 중간수준의 기구통합도 이룰 것을 강조하는 통합전략이론이다. 연방주의 통합이론에서 강조한 기구창설을 실제적으로 시도함으로써 정치역할을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논리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④ 의사소통이론:커뮤니케이션은 집단, 국가, 국제체제의 조직망으로서 통합단위들간의 친밀한 유대감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통합전략이론이다. 국가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및 상호작용은 서로 좋은 감정을 만들 수 있고, 이것이 발전하면 정치적 안전 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통합의 주요 지표인 통신수단이 국가의 독점적인 영향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없고, 주권개념을 간과하고 있으며,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01/27 14:2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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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가주의[Supernationalism] 국가에 대해 자기주장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는 국가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천황절대주의(天皇絶對主義)를 바탕으로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 또는 군국주의적인 일본의 지배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인다. 원래의 의미는 광신적(狂信的)인 민족적 사명감으로 뒷받침 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독특한 인종이론에 바탕을 둔 게르만 인종 또는 자신의 민족만이 우월하므로 다른 나라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 나치즘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편 '초국가주의'라는 말은,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의 틀을 넘어선 세계주의·국제주의·세계연방주의라든가 세계정부주의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2006/01/27 14:3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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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산 [核酸, nucleic acid] 모든 생물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고분자 유기물의 일종. 핵산은 스위스의 생물학자 F.미셔에 의하여 186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미셔는 세포의 핵 속에 들어 있는 물질을 분석하기 위해 적당한 재료를 찾다가 병원에서 붕대에 묻어 나오는 고름을 택하였다. 고름은 백혈구가 파괴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쓰면 다량의 핵물질을 비교적 용이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미셔는 이 고름에서 핵성분을 분리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 강한 산성(酸性)을 나타내며 인(燐)을 함유하는 유기화합물이 들어 있음을 알고, 이 물질에 뉴클레인(nucle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뉴클레인은 그 후 핵 속에 들어 있는 산성물질이라는 뜻에서 nucleic acid, 즉 핵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물질은 모든 생물의 세포핵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현재 밝혀져 있다. 또 세포핵 속에서만이 아니고 세포핵 바깥, 즉 세포질 속에도 미량 존재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어 이 물질의 화학구조도 철저히 연구되어 분자 구조가 밝혀졌고, 또 생물체 내에서의 기능도 소상히 알려져 있다. 2006/01/27 14:3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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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NA D-리보오스를 구성당으로 하는 핵산. 리보핵산(ribonucleic acid)이라고도 한다. 핵산의 단위물질인 뉴클레오티드(nucleotide)가 매우 길게 연결된 고분자 유기물인데, 이 뉴클레오티드는 염기와 탄수화물의 일종인 펜토오스(오탄당), 그리고 인산이 각각 1분자씩 결합한 물질이다. 이 구성성분에서 펜토오스의 당이 리보오스(ribose)일 때 RNA라 하고, 디옥시리보오스(deoxyribose)이면 DNA(deoxyribonucleic acid)라 한다. RNA를 구성하는 뉴클레오티드의 4가지 염기는 아데닌(adenine:A)·구아닌(guanine:G)·시토신(cytosine:C)·우라실(uracil:U)이다. 따라서 RNA의 뉴클레오티드에도 A, G, C 또는 U를 가진 네 가지가 있게 된다. 이 뉴클레오티드의 연결방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S는 오탄당인 리보오스를, P는 인산을 나타낸다. 위 구조에서 AGC 또는 U 의 염기를 가진 네 가지 뉴클레오티드의 배열순서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이 뉴클레오티드의 배열순서가 다르면 RNA의 종류도 달라진다. 즉, RNA의 종류라는 것은 뉴클레오티드의 배열순서인 것이다. 따라서 RNA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 보통 RNA는 뉴클레오티드가 수십에서 수백 개 연결되어 있다. 거의 모든 생물의 유전자는 DNA이지만, 식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와 약간의 동물성 바이러스, 그리고 세균성 바이러스는 RNA가 유전자 구실을 한다. 세포 내에서는 주로 리보솜에 들어 있고 일부는 핵 속에, 그리고 인에도 들어 있다. 2006/01/27 23: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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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deoxyribo nucleic acid) 생물의 유전자이며 뉴클레오티드라고 하는 단위 물질이 수없이 연결되어 있는 고분자 유기물이다. 이 뉴클레오티드는 보통 염기라고 하는 물질과 탄수화물의 일종인 펜토오스(pentose), 그리고 인산이 각각 한 분자씩 구성된 것인데 펜토오스가 디옥시리보오스라는 종류이면 디옥시리보핵산 이라하고 리보오스라는 종류이면 리보핵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디옥시리보핵산을 구성하는 뉴클레오티드는 염기, 디옥시리보오스 및 인산 한 분자씩의 연결체이다. 이중 염기에는 네가지가 있는데 아데닌(adenine ; A), 구아닌(guanine ; G), 시토신(cytosine ; C) 및 티민(thymine ; T)이다. 따라서 디옥시리보핵산을 구성하는 뉴클레오티드는 A를 가진 것, G를 가진 것, C를 가진 것, 그리고 T를 가진 것의 4종류가 있다. 이 4종의 뉴클레오티드가 무수히 많이 연결된 것이 디옥시리보핵산(DNA)이므로 4종의 뉴클레오티드의 배열순서에 따라 다른 DNA가 만들어진다. 4종류의 뉴클레오티드가 수천 개 또는 수만 개 연결될 때 그 배열순서에는 무한히 많은 종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 결과 만들어지는 DNA의 종류도 무한히 많을 수 있다. 생물에 무수히 많은 종류의 유전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은 DNA의 종류가 무수히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DNA의 분자구조는 1953년 미국의 J. 왓슨과 영국의 F. 크릭에 의해 해명되었다. 이 구조는 흔히 이중나선구조 라고 불리는 구조로서 뉴클레오티드의 길다란 사슬 두 가닥이 마치 새끼줄 처럼 꼬여 있으며 A와 T사이에는 두곳에서 G와 C사이에는 세 곳에서 수소결합이라는 약한 결합이 형성되어 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에서 A는 반드시 T와, G는 C와 마주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4종 염기의 화학구조 때문인데 이렇게 짝 지었을 때 비로소 두 가닥이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이중나선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선의 한 바퀴 수직길이는 3.4nm(1nm=1×10-9m)이고 뉴클레오티드는 10개가 나선 한 바퀴를 형성한다. 그리고 나선의 길이는 2nm이다. 2006/01/27 23:1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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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유전자(gene)는 유전정보의 단위를 가리키며 DN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포의 모든 생명현상과 기능은 단백질에 의해 이루어 집니다. 유전자는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명령체계를 지시 전달하는 광대한 정보단위입니다.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 혹은 다수의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데 필요한 특수한 암호코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자의 총체를 게놈(genome)이라고 합니다. DNA의 모양은 이중 나선구조를 이루고 있고, 각각의 나선가닥에는 염기(base)라고 불리는 수많은 화학구조단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DNA의 염기에는 아데닌(A), 사이토신(C), 구아닌(G), 타이민(T)의 4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 염기의 배열된 순서, 혹은 염기서열(base sequence)이 곧 그 유전정보를 결정합니다. 알파벳이 어떤 순서로 나열되는 가에 따라 단어와 문장이 달라지듯이 염기서열이 어떻게 배열되는가에 따라 그것이 지시하는 단백질과 유전정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최근 인간 게놈 전체의 염기서열을 판독하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어 유전자를 이용한 난치성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소위 맞춤의학, 예측의학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DNA는 염색체내에 존재하며, 염색체는 세포중심의 핵 내에 보관됩니다. 인간의 전체 유전자의 수는 약 3만개로 추산됩니다. 인체의 염색체는 모두 46개로, 44개(22쌍)의 상염색체(autosomal chromosome)와 XX(여성) 혹은 XY(남성)의 성염색체(sex chromosome) 2개로 구성됩니다. 염색체는 각각 23개씩의 두 세트로 구성되며, 각각의 세트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습니다. 하나의 유전자도 두 세트로 존재하며, 각각을 allele이라고 합니다. DNA의 유전정보는 일차 mRNA로 바뀌며, 이를 전사(transcription)이라 합니다. RNA의 유전정보는 리보솜에서 단백질로 해석(translation)됩니다. 3개의 염기가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며, 이러한 3개 염기의 단위를 코든(codon)이라고 합니다. 전사과정에서 DNA중 단백을 지정하는 부분만 RNA로 되고, 나머지 부분은 잘려나갑니다.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중에 RNA와 단백으로 바뀌는 핵심 부분을 엑손(exon)이라고 하며, 바뀌지 않는 부분을 인트론(intron)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전체 DNA중에서 엑손부위는 약 1%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유전자는 수백에서 수십만개의 염기와 수개-수십개의 엑손 및 인트론으로 구성됩니다. 세포가 분열될 때 DNA는 똑 같이 복제(replication)되어 자손 세포에 전달됩니다. 2006/01/27 23:1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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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검사 유전자검사는 특정 질환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검사하므로서 질병을 진단하고 예측하는 새로운 형태의 진단법입니다. 유전자 진단법은 기존의 임상 진단법과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기존의 진단법은 질병의 증상이나 증후 등 나타난 현상을 보고 진단하는 데 대해, 유전자검사는 질병의 근원이 되는 유전자이상을 파악하므로서 진단합니다. 따라서 질병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진단할 수 있으며, 발병 여부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 결과 유전자 질환을 조기에 치료하고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며, 심지어 예방이 가능하도록 해 줍니다. 기존의 검사는 환자에게만 해당되는 데 대해, 유전자검사의 결과는 환자 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유전자검사는 신생아선별검사로, 매년 수십만명의 신생아들에서 혈액채취를 통해 대사이상을 검사합니다. 또한 다운증후군과 같은 기형의 산전 진단을 위해 유전자검사를 시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전자검사는 암을 포함한 후천성 유전자질환의 진단에도 유용하며, 친자감식 등에도 가장 정확한 검사입니다. 유전자검사의 방법으로 과거에는 세포유전학적 방법(cytogenetic study)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세포에서 염색체의 수적인 변화나 구조적 이상을 보는 것으로 대표적인 예는 만성골수성백혈병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염색체이상인 필라델피아염색체를 특수 염색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염색체 검사는 대량의 DNA변화가 있어야 파악이 가능하므로 대부분의 암에서는 적용하기 어렵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분자생물학적 유전자검사가 주로 사용됩니다. 이는 혈액이나 체액, 조직, 세포 등에서 분리한 DNA 및 RNA를 가지고 어떤 질환과 관련된 특정유전자를 검사하는 방법입니다. 유전자의 단일 염기의 돌연변이도 알 수 있으며, 혈액이나 침 한방울 등 극소량의 검체로도 검사가 가능합니다. 대소변, 죽은 세포, 심지어 주라기공원이란 영화에서 보듯 수억년된 화석에서도 검사가 가능합니다. 물론 파라핀에 포매되어 수년이상 보관된 조직에서도 DNA와 RNA의 분석이 가능합니다. 2006/01/27 23: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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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일본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에 있는 일본 최대의 신사. 설립연도 : 1869년, 설립목적 : 황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국가 신사, 주요활동 : 태평양전쟁 전몰자 246만여 명의 위패 안치, 규모 : 9만 9000㎡ , 일본 도쿄[東京]의 한가운데인 지요다구[千代田區] 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神社)로, 8만여 개에 달하는 일본 전역의 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린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 막부(幕府) 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도쿄 쇼콘샤[招魂社]로, 일본 전역에 세워진 쇼콘샤 가운데 황실이 직접 납폐하는 으뜸 신사였다. 이후 쇼콘샤는 일본의 대외침략과 발맞추어 국가신도의 군사적 성격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잡았고, 세이난[西南]전쟁 2년 뒤인 1879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말 그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 호국신사이자 황국신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 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고, 따라서 야스쿠니신사의 제신(祭神) 원리는 국민의 도덕관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천황을 위한 죽음은 대부분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의식을 조작해 야스쿠니신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총사령부는 야스쿠니신사의 호국적 성격을 알고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본에 강요, 일본은 종교시설을 택하였지만, 야스쿠니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 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하였다. 2006/01/31 11:0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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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일본은 신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한 뒤에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시설이자 전몰자 추도시설임을 인정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는 야스쿠니신사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을 계속 제출하였다. 비록 여론에 밀려 번번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갈수록 이러한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되는 일이 발생하자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보수 우파 세력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채질하였고, 일본 정부 역시 후생성이 중심이 되어 민관합동기구가 결정한 일일 뿐이라고 발뺌하였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하였고, 2000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가,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공식 참배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어 주변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2001년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총 246만여 명의 전몰자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고,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무라 에키지의 동상, 대형 함포 등 각종 병기,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 전함 야마토의 특대형 포탄, 군마와 군견의 위령탑, 제로센[0戰] 전투기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과 전범의 동상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전시되어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시물들은 전쟁과 전투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어 전쟁박물관인지 신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2006/01/31 11: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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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을 일으키고,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한 일종의 권력투쟁이다.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를 내렸다. 2006/01/31 11:2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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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紅衛兵, Red Guards]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1976)의 일환으로 준군사적인 조직을 이루어 투쟁한 대학생 및 고교생 집단. 설립연도 1966년, 구분 학생단체, 소재지 중국 베이징, 설립목적 마오쩌둥 지지, 주요활동 행진과 회합, 열렬한 선전 활동, 규모 약 1,300만 명, 1960년대 중국공산당의 청년운동에 가담한 학생들로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고자 투쟁하였다. 1966년 당 주석 마오쩌둥이 '수정주의적' 당국자, 즉 마오쩌둥이 만족할 만큼 혁명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당 지도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하여 중국 공산당의 주관 아래 조직되었다. 마오쩌둥은 이에 따라 동료들에게 빼앗겼던 당의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였지만, 1966년 그의 소집에 호응한 홍위병들은 중국의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하고 정부 내의 부르주아적 요소로 간주되는 모든 것을 축출하는 데 앞장서는 새로운 혁명가인 듯 스스로 도취되었다. 1966년 수백만의 홍위병들이 베이징[北京]으로 집결하여 마오쩌둥과 함께 8회에 걸쳐 대규모 집회를 가졌으며, 전국적으로 그 수는 1,100만 명에 육박하였다. 홍위병들은 행진과 회합, 열렬한 선전활동에 참가하는 한편, 각지역의 당 지도자들은 물론 교사 및 학교 지도자, 지식인,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고 박해하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박해를 받고 처형당하였다. 1967년 초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걸쳐 촌락과 도시, 성 등의 기존 당체제를 전복하였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곧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하였으며, 서로 자기들이야말로 마오쩌둥 사상의 진정한 대변자라고 주장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직의 내분이 증가하는 한편, 산업생산이 중단되고 도시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정부에서는 1967∼1968년 홍위병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정규군이 전국에 걸쳐 투입되어 질서를 회복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홍위병 운동은 점차적으로 쇠퇴하였다. 2006/01/31 11:2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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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Jew] BC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이주한 헤브라이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그 자손.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BC 10세기경 이스라엘왕국이 북쪽 이스라엘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갈리고, 바빌론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다시 말해,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2006/01/31 11:3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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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유대인’ 차별 고통 이스라엘로 이주 20년 전체 60%가 빈곤 허덕, 이스라엘로 이주해 온 이디오피아 출신 유대인들이 빈곤과 백인 유대인들의 차별대우로 고통받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16일 보도했다. 통신은 “전쟁과 기근에 허덕이는 이디오피아 현지보다는 생활이 나아졌지만, 집단 이주해 온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흑인 유대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특히 백인 유대인들의 차별대우가 2세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현지 메이어스-브룩데일 사회조사연구소의 보고를 보면, 백인 유대인의 20%만이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반면 흑인 유대인 가운데 빈곤층은 60%에 이른다고 통신은 지적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솔로몬의 후예로 불리는 이디오피아 출신 유대인(이른바 ‘베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것은 1975년 메나헴 베긴 총리 시절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는 1980~90년대 군 수송기를 동원해 ‘모세 작전’ ‘솔로몬 작전’ 등의 이름으로 이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현재 이스라엘 600만 인구 가운데 이디오피아 출신 유대인은 모두 10만5천여명에 이른다. 통신은 “아랍계 및 팔레스타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지만, 다른 지역의 유대인 이민이 급격히 줄면서 이스라엘 이민 당국은 2007년가지 베타 이스라엘 2만여명을 추가로 이주시킬 계획”이라며 “하지만 이디오피아 출신 이민자들은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이디오피아계 유대인에 대한 반감으로 학교교육에서 구직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만연해있다고 호소한다”고 전했다. 정인환 기자 (한겨레, 2005.03.17(목) 18:49) 2006/01/31 11:4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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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우리가 지금 어느 시간선상에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대자연질서가 들려주는 거대한 시간질서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 당신이 어떤 종교를 신앙하고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반드시 자기 존재의 근본인 조상의 뿌리와 민족의 시원 그리고 그들이 어떤 정신세계에서 살다 갔는가 하는 민족의 정통성을 명백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것이 자기 존재의 본질을 알고,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선결해야 할 요건이다. 역사의 근본을 알면 아무리 작은 개인이라도 자신이 ‘역사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총체적으로 바로 잡아 그 원형을 되찾고 민족의 국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 ------------- "개벽실제상황" 190 페이지 中에서 ----------------- "역사를 알아야 역사적인 인간이 될수 있다" 이 한마디는 제 삶 전체를 되돌아보게 명언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을 향한 충언일 것입니다.. 분명, 나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아주 가까이 내 부모로부터, 내 유전인자의 뿌리인 조상님들로부터, 그리고, 민족의 뿌리역사와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자연질서와 새 인류문명을 이끌어갈 주인공 한민족을 위한 책! 진리의 저 밑바닥까지 파헤쳐 '참 인간으로의 삶'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책! 대자연질서와 인간의 존재의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주저없이 말하고 있는 책! 이 시대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이 책 한권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과연, 남북통일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3.8선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 그것은 무엇인가? 가장 커다란 위기이자 기회의 시대를 사는 한민족에게 잃어버린 뿌리역사와 민족정신을 일깨워 한민족의 위상을 느낄수 있는 가장 강력한 충격과 감동과 재미를 안겨줄 것입니다.. 뵌 적은 없지만, 충심어린 마음으로 청합니다... ps : 저는 충북 괴산군청 복지환경과에 근무하는 노은정입니다..... (핸드폰 : 010-9935-5725 메신저 : zmzm114@nate.com) 2006/02/01 17:4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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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위상을 느낄수 있는 가장 강력한 충격과 감동과 재미], [과연, 남북통일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3.8선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개벽 실재상황, 道典, 증산 상제님, 태모님, 그가 교류했던 모악산, 수왕사, 금산사 미륵대전, 동곡약국, 계룡산 향적산, 一夫 金恒선생과 정역 그리고 후천개벽, 수운, 강일순, 정도령, 상씨름판......... 몇가지 모두의 단어만 열거하였지만 남북통일을 미리 안다는 것,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것에 진정한 종교인은 저절로 알아져야지 천기누설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는 것에는? 남사고의 예언이 훌륭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도 있지만 그들이 흐름을 어쩌지 못했던 것은 바로 대자연의 섭리에는 어떠한 지혜로 믿었던 것도 그 앞에는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2/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드림 2006/02/01 20:58: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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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은 이주민족[어느 분의 의견] 민족에는 '토착민족'도 있고 '이주민족'도 있다. '토착민족'이란 어느 한 곳에서 형성되어 그곳에서 성장, 발전하고 있는 민족을 가리킨다. '이주민족'이란 한 민족이 형성된후 다른 한 나라에 이주하여 거주국가의 공민으로 된 민족을 가리킨다. 중국의 조선족이 바로 이주민족에 속한다. 중국조선족은 명말청초이래 조선반도로부터 선후로 중국에 들어와 정착한후 점차 중국의 한개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다. 일찍 고대력사시기에 지금의 중국경내에는 고조선, 고구려 등 나라들이 있었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비록 당시의 한조나 단조에 예속되여있었지만 여전히 독립국가였다. 고구려가 멸망된후 고구려사람들은 대부분이 조선반도로 이동하였으며 료동일대에 남은 고구려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발해국을 세웠었다. 발해가 료나라에 의해 멸망된후 그 유민들은 중국의 다른 민족들과 잡거하는 가운데서 점차 동화되였다. 그 후의 료, 금, 원 왕조와 명조초기에는 지금의 료동, 료남의 일대에 수만명을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살고있었는데 {료동지}에 따르면 그들은 당지 총인구의 10분의 3이나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구려나 발해의 유민이 아니라 원조와 명조때 조선반도로부터 이주하여 온 사람들이였다. 그들도 오핸 세월을 내려오면서 중국의 다른 민족들과 잡거하여 통혼하는 과정에 점차 다른 민족에 동화되였다.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혈통면에서나 민족속성면에서 모두 중국경내에서 생존하였던 고구려, 발해 유민이나 고려인들과 직접적인 계승관계가 없다. 근대적의미에서의 조선민족은 조선 리조중기에 와서야 비로소 형성되였다. 중국조선족은 바로 조선반도에서 이미 단일한 민족으로 형성된후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중국에 이주하여 온 민족이다.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면에서 중화민족의 많은 우수한 특점을 소유하고있으면서도 조선민족으로서의 기질과 민족고유의 문화전통, 풍속습관 및 심리적특점을 보존하고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들어와서 새로운 민족군체를 형성한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2006/02/05 23:0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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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허위와 홍범도의 자손들 “나라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떻게 하랴.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 1908년 전국 의병을 모은 ‘13도(道) 창의군’ 1만명을 이끌고 서울 진공(進攻)에 나섰던 의병장 허위(許蔿·1854~1908)가 일본군에 체포된 뒤 가족에게 남긴 편지다. 체포 직전 총리대신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외부대신을 제안했으나 허위는 거절했다. 그는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하리라 예감했다. “내 하는 일이 꼭 이뤄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 수 없어 그러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입뿐이다. 실상은 조선을 없앨 마음을 가졌기에 앉아 볼 수 없어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 허위의 인품과 기개에 감명받은 서대문감옥 아카시(明石) 소장은 통감부에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허사였다. 허위는 1908년 서대문감옥 ‘사형수 1호’로 순국했다. ▶어제 3·1절 아침신문에 실린 허위의 손자 허 블라디슬라브 얘기는 3·1 정신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안성의 공장에서 월급 120만원을 받으며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트럭 운전을 하다 형편이 어려워 작년 6월 입국했다고 한다. 허위가 옥사(獄死)한 뒤 가족들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손이 러시아, 중앙아시아, 미국까지 흘러가 신산(辛酸)한 삶을 이어온다. ▶허위가 양반 출신으로 의병을 이끌었다면 홍범도(1868~1943)는 대표적인 평민 의병장이었다. 머슴, 광산노동자, 포수로 떠돌던 그는 1907년 일제가 무장봉기를 막으려고 총기를 압수하자 포수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부대는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일본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홍대장 가는 길에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 함경도 사람들은 ‘날으는 홍범도가(歌)’까지 지어 불렀다. 홍범도는 1920년 항일무장투쟁의 꽃,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갔다. 1943년 세상을 뜨기까지 말년엔 극장 수위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의병전투에 아내와 두 아들 모두 바치고도/ 어금니로 눈물 깨물던 사람’(이동순 ‘홍범도’). 그러나 러시아에 있는 그의 후손은 허위의 유족처럼 어렵게 산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선열에 대한 예의와 대접이 말이 아니다. 김기철 논설위원 kichul@chosun.com 입력 : 2006.03.01 22:04 18' 2006/03/02 11:2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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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민족과 탈민족(조선일보 입력 : 2006.03.08)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명예교수는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라는 책에서 민족을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정의했다. 민족이 과거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발전과 함께 만들어진 근대적 가치이자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유럽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 사람들로부터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어 갔지만, 최초의 민족주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 이주민의 후손인 크리올료(creole)들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크리올료들이 유럽 본토인과 다른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발명한 민족주의가 유럽과 제삼세계로 퍼져나갔다는 분석이다. 앤더슨의 이런 주장은 국내의 일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져 탈(脫)민족 논쟁이 일어났다. ‘민족(民族)’은 근대 일본에서 ‘민(民)’과 ‘족(族)’이 합쳐져 만들어진 개념으로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들어서야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은 청의 왕도(王韜)가 1882년 ‘양무재용기소장(洋務在用其所長)’에서 사용한 사례가 있듯이 일본에서 만든 조어만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에 민족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록은 민족 대신 ‘아족류(我族類)’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때의 ‘我族類(아족류)’는 ‘우리 민족’, 또는 ‘우리 겨레’로 번역하면 정확하다. 이 용어는 일본인·여진인 등 이민족(異民族)과 구분하는 비교사로 주로 사용된다. 이에 비해 일가친척을 뜻하는 겨레붙이는 실록에서 ‘族(족)’, 또는 ‘族人(족인)’으로 표기된다. 앤더슨은 라틴어의 대중성이 상실되고 루터의 지방어(독일어)를 통한 종교개혁과 특정지방어가 행정어로 보급되고, 새로운 시장을 찾던 인쇄자본주의가 지방어 시장을 넓혀간 것이 민족주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은 단일 언어를 사용했고 한자와 이두를 행정어로 사용했다. 최근 신용하 교수가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에서 “민족은 허구 아닌 실재하는 공동체”라고 주장한 것은 한국사에는 맞는 개념이다. 2006/03/09 08:3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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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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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선생의 추천을 받아야 될것 같아서 말씀드리기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이 글을 보고 나니 입이 닫히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깊은 학문탐구에 절로 교개를 숙이게 됩니다. 특히 민족사랑 정신과 근본이 되는 홍익인간의 숭고한 사상을 근본바탕으로 하여 공부하신 내용들이라서 감히 범인들이 논하고 평한다는 것이 웃습겠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원래 전공이 사학이신가 봅니다. 얼마나 고귀한 생각을 가지고 얼마나 오랜세월 얼마나 많은 서적을 탐독하셨는지 상상이 잘 안됩니다. 잘 모르겠는데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 하시는 분같습니다. 보통사람이야 저 같아도 이렇게 파고 들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한마디로 조선블로그 최고의 민족정신 선양을 주창하시는 귀한 블로거로 추앙드립니다. 저는 이런쪽엔 문외한이다 보니까 그저 넋이 나가는 듯합니다. 그저 사진이 볼만하다는 것은 참 유치한 말이었군요. 그렇게 많은 탐구에서 얻어내신 민족의 경전에 대하여 저는 당연히 잘 모릅니다. 아시는 바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말씀하신 바대로 치우친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과 사상은 신앙과는 다른 정기와 얼로 고귀하게 받들어야 마땅하다는 데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읽어서야 잘 모르겠습니다. 또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다음 주천하신 방으로 언제 또 가 보겠습니다. 귀한 글 작성하신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2007/04/08 16:43:2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