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洪 益 人 間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5)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0:29

[들어가기 전에]

1. 서언
2. 그 출전과 기원
3. 홍익인간을 잉태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4. 그 사상의 참뜻
5. 위대한 사상의 탄생과 계승 발전
(가) 탄생 배경

(나) 세계인이 감탄하는 훈민정음
(다) 훈민정음은 과연 세종대왕의 창작품일까?
(라) 그 비밀의 열쇠
(마) 그리하여 민족의 정신이 계승되다.
(바) 영원하여라! 훈민정음! 그리고 홍익인간!

6. 결언

 

 

 

[고비 알타이의 모습]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5)- 라강하 -

 


(마) 그리하여 민족의 정신이 계승되다. 


그런데 녹도문이나 가림토문이 존재했다는 증거라도 있을까? 물론 증거가 있다. 학자들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울주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 영천 보성리 암각화등은 녹도문으로 가기 전단계의 그림문자로 보이며 평북 용천군 신암리 발굴 토기 문양이나 남해도 낭하리 금산 부소암, 만주 경박호, 선춘령 오소리강등의 암벽문자에 녹도문의 잔영(殘影)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한 녹도문은 백두용(白斗鏞)編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1926刊)』와 구한말 서예가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서법진결(書法眞訣,1914刊)』에 11자가 소개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가림토문의 증거는 배달국의 강역에 걸맞게 세계 여러지역에서 발견된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700년 전에 일본에는 이미 원시 한글이 존재했고, 그 유물이 지금도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삼도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이것들을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神代文字) 혹은 아히루문자(阿比留文字)"라 한다고 한다. 즉, 가림토문자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삼도에도 전해져 97종의 아히루 문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은나라 유적지 은허에서 갑골문(BC1300)이 발굴 되었는데 지나인들은 갑골문이 한자의 원형이라고 하지만 참고자료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한자보다는 오히려 가림토문(BC2181)에 더욱 가깝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의 최치원이 갑골문자로 쓰여진 천부경을 한문으로 옮겨 적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고려말 五隱의 한 사람인 충신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이 그것으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된 것이다. 그 발견이 왜 중요하냐면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의 존재를 몰랐었다는 데 있다. 즉 지나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저 거북 껍데기로 알았지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에야 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던 것이다. 즉 지나에서조차 19세기까지 그 가치를 몰랐던 갑골문이 14세기 고려말 농은의 유집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홍익인간 정신이 깃든 천부경등 우리의 오랜 전통사상을 유구한 세월동안 어떻게 전승할 수 있었던가에 대한 전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또 가림토문자는 역시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몽골 지방으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의 원형이 되었으며, 배달국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트 알파벳과 구자라트 문자의 원형이 되기도 했고 인디언 이동루트를 따라 전파되어 볼리비아문자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책을 보니 히브리어 문양이 새겨진 고조선 시대의 와당(瓦當)이 대동강변에서 발굴되어 성서에 기록된 유대민족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지파의 족적을 규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하여 단군은 바로 단지파를 나타내며 따라서 배달겨레는 히브리 민족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히브리인들의 풍습, 언어의 유사성까지 설명하면서 [단지파=배달족=히브리족]의 논지를 펴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는 한단고기를 정확히 연구하지 아니한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싶다. 즉 한국12연방과 배달국의 강역으로 보아 히브리 민족이 배달겨레의 하나인 수메르(수밀이국, 須密爾國)민족과 연관성은 분명히 있어 보이고 또한 녹도문, 가림토문의 영향을 받아 히브리어가 성립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대동강변에서 출토된 와당의 글자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바로 가림토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문자가 가림토문과 비슷하게 보이고 그들의 말과 풍습에도 배달족의 잔영(殘影)이 남아 있다고 보면 모든 의문은 자연스레 해소되는 것이다.

 

한글을 연구하는 이들은 훈민정음의 원형(자방고전, 字倣古篆)을 산스크리트문자, 구자라트문자(BC 2,200년), 갑골문자(은나라 BC1,500-1,100), 신대문자(AD 700년), 파스파(八思色)문자 등에서 찾지만 이는 오히려 이들 글자들은 배달국의 강역이었던 지역에서 가림토문의 영향을 받아 한글과 형제 글자들로 발전되어 갔다고 보면 자방고전(字倣古篆)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할 것이다. 즉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은 한단고기 뿐 아니라 삼도, 인도, 몽고등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나라들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지금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다. 다만 우리만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공식화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실재 가림토문은 이외에도 함경도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보고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또한 영변지에 녹도문으로 쓴 천부경에 관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소도경전본훈)에 수록된 가림토(加臨土:加臨多)의 38자(字) 정음(正音) 부호는 일견 보기에 훈민정음28자와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배달국의 홍익인간의 사상과 역사는 유구한 배달족 자신의 문자와 더불어 그들의 구전과 설화, 녹도문, 가림토문등에 의하여 전승되다가 한자 수입의 역풍(逆風)으로 삼성기, 태백일사, 단군세기, 부도지, 삼일신고, 참전계경, 부도지, 규원사화, 삼한관경본기, 삼성비기, 표훈삼성밀기, 조대기, 대변기, 진역유기, 배달유기, 단기고사, 청학집, 영변지등에 기록되었던 것인데 구한말 계연수란 분이 그 때까지 남아 있던 고서(古書)들을 참조하여 한단고기란 책으로 집대성한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자행한 살벌한 민족 고서적 말살정책에서도 그나마 살아남아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바) 영원하여라! 훈민정음! 그리고 홍익인간! 
 

이제까지의 상세한 고찰(考察)을 통하여

 

우리는 그러한 배달국의 역사(歷史)와 사상(思想)이

유구한 세월 속에서도 미흡하게나마 전(傳)하여 질 수 있었던 배경과 

왜곡되고 변질되어 거의 흔적도 없이 역사의 주역(主役)에서 사라진

 

원인(原因)을 분석(分析)하여 보았다.

 

그 요지(要指)를 다시 정리하여 본다. 


1) 한국12연방, 배달국 같은 원대한 강역(疆域)과 유구한 역사가 있었기에 홍익인간이란 위대한 사상이 탄생할 수 있었고

2) 그러한 사상과 역사는 구전과 설화뿐 아니라 문자(文字)로도 전승되었다.

3) 배달국 문자는 그림문자, 녹도문등 상형문자에서 가림토문, 훈민정음 등으로 표음문자(表音文字)화하여 변화하여왔다.

4) 가림토문은 배달국의 강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구자라트문자, 산스크리트문자, 히브리문자, 아히루문자, 볼리비아 문자, 파스파문자등에 영향을 주었슴이 증명되고 있고,

5) 녹도문과 가림토문은 산목, 구결, 각필, 훈민정음 등의 모태(母胎)가 된 배달족의 고유문자임에 틀림없다.

6) 한자도 녹도문에서 갈라져 나와 결승, 서계, 갑골문, 예서문으로 표의문자(表意文字)화하여 변화하여 왔다.

7) 그러므로 한자와 한글은 표의와 표음으로 표현기법이 상이하지만 근본으로 따지자면 형제 문자이다.

8) 따라서 한글을 우선으로 하되 무조건 한자를 배척하지 말고 한자문화권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여

9) 한글을 전용하기보다는 필요할 때에만 한자를 병기하여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0) 이와 같이 그림문자, 녹도문, 가림토문, 한문등 문자의 역사와 함께 배달국의 역사와 사상이 전승되어 왔는데

11) 너무 오랜 시일이 흐르다 보니 외래사상(불교, 유교, 기독교)의 유입과 영향으로

12) 원래의 내용에 가필(加筆)이 이루어 졌지만 한단고기의 큰 흐름은 사실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13) 가림토문은 그 당시의(단군조선)의 강역으로 볼 때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어

14)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삼도(일본)에는 신대문자(神代文字), 아히루문자(阿比留文字), 기타 인디언, 중근동등에 영향을 준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15) 아울러 문자의 전파와 함께 홍익인간의 지고한 사상이 함께 전파되어 오늘날의 종교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16) 그러다가 은둔, 겸양, 도를 중시하는 배달국은 점점 쇠퇴하게 되고

17) 배달족의 秘書는 단지 산속에서 수련자들에게만 전승되게 되고 역사의 전면에서 잊혀지게 된다.

18) 그의 후손들도 몽골, 티베트, 한반도, 일본, 인디언들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19) 그들에게 인종적인 특징이나 풍속, 전설로만 공통적인 특징을 공유할 뿐 서로 동족(同임을 알지 못하고

20) 문명(文明)의 성쇠(盛衰)에 따라 타문화에 동화되게 되었다.

21) 동양의 역사는 거대문화인 한자문화 중심으로 편성되고

22) 배달족 역사는 자의적인, 혹은 타의적인 대중화(大中華)정책으로 축소되고 왜곡되었다.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고유의 사상인 선가(仙家)의 도맥(道脈)이 이어져 한단고기란 책으로 집대성되어 전승되고 있다.

24) 배달의 역사가 기록된 문헌들을 집대성한 한단고기는 거기 기록된 천문현상등의 증명으로 상당부분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25) 거기에 약간의 가필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지만 우리가 한단고기를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26) 배달족의 역사는 한단고기에,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근간으로 하는 사상은 민족성에 면면히 녹아 흘러 이어지고 또한 배달 민족의 삼대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에 구체화되어 있다.



<- [우리 선조들의 터전이었던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

그렇게 구전과 설화와 문자로 전승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위대한 사상인 홍익인간 재세이화 사상은 민족의 삼대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에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한사상(桓思想)은 외래의 사상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한국인의 사상으로 “크다, 밝다. 하나다”라는 의미와 같다. 또한 “희다, 바르다‘ 하늘, 동쪽, 많다, 길다, 으뜸이다, 위다, 처음이다, 오래다, 온전하다, 우두머리다, 성하다, 가득하다”등의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한사상은 역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같은 뜻을 가지고 고대사회에서 현대사회까지 면면히 내려져 왔던 것이다.

 

배달민족의 각 시대별로 면면히 이어져 배달국 시대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以和), 승유지기(昇遊至氣), 접화군생(接化群生), 고구려의 이도여치(以道與治:도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신라의 광명이세(光明理世: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고려의 금탑(金塔), 조선의 금척(金尺)등으로 이들은 모두 밝은 진리와 빛을 상징함으로서 한(桓)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한(桓)을 “크다, 전체적인 하나다.”고할 때 이것은 대립성(對立性)이나 분열성(分裂性), 배타와 독선을 지양한 통일의 정신이며 전체라는 입장에서 포괄성(包括性)을 근간으로 하며, 조화성(調和性) 또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桓)에는 통일성(統一性), 총체성(總體性), 초월성(超越性), 종합성(綜合性), 협동성(協同性), 평화정신(平和精神) 등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국기의 핵심인 태극(太極)은 “크다”라는 한사상(桓思想)을 적절한 이미지로 표현한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2001년 현재 세계의 언어는 6809개인데 그마저도 6000개 이상이 금세기 말이 되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문자를 갖고 있는 언어는 30여종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문자를 갖고 있는 언어들은 절대 사라질 수가 없다. 지구상의 30여종의 문자들 중에서도 훈민정음은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아직 이런 발상(發想)을 해 본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필자는 종종 문자를 갖지 못한 언어의 민족들에게 훈민정음을 전파하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그러한 훈민정음은 바로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배달의 역사와 함께 오랜 기간 발전 되어 왔던 것이고 그와 유사한 인도 구자라트문자, 산스크리트문자, 히브리문자, 아히루문자, 볼리비아 문자, 파스파문자등이 바로 배달겨레의 영역임을 증명한다고 볼 때 훈민정음을 전파한다고 하여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세종의 창작품이 아니고 옛글을 참고하여 창조(創造)라고 해도 좋을 만큼 획기적으로 개량했다고 강조함은 한글의 우수성을 깍아 내리려함도 아니고 세종대왕의 노력을 폄하하려함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군왕(君王)의 노력이 있었기에 배달민족의 가림토문이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의 그 지고(至高)한 사상은 그렇게 탄생되고 계승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사상을 망각하였다면 복본(復本)하고 다물(多勿, 되물림)하여야 하는 것이다. (계속됩니다. blog.chosun.com/kanghan8)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9/26(초고)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3(퇴고)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풀뿌리 김규진(金圭鎭, 1868~1933)
1868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흑우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가 서화를 익힌 것은 그의 외숙인 서예가 이희수에게서 였다고 한다. 1885년 18살 때 청나라로 가서 8년 동안 체류하며 글씨와 그림을 배워 대륙기질의 서화가가 되었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인 진씨의 도움을 받아 서화를 배우며 북경 화가들과 교류했고 명가의 방문과 지도를 받게 되었다. 1893년 가을에 귀국한 고향에서 활동하다가 1896년 29살 때에 서울로 진출했다. 그는 청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상경 즉시 궁내부 주사 관직을 얻었고 그 후 1907년까지 궁내부 부서였던 내장사 주사, 예식원 문서과장, 비서관, 시종원 시종 등을 거쳐 경리원 기사직을 지냈다. 그는 1901년부터 어린 왕세자였던 영친왕(이근)의 서사書師선생)로서 왕실에 접근해 있었다. 궁내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왕세자의 글씨 선생으로 시어侍御라는 직함도 받아 수시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화가로서도 활동했다. 1906년 밀려드는 서구 문명 속에서 사진술이라는 것이 전해지자 고종 황제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서 1년간 사진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지금의 소공동에 천연당사진관을 개설하였다. 이 무렵 고종의 양위로 관직에서 물러나 서화 연구에 전심하고 특히 서화 연구회를 창설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내고, 많은 미술 행사도 치렀다. 그가 1920년 창덕궁 희정당 내부에 그린 벽화는 <금강산 만물초 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과 <해금강 총석정 절경 海金剛叢石亭絶景>이었다. 그는 글씨에서 행서, 초서, 대필서에서 특출한 필력을 발휘했고 그림은 분방한 용필의 묵죽을 위주로 하여 묵란, 묵국 등 사군자 범주의 묵화에 치중했다. 그러나 산수화와 화조화도 종종 그렸으며 말을 그리기도 했다. 1914년에 그린 <유하백마 柳下白馬>는 소품이지만 그의 역량과 자유로운 표현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수묵필치로 대범하게 표현한 고목 버드나무의 형상, 강한 바람에 의해 온통 오른편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의 소란스러운 움직임, 청록색 담채의 신선한 생동감이 현대 화가의 참신한 표현주의를 방불케 한다.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엷은 황록색 담채의 풀언덕에 뛰어든 백마의 사실주의 묘사에서 보이는 명쾌한 묵선과 선명한 흰색 표상미도 더할 나위 없는 표현기량을 엿보게 한다. 심하게 바람을 탄 버들가지의 움직임과 반대 방향으로 백마를 달리게 함으로써 시각적인 속도감을 더하여 준다. 버들가지의 투명한 청록색조와 백마의 흰색이 상쾌한 대비를 이루는 것도 지적할 만하다. 언덕 너머 공간에도 전면 푸른 색조로 깊이감이 생기게 담채를 부여해 근대적 화면을 창출했다. 1915년부터는 '해강 란죽보', '육체 필론', '서법 진결', '서화담' 등의 책자를 출판하였다. 2006/01/24 15:25:46  
풀뿌리 이세신궁 [伊勢神宮, Isejingu Shrines]
혼슈[本州] 미에현[三重縣] 동부 이세[伊勢]에 있는 신궁이다. 도쿄[東京]의 메이지신궁[明治神宮], 오이타[大分]의 우사신궁[宇佐神宮]과 함께 일본의 3대 신궁으로 불린다. 신궁의 총면적은 5,500㏊로, 이세시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넓으며, 이세시 전역에 걸쳐 있다. 일본 각지에 걸쳐 있는 씨족신을 대표하는 총본산이다. 진구[神宮]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따르면 기원전 2년에 일본 천황 가문의 선조인 여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명을 받아 내궁이 세워졌다고 한다. 크게 정궁인 외궁과 내궁으로 나뉘고, 이 외에 별궁 14개, 말사(末社) 24개와 섭사(攝社:셋샤), 소관사(所管社:쇼칸사) 등 모두 125사(社)로 이루어져 있다. 외궁의 정식 명칭은 도요우케다이진구[豊受大神宮]이다.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받드는 농경신 도요우케노오미카미를 기리는 신궁이다. 일반인은 정궁 내부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정궁 외에 곡물과 국태민안의 신, 제방의 신, 재물의 신 등을 모신 신사 등이 있다. 내궁은 외궁에서 5㎞ 정도 떨어져 있어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기리는 신궁으로, 입구에 이스즈가와[五十鈴川]가 흐르는데, 이 강이 속계와 성계를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한다. 강 옆에서 손을 씻고 들어서면 수백 년 된 고목들로 둘러싸인 정궁이 나타난다. 내궁 바로 앞에는 음식점·기념품점 등이 늘어서 있다. 이세신궁의 가장 큰 특징은 20년에 한 번씩 신을 모신 건물들을 옆에 있는 땅에 똑같은 모습으로 세우고, 이전의 건물을 헐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시키넨센구[式年遷宮]라고 하는데, 일본 최고(最古)의 건축 양식으로 짓기 때문에 건물 수명이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20년마다 한 번씩 건물을 새로 짓는다. 1993년까지 61회에 걸쳐 시키넨센구를 행했다고 한다. 원래는 황족 등 일부 계층에게만 참배가 허용되었으나, 12세기부터 일반인에게도 참배가 허용되었다. 이 때부터 일본인이면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하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지금도 해마다 600만 명에 달하는 참배객이 찾는다. 2006/01/24 15:34:10  
풀뿌리 두문동 칠십이현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 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 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 하였는데, 후일 정조(正祖)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臣)을 이르는 말.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신혼(申琿)·신우(申祐)·조의생(曺義生)·임선미(林先味)·이경(李瓊)·맹호성(孟好誠)·고천상(高天祥)·서중보(徐仲輔)·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 ·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2006/01/24 15:54:59  
풀뿌리 민안부(閔安富)
公의 휘(諱)는 안부(安富)이고, 자는 노숙(榮叔)이요. 호는 농은(農隱)이다. 공은 고려 말에 낳으시어 명망이 조정에 떨치시고, 벼슬이 예의판서(禮儀판서)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로 이씨조선(李氏朝鮮)에 벼슬 하기를 싫어하셨다. 그러므로 일생의 아는 바가 오직 옳을 의(義)자 한자 뿐이었다. 한번은 이조(李朝)에서 선생에게 벼슬에 나오기를 권하니, 선생이 문득 재촉을 잡고 나가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장차 장사를 할 것이다" 라고 하시어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재를 넘어 달아가니 뒤 사람이 그 재를 이름하여 불조현(不朝峴), 또흔 괘관현(掛冠峴)이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던 1392년 민안부,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임선味), 등 72명의 고려 충신들은 이성계에 반기를 들고 산음현(山陰縣)의 서쪽 대만(大滿; 현재의 경남 山淸)의 두문동에 은신했다. 그리고 끝까지 조선의 녹을 받지 않고 항거하다 이성계에게 전원 몰살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정설이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들 72명중 최소한 1명은 살아 남았을 것이라는 이설(異說)이 거론되고 있다. 그가 바로 두문동 대학살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 경남 산청군생 생초면 대포리에 피신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는데 지난 81년 발견된 "농은실기(農隱實記"에 그의 "천리길 탈출기"가 생생하게 묘사되 있다. 민안부의 충절의 기개가 서린 대포리의 망경대(望京臺)의 얘기를 지나칠 수 없다. 마을에서 20리길, 왕산(王山; 923 미터) 정상 송림 사이에 망경대가 우뚝 솟아 있다. 민안부는 매월 초하루와 15일이면 이 망경대에 올라가 두고 온 옛 서울 송경(지금의 開城)를 바라보며 배례했다 한다. 뒤에 사람이 그 재를 망경대(望京臺)라고 이름하였다. 공은 회포를 기록한 충절의 시(詩)를 지었는데, "'不義之富貴 於我如浮雲...(의리아닌 부귀는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도다. 돌 밭에 봄이 드니 호미 메고 아침 저녁 김을 매노라)" 하였으니, 그 왕씨(王氏)를 위하여 절개를 지킨 의리가 숨어 있음을 가히 볼 수 있다. 그는 이 유시(遺詩)와 함께 자손들에게 "조선 왕조 아래에서는 절대 벼슬을 해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했다. 조선 초에 선생의 아들 민수(閔綏)에게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제수(除授)하였으나 굳게 사양하고 부임(赴任)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교훈이 머리속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임금께서 개성을 지내다가 충신 72인의 절개에 감동하여 특히 그 후손을 채옹하고 비를 두문동중(杜門洞中)에 세우라고 명하고, 제례를 올리게 하였다. 표절사(表節祠)에 배향(配享)하는 은혜를 입었다. 선생의 묘소는 경남 산청에 있으며, 선생을 모신 대포서원(大浦書院)도 산청에 있는데, 유림(儒林)에서 춘추(春秋)로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으며, 선생의 자손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산청지방(山淸地方)이다. 선생의 충절정신이 자자손손에 스며들어 이조 오백년을 통하여 관직에 나간 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참으로 선생의 충절은 천추에 빛나고 있다.] 2006/01/24 15:55:21  
풀뿌리 설문해자 [說文解字]
총 15편.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편찬하였다. 그 중 말미의 서(敍) 1편은 진한(秦漢) 이래 문자정리의 연혁을 밝힌 것으로 100년에 완성되었다. 그 당시 통용된 모든 한자 9,353자를 540부(部)로 분류하고, 친자(親字)에는 소전(小篆)의 자체(字體)를 싣고, 그 각 자(字)에 자의(字義)와 자형(字形)을 설해(說解:訓詁解釋)하였다. 소전과 자체가 다른 혹체자(或體字:古文·籒文)는 중문(重文)으로서 1,163자를 수록하였다. 부수(部首)와 친자의 배열에서는 자형 및 자의와의 연관에 따라 그 순서를 정하였으며, 자형구성의 설명에는 육서(六書:指事·象形·形聲·會意·轉注·假借)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육서는 전한(前漢) 말경부터 생긴 한자분류법으로 그 중에서 합체자(合體字:형성·회의)는 부수분류를 가능케 하였으며, 특히 형성자는 후세의 상고한어(上古漢語) 연구(특히 상고음의 再構)를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 본서의 설해는 은(殷)·주(周) 시대의 갑골문자(甲骨文字)·금문(金文:청동기 銘文)을 해독하는 귀중한 근거가 되었으며, 청대(淸代)의 소학(小學:주로 고대언어학)은 이 책을 연구·응용한 것이다. 현행 판본에는 오대말(五代末)·송초(宋初)의 서현(徐鉉)·서개(徐鍇) 형제가 따로따로 교정한 《대서본(大徐本)》 《소서본(小徐本:일명 說文繫傳)》이 있다. 연구총서로 《설문해자 고림(詁林)》이 이용되고 있으며, 가장 뛰어난 주석인 청나라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비롯하여, 계복(桂馥)의 《의증(義證)》과 주준성(朱駿聲)의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 등 허학(許學:설문연구)의 정수를 모아 놓았다.  2006/01/24 15:57:18  
풀뿌리 복사 [卜辭]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한자로서, 갑골문[甲骨文, 귀갑문자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라고도 한다. 1899년 은나라의 옛 왕도 자리인 은허(殷墟)에서 발견되었다. 쓰여진 내용이 복점(卜占)에 관한 것이므로, 이것을 ‘은허복사(殷墟卜辭)’ 또는 간단히 ‘복사’라고도 한다. 귀갑이나 짐승의 뼈를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부터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오직 은나라시대만의 특색이다. 현재 알 수 있는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적 요소를 다분히 남기고 있으나, 순수한 그림문자보다는 상당히 진보되어 있다. 문자의 수는 대략 3,000자, 그 중 해독된 것은 약 절반이다. 그 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반경(盤庚) 때부터 은말(殷末)까지 약 2백 수십 년에 걸친 것으로, 보통 이것을 5기(期)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다. 내용은 제사(祭祀) ·군사(軍事) ·천상(天象) ·전렵(田獵) ·농경(農耕), 임금의 행행(行幸)과 안부(安否)에 관한 것이 많고, 이것으로 은대의 정치 ·사회 ·경제 등이 밝혀져서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던 은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임이 실증되었다.], 계문(契文), 귀갑문자(龜甲文字),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점을 칠 때 사용한 것이어서 복사라고 부르며, 거북껍질이나 소의 어깻죽지 뼈에 새겨져서 갑골문이라고도 한다. 또한 은왕조(殷王朝) 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殷墟)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점을 칠 때 거북껍질이나 소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로 지져 거기에 생기는 갈라짐을 보고 길흉(吉凶)을 판단했다. 점을 친 뒤에는 그 내용을 복조(卜兆) 곁에 쓴 다음 이를 새겨 놓았다. 이 갑골은 오래 전부터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이를 글자로 파악하지 못하고 용골(龍骨)이라 하여 부수어 가루를 내어 약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1899년(光緖 25)에 금석학자 왕의영(王懿滎)이 베이징[北京]의 한약방에서 용골 위에 새겨진 글자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 후 여러 학자들의 관심을 모아 민국(民國) 17년(1928)에 이르러 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어, 중앙연구원에서 민국 26년(1937)에 이르기까지 15차에 걸쳐 철저한 발굴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 문자의 수는 약 3,000개인데 그 중 해독된 글자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복사가 기록한 것은 제사·농업·전쟁·수렵·일기, 왕의 행동과 질병 및 신들의 재앙에 관한 복문(卜問)이었다. 이 복사는 중국 고문자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 은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구체적 상황이 드러나 전설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은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왕조임이 실제로 증명되었다.  2006/01/24 16:00:57  
풀뿌리 헤브라이 [Hebrew]
헤브라이어의 이브리(ibri:건너온 사람들의 뜻)에서 유래한 말. 원래 외국인들이 유대인을 멸시하여 부른 말, 또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 예컨대 노예계층 사람들을 가리킨 말이었다. 유대인이 그들 자신을 헤브라이인이라고 부른 것은 유수기(幽囚期:BC 6세기) 이후로 그때부터 이스라엘 ·유대 ·구약성서 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거나,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유대교와 같이 쓰이는 경우에는 포수기 이전의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히브리’로 많이 쓴다.  2006/01/24 16:02:55  
풀뿌리 단지파 [Dan tribe]
구약성서 야곱의 아들과 그 지파. 단은 심판이라는 뜻이 있다. 하느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은 야곱[Jacob,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 중 동생, 훗날 이름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고쳤다. 침착하고 명상적인 사람으로 장막에서 지냈다. 이삭의 사랑을 받고 있던 쌍둥이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長子權)을 양수받고, 자기를 편애하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서 장자의 축복까지 받아냈다. 형의 보복이 두려워 어머니의 주선으로 외갓집이 있는 하란으로 떠났다. 20년이 지나 돌아오는 도중 꿈속에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김으로써 땅을 약속받았으며, 하나님의 인도와 번영된 삶을 보장받았다. 잠을 깬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맹세와 함께 소산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곳을 '이곳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라는 뜻의 브니엘로 명명한다. 하란에서는 외삼촌 라반의 딸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아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자식들은 이스라엘 12부족(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뒤에 그는 기근 때문에 식량을 구해 오도록 아들들을 이집트에 보냈는데, 어렸을 때에 팔려가 거기서 재상이 된 아들 요셉을 발견하였다. 야곱 일가는 그 요셉 덕분에 이집트로 이주,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이 빌하로부터 얻은 다섯째 아들이다. 야곱은 단지파의 장래에 대하여 다른 어느 부족보다 열심으로 또는 교활하게 이스라엘의 적과 싸을 것을 예언하고(창세기 49:16~17),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에 비유하였다(신명기 33:22). 단지파는 북방의 변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종말에서의 이스라엘 12지파의 회복을 기록하는 표 중 단지파는 제거되고, 그 대신 레위지파가 기록되어 있다(요한계시록 7:5~8). 이것은 단지파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모세에게 쓰인 오홀리압과 삼손은 단지파 출신이다. 《민수기》 1장 39절에 단지파의 계수한 것이 나타나 있는데, “단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육만 이천 칠백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지파의 정복사업은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는데,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살았다.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다고 《여호수아》 19장 47절에 나타나 있다. 단지파의 성읍은 원래 라이스 또는 레셉이라고 불렀으며,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나타나 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열왕기상 12:28~30)고 기록되어 있다. 2006/01/24 16:08:46  
풀뿌리 은왕조와 갑골문자
문서에 기록되어있는 중국 최초의 고대왕조 스스로는 상(商)이라 하였으나, 이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가 전(前) 왕조를 은(殷)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전설적인 최초의 왕조 하(夏)의 계승국가로 창건연도는 BC 1760 ~ 1520년이며 몰락 시기는 BC 1766 ~ 1130년으로 추측이 다양하다. 은나라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해명하기 위한 자료는 갑골문 해독 결과와 고고학적 연구로 한정된다. 갑골문은 은 왕실의 복관(卜官)에 의해서 은 왕조의 제사·농사·기후, 외적의 침입과 정벌, 왕의 여행, 사냥·질병 등 모든 사항에 걸쳐 있는데, 은나라 사람이 인간세계에 대해 지배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천제(天帝) 즉 하느님에게, 그 신의(神意)를 묻기 위해 점친 결과를 적은 것이다. 특히 제사에 관한 점이 많은데, 이는 은 왕실의 선왕선비, 이른바 조상신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 강이나 산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로 나뉜다. 이들에게 제사지내는 일이 정치에서의 질서 형성의 핵심이 되었다는 뜻에서 제정일치의 정치형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왕도는 갑골문에서 <대읍(大邑)>이라고 불렸는데 지배귀족들의 주거지인 씨족읍이 대읍을 둘러싸며 많이 산재하였다. 이 씨족읍에는 많은 소읍이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읍들 상호간의 누층적(累層的) 지배예속관계가 국가구조의 기본이었던 것으로 보아, 왕도에는 이미 어느 정도의 지배관료층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수·조·보리 등을 재배하고 가축(소·말·염소·돼지·개·닭 등)을 사육했으며 또한 누에도 쳤다. 이것을 위해서 생산노예를 사용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갑골문 속에 강(羌)이라는 이민족(異民族)이 제사용 제물로 많이 희생되었고 또 발굴된 왕묘의 주변에서 실제로 엄청난 순장인골(殉葬人骨)이 출토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민족 노예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문화적으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 시기가 중국 청동기문화의 전성기였다는 점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은대전성기(殷代全盛期)를 전기 이리두기(二里頭期), 중기 정주기(鄭州期), 후기 안양기(安陽期)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중국 역사상 청동기의 시작은 이리두기에서 볼 수 있는데 중기에는 벌써 대형의 정교한 청동제기류(靑銅祭器類)가 많이 제작되었고, 후기에 이르자 질과 양 모두 뛰어난 청동제기와 무기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외범분할법(外范分割法)에 의해 주조된 청동기로, 기술적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또 복잡한 무늬까지 새겨져 있어서 세계적으로 고대 청동기문화의 진수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은나라문명의 근원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른바 세계 6대문명 가운데서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더스문명,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안데스 두 문명이 각각 상호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은 문명만은 이들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아직까지의 연구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2006/01/24 16:11:49  
풀뿌리 갑골문은 청(淸)나라 광서(光緖) 25년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서 서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소둔촌(小屯村)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곳은 일찍이 은 왕조의 수도였던 자리이다. 갑골문 발견에는 일화가 하나 있다. 금석문학자 왕이영(王懿榮)이 북경에 있을 때 감기를 앓고 있었는데 어느날 한약방에 사람을 보내 당시 감기에 효험이 있다는 용골(龍骨)이 든 약을 지어오게 하였다. 왕의영은 그 약을 한 포씩 살펴보던 중 우연히 용골에 미지의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음에 놀라 친구와 함께 그것을 감정한 결과 마침내 그것이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고대 문자임을 밝히고 용골의 출처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거에 사용되었던 문자 중에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발견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중국 최초의 문자라고 인식하고 있다. 1954년 서안(西安) 반파촌(半坡村)에서 출토된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채색도기 위에 있는 것은 일종의 부호를 새겨놓은 것이다. 임동채도기(臨潼寨陶器) 위에 새겨진 문자는 1974년 반파촌에서 서쪽으로 거의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도기 위에 대량으로 새겨놓은 문자의 부호다. 청해성(靑海省) 낙도현(樂都縣)의 유만문자(柳灣文字)의 부호는 갑골문과 금문(金文)에 새겨져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지금부터 6000년 전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갑골문의 필·획은 직선이 대부분이고 곡선은 매우 드물다. 선도 매우 가늘기 때문에 새길 때 무척 정성을 들여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반촌이 넘는 것도 있으며 작은 것은 깨알만한 것도 있다. 필·획과 필순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것은 왼쪽으로 향하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향하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2006/01/24 16:12:29  
풀뿌리 갑골문을 서체적으로 분석한다면 전서(篆書)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나 짜임새와 필법은 그 나르대로 독특한 경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독립체에서 합체로 향하고 있으며 대량의 형성자(形聲字)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진보된 문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글자는 필·획과 부분적으로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장단과 대소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에 비교하면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그렇지만 필·획에서 힘을 가하고 짜임새에서 성김과 빽빽함을 안배하여 참차(參差)를 이루면서 비교적 엄정한 맛을 느끼게 한다. 글자의 짜임새와 전체적인 배치는 매우 타당성이 있으며 형체도 고아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글씨에 대한 기교와 각법이 익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갑골문의 필·획이 비록 가늘다 하더라도 법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난 것과 둥근 것, 살찐 것과 마른 것을 잘 살리는 조화를 느낄 수 있다. 필·획에 있어서 모난 것이 대부분이지만 둥근 획도 있다. 둥근 획에서는 고리를 두른 것처럼 둥글게 획을 꺾었는데 이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근본적으로 칼을 댄 것 같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서예적으로 볼 때 갑골문 중에서 큰 글씨는 웅장하고 힘이 있으며 까깡지른 듯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갑골문자는 먼저 글씨를 쓰고 난 뒤에 각을 하였는가 아니면 직접 칼로써 각을 하였는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먼저 글씨를 쓰고 난 뒤에 각을 하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갑골문은 전설 속의 왕조로 여겨지던 은 왕조를 역사로 끌어냈을 뿐 아니라 고대 중국의 사회, 문화, 정치 등을 소개하는 자료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 형성의 기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출처:http://my.dreamwiz.com/deserta/kapgol.htm 2006/01/24 16:12:57  
풀뿌리 조선사편수회 [朝鮮史編修會]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1932∼1938년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관제(官制)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조직구성에는, 위원장급인 회장은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修史官)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2006/01/24 16:16:22  
풀뿌리 鸞郞 碑序文(난랑 비서문)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乃包含三敎하야 接 化群生이라 감旦如 入즉 孝於家하고 出側 忠於國은 魯司숙 之也오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며 諸惡을 莫作하고 諸善을 奉行함은 죽乾太子之化也라 (국유 현묘지도 하니 왈 풍류라 설교지원이 비상선사 하니 실내 포함 삼교하야 접화군생 이라 단여 입즉효어가 하고 출즉 충어국은 로사 숙지지야오 허무위지사하고 행불언지교는 주주사지종야며 제악을 막작하고 제선을 봉행함은 주건태자지화야라.)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사상은 유,불,선 3교를 포함한 것으로서, 화랑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또, 모든일을 억지로 하지 않고 묵묵히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을 신봉하고 행함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2006/01/24 16:32:01  
풀뿌리 "현존언어 90% 금세기말 사라진다"
소수 민족들의 언어가 희귀 동식물의 멸종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 빌 서덜랜드 교수는 과학주간지 네이처 최신호(15일자)에서 최근 500년간 소멸된 언어의 비율은 전체의 4.5%로 조유(1.3%)나 포유류(1.9%)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이래 소멸된 언어는 북미 지역 원주민 언어 176개 중 52개, 호주 원주민 언어 235개 중 31개 등이 포함돼 있다. 서덜랜드 교수는 언어의 다양성과 생물종의 다양성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림지대나 열대우림, 산맥지대에 생물이 다양하게 서식하듯 언어도 이런 지역에서 풍부하게 발달한다는 것이다. 전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이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인도, 멕시코, 카메룬, 호주, 브라질 등 8개국에 몰려 있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생물의 멸종과 달리 언어의 소멸에는 환경적 요인과 함께 정치·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것. 언어 다양성의 위기는 이미 유네스코와 환경단체 등 여러기관에서 문제로 제기해 왔다. 유네스코는 특정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집단의 수가 10만명이 안되는 언어는 소멸위기에 처한 것으로 규정한다. 민간기구인 월드 워치는 2001년 이 기준에 따라 현존 6809개 언어 중 90%인 6000여개가 금세기 말이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전쟁과 대량학살, 자연재해, 특정 언어 사용 금지 정책, 중국어처럼 사용자가 압도적인 언어에 주변 언어가 동화되는 것 등이 언어 멸종의 원인으로 꼽힌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6809개 언어의 96% 사용자를 모두 합쳐도 세계 인구의 4%가 되지 않는다. 소수민족의 언어는 사용자가 갈수록 급감하고 있다. 남미 안데스산맥의 레코어는 사용자가 약 20명, 아프리카 카메룬의 캄바프어는 30명에 불과하다. 아마존 정글의 아리카푸어는 6명, 알래스카 에약어 등 46개 언어는 단 한사람만이 사용하고 있다. 357개 언어는 사용자가 50명 이하이다. (조선닷컴 internetnews@chosun.com ) 2006/01/24 16:46:14  
풀뿌리 多勿(다물)
'옛땅을 되찾음'이란 뜻의 고구려(高句麗) 말. 다물(多勿)은 <되물린다>, <되찾는다>,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다물'이란 말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조선의 역대 단제(檀帝)중 BC590년에서 BC545년까지 재위했던 제38대 단군 '다물'로 동북아 대륙의 주인공으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면서부터였다. 이어 BC37년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한다"는 취지에서 건국정신으로 이 다물을 내세웠으며, 그런 의미로 연호를 '다물'이라 하고 최초로 회복한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이름지었음이 《삼국사기》《고구려본기》와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이 다물정신은 서기 244년 백제 고이왕 때부터 시작된 백제의 대륙경략과 일본진출로 이어졌음이 중국의 사서인 《25사(二十五史)》<조선전><백제편>에 수 십차례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후손인 대조영에 의한 발해의 건국정신으로 계승되었음이《발해고(渤海考)》《구당서(舊唐書)》《속일본기(續日本記)》등 한중일 여러 역사서에 뚜렷히 나타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고려 태조 왕건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국호를 고려로 하였고 (고려사 제 1권 제1장), 그런 까닭에 건국직후부터 1388년 위화도 회군까지 시종일관 고구려 옛 땅 수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의 요동정벌론, 세종대왕의 4군6진 개척, 효종대왕의 거대한 북벌정책추진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신채호, 배천택 선생등에 의한 '조선상고사 찾기' '대고구려주의 주창' 과 '다물단조직'으로 이어져 가장 강력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근원으로 살아 숨쉬어 왔다. 따라서 이 '다물정신' 이야말로 수천년간 대륙과 바다를 호령해온 우리민족의 기상이며, 동시에 숱한 간난과 시련속에서도 대륙강토회복과 역사복원을 염원하는 민족혼의 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물의 현재적 의미. 다물은 영토민족주의 시대가 가고 인종과 국경이 사라진 오늘에 있어 고토수복(故土收復)이라는 전통적 의미를 뛰어넘어 3천3백년간 만주대륙과 황해를 제패했던 우리 민족의 기상과 특질을 되살려 당당하게 세계를 향해 나가자는 정신문화적 민족주의이다. 또한 세계 10∼20위권의 경제,무역대국으로 성장한 오늘의 국력을 저 잃어버린 만주대륙과 연해주, 몽골 일대로 뻗쳐 서기 926년 발해 멸망 이래 1천년만에 동북아의 중심국으로 다시 일어서자는 기능적 민족주의이다.  2006/01/24 16:51:02  
풀뿌리 고비사막 [Gobi Des.]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인 몽골고원 내부의 고비사막의 범위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알타이산맥 동단에서 싱안링[興安嶺]산맥 서쪽 기슭에 걸친 동서 1,600km, 남북 500∼1,000km의 범위로 알려져 있다. 고비란 몽골어로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란 뜻으로, 모래땅이란 뜻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고비라는 말의 뜻처럼 고비사막 대부분의 지역은 암석사막을 이루어 모래사막으로 된 지역은 매우 적고, 또 일반적으로 고비사막이라 부르는 지역범위 안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포함되어 있다. 강수량은 중앙부에서 연 25∼50 mm, 북부에서 남동부에 걸쳐 150∼200mm에 불과하나, 강수량의 대부분이 목초와 농작물 생육기인 여름에 집중된다. 하천은 대개 사막 속으로 스며들거나 염호(鹽湖)로 흘러드나, 북부에 케룰렌강(江), 남부에 황허강[黃河] 등이 흐른다. 지하수면은 대개 지표에서 6m 미만의 깊이에 있으나, 물은 대부분 염수화(鹽水化)되어 있다. 중심부의 노암지대(露岩地帶)에서 주연부(周緣部)로 나가면서 스텝지대로 이행하는데, 수목은 거의 없고 유극관목림(有棘灌木林)이 간간이 있을 정도이다. 영양류(羚羊類) ·설치류(齧齒類) 등의 야생동물이 살고, 가축으로는 염소 ·양을 비롯하여 소 ·낙타 ·말 등이 사육된다. 근래 농목업의 집단화 ·기계화가 이루어지고, 종래의 유목민의 생활도 정착화되어가고 있다. 한편, 몽골의 날라이하에서 석탄, 사인샨드에서 석유가 개발되고, 또 중국 간쑤성[甘肅省]의 위먼[玉門]에서도 유전이 개발되어 간쑤철도가 그 유전지역까지 연장됨으로써 과거의 오아시스 거리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고비사막은 공룡화석의 보고(寶庫)로서 1922년에는 프로토세라톱스의 뼈와 공룡 알들이 발견되었고, 1960년대에는 벨로시랍터와 프로토세라톱스 공룡을 한 마리씩 발견했으며, 1992년에는 날지 못하는 새의 친척인 최초의 모노니쿠스가 발견되었다.  2006/01/24 16:56:35  
풀뿌리 타클라마칸사막 [Takla Makan Des.]
중국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 서부, 타림 분지[Tarim Basin, 면적 약 70만km2, 남북 길이 500km, 동서 길이 1,500km, 평균 해발고도는 800∼1,200m이다. 서쪽은 파미르고원, 북쪽은 톈산[天山]산맥, 남쪽은 쿤룬[崑崙]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경사를 이룬다. 주위의 산맥이 모두 높고 산꼭대기는 만년설에 덮여 있기 때문에 유출하는 수량이 많아 타림(물을 모으는 곳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기슭에는 하천이 퇴적시킨 선상지가 늘어서 있으며 선상지의 선단(扇端)은 오아시스 지대이다. 분지의 중앙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선사시대의 내륙호가 말라붙은 것이다. 오아시스 지대에서는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하여 도시국가의 성립을 촉진하였으며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분지의 북쪽과 남쪽 가장자리에는 실크로드가 뻗어 있어 동양과 서양 문명의 교류에 공헌을 하였으며, 부근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에 있는 사막. 면적은 약 37만km2이다. 뤄부포호(湖) 서쪽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타커라마간[塔克拉瑪干]사막이라고 한다.높이 100m 안팎의 크고 작은 사구가 이어지고, 사구가 바람에 밀려 이동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교통의 큰 장애가 되었다. 타클라마칸이란 위구르어(語)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뤄부포호 동쪽은 암석 사막인데 바이룽두이[白龍堆]라고 한다. 겨울에는 혹한, 여름에는 혹서로 유명하다. 2006/01/24 16:59:28  
풀뿌리 파미르고원 [Pamir Plat.]
중앙 아시아 남동쪽에 있는 대산계(大山系)와 고원으로 이루어진 지방. 파미르는 옛 페르시아말로 ‘미트라(태양)신의 자리’를 뜻하는 ‘Pa-imihr’가 어원이라고 하나 이설(異說)도 있다. 해발고도 5,000m가 넘는 10여 갈래의 복잡한 주행(走行)을 보이는 산맥들로 구성되어 있는 파미르 지방의 대부분은 타지키스탄 고르노바다흐샨주에 속하며, 동쪽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남 ·서쪽은 아프가니스탄에 속한다. 산계(山系)는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동(東)파미르는 카슈가르파미르(중국 영토)를 가리키며, 최고봉은 쿵구르봉(7,719m)이다. 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호(孤)를 그리며 남쪽의 타시쿠르간 산계로 이어진다. 심한 개석이 진행되고 있으나 이 고원은 기후가 한랭한 데다 건조하기 때문에 식생이 빈약하고 관목상(灌木狀)의 텔레스켄이 주민의 유일한 식물질 연료이다. 중부 파미르(지질학자 무르자에프는 이곳을 좁은 뜻의 파미르라고 부른다)는 파미르 가운데에서도 가장 새로운 지질시대에 융기하였기 때문에 산꼭대기 부근이나 하곡(河谷)의 중간 등에서도 평탄한 면이 잘 남아 있다. 그리고 서(西)파미르는 자알라이산맥(트랜스알라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7,134m의 레닌봉이 있다) ·표트르1세산맥 ·아카데미아산맥(교차점에 7,495m의 코뮤니즘봉이 있다), 그 밖에 여러 산맥으로 구성되며 심한 개석으로 웅대한 모습을 보인다. 파미르 산계는 여러 줄기의 향사축(向斜軸) ·배사축(背斜軸)을 가지고 있는데 배사부는 편마암 ·고생층(古生層:헤르시니아계가 많다), 이에 관입(貫入)한 심성암류(深成岩流)로 이루어져 있으며, 향사부에는 중생층을 중심으로 하는 퇴적암이 나타나고 있다. 융기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파미르 주변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지진대(地震帶)이다. 파미르 지방의 기후는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서파미르의 해발고도 4,000m 부근에서는 연평균 강수량이 1,000mm나 되지만 골짜기는 건조하다. 식생의 수직적인 변화가 분명하며 서쪽으로 열려 있는 하곡에서는 쑥 등이 식생하는 반사막(半砂漠), 하천 연안이나 선상지(扇狀地)에서는 규모는 작지만 버드나무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2,600m에서는 스텝, 3,800m에서는 고산식물의 꽃밭, 4,000m에서는 설선(雪線)이 나타난다. 동파미르에서는 5,200m에서 설선이 나타나고, 빙하는 타지키스탄 영토에만 해도 1,085줄기가 있다. 파미르에서 사는 동물은 양 ·늑대 ·설치류(齧齒類) ·산까마귀 ·독수리 등이고 서파미르에는 불곰 ·표범류도 있다. 2006/01/24 17:00:55  
풀뿌리 알타이산맥 [Altai Mts.]
중앙아시아에서 북동아시아에 걸쳐 있는 복합 산계(山系). 길이 2,000 km. 알타이는 ‘금으로 이루어진’이란 뜻의 몽골어 알탄(altan)에서 비롯된 말이다. 러시아연방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오지에 걸쳐 있으며, 북극해로 흘러드는 오브 ·이르티슈강 유역과 중앙아시아 내륙 유역의 분수계이다. 남동쪽은 몽골 고원, 북서쪽은 서시베리아 저지에 접하며, 북동쪽은 서(西)사얀산맥으로 이어진다. 이 산맥은 몽골알타이(최고점 후이툰:4,355 m) ·고비알타이 ·소비에트알타이(최고점 벨루하산:4,509 m)의 셋으로 크게 구분된다. 지질은 고생층의 혈암(頁岩), 녹니편암(綠泥片岩) ·사암(砂岩) ·화산분출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강암도 군데군데 노출되어 있다. 이들은 강한 변위(變位)를 받아 칼레도니아 및 헤르시니아 조산운동으로 습곡하면서 융기하였는데, 나중에 준평원화 작용을 받았다가 다시 제4기 초에 심하게 융기하였다. 이 융기과정에서 많은 단층운동이 수반되었고, 몇 개의 커다란 단층 분지가 형성되었으며(추강 ·칸강 ·크라이 계곡 등), 산허리와 봉우리는 빙식을 받았다. 알타이산맥은 ‘루드니알타이(광석이 많은 알타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듯이 납 ·아연 ·주석 ·금 ·백금 등이 매장되어 있으며, 서부(주로 러시아연방)의 오브강 ·이르티슈강 유역의 상류는 유력한 전원(電源) 지대이며 부크타르마 ·비야강 등에는 낙차가 큰 수력발전소가 많다. 연평균 강수량은 카자흐스탄 쪽의 산허리가 1,000∼2,000 mm, 탁월풍의 바람그늘에 해당하는 몽골 쪽이 300 mm 전후이다. 산허리인 1,500∼2,500 m 지대에는 낙엽송 ·전나무 등이 무성하며, 삼림은 전면적의 2/3를 차지한다. 산꼭대기의 빙하는 모두 800줄기이며, 면적은 600 km2에 이른다. 서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쪽의 산기슭에서는 스텝을 개간하여 대규모의 밀 ·옥수수 재배가 이루어지며 알타이 산중에서는 축산과 임업 ·광업이 경제의 기초를 이룬다.  2006/01/24 17:02:23  
풀뿌리 신채호[申采浩, 1880.11.7~1936.2.1]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6/01/24 17:05:14  
풀뿌리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가 담기어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본디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전12편으로서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한족격전시대, 5편 (1)고구려전성시대, (2)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서 신채호는 그의 역사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이런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택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 저자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역사학연구의 방법론으로서의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인 역사학을 한다던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고,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의 계승과 단군·기자·삼한·삼국으로의 계승되는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의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2006/01/24 17:08:25  
풀뿌리 조선상고사 서문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은 시간부터 발전하여(상속성) 공간부터 확대하는(보편성)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한다. 또한 무산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각기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에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그 ‘아’와 대치한 ‘비아’가 있고, ‘아’의 중(中)에도 ‘아’와 ‘비아’가 있으며, ‘비아’ 중에도 또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煩劇)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쟁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기록이니라.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속성을 요하나니, ① 상속성이니, 시문에 있어서 생명의 부절(不絶)함을 위함이요, ②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 영향의 파급됨을 위함이라.  2006/01/24 17:17:10  
풀뿌리 그러므로, 인류 말고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여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을 인류에뿐 상(喪)함이라. 사회를 떠나서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 ‘아’의 범위가 너무 약소하여 또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됨이라. 동일한 사건이라도 양성 ─ 상속·보편 ─ 의 강약을 보아 역사의 재료될 말한 분량의 대소를 정한다. 이를테면 김석문은 3백 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창도한 조선의 학자이지만 부르노의 지원설과 같은 양상의 역사적 가치를 쳐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피부르노가 그 학설로 인하여 구주 각국의 탐험열이 광등(狂騰)한다,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만, 김석문은 그런 결과를 가지지 못함이라. 또한 정여립은 4백 년 전에 군신 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만, 이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작한 루소와 동등되는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설(鄭說)의 영향을 입은 양반 살육계 등의 전광 일섬(電光一閃) 같은 거동이 없지 않으나, 마침내 루소 이후의 프랑스 혁명에 비길 수 없는 까닭이라.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표창하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이으며, ‘아’를 소멸하여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진적(陳跡)만 끼치나니, 이는 고금 역사에 바꾸지 못할 원칙이라.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성(通性)이어늘, 매양 예기(豫期)와 위반되어 승리자가 아니 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이뇨? 2006/01/24 17:17:33  
풀뿌리 백두산 [白頭山]
높이 2,744m로 북위 41˚01´, 동경 128˚05´에 있으며 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다. 또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해왔다. 중국 금대(金代)인 1172년에는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대(淸代)에는 이곳을 왕조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창바이산맥[長白山脈]의 주봉으로 최고봉은 병사봉(장군봉:2,744m)이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 등이 있다. 남동쪽으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뻗어 있다. 휴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다. 화산분출은 쥐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현무암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2006/01/24 17:23:41  
풀뿌리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토양은 여러 해 동안 동결층의 영향과 한냉한 기후에서 형성된 토양, 평탄한 현무암대지 파습조건에서 형성된 토양과 수평대성을 띤 포드졸성 갈색산림토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하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1월 평균기온 -23℃(최저 -47℃), 1월의 평균 일교차는 7.5℃, 7월의 평균 일교차는 4.8℃이다. 연평균 상대습도는 74%이며 여름에 가장 높고 겨울에 낮다. 북서풍과 남서풍이 강하게 불고 최대 풍속은 40m/s,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며,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48회이고 그중 60∼70회는 6∼7월에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물은 검은담비, 수달, 표범, 호랑이,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 큰곰 등 희귀동물이 많고 204종의 조류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메닭, 세가락메추리,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으며, 천지에 어류는 살지 않는다. 2006/01/24 17:24:49  
풀뿌리 300과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적 분포속도가 빠른 식물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받기 전의 식물종들이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이 자란다. 빙하기 이후 고산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분홍노루발풀·왕바꽃·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산 정상에는 칼데라호인 천지(天池)가 있는데 면적 9.165㎢, 평균수심 213m, 최대수심 384m이다. 천지의 물은 높이 67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사기문폭포·형제폭포·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천지에는 백암온천과 새로 개발된 백두온천이 있으며, 주변에 장백온천과 제운온천이 있다.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위 길이가 4.5km, 수심 3m인 천연호수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난 휴양지이다. 문화재로는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2006/01/24 17:2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