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洪 益 人 間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2)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0:09

[들어가기 전에]

1. 서언
2. 그 출전과 기원
3. 홍익인간을 잉태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4. 그 사상의 참뜻
5. 위대한 사상의 탄생과 계승 발전
(가) 탄생 배경

(나) 세계인이 감탄하는 훈민정음
(다) 훈민정음은 과연 세종대왕의 창작품일까?
(라) 그 비밀의 열쇠
(마) 그리하여 민족의 정신이 계승되다.
(바) 영원하여라! 훈민정음! 그리고 홍익인간!

6. 결언


 

[민족의 시원인 天海, 바이칼호]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2)- 라강하 - 

 

 

 

3. 홍익인간을 잉태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이상이 한단고기에 나오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이념을 내 보인 한웅천황에 관한 기록을 현대고고학적인 자료를 가미하여 정리한 내용인데 그러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였기에 그러한 사상을 연생(緣生)하였고 세계사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흔히 배달민족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배달(倍達)의 참뜻을 알고 스스로 배달민족이라 하는가? 과연 세계의 중심(中國)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나인의 오만과 변방국(邊方國)임을 자처한 선조들의 자기비하적(自己卑下的) 사고방식으로 기록된 배달국의 진정한 실체는 무엇일까? 조그마한 반도에서 곰의 자손이라는 일연의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려한다는 드넓은 사상이 나왔다는 것은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 지고(至高)한 사상을 잉태한 배달국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알아보기로 하자.

지나(支那,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에 의하면 당시 지나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쪽에는 대인국(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공자까지도 군자가 살고 있는 구이의 땅에 가 살고 싶다고 하였음을 보면 지나인들은 본능적으로 배달국을 이상향으로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논어에 이르길 “子欲居九夷或日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자욕거구이혹왈루여지하자왈군자거지하루지유)라 하였다. 내용을 해설하면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가 살고 싶다”하였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그곳은 더러운 땅이라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살고 있는데 어찌 더럽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풀이가 있으나 동방 구이의 땅에 군자가 살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게 마땅한 해석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구이(九夷)의 땅이란 곧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의 동쪽 일대를 일컫는 것으로 공자가 우리의 선조들을 군자로 일컬은 이래 이와 유사한 기록은 지나 고대의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설문해자>, <산해경찬>, <한서지리지>, <신이경>등에 군자국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흔히 우리는 "夷"를 "오랑캐 이"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오랑캐라고 불렀던 그들의 옛 기록에도 군자국(東方曰夷 言仁而好生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後漢書), 어질다(仁也 說文通訓定聲, 爾雅), 오직 東夷만이 큰것을 따르니 大人이다(惟東夷從大大人也 說文字解), 夷는 易의 假借이다(夷卽易之假借也 說文解字)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없는 공경의 뜻을 담은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큰 활을 잘 다루는 어진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동이족에 매번 연전연패한 지나인들이 "어질 이"로 불러주다가 갑자기 "오랑캐 이"라고 한다고 하여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 할 이유는 없을 뿐더러 원래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러한 배달국의 정치, 문화, 경제 등에 대하여는 한단고기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잠깐 그 내용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왜냐면 홍익인간이란 큰 사상을 잉태한 배달국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 뜻을 알기란 수박겉핥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배달국은 한국(桓國)의 계승국인데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국(桓國)은 안파견(安巴堅)한인이란 분이 비조(鼻祖)로 일곱분의 한인께서 3301년 동안 천해(天海)와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하는 땅에서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의 땅을 12연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했다. 그리고 배달이라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지상천국이나 낙원이라는 의미 내포되어 있다. 사람이 서로 존경을 하고 만물이 사랑을 받는 광명의 나라였기 때문에, "밝은 나라"라는 뜻으로 "밝은 땅"->"밝땅"->"백땅"->"백달"->"배달"로 변이된 것이다. 여기서 천해(天海)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로서 바이칼은 "밝안"으로 이는 "밝음이 시작되는 호수"라는 말이다. 천산(天山)은 중앙아시아의 힌두쿠시 산맥의 파미르 고원, 즉 한탱그리산이다. 그리고 바이칼 호수와 한탱그리산의 중간쯤에 알타이어족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되는 알타이산이 있다. 소위 한국(桓國)이란 인류 최초의 국가임과 동시에 우랄알타이어족의 최초의 국가인 것이다. 

한국을 세운 한인할아버지에 대하여 한단고기에서 말하기를 "시베리아(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계시니 그 밝음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가르침은 만물을 낳았다."고 했다. 이 내용은 우리 한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의 기원이 멀리 9000년 이전의 한국(桓國)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 다시 말해 태양신 사상은 이후로 세워진 모든 한민족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고대의 거의 모든 민족과 국가에 깊이 영향을 준 중요한 사상이다. 또한 "시베리아(斯白力)"란 "새밝"으로서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라는 의미로 우리 고대국가의 모든 이름과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육당의 해석에 의하면 "새밝"은 "셔블"로서 서라벌이며 또한 지금 우리의 수도 서울과도 같은 개념이다. 서라벌의 계림(鷄林)은 "닭이 있는 숲"이다. 여기서 닭은 곧 닥이며 닥은 대가리로서 "탱그리"->"당골"->"단군"이다. 즉 "단군이 머무는 숲", "천하의 중심이 되는 숲"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만 년 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지금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일관된 사상체계에서 우리는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배달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약 6000년 전 삼위(三危)와 태백(太白)사이에서 나라를 세웠다 했다. 삼위(三危)는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과 만주의 백두산(白頭山)과의 중간지점인 북중국에 위치한다. 태백(太白)은 지나의 섬서성이라고도 하고 만주의 백두산 일대라고도 말하기도 하나 이는 더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지금의 한반도에 있는 태백산은 더더욱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천산과 만주의 백두산은 지나치게 먼 거리이다. 따라서 천산과 백두산의 중간쯤이 배달국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위치는 북중국의 서안(西安) 근처의 4166m의 태백산(太白山)으로 이른바 삼위(三危)와 함께 중앙아시아와 만주의 중간 지점에 속한다. 한국이 인류 최초의 국가라면 배달국은 인류최초로 문자(鹿圖文)를 만들고 역법(歷法-일년을 365와 4분의 1일로 확정)을 만들었으며, 불로 익혀 먹는 법(고시례, 高矢禮)등을 발견하고 팔괘를 만드는 등 가히 인류 문화와 문명의 근본을 세운 나라이다. 특히 한국에서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던 천부경(天符經)을 녹도문으로 기록했고 삼일신고와 366사(참전계경)그리고 한역(桓易)을 만들어 전함으로서 지나의 주역(周易)의 모태가 되어 인류 종교와 사상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또 화백(和白)제도를 사용함으로서 민주정치의 근본을 세웠다. 5대 태우의 한웅께서 조식보정(調息保精)을 근간으로 수립한 선도(仙道)는 단군조선의 천지화랑(天指花郞), 국자랑(國子郞)으로,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仙人) 으로, 신라의 화랑도(花郞道)로, 고려의 재가화상(在家和尙)으로 면면히 이어졌던 것이다. 배달국은 18분의 한웅할아버지께서 156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셨다고 한다.

 

이후 18대 거불단 한웅이 곰족의 공주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게 된다. 단군왕검은 구한(九桓)의 무리들의 추대로 송화강의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배달국의 이념인 홍익인간을 국시로 조선(朝鮮)을 개창하게 되는데 이른바 47대 2096년간 지속된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그것이다. 조선(朝鮮)은 음차(音借)하여 쓴 말로 "빛나는 아침의 나라"란 뜻이 결코 아니다. 단재 선생은 이에 대하여 조선의 어원을 숙신(肅愼)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서는 숙신의 옛이름은 주신(珠申)이라 했고 주신은 "소속된 영토를 관활하는 경계인 관경(管境)"을 뜻하는 만주어라 했다. 여기에 그 원뜻이 있으니 숙신은 조선의 고어(古語)인 것이다. 이리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배달국 이념은 단군조선시대에도 면면히 계승 발전되었던 것이다.

 

 

 

[때 묻지 않은 파내류산 즉, 파미르고원의 모습]



한 가지 부연하여 특기할 사실은 배달국 비조 거발한 한웅 말기에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는 자가 십간십이지 신장(神將)을 갖고 공공(共工, 工人을 다스리는 관리), 유소(有巢, 법을 관장), 유수(有燧, 불을 관장)와 더불어 배달국을 배반하고 삼위산 라림(拉林)동굴에서 지나를 건국하였으며 배달국의 태우의 한웅천왕이 선도수련법을 체계화한 일이라든가, 치우(蚩尤)천왕이 나라의 영역을 중원의 핵심 지대로 확장했다든가 하는 업적은 우리의 기록뿐만 아니라 지나의 기록에도 뚜렷이 나와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대 태우의천왕의 막대아들과 막내딸이 곧 태호복희(太昊伏犧)와 여와씨인데, 특히 지나의 삼황오제 즉 태호복희, 신농씨, 황제헌원(이상 삼황),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이상 다섯 제왕인 오제)이 모조리 배달족이었다는 사실은 지나의 상고사 자체가 우리 민족 상고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력히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그 후 하, 은, 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 대에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되는 것이다. 태호복희란 말도 태호는 곧 "탱그리"로서 "당골", "단군"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복희는 곧 "밝"으로서 밝음이니 배달l과 같은 말이다. 이는 곧 "머리밝은"이란 말이다. 태백산의 태가 탱그리, 백이 밝으로 머리밝은산이다. 백두산 또한 머리밝은산이다. 천하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라는 의미일 때 태호복희, 천하의 중심이 되는 산일때 태백산, 백두산인 것이다. 그리고 지나 문화를 대표하는 유교와 도교의 근원을 따져보면, 황제헌원이 배달국의 자부선생(紫府先生)에게서 전수받은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에 그 뿌리를 두고 발전한 신선음부경(神仙陰符經)에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배달국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으며, 거의 일방통행 식으로 동양 문화를 이끌어왔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양문화의 뿌리는 지나라고만 철석같이 믿어온 것이 얼마나 잘못된 허구였는가 하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즉 배달국의 잔가지중의 하나가 지나족 문명을 일으켰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한 한반도란 좁은 영역이 아닌 대륙의 웅혼한 영역을 가진 한국(桓國)의 계승국 배달국이 있었기에 홍익인간, 재세이화란 지고한 사상을 잉태할 수 있었고 단군조선시대에는 계승발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 알타이 산맥에 있는, 우리의 서낭당과 너무 흡사한 '어워']

 

4. 그 사상의 참뜻

홍익인간의 "홍(弘)"은 "크고 넓다.", "익(益)"은 "유익케 하다."는 뜻이다.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넓게 해석하면 "진리로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백낙준님은 영역(英譯)하길 "The maximum service for benefit of humanity"라 하였는데 실로 적절한 번역이라고 본다. 홍익인간이란 말은 원래 "弘益人間 理化世界"라는 말에서 나왔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 바른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세이화는 홍익인간을 떼어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없다. 줄여서 홍익인간, 붙여서 홍익인간 재세이화라 해야 할 것이다.

한웅이 땅으로 내려올 때 한인이 준 천부인에는 홍익인간 정신이 깃들어 있다. 천부인 중 하나인 거울은 태양을 가리키는데, 왕이 항상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반성하며 백성을 다스리라."는 의미이다. 또 "둥근 모양처럼 둥글고 어진 성품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은 힘의 근원으로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데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되며 꼭 필요한 때만 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방울은 그 소리가 왕이 하는 말과 같다. 왕의 말이 천하에 울리는 소리인데 "그 소리가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는 훌륭한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인은 자신이 이런 홍익인간 정신으로 하늘 세계를 다스리듯이 한웅 또한 땅에 내려가 홍익인간 정신으로 인간을 다스리기를 바란 것이다. 홍익인간은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경지에서 나온 말이다. 내 가족, 내 이웃, 내 민족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널리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비심과 기독교의 사랑 등도 홍익인간과 통한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 국가는 개인이나 국가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있다. 얼마전 우리 농민 이경해씨가 자살한 WTO협상도 인류공영은 말로만이고 기실 속내를 들여다 보면 각국의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이 EU로 통합되었지만 공존공영은 명분일뿐 자국, 자민족의 이익을 위한 실리 찾기의 가면무도회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제껏 동서양의 접점(接点)에 위치한 터키가 그렇게 EU가입을 주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의 기독과 터키의 이슬람이 사상적으로 맞지 않을 뿐더러 EU에 흡수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인데 &+(함께, 더불어)논리에 굴복, EU가입으로의 진일보를 내디뎠다는데 이의 결과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때 삼도(일본)가 내세웠던 대동아공영이란 슬로건도 동아시아가 진정 하나되자는 뜻이 아니라 삼도만을 위한 대륙침략의 근거를 마련하기위한 허구였슴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공존공영을 위한다는 철학이 필요하고 그런 방향으로 가기위한 단계를 밟아 나가야 할 텐데 이럴 때 바로 이런 홍익인간 정신이 강조되어야 한다. 홍익인간은 모두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임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란 세상에서 삼라만상의 氣를 理로 변화시켜 이화세계(理化世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스스로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룬 재세이화를 남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6,000년 전 배달민족이 건국하면서 내세운 국시(國是)인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다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민족과 아랍민족(성서를 통해 추정하면 아담의 10대 손이 노아이며, 노아의 3형제 중 셈(Shem)의 후손이 아브라함(Abraham)인데, 그 아브라함과 본부인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Issac)이 유대민족의 조상이고,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일(Ishmael)이 아랍족의 조상이다. 그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것이다. 즉 그들은 이복형제의 후손으로 같은 핏줄인 셈이다.)이 철천지 원수로 싸우고 있슴을 보면 6,000년 전 배달민족이 내세운 우리의 홍익인간이란 국시가 자랑스럽다. 홍익인간 - 이 사상이야말로 어떠한 종교와 철학보다도 위대하다고 본다.

흔히 기독교는 “사랑”을, 불교는 “자비”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만으로 부족하여 그 이념을 사람들이 알기 쉽고 객관성 있게 “성경(THE BIBLE)"과 ”불경(佛經)“으로 후세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물론 율법과 구약이 예수 이전의 유대 사회에 존재했지만 신약은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저작되고 수차에 걸친 성서 공의회를 통하여 개정되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한 가필(加筆) 과정에서 예수의 일생중 20여년을 빈 생애로 남겨 신비로움을 더하게 하고 있고, 구약에도 물론 교파의 논리에 의하여 수많은 가필이 이루어 졌다. 그들은 성서공의회에 의하여 가필이 이루어진 경전을 정경(正經, Canon)이라 하고, 가필이 안 된 경전의 자료들을 외경(外徑, Apocrypha)이라 하여 폐기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외경은 존재하는가? 이집트, 나일강가, 그리고 중동의 석회암 동굴들, 사해(死海)등지에서 양피지와 파피루스의 두루마리로 발견되어 성서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진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외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단자로 낙인찍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동굴 벽을 울릴 뿐인 것이 현실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구약과 신약을 합본(合本)한 성서도 이와 같이 교파들의 논리로 가필되고 나라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중차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불경은 어떤가? 석가 생존시에는 애당초 불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제자들에 의하여 세존의 생전의 말씀들이 암송되어 전해지다가 말씀의 변질을 우려한 일부 제자들의 제안으로 수차에 걸쳐서 결집되고 제자들이 경전을 만들고 수차의 가필이 이루어졌으며 다시 지나로, 티베트로, 조선으로, 삼도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번역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우리가 지금 소중히 알고 있는 인류의 경전들은 여러 시대와 교파들의 논리에 의하여 가필이 이루어졌는데 결과적으로 정본(正本)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성경이나 불경은 예수나 석가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나 석가의 말씀에 사람의 이상향이 가미된 한얼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서 공동 참여하여 만든 합작품이란 이야기이다.

그런데 세상을 한없이 이롭게 하고 바른 이치로 교화한다는그토록 지고한 사상이 홍익인간 재세이화라면 그 사상만 가지고는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사상이 사상으로 인정받을려면 그 사상을 뒷받침하는 해설이 필요할 것이다. 불교의 금강삼매경이 유명한 것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이 있기 때문이듯이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를 구체화한 성경과 불경이 있기에 우매한 백성들이 이해되는 바 아닐까? 마찬가지로 ”홍익인간 재세이화“가 좀더 구체화된 경전은 없을까? 유대의 역사가 구약에 서사시로 읊어졌듯이 배달의 역사가 기록된 경전은 없을까? 그 이념을 알기 쉽고 객관성 있게 후세사람들이 포장한 경전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 분명히 있다. 배달의 역사는 한단고기에, 사상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에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설은 필자의 아직 공부가 빈약하여 후일로 미룬다. (계속됩니다. blog.chosun.com/kanghan8)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9/26(초고)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0(퇴고)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상선약수 깊은 감명을 받고 갑니다. 2006/01/12 22:07:08  
풀뿌리 민족 자주사학의 대선배님께서 깊은 감명을 받으셨다니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다시 돌아보니 그러한 자격이 不備하오니 거두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합니다. 홍익인간 일단 끝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1/15 21:48:46  
풀뿌리 산해경[山海經, Shanhai ching]
고대 중국 및 국외의 지리를 다룬 지리서. 〈산해경〉이란 이름은 사마천(史馬遷)의 〈사기〉에서 맨 처음 보인다. 유향(劉向)의 아들 유흠(劉歆)이 기존에 전해져 오던 내용에 덧붙여 편찬했으며, 진대(晉代)의 곽박(郭璞)이 최초로 주석을 달았다. 이 책의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지금 전해 내려오는 판본에 근거하면, 그중 많은 편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가장 오랜 것은 주대(周代)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한대(漢代)에 첨가된 부분도 있다. 〈산해경〉은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첫째, 상상력이 풍부한 묘사로 후대의 중국 작가·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둘째, '지이류'(志異類) 문체의 효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이류의 작품들은 기이한 이야기를 위주로 하고 사람과 풍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기는 하나 결코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이 묘사법은 중국소설의 발전에 중요한 몫을 했다.  2006/01/19 16:52:16  
풀뿌리 회남자[淮南子, Huainantzu]
중국의 고전. BC 2세기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그의 빈객(賓客)들과 함께 지었다. 원래는 내편(內篇) 21편과 외편(外篇) 33편이었으나, 현존본은 내편 21편만이 전한다. 형이상학·우주론·국가정치·행위규범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대체로 초기 도가의 고전인 노자와 장자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이지만 이 책의 우주생성론은 더욱 발전되어 있고 명확하다. 이 책의 우주생성론에서 도(道)는 태허(太虛)에서 나오고 태허는 우주를 낳으며 이것은 다시 양의(兩儀)를 낳는다고 했다. 천(天)과 지(地)의 양의가 결합하여 양(陽)과 음(陰)을 낳으며 이 2가지가 만물을 낳는다. 이 우주론의 개략적인 내용은 도가에서만이 아니라 후대의 유학자들도 정설로 채택했다. 영혼을 논한 곳에서는 지상에서의 불멸성과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호흡법과 같은 신체적 기술에 대해 언급하여 후에 도가 사상과 속화된 도교 신앙을 혼동하게 될 여지를 만들었다. 아울러 형이상학과 우주론에 본질적으로는 합리적 정신으로 접근함으로써 합리주의적인 신도가(新道家)의 출현을 예비했다. 2006/01/19 16:54:14  
풀뿌리 설문해자[說文解字, Shuo-wen chieh-tzu]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58경~147경)이 편찬했다. 본문은 14권이고 서목(敍目) 1권이 추가되어 있다. 9,353개의 글자가 수록되었고, 중문(重文:古文·文의 異體字)이 1,163자이며 해설한 글자는 13만 3,441자이다. 최초로 부수배열법을 채택하여 한자 형태와 편방(偏旁) 구조에 따라 540개의 부수를 분류했다. 통행하던 전서(篆書:小篆)를 주요 자체(字體)로 삼아 고문(古文)·주문(文) 등의 이체자를 추가시켰다. 글자마다 지사(指事)·상형(象形)·형성(形聲)·회의(會意)·전주(轉注)·가차(假借)의 '6서'(六書)에 따라 자형(字形)을 분석하고 자의(字義)를 해설했으며 독음을 식별했다. 고문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중국 고대서적을 읽거나 특히 갑골문(甲骨文)·금석문(金石文) 등의 고문자를 연구하는 데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송대(宋代) 서현(徐鉉)이 쓴 교정본이 남아 있다. 후세인들의 연구저작이 대단히 많으나 청대(淸代)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 說文解字注〉가 가장 자세하다.  2006/01/19 16:55:42  
풀뿌리 반고 (班固 ; 32~92)
중국 후한 초기의 역사가로서 자는 맹견(孟堅)이며 산시성 셴양[咸陽] 출생이다. 표(彪)의 아들로서 서역도호(西域都護) 초(超)의 형이며 소(昭)의 오빠이다.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이어 고향에서 《한서(漢書)》 편집에 종사하였으나, 62년경 국사를 개작(改作)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 즉, 아버지인 반표(班彪:3~54)는 호고적(好古的) 취미가 강한 지식인으로서 한 황실이 재건되었을 때(후한)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서령(徐令)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관직을 사퇴하고 독자적으로 역사연구에 몰두했다. 3황5제(三皇五帝)로부터 시작하여 전한시대 중간에서 끝을 맺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계승할 역사서를 쓰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했다. 반표가 죽은 뒤 반고는 그의 뒤를 이어 역사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사(國史)를 함부로 개작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생 반초의 노력으로 명제(明帝)의 용서를 앗으며 난대령사(蘭臺令史)라는 관직까지 얻었다. 그 후 20여 년 걸려서 《한서》를 완성하였다. 그가 저술한《한서(漢書)》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 즉, 반고는 한대초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마천이 그 시기를 다룰 때 사용한 대부분의 사료를 섭렵했다. 또한 장황한 부분을 삭제하고, 어색하고 모호한 부분을 단순명료하게 바로잡았다. 그당시 교육의 보급, 관료기구의 확대, 문서기록 기술의 향상, 서체의 통일 등으로 인해 그는 더 많은 양의 최근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약 200년간의 역사를 다룬 《한서(漢書)》는 3,000년을 망라했다고 하는 《사기(史記)》보다도 분량이 훨씬 많다. 사마천과 반고는 둘다 사관(史官)이었으므로 불가피하게 관찬(官撰) 기록들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황제와 황족의 생활(그들의 민정·군정상의 중요한 활동을 포함)을 인물별·연대기별로 기술했다. 이것이 《한서(漢書)》의 첫번째 부분인 본기(本紀)이다. 반고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사마천의 《사기(史記)》 체제를 따랐다. 2006/01/19 17:03:13  
풀뿌리 2번째 표(表)에서는 사건·가계(家係)·인물 등에 관한 도표를 만들었다. 3번째 지(志)에서는 교사(郊祀)·예악(禮樂)·식화(食貨) 등과 같은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4번째 열전(列傳)에서는 황제 이외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1명씩 또는 몇 명을 1전(傳)으로 묶어 서술했다. 그는 지에 새로 천문지(天文志)·지리지(地理志)·예문지(藝文志)를 추가했다. 특히 황실도서관인 난대(蘭臺)에 보관된 서적들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예문지는 후대의 학자들이 문헌의 진위성이나 가전(家傳)을 밝힐 때 반드시 참조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중국이 당시에 더이상 제후 분립의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기의 편찬체제 중 세가(世家)를 없앴다. 79년 여러 학자들이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토론할 때, 황제의 명을 받아 《백호통의(白虎通義)》를 편집하였다. 화제(和帝) 때 두헌(竇憲)의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흉노 원정에 수행하고, 92년 두헌의 반란사건에 연좌되어 옥사하였다. 즉, 40대 중반에 그는 더욱 모험적인 일에 뛰어들었다. 《한서(漢書)》의 퇴고는 특출한 학자였던 여동생 반소(班昭)에게 맡기고, 장군 두헌(竇憲)을 따라 흉노(匈奴) 정벌에 나섰다. 변경으로부터 1,60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다. "우리 정병(精兵)은 오랑캐 무리를 정벌하러 이곳에 왔다. 우리는 서역인들의 무례함을 응징했고 먼 이역인 이곳을 평정했다. 그들은 이 거대한 평원을 지나 북쪽 고향으로 돌아갔고 장한 우리 군대는 이 전승기념비를 세우니, 위대한 천자(天子)의 업적이 앞으로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그러나 두헌의 조카이며 아직 14세에 불과했던 화제(和帝)는 두헌의 자만심을 경계했고, 그의 지나친 야심을 우려해 그를 고향 땅으로 유배시켰다. 반고도 상관의 몰락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문초를 당했으며, 60세에 옥에 갇힌 채 죽었다. 여동생인 반소는 예정대로 한서의 초고를 완성하고 그 내용을 다른 학자들에게 가르치도록 공식 승인을 얻었다. 문학 작품에 《양도부(兩都賦)》 등이 있다. 2006/01/19 17:03:49  
풀뿌리 반고[盤古, Pan Ku]
중국 도교의 천지창조 설화에 나오는 주요인물. 최초의 인간인 반고는 2개의 뿔, 2개의 어금니, 많은 털을 가진 몸으로 혼돈을 의미하는 알속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어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하늘과 땅을 분리하고 해·달·별·행성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바다를 넷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골짜기를 새기고 산을 쌓아올려 땅의 모습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음양(陰陽)의 원리, 즉 만물이 갖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이중성의 원리에 관한 반고의 지식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반고의 거대한 시체에서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그의 눈은 해와 달이되었고, 피는 강을 이루었으며, 머리는 자라서 나무와 식물이 되었다. 그의 땀은 강물로변했으며, 살은 흙이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반고의 몸에 들끓었던 기생충에서 생겨났다. 이런 창조설화는 3~6세기 사이에 형성되었다. 반고를 그린 예술적인 초상화는 대개 나뭇잎 옷을 입은 난쟁이로 묘사된다. 2006/01/19 17:08:38  
풀뿌리 만주원류고
삼국사기가 신라 후손의 역사책이라면,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발해 후손의 역사책이다. 즉 삼국사기가 신라 경주 출신인 김부식이 쓴 역사책이라면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백두산 출신의 후금인[청 건륭 42년(1777년) 청 한림원]이 쓴 역사책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신라중심으로 서술되고,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발해 즉 만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일만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바이칼호 연안, 시베리아, 만주, 칸(한)반도, 그리고 연해주는 우리 한(칸)민족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만주와 한반도에서 어떤 국호를 가진 나라가 세워졌건 그것은 하나의 민족에 의한 다수의 국가 건설이었을 뿐이다. 즉 수많은 국가들은 한민족 연방의 한 부속국가였을 뿐이었다. 곧,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 지역에 부여가 세워지건, 고구려가 세워지건, 옥저가 세워지건, 발해가 세워지건, 금나라가 세워지건, 요나라가 세워지건, 실위국이 세워지건, 후금이 세워지건 그것은 모두 우리 한민족 연방국가의 일 개 부속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또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신라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백제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가야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아니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아니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건 그것은 모조리 다같은 한민족에 의해 세워진 일 개 정치집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후금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면서, 설령 중국으로 편입됐다 하더라도 강역상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여전히 중국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님은 분명해진다. 특히 만주원류고에서 다루는 지역은 중화족의 강역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강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결단코 중화족의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 다시 말해서, 고구려인/발해인의 역사책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만주원류고는 고구려의 태학박사 이문진 (李文眞)이 AD 600년(영양왕 11년)에 왕명으로 기존에 전해 오던 역사책인 《유기(留記)》 100권을 편집하여 만든 《신집(新集)》5권이 1100여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06/01/19 22:29:26  
풀뿌리 현재 만주가 중국의 강역이 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 마저 중국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현대의 다물정신은 전쟁을 통한 강역회복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인식을 통한 민족사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구촌 시대에는 이제 자연지리적인 강역은 별 의미가 없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산천을 넘어야만 영토를 빼앗아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현대엔 굳이 몸에 총칼을 메고 산넘고 물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타국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재물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따라서 옛날과 같이 무력을 통한 고토수복은 이젠 다물운동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다물운동은 잃어 버린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다시 찾는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역사인식은 앞으로 무한경쟁시대에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중요한 벼리가 되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만주원류고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흠정만주원류고>로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입수한 복사본이다. 앞으로 틈이 나는대로 원본을 일부씩 게재해갈 예정입니다. 관심있는 분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제 서론은 접어두고 만주 원류고의 개략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권1부터 권7까지는 부족을 다루고 있다. 권1 : 숙신, 부여족, 권2 : 읍루, 삼한, 물길족, 권3 : 백제족, 권4 : 신라족, 권5 : 말갈족, 권6 : 발해족, 권7 : 완안, 건주족, 권8부터 권13까지는 각국의 강역을 다루고 있다. 권8 : 부여, 숙신, 읍루, 삼한의 강역, 권9 : 물길, 백제, 신라, 흑수말갈의 강역,  2006/01/19 22:31:44  
풀뿌리 특히 신라 강역과 관련해서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길림까지 아우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신라의 계림은 경상도에 있지 않고 만주 길림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판에서 잘못된 정보에 터잡아 고구려 멸망후 만주지역을 신라가 자동흡수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견해는 오류이므로 이를 시정하기로 합니다. 한편, 신라의 계림을 만주의 길림으로 보는 만주원류고의 시각에 따르면 고구려의 강역은 박창범 교수의 삼국의 천문관측지점도대로 바이칼에서 동몽골, 흑룡강에 이르는 것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검토를 요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권10 : 발해의 국경, 권11 : 요의 강역, 권12 : 금의 강역, 권13 : 원의 강역, 권14부터 권15까지는 산천을 다루고 있는데 권14가 산악을, 권15는 하천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만주일대의 산악, 하천을 다루고 있다. 권14에 바로 그 말썽 많은 도문강(두만강?)이 나온다. 끝으로 권16부터 권20까지는 국가의 습속을 다루고 있다. 
 2006/01/19 22:32:54  
풀뿌리 백낙준 [白樂濬, 1895.3.9~1985.1.13]
호 용재(庸齋), 영어명 조지 백(George Paik)이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22년 미국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프린스턴 신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해 예일대학교에서 철학박사, 1948년 파크대학에서 신학박사, 1954년 스프링필드대학에서 인문학박사, 1958년 디포대학에서 법학박사,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연희전문 교수, 1938년 영국 왕립역사학회원이 되고, 1946년 연희대학 총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여 6 ·25전쟁 중의 교육문제 해결에 진력하였으며, 1953년 서울시교육회장, 1956년 대한교육연합회장에 선임되고, 4·19혁명 이후 참의원의장을 지냈다. 1961년 연세대학 명예총장에 추대되었으며, 1969년부터 통일원 고문, 1980년부터 국정자문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70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저서에 《한국의 현실과 이상》(상 ·하권) 《한국개신교사》(英文), 에세이집 《시냇가에 심은 나무》 등이 있다. 2006/01/19 22:39:25  
풀뿌리 아브라함 [Abraham]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열국(列國)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본래 그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그 뜻은 ‘아버지는 높임을 받는다’이다.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아버지 데라, 아내 사라, 형제 나홀과 하란, 그리고 조카 롯과 함께 하란으로 갔으며, 데라가 죽은 후 그의 나이 75세에 다시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으로 이주하였다(창세 12:1-6). 그는 86세에 애굽인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고(창세 16:1 이하), 100세에 비로소 아내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었다(창세 21:1 이하). 그는 조상들과 달리 유일신 하느님을 신앙하였다(여호 24:2). 그는 하느님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으로(창세 17:1, 21:33), 하늘과 땅의 주관자로(창세 24:3), 그리고 모든 인류의 심판주로 모시고 섬겼다(창세 18:25). 그는 하느님의 친구로 대접받았으며(창세 18:33), 환상이나 천사들의 방문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수시로 계시 전달받았다(창세 15:1, 18:1).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술되어 있는 그의 이야기는(창세 12-23장)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형성에 기반과 근거를 제공하였다. 유일신 신앙이나 선민사상, 그리고 계약개념 등은 모두 그의 이야기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신약성서 기자들에 의해서도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되었다(마태 1:1, 로마 4:3). 한마디로, 그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 종교들의 공통조상이 되었다. 2006/01/19 23:04:49  
풀뿌리 원효 [元曉, 617~686.3.30]
속성 설(薛), 법명 원효, 아명 서당(誓幢)·신당(新幢)이다. 압량(押梁:慶山郡)에서 태어났다.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唐項城:南陽)에 이르러 한 고총(古塚)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元曉宗 ·芬皇宗 ·海東宗 등으로도 불린다)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破戒)로 단정,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자칭, 《무애가(無 歌)》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왕과 고승(高僧)들 앞에서 강론, 존경을 받았다. 그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저서에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범강경보살(梵綱經菩薩)》 《계본사기(戒本私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판량비론(判量比論)》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이 있다.
 2006/01/19 23:06:32  
풀뿌리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효(元曉)가 북량(北凉) 때에 번역된 《금강삼매경》에 주석을 붙인 책. 3권 1책. 원효가 주석서를 내기 이전에는 이 경전에 대한 논급이 없었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제4권 <원효전>에는 논을 저술하게 된 연기(緣起)를 밝히고 있다. 원래 원효는 소(疏)라고 하여 《삼국유사》에도 《삼매경소》로 되어 있으나, 당나라의 번경 삼장(翻經三藏)들이 소를 논(論)이라고 불렀다. 중국 ·한국 ·일본인들이 찬술한 불교서적 중에서 논이라고 이름 붙여진 유일한 책이다. 《금강삼매경》은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당(唐)나라 초기까지 중국 불교에서 제기된 공(空)사상. 화엄(華嚴) ·재가불교(在家佛敎) 등의 모든 교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원효의 논석(論釋)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도록 압축된 경전이다. 원효는 이 논에서 교설(敎說)을 원활하게 유통시키기 위해 《화엄경》 《기신론(起信論)》 등의 대소승경론(大小乘經論) 23종을 52회에 걸쳐 인용하였다. 이 논석은 그 내용이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의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원효의 독창적인 사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서분이다. 원효의 이 논석은 독보적인 불교 전문술어들을 사용하여 다른 경전의 설명과는 다른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한다. 해인사에 이 책의 판목(板木)이 있으며, 1958년 동국대학교에서 영인하였다. 또 현암사(玄岩社)의 《한국의 명저》 101선에 선정, 현대어역으로 출간되었는데, 이기영(李箕永)의 해제가 실려 있다. 2006/01/19 23:09:40  
풀뿌리

환국과 12연방
『《고기古期》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 환인씨桓仁氏의 나라가 있는데 천해天海의 동쪽 땅이며 파내류의 나라라고도 안다.』─ 《삼성기》 하편, * 총 강역 -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 * 환국(桓國)은 제1세안파견(安巴堅), 제2세혁서(赫胥), 제3세고시리(古是利), 제4세주우양(朱于襄), 제5세석제임(釋提壬), 제6세구을리(邱乙利), 제7세지위리(智爲利)환인(桓仁)등 7분에 의해 3,301년간 다스려졌다고 하며, 또한 12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는데, 1수밀이국 (須密爾國) 2우루국(虞婁國, 필나국) 3구다천국(勾茶川國) 4선비국(鮮裨國, 시위국, 통고사국) 5양운국(養雲國) 6 매구여국(賣勾餘國, 직구다국) 7객현한국(客賢汗國) 8구막한국(寇莫汗國) 9구모액국(勾牟額國) 10비리국(卑離國) 11일군국(一群國) 12사납아국(斯納阿國)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을 가야 한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구막한국에 접해있고 북으로는 약수弱水(흑룡강)에 닿았다. 그 땅의 경계는 넓고 길어 수천리에 이른다. (중략)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 《진서晉書》는 당 태종이 20여명의 학자로 하여금 편찬케 한 동진東晉과 서진西晉의 정사로, 25사의 목록에도 올라가 있는 역사서이다.

■수밀이국 = 수메르Sumer,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황하 등의 4대문명설은 이미 폐기된 학설이나 다름없다. 이들보다 더 오래된 문명유적들이 세계각지에서 발견되고 있고, 특히 우리민족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요녕성에서는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선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주인공은 바로 수메르이며 지금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등지의 인접지역이다. * 수메르인 - 그들 스스로 동방의 고원 산악지대에서 이주해 왔다고 하며. 교착어를 쓰는 검은 머리의 황색인종이었다. 이들의 창세신화는 후일 바빌론과 시리아에 전해졌으며 그들의 점토판에 기록된 홍수설화는 이스라엘의 구약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의 유물 중에는 두 장정이 서로 씨름(?)을 하는 모양으로 구리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고구려 벽화의 씨름도와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다. 이들은 서로의 샅바를 잡은 손 중에서 왼손이 바깥으로 나가있는 왼씨름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전라도 지방에서 행해지는 씨름이 바로 왼씨름이다. 삼국 중 백제와 고구려의 동일기원설을 떠올리게 하는 의미있는 대목이다.  2006/01/25 11:35:44  

풀뿌리 불경결집[佛經sūtra結集Sa gî ti]
불교의 전적(典籍)을 불교 경전 또는 불교 성전(聖典)이라고 하여 통속적으로는 이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경전은 성전의 일부분으로 석가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경문(經文)이며, 성전은 경전 이외에 후에 불교도들이 저술한 것 또는 불교의 역사, 석가의 전기, 기타 서류 등 불교에 관계되는 모든 저술로서 불교연구에 관한 자료 및 문헌의 전부를 망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인도 ·중국 ·한국 등 여러 나라에 걸쳐 1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통하여 증가해왔고, 그 수량도 매우 많다. 그리고 경전은 예로부터 전제되는 것이 5,000여 권이라는 많은 종류와 부문이 있다. 상기티를 결경(結經) ·집법(集法) 또는 합송(合誦) ·합창(合唱)의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회의(會議)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많은 자격 있는 사람들이 모여 불전(佛典)을 올바로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는 전후 4차례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제1회 결집은 석가의 입멸(入滅) 직후 500명의 유능한 비구(比丘)들이 라쟈그리하(Rājagha:王舍城) 교외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마하카샤파(Mahākāśyapa:大迦葉)의 주재로 열렸다. 우팔리(Upāli:優波離)가 율(律)을, 아난다(nanda:阿難陀)가 경(經)을 그들이 듣고 기억하는대로 외고, 다른 사람들의 승인을 받아 확정했다고 한다. 그 후 석가 입멸 후 100년경에 계율에 대해 이론이 생겼으므로, 바이샬리(Vaiśāli:毘舍離)에서 야샤스(Yaśas)가 주재하는 제2차 결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700명의 고승이 모였다 한다. 남방의 전승에 의하면 제3차 결집은 불멸(佛滅) 후 200년경에 아소카왕(Aśoka:阿育王) 치하의 서울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華氏城)에서 열렸으며,모갈리푸타 티사(Moggaliputta Tissa)의 주재로 1,000명의 비구가 모여 경 ·율 ·논(論) 전부를 집성했다고 한다. 제1 ·제2 결집에 관해서는 남방불교나 북방불교 모두가 다 전하지만, 제3차 결집에 관해서는 북방불교에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제4차 결집은 2세기경, 카니슈카왕(Kanika 王) 밑에서 파르슈바(Pārśvā:脇尊者) ·바수미트라(Vasumitra:世友) 등의 주재하에 카슈미르(Kaśmira)의 비구500명이 모여 삼장(三藏)에 대한 해석을 가하였는데, 그것이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믿지 않고 있다. 2006/01/25 13:33:14  
풀뿌리 정경 [正經, canon]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경전을 가리키는 말. 즉 신·구약성서를 말하며 정전(正典)이라고도 한다. 본래 그리스어(語)의 kanōn에서 유래한 말로서, 라틴어 ‘카논’은 ‘표준·척도·모델’을 뜻한다. 사도 바울로는 이 말을 ‘인간행위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썼으며(갈라 6:16),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과 행동의 모범’이라는 뜻으로 썼다. 오늘날에는 성경 가운데서 최초부터 교회가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인정한 것을 ‘제1정경(Libri Prodocanonci)’이라고 하고, 일부 교회(특히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제2정경(Libri Deuterocanonci)’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의 일부분 등 몇몇 부분이 그러한데,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것들은 ‘외경(外經)’으로 여기는 데 반하여, 가톨릭에서는 ‘제2정경’(7권)이라 하여 이것들도 정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의 정경이 지금의 39권(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90년경의 얌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것처럼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敎會會議, synod, 교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성직자들의 모임으로 시노두스라고 한다. 교회 안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논의한다는 뜻이다. 주교들이 모여 교회 문제를 함께 토의하고 결정한 것은 50년경 바울로가 초청되어 이교도의 할례에 대해 판단한 예루살렘 공의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에 보면 1세기에는 더 이상 교회회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2세기 중반부터 많은 교회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 1세의 편지에도 고린토 교회에 특사를 파견하여 그곳 사제단 회의에서 문제를 함께 토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도 주교의 자문 기관으로 사제들의 모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지역도 교회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갈리아 교회 역시 4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3세기에 들어서면서 아프리카 교회는 정기적으로 교회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325년에 개최된 최초의 보편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에서는 각 관구에서 일 년에 두 번씩 교회회의를 개최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451년의 칼케돈공의회에서 재확인되었다. 교회회의는 교황이 직접 소집하고 타인을 시키거나 직접 주재하는 전세계적 규모의 교회회의와, 소집권이 사도좌로부터 지역 교회로 위임된 지역 교회회의로 크게 구분된다. 교황이 소집하는 교회회의는 보편공의회와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Synodus Episcoporum)가 있다. 지역 교회회의는 초(超)교구회의와 교구내 회의로 나누어진다. 주교회의와 사도좌의 승인을 얻어 개최하는 전체(전국) 공의회, 그리고 동일한 교회 관구의 여러 개별 교회를 위하여 그 관구의 관구장들 다수의 판단에 따라 타당하다고 여기는 때에 개최하는 관구공의회가 초 교구회의에 속한다. 교구내 회의는 교구 대의원 회의, 사제 평의회, 참사회, 의전 사제단, 사목 평의회 등으로 세분된다.]에서 였다. 2006/01/25 14:00:20  
풀뿌리 초대교회 [初代敎會, early church]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경전이 기록되었고, 교회의 신학과 체제가 확립된 기간으로 그리스도교 역사 중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가 활약했던 180년경 이전을 구분해서 원시교회로 부르기도 한다. 원시교회는 다시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로 구분한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방랑생활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원시 공동체는 팔레스타인을 넘어 소아시아 지방으로 전파되어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 영역의 확장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 신약성서에서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소아시아 지역 전파는 초기에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행해졌고, 후기에는 거의 전적으로 바울로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바울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헬라문화와 만나면서 다른 경향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까지는 유대적 전통을 전제로 그리스도교가 설명되었고, 특히 선교의 대상이 소아시아와 그외 다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역이나 회당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2세기 전후에 선교의 대상이 헬라문화권의 사람들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가 유대적 색채를 벗고 헬라적 경향을 띠면서, 세계의 종교로 성장해가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3세기에 이를 때까지 그리스도교는 양적으로 놀라울 만큼 급격히 팽창하였다. 이러한 성장의 원인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관한 복음이 당시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구원의 도를 가르쳤다는 반증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교가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만큼 기존의 국가체계와 기성 종교들이 느끼는 위기의식도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원시 공동체가 겪어야 하였던 박해였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원형으로 후대 역사 속에서 항상 높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하였을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종교적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2006/01/25 14:02:38  
풀뿌리 외경 [外經, Apocrypha]
성경의 편집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도 한다. 정경(正經)과 대비되며, 그리스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구약의 ‘70인역’에는 포함되고 헤브라이어 성서에 들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처음엔 문학적 용어로 일반대중에는 금지된 책이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여진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 《제2에스드라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 외경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명칭도 서로 다른데, 가톨릭 학자들은 외경을 제2정경(正經: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종교적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외경의 형성 경위는 이스라엘 역사 중 바빌로니아 포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하였던 이스라엘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성전의 재건과 헤브라이어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헤브라이어 정경이 율법서(《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예언서(《여호수아서》부터 《12소선지서》까지), 성문서(聖文書:그 이외의 《시편》 《잠언》 등을 대표로 하는 문학서)로 확정되면서 유대인들에게 규범적인 문서로 등장하였다(90년경).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하면서 그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를 당시 국제공용어로 만든 이후로, 점차 모국어인 헤브라이어를 잊어 가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BC 3세기 중엽), 이 때 원래의 헤브라이어 성서에는 없던, 그리스어의 종교서적들이 삽입되었다. 이 외경의 종교적 가치에 대해서도 신 ·구교가 상이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대 동방교회가 4세기 이래 외경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반면, 라틴 교회에서는 외경에 큰 비중을 두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외경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견해를 빌려 설명할 수가 있는데, 그는 “외경, 이는 성서와 동등시될 수 없는 책이지만, 읽어서 유익하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경은 역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구약외경은 특히 신약성서 이해에 큰 공헌을 해왔다. 2006/01/25 14:04:08  
풀뿌리 위경[僞經, Apocryphos]
그리스어 형용사에서 온 말로 그 본래 의미는 `숨겨진' 또는 `감춰진' 이라 는 뜻이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교회가 점차 정립되어 가면서 `숨겨진'것은 "이단적 내용이거나 출처 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숨겨진" 것 또는 `거짓된'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교회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에 널리 유포돼 있던 종교적 서적들중 경전에서 제외된 모든 서적들을 위경이라 불렀다. 예를 들면 구약위경으로서 12성조의 유훈, 헤녹서, 유빌레움, 므나세의 기도, 제3 에즈라서, 제3 마카베오서 등이 있으며 신약 위경으로서는 에피온인, 히브리인, 이집트인, 니고데모, 야고버, 베드로 등의 복음서를 비롯하여 각종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 등이 있다. 이상이 가톨릭이 말하는 위경이지만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일반적으 로 이 용어를 외경(外經)으로 번역하여 가톨릭의 구약 제2경전 즉 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마카베오 상권, 마 카베오 하권, 그리고 에스델서와 다니엘서 중 그리스어 성서만이 전해 주는 부분들을 칭할 때 사용한다. 물론 신약성서에선 제1경전과 제2경전의 구분이 없으므로 경전 외의 작품들을 모두 위경이라 한다. <가톨릭 대사전에서> 2006/01/25 14:0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