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洪 益 人 間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4)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0:24

[들어가기 전에]

1. 서언
2. 그 출전과 기원
3. 홍익인간을 잉태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4. 그 사상의 참뜻
5. 위대한 사상의 탄생과 계승 발전
(가) 탄생 배경

(나) 세계인이 감탄하는 훈민정음
(다) 훈민정음은 과연 세종대왕의 창작품일까?
(라) 그 비밀의 열쇠
(마) 그리하여 민족의 정신이 계승되다.
(바) 영원하여라! 훈민정음! 그리고 홍익인간!

6. 결언

 

 

 

 

 

[민족의 始原 天海, 바이칼호]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4)- 라강하 -


 


(다) 훈민정음은 과연 세종대왕의 창작품일까?

필자는 일찍이 그렇게 과학적이라는 훈민정음이 과연 “세종, 일개인의 노력으로 창안되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있다. 즉 기록(記錄)에 의하면 초기에는 집현전 학자들까지도 반대하여 세종 혼자서 연구했다고 했는데 “세계인이 찬탄하여마지않는 그런 훈민정음을 아무리 영민하시다 하더라도 과연 세종대왕께서 그 짧은 시간에 혼자서 창안했을까?”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훈민정음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세종 28년, 단기 3779년 서기 1446년 발간)”이 그것인데 그에 의하면 "형상은 옛 전(篆)자를 모방(字倣古篆)하고 소리는 7조(調)를 화협하였는데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가 모두 포괄되어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한글이 세종대왕의 완전(完全)한 최초의 창작품(創作品)이 아님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조선 왕조 실록> 세종실록 제102권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 그믐 조에,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였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是月上親制諺文 二十八字其字倣古篆)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 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라고 하였으며, 또 최만리의 소(疏)에서도,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篆文)를 본받은 것이고, 새로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과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사옵니다."고 하였다. 또한 세종이 총애하던 20대의 집현전 학자 성삼문과 신숙주로 하여금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학림학사 황찬을 13번이나 방문하여 음운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케 했다는데 배달의 영역인 요동에서 그들이 수집한 자료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한글 자모 24자가 세종 때 창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正音"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를 반포한 것이라기 보다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고 하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 음을 바로 잡은 글에 대하여 훈민정음이라 했는데 여기 그 "正音"이야말로 세종께서 옛글자를 참고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桓檀古記』단군세기 편에는 "단군 가륵 2년, 곧 B.C. 2181년 삼랑 을보륵이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일러 가림토(加臨土)라고도 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중 주목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바로 "정음(正音)"이라는 낱말이 그것인데, '훈민정음'에 들어있는 '정음'과 완전 일치하는 것으로, 세종께서 당시 고사서인『단군세기』등을 보았을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세종께서 표음문자를 집대성하고 그 명칭을 짓는 과정에서 '조선음자' 또는 '세종언문' 식이 아닌 고서에 나오는 옛 명칭 '정음'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조상의 맥을 이어받음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단군 때의 正音[가림토] 38자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창제 배경을 설명하는 증거도 찾아 볼 수 있다. 집현전 학자 신숙주의 후손인 영조조의 신경준(1712-1780)은 "" 서문에서  “東方舊有俗用文字”라 하였으며 서얼() 출신인 정조조의 이덕무(1741-1794)는 그의 「청장관전서」 제54권 훈민정음조에, “훈민정음에 초성․종성이 통용되는 8자는 다 古篆의 형상이다. ㄱ ‘古文의 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ㄴ ‘匿자에서 나온 것인데, 隱과 같이 읽는다.’ ㄷ ‘물건을 담는 그릇 모양인데, 方자와 같이 읽는다.’ ㄹ ‘篆書의 己자이다.’ ㅁ ‘옛날의 圍자이다.’ ㅂ ‘전서의 口자이다.’ ㅅ ‘전서의 人자이다.’ ㅇ ‘옛날의 원자이다.’ 또 ㅣ‘위 아래로 통하는 것이니, 古와 本의 번절이다.’ 翻切 ‘세속에서는 언문으로 反切이라 하여 反자를 배반한다는 反자로 읽고 反切의 反자 음이 翻인 줄은 알지 못한다. 1행에 각각 11자이다.’ 모두 14행인데 글자를 좇아 횡으로 읽으면 ‘가(可)․나(拿)․다(多)․라(羅)의 유와 같다.’ 자연히 梵呪와 같다. 대체로 글자의 획은 篆籒(전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인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참여 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여기서 자방고전(字倣古篆)의 “고전(古篆)이 과연 어떠한 글자일까?”하는 의문이 일 것이다. 어떤 이는 한자의 전서체(篆書体)라고도 하고, 주변국들의 옛 글자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필자뿐이 아니고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여도 꾸준히 제기 되어 왔는데 요약(要約)하면 가림토문자기원설, 아히루문자기원설, 한문전서체기원설, 산스크리트문자기원설, 몽고파스파문자기원설, 발음기관상형설, 히브리문자기원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은 한단고기에 속 시원하게 나와 있다. 한단고기의 가림토문자기원설 이야말로 모든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이라고 믿는 바이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조선 제3세 가륵단군 때(BC2181)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桓檀古記"에 언급되고 있으며 <단전요의(檀典要義)>라는 책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서 고운(孤雲, 최치원)이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로 그 옛 전자가 가림토문(加臨土文, 또는 加臨多文)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독자들은 “한글이 세종대왕의 완전한 창작품이 아님이 왜 중요한가?”, “우리뿐 아니고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훈민정음의 세종창제설을 왜 굳이 부인하려 하는가?”고 의문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유구한 우리의 역사와 함께한 한문 이외에 훈민정음 이전의 글자가 있었다면 그 글자는 어떠한 글자였고 또 그 글자는 어디서 나왔느냐가 배달민족의 장대한 역사와 홍익인간이란 지고한 사상이 오랜 기간 동안 전승되어질 수 있었던 까닭을 설명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 그 비밀(秘密)의 열쇠


앞서도 잠깐 설명했지만 우리가 흔히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선사 이전의 세계는 아주 미개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 석기시대는 국가개념은 없고 단지 부족단위 부락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알고 있는데 하지만 이는 지극히 국지적이고 단편적으로 살펴 본 편견이 아닌가 한다. 우선 선사(先史)시대의 동아시아의 자연 환경부터 살펴보자.

 

약 200만년 전부터 1만 년 전 사이에 4차례에 걸쳐 빙하기가 있었다. 빙하기에는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타이완이 육지로 연결되었고, 마지막 후빙기(약 1만년 전)에 들어 일시적인 기온상승으로 해수면(海水面)이 상승하여 대홍수(大洪水)가 일어나 물이 빠지면서 현재와 같은 지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노아의 방주"가 나오는 대홍수, 수메르의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대홍수란 바로 BC1만년전 마지막 간빙기의 홍수를 말한다. 즉 약 1만여년 전의 엄청난 대홍수 이야기가 7,000여년 동안 구전으로 혹은 또 다른 전달체계(그림, 서계, 결승등등)로 전해지다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BC3,000년 쯤에 설형문자로 점토판에 기록되었던 것이고, 그 점토판이 발견되기 전까지 성서에 기록된 홍수에 대하여 유대의 이야기로 그대로 믿었던 것인데 20세기에 점토판이 발견됨으로 인하여 성서의 홍수 모델이 수메르에 있었고 유대인들의 바빌로니아 유수 때 성서에 이입(移入)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격렬한 천재지변(天災之變)은 인간의 유전자에 기록, 전파되어 세계 도처에서 신화(神話)로 발견되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지금보아도 문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너무나 세련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한단고기에 언급된 배달의 역사도 선사(先史)시대에 구전으로, 설화로 대대로 전달되다 문자의 발달과 한께 다듬어져 전해져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4차례의 빙하기와 그 빙하기 사이의 3차례 휴식기와 같이 기온이 올라가는 시기가 있었는데 이를 간빙기라 한다. 빙기(氷期)에는 지구상의 평균 기온이 3℃-10℃정도로 매우 추웠으나, 간빙기(間氷期)에는 기온이 올라가서 해수면이 상승하였다. 인류나 동식물은 빙하기가 되면 거의 전멸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간빙기에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보였다. 인류의 진화 연결고리를 추적하다 보면 도저히 연결이 안되는 고리(Missing Link)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인류가 전멸되다시피하는 빙기와 다시 출현하는 간빙기의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돌연변이가 생성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류고고학적으로 직립보행 인류의 출현을 대체적으로 300만년 전으로 보는데 200만년 전부터 이제까지 4차례의 빙하기가 있었슴을 상기하면 인류가 얼마나 혹독한 대자연의 변화 속에 진화(進化)되어 왔는지, 그 대자연의 산물(産物)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한 바와 같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에렉투스 상호간,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싸피엔스 상호간은 물론 비교적 가까운 네안데르탈인조차 호모씨피엔스싸피엔스인 현대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종(別種)이라고 한다. 4차례의 빙하기는 모든 생물을 전멸상태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진화체계상 같은 인류집단이므로 인류카테고리로 분류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 끊어진 고리(Missing Link)를 연결하기 위해 인류고고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고, 대자연은 비록 역사(歷史)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지질(地質)적으로, 유전자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곧 그 미스테리는 밝혀지리라고 본다.

 

본론으로 돌아가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짐세시대(朕世時代)란 바로 70만년 전부터 시작된 구석기시대를 말하는데 이와같은 혹독한 빙하기를 거쳐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주먹 도끼.찍개.찌르개(사냥용), 긁개.밀개.자르개(조리용), 돌마치.새기개주먹도끼.긁개.새기개(연장)]등 뗀석기를 발달시켜 왔고 그 흔적은 웅기 굴포리, 상원 검은모루 동굴, 연천 전곡리, 청원 두루봉 동굴, 단양 수양개 유적, 제천 점말 동굴, 제주도 빌레못 동굴, 공주 석장리등지에서 발견된다. 바로 그 구석기 유물이 삼도에서 나오지 않아 후지무라 신이치가 미리 묻어놓고 70만년전 유물이 발견되었다면서 삼도 열도 구석기를 날조한 것이다. 그 때의 사람들의 생활이란 가죽옷을 입고 사냥과 채집을 위하여 무리로 이동을 하며 동굴 막집등에서 3, 4명 내지 10명 단위로 생활하였고 생산과 풍요를 위해 뼈나 돌에 짐승, 물고기등의 그림을 그리며 예술과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이 그 고고학적 실증이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한국 12연방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BC6,000년 경에 드디어 토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민무늬에서 빗살무늬로 발전하며 강가등지에서 정착 농경생활을 하여 한국12연방같은 정치 조직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평북 의주 미송리, 황해 봉산군 지탑리, 강원 양양 오산리,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등 한반도 전역에서 베짜기(가락 바퀴, 뼈바늘 등 사용)를 하고 수렵, 어로, 채취, 간석기를 이용한 농업(돌괭이, 돌낫, 뼈낫, 돌갈판, 조.피등을 재배)에 종사하였다. 주거는 움집 생활이었는데 부족장 중심으로 족외혼을 하고 공동 생산 공동 분배원칙을 지켰으며 애니미즘(해, 달 , 산 , 강, 큰 나무 등 숭배)과 토테미즘(특정 동물을 자기 씨족의 수호신으로 숭배)의 신앙이 있었고 예술의 잔영(殘影)으로 각종 암각화(예: 울주 암각화, 수렵, 어로의 생활 묘사)가 있는데 참고자료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놀라울 정도로 기하학과 사실이 어우러진 그림이다.

이러한 것은 지금까지 고고학적으로 알려진 사실인데 석기 시대의 어마어마한 돌무더기나 고인돌, 피리미드등 구조물들과 신앙, 암각화 조영(造營)등을 본다면 국가(國家)개념의 거대한 집단의 통치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사업들이었다는 것은 누구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현대 문명의 시스템은 어느 한 날 갑자기 조제(造製)되어진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오랜 기간의 축적된 기술로 이루어진 것이며 현대기술의 어떤 부분은 고대의 기술보다 오히려 뒤떨어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대 과학의 기본 알고리즘은 석기시대에 제시한 수준을 결코 넘지 않는다고 본다. 일례(一例)로 얼마전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절구공이나 나무배, 논농사 유적등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아니하며 그들의 동굴벽화나 암각화를 뛰어넘는 예술을 오늘날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자(文字)의 발달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단순한 표현 문자가 등장한 시기를 대략 50,000년으로 보며, 그림문자가 등장한 시기는 10,000년전으로 본다. 그림문자, 결승문자, 설형문자가 오늘날의 문자에 비하여 전달(傳達)능력이 뒤떨어지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정확한 의미(意味) 전달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실용적인 문자의 역사는 5,000년 전으로 보는 것이 통례(通例)이다. 수메르인들은 BC3,000년에 이미 쐐기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을 방대하게 소장한 도서관까지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인도에서도 문자라고 할 만한게 BC3,000에 등장하고 지나에서는 BC1,600년에야 갑골문자가 나타나고, 이집트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아 BC1,300년 쯤 상형문자가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가 바로 고고학에서 말하는 신석기 시대인데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국12연방시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가 그림문자와 더불어 입으로 전하다 문자의 발달과 더불어 가감(加減)되어 이야기 체계를 갖추면서 전해졌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내용도 마찬가지이며 세계의 여러지역의 신화도 마찬가지인데 역사연구에 있어서 신화를 무시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우리의 배달국에서는 제1대 거발한 한웅천왕 때(BC3897-3804) 신지(神誌)의 지위에 있던 혁덕(赫德)에 의하여 녹도문(鹿圖文)이 정리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훨씬 뒤에(BC 3,000년) 중동에서는 배달국의 일족인 수밀이국의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알파벳의 전신인 설형문자류가 등장하게 된다. 지나에서는 배달국 제14대 치우천왕 때(BC2707-2598) 창힐(蒼詰)이 배달국 자부선생에게서 배운 녹도문을 본떠 조족문(鳥足文)을 만들고 결승문(結繩文), 서계문(書契文), 갑골문(甲骨文)등의 변이를 거쳐 진시황 때(BC259-BC210)에야 예서체(隸書體)로 문자를 통일함으로써 오늘날의 한자(漢字)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한문의 문자체의 통일과 함께 지나위주의 역사를 기록하게 하고 지나보다 우월적 사항을 기술한 역사서들을 모조리 불태웠는데 그 사건이 다름 아닌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지나측 배달의 역사 기록은 이때 대부분 소실되게 된다. 즉 지나보다도 우월한 문화와 역사를 진시황은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곳이다. 그것이 분서갱유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엄청난 지나측 기록이 멸실되었지만 그 찬란한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배달의 역사를 알게 한다. 그 배달국에서 창안(創案) 발달시켜 온 문자의 역사를 알게 한다. 배달국의 녹도문은 그 뒤 단군조선의 제3세 가륵단군 때(BC2181)에 삼랑(三郞)직에 있던 을보륵(乙普勒)에 의하여 가림토문(加臨土文)으로 개량되었는데 신지문자라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훈민정음의 모태(母胎)가 된 것이다. 따라서 어제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에서 언급된 말씀은 “세종대왕께서 옛글인 38자의 가림토문을 참고하여 창제라고해도 좋을 만큼 음운체계를 정비하여 28자의 훈민정음을 완성하니 백성들이 자기 뜻을 나타내기에 편리하게 되었다.”라고 해석하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계속됩니다. blog.chosun.com/kanghan8)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9/26(초고)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1(퇴고)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풀뿌리

집현전 [集賢殿]

고려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궁중에 설치한 학문 연구기관.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계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1420). 그 직제는 겸관(兼官)으로 영전사(領殿事:정1품) 2명, 대제학(大提學:정2품) 2명, 제학(提學:종2품) 2명을 두었으나 실제로 직무를 집행한 것은 녹관(祿官)인 전임직이었다. 그 인원은 처음에 10명이었으나 점차 증원되어 36년(세종 18)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세종은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임무는 ① 학사 20명 중에서 10명이 경연(經筵)을, 다른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고, ②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으며, ③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는 한편, ④ 중국 고제(古制)에 대하여 연구하는 일 등이었다. 이곳에서 이룩된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이다. 그 밖에도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룩해 놓았다. 그러나 56년(세조 2) 단종(端宗) 복위를 꾀한, 후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하여 반대파 인사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오자, 세조(世祖)는 집현전을 폐지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2006/01/23 12:10:06  

풀뿌리 정인지 [鄭麟趾, 1396~1478]
본관 하동(河東). 자 백저(伯雎). 호 학역재(學易齋). 시호 문성(文成). 1411년(태종 11) 생원이 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예빈주부(禮賓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예조좌랑을 거쳐, 1418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가 되고, 1425년(세종 7)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427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좌필선(左弼善)이 되고 이듬해 부제학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고, 이듬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지어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1432년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를 거쳐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로 있다가, 1436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439년 형조참판에 기용되어 이듬해 형조판서에 승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였다. 1443년 중추원지사 ·제조를 거쳐, 1445년 우참찬 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찬진(撰進)하였다.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田品)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하였고, 뒤에 공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452년(문종 2)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우의정이 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 1) 영의정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58년 공신연(功臣宴)에서 불서(佛書) 간행을 반대하여 부여(扶餘)에 부처(付處)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다시 부원군이 되고, 1465년 궤장(几杖)을 받았다. 1468년(예종 즉위년)남이(南怡)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1470년(성종 1)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천문 ·역법(曆法) ·아악 등에 관한 책을 많이 편찬하였다. 문집에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고, 편저로 《고려사(高麗史)》 《역대역법(歷代曆法)》 《역대병요(歷代兵要)》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이 있다. 2006/01/23 12:12:29  
풀뿌리 신숙주 [申叔舟, 1417~1475]
본관 고령(高靈). 자 범옹(泛翁), 호 보한재(保閑齋)·희현당(希賢堂). 시호 문충(文忠). 1439년(세종 21)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집현전(集賢殿) 부수찬을 역임, 1443년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응교(應敎)에 특진하고 부제학 등을 거쳐,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참여, 정난공신 2등이 되었다. 1454년(단종 2) 도승지에 오르고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고, 이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판서·우찬성·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고 1459년 좌의정에 승진,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江原咸吉道都體察使)로서 모련위(毛憐衛)의 야인(野人)을 정벌, 1462년(세조 8)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 즉위 후 원상(院相)이 되었고, 이해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좌하여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채록,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로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정운(東國正韻)》 《국조보감(國朝寶鑑)》 《세조실록(世祖實錄)》 《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撰修)했다.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학자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보한재집(保閑齋集)》 《북정록(北征錄)》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이 있다. 2006/01/23 12:15:53  
풀뿌리 정도전 [鄭道傳, 1337~1398]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국사(高麗國史) 》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2006/01/23 12:16:58  
풀뿌리 최만리 [崔萬理, ?~?]
본관 해주(海州), 자 자명(子明), 호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어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하였다. 1427년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37년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고 1439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1444년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또한 환관(宦官)의 사모착용(紗帽着用)이 고제(古制)에 어긋남을 지적, 중국의 제도에 따르도록 주장하여 이를 시행하게도 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꼽히는 인물이다. 2006/01/23 12:18:53  
풀뿌리 黃瓚 황찬
요동(遼東)에 귀양 왔던 명(明)나라 초엽(初葉)의 한림학사(翰林學士)ㆍ음운학자(音韻學者). 조선(朝鮮) 시대(時代) 4대 세종(世宗)은 훈민정음을 창제(創製)할 때에 음운(音韻)을 묻기 위하여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 등(等)으로 하여금 13차례나 방문하게 하였음. 2006/01/23 12:21:22  
풀뿌리 신경준 [申景濬, 1712~1781]
본관 고령(高靈). 자 순민(舜民). 호 여암(旅庵).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휘릉별검(徽陵別檢) ·전적(典籍), 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장연(長淵)현감 ·헌납(獻納) ·사간(司諫)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다. 17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 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2006/01/23 12:23:21  
풀뿌리 이덕무 [李德懋, 1741~1793]
본관 전주(全州). 자 무관(懋官). 호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정종(定宗)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중국 여행 기회를 얻어 청나라의 문사들과 교류하고 돌아왔으며,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명나라 유민(遺民)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 십여 종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 등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光葵)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다.  2006/01/23 12:25:13  
풀뿌리 빙하시대 [氷河時代, ice age]
지질시대(地質時代)에 지구상이 한랭하게 되어 넓은 지역에 걸쳐 빙하에 덮인 시기. 빙하의 침식작용(浸蝕作用)에는 굴기(掘起)와 연마(硏磨)에 의하여 골짜기 전면에 카르(Kar:圈谷), 유로에 U자곡(산 빙하)이나 파상지형(빙상)을 만들며, 흔히 바위조각이나 기반암에 찰흔을 만든다. 빙하 말단부에는 분급작용을 받지 않은 표력(漂礫)에서 점토에 이르는 쇄설물이 섞인 빙퇴석(氷堆石:漂礫土)이 형성되며 하류에는 융빙수의 영력(營力)으로 운반 퇴적된 융빙수류 퇴적물이 분포한다. 이러한 퇴적물이 알프스지방에서는 현재의 빙하 말단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으며, 또 중 ·북부 유럽에도 널리 산재하는 사실로부터 1821∼1829년 I.페네디텐은 알프스빙하가 확대한 시기가 있었다고 제안하였다. 같은 무렵 J.에스마르크, A.베른하르디 등도 같은 주장을 하였으나 세상의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그러나 1838년 L.아가시가 대빙하시대를 주장함에 이르러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되었다. 또 표력토가 고결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암석이 여러 지역의 오래된 지층 속에서 발견되어 빙하시대는 오랜 지질시대에도 있었다는 인식이 퍼졌다. A.펭크와 E.브뤼크너는 뮌헨 남부의 도나우강 상류지방에 분포하는 빙퇴석이나 융빙수류 퇴적물을 그 분포 고도, 침식도 그 사이에 개재하는 토양이나 뢰스(Löß:황토)의 특성 등을 단서로 하여, 1909년 고피복암층 ·신피복암층 ·고위단구역층 ·저위단구역층으로 구분하고, 이들 역층에 의하여 대표되는 빙기(氷期)를 각각 귄츠 ·민델 ·리스 ·뷔름이라고 이름붙였다. 이들 빙기 사이에는 빙하가 후퇴한 시기, 즉 온난한 간빙기(間氷期)가 있었다. 또 대부분 빙기는 온화한 아간빙기(亞間氷期)와 아빙기로 나누어진다. 그 후 귄츠빙기 앞에 도나우빙기가 있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알프스의 산빙하 퇴적물에 의한 빙하기 편년은 북유럽이나 북아메리카의 빙상에 기초를 두는 편년과는 서로 대비된다. 제4기의 빙하가 북반구에만 편재하는 사실은 주목을 받고 있다. 오랜 지질시대의 것이라고 제안된 빙하시대 중 석탄기(石炭紀)에서 페름기의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한다. 석탄기 전반에는 북반구에서 북위 20∼60°에 걸쳐 산호초가 발달하였는데, 세계는 거의 균일하게 이러한 난기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석탄기 후반에는 남북 양반구의 기후가 대조적으로 되었다. 북반구에서는 난대강우림형의 식생이 해퇴(海退)로 확장된 육지를 덮었고, 한반도 근해나 북아메리카 동부 등에도 부분적으로 산호초를 만들었는데, 남반구에서는 기온이 점차 저하하였고, 수목의 나이테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기후의 계절적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2006/01/23 13:08:02  
풀뿌리 페름기의 북반구는 건조기후에 지배되었고 적색암층이나 암염 등이 퇴적된 데 대하여, 남반구에서는 표력토가 고화한 표석점토암(tillite)이 있어서 빙하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표석점토암은 몇 층으로 되어 있고 보통의 지층에 개재하며, 여기에도 빙기와 간빙기가 교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석점토층에 접하는 지층으로부터는 글로소프테리스(Glossopteris) 식물군이 산출되며, 이것은 잎의 기능 형태로부터 냉량기후에 적응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당시의 남반구의 대륙인 곤드와나대륙에서 빙상(氷床)이 가장 발달한 시기는 석탄기 말에서 페름기 초이며, 2600만km2 이상의 넓이를 차지하였다고 계산되었다. 쿠치칭 ·휴런 ·알고키안 ·캄브리아기 초기, 데본기 등에 빙하시대가 존재했다는 것은 표석점토암, 찰흔이 있는 역석, 줄무늬 슬레이트(점탄암) 등에 바탕을 두고 제창되지만 대부분은 불확실하다. 2006/01/23
풀뿌리 빙기 [氷期, glacial age]
빙하시대(지질시대, 地質時代, geologic age, 현재 절대연령으로 측정된 지각 중 가장 오랜 암석이 38억 5000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지질시대는 약 40억 년으로 추정된다. 지구의 탄생에서 지질시대 이전까지의 시기는 원시시대(原始時代)라고 하며, 이 시기의 지구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른 천체의 상황과 운석(隕石) 등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추론한다. 지구는 형성 초기에 수많은 운석들이 뭉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해석된다. 원시지구는 비교적 낮은 온도를 유지하였으나 이들 속에 함유된 방사선물질(放射線物質)의 붕괴로 발생한 열 때문에 점차 온도가 올라가고, 이로 인하여 구성물질의 부분적인 융해가 일어나, 규산염과 같은 가벼운 물질은 상승하여 지각을 이루고, 철 ·니켈과 같은 무거운 물질은 중심부로 침강하여 핵(核)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본다. 지각은 형성된 후 40억 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거듭했고, 해양과 대기(大氣)의 성분도 크게 변했으며, 30억 년 이전에 출현한 것으로 보이는 지구상의 생물들은 점차 진화하여 인류와 그 밖의 고등동식물로 발전되었다. 이와 같은 지각 ·해양 및 대기의 변천사와 생물의 진화는 지각을 형성하고 있는 암석 속에 기록되어 있으며, 지구의 역사는 이 기록을 과학적으로 해명함으로써 밝혀진다.]의 제4기 홍적세) 중 특히 세계적으로 기후가 한랭하게 되어 고위도지방이나 높은 산악지대에 빙하가 발달하였던 시기. 빙하기라고도 한다. 빙기와 빙기 사이에는 기후가 온난하였는데 이 시기를 간빙기[間氷期, interglacial epoch, 빙기(氷期)와 다음 빙기 사이에 있는 기간. 지질시대 말기의 제4기 홍적세는 빙하시대라고 불리듯이 지구상의 육지의 많은 부분이 빙하에 덮였다. 그러나 빙하시대 전 기간 동안 내내 한랭한 기후만 계속된 것이 아니라, 한난의 고기후(古氣侯)의 변화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었다. 간빙기는 전후의 빙기에 비해서 비교적 온난한 기후가 상대적으로 오래 계속된 시기로서, 빙기에 저위도(低緯度) 지방에까지 발달해 있던 빙하가 이 시기에는 고위도 지방으로 후퇴 ·축소되어 뒤에 이탄지나 호소(湖沼)를 남겼으며, 빙기에는 빙상(氷床) 주변의 툰드라였던 지역이 온대림으로 뒤덮였다. 기후가 온난해지자 화학적 풍화가 진행되어, 빙성퇴적물(氷成堆積物)의 표층부에 토양화가 일어났고, 융빙(融氷)에 의한 해수량의 증가로 세계적인 범위에서 해진(進)이 있었으며, 각지에서 현재의 해안 부근에 해성층(海成層)을 남겼다. 간빙기는 빙하시대에 3∼4회 이상이 인정되고 있는데, 전후 빙기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다. 유럽의 알프스 지방에서는 오래된 것부터 귄츠민델 간빙기(제1간빙기), 민델리스 간빙기(제2간빙기), 리스뷔름 간빙기(제3간빙기)가 알려져 있다. 간빙기의 기온은 현재와 같거나 현재보다 따뜻한 편이었으므로, 현재는 제4간빙기에 해당되며, 장차 5번째의 빙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라고 한다. 빙하시대에는 4차례의 빙기가 있었는데, 오래된 것부터 귄츠빙기·민델빙기·리스빙기·뷔름빙기라고 한다.  2006/01/23 13:15:50  
풀뿌리 미싱링크 [missing link]
잃어버린 고리 또는 멸실환(滅失環)이라고도 한다. 생물이 진화해온 경로를 현존하는 생물 및 화석으로 연구할 경우, 큰 종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작은 종류 사이에는 작은 간극이 있고 결여된 곳이 있어서 완전한 생물의 계통도를 증명하기가 곤란하다. 즉, 진화 계열의 중간에 해당하는 종류가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데도 화석으로 발견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것에 해당하는 화석의 발견은 진화학상 또는 분류학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서, 양서류 화석의 일종인 견두류(堅頭類)는 어류와 양서류 또는 양서류와 파충류의 중간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또, 시조새는 가장 오래 된 새의 화석으로 다른 예인데, 조류와 파충류의 중간형인 원시조(原始鳥:날개를 가진 파충류)의 화석은 발견되지 않은 미싱링크이다. 2006/01/23 13:42:04  
풀뿌리 시황제 [始皇帝, BC 259~BC 210]
성 영(嬴). 이름 정(政). 조(趙)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 ?~BC 235, 원래 양책(陽翟:河南)의 대상인(大商人)으로 조(趙)나라의 한단(邯鄲)으로 갔을 때, 진나라의 서공자(庶公子)로 볼모로 잡혀 있는 자초(子楚)를 도왔다. 그의 도움으로 귀국한 자초는 왕위에 올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 공로에 의해 그는 승상(丞相)이 되어 문신후(文信侯)에 봉하여졌다. 장양왕이 죽은 뒤 《사기(史記)》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정(政:始皇帝)이 왕위에 올랐다. 최고의 상국(相國)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중용되었으나, 태후(太后:진시황의 모후)의 밀통사건에 연루되어 상국에서 파면, 압박에 못이겨 마침내 자살하였다. 전국 말기의 귀중한 사료인 《여씨춘추(呂氏春秋)》는 그가 식객들을 시켜 편찬한 것이다.]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2006/01/24 13:54:38  
풀뿌리 분서갱유 [焚書坑儒]
책을 불태우고 학자를 생매장한 일. 본래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지만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는데, 시황(始皇) 34년(BC 213년) 유생이 진제국의 철저한 군현제 강행을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기 이외의 사서는 모두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수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되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하는데 실패한 방사(方士)들이 달아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던 것도 사실이라면, 분서갱유가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2006/01/24 13:56:17  
풀뿌리 제4기[第四紀, Quarternary Period]
지질시대의 구분에서 신생대[新生代, Cenozoic Era, 지금으로부터 약 6500만 년 전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을 말한다. 1841년 J.필립스가 명명하였다. 오랜 것부터 제3기와 제4기의 2기로 구분되며, 제4기는 약 180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중생대에 번영하였던 두족류인 암모나이트류나 파충류인 공룡류 등은 절멸되었고, 이들을 대신하여 포유류 ·조류 ·경골어류 등이 본대에서 번성하였다. 한편 해서(海棲) 무척추동물로는 유공충, 부족류나 복족류 등이 표준화석으로 많이 등장한다. 포유류로는 말 ·코끼리 ·코뿔소 등의 선조가 발전하였으며, 원시식충류로부터 진화된 영장류에서 인류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식물에서는 속씨식물 등이 뚜렷한 번식을 하였다. 현재 세계의 해륙분포는 신생대 초기에 범세계적으로 활동한 알프스조산운동의 결과이며, 히말라야 ·알프스 등의 대산맥도 이때 형성되었다. 제4기는 빙하시대(氷河時代)라고도 하며 주기적으로 4번에 걸쳐 빙기가 있었다.]마지막 기(紀). 지질시대 가운데 현세와 가장 가까운 기(紀)로 약 20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홍적세(洪積世:Pleistocene Epoch, 플라이스토세, 플라이스토세·갱신세(更新世)·최신세(最新世)라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에 시작되어 약 1만 년에 끝났으며, 이 세 기간 중에 4회 또는 6회의 빙기(氷期)와 이들 사이에 간빙기(間氷期)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 세를 대빙하기라고도 한다. 빙기에는 남·북반구의 고위도지방이나 저위도지방의 높은 산악지대에 많은 얼음층이 쌓였던 까닭에 해수면이 하강하였으며, 간빙기에는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지구상의 동식물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화산활동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인류의 조상이 나타나기도 한 시대이다. 한국의 각처에 발달하는 하안단구층(河岸段丘層)은 이 시기의 지층에 해당되며 제주도의 사구층이나 고산지층은 이에 해당된다.)와 충적세(沖積世:전체주의Alluvial Epoch, 홀로세(Holocene Epoch)·현세(現世)라고도 한다. 주(主)뷔름아빙기(亞氷期) 후 기후는 한온(寒溫)의 작은 기복을 되풀이하면서 차차 따뜻해졌다. 전에 대륙빙하로 덮여 있던 지역에서 최후의 툰드라상(相)이 개림지상(開林地相)으로 변한 오늘날로부터 약 1만 300년 전이 홍적세와 충적세의 경계가 된다. 충적세에 들어와서 기후는 더욱 더워졌으며, 그에 따라 융빙(融氷) 때문에 해면이 상승했다. 충적세 중기가 해면상승의 극한이다. 그 이후에는 작은 기복을 나타내면서 기후가 냉량하게 되어 갔고, 해면도 강하했다. 이 해면변화에 대응해서 현세의 충적층은 해진의 이질층(泥質層)과 그 위아래의 사질층(砂質層)의 3부분으로 나뉜다. 인류는 충적세 초기에 농경을 시작했으며, 그뒤 급격히 문화를 발달시켜 나갔다.)로 나뉜다. 마지막 빙하시대가 존재했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형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인류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제4기는 중요한 시대이다.  2006/01/24 14:12:19  
풀뿌리 구석기시대 [舊石器時代, Paleolithic Age]
19세기 초반 덴마크의 C.J.톰센이 인류의 과거를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나눈 삼시대법을 창안한 뒤, 영국의 J.러벅이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로 세분하여 구석기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는 인류가 최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때부터 토기 등장과 농경 시작으로 특징지워진 신석기시대 이전의 시기를 일컫는 말이며, 지질학적 시대로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와 충적세의 경계, 즉 약 1만 년 전을 그 종료시점으로 설정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전통이 홍적세가 끝난 뒤 충적세의 초창기까지 지속된 시기를 중석기시대로 표현하기도 하나, 모든 지역에서 중석기시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그 문화 내용 역시 구석기시대와 구분하기 어려운 곳이 많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 시기를 구석기시대에 포함시키거나 후(後)구석기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은 뗀석기[打製石器]인데, 석기제작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각 시기의 경계에 대한 정의는 지역에 따라 일정하지 않은데, 세 시기의 구분중 가장 알려진 기준은 유럽 서남부에서 정의된 것으로서, 여기에서도 이를 따르도록 한다.  2006/01/24 14:20:31  
풀뿌리 중석기시대 [中石器時代, Mesolithic Age]
이것은 유라시아에 관하여만 사용되는 시대 개념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제외)의 고고학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고고학의 연구자는 석기시대를 3분하여 그 중간시대를 중간석기시대(Middle Stone Age)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과 중석기시대와는 내용을 달리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혼동해서는 안 된다. 중석기시대라는 용어는 1909년, 프랑스의 J.모르강이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는 문화 내용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므로,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 말기 현상으로 파악하여 아구석기시대(亞舊石器時代:Epipalaeolithic Age)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석기시대 문화의 특징은 인류생활이 수렵 ·어로 ·채취 등 획득 경제에 의존했다는 점과 그 문화가 해빙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의 석기는 거의 고타(敲打) ·훼고(喙敲)에 의해 제작되었으므로, 아직 간석기는 나타나지 않았고, 토기는 정체된 중석기문화에서만 제작 ·사용되었다. 중석기문화는 극북(極北)지대를 제외한 유럽 ·북아프리카 ·오리엔트 ·중앙아시아, 부분적으로는 인도와 일본 열도 등지에서 확인되는데, 그것은 잔석기문화와 조석기(粗石器)문화로 대별된다. 잔석기문화는 잔석기(microlith)를 주요한 석기로 하는 문화이지만, 이 잔석기는 단지 세형(細形)으로 된 석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형태를 미리 예상하며 몸돌로부터 떼어 낸 작은 돌날[石刃]이나 박편된 것을 그대로 혹은 표면 일부 측면을 약간 다듬어 손질을 한 석기도 포함되어 있다. 가장 전통적인 잔석기문화는 잔석기 중에서도 세조기(細彫器)를 수반하는 문화이며, 이 문화는 주로 수렵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의 문화였다. 조석기문화는 타제석부(打製石斧), 돌망치 등 조잡하고 큰 석기를 수반하며, 식물 재배, 어로 채집, 특히 패류(貝類)의 채집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의 문화로, 조개더미를 남기기도 하였다. 잔석기문화권에서는 수렵을 돕기 위하여 개가 사육되었다. 가장 선진적인 것은 이란 서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아나톨리아 남부 ·팔레스티나 등으로, 그 곳에서는 BC 9000년경에 석기의 마제법이 고안되었다. 또, 거의 같은 시기에 곡식 재배와 염소 ·양 등의 사육도 시작되어 생산 경제를 주로 하는 신석기시대로의 이행(移行)이 엿보인다. 그러나 기타 지역에서의 중석기문화는 BC 3000년경까지 지속된 곳도 있고, 곳에 따라서는 더 오래 정체되기도 하였다. 2006/01/24 14:36:01  
풀뿌리 신석기시대 [新石器時代, New Stone(Neolithic) Age]
구석기 ·중석기 시대에 이어지며 금속기시대에 선행한다. 약 1만 년 전, 즉 지질학상 홀로세(世)인 제4빙기가 끝난 후빙기(後氷期)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산경제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 등 2가지를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는, 식량을 채집하고 뗀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던 구석기 단계에서 벗어나 인류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나 자연을 이용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동시에 인류는 정착 ·촌락 생활이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문명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기술이 진보하여 식량을 저장하거나 익혀 먹기 위한 용기로서 토기가 발명되었고, 농경 ·수렵 ·벌채용의 도구로 간석기[磨製石器]가 사용되었다. 바구니 제작, 방직기술이 나타났고, 생산력 증가와 인구 증가에 따라 촌락을 만들게 되어 원시적 건축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농경의 발달로 풍요를 비는 지모신(地母神) 신앙, 사체 매장을 위한 장례방식 등, 정신면의 발달도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말기에는 지역에 따라 자연동(自然銅)을 사용, 도구를 만들게 되어 금석병용(金石倂用) 시기로 접어든 곳도 있었는데, 이러한 신석기시대의 생산경제는 이후 고대 도시문명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종전에는 토기와 간석기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농경단계에 들어와서도 토기가 사용되지 않은 이라크의 자르모 문화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토기 사용이 반드시 신석기 경제단계와 일치된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는 고고학적으로 특정 시기를 지칭하기보다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의미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농경 ·목축에 의한 생산경제 단계를 이룩한 서남아시아 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선무늬토기[線文土器]문화라 하여 ‘신석기 A군(群)문화’라 부르는 데 대하여, 서남아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시베리아 ·몽골 ·만주 ·한국 북부 등지로 연결되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문화 지역은 아직 농경 ·목축의 생산단계로 들어가지 않고 채집 ·수렵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삼은 이른바 획득경제단계에 있었다. 이 지역은 서남아시아 선진 신석기문화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농경 ·목축이 부적당하여 성격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문화를 ‘신석기 B군(群)문화’라 부른다. 2006/01/24 14:37:40  
풀뿌리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Bronze Age]
청동의 야금술(冶金術)이 알려지고, 그에 따라 이기 등의 기구(器具)가 제작·사용되면서도 아직 철의 야금술이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를 말한다. 구대륙의 선진문화권에서는 동기(銅器)시대에 뒤따르고 철기시대에 선행한다. C.J.톰센이 1836년에 제창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청동기시대의 설정에 반대하는 학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주된 반대 이유는, ① 문화의 정도가 높으면서도 원료, 특히 주석(朱錫)이 없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에는 들지 못했던 사회가 있었던 점, ② 원료인 동(銅)이나 주석 산지와 그 산출량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청동기 제품은 상층계급의 무기와 장신구를 볼 수 있을 뿐, 사회 전반에 보급되지 않았고, 생산용구로도 채용되지 않았으므로 청동이 가지는 사회경제사적 의의가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는 점, ③ 원광석에 포함되어 있던 주석이 제련법의 미숙으로 그대로 남아 있어 의도와는 다른 청동기가 만들어져, 그것과 합금술로써 제작된 참된 청동기와의 구별이 곤란한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 특히 ①은 가장 유력한 반대 이유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은 제4왕조 이래 청동을 알고는 있었으나 주석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12왕조 무렵까지 청동기를 만들지 못했다. 제4왕조에서 제12왕조에 걸친 이집트 문화는 북유럽 기타 여러 지역의 청동기문화나 철기문화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 또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제18왕조의 이집트문화는, 이 또한 여러 지역의 철기문화보다 정도가 높았다. 요컨대 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라 함은 지극히 기술사적(技術史的)인 시대구분이어서, 정치 ·경제 ·사회 ·정신문화의 전반을 고려하여 이루어지는 일반사적인 시대구분으로서는 적절하지가 않다. 그러나 문화발전의 양상이 확실치 않은 문화권을 연구할 경우에는 우선 3시기법에 따라 시대구분을 시도하는 것이 편리하다. 즉, 그 한정된 능력 내지 역할을 이해한 다음에 청동기시대라고 하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006/01/24 14:41:01  
풀뿌리 청동기시대의 고분
청동기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고인돌·돌널무덤·독무덤[甕棺墓]·움무덤[土壙墓] 등이 새로 들어와 초기철기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 중 가장 특징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과 일본 규슈[九州], 중국 랴오둥반도 등에 퍼져 있으나 한반도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고 있다. 서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이들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과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무덤형식인 듯하다. 고인돌은 주검의 위치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뉜다. 판돌[板石]로 땅 위에 네모난 방을 만들어 주검을 넣고 그 위에 크고 넓은 돌을 얹은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北方式)과, 땅 밑에 판돌 및 깬돌[割石]로 널을 만들어 주검을 넣은 뒤 굄돌[支石] 또는 돌무지 위에 덮개돌을 덮은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대표적인 출토지의 지명을 따라 전자를 오덕리형고인돌, 후자를 침촌리형고인돌이라고 부른다. 고인돌에는 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丹陶磨硏土器]·반달돌칼·돌검·돌살촉이 묻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파형동검을 부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청동제품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돌널무덤은 지하에 판돌 ·깬돌로 널[棺]을 만들고 판돌 및 나무판자로 뚜껑을 덮은 것으로, 대개 북방 시베리아 계통의 무덤 양식으로 보고 있다. 봉분(封墳)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지역과 묻힌 자의 신분에 따라 형식과 껴묻거리의 양이 다르다. 여기에는 돌검·돌살촉·민무늬토기·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출토되며, 간혹 청동기도 함께 나온다. 충남 일대에서 발견되는 돌널무덤은 깬돌로 널을 만들고 구덩이의 윗부분을 돌로 채우는 특이한 형식으로, 한국식동검을 비롯한 청동거울, 각종 의기(儀器), 덧띠[粘土帶]토기,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어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부여·공주 일대에서는 이 시대의 독무덤도 나오는데, 바닥에 구멍을 뚫은 일상용 토기를 바로 세워 묻고 아가리를 판돌로 덮은 형식이다. 2006/01/24 14:41:47  
풀뿌리 철기시대 [鐵器時代, Iron Age]
이 시대는 청동야금술(靑銅冶金術)뿐만 아니라 철의 야금술이 발명 ·보급되어, 이기가 철로 제작된 시대를 말한다. 원자력이 사용되는 오늘날에도 철이 주요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넓은 의미의 철기시대는 현대도 포함되나, 일반적인 고고학적 의미의 철기시대는 철의 야금술이 알려진 시대를 의미하고 있다. 신대륙에서는 고도의 고대문화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구대륙에서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구대륙 모두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행된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는 신석기시대가 오래 지속되었다가 직접 철기시대로 이행한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이집트는 제외)이다. 이것은 청동야금술 전파의 지체, 구리나 주석 산지(産地)의 제한성, 또는 이 지역 주민들이 구체제에 만족하고 기술적 혁신에 대한 관심이 적었거나, 문화적 수준이 청동야금술을 받아들일 정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구분은 지극히 기술사적(技術史的)인 시대구분이다. 철의 야금술의 존재는 철기와 쇠똥(슬래그), 목제품에 보이는 철제의 흔적 등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즉물적(卽物的)으로 내보일 수 있는 점에서 철기시대란, 유물 ·유적을 다루는 고고학자들에게는 편리한 시대구분이다. 그러나 기술사적 시대구분은, 문화 전반을 파악한 뒤의 시대구분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원고사(遠古史) 서술에서 고고학자 자신도 ‘철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점차 감소되고 있다. 2006/01/24 14:44:23  
풀뿌리

뗀석기 [打製石器(타제석기), chipped stone implement]
자연석에 물리적 타격을 가하여 형태를 다듬어 만든 석기. 가공하고자 하는 돌에 직접 타격을 가하거나, 다른 물체를 놓고 힘을 간접적으로 전달하여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 제작된다. 인류의 구석기시대 전기간에 걸쳐서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뗀석기는 원석에 타격을 가해 쓸모없는 격지[剝片]를 떼어낸 다음 원석(原石)을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 몸돌석기[石核石器]와, 타격으로 떨어져 나간 격지를 손질해 만든 격지석기[剝片石器]로 나눌 수 있다. 석기를 제작하는 데에는 원석에 타격을 가하는 방법에 따라 직접떼기와 간접떼기로 나뉜다. 직접떼기는 원석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망치를 돌로 쓰느냐 아니냐에 따라 하드해머(hard hammer)기법과 소프트해머(soft hammer)기법으로 나뉜다. 전자는 망치로서 돌을 이용하는 기법이며, 후자는 원석보다 경도가 약한 나무나 뿔, 뼈 등을 망치로 이용하는 기법이다. 소프트해머기법은 형태를 보다 원하는 꼴로 다듬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며, 전기구석기시대 말부터 보편화되었다. 간접떼기는 원석에 직접 타격을 가하지 않고 다른 물체를 원석에 대고 타격하는 것으로서, 원하는 형태의 격지를 보다 용이하게 얻을 수 있다. 이 밖에도 돌에 타격을 가하지 않고 다른 물체를 댄 후 눌러서 격지를 얻는 눌러떼기 기법도 넓은 의미에서 뗀석기 제작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밖에 돌을 단단한 물체에 던져서 깨뜨리는 던져떼기방법도 있다. . 2006/01/24 14:46:59 

풀뿌리 뗀석기는 이러한 여러 기술이 발전하며 보다 정제된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석기 발전의 역사는 주어진 석재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인류 최초의 석기공작인 올두바이 공작에서는 주로 하드해머를 통한 직접떼기로 석기를 제작하였으나, 호모 에렉투스의 단계에서는 소프트해머를 이용한 제작기법과 르발루아기법(Levallois technique)이라고 하는 기술이 등장하여 도구제작상의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르발루아기법은 소위 ‘준비된 몸돌(prepared core)’을 이용한 석기제작 기술이다. 이전까지의 석기 제작에서는 원석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날의 길이와 형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데 비해, 준비된 몸돌기법은 본격적 석기제작에 앞서 몸돌을 미리 특정 형태로 제작한 다음 여기에서 일정한 형태의 격지를 계속 떼어내, 이것을 가공하여 원하는 석기를 만드는 방법이다. 몇 단계의 연속적인 도구 제작과정을 통해 정형화된 형태의 도구를 만들 수 있게 한 이 방법은 아마도 인류 최초의 대량생산기술이라고 부를 만한 중요한 기술사상의 전기를 가져왔다. 눌러떼기는 현생인류가 등장한 이후 널리 보급되었다. 직접떼기 ·간접떼기가 원석에 순간적인 타격(打擊)을 가하여 격지를 얻기 때문에 격지를 일정한 크기 이하로는 얻을 수 없지만, 눌러떼기는 극히 제한된 면적에 서서히 힘을 가함으로써 아주 작은 크기의 격지도 원하는 형태대로 떼낼 수 있는 방법으로, 보다 작고 정교하며 전문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석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신석기시대 이후에도 제작이 손쉬운 뗀석기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신석기시대 돌도끼는 거의 전부가 완전뗀석기거나 또는 부분을 간 뗀석기이며, 청동기시대에도 뗀석기는 각종 목적에 널리 사용되었다 2006/01/24 14:47:07  
풀뿌리 간석기 [磨製石器(마제석기)]
마제석기라고도 한다. 돌의 전면을 갈아 만든 것이 많지만, 연대가 오래된 것 중에는 필요한 부분만 갈아 만든 것도 적지 않다. 주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간석기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유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지역에 따라 최초의 사용시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유럽이나 서남아시아 ·일본 등지에서는 신석기시대 이전의 중석기시대에 이미 간석기를 사용한 예가 확인되고 있으며, 반면에 시베리아의 환북극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에도 중석기시대의 잔석기[細石器]와 뗀석기[打製石器]가 계속 쓰이나 간석기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BC 5000년경의 신석기시대 전기의 유적으로 알려진 양양(襄陽) 오산리(鰲山里) 유적에서부터 낚싯바늘, 돌칼 등의 간석기가 출토되고 있다. BC 4000∼3000년경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평남 온천군 궁산리(弓山里), 대동군 청호리(淸湖里),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智塔里), 함북 웅기군 서포항(西浦項), 서울 암사동(岩寺洞),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渼沙里) 등의 유적에서도 돌괭이 ·돌도끼 ·돌창 ·돌낫 ·돌화살촉 ·갈돌 등의 다양한 간석기가 출토되었다. 한국에서 간석기가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농경이 주된 생계수단이 된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였다. 이 시기의 간석기는 종류가 보다 다양해지고, 형태도 정형화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간석기로는, 돌도끼 ·홈자귀[有溝石斧] ·턱자귀[有段石斧] ·자귀 ·끌 등의 목공구와 괭이 ·호미 ·가래 ·낫 ·반달돌칼[半月形石刀] ·갈돌 등의 농구, 돌화살촉 ·돌창 ·돌검 ·그물추등의 사냥 및 어로용구, 바늘 ·가락바퀴 ·숫돌 등의 일상생활용품, 톱니날도끼[多頭石斧] ·바퀴날도끼[環狀石斧] 등 공동체 수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구(儀禮用具)가 있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간석기문화는 중국이나 북방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신석기시대의 간석기문화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간석기는 BC 400년경 이후 중국 둥베이[東北]지방과 한반도 서북부지방에서부터 새로운 도구로서 각종 철기가 보급됨에 따라 점차 쇠퇴하기 시작, 철기가 한반도 남부지방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는 서기 3∼400년경에는 마침내 주된 생산 및 생활도구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2006/01/24 14:48:56  
풀뿌리 애니미즘 [animism]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 물신숭배(物神崇拜) ·영혼신앙(靈魂信仰) 또는 만유정령설(萬有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되는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아니마(영혼)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가 《원시문화》(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야만인의 철학’으로써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종교의 근본원리가 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타일러에 의하면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추리되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령 잠자고 있는 동안 몸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도 멀리 떠나 있는 꿈을 꾼다거나, 또는 죽음 직후에는 외관상 아무 변화는 없으나 살아 있을 때의 상태와는 다른 것을 느낀다. 그래서 육체와 유리되어 활동하는 원리, 즉 영혼을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수면과 가사(假死)는 영혼의 일시적 부재(不在)상태이며, 죽음은 그 영원한 부재상태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영혼은 독립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숭배하는 데서 종교가 비롯되었으며, 동물이나 나아가서는 자연물에까지 영혼을 인정함으로써 신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같은 타일러의 학설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한 원시인에게서 꿈이 그처럼 중대한 경험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논란도 있었으나, 이원론(二元論)의 사고양식을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아직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보통 사람이 넋을 잃으면 질병에 걸리거나 죽는다고 믿는데, 무당이 행하는 병치료법은 그같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어 환자의 육체에 되돌려주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오 사회에서는, 인간과 특정의 동물이 넋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신앙을 흔히 보게 되는데, 그 상대 동물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믿고 있다.  2006/01/25 11:51:18  
풀뿌리 토테미즘 [totemism]
토템 신앙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체제 및 종교 형태. 토템이라는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브와족(族)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 ·식물류(독수리 ·수달 ·곰 ·메기 ·떡갈나무 등)를 토템이라 하여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이와 같이 인간집단과 동 ·식물 또는 자연물이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집단의 명칭을 그 동 ·식물이나 자연물에서 따붙인 예는 미개민족 사이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토템이라는 말은 이런 유의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 ·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이며,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집단과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 ·의례 ·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토템은 어느 특정 개인에 관계된 수호신이나 초자연력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일이 있어, 이런 입장에서 보는 토테미즘설도 있으나 현재에 와서 이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토템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토템은 본래 집단적 상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집단과 어느 동 ·식물, 자연물과의 결합이 토테미즘이라는 설도 그대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서아프리카의 표인(豹人:leopard men)의 비밀결사에서는 표범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이것과 관계 있는 의식을 행하지만 이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현상이 토테미즘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에 합치되어야 한다. 그 조건 또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집단은 그 집단의 토템의 이름으로 불린다. ②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는 신화 ·전설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다. ③ 토템으로 하고 있는 동 ·식물을 죽이거나 잡아먹는 일은 금기(禁忌)로 하고 있다. ④ 동일 토템 집단 내에서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다. ⑤ 토템에 대해서 집단적 의식을 행한다. 토테미즘은 현재도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멜라네시아 ·인도 등 넓은 범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전에는 남아메리카 ·폴리네시아 ·아프리카 ·북극 에스키모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토테미즘은 J.F.맥레넌의 조직적인 연구에 의해 1870년경부터 학계와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뒤르켐의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 정밀한 연구에 의해서 종교기원론 ·본질론으로서 전개되었으며, 그 후의 조사연구로 여러 가지 측면이나 형태가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토테미즘을 제도적인 주술(呪術), 종교적 현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여러 학문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 실체는 아직 충분히 해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06/01/25 11:5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