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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2 : 한글의 기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3:23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2 : 한글의 기원]

 

  

 

문자의 기원을 찾아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꼽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지폐에까지 등장시키며 지난 독재 정권들이 장기 집권과 무관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주입한 혐의는 있지만, 그 두 인물의 업적을 감소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발명하여 언어 표현과 기록의 바른 길을 열어주었고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어 수 백 척의 왜선을 섬멸시키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임금과 신하, 문과 무의 차이는 있지만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아이디어로 상상을 넘는 변화와 결과를 가져 다 주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발명은 정말 그 두 사람의 머리 속에서 처음 만들어지고 발전된 것일까? 미국의 디자이너 허브 루발린은 모방의 필요성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  “디자인은 일상 속에 편재해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 어느 날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는 보다 많은 것을 관찰하고 머리 속에 그것을 담아두는 데서 시작된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무렵에 이순신에 의해서 고안된 철갑선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헌에는 그보다 200여 년 가까이나 거슬러 올라간 이조 초기에 거북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다른 배가 이를 공격하기 어렵게 견고하다는 이 거북선의 모양과 구조는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거북선이 100% 이순신 장군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은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역시 세종대왕이 문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른 영감에 의해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게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떠오른 아이디어였다면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듯 그렇게 과학적인 문자로 만들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수없이 기나긴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듬어지고 변해 가는 다른 모든 언어와 문자의 발전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기간에 한 사람의 발의와 결단, 그리고 몇 사람의 집념어린 노력에 의해 완벽에 가까운 기능을 가진 문자가 탄생했다는 것이 위대한 것이지 그것이 한 천재의 머리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는 신화적인 것을 우리가 추앙하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한글은 옛 고전(古篆)을 본떠 만들었다는 말이 적혀있다. 문제는 그 고전(古篆)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한자의 해서체처럼 붓의 힘에 따라 획의 굵기가 바뀌는 서체 모양이 아니라 지금의 딱딱한 고딕 모양을 가진 전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글자를 쓰는데 있어서 이렇게 기하학적인 형태를 땄다면 그것은 획의 끝 모양만을 두고 이야기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만들어진 글자는 붓으로 쓰게 마련이고 그렇다면 전자(篆字)의 마무리 형태를 유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획 끝의 모양 따위 보다는 직선적인 전체 구조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한자의 형태에서 가져오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옛날 우리 겨레의 활동 무대가 엄청나게 넓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런 위대한 민족이 글자를 가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 이전의 글자는 모두 한자를 빌려 쓴 것뿐이다. 신라시대에는 온통 우리말을 한자로 적었다. 그 이후로는 오히려 한자말을 많이 섞으면서, 토씨 같은 것만을 한자로 덧붙여 표기하는 수준이 되었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토씨나 어미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한자만으로 우리말을 다 적을 수 없었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처음 훈민정음의 각 낱글자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령 ㄱ, ㅅ, ㄷ이 니은, 리을처럼 기윽, 시읏, 디읃으로 표기되었어야 하지만 이와 같은 소리를 가진 한자를 찾을 수 없었고 우리말에서도 윽, 읏, 읃은 별다른 뜻을 가지지 못해 그 뜻에 해당하는 한자를 가져다 댈 수도 없어 결국 ㄱ은 기역(役)으로 ㅅ은 시옷(衣, 옷을 의미하는 한자)로 ㄷ은 디귿(末, 끝을 의미하는 한자)로 변통하여 적게 되었다. 이에 비하면 일본말은 한자로 모두 표기할 수 있어서 별 어려움 없이 한자를 가져다 쓰게 된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처럼 우리말을 한자로 적기 어려워 갈 길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를 빌려 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길이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 당시 중국 문화에 젖은 지식인들이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 글자를 빌어다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남은 방법은 새 글자를 만드는 것뿐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왜 하필이면 그 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야만 하느냐는 의문이 생기고 이는 최만리 등이 상소문을 통해 주장된 내용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새 글자를 만들기로 한 것은 훈민정음 전문에 잘 표현이 되어 있고, 결국 새로운 글자는 그러한 의도에 따라 음절글자가 아닌 음소 글자가 되는 것은 정해진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세종대왕은 처음 글자를 만들 때 어떤 글자의 모양을 참고했을까? 훈민정음 해례의 설명대로, 발음할 때의 입모양을 처음부터 그리면서 글자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단지 입 모양만 연상했다면 그렇게 간단하고 기하학적인 패턴의 파생보다는 오히려 곡선적인 글자 모양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까? ‘ㄱ’이나 ‘ㄴ’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ㄹ’이나 ‘ㅅ’도 발음할 때의 입 속의 모양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어떤 글자의 모델에 입모양을 결합하는 논리로 글자를 설명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과 그에 따른 몇 가지 한글 글꼴의 원형에 대한 가설들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세종대왕의 치적과 위대함을 훼손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글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자랑삼기보다는 좀더 시야를 넓게 함으로 우리 글의 위상과 특성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로 제기되어 왔다. 이렇게 설이 구구했던 이유는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오기 전까지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세종실록에 「자방고전(字倣古篆:글자는 고전을 본떴다)」이라는 한 구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은 글자 그대로 옛날 한자의 전서체로 보는 고전기원설을 낳았다. 이것은 단지 「전서체의 각이 진 모양(角形)」을 본떴다는 글자의 형태에 국한시킨 견해이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를 닮았다는「범자(梵字)기원설」이다. 조선 성종 때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초, 종성 8자, 중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범자에 기대어 만들었다』주장했다. 그 후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를 본받았다』고 했다.
파스파 문자 기원설이란 것이 있다. 파스파 문자는 훈민정음보다 약 1백70년 앞선 원나라 세조 때 제정된 문자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파스파 문자 기원설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세종께서 한글을 처음 만드실 제 명나라의 학사 황찬이 귀양살이를 하는지라, 성삼문 등을 보내 질문하게 하였는데 13번이나 왕래했다. 이때가 원이 망한 지 겨우 79년이 된 즉,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몽고글자에 대한 지식이었다』. 유희의 『언문지』에서도 한글의 기원이라고 언급되는 파스파 문자는 세종 당시 이미 잘 알려진 창제문자라는 점, 자형이 정사각형이고 특히 「ᄀ ᄃ ᄇ ᄉ」 등의 글자가 비슷한 점, 문자의 구성원리와 운용이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 각종 기원설이 힘을 잃고,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대로 초성의 기본 글자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중성의 기본 자는 천ㆍ 지ㆍ인의 3재(三才)를 본떠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한글의 기원설은 이따금씩 나오고 있다.

 


 


그 중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이 1983년 제기된「가림토 문자설」이다. 가림토 문자 기원설에 따르면, 고려 말기의 학자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3세 단군 가륵이 재위 2년(서기전 2181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해 환웅 천황시절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짐승가죽에 문자화했던 옛 기록을 정리하여 정음 38자의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는데 가림토 문자 38자 속에는 한글 28자가 거의 다 원형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림토’란 사물을 분별하고 뜻을 분명하게 해주는 ‘가림’과 ‘토’를 합친 단어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사실은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라고 한다.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의 일부도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였는데 이들이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 되었고, 놀라운 것은 이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서도 우리가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과 대단히 유사한 문자가 사용되고 있는 것 역시 가림토 문자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국어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문자는 일반적으로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의 단계를 거쳐 표음문자로 발전하는 것이 원칙인데, 수메르상형문자와 이집트상형문자 정도가 존재할 무렵인 BC 2181년에 음소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은 문자학의 상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가림토문자의 출전『단군세기』가 고려시대의 원본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이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가림토 문자 기원설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일본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가 그것이다. 일본 미에현에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700년 전인 1세기쯤에 지어진 일본 최초의 신궁이자 모든 신사의 본종인 '이세신궁'이 있다. 이세신궁에는 외부에 잘 공개하지 않는 보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인들이 '신대문자(아히루 문자)'라고 부르는 문자가 새겨진 거울과 문헌이다. 신대문자란 일본에 한자가 전파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문자인데, 이것의 생김새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과 닮았다. 때문에 과거 일본은 한글이 일본의 신대문자를 베낀 것에 불과하며 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여 신대문자의 정체를 파헤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전면 중단하고 연구 결과를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아마 자신들에게 절대로 불리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 역사 다큐멘터리가 밝힌 바에 의하면, 이 문자는 일본 큐슈 지역의 신사와 비석 등을 중심으로 100 군데 넘게 흔적이 남아있으며 발음도 현재 한글과 유사하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세종실록이나 정인지 해례본에 나오는 옛 전자(篆字)는 한글의 모델이 된 문자가 분명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 '옛 글자'와 한글, 그리고 일본의 신대문자의 관련성은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가림토 문자의 존재가 부정된다면 자칫 한글이 신대문자를 모방했다는 주장을 반박할 근거를 다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림토 문자의 흔적들이 이처럼 일본, 인도, 몽고 등에 풍부하게 남아 단군 조선 시대와 그 영향력을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세종의 치적을 다소 변질시킬 수도 있으나 다른 의미로는 오히려 우리 민족의 문자가 세계사의 가장 오래된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획기적인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림토 문자는 중국에 와서 살던 유태인들의 히브리 문자를 모방한 것이며, 따라서 훈민정음은 이 가림토 문자를 바탕으로 중국 음운학과 히브리 문자. 히브리어 음운학을 참조해서 창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1997년 5월 신동아에 기고한 조철수 서울고전고대문헌연구소 곧문헌담당소장의 주장으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이 본떴다는 고전은 가림토 문자이며 이 가림토 문자는 기원전이 아니라 11-15세기 중국에 와서 집단을 이루어 살던 유태인들의 문자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고 훗날 집현전 학자들이 중국을 여러 번 왕래하며 중국의 성운학을 기준으로 히브리어 음운체계와 비교하여 다시 훈민정음과 그 해례를 만들었다고 가정한다. 중국의 유태인들은 서기 9세기 무렵부터 무역을 위해 서역 길을 따라 중국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공직에 기용되기도 하면서 중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유태교도 중국에 알려지고 그들의 문헌과 성경도 전해졌다. 중국유태인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모음 부호는 ㆍ _ ..| ‥ ∵ 등이고 이는 ㆍ | _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의 모음은 가림토 문자 첫 11개의 부호와 같고 이 모두 히브리어 모음 부호와 기본 구조가 유사하다. 전세계에 알려진 알파벳 모음부호 중 히브리어 모음과 훈민정음 모음처럼 비슷한 것은 없다. 또한 히브리어의 모음부호 ㆍ의 음가는 [o]이며 한글 방점 ㆍ의 음가 역시 [o]와 [a] 사이 정도의 음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한 학자의 주장일 뿐 아직 충분한 증거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평을 받고 있다. 몇 몇 글자의 모양과 모음과의 모아쓰기 등이 매우 유사하고, 당시의 히브리 음운서가 표방하고 있는 후,구개,설,치,순(喉,口蓋,舌,齒,盾)의 5가지의 음운체계가 발음기관을 순서에 따라 후아설치순(喉,牙,舌,齒,盾)으로 설명하는 훈민정음의 제자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글자꼴이 서로 다르고 그 사이의 점진적인 변화의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 주장은 논란의 여지와 연구의 과제를 남긴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이외에도 한글의 기원설로는 서장문자기원설, 고대문자 기원설, 창호상형기원설, 태극사상기원설, 거란여진문자 기원설, 이론 신대문자 기원설, 팔리문자 기원설 등 갖가지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들이 반드시 세종대왕의 치적과 위대함을 깎아 내리는 일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그 중 어느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글꼴의 차용에 대한 부분일 뿐이고 한글의 과학적 원리와 그로 인해 우리말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다. 한글의 우수성은 누누이 강조되어 왔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재산이며 스스로의 얼굴이다. 이것이 정치적인 용도가 아니라면 무조건 영웅적인 위치에 놓여야 할 이유는 없다. 수백 년을 무시되어 왔던 것처럼 또다시 무조건 추앙되는 것 역시 또 다른 실수가 될 수도 있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천지 창조의 순서가 1장과 2장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바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2장에는 오히려 다른 생물들 보다 먼저 창조된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불필요한 이러한 모순된 기록에 대해 무지하거나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머리부터 만나는 이 같은 모순을 피해서 얻는 신앙의 깊이는 과연 얼마나 가치 있고, 신에게 떳떳한 모습일까? 모든 언어는 서서히 세월 속에서 변해 간다. 세종대왕의 뜻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그 모양과 용법을 고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뜻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무책임한 파괴나 실험이 아니라면 문자 변화를 직시하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字倣古篆의 비밀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글자(훈민정음)의 모양은 옛글자 전(古篆)을 본떳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고전(古篆)은 실록의 최만리상소문에서는 고지전문(古之篆文)으로 또 한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에 기록된 정인지서문에 또한번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이 등장합니다.

 

결국 우리역사의 기록속에서 실록과 실록에 기록된 최만리상소문 그리고 해례속의 정인지서문 이 세군데에서 고전(古篆)이란 글자가 등장합니다.

 

도대체 이 고전이란 글자는 뭘까요?

스쳐지나가듯 기록된 이 짤막한 기록때문에 훈민정음의 기원에 관해 중구난방의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해례의 발견후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는줄 알았는데 요즘에 와서는 가림토라 불리는 글자가 훈민정음의 기원을 자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고전(古篆)이란 글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자의 서체에 관해 들을때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라는 다섯가지 형태의 서체에 관해 들어보신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이 중 전서(篆書)를 고전(古篆)이라 합니다. 한자의 초기형태입니다.

조선조때에 이미 고전(古篆)이라 불렀습니다.

강원도 삼척에는 조선 현종때의 대학자인 미수 허목이 세운 '동해척주비'란 비석이 있습니다.

이 비석에 허목의 글씨가 적혀있는데 허목은 당시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란 서체를 완성한 전서의 달인이었습니다.

 

                     

正音에 얽힌 우리 조상들의 어문 궤적(대종언어 연구소)

 

 

단군 때의 正音정음과 세종대왕께서 강조한 正音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신라시대 朴堤上박제상 저『澄心錄징심록』제 1지 符都誌부도지 및 金時習김시습(1435∼1493) 저『징심록추기』에 들어있어 주목된다. 대강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선천의 시대에... 오직 팔려(八呂)의 음만이 하늘로부터 들려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 중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 역시 이 음 중에서 생겨났다... 마고는 궁희와 소희라는 두 딸을 낳아 그들로 하여금 5음7조의 음절을 관장하게 했다...(부도지 제 2장 중에서; 필자 新解)

분거한 여러 족속이 각 주에 당도, 터를 잡은 지 어언 천년이 흘렀다... 제 족속이 이미 정착·거주한 이래 바다와 험한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서로 왕래가 거의 단절되었다...(부도지 제 9장)

황궁씨가 天山주에 도착하여 모든 의혹을 풀고 근본을 회복할 것을 서약하고 많은 이들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실을 증명하는 일에 힘쓸 것을 권하였다. 이에 장자 유인씨에게 명하여 인간세상의 일을 밝히게 하고, 차자·삼자에게는 여러 주를 돌아보게 하였다. 황궁씨는 이에 天山에 들어가 돌처럼 확고부동한 자세로 바르게 조율된 음을 계속해서 널리 알림으로써 인간세상의 의혹되는 부분을 일체의 여지없이 모두 제거하려고 노력한 결과, 기필코 마고대성 회복의 서약을 성취하였다. 이에 유인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으니 이는 곧 천지 본음(本音)의 상으로 그것은 진실로 하나가 근본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유인씨는 천년 치세 후 천부를 자손 환인씨에게 전하고... 환인씨는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인간세상의 진리증명 작업을 대대적으로 행하니... 본성에서 멀어져 괴이하게 된 사람들의 상(相)이 차츰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였다...(제 10장 중에서)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날 때부터 큰 뜻을 품어 천부삼인을 계승하고... 바다에 띄운 배에 올라, 사해를 순방할 새 천부를 비추어 증명함으로써 제족의 신뢰를 구축하고 제족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게 하며 근본을 잊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환웅씨가 돌아와 8음2문을 다스리니... 가히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였다...(제 11장 중에서)

환웅씨가 임검씨를 낳을 당시 세상의 제족은 천부의 이법을 익히지 아니한 결과 스스로 미혹에 빠져 그로 인해 인간세상은 고통스럽게 되었다. 임검씨는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를 닦으며...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널리 사해를 답사하고 제족을 두루 방문하니 백년 사이에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천부에 의거하여 증명함으로써 제족의 신뢰를 쌓고, 의혹해소와 근본회복을 맹서하며 부도 건설을 약속하니, 이는 각 지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소식 두절로 인해 제족의 언어풍속이 점차 변하여 서로 달라지게 된 관계로 함께 모여 화합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법을 익히고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제 12장 중에서)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를 건설할 땅을 고르니 곧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제 13장 중에서)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명이 그곳을 지키고, 나무를 베어 뗏목 8만개를 만들어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떠내려보내 사해 제족을 초청케 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보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박달(朴達)나무 숲에 신시(神市)를 크게 열고 악심을 다스려 마음을 정화한 다음 천상(天象)을 살펴 마고의 계보를 정리하고 그 족속의 근원을 밝힘과 아울러 천부의 음에 준하여 어문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필히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이 통일되고 천하가 하나로 평정되어 인간세상은 크게 화합하였다... (제 14장 중에서)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세상천지가 하나의 이치에서 비롯되었고 인간의 태어남이 한 족속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여 크게 부친과 선조의 도를 발흥시키고 널리 천웅의 법을 행하여 인간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히 하(夏)나라 땅이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이도(異道)가 점점 성하여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부루씨는 천부를 아들 읍루씨에게 전하고 입산하였다. 읍루씨는 나면서부터 대자대비의 바램이 있어 천부 삼인을 이어받았다. 하(夏)족이 도탄에 빠진 것을 애처로이 여기고 진리가 사단(詐端)의 땅에 떨어진 것을 비통해 한 나머지, 마침내 천부를 명지(明地)의 단(壇)에 봉쇄하고 입산하여 근본회복이라는 대원만을 염원하며 백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남아있는 무리들이 대성통곡하였다...

(제 26장 중에서; 이상 필자주

이상은 부도지에 기록된 天符천부 및 그 어음[본음]에 관련된 내용으로 우리 민족의 시발지이자 인류의 시원지인 마고대성에서의 분거 이후, '마고→황궁→유인→환인→환웅→임검→부루→읍루'로 이어지는 수만년 동안의 천부의 전해짐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랜 분거로 인해 본음이 변화한 것을 알고 임검씨를 비롯한 천부의 정통 계승자들이 사해의 족속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천부의 음, 즉 정음에 따라 어문을 정리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그로 인해 어문이 통일되고 천하가 하나로 평정·화합하였다는 내용 등을 보고, 그로부터 수천 년이 흐른 지금 우연히도 어지러워진 세상의 어음을 정리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옛날에 이미 우리 조상들에 의해 그러한 작업이 수 차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남다른 감회와 함께, 그동안 가졌던 몇 가지 사항에 대한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부도지를 보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세계 어문을 정리할 때 어떤 방법으로 정리를 했으며, 또 그 정리한 천부의 정음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복구되지 않은 징심록 중 音信誌음신지, 物名誌물명지, 四海誌사해지 등이 발견된다면 조상들의 작업을 대강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읍루씨에서 그 대가 끊어진 천부의 도는 사해 종주민족인 우리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박제상의『小부도지』및 김시습의『징심록추기』편에는, 천부의 도를 되찾아 그 옛날 마고대성의 지상낙원을 재건설하려는 우리 조상들(박혁거세→왕건→세종 등)의 집념 어린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혁거세씨는 그 성품이 신과 같았고, 슬기는 가히 성인의 경지였다. 또한 어진 왕비 알영을 맞이하니 당시 사람들은 두 사람을 일러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위대한 선조들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천부 소도(小都)를 남태백(南太白)에 건설하였다...

동해에 피하여 산지 천여 년 사이에 제시의 모임을 개최하지 못하여 피차간에 내왕이 오랫동안 두절하고... 제족이 각자 나라를 칭하고 유구한 세월동안 전란을 거듭하니 겨레는 종횡으로 나뉘고 언어는 잡다하게 와전되었다. 천부에 대한 일은 거의 망각하여 혹 사실을 아는 자가 있어도 모두 변형되어 음이 다르니 마랑(馬郞; 모든 것은 하나가 근본임을 설파하기 위해 먼 이국 땅에 파견된 신라의 젊은 사도들의 직명)의 원행은 심히 어렵게 되어 순교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마랑들은 만리타국에서도 충절을 지켜 능히 굳은 의지를 가다듬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여 마침내 사명을 완수하니 그 풍모와 자태는 진실로 호탕하고 영매(英邁)하였다...

고려 왕건 태조는 박제상 공의 종사(宗嗣) 집에 사신을 파견하여 옛적 부도의 일을 상세히 알아내고...

조선시대 세종대왕께서 제위에 올라서는 영해(寧海) 박씨 가문을 매우 정중히 대하고 박제상 공의 문중을 두루 거두었다. 또한 혁거세왕의 능묘를 세우고 공의 종가·차가 두 집에 명하여 서울 반궁(泮宮; 성균관) 부근에 이주케 하며 장로로 하여금 편전에 입시토록 명하여 그 은고(恩顧; 은혜로 보살핌)를 매우 두텁게 하고 차가의 후예 창령공 부자를 불러 등용하였다...

그런즉 영묘(세종대왕)께서 박제상 공 집안 후예를 정중히 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며, 하물며 훈민정음 28자를 박제상 저『징심록』의 기록 중에서 그 근본을 취했으니 더 물어 뭐하겠는가?

― (원문 생략; 필자주)

 

 

이상의 내용, 특히 김시습의 증언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세종대왕께서는『징심록』과『단군세기』등의 고서를 심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내용에 따라 선대의 부도를 재건설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조선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궁내에 正音廳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재창제한 일, 朴堧박연(1378~1458)을 통한 雅樂아악 및 불완전한 악기 調律조율의 정리, 그리고 노예 신분의 蔣英實장영실을 특명으로 발탁, 천문의·혼천의·자격루 등을 제작케 함으로써 과학발전에 힘쓴 일 등은 단순히 그가 성군이었기 때문이 아니라,『징심록』등을 통해 우리 민족이 세계의 종주민족임을 확신하고 제왕으로서 선대의 이상국가[부도]를 재현코자 한데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왕명에 따라 널리 토착음과 변음을 조사해 올렸는데, 이 때의 토착음은 '훈민정음'의 '정음'을 의미하며, 정음은 곧 원음이자 본음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동국정운에 표기된 각 문자에 대한 음은 세종 당시의 국어표준음이 아니라 유사이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우리 종주민족의 정음이자 고음[부도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鐵철의 현대중국음 tie는 물론 고대중국음 tiet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어 steel의 정체를 밝힐 수 없지만, 우리의『동국정운』에 표기된 鐵철의 정음 텰(텷)의 된소리 ㅅ뎔[styoul]만 알고 있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영미인을 붙잡고 steel의 어원을 설명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언어학적으로 사실은 이러저러하다'라고 그들을 교육·감복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체 내에 문제가 있음 또한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 철(鐵)이란 음은 현재는 표준음으로 교육되고 있지만 본음[정음] 텰이 변질된 변음이다. 만약 선대 이래의 정음을 중시하는 세종대왕께서 살아계셨더라면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에 담긴 깊은 뜻을 파악치 못하고 '한글'로 개명하고, 鐵을 텰이 아닌 변음 철로 부르는 우리 후손들을 보고 크게 꾸짖었을 지도 모른다.

앞서『桓檀古記』및『징심록』그리고 세종대왕에 관한 이야기 등에서 알 수 있듯, 우리 민족은 세계인류의 종주로서 예로부터 '變변(邪사)'이 아닌 '正정'을 중시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변형자인 일본의 약자나 중국의 간자를 우리 민족은 생래적으로 탐탁찮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다른 나라들처럼 음을 길게 늘이지 않고 동방문자 1자 당 1음절 원칙을 고수하는 민족은 세계에 우리 밖에 없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세종대왕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만약 세종께서 마고 이래의 바른 음을 정리하지 않고 훈민정음을 완성치 않았더라면 필자는 물론 그 누구도 우리 음을 가지고 세계 어음의 근원을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비록 수많은 고서들이 내외의 적들에 의해 방화·약탈·분실·백안시되었으나, 다행히도 뜻있는 지사들에 의해 보존된 '징심록·桓檀古記·훈민정음·동국정운·홍무정운역훈' 등의 자료들로 인해 부도·세계종주국의 맥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공덕으로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의 자료만 가지고도 영어를 비롯한 서방제어의 정체를 능히 파악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홍복이 아닐 수 없다.

(한국동란의 와중에서 세계적 역사서인『징심록』제 1지 '부도지'를 복원한 영해 박씨 후손 고 朴錦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한글과 비슷한(?) 구자라트 문자

김광해(金光海) / 서울대학교

한글이 과연 세종에 의해서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그 전에도 한글의 모태가 되는 어떤 문자 체계가 존재했었느냐 하는 논의들이 심심치않게 제기되는 일이 있는데, 이 문제는 궁금하기 짝이 없는 만큼 지극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간 우리 나라 주변에서 발견되는 몇 종의 문자가 한글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는 주장이나 방송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었다. 그 하나는 소위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실려 있다고 하는 ‘가림토 문자’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여기저기서 발견된다고 하는 ‘신대문자(神代文字)’이다. 이런 문자들이 한글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확신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도 있어 견해가 대립된다. 이들이 과연 한글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된 것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이 밖에 또 하나, 한글과 모양이 비슷한 문자를 인도의 어떤 지방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가 몇 건 있었다. KBS 방송사업단 발행 “신왕오천축국전(新往五天竺國傳)”(1983)의 200쪽에는 “구자라트 문자는 한글과 모양이 닮은 것은 자음은 ㄱ,ㄴ,ㄷ,ㄹ,ㅁ,ㅅ,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다.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은 한글이 가림토 문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확신하는 글을 쓴 송호수(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광장, 1984, 1월호, p.154) 교수에 의하여 다시 인용되었다. 한편 모 일간지 1996년 3월 8일자 ‘아시아 10만 리, 인도 수라스트란 반도’라는 기행문에서는 “구자라트 주에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있었다. …… 한글 자모와 같은 모양, ㄴ, ㄷ, ㅌ, ㅇ, ㅁ, ㅂ, ㄹ, ㅓ, ㅗ, ㅣ……”, “비록 글자 몇 개의 모양은 산스크리트 어에서 차용해 왔을망정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그것을 우리 민족의 소리 빛깔에 맞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고 단정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글들에서 자극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한 방송에서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촬영한 내용을 인도 학자의 증언(?)과 더불어 보도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 보고들을 접하면서 전율하였다. ‘한글과 닮은 문자가 머나먼 인도 대륙에서 수억의 인구에 의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니……. 이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사건이다.’ 이것이 국어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의 본능적 육감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파장이 보통 엄청날 것이 아닌 만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확언을 하기가 어려웠다. 1997년 구정 휴가를 이용한 약 일주일간의 인도 방문은 이렇게 해서 결행되었다.
   인도의 뭄바이(옛날 이름 봄베이)에서 국내 비행기로 갈아타고 두 시간을 더 날아가는 곳에 구자라트 주의 수도인 아메다바드가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아닌 게 아니라 한글과 닮아 보이는 <그림 1>과 같은 문자들이 온 천지에 가득한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구자라트 주는 간디의 고향이기도 하였는데, 그가 일기를 쓸 때 사용한 문자도 바로 이 구자라트 문자였다.

 


 <그림 1> 구자라트 문자의 모습

 

<그림 2> 구자라트 문자의 모음

 
정확하지는 않으나 발음을 대강 모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윗줄 순서대로 ‘어, 아, 이, 으, 우, w, ri’, 아랫줄 ‘에, 애, 오, 어우, 응어, 어허’. 한글처럼 모음과 자음이 자소(字素)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도착한 날로 힌디 어를 전공하는 학자를 만나 이 구자라트 문자를 읽는 법을 배우고, 문자의 기원에 대해서도 조사하였다. 이렇게 조사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둘씩 이 문자에 대하여 알게 되기 시작하자, 혹시나 이 문자가 우리 한글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는 간단하게 무너져 가기 시작하였다. 이 문자가 음소문자인 것은 틀림없고 일면 한글과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글처럼 자모가 결합하여 하나의 음절을 이루는 체계는 전혀 아니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한 덩어리 전체가 모음, 혹은 자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문자는 현재 인도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힌디 문자(데바나가리)와 모양이 기본적으로 같았으며, 따라서 문자의 기원도 결국은 산스크리트 문자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구자라트 문자들의 윗부분에다가 단어별로 줄을 죽죽 그으면 그것이 바로 힌디 문자였다. 그래서 힌디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이 구자라트 문자도 쉽게 읽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문자는 한글과 닮아 보이는 형태가 몇 개 있는 것이었을 뿐 구조상으로나 기원상으로 한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한글과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도 전적으로 우연일 뿐이었다. 따라서 송호수 교수가 앞에 적은 글 154쪽에서 한글과 구자라트 문자가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 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적은 것이나, 모 일간지의 기록은 전문적인 확인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무책임한 기록들이다. 또한 모 방송에서 인도의 학자라는 사람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이 문자가 한국으로 건너갔을 수 있다고 자랑스런 표정으로 증언(?)한 것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아전인수적 몽상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단 하루 만에 간단히 확인되었기 때문에, 원래 구자라트에서만 일주일 가량 머물며 조사를 하기로 했던 계획을 바꾸어 나머지 기간에는 인도 내륙을 여행하였다. 필자가 구자라트 문자와 한글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떠났던 인도 여행은 이렇게 해서 ‘두 문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하나는 ‘중요한 판단을 상식에만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둘은 ‘세계에서 한글은 여전히 독보적인 문자’라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解例)


 

종목 ; 국보 제70호 (1962.12.20. 지정)

분류 ; 기록유산,전적류,목판본,관판본 1책

소재 ; 간송미술관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28년(단기 3779, 서기 1446) 반포(頒布)한 훈민정음을

왕령으로 정인지 외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책이름은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 이라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체제는 총 33장 3부로,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제1부 : 훈민정음 본문 : 4장 7면      

-제2부 : 훈민정음해례  : 26장 51면 3행

-제3부 : 정인지 서(序) : 3장 6면

         그 끝에‘정통 11년(단기 3779)이라 명시하고 있다.


정인지 서(鄭麟趾 序)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천지자연에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그에 맞는 글이 있어야 한다.


所以古人因聲制子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그래서 고인(선조)은 그 소리에 따른 글자를 만들어,

그로써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三才)의 이치를 담으니

후세에도 바뀌지 않았다.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그러나 사방 풍토가 나누어지니 음성과 기운(聲氣) 또한 달라졌다.


盖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文字以通其用 是猶鑿之也.

대개 외국어는 그 음성은 있으나 그 상응 글자는 없다.

(그럼에도) 중국 글자를 빌어서 통용케 함은

오히려 그 차이를 벌리는 것이 되었다.


豈能達而無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능히 통달한다 해도 어찌 틈새가 없으리오?

요컨대 모두 그 처지에 따라 안정할 할 필요는 있으나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다.


吾東方禮樂文章 擬華夏. 但方言之語 不與之同.

우리 동방의 예악 문장은 화하와 비등하나 방언은 그러하지 않다.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獄者疾其曲折之難通.

글 배우는 사람은 뜻을 깨치기 어려워 고민하고

법 집행자는 그 곡절 파악이 어려워 괴로워한다.


昔新羅薛總 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옛날 신라 설총이 처음 이두를 만들었는데,

관청과 민간에서는 이제까지도 그것을 쓴다.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그러나 모두 자(字)를 빌어 사용하여,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맞지 않는다.


非但鄙 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비단,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을 글로 표현하는데 이르러서는 그 만분의 일도 반영하치 못한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계해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여

간략한 예의(例義)를 들어 보이시고,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犀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

고전(古篆)을 본떠 상형(象形)문자를 만들었다.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음은 칠조(七調)에 맞다.

삼재의 뜻과 이기(陰陽)의 묘를 다 포괄한다.


▲ 삼현삼죽(三絃三竹)과 칠조(七調)

-삼현 ; 거문고(玄琴)/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

-삼죽 또는 삼금(三笒) ; 대금(大笒)/중금(中笒)/소금(小笒)

-칠조 ; 평조(平調)/월조(越調)/출조(出調)/준조(俊調)/황종조(黃鐘調)/

        이아조(二雅調)/반섭조(般涉調) → 서양의 도레미파솔라시도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이 28자로도 무궁한 전환, 간명한 요약, 정치한 통달이 가능하다.


故智者不終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 以是解書 可以知其義.

고로 지자(智者)는 조회가 끝나기 전에, 우자(愚者)라도 열흘이면

이로써 글을 해석하여 그 뜻을 알 수 있다.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이로써 송사를 심리하면 그 실정(實情)을 지득할 수 있다.


字韻則淸獨之能辨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 無所往而不達.

자운(字韻) 청탁을 구별할 수 있고,

악가(樂歌) 율려(律呂)가 고르고,

쓰는 데 부족한 바가 없어

어떤 경우에도 이르러 통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


雖風聲鶴 鷄鳴狗吠 皆可得而書矣.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일지라도

모두 글로 적을 수 있다.


逐命詳加解釋 以喩諸人.

드디어 (상께서) 상세한 풀이를 더해서 민중을 가르치라 명하시니,


於是 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 副敎理臣朴彭年 臣申叔舟 修撰臣成三問

敦寧府注簿臣姜希顔 行集賢殿副臣撰李塏 臣李善老等

이에 臣은 집현전응교 최 항, 부교리신 박팽년, 신 신숙주, 수찬신

성삼문, 돈녕부 주부신 강희안, 행(行)집현전부수찬신 이개, 신 이선로 등과 더불어


謹作諸解及例 以敍其傾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

삼가 여러 예해(例解)를 지어 요약본을 서술하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 없이도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려하나,


若其淵源精義之妙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심오한 연원이나, 정치(精緻)한 묘의(妙意)에 대해서는,

신 등이 능히 펴 나타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恭惟我殿下 天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시정 업적이 백왕을 초월하여,

정음을 지으심도 어떤 선인(先人)의 술(述) 없이 스스로 이루신 것이라.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그 이치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사람의 사사로운 작품이 아니다.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盖有待於今日也歟.

대저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 오래이나,

문물을 창조하고 사업을 성취시킬 큰 지혜는

오늘을 기다리게 하였음이로다!


正統十一年九月上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臣鄭麟趾拜手稽首謹書

정통 11년 9월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정인지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 조아려 삼가 쓰다. 

[출처] 훈민정음 이해(6) ; 훈민정음 해례(解例)와 정인지 서(序)|작성자 선효후문

 

 

◈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란. 


  

국보 제70호로, 조선시대 중기이후 여러 학자들이 한글의 제자원리를 연구하였으나, 그 원리를 완전하게 들추지 못하던차 이 책이 발견됨으로서 훈민정음의 모든 이치와 원리가 밝혀지게 된 세종임금시대에 간행된 안동의 진성이씨 두루종택(周村宗宅)에서 발견된책이다. 


 

1940년 경북 안동(安東), 진성이씨(眞城李氏) 두루종택(周村宗宅)에서 발견되어 전형필(全鎣弼)씨가 소장(所藏)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국내 유일본, 1962년 12월 20일 국보(國寶)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木版本)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1940년까지 경북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李漢杰)가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 이정(李禎)이 여진(女眞)을 정벌(征伐)한 공(功)으로 세종(世宗)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 까지에는 김태준(金台俊)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 부분 두 장이 낙장(落張)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용준은 표지와 첫머리 두 장이 낙장되어 있는 것을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록을 참고로 보완하였는데, 실수로 서문의 끝 부분을 '便於日用耳'를 '便於日用矣'라고 쓰는 등 몇 가지 오류를 범했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 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난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있다.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40년 간송 전형필씨가 구입하여 1946년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전형필씨가 원본 훈민정음을 6년동안 공개하지 않은 것은 공개 되었을 때, 일제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조선 왕조 제4대 임금이었던 세종이 그때까지 사용되던 한자가 우리말과 구조가 다른 중국어의 표기를 위한 문자체계여서 대다수 백성들이 배워 사용할 수 없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여 세종 25년(1443)에 우리말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체계를 완성하고 "훈민정음"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훈민정음은 동시에 두 가지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는 '문화재'로서의 훈민정음--. 전세계에 아직까진 단 한 권밖에 없는 이른바 《훈민정음 해례본》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유산'으로서의 훈민정음--.즉, 세종 25년(1443)에 창제되어 세종 28년(1446)년에 반포된 글자의 이름을 말한다. 오늘 날, 우리 모두가 익혀 나날이 쓰고 있는 이른바 '한글'이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 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이미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두루종택에서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또한,이 《훈민정음해례본》에, 이전에 발견된 훈민정음에는 나오지 않던 5해 1예의 해례부분이 있어서, 글자를 만든 원리를 알 수 있게 되어 그때까지 분분했던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각종 가설을 비로소 불식시키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해례 본》은 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이란 글자를 설명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인데, 세종 28년(1446) 9월 상순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새 글자를 세종28년 1446년 정인지 등이 왕명을 받들어 전권 33장 1책으로 설명한 한문해설이다.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 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직접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본문의 내용은 새 문자를 창제한 목적을 천명한 훈민정음 서문과, 새 문자 28자를 초성 11자로 나누어 차례로 예시하고 설명한 다음에 이들을 결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예구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은 세종 어제의 서문에 이어 새 글자의 소리내기와 쓰임새를 밝힌 '예의편(例義篇)'까지로,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함으로 우매한 백성들 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고 한 훈민정음의 서문은 세종대왕의 자주사상, 애민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대문장이다. 바로 그 뒤를 이어 'ㄱ은 아음이니 군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ㅋ은 아음이니 쾌자의 첫 발성과 같고…'라 시작되는 '예의편'은 15세기 세계 음성학의 정상을 선구한 세종대왕의 과학사상을 입증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제2부는 해례편(解例篇)으로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그것은 새 문자의 제작원리를 설명한 제자해, 음절 두음을 표기하는 자음 17자를 설명한 초성해, 모음 11자를 설명한 종성해, 음절말지음을 설명한 종성해, 초성·중성·종성이 결합하여 음절을 표기하는 방법을 설명한 합자해, 새 문자로서 단어를 표기한 예를 보인 용자례의 6장으로 나뉜다.

 

끝에는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이 붙어있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훈민정음은 전체 분량이 본문 4장, 주석과 정인지의 서문 29장으로 된 33장에 지나지 않으나, 이론 전체가 정연하고 서술이 과학적인 내용의 책이라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은 현대의 세계 언어학자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훈민정음의 첫부분인 '예의편'만을 국역한, 흔히 '언해본'이라고 일컫고 있는 책은 몇 부가 남아있으나 '해례편'이 붙어있는 '훈민정음 원본'은 두루종택에서 발견된 이 책이 유일본이다.

 

바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여덟학자들이 집필한 이 '해례편'이 발견됨으로써 종래 구구했던 훈민정음의 여러 기원설을 물리치고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15세기 국어의 음운분석에 입각하여 고금동서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언문일치의 새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문자제정의 기본원리'가 만천하에 밝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은 '언제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한 세계의 유일한 문자일 뿐 아니라, 과거에 몇 차례 독창적인 문자체계가 시도됐으나 실패를 거듭했던 세계문자역사에서 성공을 거둔 거의 유일한 문자체계이기도 하다. 게다가 훈민정음은 표의문자체계인 한자문화권의 동아시아에서 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음소문자로 탄생함으로써 고작 한자를 변형해서 만든 일본의 '가나'(가명) 또 계단(거란) 여진문자등 과는 전혀 다른 독보성으로 빛나고 있다. 그것은 문자의 발달사에서 볼 때 최후의 알파벳문자요 최고의 과학적인 음소문자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견으로 밝혀진 15세기 세종조의 찬란한 학문 수준에 못지 않게 감동적인 또다른 사실은 세계사적 전망에서 비교해보더라도 동시대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종대왕의 목민 애민의 민본 정치이념이다.
'훈민정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이다. 여기서 '소리'는 '글자'를 가리킨다. 주목을 끄는 것은 '바른'이란 수식어이다. 그 당시나 그후 5백년 동안이나 중국의 한자를 '진서'라 받들어 모시던 조선조 지식인사회에 대해서 구차한 외국문자를 빌려쓰지 않고 우리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를 '바른'글자라고 명명한 것이다.

 

'바른'글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로 해서 이제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어린이나 어른, 사내나 계집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지껄이는 모든 말은 그대로 글씨로 옮겨 쓸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국어의 완전한 전면적 문자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집현전의 대석학 정인지는 "비로소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라든지, 닭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고 좋아해 하고 있다.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이제 비록 글자 수는 28자로 더없이 간략하면서 전환이 무궁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만에 배울 수 있게 된 훈민정음의 창제로 모든 소리를 바른 글자로 적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정인지가 쓴 서문의 요지이다.

 

세종은 새로 만든 새 문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 문자 하나 하나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한 글을 짓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하여 책을 만들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공표하였다.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의 언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서 직접으로 영향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은 유례가 없었던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한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문명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 곧 한글은 28자로 된 알파벳으로, 오늘날에는 4가지가 안 쓰이고 24자만 쓰이는데, 한국어를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배우기와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문자체계이다. 문자체계 자체로도 독창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인정되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bhjang3.do?Redirect=Log&logNo=140029563833

 

 

 

 

부제학 최만리 상소문 전문.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50일 만에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최만리등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 반포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 속에는 당시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과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중국에 대하여 얼마나 실례인가 하는 당시 선비들의 생각과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음으로 좀 번거롭지만 여기에 그 전문을 싣는다.


1)부제학(副提學) - 당시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로 그 위 대제학(大提學)은 명예직이었음

경자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등 상소문에 가로되, 신 등이 언문 제작한 것을 엎드려 보니 지혜를 움직여 그것을 제작한 것이 가히 신묘하여 천고에 특출난 것이나 신 등의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럽고 위험한 면도 있는 것 같사와 삼가 소를 올리고 엎드려 성상의 재가를 바라옵니다. 첫째 우리 조정은 태조대왕 때부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국의 법제를 따라와서 지금도 글자나 풍속이 중국과 한가지인 이때에 언문을 지으셨다기에 혹시나 하여 말씀을 드리옵니다.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으로 한 새 글자가 아니라 하셨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 전자를 모방 했다하나 발음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달라서 실로 옛것을 근거했다고 볼 수 없음으로 만약 이것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 혹시 비방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중국을 섬기고 사모하는 우리 정서에 부끄러움이 아니옵니까?


또 한 가지는 자고로 구주(九州)의 안이 비록 풍토가 다르다고 해서 별도로 문자를 만들지는 않았사옵니다.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이 각자 그들의 문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라 족히 거론 할 것도 없사옵니다.



옛 글에 이르기를 중국의 문화로써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어도 오랑캐에게 변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나이다. 역대중국에서는 다 우리에게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있기 때문에 문물이나 예의 나 음악이 중화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지금 특별히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면 이는 소위 향료(蘇合)1)를 버리고 쇠똥구리(螗螂)2)를 취하는 것이니 이 어찌 문명을 크게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또 한 가지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저속한 글이나 다 중국에 통용되는 한자를 빌려 말을 돕는데 쓰게 했기 때문에 문자(한자)와 더불어 크게 다른 점이 없었나이다. 그런고로 비록 서리(胥吏)나 노복의 무리라도 반드시 그것을 익히고자 할진대 먼저 몇 권의 책을 읽어 문자를 안 연후에야 이두를 쓰게 되니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지한 연후에야 능히 뜻을 전달 할 수 있는 고로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아는 자가 많으니 학문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끈을 맺어서 일을 기억하는 세상이라면 일시적으로 언문을 빌려 쓰는 것은 오히려 괜찮을 것이므로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말할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편안하기보다는 좀 더디더라도 중국에 통용되는 문자를 쓰는 것이 장구한 계획이라고...


하물며 이두를 행한 지가 수천 년이라 관청의 장부나 모임을 기약하는 등의 일에 막히는 폐단이 없는데 어찌하여 오래도록 쓰이고 폐단이 없는 것을 버리고 아무 이익이 없는 비천한 언문을 만드셨나이까? 만약 언문을 쓰게 되면 관리된 자들이 언문만 익히려고 할 것이고 문자 배우기를 원하지 않아서 결국 관리들은 두파로 나뉠 것이고 관리된 자가 언문으로써 관청일을 하게 된다면 후진(後進)들은 다 그와 같이 언문 이십칠자로 세상에 입신(立身)을 하려 할 테니 어찌 수고로이 중국의 성리학을 공부하겠나이까? 만약 이같이 된다면 수십 년 후에는 참다운 문자인 한문을 아는 자가 극히 적고 언문에 능한 자만 있어서 관리들은 중국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는 즉 사리가 담벼락을 마주한 것 같이 될 것이니 헛되이 언문만 공부한다면 장차 어디다 쓰겠나이까?


우리나라가 오래 동안 참다운 학문을 숭상해 왔는데 이 학문이 사라질까봐 두렵나이다. 전의 이두는 비록 한자로 쓰고 있는데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비천하다고 하여 관리들의 문서를 바꾸려고 하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이옵니다. 가령 언문이 전의 조정(고려나 그 이전)때 부터 있던 것을 빌려 쓴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문명시기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3) 뜻을 두어야 하거늘 오히려 구습에 따르려 하시나이까? 이는 반드시 다시 고치려는 의식있는 자가 있을 것 이며 이는 불을 보는 듯이 뻔 한 이치이옵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을 통해서 골치 거리인데 지금 언문을 빌려 쓰는 것은 신기한 한 가지 재주에 불과한 것으로 학문에 손해가 가고 나라를 다스림에 아무런 이익이 없어 이를 반복해서 생각해봐도 옳다고 볼 수 없나이다.


또 하나 말씀하시기를 “만약 형벌이나 옥사를 이두문자로써 한다면 글자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이 단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억울하게 당할 수 있으나 언문으로 바로 그 말을 쓰고 읽어서 듣게 한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모두 억지로 굴복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셨나이다. 그러나 자고로 중국에서는 말과 글이 같은데도 옥사나 송사의 일에 원통한 일이 심히 많사옵니다. 우리나라의 일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자면 옥에 있는 죄수가 이두를 해독하여 문초한 사실을 친히 읽고 그 무고함을 알고 있다해도 매질에 못 이겨 굴복하는 자가 많을 것이옵니다. 이는 문초한 글의 뜻을 알지 못해서 당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옵니다. 만일 그렇다면 비록 언문을 쓴들 여기서 무엇이 다를 것이옵니까? 이것은 형벌과 옥사의 공평하고 불공평 한 것은 옥리(獄吏)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지 말과 글이 같고 같지 않은데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므로 언문으로 옥사를 공평히 하신다는 것에 신등은 그 옳은 바를 찾아 볼 수가 없나이다.

또 하나 무릇 일과 공을 세움에 쉽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지지 않는데 근래에 국가에서 일을 처단함에 모두 속성으로 하고 있으니 나라를 다스림에 그릇됨이 있을까 두렵나이다. 상고하여 말씀 드립니다. 언문을 부득이 사용하신다면 이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것으로 마땅히 재상들이나 아래로는 모든 각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의 하셔서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행시기를 세 번쯤 생각하셔서 역대의 임금에 거스름이 없고 중국에 부끄러움이 없어서 백세 후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스러움이 없는 연후에야 가히 시행해야 할 것이 온데 이제 널리 대중과 의논함을 택하지 아니하고 갑작스레 아전무리 수십인 에게 명하시어 그것을 익히게 하였고 또 옛사람이 이미 이루어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처 그 상고할 수 없는 언문을 붙여서 모아놓고 공인 수십 인을 모아 그것을 새기고 온 천하에 반포하려 하시니 후세 사람들의 공론과 논의가 어떠하겠습니까?

또 근래 성상께서 청주온천에 행차하실 때 특별히 흉년을 염려하시어 따라가는 사람이나 제반사를 간략하게 하라 하셨기에 전날에 비해 경비가 십중팔구나 절감되었고 조정에 올라오는 공무 역시 의정부에 위임하시었는데 그 언문이란 국가의 위급한 사항이나 부득이 기한을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어찌 홀로 휴양소에서까지 몰두하시어 성상께서 옥체를 조섭하실 때 번거롭게 하셨으니 신등은 그 옳은 바를 찾아볼 수가 없나이다.

또 하나는 옛 선비들이 이르기를 “무릇 백가지 애완 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다 선비의 공부하는 뜻을 빼앗게 된다. 고 하였고 지금도 좋아하는 짓만 따라가면 선비의 뜻이 상하게 되는데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德性)은 성취하셨으나 오히려 마땅히 중국 성인들의 학문에 전염하시어 그 깨닫지 못한 것을 탐구하셔야 하는데 그 언문이라는 것을 유익한 것이라 하셨다니 그것은 단지 문사들의 재주 하나에 불과한 것 일 뿐입니다. 하물며 전혀 국가 다스림에 이로움이 없는 것에 종일 생각을 소비하시니 부지런히 공부하셔야 할 이때에 실로 손해가 크옵니다. 신 등의 글이 재주가 없어 죄를 기다립니다. 그간 시종해 오며 마음에 있던 바를 참지 못하고 감히 요점을 정리하였사오니 성상의 총기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庚子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 上䟽曰臣等伏覩諺文制作至爲神妙創物運智特出千古然以臣等區區管見尙有可疑者敢布危懇謹䟽于後伏惟聖載 一. 我朝祖宗以來至誠事大一遵華制今當同文同軌之時創作諺文有駭觀聽儻曰諺文皆本古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若流中國或有非議者豈不有愧於事大慕華 一自古九州之內風土雖異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各有其字是皆夷狄事耳無足道者傳曰用夏變夷未聞變於夷者也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文物禮樂比擬

中華今別作諺文捨中國而自同於夷狄是所謂棄蘇合之香而取螗螂之丸也豈非文明之大累栽 一新羅薛聰吏讀雖爲鄙俚然皆借中國通行之字施於語助與文字元不相離故雖至胥吏僕隸之徒必欲習之先讀數書組知文字然後乃用吏讀用吏讀者須憑文字乃能達意故因吏讀而知文字者顔多亦與學之一助也若我國元不知文字如結縄之世則姑借諺文以資一時之用猶可而執正議者必曰與其行諺文而姑息不若寧遲緩而習中國通行之文字以爲久長之計也而况吏讀行之數千年而簿書期會等事無有防礎者何用旼舊行無弊之文別創鄙諺無益之字乎若行諺文則爲吏者專習諺文不願學問文字吏員岐而爲二荀爲吏者以諺文而官達則後進皆見其如此也以爲二十七字諺文足以立身於世何須若心勞思窮性理之學哉如此則數十年之後知文字者必少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不知聖賢之文字則不學墻面昧於事理之是非徒工於諺文將何用哉我國家積累右文之化恐摲至掃地矣前此吏讀雖不外於文字有識者尙此鄙之思慾以吏文易之而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燮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必有更張之議者此灼然可知之理也厭舊喜新古今通患今借諺文不過新寄一藝耳於學有損於治無益反覆藝之未見其可也一若曰如刑殺獄辭以吏讀文字書之則不知文理之愚民一字之差用或致寃今以諺文直書其言讀使聽之則雖至愚之人悉皆易曉而無抱屈者然自古中國言與文同獄訟之間寃枉甚多借以我國言之獄囚之解吏讀者親讀招辭知其誣而不勝捶楚多有枉服者是非不知招辭之文意而被寃也明矣若然則雖用諺文何異於此是知刑獄之平不平在於獄吏之如何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慾以諺文而平獄辭臣等未見其可也一凡立事功不貴近速國家比來措置皆務速成恐非爲治之體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此變易風俗之大者當謀及宰相下至百僚國人皆曰可猶先甲先庚更加三思質諸帝王而不悖者諸中國而無愧百世以俟聖人而不惑然後乃可行也今不博採群議驟令吏輩十餘人訓習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附會無稽之諺文聚工匠數十人刻之劇欲廣布其於天下後世公議何如且今淸州椒水之幸特慮年兼+欠(흉년들겸)扈從諸事務從簡約比之前日十减八九至於啓達公務亦委政府若夫諺文非國家緩急不得已及其之事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以煩聖躬調燮之時乎臣等凡未見其可也一先儒云凡百玩好皆奪志至於書札於儒者事最近然一向好者亦自喪志今東宮雖德性成就猶當潛心聖學益求其未知也諺文縱曰有益特文士六藝之一耳况萬萬無一利於治道而乃硏精費思竟日移時實有損於時敏之學也臣等俱以文墨末技待罪侍從心有所懷不敢合黙謹整肺腑仰瀆聖聰

 

     

1) 蘇合 - 인도산 향료

2) 螳螂 - 사마귀 똥, 쇠똥벌레의 쇠똥구리

3) 變魯至道 - 變魯는 魚魯混眞과 같은 말이다. 즉 어로혼진은 魚자와 魯자가 비슷한여 魚魯不辨 이란 말이 있드시 혼동되므로 글자를 혼동해서 서로 뒤섞여 쓰는 것을 말한다. 至道는 도리에 맞다는 뜻.



  이상이 당시 급제, 지금 같으면 고등고시에 합격한 이 나라 최고 지성이라는 집현전 학사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다. 웬만한 임금 같았으면 이 상소문에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나 세종대왕께서는 이 구역질나는 상소문을 보시고 지금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도록 이들에게 호통을 치시고 이들을 어린애 다루듯 하는데 이는 세종대왕께서 이들보다 얼마나 학식이 높으신가 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그러면 세종대왕의 답변을 보자.  

 

세종의 답변


 임금님께서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문을 읽어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말하기를 발음하는 것이나 글자 조합한 것이 진실로 옛것 같지가 않다고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옛것과 다른 소리가 아니더뇨?

 그러나 이두를 제작한 본의는 그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 밖에 없지 않드뇨? 그와 같이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역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드뇨?

 너히들은 설총이 한 것은 옳다고 하면서 너희들 임금이 한일은 틀렸다고 하니 어찌된 심보인고?

 또 너희들이 운서(韻書)가 무엇인지나 아느뇨? 도대체 사성(四聲)1)이나 칠음(七音)2)의 자모(字母)가 몇 개인지나 아느뇨? 이것을 만약 내가 바로잡아놓지 않으면 누가 있어 바로잡아 놓겠느뇨?(너희들 주제에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또 상소문에 말하기를 언문 만든 것이 새롭고 신기한 한 가지 재주에 불과 하다고 했는데 내가 그전부터 소일하기 어려워 서적으로 벗을 삼고 지냈거늘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이 좋아하는 마음에서 글자를 만들었겠느뇨?

 또 이 글자 만드는 일이 어찌 들에 나가 매를 부리며 사냥이나 하는 일과 비교 될 바가 아니거늘 너희들 말이 괘심하기 짝이 없도다.


또 내가 나이가 많아 국가의 모든 일을 세자에게 전담시키고 있어서 비록 작은일 이라도 참여하고 결정해야 하는데 하물며 언문을 만드는 일이라고 빼 놓을 수 있겠느뇨? 만약 세자를 동궁에만 처박아둔다면 글자 만드는 일을 환관내시 나부랭이하고 하란 말이드뇨? 너희들이 진정 나를 시종 하는 신하라면 내 뜻을 확실히 알아서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뇨?”    



1) 사성(四聲) - 上聲, 去聲, 平聲, 入聲

2) 칠음(七音) - 牙, 舌, 脣, 齒, 喉, 半舌, 半齒音.



 세종의 답 원문 -  上覽䟽謂萬理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且吏讀制作之本意無乃爲其便民乎如其便民也則今之諺文亦不爲便民乎汝等以薛聰爲是而非其君上之事何哉且汝知韻書乎四聲七音字母有幾乎若非予正其韻書則伊誰正之乎且䟽云新奇一藝予老來難以消日以書箱爲友耳豈厭舊好新而爲之且非田獵放鷹之例也汝等之言顔有過越且予年老國家庶務世子專掌雖細事固當叅決况諺文乎若使世子常在東宮則宦官任事乎汝等以侍從之臣灼知予意而有是言可乎


 


최만리 등은 세종대왕의 청산유수 같은 반박에 얼굴을 붉히나 그래도 핑계는 댄다.


 최만리 등은 대답하여 가로되 설총의 이두는 비록 소리는 다르다고 말씀 하셨으나 소리를 의거하고 풀이를 의거하여 문자(한문)를 말로 돕는지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옵니다. 그런데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또 (언문을) 신기한 한 가지 재주에 불과 하다고 한 것은 글을 쓰다 보니 문장 상 어쩌다 그리된 것이니 별 뜻이 있어 그리한 것은 아니옵니다.  또 동궁께서 공무를 처리하는 일이 비록 작은일 일지라도 참결(叅決)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급하지 않은 일인데도 (언문에)하루 종일 신경을 쓰셔야 하옵니까?    



   

 萬理等對曰薛聰吏讀雖曰異音然依音依釋語助文字元不相離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且新奇一藝云者特因文勢而爲此辭耳非有意而然也東宮於公事則雖細事不可不叅決若於不急之事何竟日致慮乎



세종대왕께서 대노하여 말씀하신다.


 얼마 전에 김문이 왕후께 고하기를 언문을 만드는 것은 나쁘지가 않다고 하더니  지금은 반대로 나쁘다고 하느뇨? 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이란 책을 (언문으로)만들어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이 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사람이 하고 하지 않는 것이 다만 사람의 자질에 여하에 달려있지 어찌 언문으로 책을 번역 하였다하여 금방 다 효과가 있겠느뇨? 이따위 말들이 어찌 사리가 있다는 선비의 말이라 할 수 있겠는고? 참으로 쓸모없는 속된 선비로다. (그런데 이 말은) 이보다 앞서 세종께서 정창손에게 ‘내가 만약 언문으로 삼강행실 이란 책을 번역하여 반포하면 우매한 지아비나 지어미라도 다 쉽게 읽어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될 것’ 이라고 했기 때문에 정찬손이 (책을 반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따위 말을 했기 때문에 세종께서 오늘 그와 같이 질책하신 것이다.


세종께서는 다시 말씀 하신다.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를 묻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너희들 상소문 가운데 한두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부른 것이니라. 그런데 너희들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말만 바꾸어 이랬다 저렸다 대답하니 너희들 죄는 벗어나기가 어렵게 됐도다.

 하시고 드디어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 등을 의금부에 명하여 하옥 시켰다가 다음날 명을 내리어 석방 시켰는데 다만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김문은 왕후께 드렸던 말과 앞 뒤 말 바꾸는 짓을 하였으므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서 국문토록 하였다. 



  

  上曰前此金汶啓曰制作諺文未爲不可今反以爲不可又鄭昌孫曰頒布三綱行實之後未見有忠臣孝子烈女輩出人之行不行只在人之資質如何耳何必以諺文譯之而後人皆效之此等之言豈儒者識理之言乎甚無用之俗儒也前此上敎昌孫曰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頒諸民間則愚夫愚婦皆得易曉忠臣孝子烈女必輩出矣昌孫乃以此啓達故今有是敎上又敎曰予召汝等初非罪之也但問䟽內一二語耳汝等不顧事理變辭以對汝等之罪難以脫矣遂下副提學崔萬理直提學辛碩祖直殿金汶應敎鄭昌孫副校理河緯地副修撰宋處儉著作郎趙瑾乎義禁府翌日命釋之唯罷昌孫職仍傳旨義禁府金汶前後變辭啓達事由其勅以聞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 몇 개가 있다



 그 하나는 여기 주제와는 상관없는 객설 이지만 세종께서 우리 한글을 만드실 때 신하 몇한테 적당히 명을 내려서 만든 것이 아니고 청주온천으로 휴양을 가셔서도 만사 다 잊고 푹 쉬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고심하여 한글을 만드셨다는 것에 감격의 눈물이 나고 얼마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던가에 눈물이 나며 급제하여 들어온 일류 학자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시고 훈계하시니 얼마나 유식 하셨던가에 한 번더 존경이 간다.  다음 우리가 우리의 독립된 우리의 글자를 만드는 것이 당시 얼마나 중국에 큰 실례가 되므로 세종은 자꾸 새 글자가 아니라고 하고 최만리 등은 새 글자이니 위험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가림토가 없어진 원인이  짐작이 간다.


만약 한자가 아닌 우리조상이 만든 글자로 된 책이라도 가지고 있다가 들키면 반역의 죄로 다스려 질수도 있기 때문에 가림토로 써진 문서는 스스로 불태워졌으리라고 추정된다.

 

 

 

 

 

세종전에 원시한글(언문)이 있다는

세종, 정인지, 최만리 상소문

 

훈민정음의 가치

 

우리말을 국제화 해야 한다는 한글학회와 다른 단체등의 말은 글쓴이는 할 수도 없거니와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즉, 각자 민족은 그들 나름대로의 말을 발달시켜왔는데, 그 말을 지금 우리 말로 바꾸게 한다는 것은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가 아니라 남의 여편네를 달라는 것과 같이 무모하다.

따라서 나는 남의 나라 말을 우리말로 바꾸자 할 게 아니라 우리 훈민정음을 세계 공용문자를 만들자는 것이고, 이는 우리 훈민정음 가지고는 세계 어느 민족 말도 못 적을 말이 없으니 가능하고, 또 아주 쉽기 때문에 머리 좋은 놈은 하루 아침에 훈민정음을 다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쓰는 한글이 아니고 꼭 훈민정음이어야 하는 것은, 지금 한글은 세종보다 더 잘난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다 망쳐놓아 우리 글자로 우리말도 다 적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훈민정음으로 세계 공용문자를 만들고 사실상 우리 땅인 간도를 총 한 방 쏘지않고  되찾을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이 이 훈민정음 자판으로 천조 원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자세한 이론은 이미 간도찾기협의회 연설문에 있고, 이 카페에 무수히 올려있다.

 

훈민정음 서문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우리나라 말이 듕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상이 훈민정음 공식 창제 동기이다.

그러나 글쓰는 이의 생각은 다르다.

누구보다도 천재적인 충령은 당시 쓰던 우리의 한자음이 중국음과 거의 같으나 그렇다고 중국인과 대화는 할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즉, 당시 사람들은 한자음을 中國은 듕귁, 朝鮮은 됴션등으로 거의 중국인과 같은 발음은 했으나 그렇다고 통역이 없이는 중국인과 통할 수 없어서 정확한 중국음을 알기 위해 대표적 중국 발음사전인 <홍무정운>이란  중국 명나라 태조 홍무 8년(1375)에 악소봉(樂韶鳳) 등이 왕명에 따라 펴낸 운서. 양나라의 심약(沈約)이 제정한 이래 800여 년이나 통용되어온 사성의 체계를 모두 북경 음운을 표준으로 삼아 개정한 것으로,《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을 짓는 데 참고 자료가 된 15권짜리 책이다.

 

그러나 충령은 이 책으로는 한자의 음을 제대로 알기도 어렵고, 또 누구에게 가르쳐 알리기도 많은 제한이 있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즉, 중국인이 하는 발음을 녹음기처럼 녹음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는 것은 이따위 책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충령은 왕세자가 아니었기에 궁궐밖 상것들과 어울리기가 쉬웠다.

그런데 그들은 역시 상것들이나 쓰는 글자를 땅바닥에 그려가며 말했고, 당시 선비들은 이 글자를 언문(諺文)이라 했다. 충령도 물론 그 언문이 쉬우니 알고 있었는데, 한자를 홍무정운으로 제대로 표시할 수 없는 마당에 이 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니 이 불완전한 모음이 붙어있는 언문의 모음을 체계 있게만 고친다면 자신이 생각하던 녹음기와 같은 발음사전을 만들수 있으리란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결국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후 자신의 꿈이었언 그 정확한 발음 사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동국정운(東國正韻)이다.

 

즉, 충령은 왕이 된 후에도 겨우 딸이나 아들등 가족과 그 언문 글자를 자방고전(字倣古篆) 하고 발음 구조를 바꿔 훈민정음을 만든다.

그러나 세종은 옛 조상들이 쓰던 엉터리 발음을 없애지는 않았다, 즉 검둥이, 감둥이가 같이 발음되는 글자를 아래 아 점으로 남긴 것이다.

 

세계 석학은 말한다.

그렇게 훌륭한 문자가 한 사람의 생애에 한 사람에 의해 창제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그  의문은 바로 세종이 이 언문을 참고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하면 의문이 풀린다.

 

단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훈민정음 서문의 予爲此憫然新製二十八字. 즉 새로 28자를 지었다는 말과, 그리고 정인지 서문의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즉 '정음을 지은 것은 조상이 지은 것이 아니라 자연속에서 지은 것이다' 하는 말과 또 世宗御製訓民正音 등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세종은 전연 무에서 28 자를 친히 지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전 원시한글은 있을 수 없다는 반론도 많은데,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즉,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든다. 그 비행기는 겨우 프로펠러를 붙이고 날개를 단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 보잉 747기는 그 원리가 아니다. 제트추진원리로 하늘을 난다.

그럼 보잉747기는 요즘 사람이 창작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원리, 즉 공기를 앞에서 빨아 뒤로 밀고 날개로 나는 원리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원리를 모방한 것이다.

 

세종의 字倣古篆(옛 전자를 모방해서 글자를 만들었다) 는 세종 말씀이나, 또  정인지의 象形而 字倣古篆(그 형상은 옛 전자를 모방해서 글자를 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반론자들처럼  세종 전 언문이 있을 수 없다면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1. 字倣古篆, 또는 象形而字倣告篆이란 세종 말씀이나, 정인지의 말이 순 거짓인가? 세종이나 정인지는 과연 거짓말쟁이일까?

 

2. 최만리 상소문에 옛부터 글자나 언문이 있었다는 말이 다음과 같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세종실록>이 위서인가?

 

언문(諺文)이 세종 전부터 있었다는 최만리 상소문중 엣 글자가 있었다는 부분

 

*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으므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 때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희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전 조정 때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借使諺文自前朝有)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전용하는 말일 뿐이옵니다.(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이상 세종 전에 언문이 없었다면 세종이 거짓말쟁이인지, 또 세종실록이 위서인지 두 가지만 답해주어야 한다.

 

 

 

 

 

 

 

               석보상절(釋譜詳節) 

 

 

 # 원문 읽기

 

이완근

 

 # 원문 해석

 

아득한 먼 옛날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다가, 그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도리를 배우러 나아가시어, 바라문교의 구담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을 벗도 구담의 옷을 입으시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참선을 하시다가, 나라에 빌어먹으러 오시니, 모두가 몰라보더니 소구담이라고 하더라.

 보살이 성 밖에 있는 사탕수수밭에 정사를 만들고 혼자 앉아 있으시더니, 도둑 오백 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서 정사의 곁으로 지나가나, 그 도둑은 보살의 전세의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는 도둑의 자취를 밟아 그 보살을 잡아다가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더니, 대구담이 신통력이 있는 눈으로 보고 허공으로부터 날아와서 묻자오되, "그대 자식이 없더니 무슨 죄인고?" 보살이 대답하되, "곧 줏을 나이거니, 자손은 의론하리요?" 그 왕(보살의 동생)이 사람을 시켜 쏘아 죽이니라.

 대구담이 슬퍼하며 시체를 꾸리어 관에 넣고, 피 묻은 흙을 파 가지고 정사에 돌아와서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기를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 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러라,." 열 달 만에 왼쪽 피는 남다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거늘, 성을 구담씨라 하더니, 이로부터 자손이 이으시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그 후로 자손이 계속 번성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드디어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 한다.)

 

 

 # 요점 정리

 

이완근 주제 : 석가모니 탄생의 유래

 

 

 어휘 연구

이완근 이완근
이완근 이완근

 

 

 # 이해와 감상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의 전기를 엮게 하였는데, 《석가보(釋迦譜)》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경(藥師經)》 등에서 뽑아 모은 글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 1447년(세종 29)에 완성한 것을 1449년(세종 31)에 간행하였다. 이 책은 조선 전기의 언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불경 언해서(諺解書)와는 달리 문장이 매우 유려하여 당시 국문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즉 서명의 '석보'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은 요긴한 것은 상세히, 요긴하지 않는 것은 생략한다는 뜻이고, 편찬동기는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고 대중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 위한 데에 있으며, 내용에 관해서는 '월인석보서'에 승우와 도선의 '석가보', '석가씨보'를 참고로 한 책을 만들어 이를 번역하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번역에 앞서 한문으로 돈 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심화 자료

 

이완근석보상절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간행한 석가모니의 가계와 그 일대기를 기록한 책.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당시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아 편역한 책이다. 책의 명칭 및 편찬동기와 간행시기, 그리고 편자에 대해서는 월인석보(별항) 권1에 있는 석보상절 서(序)어제월인석보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명의
석보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은 요긴한 것은 상세히, 요긴하지 않은 것은 생략한다는 뜻이고, 편찬동기는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 대중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 위한 데 있다.

〔내용〕 내용에 관해서는 월인석보서에 승 우(祐)와 도선(道宣)의 석가보≫·≪석가씨보를 참고로 한 책을 만들어 이를 번역하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번역에 앞서 한문으로 된 책(漢文抄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석보상절을 보면, 위의 두 석가보 외에도 법화경≫·≪아미타경 등 여러 불경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편찬순서는
팔상도(八相圖)·도솔래의(兜率來儀 :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옴.)·비람강생(毘藍降生 : 룸비니 동산에서 이 세상에 태어남.)·사문유관(四門遊觀 : 사대문으로 나가 봄)·유성출가(踰城出家 : 성을 넘어 출가함.)·설산수도(雪山修道 : 설산에서 도를 닦음)·수하항마(樹下降魔 : 나무 아래에서 마군에게 항복을 받음.)·녹원전법(鹿苑轉法 : 녹야원에서 설법함.)·쌍림열반(雙林涅槃 : 쌍림에서 열반에 듦.)의 순서를 따랐다.

〔전본 및 소장처〕

  이 책의 분량은 현전하는 권24의 내용으로 미루어 모두 24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자는 갑인자로 된 활자본이다. 당시의 활자인쇄술로 미루어 많은 부수가 간행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난리로 인해서 그나마 전해지던 책도 없어져서 현재 초간본은 권6·권9·권13·권19·권23·권24가 각 1책씩 전할 뿐이다. 복각된 중간본도 권3·권11의 2책만 전한다. 권3은 16세기 중엽의 중간목판본으로 천병식(千柄植)이 소장하고 있다.
보물 제523호로 지정된 석보상절은 7책으로 각권의 소장처와 영인상황은 다음과 같다.
권6·권9·권13·권19는 초간활자본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으며, 한글학회에서 영인(1955)하였다. 권11은 16세기 중엽의 중간목판본으로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어문학회에서 영인(1959)하였다. 권23·권24는 초간활자본으로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동악어문학회에서 영인(1967)하였다.

가치

  ≪석보상절이 학문적으로 갖는 가치는 첫째, 불교학적인 면에서 당시의 불교를 조직화한 것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학 수준을 말하는 것이며, 최초의 번역불경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둘째, 문학적인 면에서 국문으로 된 최초의 산문작품이지만, 문장이 유창하고 세련되어 후대의 고전소설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셋째, 국어학적으로는 그 풍부한 어휘와 이에 따른 어법
·음운·표기법 등 15세기 중엽의 국어연구 및 한자음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서지학적으로는 월인천강지곡
과 함께 최초의 국문활자본이란 점에서 값진 문화재로서 가치가 인정된다.

참고문헌 注解 釋譜詳節(李東林, 東國大學校出版部, 1959), 釋譜詳節 第二三·二四 注解(金英培, 一潮閣, 1972), 釋譜詳節 第二三·二四 解題(李丙疇, 東岳語文論集 5, 1967), 釋譜詳節의 校正에 대하여(安秉禧, 國語學 2, 1974), 새로 발견된 釋譜詳節 卷三 解題(千柄植, 國語敎育 38,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1999/10/9 KBS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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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훈민정음의 기원설중의 하나로서 이 고전기원설이 존재합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였던 형암 이덕무가 자신의 저서인 (청장관전서)에서 바로 이 고전기원설을 주장했는데 한 번 보시죠.

 

[훈민정음에 초성․종성이 통용되는 8자는 다 古篆의 형상이다. ㄱ ‘古文의 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ㄴ ‘匿자에서 나온 것인데, 隱과 같이 읽는다.’ ㄷ ‘물건을 담는 그릇 모양인데, 方자와 같이 읽는다.’ ㄹ ‘篆書의 己자이다.’ ㅁ ‘옛날의 圍자이다.’ ㅂ ‘전서의 口자이다.’ ㅅ ‘전서의 人자이다.’ ㅇ ‘옛날의 원자이다.’ 또 ㅣ‘위 아래로 통하는 것이니, 古와 本의 번절이다.’ 翻切 ‘세속에서는 언문으로 反切이라 하여 反자를 배반한다는 反자로 읽고 反切의 反자 음이 翻인 줄은 알지 못한다. 1행에 각각 11자이다.’ 모두 14행인데 글자를 좇아 횡으로 읽으면 ‘가(可)․나(拿)․다(多)․라(羅)의 유와 같다.’ 자연히 梵呪와 같다. 대체로 글자의 획은 篆籒(전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인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참여 할 수 있겠는가]

 

좀 억지스럽단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실록에 분명히 고전(古篆)이라 기록되어있고 또 조선조에 고전(古篆)이라 부르던 글자가 존재했다는 점에서 이 설이 나온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덕무가 과연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을 봤을지 보지 못했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 한글학회장이셨던 허웅선생께서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허웅선생은  「세종실록」에 나타난 글이나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 서문의 글의 뜻은 훈민정음이 바로 고전 글자에서 왔다는 것이 아니라, 꼴을 본떠서(象形) 글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象形한 것이 古篆의 글자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설을 가장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이 가설이야말로 훈민정음해례속에 나타난 창제원리와 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동시에 만족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해례에 적힌 창제원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교하게 씨줄과 날줄이 얽혀 아름다운 비단이 만들어지듯 해례의 창제원리는 천의무봉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사고력으로 어떻게 이런 상상조차 하기힘든 이론을 창조할 수 있었는지 정말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따라서 모든것은 바로 이 해례의 창제원리를 근본으로 삼고서 그 주변정황을 추정해나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허웅선생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허웅선생의 가설을 살펴보면 말 그대로 훈민정음은 해례에 기록된 창제원리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만들어놓고보니 그 형상이 한자의 초기형태인 고전(古篆)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가설역시 실록에 나온 고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객관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절대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훈민정음해례라는 절대적인 증거 있으므로 이 가설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가림토를 주장하시는 분들이 최만리상소문을 들먹이며 그것이 가림토의 증거라고 말하지만 한문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황된 주장인지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최만리가 상소문에서 말하는 고전(古之篆文)은 이분들이 주장하는 가림토가 아니라 바로 위에서 설명드린 초기의 한자인 고전(古篆)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말하는 가림토의 증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상소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인

[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이 구절을 인용하며 위에서 붉은 글씨로 표시한 옛글자(古字) 와 옛글자 전(古之箋文)이 바로 가림토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게시판에서도 지겹게 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위 구절을 해석하면

[말씀하시기를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은 것으로 새로운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 곧 글자모양은 옛글자 전(古之篆文)을 본떳다 하더라도 용음과 합자는 옛글자와 다르니 실로 근거가 없습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편의상 용음은 소리내는법, 합자는 글자조합법 정도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약간 다른 의미가 있지만 크게 문제될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 위의 옛글자와 옛글자 전은 같은 글자를 가리킨다는 것은 금방 아실 수 있을실 거며 또 훈민정음이 그 글자들의 모양을 본떳다는 것을 최만리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가림토가 아닐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음미하시면 저 옛글자란 것은 결코 가림토가 될 수 없음을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은것으로 새로운자가 아니라고 하신다면]이란 구절을 음미해 보십시오. 최만리의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가 얼마나 극렬했는지는 다 아실겁니다. 그래서 세종께서는 최만리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을겁니다. 위의 문장이 바로 세종께서 최만리를 어떤 방법으로 설득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세종께서는 최만리가 왜 한자를 놔두고 새로운 글자를 만드셨냐는 물음에 훈민정음은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새로운 글자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설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죠. 그 밑에 [곧 글자모양은 옛글자 전을 본떳다 하더라도]라는 구절까지 본다면 세종께서 훈민정음이 옛글자의 모양을 본떳으므로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은것이며 그러므로 새로운 글자라고 할 수 없다라고 최만리를 설득하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가림토를 믿으시는 분들의 주장대로 이 옛글자가 가림토라면 도대체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한자이외에는 어떤 글자도 용납하지 않는 최만리에게 [훈민정음이 가림토의 모양을 본떳으니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그러니 괜찮지 않느냐]라며 설득하시는 세종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무슨 코메디입니까? 세종께서 가림토의 모양을 본떳으면 최만리가 훈민정음의 창제를 인정하리라 생각하셨을까요? 말도 안되는 주장이란걸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또 그 뒤의 최만리의 말을 마저 보겠습니다.

[곧 글자모양은 옛글자 전을 본떳다 하더라도 용음(소리내는 법)과 합자(글자조합법)는 옛글자와 다르니 실로 근거가 없습니다]라는 구절입니다.

여러분도 가림토를 이 게시판에서 많이 보셨겠지만 세월이 흘러 도대체 어떻게 변했길래 모양만 비슷하고 소리내는 법이나 글자조합법이 근거가 없을 정도로 달라졌을까요? 가끔 이 게시판에 가림토의 음가라며 시중에 떠도는 표가 가끔 올라오던데 보면 지금의 한글과 음가가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그런데 왜 최만리는 근거가 없을 정도로 다르다고 했을까요?

 

현재의 한글과 소리내는법이 근거가 없을 정도로 달라보이는 분 있으십니까? 또 저 위의 음소들을 어떻게 조합하길래 훈민정음과 근거가 없을 정도로 달랐을까요. 볼 때마다 느끼지만 무엇을 근거로 저 음소들의 음가를 알아냈는지 정말 신기하기만 합니다.

 

상소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위의 문장은 이런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최만리가 세종께 한 말의 의미는 [전하께서 언문이 옛글자 전(古篆)의 모양을 본떳으니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지만 소리내는 법과 글자조합법이 옛글자와 근거가 없을정도로 다르니 언문은 옛글자를 근본으로 삼은 글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언문창제는 부당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저 위의 고전(古篆)이 가림토라면 최만리의 말은 이런 의미가 될 겁니다.

[전하께서 언문이 가림토의 모양을 본떳으니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지만 소리내는 법과 글자조합법이 가림토와 다르니 언문은 가림토를 근본으로 삼은 글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문창제는 부당합니다]라는 말이 될 겁니다.

 

마치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가림토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모양새입니다. 철저한 모화주의자이며 한자이외의 글자는 글자로 취급도 않았을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가림토와 다르기 때문에 창제를 반대하는 상황이 상상이 가십니까?

 

이상에서 보듯 최만리 상소문에 나오는 옛글자(古字)와 옛글자 전(古之篆文)은 바로 조선조때 말하던 한자의 초기형태인 전서(篆書), 즉 고전(古篆)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위의 모든 코메디같은 상황은 사라지게 됩니다.

 

세종께서는 훈민정음이 초기의 한자인 고전(古篆)의 모양을 본떳으니 한자와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글자라 할 수 없다라고 최만리를 설득하셨을 것이며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비록 고전(古篆)의 모양을 본떳다 하더라도 소리내는 법과 글자조합법이 한자인 고전(古篆)과는 근거가 없을 정도로 다르니 훈민정음은 한자와 무관한 글자다라고 세종께 반박하는 지극히 당연한 상황이 만들어짐을 여러분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참고로 한자에 무슨 글자조합법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가지시는 분이 계시면 '반절법(反切法)'이란 것을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자의 음을 표시할때 다른 한자 두개를 조합하여 하나의 발음을 표시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東(동)이란 글자를 보면 잘 아시듯 (동)이란 발음을 가집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없던 시절에 저 東의 발음을 어떻게 표시했을거라 생각하십니까?

德洪切이라 표시했습니다. 첫번째 글자인 (덕)의 자음부분인 (ㄷ)과 두번째 글자인 (홍)의 (ㅎ)을 제외한 (옹)의 발음을 합하여 (ㄷ + 옹 = 동)이란 발음을 표시했던 겁니다. 마지막의 절(切)은 앞의 두 글자가 (동)의 발음을 반절법으로 표시한 것을 의미합니다.이런것을 반절법이라 부르며 한자의 음을 책에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이를 보면 한글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실 겁니다.

 

최만리가 말한 용음과 합자는 바로 이 반절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한자의 용음합자인 반절법이 훈민정음의 용음합자와는 실로 근거가 없을 정도로 다름은 여러분도 금방 아실수 있겠지요.

 

이상에서 보듯 실록과 상소문 그리고 해례의 정인지서문에 나타난 古篆은 바로 한자의 초기형태인 전서(篆書)를 의미한다고 보며 허웅선생의 말씀대로 해례의 창제원리(자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하고 모음은 천.지.인을 상형)에 따라 훈민정음을 창제했는데 하고보니 古篆과 닮은 점이 있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추가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덧붙여 본다면 그당시 집현전학사들의 엄청난 반대를 걱정한 세종께서 일부러 훈민정음이 고전의 모양을 본떳다라고 하셔서 훈민정음이 한자와 무관한 글자가 아님을 들어 신하들을 설득하려 하신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실제 최만리상소문에 세종께서 최만리에게 훈민정음이 한자와 무관하지 않음을 말하시며 설득하신 정황이 있음을 여러분도 보셨으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훈민정음과 관련된 이야기들

 

 

한글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럴까? 

세종 25년 1443년, 훈민정음이 발표되자 당시 집현전 최고책임자 부제학 최만리는 한글창제를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3년뒤 완성된 '해례본' 서문에 정인지는 "전하창제"라 기록하였으며, '훈민정음' 서문에도 "내 이랄 위하야 ... 맹가노니.." 라고 적고있다.

 

또한 세종실록에 보면 최만리의 반대상소에 대해 세종은 "설총의 이두는 옳다하고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여, 세종자신이 직접 창제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나타내고 있다.

 

한글을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면 집현전 학자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한글창제에 관여한 집현전 학자들은 정인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등 일곱명인데 이들을 '집현전 칠학사'라 한다.

특히 신숙주는 중국어 일본어 등 다섯나라의 언어에 능통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한글창제 작업에도 가장 많이 동원되었는데, 그의 문집 '보한제집'에, 한글 28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며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세종은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고 전격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집현전 소장학자들은 그 후 몇년동안 한글서적 편찬을 하였을 뿐이었다.

 

절대권력의 군주였던 세종이 왜 그렇게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해야 했을까?

 

무엇보다도, 사대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중국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 분명했던 중신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궁내에 불당을 지으려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자 황희정승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창제때 만큼은 내불당사건때와는 달리 초강경으로 대처하였으니, 반대상소를 올린 학자들을 모두 하옥시키고 한글서적 편찬사업을 강행하였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세종 10년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와 한다.

 

 문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난다. 모든 백성들이 글자를 알아 인간의 도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하려는 세종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한글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세종은 과연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던 것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남달리 열중하였던 세종은 특히 당대최고의 언어학자였으며 어느 학자도 그를 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언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둘째딸 정의공주 등 직계가족들의 도움으로 한글 스물 여덟자를 만들었다.

 

 정의공주의 시댁 죽산 안씨 족보에는,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풀어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구를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변음과 토착은 민간용어 또는 사투리로 추측됨).

 

성삼문의 저서 '직해동자습' 서문에는 세종과 문종이 함께 한글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자들이 한글창제에 깊숙히 관여하였다는 또다른 좋은 증거이다.

 

 

한글과 유사한 문자는 없는가?

 

일본의 "신대문자" 고조선 글자라는 "신지문자"와 "가림토문자" 등이 그 모양만으로 보면 한글과 유사한 면이 많다.

 

지금도 일본의 신사에는 신대문자를 적어 놓고 신성시하는 곳이 100여개소가 넘으며, 민간의 부적에는 아직도 이러한 문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오랜 옛날 조상의 신이나 영험한 신령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그들이 살던 시대의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때문이다.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 운해> 에는 -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용하던 俗用文字가 있었는데 그 수가 일정치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다 - 고 적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한문외에 민간에서 사용되던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만약 세종당시 이런 민간문자가 있었다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이 이 문자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세종이 참고했다는 글자 - 고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는 오랜 세월동안 미궁속에 잠들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이는 세종이 창호문의 문양을 바라보다가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기역 니은 이라는 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훈민정음 해례가 발견되면서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한글의 글자꼴이 무엇을 본따 만든 것인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때문이다

 

기역은 혓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ㅁ은 입모양을 본떴다. ㄱ,ㄴ,ㅁ,ㅅ,ㅇ 이처럼.. 다섯 개의 기본음은 발음기관의 생김새에서 본따 만들었던 것이다.

 

그외의 글자들은 매우 간단한 원칙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했다.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소리가 강해지면 기본자에 획을 더하면 된다. (ㄱㅋ, ㄴㄷㄹ, ㅁㅂㅍ, ㅅㅈㅊ, ㅇㅎ...)

 

그런데 이 경우, 동일한 계열의 소리는 동일한 글자꼴을 갖게 됨으로써 한글은 소리와 모양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가 되는 것이다.

 

혓부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인 기역 "ㄱ" - 이는 동서양 흑백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 현상인 것이다.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어떨까?

 

세계적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94년 7월호에 문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글은, 한글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 이라는 최상급의 표현을 써서 한글을 극찬하고 있다.

 

다른 문자와 비교해도,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한 것이다.

미국인 학자로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세계 문자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 그것이 바로 한글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자의 사치 - 그것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언어학자 세종의 외로운 노력이 가져다 준 고귀한 선물이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비록 오랑캐가 된다 하더라도 백성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의지. 한글창제는 극소수 양반층만 누리던 문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준 세종의 거룩한 문자 혁명 이었다. (KBS TV 일요스페셜 1999.10.10.)

 

 

 

'한글'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다.(대종 언어 연구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소리글자의 본명은 '訓民正音훈민정음'이며 '한글'이란 명칭은 주시경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다른 학설도 있음).

생각컨대 성군 세종께서 '훈민정음'이란 명칭을 붙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명칭이 가슴에 와닿는 것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능히 실어 펴지 못하는 고로 내 이를 어여삐 여겨..."라는 문구와 함께 訓民훈민이라는 말속에 담긴 백성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 訓民훈민에는 단군조선 2100년간의 국가철학인 '홍익인간'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한글이란 명칭에는 그러한 애민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모름지기 성인이 심혈을 기울여 작명해 놓은 명칭을 바꿀 때는 그에 따른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식명칭 훈민정음을 한글로 개변시킨 과정을 조사해보니 특별한 개명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과연 당시 조선어학회[한글학회]는 세종대왕을 무시하고서라도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안될 어떤 중요한 명분과 당위성이 있었을까?

초기에 필자는 '正音정음'이란 말의 의미를 단순히 '바른 음' 또는 '표준음' 정도로만 이해했었다. 그런데 몇 가지 사실을 접하고 나서 상말로 "이렇게 깊은 뜻이..." 하며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桓檀古記』단군세기 편에는 "단군 가륵 2년, 곧 B.C. 2181년 삼랑 을보륵이 正音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일러 加臨土가림토라고도 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 중 주목할 부분이 있다.


단군 때의 정음[가림토] 38자

그것은 바로 '正音정음'이라는 낱말이다. 그간 국내에서는『桓檀古記』열풍 이후,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한글을 세종대왕이 최초로 창제한 것이 맞는가'에 대한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 왔다.

이런 와중에 필자는 '가림토'라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정음'이라는 낱말에 더 주목했다. 그것은 '훈민정음'에 들어있는 '정음'과 완전 일치하는 것으로, 세종께서 당시 고사서인『단군세기』등을 보았을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세종께서 표음문자를 집대성하고 그 명칭을 짓는 과정에서 '조선음자' 또는 '세종언문' 식이 아닌 고서에 나오는 옛 명칭 '정음'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조상의 맥을 이어받음을 분명히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왕들 중에서 왜 하필 세종만이 그러한 일을 구상·추진했으며 그 배경 및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그 분이 천재였기 때문일까? 그런게 아니라면 세종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영어를 비롯한 서방제어 어휘의 상당수가(물론 중국어, 일본어도 마찬가지) 고대우리말의 변음임을 확신하고 그 증거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과정에서 K일보의 한 여기자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통렬한 지적을 했다.

"아니 당신이 세계원음으로 내세우는 음은 동국정운에 표기된 훈민정음이 주류인데, 그것은 다 아다시피 중세한국어이지 않느냐? 그 이전에 고구려·백제·신라의 고대한국어가 있고, 또 그 이전에는 상고한국어가 있는데, 상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시대의 음은 자료불충분으로 확실한 정황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중세한국음을 가지고 상고 이래의 세계음을 대조할 수가 있느냐? 공부를 다시 하는게 어떠냐?"

물론 그녀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굳이 우리 상고음까지 거슬러올라가지 않고 세종께서 정리해놓은 정음만 가지고도 세계제어의 정체를 밝히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학계에서 중세한국어의 한 자료로 취급하는『동국정운(1447)』만 가지고도, 영어 cow의 인도유럽기어 *go는 우리말 (암소 고) 그대로이고, steel(강철)의 정체는 鐵(쇠 철)의 옛음 텰의 된소리 ㅅ뎔[styoul]의 모음변형이라는 사실을 별 무리 없이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데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