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6 : 한국의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
국보 147호, 암벽에 선조(線彫), 200cm x 800cm,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신석기, 청동기시대
천전리 암각화에는 윗부분에 사슴 등의 동물 모습과 인간 모습, 추상적 도형들이 있고, 그 아래 부분에는 가는 선각의 글씨들과 인물, 동물 또는 추상적 도형들이 새겨져 있다. 아래 부분의 글씨는 신라 시대의 선각 글씨인데, 당시 글씨를 새기기 위해 바위를 평면으로 만들어서 본래 암각화에 있던 문양들이 많이 파손되었다.
암각화 중 가운데 붉은색의 중간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암수 사슴 한 쌍이 있다. 이 그림은 생산의 풍요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암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하학적 문양이다. 다른 곳의 암각화도 이와 비슷한 무늬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문양 중에는 눈과 눈동자를 동그랗게 그린 모양의 동심원도 있고, 이중선으로 표현된 마름모형 문양도 있다. 동심원 문양은 태양신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가 농경사회였으니만큼 태양은 곡식을 여물게 하고 과일을 익게 하는 소중한 존재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중선 마름모형 문양은 여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문양은 인구의 번성을 기원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천전리 암각화가 있는 곳은 선사인들의 제사 지내는 장소라고 여겨지고 있다. 선사인들의 하늘에 대한 제사의례가 생명 창조와 관련된 신성성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암각화도 생명을 만들어내는 태양 빛이나 성적 표현물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문양들은 성기나 태양을 상징하고 그에 따라 풍요를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
종목 국보 285호, 명칭 울산대곡리반구대암각화(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분류 각석, 수량 1기, 지정일 1995.06.23
소재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 시대 석기시대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을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1960년 사연댐 건설로 인해 현재 물 속에 잠겨있는 상태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19990123 | 3000년전의 고래사냥 - 울주 암각화의 비밀 |
19981205 | 한반도,고인돌왕국의 수수께끼 |
(02/4/20, KBS역사스페셜)
[반구대 암각화 전경]
[반구대 암각화 근경]
[천전리 암각화 전경]
[천전리 암각화 근경]
국보 암각화 있는 울주 반구천, 심의 20년만에 명승 지정
입력 2021. 04. 28. 17:14 댓글 34개
지질·선사·역사시대가 어우러진 경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에도 탄력받을 듯
"지자체 싸움과 정치에 휘둘린 훼손,늑장 지정"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국보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울주 반구천(현재 이름 대곡천) 일대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됐다. 이에 따라 반구대 계곡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반구천 일대
문화재청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자연유산인 울주 반구천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지난 2001년 명승가치에 대하여 처음 조사한 이후 여러 차례의 추가조사와 논의를 거쳐 울산광역시 신청을 받아 20년 만에 지정된 것이다.
반구천(盤龜川)은 조선 시대까지 지금의 대곡천을 부르던 원래 이름이다.
울주 반구천 일원은 계곡물이 수많은 절벽과 협곡, 구하도(옛 물길), 습지 등을 거치며 다양한 지형과 숲 경관을 만들고 있으며, 구곡(九曲)문화와 함께 저명한 정자 등 자연경관, 역사문화경관이 복합된 명승으로서 가치가 뛰어난 자연유산이다.
반구천 일원에 남아있는 공룡발자국
이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층으로, 초식공룡과 익룡의 발자국 화석이 있으며, 특히, 암각화 인근의 코리스토데라(수생 파충류) 발자국은 세계 최초로 발견되어 노바페스 울산엔시스(Novapes ulsanensis)로 명명까지 된 한반도 공룡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특히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으로 선정된 선사 시대 고래사냥 모습의 암각화(국보)가 반구천 일대에 있다.
반구대 암각화 20년전 찍은 사진. 지자체들 간의 물싸움 때문에 무분별하게 댐이 만들어지면서 물에 잠기기를 거듭해 지금은 많이 풍화됐다. 아쉽게도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일부. 수몰 등 과정에서 지금은 상당부분 풍화됐다.
한 어린이가 오랜 기간 반구대 암각화 공부를 한 뒤, 지금 남아있는 미미한 흔적을 토대로 그린 반구대 암각화 상상도.
또 선사 시대부터 삼국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각석(국보), 정몽주(1337~1392)가 유배 중 머문 포은대(반구대의 다른 이름)와 반고서원유허비(울산 유형문화재), 반구서원, 집청정(集淸亭) 등은 선사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조상들의 생활과 유람문화를 알려주는 역사문화적 가치도 높다.
반구천의 아름다운 구곡(九曲) 경관은 많은 사람들이 남긴 시, 글, 그림으로 남아있으며, 특히,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공회첩(孔懷帖」에 남긴 반구 그림을 통하여 이곳이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명승임을 알 수 있다. 반계구곡(磻溪九曲)의 일부는 사연댐에 수몰됐고, 백련구곡(白蓮九曲)은 대곡댐 건설로 사라졌다.
정선의 공화첩에 나타나있는 반구천 명승
반구천 일대 기암괴석과 반석
문화재청은 지정추진 과정에 주민설명회 개최, 주민불편사항을 수렴하였으며, 지정 이후에도 주민과 관람객에게 불편한 도로를 개선하고, 사유지 매입, 경관 저해 지장물 철거 등 제반 관람환경을 조성하여 주민과 상생하는 문화재관리의 바람직한 유형을 만들 계획이다.
지방자치단체 들간의 싸움과 정치 논리에 휘말려 반구천(대곡천)과 암각화와 기타 문화재는 거듭 훼손 당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못지 않은 우리 선사인들의 우수성을 보인 국보와 문화재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이고, 이는 길이 자부심으로 남을 엄청난 자산이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두번 다시 이런 파괴적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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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와 천전리 암각화
암각화 전체(가로 6m * 세로 3m)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세인들의 관심과 학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한단고기와 화랑세기 (花郞世紀)의 진위논쟁일 것이다. 전자는 웅장한 우리 조상들의 먼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심정적으로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은 책이고 , 후자는 현재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고려시대 이전에 쓰인 역사서라는 사실과 만약 사실이라면 신라史 연구에 획기적인 요소가 될 것임은 물론, 근친혼과 동성애 다부제(多夫制)와 같은 신라사회의 충격적인 性 풍속도에 관한 흥미 때문일 것이다.
공통점은 두 권이 모두 저자 死後에 비교적 근세에(1911년과 1989년) 세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이고, 일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단고기는 일본에서 출간되어 한국으로 역수입 된 것이고, 후자는 원본이 일본 왕실도서관인 궁내성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저자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가 1933~1945 동안 왕실 도서관 史書로 있으면서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하학 무늬와 여성의 자궁 등) 암각화 좌측부
화랑세기는 두 권의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에 서강대 이 종옥 교수의 진본론과 서울대 노태돈 교수 등의 위작 설 등으로 대립되고 있고, 최근에 박창화의 초기 논문이 발견되어 다시금 논쟁이 재연되고 있는 사항이다
두 권의 진위 논쟁 Point는 반대론자들은 구체적인 증거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측면을 강조하고, 진본론 자들은 그 창작의 의도성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내용이 필사과정에서 오류, 첨삭 ,수정은 있을지라도 골격은 사실일 것으로 주장한다. 즉 왜 저자가 무슨 의도로 그런 내용을 저술하였거나 필사하였을까 이다.
만약 위작이라면 상상을 초월한 천재적인 창작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저술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고, 만약 명예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더 효과적인 방법과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헌상으로‘화랑세기’는 8세기 신라 성덕 왕 때 한산주 도독을 지낸 김대문(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신라 화랑의 전기이자 역사책이다. 이 책의 허구 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경남 울주군 소재 천전리 암각화(Petroglyph)이다. 이곳은 선사시대의 이해 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암각화와, 후대 신라시대에 새겨진 문자들 특히 화랑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문 및 낙서(?)
>
현재 우리 사회의 성문화로 보면 타락 적이고 패륜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8세기는 통일신라시대로 한창 신라가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고, 신라에서 발견되는 토우 등에서 보이는 포르노 적인 Sex 장면은 당시대의 사회상이 화랑세기가 이야기하는 것과 일치되는 모습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명문 >
지역적으로 경주와 가까워서 당 시대에 화랑들의 수련장이거나 휴양지 엿을 것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의 이름이 이곳 암각화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위작에 힘을 보탠다. 그러나 나의 私見은 보는바와 같이 조각이 조잡하여 이곳은 화랑도의 말단 졸병들의 낙서(?)이기 때문에 소위 요즘말로 지휘관급인 소대장 이상만 기록되는 화랑세기의 인물과는 일치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것으로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수긍이 안 간다. 더 나아가 저자로 알려진 박창화씨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위작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도 알고 있었을 관창이나 기타의 알려진 화랑의 이름을 차용 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일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도적인 위작이 아닐 수도 있다
참고로 천전리 각석은 1984년 동국 대에서 조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한 시대의 암각화 만이 아니고 적어도 청동기 시대의 기하학적인 무늬와 동물에서 신라 시대까지 다양한 그림과 시대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풍화 작용에 의한 보존에 상당한 문제점이 예상된다. 유명한 반구대 고래 암각화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사진에서 보는 계곡 물이 흘러내려 雨期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물에 잠기게 만든다.
사실 이곳의 최초의 발견자는 문명대교수가 아닌, 법흥왕의 친동생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었다. 때는 525년, 그는 사랑하는 애인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이곳으로 놀러왔다가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짓고 명문을 남겼다.
그 후 사부지갈문왕은 형 법흥왕의 딸, 그러니까 여 조카와 결혼하여 아들 심맥부지(深麥夫知: 후일 법흥왕)를 낳았다. . 사부지갈문왕은 이곳에 놀러 온지 12년 후에 죽었고, 2년 후, 그의 부인은 애달프게 그리운 남편의 젊은 시절 로맨스가 서린 이곳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추모의 제식을 올린다. 7세의 어린 아들은 그 해 겨울 왕위에 올랐다.
<천전리 계곡 :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1999/7/10 KBS 역사스페셜) |
花郞世紀
花郞者仙徒也 我國 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昔燕夫人 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只召大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 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花郞] 花郞之名始此 古者 仙徒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花郞之史 不可不知也
魏花郞者剡臣公子也 母曰碧我夫人 以母寵 爲毗處王摩腹子 世所謂摩腹七星也 阿時公 父曰善牟 母曰寶兮 守知公 父曰伊欣 母曰俊明 伊登公 父曰叔欣 母曰洪壽 苔宗公 父曰阿珍宗 母曰寶玉公主 比梁公 父曰比知 母曰妙陽 ?吹公 父曰德智 母曰加耶國??公主 或曰 法興大王居七星之首 魏花郞則 以母微不參云 而七星錄及寶兮記 皆無伊登公 載魏花公 則未詳孰是也
公 面如白玉 唇若赤脂 明眸皓齒 談下生風 碧我夫人在捺已 生一女 乃毗處后碧花夫人也 碧花夫人入宮 而公以私弟 出入有寵 法興大王 時以副君之子 位在國公 而寵不及焉 阿時公乃勸大王 下拜于公 公告于剡臣公曰 國公下拜于汝者 欲以汝爲臣也 今王老 國公有大望 汝其事之 公乃詣爲臣 事多稱旨 法興曰 吾鄧通也
未幾 毗處果崩 智證大王卽位 以法興爲太子 公勸碧花后 事太子生女 是曰三葉宮主也 時太子妃保道夫人 乃毗處女 而無寵 保道之弟 吾道者 妙心私通善兮后而生者 故甚美 有寵於太子 媚于三葉 而深結于公 潛相通焉 乃生玉珍宮主 太子知之 以吾道賜阿時公 以碧花賜比梁公 乃寵正妃保道夫人 黜公疎之
雖然 保道德之 請于智證大王 封于天柱 而主祀 延帝太后亦幸之 及玉珍入幸 乃復如初寵之 遂居伊飡之位 玉珍專寵 法興使保道爲尼 以公爲臣 以故 只召太后當國 而置花郞 以公爲其首 號曰風月主
只召者保道女也 爲立宗公夫人 生眞興大王 而法興大王愛玉珍宮主 無立意 只召憂之 公乃曉大義于玉珍 而立之 時人莫不義之 以此 思道太后亦無事 公之德大矣
公之子孫甚繁 長女玉珍宮主 次女金珍夫人 乃吾道夫人生也 玉珍初嫁英失公 未幾 受幸于法興大王 生比臺公 大王欲立爲太子 公諫之曰 臣女無骨品 而且與英失混處 恐未可也 法興崩 只召太后降比臺公王子位 以奉公祀 比臺公女開元宮主 事銅輪太子 有子
公子二花郞 乃俊室夫人生也 俊室者守知公妹也 慈悲王外孫也 有美色 善文章 初爲法興大王後宮 無子 歸于公而生 亦貌美而善文章 只召太后寵愛之 常侍左右 太后女叔明宮主悅之 逃出生子 是爲圓光祖師 我東方大聖人也 圓光之弟曰菩利沙門 卽予曾祖也
贊曰 花郞之祖 沙門之? 靑我之孫 碧我之子 在地則仙 在天則佛 圓滿常住 功德無缺
未珍夫公者阿時公子也 母曰三葉宮主 乃法興大王女也 夢見白鶴 而生公 貌美而多才 法興大王愛之 與比臺公等長于宮中 時玉珍宮主寵隆 只召太后以正統難立 三葉與阿時護之 以此 太后愛三葉及公 及太后聽政 以公爲嬖臣 時公年十六 能稱旨
先是 三山公女俊貞 爲源花 多置郎徒 至是 法興大王女南毛公主者 乃百濟寶果公主生也 亦以絶色 與公篤好 太后愛公 而右南毛 欲立爲源花
先是 法興大王 以玉珍宮私夫英失公 爲龍陽君 寵居上位 命破源花 故俊貞事之勤 沮破南毛 太后雖以遺命 以英失爲繼夫 而實不悅 乃命公破之 太后又慮郎徒不足 使屬魏花公郎徒 倍之 俊貞妬之 乃誘以酒 害之水上 毛徒發之 太后乃廢源花 以仙花爲花郞 號其衆曰風月 號其頭曰風月主 魏花公主之 公副之 未幾 公主之
公自失南毛以後 無以爲配 公以外孫 嘗侍法興大王於宮中 與後宮妙道夫人有私而不敢言 太后知之 許之 公乃娶妙道 生美室娘主及美生郞 美室才色絶人 事眞興眞平 受特寵 美生郞亦入花郞 公事只召太后 盡其忠 寵衰 願以身殉國 率郎徒赴戰 累建大功 及美室得寵 進爵角干 夫人妙道 亦至宮主 以續大元神統 於戱盛矣
贊曰 以色事之 極盡其忠 以勇奉公 又盡其效 夫人妙道 魏公之孫 配生美花 天道攸長
毛郞者南毛之弟也 先是 法興大王以國公入百濟 與寶果公主有私 後寶果逃歸入宮 生南毛毛郞 皆有美色 未珍夫爲花郞 以毛郞爲副 有寵於太后 眞興大王九年 太后命爲三世風月主 以慰南毛之靈 魏公妻以女俊花 卽二花郞之女兄也 生一女俊毛 而早卒 遂以二花郞繼之
贊曰 東城之美 魏花之壻 大王之子 太后之好
二花郞者魏公之子也 膚如玉膏 眼如笑花 善音律文章 以十二歲 能副毛郞公 太后極愛之 時黃華淑明松花等公主 皆從公學 公以此得通淑明宮主 時太后欲專上寵 皆以公主奉之 上以爲其胞妹 不甚愛 公主亦然 公主之父乃苔宗公也 時以上相爲國柱石 上以此不敢忽公主 公主恃寵自蕩 及生太子 封爲皇后 益無忌憚 上素愛思道皇后 欲以其子銅輪公 爲太子 而不得 至是 淑明后與公相通益甚 累爲上見 上欲廢之 太后泣諫之 不得 上不幸淑明 而淑明自有娠 乃與公逃出 群臣疑太子非上子 乃以銅輪公爲太子 公雖有罪 而有寵於太后 且還爲銅輪公一幸 故思道皇后勸上力保以安太后之心 遂許淑明爲夫婦 乃生圓光菩利 亦非天意乎
開國五年 毛郞公 遊比斯伐 得疾 途卒 郎徒乃願奉公 時 公以太后寵常居宮中欲辭之 郎徒曰 魏公之子不居而誰可居乎 太后乃命居之 以爲四世風月主 使巡郡縣 時太后 方娠萬呼娘主 故其産而行也 玉珍宮主之妹曰金珍 亦魏女也 事法興大王 無子 大王崩 退居蚊上 南毛初害 郎徒欲奉之 太后不許 仇利知公潛通之 生?含公 極精妙 早屬郎籍 至是奉爲副之 太后召見宮中曰 此兒不下比梁叔公 美過碧母 可賀得人 公亦酷愛?含公 起居必同 金珍娘主感而壽之
?含公有弟斯多含公 大有妙梁之風 郎徒多歸之 時有武官郞者亦有人望 多畜私徒 聞斯多含公年少好義 求與 相見大悅曰 公子誠古之信陵孟嘗也 願事之 斯曰 我何敢有乎 乃歸于公 公乃奏太后曰 ?含之弟斯多含 年未免艾而自有郎徒 殆所謂國仙者乎 太后乃召宮中賜食 問其懷人之道 斯曰 愛人如己而已 善其善而已 太后奇之 言於大王 以爲貴幢 以掌宮門 其徒千人 莫不盡忠
時 比助公子文弩 亦豪傑 善擊? 公使斯多含學?于文弩 弩曰 ?是一人敵 何用高貴知 公曰 不敵一人則 安能敵萬人乎 此兒好俠 雖曰多衆 不無其敵 汝其保之 文弩乃以其徒五百隨之 其威盛於?含 時銅輪公漸長 大王憂輔導之無人 使?含輔之 ?含曰 是吾職也 乃以花郞之位辭其弟 公乃以斯多含爲副 愛之如?含 時人賀公得人 未幾加耶反 斯多含請從軍 得勝 公乃以主位讓之 乃與?含公專務宮中輔養太子 於絲 盛矣 公之淸德榮名 萬世不絶
公與淑明公主出居永興寺 專心佛道 太后亦爲之歸依 肅太子亦落彩受戒 公子圓光法師 淑明公主所生也 受娠時 公主慕公不能自抑 恐有禍 而欲自殺 忽有金佛來告曰 我乃藥師佛也 欲借公主之腹而居之 公主乃?其前而合掌拜禮 佛乃抱公主而臥 ?若入之 時 公亦慕公主不禁 乃犯宮中 見公主 仰臥若失抱 而問故乃喜曰 是乃佛力也 交歡 生之 果大聖如來也 淑明又生公二女 曰花明玉明 皆入眞平大王後宮 圓光之弟菩利 娶肅太子女萬龍 生禮元角干 卽予祖也 公又娶?含公妹 生庶子七人 皆貴
贊曰 二花風流 鷄林淸談 華胄寶眷 聘王公主 金佛來依 藥師如來 花郞之門 法師之親 振振公族 萬世無窮
斯多含者仇利知子也 初比梁公慕碧花后 常如其厠 法興大王愛比梁公 不禁之 果通后生子 故曰仇利知 美如碧后 膽如比公 及長 好郎徒武事 通金珍娘主 生?含塞達斯多含 塞達者 二花公之妾也
斯多含 十二能擊?愛人 十六率精兵五千 馳入?檀門 竪白旗 大破加耶軍 以功賜田 則分給部下 所虜生口盡放爲良人 大王益重 賜閼川地 則固辭不受 擇其不毛者數頃受之曰 此足以令人勤也 時二花公多上寵 倦於郎徒 乃以公爲五世風月主 以公胞弟薛原郞爲副 年十三也 公臣武官郞多功 以微賤不報而卒 公哀之痛 亦瘦盧而盡 公素愛未珍夫公女美室 美室亦好公 而以太后命嫁于世宗公 以此竟不娶而卒 郎徒請復立二花公 二花公曰 無如世宗殿君也 乃立世宗爲主
贊曰 比梁遺氣 魏花之孫 征虜功高 自居不毛 靑鳥山中 松栢長靑
世宗者苔宗公子也 母曰只召太后也 端雅美風儀 孝于太后 忠于大王 大王亦極愛之曰 是吾末弟也 少不禁束 而公天姿極好 無有失焉 太后擇公卿之美女聚于宮中而觀公最喜美實娘主而欲戱之 太后大喜 使美室入宮中事之
先是 斯多含公出征時 美室作歌送之 及歸 已入宮中爲殿君夫人 斯多含公乃作靑鳥歌而悲之曰 吾死爲神兵 保護殿君夫妻 臨卒 二花公抱而哀之曰 爾弟尙幼 而爾若不起 誰爲之繼乎 斯曰 臣妹美室之夫依毛郞公故事 則不亦可乎 二花公乃奏太后請立之 太后不肯曰 吾子幼弱 安能爲乎 美室乃勸世宗曰 從兄慕我而死 臨死一言不聽 則非丈夫也 世宗然之 乃說太后得旨 乃爲六世風月主 仍以薛花郞副之
是夜美室果夢 斯多含公入寢曰 吾與汝願爲夫婦 可托于爾腹而生 乃生夏宗公 時銅輪太子已長 太后乃以萬呼公主欲配之 以續眞骨正統 思道皇后欲續大元神統 陰與相議曰 吾兒善子 可與太子相親有子 則當以汝爲后也 美室大喜 與太子相通有娠 大王不知之 使美室入侍承寵 以爲皇后宮殿主 世宗乃求出征 美室恃寵放蕩 乃通薛原郞及其弟美生 大王不知之 奉爲源花 使二郞統率郎徒而朝之 大王與殿主受朝于南桃 源花之制廢二十九年而復興 乃改元大昌
美室色麗善媚 大有玉珍之風 時以爲斯多含之靈常在美室之寢而授之好計云矣 鴻濟元年三月 銅太子以寶明宮獒事卒 大王乃索太子 從人多屬美室郎徒 美室恐得罪 乃辭源花 大王亦憐世宗 乃召入之 許美室復歸 美室乃勸世宗傳位于薛原 時金太子亦好美室 交結薛原美生等 爲方外友 世宗公獨守淸節 出將入相 淡然無私意 孝于太后 忠于大王皇后太子 貞于美室 花郞中花郞也
贊曰 太后私子 相國寵胤 淸雅高標 花郞典型
薛花郞 初名薛原郞 金珍娘主之私子也 其父薛成以郎徒美貌善媚 爲仇利知龍陽臣 仍通于娘主而生也 美風采善玉笛 而出微之故 郎徒無奉意 而美室以上寵號令郎徒 故郎徒不敢多言 乃爲七世風月主 以美室爲副 原乃屈折下士 散財懷人 郎徒咸服之 而猶有未洽 美室乃勸原娶毛郞公寡妻俊華娘主 娘主時年三十八 寡居十八年 復得花郞爲夫 遂生子薛雄 於是諸徒賀之曰 魏公之孫 無復有不服之人 原乃與美室相通 益無忌憚 俊華知之而不能禁
先是 俊華女俊毛因美室得通于銅太子 至是又欲金太子 薛原沮之曰 事銅太子之事 聖上知之 今又納金太子 則上知之 則必不悅于吾夫妻矣 俊華曰 郞君之言善矣 乃名俊毛爲尼 毛不肯 原乃誘以通之 歲餘有娠 俊華知之 怒曰 沮納太子而自私之 是何道乎 原乃求乞于美室 美室乃使美生娶之而事平 俊毛乃生薛原女于美生 名美毛 郞徒不知之
時 文弩一派 從世宗于外 有戰功 而不得位 不服於薛原郞 自立一門 於是郎徒遂分 薛派以爲正統在我 而文波以爲淸議在我 互相上下 美室憂之 使世宗和之 不得
而眞興大王崩 美室雖有寵於新主而 未若知道夫人 知道之父起烏公 與文弩爲從兄弟 故知道素服於文弩 乃勸王立文弩爲國仙 以秘寶郞副之 文弩之徒好武事 多俠氣 薛原之徒善鄕歌好淸遊 故國人指文徒爲護國仙 指薛徒爲雲上人 骨品之人多從薛徒 草澤之人多從文徒 互相磨義爲主
眞智大王以美室之故得立 而好色放蕩 思道太后憂之 乃與美室議廢之 乃使弩里夫公行之 弩里夫公乃思道之兄也 與美室之夫世宗公將擧大事 恐文弩之徒不服 以太后命合兩徒爲一 復奉美室爲源花 世宗爲上仙 文弩爲亞仙 薛原秘寶爲左右花郞 美生爲前方花郞 以鎭之
以此 文弩之徒多以微賤之人擢爲高官 草澤之人降順之徒以爲出身之門 而奉文弩如神 美室乃知薛原之不及文弩 乃命薛原師事文弩 薛原之徒多有不平 原曰寵主之命 不可抗也 乃屈服事之 以此文弩之徒亦善服於薛原 美室喜之 使讓其位於文弩
文弩曰 國仙不下風月主 且子爲我弟 旣有以師受弟乎 薛原曰 國仙雖是前王所立 非風月正統也 且世宗殿君 以王子之貴 尙繼斯多含公 ?我奉事師兄以美室宮主之命也 今宮主又命讓位 故不敢背也 文弩曰 宮主旣有命 則臣亦何敢反乎 乃繼之曰 道脈則師 統脈則弟 當何居 美室曰 薛原我之寵臣 且正統之兄也 安可不拜乎 文弩乃下拜稱臣 美室乃謂薛原曰 吾所以使汝先屈者 以有今日也 薛原拜謝曰 臣之一髮一膚無非寵主有也 又何多言乎
文弩以國仙爲花郞之首 故曰仙花 薛原從美室于永興寺 後加號彌勒仙花 終始于美室者薛原也 終始于世宗者文弩也 盛矣至矣
贊曰 美室之臣 仙花之始 托于佛門 以令其美 盛矣淸名 長在靑史 終始一忠 開天福祉
文弩者比助夫公子也 母曰加耶國文華公主也 自幼善擊?好義氣 及加耶反 斯多含請同行 弩曰 安有以母之 困其外朝之民者乎 遂不行 國人有非之者 斯多含曰 吾師義人也 及入加耶 戒妄殺 以報其意 及世宗繼之 以其徒屬焉 征麗濟 累有功 以母之故不能顯 世宗公愛惜之
及眞智之廢 以功進阿飡 始寵于美室 乃得仙花之位 卽八世風月主也 公好勇能文 愛下如己 不拘淸濁 歸之者盡懷之 故名聲大? 郎徒相勵 願以死效 士風以是起秀 統一大業未嘗不萌于公也
公之時 署郎徒部曲 制度 燦然備矣 居三年 傳于秘寶郞 公久未娶 及爲國仙 奉久宮娘主爲內援 久宮者 荒宗公女也 事銅太子生女 寡居 與美室秘寶各爲從兄弟 秘寶郞力勸久宮 以公爲繼夫 生三子二女 公之爲仙花 久宮多有內助
贊曰 加耶外孫 義氣之宗 以仙爲花 振我國風
秘寶郞者 比臺殿君之子也 母曰實寶娘主 乃未珍夫公之妹也 與薛原公同年生 同學歌不及 學笛又不及 乃投文弩而學? 遂爲高弟 力輔文弩 爲仙花 以功公爲其副 至是 爲九世風月主 務遵文弩制法 力於拔微救弱 分遣郎徒 以慰邊戍 時美生公以薛原公副弟 久未居位 文弩公乃命讓位 公在位亦三年 郎徒惜之 時建福二年春正月也
公娶弩里夫公女細珍娘主 生子細好郞 又娶眞興大王女德明公主 生子 皆貴顯 庶子柳五郞者 公妾柳枝生也 從智明法師入陳 多藏書以來 以開後進沙門 其功亦大矣
贊曰 法興之孫 眞興之斷
美生者未珍夫公之子也 母曰妙道夫人也 公之妹曰美實宮主 有寵于眞興大王 公亦被上寵 累召入宮 與銅太子金太子等同學于?含公 從斯多含公爲郎徒 年才十二 世宗公代之 以公爲前方花郞 欲傳其位 而美室宮主寵愛薛花郞 使公事之 至是乃爲十世風月主 公年已三十六歲也 公笑曰 斯多含公十六爲主 天下榮之 予以十三爲前方花郞 天下尤榮之 以爲年未十六而必主之 豈謂三十六年而得乎 美室曰 以我寵時 汝尙如此 ?我寵衰 誰爲夏宗計乎 乃以夏宗副之
時郎徒尙有爭論 其一曰 不拘貴淺內外 拔用人才 以强國力者 謂之統合元流 欲奉大元神統者 美室一派爲其二 欲奉眞骨正統者 文弩一派也 爲其三 雖然 文弩亦忠於世宗 故不敢爭夏宗 統合派以夏宗爲不才 亦不服於美生公 又一派欲立甬太子 以圓光副之 乃文弩派及統合派中混成者也 名曰二花流 又一派欲立天柱公 以舒玄郞副之 乃統合派中加耶派也 公居位三年 議論不一 乃讓于夏宗
公生長富貴 不識下情 性又好色貪財 故衆望不重 雖然久在仙門 郎徒多出門下 故莫敢背之 公多妻妾 有子百人 不能盡記
贊曰 玉珍之孫 大元神通 有子百人 有徒萬衆
夏宗者世宗殿君子也 母曰美室宮主 故亦爲大元神統 文弩派不服 故以二花公子菩利公副之 菩利公之母乃淑明公主 故眞骨正統也 雖然 主兄與副弟異派 故自然不和 美室宮主憂之 乃以思道太后詔大會郎徒 使二花世宗兩公事之 以調之 多用不服之人 以鎭之 以此加耶派漸復有力 乃命舒玄郞爲前方花郞 亦大元神統也 此是二花美室加耶三派團結也
時宮中有三太后 行政大王仁孝承順 故郎徒之好進者多付太后宮 太上太后思道法主 以美室宮主爲法雲 故政令多出美室宮 而法主之女阿陽公主 乃舒玄郎之母也 爲加耶派之日光 而分美室之勢 萬呼太后 大王之母 故尤有上寵 而爲眞骨正統之首主 智道太后出入於太上萬呼之間 以扶文弩正派 故秘寶郞推智道子龍春公 欲代菩利公 而萬呼太后不聽 雖不得位 而郎徒多歸之 舒玄郎曰 龍春公乃先君之子也 我何敢敵之 辭其郎而讓之 於是加耶派亦歸于龍春公 亦大元神統 故美室派不爭之 郎徒皆賀曰 得其人矣 菩利公亦愛龍春公 誓不黨異 眞骨大元之論始于此 夏宗公雖孝于母 主察勢趨之 內贊其論而外不敢言
時銀輪公主失寵于上 乃太上之季女也 太上慮大元而命公奉之 生子孝宗公 先娶薛原公女美毛娘主 生子毛宗 孝宗之妹曰夏姬月姬 毛宗之妹曰柔毛令毛 公淸儉愼色 能愛下恭上 大有世宗風 故 初有不服而終乃歸之 居三年而讓于菩利公曰 先位列仙 皆以大聖 猶居三年 我何敢久乎 菩利公曰 主兄則美室源花之子也 安可與凡仙同例乎 公固辭之 菩利公乃就位
菩利公乃予曾祖也 嘗稱夏宗公於先考曰 今世無比孝子忠臣也 盖美室宮主歷事三朝 兄弟異種 動輒多難 銀輪公主亦恃骨放蕩 公一如世宗公之待美室而不問 太陽公主 以銀輪之兄 與公隣居 惑之甚而 公一不投足 公之淸守如此云爾
贊曰 淸謹守德 以保令名 世宗之子 美室之生
菩利公者二花公之子也 母曰淑明公主 乃只召太后女也 公夢見黃色神麓而生 公生而穎異 有大志 及長 與伯氏圓光法師力學不怠 圓光嘗敎之曰 吾爲佛 爾爲仙 則可以安吾家國 公乃屬郎徒得位 乃建福八年春正月也 以萬呼太后女萬龍娘主爲妻 年才十三 先是太后愛公之胞兄甬太子生萬龍 至是太后慮大元統之纂奪眞通 特授之 萬龍喜爲之妻
萬龍之兄萬明 年長而未許 乃與舒玄郞私之 萬呼太后素與阿陽未洽 故欲囚萬明而流舒玄于萬弩 萬明乃脫而同走 太后將罪 公與萬龍力解得保 時公之女兄花明玉明 皆事眞平大王有寵 故朝廷欲重用公 公不就曰 吾家世襲花郞足矣 又何用官乎 公淸潔自守 而娘主以太后愛女 賞賜甚多 故家道甚侈
公謂娘主曰 我以郎徒之君 豈可獨享富貴乎 吾妻願察我心 娘主曰 夫婦一體 郞君之心 卽妾之心 有何不可乎 乃盡敬之 郞徒以此仰若父兄 凡有患難之人 公與娘主偕往慰護 時人比之二聖 娘主以王妹之貴盡婦道 故公感之 不育他色 情好無比 晩生一子一女 子曰禮元 女曰寶龍 卽文武王后之母也 居三年而傳于副弟龍春公 於戱 盛哉 公之晩年事 出高僧傳
贊曰 菩利沙門 魏公之孫 德合萬龍 恩惠如山
龍春者金輪王之子也 母曰智道太后也 龍樹葛文王之弟也 金輪王以荒亂見廢 居幽宮三年而崩 公尙幼而不識其貌 智道太后以太上太后命復事新王 公呼新王爲父 以此王憐之 寵過殊重 旣長 乃慨然 入文弩之門 事秘寶郞爲兄 與庶弟鼻荊郞務捨郎徒 以此大衆散之 三派皆願戴之 以此舒玄郞以位讓之 至是乃爲十三世 以虎林公副之
公乃革郎徒舊習 一以人才拔之 不拘骨品 曰 骨品者王位臣位之別也 郎徒何用骨品乎 有功者賞 法之常也 何用派爲 衆大洽 曰 文弩之治 可以復明矣 時大王無適子 欲以公之兄龍樹殿君爲斷 以傳之 殿君問於公 公曰 大王春秋方强 有嗣則恐不幸也 殿君以此讓之 而摩耶皇后不聽 遂以殿君爲斷 卽天明公主之夫也 公以此益重於內 以位讓于虎林公 入居樞要 以此郎徒之登用者甚重
善德公主漸長 龍鳳之姿 天日之表 可以嗣王 大王屬意 天明公主孝順讓之 大王乃命公奉之 公固辭不得 乃奉之 無嗣請退 大王乃命龍樹殿君侍之 亦無嗣 公出征高句麗有大功 進奉角干 龍樹殿君臨薨 以夫人及子托于公 乃太宗我皇也 公主卽位 以公爲夫 而公以無嗣自退 群臣乃議三斷之制 公乃以天明公主爲妻 以太宗爲子 先是 公以王命居昊明宮生五女 公無他適子 故太宗子之 庶子五人庶女十八人 皆貴顯 太宗卽位追尊葛文王 於戱 盛矣 聖德如天如地
贊曰 葛文之德 日月幷明 三韓之業 願以大成
虎林者福勝公子也 母曰松花公主 只召太后女也 或曰公乃公主私子 故未詳其父 或曰秘寶郞子也 公多勇力好擊? 早入文弩之門 率儉自居 不以骨品自高 公之嫡兄摩耶夫人 時以皇后有寵 龍春公乃擢爲副弟 至是爲十四世 乃眞骨統也
公熱心淸直 散財施衆 時人稱以脫衣地藏 公謂郎徒曰 仙佛一道也 花郞亦不可不知佛也 如我 彌勒仙花菩利沙門 皆吾師也 公乃就菩利公受戒 以此仙佛漸相融和 公初娶文弩公女 早卒 再娶夏宗公女柔毛娘主 時美室宮主春秋已高 極愛娘主 願見貴子 命公造千部觀音而禱子 乃生善宗郞 長爲律家大聖人 公崇佛益重 乃讓位于庾信公 自號茂林居士 不干朝廷 然國有大事 必奉之而問 與閼川公等作七星友 統一之業多從公等始焉 盛矣 至矣
贊曰 太后之孫 眞骨之流 福入佛仙 共垂千秋
庾信公者 舒玄角干之子也 母曰萬明夫人 卽萬呼太后私女也 父曰肅訖宗 亦立宗葛文王之子也 初萬明與舒玄野合而有娠 太后以舒玄大元流欲不許 乃逃萬弩 凡二十月而生 多有夢祥 眞平大王以私妹受苦 封舒玄公于萬弩公 旣長 有天日之表 太后欲見之 許歸 而見之 喜曰 是眞吾孫也 以是加耶派遂奉之 虎林公副弟寶宗公者 美室宮主末子也 父曰薛原 以公有衆望 讓其位 盖宮主欲慰太后而命之也 時公年十五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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