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3 : 삼도의 神代文字]
[신대문자]
신대문자의 존재는 일본의 상당수 언어.역사 학계에 있어서도
터무니 없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언어학자인 山田孝雄과 小倉進平은 일본 신대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山田孝雄은 신대문자는 위작(僞作)이며, 아비유(阿比留)문자를 비롯하여 현전(現博)하는 모든 신대문자는 한국의 한글에서 유래되었다고 논문발표한 바 있다. 신대문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신대문자가 모든 언어의 기원이며, UFO 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터무니 없는 소리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신대문자의 등장은 일본의 국수주의에서 비롯된 모방 행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대문자에는 한글과 닮은 그것만이 아니라 인도.아랍.알파벳과 닮은 신대문자도 있답니다. - -; 모든 언어의 기원이 아니라 그만큼 철저하게 19세기에 위증한 것이지요. 훈민정음의 기원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들이 독도처럼 언제 쓸데없이 우길지 모르는 상황을 우려하여 한국 학계는 이러한 일본 일부 측의 주장을 경계하고, 많은 자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한글과 일본의 "신대문자"의 수수께끼 출처:PRKOREA웹진 기획기사 2002년12월12일자
일본의 신사에 가 보면, 신도 경전이나 신사에서 나눠주는 부적에, 그리고 어떤 신사에서는 아예 신사 간판에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적혀 있다.(물론 우리처럼 자음 + 모음 + 받침 ― '검'을 ㄱ + ㅓ + ㅁ 으로 적는 것처럼 ― 으로 글자를 적지 않고 자음 따로, 모음 따로 적는다./* 예 : '가'를 ㄱ ㅏ 로./ 그리고 받침을 쓰는 일이 없다) 신관이나 궁사에게 글자의 뜻을 물어보면 "글자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글자는 가나로 된 글과 같은 소리가 나지만 ('가'를 ㄱ ㅏ 라 적고 가나로는 'が'라고 쓰며 '가'라고 읽는다) 가나를 보지 않고서는 어떻게 읽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부적에 쓰는 글자나 간판에 적힌 글도 마찬가지. 모습은 한글과 닮았는데 뜻이나 읽는 방법은 잘 모르고 있다. 이 글자를 일본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 신(『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들이 살았던 때에 쓰인 글자' 라고 해서「신대문자(神代文字)」라고 부른다.
「신대문자」가운데서도 대마도에서 나온「아히루」문자가 제일 잘 알려져 있어서 신대문자를 [아히루 문자]라고도 한다. 18세기, 일본의 국수주의자인 국학(國學)을 공부하는 국학자(그러니까 신국사상가神國思想家)들은, '옛 일본이 쓰던 글자를 찾아냈다' 고 주장하며, 이 신대문자를 널리 보급하고 신대문자로 된 책들을 인쇄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19세기가 되자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조선의 언문(훈민정음)은 일본의「신대문자」를 베낀 것이며 신대문자 쪽이 훨씬 오래됐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45년까지 이어져서 1940년대까지 일본 교과서에는 신대문자가 왜열도 지도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 실렸었다. 20세기 후반까지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대문자가 한글보다 오래되었으며 세종은 일본의 신대문자를 베껴서 한글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 신대문자는 일본에 고대국가가 세워지던 4∼5세기에도 쓰여졌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다. "그토록 과학적이고 훌륭한 글자를 세종 한 사람이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는 없다.「세종실록」에서 세종이 한글을 만들어냈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이다." (신대문자를 연구하는 왜인倭人 학자. 한글이 신대문자를 베꼈다고 주장하면서 한 말) 필자는「신대문자」를 둘러싼 몇가지 수수께끼를 간단하게 살펴보고, 신대문자(특히 한글과 닮은 대마도의 아히루 문자)가 왜 왜열도 고유의 문자가 아닌지, 한글이 신대문자를 베꼈다는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신대문자는 단군조선이나 삼국시대의 글자가 건너간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짚어 보고자 한다.
시기로 보아, 이 때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공표한 15세기보다 300년 늦고 에도시대 조선에서 일본으로 오는 사신인 '통신사'가 오면서 통역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본에 한글과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재가 나온 때이다. 또 임진왜란 때 약탈해간 문화재 가운데 훈민정음과 한글 활자, 한글로 된 책도 있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은 일본에서 한글을 보고 국학자들이 신대문자를 위조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늘날의 한글과 신대문자의 발음은 아주 비슷한데 예를 들어 '미'를 'ㅁㅣ' 라 쓰고 가나로는 '미'로 읽는 'ミ' 라고 적는다) 또, 한국 학자들은『일본서기』에는 '옛적에는 글자가 없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신대문자가 오랜 옛날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여기에 반박해서 일본에서 신대문자를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은 한글처럼 '과학적이고 잘 짜여진 체계를 갖춘 문자가 어느날 갑자기 한 사람의 왕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고 주장하며 그러므로 한글은 신대 문자를 베낀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또 일본인 학자들은 '환무(桓武)'왕 때(서기 9세기경의 일본 왕) "일본은 삼한(三韓)과 뿌리가 같다."고 쓰인 책들을 불태워 버렸다는 사실을 들어 '신대문자는 이 '불태워 버린' 책들에 쓰여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이들이 '증거물'로 내세우는 것이 나라(奈良. 내량)시대 이전에 쓰여졌다는 '신대문자' 탁본과『고사기』를 지은 사람인 태안만려와 히에다노 아레(비전아례)의 이름이 나와 있는 탁본이다. 먼저 나라 시대 이전에 쓰여졌다는 탁본에는 세금을 내는데. 돈 대신 소금을 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런 내용이 신대문자와 한자로 나와 있는데 돈 대신 물건을 세금으로 낸다는 것은 일본에 '통일된 고대국가'가 나타나기 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나라 시대 이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탁본도 역시 한자와 신대문자로 적혀 있는데 끝에 한자로 '태안만려(太安萬呂)' 와 '비전아례(비田阿禮 : 히에다노 아례)' 라고 적혀 있다. 이세 신궁(伊勢神宮)에는 '신대문자'가 적힌 수많은 기록들이 창고에 남아 있고 신궁에 모셔진 옛날 청동거울(청동거울은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 가운데 하나이다)에는 거울 뒷면에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필자는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한글의 자음·모음과 아주 모양이 비슷했다) 또 구슈 지역에 있는 신사들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 가운데에는 청동창이나 청동검이 있는데 이들 청동검의 날 양쪽에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글은 '신대문자'를 베껴서 만든 글자일까?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조선왕조실록』의「세종실록」의 기록은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글자는 옛 글자를 본땄다.'는 말은 신대문자를 본땄다는 말일까? 우선 신대문자의 하나인 아히루 문자가 나온 곳을 의심해 보자. 아히루 문자는 대마도(對馬島)에서 나온 문자다. 이 대마도(對馬島)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우리나라의 속국이었고 풍신수길이 침략한 뒤 일본 땅이 되었으나 19세기까지 조선과 친하게 지냈으며 에도 시대 막부의 관리는 대마도를 "조선의 신하이니, 마땅히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 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19세기에 일본 명치유신이 일어난 뒤 중앙정부에서 대마도로 파견된 관리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집안 창고에 조선 관련 책이나 조선의 역사서, 또 대마도주가 조선에게서 벼슬을 받았을 때 얻은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실에 놀라서 이를 거두어 들인 뒤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러니까 대마도는 고려·조선시대에는 한국의 영토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풍신수길이 일본 땅으로 만든 뒤에도 조선과의 우호관계는 바뀌지 않았고 19세기에 와서야 완전히 조선과 단절된다. 이런 대마도에서 나온 '한글과 모양이 비슷한 글자' 라면 당연히 '혹시 한글을 베낀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게다가 위에서 소개한 일본 신사에서의 신도 경전이나 신사의 간판도 한글과 쓰는 방법이 비교적 비슷하다는 사실도 (예를 들면 '가'를 'ㄱ ㅏ' 로 쓰는 식으로) 에도 시대에 한글을 베껴서 신대 문자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세 신궁의 창고에 있는 수많은 신대문자로 된 책들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구슈 지역에 있는 신사 터에서 나온 이끼가 낀 오래된 돌 비석이나 구슈의 또다른 신사에 있는 돌 난간에 새겨진. 그리고 몇몇 신사들이 보관하고 있다는 오래된 청동검 몸체와 이세 신궁 깊숙한 곳에 모셔진 청동거울 뒷면에 새겨진 '한글과 비슷한 글자' 는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이세 신궁은 풍신수길이 나타나기 수세기 전에 세워진 신궁이고 구슈 지역에 있는 돌 비석이나 돌 난간도 연대가 - 아무리 짧게 잡아도 - 수백년 가량은 되는 것들이다.(물론 에도 시대 국학자들이 세운 비석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래된 것들이다) 이세 신궁에 있다는 청동거울이나 다른 신사의 청동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단순히 '신대문자'를 에도시대 국학자들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에도시대 이전에도 있었을 청동유물이나 돌로 된 비석(또는 난간)에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는 사실은, 국학자들이 '신대문자'를 들고 나오기 전에도 일본에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있었으며 실제로 쓰이기도 했을 거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TV 화면에서 직접 본) 청동거울이나 청동 검에 새겨진 글자는 확실히 한글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다만 자음만을 새겨놓은 것도 있고 한글의 모음에 해당되는 글자는 거의 없어 그 점이 오늘날의 신사나 신도 경전에 새겨진 '신대문자'와는 달랐다. 신사의 간판이나 신도 경전에 새겨진 신대문자는 한글과 비슷한 방법으로 적고 음도 비슷하게 읽지만 청동거울이나 청동검에 새겨진 글자는 대부분 한글의 자음과 같은 모양이었고 한글에는 없는 모양도 일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임진왜란 때 한글서적이나 활자를 약탈해 간 일본인들이 그걸 보고 신대문자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다. 받침이 거의 없는 그들 말의 속성을 따라 받침을 빼 버린 채 자음 + 모음으로만 적었고 된소리를 내는 자음이나(ㄲ, ㄸ, ㅃ, ㄸ) 'ㅢ. ㅟ. ㅘ' 와 같은 '소리내기 힘든' 모음을 빼 버린 뒤 '고대부터 일본에서 쓰이던 글자를 찾았다' 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국학자들이 신궁이나 신사에 전해 내려오던 청동 유물이나(위에서 말한 청동 거울이나 청동검) 오래된 돌로 된 비석이나 돌 난간을 알고 있었다면 자기들이 한글에서 위조해낸 '신대문자'와 이 유물들에 적혀 있는 옛 글자의 모양이 같은 점을 이용해서 '옛 글자는 곧 신대문자다.' 라고 연결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국학자들이 옛 글자의 모양을 빌려다가 한글과 섞어 버렸을 가능성이다. 그러니까 글자를 쓰는 방법은 한글처럼 하되, 글자의 모양은 옛 글자를 빌려와서 그것을 '신대문자' 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만들었을 가능성이다.(나는 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신대문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문제가 "(만약 한글이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말을 믿는다면)그렇게 과학적이고 잘 짜여진 글자가 단 한 사람(세종)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는 것이다. 따라서 「세종실록」의 기록은 왕을 찬양하고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기록이거나 과장된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왕이나 왕족, 관리도 보지 못하는 기록을 적는 사관이 왕이 보지도 않을 기록에 일부러 왕을 찬양하는 기록을 할 턱이 없으며, 게다가 한글과 비슷한 모양의 소리글자는 이미 고려 때에도 있었다. 따라서 세종 이전에 있던 글자를 세종이 보다 쓰기 좋게 다듬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면 모를까, 세종실록의 기록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태도는 설득력이 없다. 개인이 소리글자를 만들어낸 사례는 많다. 예를 들면 18세기 미 원주민 체로키족의 족장인 세쿼이어(세코야)는 영어 알파벳을 참고해서 소리글자인 체로키 문자를 만들어 냈으며 19세기 이뉴이트(에스키모)족은 알파벳을 본따서 소리글자를 만들어서 썼다. 그리고 1930년대 서아프리카 멘데(멩데)족의 왕은 알파벳과 아라비아 문자를 참고해서 복잡한 기호로 이루어진 글자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개인이 소리글자를 만들어 냈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참고한 글자 없이 혼자서 만들어냈다고 하면 그때는 의심이 가겠지만. 그럼 '고려 시대에도 있었던 글자' 가 일본에서 흘러들어온 글자일 가능성은 있는가? 이 점을 알기 위해 우선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고려가 세워진 때가 서기 918년(단기 3251년). 이 때 일본은 쇄국을 고수하며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걸어잠근 때이다. 그리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라 불리는 내전이 있었으며 무사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피튀기는 권력다툼을 하던 때이다. 이 시기 일본의 관심은 ― 원나라의 침략을 빼고 ― 온통 나라 안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일본은 고려를 비롯한 다른 나라와는 의례적인 사신 교환을 빼고는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고려말 조선초를 휩쓴 왜구는 일본인이 아니라. 원래는 절강성과 복건성에 살던 백제의 후손들인 '해민(海民)'으로 명나라가 농본주의 정책을 결정하고 장사하는 일을 금지하며 해민들의 배를 빼앗고 재산을 몰수하자 화가 난 해민들이 명나라에 항의해서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일본 해안도 철저히 약탈당했는데 과연 일본에서 일어나 다른 나라를 노렸다면 일본까지 당했겠는가? 또 당시 일본의 배는 먼 바다는 물론이고 가까운 바다까지도 제대로 항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배를 타고 대규모로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에서는 한자와 가나로 쓰여진 당시의 글이나 기록은 많이 나오지만, 어디를 보아도 신대문자로 쓰여진 기록이나 유물,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에도의 국학자들이 '신대문자를 찾아냈다' 고 떠들 때까지, 사람들은 신대 문자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설령 한글과 비슷한 옛 글자가 새겨진 유물을 신궁이나 신사에서 계속 보관하고 있었을지라도 일반 민중이 함부로 볼 수 없는 곳에 깊숙히 보관하고 있었지 널리 쓰이지는 않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설령 일본인이 고려로 갔다 하더라도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쓰지도 않았던 글자를 전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일본이 고려에 아히루 문자를 전해주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또 대마도 자체가 고려시대에는 고려의 속국이자 영토였으므로 대마도가 고려에서 쓰던 글자를 본받아서 썼을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성립하기 어렵다) '혹시 반일감정과 [오랑캐로부터 글자를 받아들였다]는 생각 때문에 수치스러워서 이를 감추지 않았느냐?' 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하겠지만 한국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반일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은 고려나 조선에게는 다만 '동쪽에 있는 다른 나라' 정도로만 여겨졌지, 특별한 악감정이나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다. 대진국(발해)만 해도 일본에 국서를 자주 보내며 신라와 대항해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후백제 왕인 견훤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 '후백제와 연합해서 신라를 치자' 고 제안했다. 또 고려의 삼별초도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삼별초와 일본이 힘을 합쳐서 원나라에 맞서 싸우자.'고 제안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대해서 악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며, 고려 말과 조선 초까지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초에 쓰여진「세종실록」에서 단지 "전조(前朝)"에도 있던 언문이라고 썼지 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우리 나라의 글이었기 때문이지 외국의 글은 아니었다는 점과, 만약 일본의 글이었다면 '왜문(倭文)'이나 '일본국지문(日本國之文)' ― 당시 위정자들도 일본이라는 '정식 국명'을 알고 있었다 ― 이라고 말하면서 반대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그냥 '옛 글자' 나 '옛 왕조 때도 있던 언문' 이라고만 말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글이 일본 글자를 베껴서 만들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 신대문자가 '일본 고유의 것' 이라면 생기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왜 이세신궁이나 다른 신사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대문자가 적힌 자료들을 일절 내놓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일본 고유의 것이고 일왕(日王)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공개하고 자랑스럽게 떠들어야 하는데 실물을 철저히 숨기고 고증이나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환무(桓武 : 9세기의 일왕. 외가가 백제계라고 한다)왕때 "일본이 삼한과 같은 족속이다."라고 된 책을 태워버렸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일본이 삼한에 건너가서 식민지를 세웠다는 기록이라면 자랑스럽게 가지고 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떠들었지 태워 없애거나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일본에 유리한 자료였다면 두고두고 보관해 왔지 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환무때 태워버린 책 가운데에 신대문자로 된 책들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거꾸로 말해서 신대문자는 일본 고유의 문자가 아니라 한국에서 건너간 한국산 문자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 한국이나 베트남, 버마, 태국, 라오스와는 달리 직접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상대적으로 중화질서에서 '자유'로왔던 일본이 아무려면 중국의 눈치를 봐서 신대문자를 금지하고 한자와 가나만 썼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신대문자가 일본의 글자였다면 당당히 공개하고 '이것을 써라' 라고 했지, 그 반대로 꼭꼭 감추고 숨기면서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대문자는 일본 고유의 문자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어하는 어딘가에서 온 글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딘가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구슈에는 삼신(三神)을 모신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에는 항웅(恒雄)이라고 이름만 바뀐 한웅(桓雄) 영정이 모셔져 있다.(물론 신사를 지키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한웅임을 알 수 있게 그려졌을 뿐이다) 이 산의 이름이 '히코산' 이라는 사실도 이곳이 집단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단군조선 사람들이 살던 곳이며 그래서 한웅을 신사에 모셨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서 나라라고 할 만한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한 사람들도 단군조선의 남쪽에 살다가 건너가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신대문자도 원래 그 사람들이 쓰던 글자가 그대로 건너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후대에 들어와서 지배층이 한자와 이두를 쓰고 고유 글자는 밀려나서 서민들이나 쓰다가 잊혀졌거나 전통 신앙이 밀려나면서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한자와 가나만이 쓰이고 고유 문자는 옛 유물 속에서만 나오게 되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백제와 고구려가 무너진 뒤 한반도와의 관계를 끊어야 했던 일본이 한반도와 관련된 기록들을 철저히 불태워 없애거나 부정함으로서 그나마 명맥이 이어져오던 옛 글자가 사용이 금지되고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이 '옛 글자'를 규명하는 일은 "고조선을 신화에서 역사로 끌어올리는 길이 될 것이다." (영국 런던 특파원 문봉교) 왜노의 신대문자는 한자다 (1) -상선약수님- 5. 왜노의 신대문자는 한자다. (2)
일본에서 "일본은 한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신대문자를 썼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때는 에도시대인 18세기 때부터이다. 이 때는 일본에서 '일본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학문인 '국학(國學)'이 싹터서 자라나던 때이다. 국학자(國學者)들이『고사기』와『일본서기』를 읽고 '고대 일본의 크나큰 영광'을 찾아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신대문자를 '발견'하고 신대문자를 알리는 책을 찍어내서 신대문자를 널리 알린 국학자가 나온 때도 이 무렵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18세기 이전에는 신대문자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나, 신대문자를 쓰는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일본은 한자와 가나를 쓰고 있었는데, 18세기쯤 되어서 국학자들이 "한자가 들어오기 전에 일본이 쓰던 글자가 있다. 바로 신대문자다."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널리 퍼뜨렸다는 것이다.
해신의 바다 수많은 흰 파도를 넘고 넘어서
여덟 섬나라에는 글이 전해졌노라.
943 년, 다치바나노 나오모토(橘尙幹)가 日本에 문자를 전해준 王仁 박사의 업적을 기려 읊은 와카(和歌)다. 日本의 漢詩集 가이후소(懷風藻)의 머리말에서도 문맹의 倭에 王仁이 처음으로 글을 가르친 것을 칭송하고 있다.
日本에는 405 년(? 日本에 漢字가 전해진 것은 420 년대이다)까지 문자가 없었다. 까막눈 이었다. 그래서 倭라는 국명이 가슴에 사무 치도록 싫었음에도 글자를 몰라 그대로 썼다. 그뿐인가. 왜노국(倭奴國)이라는 사실이 오늘날 까지 지상 최대의 자랑인 종족이다. 그 뒤로 다시 文盲時代로 회귀 해서는 고작 몇 명만 글자를 읽을 줄 알아 책을 읽어주면 사무라이라는 인간들이 에토키(繪解)라는 그림책을 들여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들었던 종족이다. 이게 가슴에 사무쳤던지, 에도(江戶) 시대에 國學 혹은 미도학(水戶學) 이라는 역사왜곡학이 발흥할 때, 고대, 아니 神代의 문자라며 또 날조를 해댔다. 金印[漢委奴國王(かんのわのなのこくおう) : 漢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王, 시키노시마(志賀島)에서 출토 되었다고 한다]만으로는 모자랐던 것이다.
( http://museum.city.fukuoka.jp/jb/jb_fr2.html 참조 )
''아주 오랜 옛날(古事記나 日本書紀에 나오는), 神들이 살았던 때에 쓰인 글자''라고 해서 ‘神代文字’라고 부른다. 神의 詩歌와 죽이 잘 맞는가? 저 神들조차 韓國神이다. 한인 및 한웅이다.
너희 倭奴民族은 王仁을 文字의 神으로 섬긴다면서? 그럼 王仁이 가르쳐준 漢字가 너희민족의 神代文字가 아니냐? 列島에 나라가 들어선 것이 백제 아신제(阿莘帝) 4 년 즉 395 년이다. 日本書紀에는 應神 14 년, 百濟王이 재봉사 진모진(眞毛津)을 보내 주었는데, 衣縫의 始祖라고 했다. 그리하여 日本 侯王과 귀족만 옷을 입었으니, 5 세기의 일본은 옷조차 만들지 못해 벌거벗고 살았다. 18 세기의 일본 역사학자 토우테이칸(藤貞幹 : 1732∼1797)은 제 조상을 일러 ‘벌거숭이’라고 했다. 5 세기 말에도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았다.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고대국가와 천황, 타무라 엔쵸 : 田村圓澄)." 6 세기 “대부분의 일반인은 땅을 판 구덩이의 움집에서 살고 있었다.”(田村圓澄) 이런 미개국에서 문자를 개발할 수 있는가.
日本書紀에도 王仁이 漢字를 가르쳐주기 전에는 文字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자가 없어서 역사기록도 못해, 겨우 우리나라 역사서를 보고 줄줄이 베낀 일본이다. 18 세기에 들어와서야 발견 했다며 난리치며 한다는 말이 “漢字가 들어오기 전에 日本이 쓰던 글자가 있다. 바로 神代文字다”고. 그럼 저급한 漢字는 왜 썼나? 계속 神의 문자를 쓰지. 神의 문자를 버리고 漢字를 썼다는 것 부터가 이상 하지 않은가. 왜 저급한 가나(假名)를 만들어 썼냐구? 너흰 저급한 것만 선호하는 민족이냐? 왜 그처럼 소중한 문자로 역사책 조차 기록하지 않아서 新羅의 천문기록까지 다 베꼈느냐?
日本의 神代文字 날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간단하다. 한글보고 베꼈다. 하지만 한글을 그대로 쓰진 못하고 한글 아닌 문자도 고심해서 몇 개인가 만들었다. 子音 으로만 배열했다. 자음, 모음을 따로 떨어뜨려 놓았다. 이제 좀 있으면, 한글을 그대로 사용 하면서 神代文字라 우길 날이 오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1419 년 이종무(李從茂 : 1360~1425) 장군이 對馬島를 정벌 했는데, 항복한 對馬島主와 倭寇들이 무역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해서 三浦까지 열어주어 朝鮮에서 살게 해줬다. 이때부터 倭奴들이 건너와 朝貢貿易을 하면서 高麗時代에 개발한 한글을 배웠다. 교과서도 남아 있다. 對馬島 민속자료관에 가보라. 漢字에다 한글과 가나인지 뭔지 하는 왜(倭)말로 적어뒀을 테니까.
일본에서 “일본은 한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신대문자(神代文字)를 썼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때는 에도시대(江戶時代)인 18 세기 때 부터이다. 이때는 일본에서 ''일본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학문인 ''국학(國學)''이 싹터서 자라나던 때이다.
신대문자를 발견하고 신대문자를 알리는 책을 찍어내서 신대문자를 널리 알린 국학자가 나온 때도 이 무렵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18 세기 이전에는 신대문자를 아는 사람도, 신대문자를 쓰는 사람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일본은 한자와 가나를 쓰고 있었는데, 18 세기쯤 되어서 국학자들이 신대문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널리 퍼뜨렸다는 것이다. (PRKOREA 웹진, 한글과 일본의 "신대문자"의 수수께끼, 2002. 12. 12)
가림토(加臨土)를 보고도 베꼈다. 百濟 유민들이 이주 하면서 한단 역사서도 가져갔기 때문이다.
온갖 유물을 날조해 증거랍시고 남겨놓았다. 칸무(桓武)의 焚書 사건을 두고 “神代文字는 이 불태워 버린 책들에 쓰여 있었을 것”이라고 횡설수설 하는가 하면, 구석기 날조 사건을 연상케 하는 온갖 증거를 제시한다.
神代文字 탁본과 함께 古事記를 지은 사람인 태안만려(太安萬侶)와 비전아례(裨田阿禮)의 이름이 나와 있는 탁본을 증거랍시고 제시한다. 나라(奈良) 시대 이전 것이라고 우기는 탁본에는 세금을 낼 때, 돈 대신 소금을 낸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神代文字와 漢字로 병용해서 써 놓았는데, 돈 대신 물건을 세금으로 낸다는 것은 日本에 통일된 고대국가가 나타나기 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奈良時代 이전으로 보인다고 우긴다.
통일국가가 되면, 왜노 민족이 돈을 사용한 줄 알았는가? 天武 金多遂(新羅の王は、沙トク部沙サン金多遂を派遣して質とする)가 부본전(釜本錢)이라는 新羅 돈을 도입 했지만, 미개 사회라 통용은 못 했다.
멀쩡한 비석의 비문도 서슴없이 깎아내는 농간도 마다하지 않는 民族이다.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의 비문을 여기저기 다 긁어내고 석회칠을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탁본쯤 위조하는 것이야, 日本軍이 수십 만 명을 생체실험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 않나? 생체실험을 했을 때처럼 자긍심을 가지고 임했을 것이 틀림없다. 拓本 날조는 저 노예민족의 독자적인 학문, 즉 國學, 미도학(水戶學)이라 부르는 歷史歪曲學의 필수과목이다.
증거라는 拓本에는 漢字와 神代文字가 나란히 나와 있다. 神代文字가 새겨진 비문 이라면서 증거로 내세운 비석에도 저 倭奴民族이 날조한 문자와 함께 漢字도 새겨져 있다. 神들의 시대에 사용해서 神代文字라며? 漢字는 405 년(실제로는 420 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보내 주지 않았는가. 405 년 이후가 神들의 시대인가? 우리나라에서는 9200 년 전부터 인간의 국가가 성립 했는데, 倭奴 땅에서는 405 년 부터가 神들의 시대면, 대체 인간의 시대는 언제부터인가?
神代文字와 漢字가 병존하는 상황에서 漢字가 그 신성한 神代文字를 밀어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漢字가 神代文字보다 우수해서? 神들이 사용한 문자가 외부종족이 사용하는 문자보다 열등했다는 것인가?
◀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정전
이제 여러분은 남몰래 몇 명이 동원되어 비지땀을 흘리면서 종이인지 종이묶음 인지에 한글을 자음, 모음 분리해서 적고, 혹은 자음만 모아서 적어 이세신궁(伊勢神宮) 이라는 날조 유물 모아두는 장소에 감춰두는 일본민족이 떠오를 것이다. 규슈(九州) 지역 神社들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 가운데에 청동창과 청동검을 골라 날 양쪽에 한글을 새기는 일본민족의 모습도 선연히 떠오를 것이다.
百濟 皇帝가 韓半島를 침공한 新羅를 물리치기 위해 列島에 植民地를 만들면서 최초의 侯王 應神에게 하사한, 日本의 신보라는 七支刀 銘文도 쪼개서 날조한 인간들이다. 고작 수백 년 된 유적, 유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七支刀를 날조한다 해서 한 번이라도 주저한 적이 있었겠는가. 한글을 베끼면서 한글이 오히려 베꼈다고 억지를 부릴 수 있으니, 이 정도쯤이야 무엇이 아깝겠는가. 원래부터 그런 민족인 것을. 그 열성으로 무엇 인가를 개발 했으면, 왜노국(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노예들이 모여 사는 나라) 소리는 안들었을 텐데.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는 저 민족이 神代文字로 쓰여진 책은 모조리 焚書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倭奴民族은 칸무(桓武)가 분서한, 三韓과 同族 이라고 쓰여진 책에 神代文字로 써 있었다고 우기는데, 그 책도 漢字로 되어 있었다. 中國倭가 이주해 항해술과 조선술을 전수해주자, 더 이상 新羅에 기댈 필요 없다고 焚書했던 것이다. 桓武가 神代文字로 된 책이라서 焚書했다면, 神代文字가 日本의 文字가 아니라는 것밖에 더 되는가.
어이없게도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倭奴民族의 날조문자 비슷하게 쓰면서 한글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고 있다. 특히 채팅창을 들여다 보면 가끔씩 아무런 의식없이 쓰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예를 들면 ㄱ ㅏ ㄴ ㅏ 하는 식) 심지어 실생활에서 조차 그런다고 한다. 배울 것을 배워야지,,,,
加臨土에서 아히루(阿比留)인지 神代文字인지 하는 것이 파생 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사람들까지 있다. 그 근거로 檀君世紀의 “협야노(陝野奴)라는 자가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에 웅거하면서 (토벌될 때까지) 스스로 天王이라 불렀다(陝野奴者渡於海上據三島僭稱天王)”는 구절을 내세운다. 三島가 日本列島라고 하는데, 이 당시는 韓半島人들이 북큐슈(北九州)에도 정착하기 훨씬 전이었다. 韓半島人들이 列島로 이주한 것은 고작해야 기원전 3 세기로 그나마 植民地 왕조가 들어선 것은 4 세기 말(百濟)이다. 이때 까지도 벌거벗고 흙바닥에서 뒹굴었다. 이전까지는 아이누族의 땅으로 三島가 아니라 四島이다.
陝野奴가 列島로 도망쳐 보았자, 죠몬인(繩文人)들이나 지배할까, 종국에는 자신도 벌거벗고 살아야 했다. 衣, 食, 住 해결이 선결문제였던 陝野奴가 한가하게 列島 여기저기에다 加臨土나 새기고 앉아 있었을까. 列島의 유적들도 모두 5 세기 이후에 百濟人과 新羅人이 만든 것이다.
三島라는 섬 이름만 있지, 방위나 거리, 지형 등 그 장소를 특정할 어떤 설명도 안나온다. 三島가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는 필리핀이나 보르네오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 하는가. 중국 대륙 남부나 동부에 있는 섬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 하는가. 제 나라 지명조차 알지 못해 광대한 大陸史를 半島史로 축소 시키는 민족이 우리민족 아니던가. 위대한 韓民族에서 고작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산 濊貊族”이 되기를 원하는 民族이 아닌가.
陝野奴는 기원전 723 년에 사벌단제(沙伐檀帝)가 보낸 언파불합(彦波弗哈)에 의해 웅습(熊襲)에서 평정 되었다(戊午五十年帝遣將彦波弗哈平海上熊襲 檀君世紀). 가공인물 神武의 즉위 연대보다 무려 63 년이나 앞선다. 정말 陝野奴가 日本列島로 갔다면, 왜(倭)는 그것이 아까워서라도 陝野奴가 初代 天皇이라고 우겼을 그런 민족이다.
정말 陝野奴가 倭奴 땅으로 가서 加臨土를 문자로 사용했다고 하면, 왜(倭)는 陝野奴 이후에 한번, 中國倭 이주 후 한 번 해서 두 번씩이나 문자를 잊어먹은 世界史에 다시 없는, 다시 없을 그런 未開民族인 것이다.
대마도(對馬島)의 복부(卜部) 아히루(阿比留) 가문(家門)에서 전해지는 아히루(阿比留, アヒル) 문자는 거의 한글 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주(九州)의 구가미(九鬼) 가문(家門)에서 전해지는 까스가(春日, カスガ) 문자는 선보다는 원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밖에도 시마네현(島根縣)에서 발견된 이즈모(出雲) 문자, 나라현(奈良縣) 동쪽의 이세시 (伊勢市)에서 발견된 이세신궁고자(伊勢神宮古字), 미야자끼현(宮崎縣) 천암호신사(天岩戶神社)에서 발견된 도요쿠니(豊國) 고문자(古文字), 그리고 상까(山窩, サンカ) 문자 등이 발견 되었는데, 이 가운데 일부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당시에 신대문자의 유행이 일면서 위작 (僞作)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倭奴民族은 朝鮮通信使가 학문을 가르쳐준 직후부터 날조와 왜곡을 일삼아 왔다. 그것이 金印, 神代文字 등을 거쳐서 오늘날 舊石器 날조에 이르고 있다. 한 마디로 日本民族은 어제도 날조했고 오늘도 날조하고 있으며 내일도 날조할 민족이다.
捺造王國인 것이다.
日本民族에게는 歷史捺造가 千年之大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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