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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5 : 남해 낭하리 암각문]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3:32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5 : 남해 낭하리 암각문]

 

 

고대남해는 천문학의 성지였나
가을하늘 별자리 은퇴교육자 조세원 향우, 새로운 학설 제시
[217호] 2010년 08월 20일 (금) 16:07:52 김종수 기자  nhsd@hanmail.net

 

 

 

 
도기념물 제6호인 양아리석각이 ‘바위에 새긴 가을하늘의 별자리’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사천시 벌리동에 거주하고 있는 조세원(이동면 다정출신·63) 향우는 지난 13일 본지에 견해를 밝혔다. 지난 2007년 38년간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퇴직한 조세원 향우는 평소 고대문자와 암각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고향 남해의 양아리석각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그는 교직생활 중 양아리석각에 대한 거란족문자설(이청기·남해도 저자), 수렵선각설(데세판데박사·인도), 고대문자설(최남선), 선사시대각석설(정인보), 선사 석각화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불기례일출설(오경석·오세창의 父), 한웅출렵삼신치제문, 귀인사냥터, 서불제명 등의 다양한 설들 중 고대문자설에 초점을 맞춰 여러 해 동안 해독에 힘썼지만 결국 실패했고, 글자의 크기나 배열이 맞지 않는 점을 근거로 문자가 아니라는 추론을 하게 됐다.


그로부터 몇년후 석각을 다시 살폈을 때 석각의 하단에 하늘 ‘天’자가 새겨진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하늘의 별자리와 성좌도와 비교하게 됐는데 놀랍게도 별자리의 위치와 방향이 양아리석각과 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연구·조사한 결과 안드로메다의 별자리를 중심으로 페르세우스, 남극물고기, 북극성에 이르는 가을하늘을 정교하게 새긴 것으로, 절기로 따지자면 오곡백과를 수확하는 한로(寒露·양력10월8~9일경) 전후의 별자리가 양아리석각과 가장 일치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대 한반도에는 고인돌과 석벽 등에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옛적부터 우리 선인들의 별자리 관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우리 선인들의 눈에 별자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고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남해에서 양아리석각과 관련해 학술활동이 개최된다면 자신의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남해도(南海島) 각석(刻石)

 

경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곳 금산에는 쌍홍문(雙虹門)이라는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석문(石門)을 앞에 두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면서 지금으로 부터 2200년 전(前)의 서불(徐市 또는 徐福)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금산사(錦山寺)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산사 옆 부소암 아래에는 7m x 4m의 평평한 바위가 놓여져있고, 그 바위 위에 1m x 50Cm의 넓이로 글자와도 비슷한 모양들이 새겨져있다. 일반적으로 암각화(岩刻畵)는 절벽이거나 세워진 바위 면에 있는데, 이것은 얼핏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산비탈에 박혀있는 나즈막하고 아주 평범한 바위 상부(上部)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 마치 종이에 글을 쓴 것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상형문자(象形文字)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암각화(岩刻畵)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곳 남해도 인근에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傳說)이 이곳저곳에 전해져 오기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 정(政)이 보낸 사신(使臣) 서불(徐市)이 이 곳에서 불노초(不老草)를 찾으면서 새기어논 글자라 하여, 과거에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意味)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1)

sobul kakza2 이 암각(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2)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3) 또한 "일본(日本)의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다고 한다. . . . 서복(徐福)은 일명 서불(徐市)로서, 불(市)과 복(福)의 음(音)을 같이 혼용(混用)하고 있다."(4)

서불(徐市) 또는 서복(徐福)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때, 낭야(琅邪) 사람으로 연단술(煉丹術)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하겠다는 뜻을 굳힌 방사(方士)의 한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 정(政, cheng)이 B.C. 221년(始皇 26年)에 6국을 정복(征服)하여 대륙(大陸)을 통일(統一)한 뒤, 천하(天下)의 부호(富豪) 120000호(戶)를 함양(咸陽, xianyang, 현재의 西安, xian)으로 이주(移住)시켰으며, 죄수(罪囚, 刑徒) 700000명을 동원하여 함양(咸陽) 북판산(北阪山)에 아방궁(阿房宮)을 짓게 하였다. 3년후 B.C. 218년에 천하(天下)의 명산(名山)마다 자신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러 다니던 진시황(秦始皇)이 낭야(琅邪)에 왔을 때,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神仙)이 사시는데, 어린 소년(少年), 소녀(少女)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려 합니다." 시황(始皇)은 크게 기뻐하며 총각 처녀 3000명을 가려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아가서 신선(神仙)을 찾아오게 하였다 한다.(5) 그러나 태백일사(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에서는 약간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도 역시 회사(淮泗)지방 출신이라 평소에 진(秦)나라를 거역(拒逆)할 뜻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바다로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주(逃走)를 계속(繼續)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6) 여하튼 이때 서불(徐市)은 동야현(東冶縣)의 해상(海上)에서 곧 나패(那覇)에 도착하고, 다네시마(種島)를 거쳐,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곳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으며, 이국(伊國, 伊勢)의 신궁(神宮)에는 서불(徐市)의 무덤(墓)과 사당(祠堂)이 있었다고 한다. (7) 즉 이러한 기록(記錄)에서는 서불(徐市)이 지금의 남해도(南海島)에 도착했었다고 명시(明示)되지 않았으나, 남해도(南海島) 내의 여러 곳에 서불(徐市)의 전설(傳說)이 남아있어, 서불이 분명 이곳을 거쳐 갔으리라 생각된다. 오히려 기록으로 보기에는 여기의 암각(岩刻)을 주로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전각(篆刻)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서불(徐市)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지 않나 생각된다.
조선(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 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禮)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王)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旗)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8)

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로서는 신시(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발해(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倭)와 진(辰)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金+契'木)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 즉 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秦,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晋,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9)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秦)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열거(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10) 그리고 우서(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11)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卦)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12) 여기서도 효(爻)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秦)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13)
대부분의 고문자(古文字)들도 대부분 가로나 세로로 나열(羅列)되거나, 줄칸을 그어서 그 안에 채워 넣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남해도(南海島)에서 볼 수 있는 형식과는 구별(區別)이 된다. 특히 기념(記念)으로 새겨놓는 암각(岩刻)은 주로 암벽(岩壁)이나 비석(碑石)일 경우가 많다. 암각(岩刻) 비석(碑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암(李'品/山', A.D. 1296~1364)이 편찬(編纂)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B.C. 1833년 여름 4월, "황제(皇帝)께서 나라를 순시(巡視)하시다가 요하(遼河)의 왼쪽 강가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帝王)의 이름과 호(號)를 새기어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뛰어난 금석문(金石文)이다." (14) B.C. 1634년, "황제께서 태백산(太白山)에 올라가서, 비석(碑石)을 세우고 여러 성인(聖人)들과 임금들의 공덕(功德)을 새겼다." (15) 이 기록에서도 기념비(記念碑)는 비석(碑石)을 만들어 세우는 것이며, 다른 기록에서도 최소한 절벽(絶壁)에 암각(岩刻)하여 남기고 있다. 이 암각(岩刻)이 새겨진 위치(位置)가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절벽(絶壁)이 아니고, 금산(錦山)에서 내리뻗은 능선(稜線)에서 돌출(突出)되어 드러난 바위 위라는 점에서 오히려 풍수(風水)에서 말하는 기혈(氣穴)과 관계있는 장소(場所)이자, 하늘을 지향(志向)하여 만들어진 유적(遺蹟)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제천(祭天)이나 제의(祭儀)의 성격을 갖고있는 경북(慶北)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한들바위(또는 신선바위)의 암각화(岩刻畵)들과 성격상 상통(相通)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종합(綜合)하여 보면, 여기 남해도(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線)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암각(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天)' 자(字)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주민(住民)이 전하나 직접 찾아보지는 못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나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른다.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이라고는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암석(岩石)의 자연적(自然的)인 균열(龜裂)이 아닌가 생각된다. (邊光賢작성, 1988년 7월 촬영, 1997년 1월 작성, 1998년 3월 수정, 보완)


(1) 과거부터 전해지는 여러 기록에서의 서불(徐市)을 '서시'로 읽어왔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생활속의 한자' 433호에 보면, 서시에 대한 김언종(金彦鍾) 씨의 매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이글에서 김언종은 서복(徐福)도 아니며, 徐市로서 '앞치마 불'인 '서불'이라 읽어야 올바른 발음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호칭이야 어찌되었든 앞으로는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모두 '서불'로 하였다.
(2) "南海縣郎河里岩壁 有神市古刻" (太白逸史/ 神誌秘詞),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崔致遠嘗得神誌古碑 . . . 卽郎河里 岩刻的是皆實跡也" (太白逸史/ 三聖記 註).
(3) "聞 南海島 郎河里之溪谷 及 鏡珀湖 先春嶺與 夫烏蘇里 以外岩石之間 時或有發見 彫刻非梵非篆 人莫能曉"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리고 남해도 낭하리(郎河里)는 이 암각 소재 지역의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며, 경박호(鏡珀湖)는 현재 만주(滿洲) 연변(延邊, yanben) 북쪽, 흑룡강성(黑龍江省, heilongjiang)의 모란강(牧丹江) 상류(上流)에 위치하고 있다.
(4) "日本紀伊 有徐市題名之刻 伊國神宮 有徐市墓祠 云徐福一稱徐市 市福音混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기이(紀伊)는 지금의 일본(日本) 혼슈(本州, honshu)의 와가야마(和歌山, wakayama)縣이다.
(5)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146쪽 및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한 金彦鍾의 '생활속의 한자'(朝鮮日報 連載) 433호 참조.
(6) "至於徐福韓終 亦以淮泗之産 素有叛秦之志 至是入海求仙 爲言仍逃不歸"
회사(淮泗) 지방은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省, henan) 신양(信陽, xinyang) 지역으로 추정(推定)된다.
(7) "秦時徐市自 東冶海上直 至那覇經種島 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舊有 徐福墓祠 或曰亶州 徐福所居云"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그리고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참조.
나패(那覇)는 일본 규우슈(九州) 남쪽 난세이 제도에 딸린 오끼나와 섬 남단에 있다고 함. (임승국 번역, '桓檀古記', 정신세계사, 1987. 268쪽 참조)
(8) 황용훈,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민음사, 1987. 91~92쪽 참조. 그리고 정인보의 해석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다음 구절(句節)을 참고(參考)한 듯이 보인다.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9) 檀君世紀/ 蘇塗經典本訓에 소개된 三聖記 註釋 參考
그리고 숙신(肅愼)의 원음(原音)은 조선(朝鮮)이라 하며, 진(秦) 이전에는 동이족(東夷族)이 중국 대륙을 대부분 점유(占有)하였으나, 같은 동이족(東夷族) 출신(出身)인 진시황(秦始皇) 정(政)에게 패한 후, 여러 나라 왕족(王族)과 귀족(貴族) 대부분이 한반도(韓半島)와 일본(日本)으로 이주(移住)하여 피신(避身)하였다는 주장(主張)이 있다.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참조)
또한 진(秦) 시대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던 흉노족(匈奴族, Hun)는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동이(東夷), 북융(北戎), 동호(東胡), 예맥조선(濊貊朝鮮)과 부여(夫餘)와 숙신씨(肅愼氏)를 포함(包含)하여 통칭(統稱)하는 말로서, 대륙(大陸)에 퍼져있던 기존(旣存)의 여러 환족(桓族, Hwan)을 비하(卑下)하여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동중(元董仲)이 편찬(編纂)한 삼성기(三聖記全/ 下篇)에 보면 구약성경(舊約聖經)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인류의 조상(祖上)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아이사타(阿耳斯타)에서 처음 만나 천신(天神)의 가르침으로 결혼(結婚)하였으며, 그 후손(後孫)이 구환족(九桓族)이 되었다고 한다.
"人類之祖 曰 那般初與阿曼 相遇之處 曰 阿耳斯(駝-馬) 夢得天神之敎 而自成昏禮 則 九桓之族 皆其後也"
(10) 클로드 보데(Claude Baudez)/ 시드네이 피카소(Sidney Picasso), 김미선 옮김, '마야-잃어버린 도시들', 시공사, 1996. 참조
(11) "留記云 神劃曾在 太白山靑岩之壁 其形如ㄱ 世稱神誌仙人所傳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留記)
(12) 金東春, '天符經과 檀君史話', 가나출판사, 1987. 259~289쪽 참조
(13) 神代文字總覽 參考, 웹페이지 http://www.sannet.ne.jp/userpage/tsuzuki/sinmoji.htm (97-10-26)
(14) "帝巡國中 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 刻歷代帝王 名號而傳 之是金石之最也" (檀君世紀/ 12世檀君 阿漢 在位52年)
(15) "帝登太白山 立碑刻列聖群汗之功" (檀君世紀/ 15世檀君 代音 在位51年)

 

 

 

 


△ 서복의 고향인 중국 장쑤(강소)성 간위(감유)현 서복사당에 있는 좌상과 서복 일행이 내한할 때 이용했을 범선. 서귀포시 제주서복연구회,<정방폭포서복유적조사보고서>(1992년) 8쪽.

불로초 얻었는가, 해동땅 건너온 그대 서복

 

어릴적 어른들로부터 불로초를 구하러 진시황이 동남동녀 수천 명을 우리나라쪽에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 선약을 구해 갔는지, 못갔는지는 저마다 하는 소리가 달라서 종잡을 수 없었고, 또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통 오리무중이었다. 그저 심심파적의 흥미거리로만 들렸다. 어쩌면 이것이 전설의 매력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매력은 허망만이 아닌, 사실의 투영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전설은 상상과 가공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정한 사실성과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전설은 오래도록 전승되며, 또한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방증적으로 조명하게 된다. 이 불로초 전설의 중심에는 서복(徐福:일명 서불)이라는 방사(方士)가 서 있다. 사실 서복이 바다로 동쪽을 향해 갔다는 ‘출해동도(出海東渡)’는 기원전 3세기께 중국과 한국, 일본 세 나라의 관계에 얽힌 역사적 현장으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일본 사람들은 서복을 고대 일본문명을 일으킨 문명의 개조(開祖)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여 관련 논문만도 200편 넘게 내놓았으며,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당사자인 우리는 거의 소외되어 있다. 2년 전, 섬 고장 서귀포에서 어렵사리 ‘서복과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이름 아래 3국 학술모임을 한번 열었지만, 뭍 사람치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앙 언론에 보도 한 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관계없이 전설과 그 주인공은 오늘날까지도 이러저러한 문헌기록과 유적유물, 그리고 민간 구전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중국의 사서 <사기>와 <삼국지>, <후한서>에 나오는 서복의 동도와 관련된 7종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진시황은 방사 서복의 거듭되는 청을 받고 선약(불로초)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과 함께 오곡과 쇠뇌까지 지닌 각종 공장들을 바다에 들여보냈는데, 그들이 택한 행선지는 ‘가기에 멀지 않은’ 발해 한가운데에 있는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런데 선약을 구할 수 없게 된 서복 일행은 죽음이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회계(會稽) 바다 밖에 있는 단주(亶洲) 혹은, ‘평원광택(平原廣澤: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그 어느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에 ‘이곳 지나가다’ 글 남기고 남해 금산 바위엔 ‘해 향해 예 올렸다’ 기록 한-중교류 서막이었나

이 내용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복 일행의 내한(來韓)과 관련된 것이다. 당초 행선지로 잡은 삼신산과 그 산들이 소재하는 발해, 그리고 종착했다는 단주가 다 한반도 판도 내에 속한다.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고유 신앙체계인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삼신산은 오늘의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가리킨다. 또 진대의 발해는 오늘의 발해와 황해를 망라한 한반도 주변의 해역이다. 회계는 오늘의 중국 절강성 회계이고, 단주는 선인들이 사는 동해 상에서 회계와 교역을 하는 곳이라고 하니, 십중팔구는 한반도 내의 어느 곳일 것이다. 단,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땅이 어디인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서복이 일본에 이르렀다는 유일한 증거로 삼으며, 거기에 봉래산을 부사산(鳧繭箚내세우며 한술 더 뜬다. 신빙성이 없는 억지주장일 따름이다. 이러한 문헌기록과 더불어 서복의 내한과 관련된 유적유물로는 마애각(磨崖刻:절벽에 새긴 글) 5점과 암각(岩刻:바위에 새긴 글) 1점, 총 6점이 있는데, 그 중 명문을 남긴 대표적 유물은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의 마애각과 경남 남해군 금산(錦山)의 암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의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마애각이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암각은 폭포 위에 전분공장이 들어서면서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 지금도 또렷한 남해 암각은 금산의 한 평평한 바위 위에 새겨진 금석문(너비 1×0.5m)인데, 그 내용은 여태껏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16세기 전반 이맥(李陌)은 그 옛날 환웅시대의 수렵도 같기는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이 각문을 서복의 내한과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금석문 학자 오경석은 탁본을 해 가지고 중국에 간 뒤 상형문 학자인 하추도(何秋濤)로부터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즉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예를 올렸다’라는 해석을 받고 돌아왔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문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크게는 글자를 새겼다는 각문설(刻文說)과 그림을 새겼다는 각화설(刻畵說)이 맞서고 있다. 각문설에는 그것이 고문자이거나 상형문자, 혹은 진나라의 전자(篆字)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각화설에는 물형그림이나 수렵그림, 혹은 태양을 상징한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진시황의 명 받자옵고 아직 동정인 수천명 데리고 뱃길이라 몇 만리 신선의 나라 찾은 서복
전설로만 남겨둘수야‥

이와 같이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이 암각이 서복의 내한을 실증하는 유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유물로서 서복 내한의 전설적 요소가 깊이 배어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고장(남해도)의 서리곶을 비롯해 주변 가까이에 관련 전설이 여러 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 암각이 갖는 상징적 의미나 시사하는 바를 결코 무시 못할 것이다. 그밖에 서복의 내한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전설은 사실성을 한결 보강해준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한라산 17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한 식용 과실)란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섬진강 지류인 구례의 서시천(徐市川, 서불의 불(市)자를 시(市)자로 오인) 이름도 같은 경우다. 이와 더불어 서복전설은 계발과 교훈을 보듬어주는 문학적 모티브로까지 승화하여 귀중한 민족문학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가사 묶음집인 <경세설(警世說)> <백발가(白髮歌)>에는 서복의 맹랑한 구약 허사를 빗대어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개탄한다. “서복의 동남동녀 돌어온지 뉘 들었노, 불사약 어디 있고 불로초 보았느냐, …가는 청춘 뉘 막으며 오는 백발 뉘 제할까‘. <심청전>에도 이러한 대목이 있다. ”동남동녀 실었으니 진시황의 불로초 캐러 가는 배인가, 방사 서시(서불의 오자) 없으니 한무제의 신선 찾는 배인가, 가는 길에 죽자해도 뱃사람들이 지키고, 살아가자 해도 돌아갈 나라는 멀고 아득하다“. 배에 실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심청의 신세를 서복이 당한 비운에 비추어 애통해 하고 있다. 조선조 문인 신광한도 <기재기이(企齋記異)>에서 진시황의 허망한 꿈은 ”천하를 혼란시키고 만세에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신선이 될 분수도 없으면서 신선이 되는 약을 먹는 자는 한갓 그 수명을 재촉하기에 족할 따름이다“라고 신랄한 풍자를 보내고 있다. 그밖에 유명한 ’금란굴 전설‘은 불로초를 구하려는 것처럼 헛된 망상을 안고 무모하게 이땅을 범접하는 자들은 죽임만 당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사실은 전설 속의 서복을 2천여 년 전 한중 교류의 역사적 현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물론, 진나라 이전 시대에도 고조선과의 인적 , 물적 교류가 있어왔지만, 서복 일행처럼 수천 명이 대선단을 만들어 곡식과 무기를 싣고 오간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중국 해양사에서도 서복의 출해동도는 원양 항해의 효시라고 평가한다. 서복 일행은 낭아란 곳에서 출항해 산동반도의 연해를 따라 북상한 다음 발해를 건너 요동반도의 남해안을 거쳐 한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해 제주도나 남해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고대 한중 해로의 연해로를 따른 셈이다. 그 선단 규모에 관해 동남동녀 3000명을 포함해 승선인원을 약 5300명으로 계산하는 학자가 있다. 아무튼 전말이야 어떻게 되었든간에 서복은 고대 한중 교류의 여명기에 그 서막을 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중국 왕조별 약사-진(秦)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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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진의 시황제는 법가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였고, 전국을 군, 현으로 나누어 여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전제 정치를 확립함으로써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아울러 도량형, 문자, 화폐 등을 통일하는 등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밖으로는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다. 반면, 시황제는 정치 비판을 봉쇄하기 위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분서갱유를 단행하였고, 또한 아방궁의 건설과 여산릉의 공사 등으로 3백만 명의 무상 노력 동원과 이를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하여 무리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시황제의 급진적 개혁정치와 대토목 공사, 그리고 계속된 전쟁 등은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반란을 신호로 각지에서 진나라의 타도를 외치는 반란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유방과 항우이다. 유방과 항우도 여러 제후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게 된다. 처음 유방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날이 갈수록 유리해져 유방은 마침내 궁지에 몰린 항우를 해하의 싸움에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오강에서 최후를 마치게 한다.

   [진시황]
   
중국 진(秦)나라 왕(BC 247∼BC 221), 진제국(秦帝國)의 초대 황제(BC 221∼BC 210). 이름은 정(政).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2000년 이상 존속된 황제지배체제의 창립자이다. 시황제는 시호이며, 생전의 정식 칭호는 <황제>이다. 아버지 자초(子楚;莊襄王)가 인질로서 조(趙)나라에 있던 무렵 그 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사기(史記)》에는 자초의 후원자이며 대상인(大商人) 여불위(呂不韋)가 막대한 자금과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자초에게 바쳤는데, 그때 그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시황제 정(政) 적혀 있다. 자초의 뒤를 이어 13세에 진나라 왕이 되었으며, 승상(丞相)이었던 여불위가 상국(相國;재상)으로서 집정했다. 진나라는 6대 전인 효공(孝公)시대에 도읍을 셴양[咸陽;陝西省 咸陽市의 동쪽 15㎞ 부근]에 두고 법가(法家)인 상앙을 채용하여 부국강병에 힘썼는데, 진왕 정은 이때의 성과를 이어받아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를 계기로 여불위를 추방,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이어 법가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상앙이 시작한 내정개혁(變法)을 더욱 철저히 하였다. 셴양 북동부 평야에 거대한 용수로[鄭國渠]를 만들었으며, 4만여경(頃;약 1867만a)의 경지를 개간하고 민정을 안정시켰다. 이와 같은 개척사업을 바탕으로 국가에 충실한 많은 병사의 양성과, 군공을 세우면 서민에게도 귀족의 계급을 준다는 신상필벌정책(信賞必罰政策)의 실시 전통적 기마전술과 교묘한 외교정책(합종연횡) 등을 전개함으로써 한(韓)·조(趙)·위(魏)·초(楚)·연(燕)·제(齊)의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BC 221년 통일국가를 완성하였고, 이 신생국가의 맹주에 어울리는 <황제> 칭호를 창립했다.

 

진시황제-중국역사에서 제일 첫위 봉건황제

중화대지 이 역사무대에서 상하 오천년중 많은 풍운아들이 총망히 걸어왔다.그중의 진시황제가 바로 이 역사무대에서 중요한 발자국을 남긴 황제였다. 그는 부친 qin zhuangxiang (秦庄襄) 왕의 손에서 진나라 선공선왕(秦- 先公先王) 때부터 전해 내려온 6국의 통일 사업을 물려받고 필사적으로 싸워 끝내 승리를 달취하여 공전에 통일된 진나라를 건립하였고 "진시황제"는 그가 황제가 된 후의 호칭이다.

기원전259년(진소왕秦昭王48년) 정월,진시황은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을 정이라고 지었다.진 과 조는 동족 조상이고 모두 황제의 후대이기에 성을 "조"씨로 하고 이름을 조정이라고 불렀다.또 진의 조상이 예전에 "영"씨 성을 받아왔기에 후세에서 그를 많이는 영정이라고 불러왔다.

기원전 247년[진장양(秦庄襄) 3년],장양왕자가 세상을 떠난 그해13세인 영정이 진왕으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기에 국가대사는 모두 황태후와 대신들이 주관하였다.이 시기에 진나라는 선왕의 노력을 거쳐 이미 황하를 건너 사천,호북,산서,하남,내몽골 일대를 점령하여 6국을 병탄하여 멸망시킬 준비를 하였다.

상방 여불위(呂不韋)는 어린 진왕을 보좌하여 조정을 처리하였다.문무대신은 이스(李斯),왕전, 몽첩(蒙恬),위료등이였다. 기원전238년 진왕영정은 22세에 나라대사를 집권하였다.그가 한 제일 첫번째일은 바로 장신후 lao ai(長信候)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었다.이듬해 그는 또 여불위의 상권을 면직시키고 그를 사천으로 떠나 보냈다.그리하여 여불위는 자살하였다. 국정을 배치 한다음 영정은 6국통일 전쟁을 시작하였다.

기원전 230년,왕전,몽첩은 촉나라를 멸망시켰다.기원전222년 왕분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왕분은 제나라를 멸망시켰다.그때로 부터 춘추전국이후 중국대지에서 형성된 제후가 패권을 다투어 여러 해 계속되던 흔전정세를 결속지어 6국 통일을 하였다.진나라의 변경지역은 동남은 바다까지 서쪽은 임조까지 북쪽은 음산부터 요동일선까지였는데 그때 영정은 39세 밖에 안되였다.6국을 통일후 영정은 자신의 덕망과 명망이 높아 3황으로 인정하고 5제왕의 공로를 세웠기에 호칭을 "황제"로 하였다.

그 이후부터 중국 역대군주는 모두 황제로 불리어 왔으며 영정은 시황제로 청호하였는데 그뜻은 그로 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그의 후세는 2세,3세,이런 순서로 만세까지,무궁무진하게 전해 내려간다.그는 봉건제국의 통일을 보호하는 일련의 조치를 실시하였다. 은, 주나라 이래의 분봉제를 폐지하였고 군현제를 실행하였으며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뉘고 군 아래에 현을 설치하고 현 아래에는 향,정,리가 있으며 군 현 향 정 리의 정권체계를 형성하였고 중앙에는 삼공구경(三公九卿) 을 설립하고 황제를 보좌하여 국정를 처리하였다.그리하여 중앙에서 지방까지 일체권리는 모두 황제에게 집중되여 중앙집권제의 군주 통치를 크게 강화하였다.그리고 도량형(度量衡) 표준기를 발급하고 전국의 도량형제도를 통일하였고 또 차바퀴의 너비를 6자로 규정하였고 글자는 진소전(한자 서체의 한가지)을 전국통용문자로 하였는데 바로 "차동궤", "서동문"이라고 하는것이다.

사상문화를 통일하기 위하여 그는 전국범위에서 "분서갱유"의 활동을 벌이였으며 진나라 통일에 불리한 유가의 저작및 각나라 사서를 불살라 버렸다.함양위하 강변에서 한번에 400명도 넘는 유생을 살해하였고 또 리산산기슭에 700명도 넘는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전국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사상 방면에서 최고의 통일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진시황은 정무를 아주 중시하였고 매일 각지방에서 오는 120근의 문서(그당시 문서는 참대목판에 새겼다)를 읽어야 하였으며 경상적으로 한밤중까지 읽었다고 한다. 그는 또 전국에 적도를 건설할것을 명령하였고 함양에서 북쪽으로 직통하는 도로를 건설하였다.그는 선후로 적도를 따라 차를 타고 5차 순행하였고 서쪽방향으로는 오늘의 감소동부 ,동서방향으로는 오늘의 산동, 강소, 절강일대였다.

매곳에 이를 때마다 석비를 세우고 글을 새기여 황제의 공득을 선양하고 통일을 선양하며 국민은 진나라 법을 준수하여야 하며 북방의 영토를 보위하고 북방흉노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거느린 대장군몽첩을 파견하였으며 전국시대에 각 나라에서 건설한 장성을 연결하여 놓았고 서쪽의 감숙민산에서 부터 동쪽의 요동까지 모두 1만여리의 길이였는데 "만리장성"이라고 호칭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고대 인민들이 건설한 하나의 위대한 공사이고 또한 세계기적중의 하나이다. 남방에서 진시황은 병사를 파견하여 오령을 수복하고 영구(靈渠)를 팠다.이런 조치는 통일한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여 명조시대의 사상가 이지(李贄)는 진시황을 "천고일제" (千古一帝) 라고 찬양하였다.

진시황제는 중국역사상에서 명성이 매우 높은 걸출한 인물이고 혹간 극단적이고 참혹한 폭군이라고도 알려졌다.13세에 즉위하여서부터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천하를 통일 한 후로는 묘 건설을 더 다그쳤다.자신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하여 전국에 많은 별궁들을 건설하였으며 "관내삼백, 관외사백"의 규모를 형성하였다. 사서 기재에 따르면 그당시 진시황제릉과 아방궁의 건설에 참가한 노동자가 제일 많을 때 7천여명에 이르렀으며 통계에 따르면 그당시 전국인구는 이천여만명 인데 참가한 부역자는 이백여만명 으로서 전국인구의 십분의 일을 차지한다. 많은 노동력을 이런 사치스러운 건설에 종사기켰고 농업생산에서 이탈하여 자연경제 조건하에서 사회경제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했다.

더욱 비참한것은 진시황제는 매우 미신적이였는데 오항학의 영향을 받아 지금 가지고 있는 강산은 매우 쉽지 않은것으로 물론 이대, 삼대에 전해줄것을 기원하고 있었지만 죽음을 매우 두려워 하여 도사들이 제출한 "장생불로"의 그릇된 주장을 믿었다. 그후 그는 백관군신들을 거느리고 태산에서 봉선제 (천자에 제를 지낸 의식)를 지냈고 앞에서 소리쳐 길을 열고 뒤에서 옹호하며 위풍당당하게 국민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면서 대규모의 행차를 5차 진행하고 전국을 순행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지만 동해에 가서 장생불로약을 찾는것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였다.

장생불로약을 얻기 위하여 그는 여러번 속임수에 넘어갔으며 도사 서복(徐福)과 삼천명의 남녀아동을 데리고 동해를 건너 약 구하러 파견 보냈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동해바다에서 고래를 잡은일도 있었는데 장생불로를 갈구하는 절박한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허사였고,장생불로약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여러차례 행차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죽음의 시간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진시황제는 죽음을 제일 두려워 했기 때문에 제5차 행차시 평원진을 지날때 진시황은 이미 중병에 시달리였지만 대신들 누구도 감히 "사"자라는 말도 입밖에 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병세는 점점 심해 갔고 진시황제 자신도 이미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 당시 그는 세상을 떠난 후 황위계승자의 즉위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노련하고 심중한 정치에 능숙한 장자 부소(扶蘇) (진시황의 분서갱유 정책을 반대하였기에 북방감군으로 파견되었다.)를 계위 시키려고 생각하였다,그리하여 일행한 중차부령(中車府令) 조고 (趙告)에게 공자 부소를 신속히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즉위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하사하였는데 . 조고는 꾸물대면서 출발하지 않고 서신을 감추었다. 출행하는 차대오가 사구(오늘의 하북평향)에 도착하였을때 진시황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고 떠나기 아쉬워 하던 세상을 떠났으며 결국은50년이라는 짧디짧은 생명을 끝맺고 말았다.






진시황이 세상을 떠난후 승상(군주를 보좌하는 최고위직의 관리) 이스는 나라에 군주가 희생된 소식을 경솔히 선포하면 필경 대란을 일으킬것이라 생각해 그것이 두려워 비밀로 감추고 선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진시항의 죽음을 아는자는 진시황제의 막내 아들 호해(胡該)와 중차부령 조고 둘 뿐이였다.그들은 황제의 시체를 온도를 조절할수 있는 시체를 담는 수레에 싣고 매일 예전 처럼 진지를 따랐고 백관들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과 그 밖의 국정을 모두 호해공자와 중차부령 조고및 승상 이스가 맡아 칙령을 내렸다. 그에 동시에 정권을 탈취하는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조고와 호해는 상의하여 호해을 황제로 하기로 모의하였고 이스는 조고의 위협과 핍박하에 그의 탐욕은 끝내 마음을 흐리게 하여 점차적으로 호해가 황제로 결정되는것을 동의하게 되었다.그들은 진시황제의 원래의 칙령을 왜곡시켜 사자를(使者) 파견하여 북쪽 변경을 지키고 있는 부소공자와 대장 모첩에게 칼을 하사하여 그들을 자살하라고 명령하였다.


부소는 사람이 정직하고 재능이 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몽첩은 또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방에서 흉노들의 침략을 방지하였기에 그들이 황제자리을 찬탈하는데 제일 큰 장애가 되였기 때문이다. 호해가 황위를 찬탈하려면 우선 먼저 이 두 핵심인물을 없애 버려야 했다.거짓 칙령을 전달하고 부소,몽첩의 자살소식을 기다리려면 시간이 수요되기 때문에 진시황제 시체를 싫은 차대오는 고의적으로 북쪽에서 출발하여 구원(지명)을 돌아 다시 함양으로 돌어왔다. 그당시 바로 7월 삼복철이어서 진시황의 시체는 사체의 수레에 실었지만 썩기 시작하면서 구린내가 났다. 조고등은 다른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건어물(鮑魚)을 차에 실어서 그 고약한 냄새를 빌어서 진짜 구린 냄새를 감추려 하였다. 차대오가 함양에 들어설때 부소,몽첩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리하여 이스 ,조고, 호해는 떳떳하게 부고를 공개하였다. 9월에 진시황제의 시체를 진시황릉에 묻었고 그곳이 지금의 임통구 이동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대봉토 아래이다.

진시황은 그가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더우기는 그가 세상을 떠난후 조고 ,이스,등이 정변을 발동하고 칙령을 왜곡하려고는 더욱 생각못하였으며 황제로 봉하였던 부소가 사약을 받고 자결하게 되고 호해가 황제로 즉위하고 진2세로 될줄은 몰랐다. 호해는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랐고 정치 의식이 전혀 없으며 도무지 나라를 다스릴 재능이 없었다. 그리하여 대권은 조고가 독점하고 역사상에서 유명한 "노루를 가리켜 말"이라는 웃음거리를 빗어냈다. 2세 호해는 정치를 다스리지 않지만 호화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데는 진시황보다 더 하면 하였지 못하지는 않았으며 하여 계급 모순이 날로 더 격화되였다. . 기원전 209년, 중국의 제1차 대규모적인 농민 봉기가 폭발하였다. 매우 빠른 속도로 전국을 휩쓸었으며 신속히 진왕조의 통치를 타파하였다. 진왕조가 생존한 시간은 비록 짧디짧은 15년 (기원전221년-전206년)이지만 이후 이천여년의 중국 봉건사회에서 정치의 기초를 다지는것과 중국의 고대역사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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