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5 : 남해 낭하리 암각문]
고대남해는 천문학의 성지였나 | ||||||
가을하늘 별자리 은퇴교육자 조세원 향우, 새로운 학설 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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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南海島) 각석(刻石)
경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곳 금산에는 쌍홍문(雙虹門)이라는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석문(石門)을 앞에 두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면서 지금으로 부터 2200년 전(前)의 서불(徐市 또는 徐福)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금산사(錦山寺)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산사 옆 부소암 아래에는 7m x 4m의 평평한 바위가 놓여져있고, 그 바위 위에 1m x 50Cm의 넓이로 글자와도 비슷한 모양들이 새겨져있다. 일반적으로 암각화(岩刻畵)는 절벽이거나 세워진 바위 면에 있는데, 이것은 얼핏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산비탈에 박혀있는 나즈막하고 아주 평범한 바위 상부(上部)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 마치 종이에 글을 쓴 것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상형문자(象形文字)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암각화(岩刻畵)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곳 남해도 인근에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傳說)이 이곳저곳에 전해져 오기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 정(政)이 보낸 사신(使臣) 서불(徐市)이 이 곳에서 불노초(不老草)를 찾으면서 새기어논 글자라 하여, 과거에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意味)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1)
이 암각(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2)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3) 또한 "일본(日本)의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다고 한다. . . . 서복(徐福)은 일명 서불(徐市)로서, 불(市)과 복(福)의 음(音)을 같이 혼용(混用)하고 있다."(4)
서불(徐市) 또는 서복(徐福)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때, 낭야(琅邪) 사람으로 연단술(煉丹術)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하겠다는 뜻을 굳힌 방사(方士)의 한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 정(政, cheng)이 B.C. 221년(始皇 26年)에 6국을 정복(征服)하여 대륙(大陸)을 통일(統一)한 뒤, 천하(天下)의 부호(富豪) 120000호(戶)를 함양(咸陽, xianyang, 현재의 西安, xian)으로 이주(移住)시켰으며, 죄수(罪囚, 刑徒) 700000명을 동원하여 함양(咸陽) 북판산(北阪山)에 아방궁(阿房宮)을 짓게 하였다. 3년후 B.C. 218년에 천하(天下)의 명산(名山)마다 자신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러 다니던 진시황(秦始皇)이 낭야(琅邪)에 왔을 때,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神仙)이 사시는데, 어린 소년(少年), 소녀(少女)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려 합니다." 시황(始皇)은 크게 기뻐하며 총각 처녀 3000명을 가려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아가서 신선(神仙)을 찾아오게 하였다 한다.(5) 그러나 태백일사(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에서는 약간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도 역시 회사(淮泗)지방 출신이라 평소에 진(秦)나라를 거역(拒逆)할 뜻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바다로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주(逃走)를 계속(繼續)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6) 여하튼 이때 서불(徐市)은 동야현(東冶縣)의 해상(海上)에서 곧 나패(那覇)에 도착하고, 다네시마(種島)를 거쳐,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곳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으며, 이국(伊國, 伊勢)의 신궁(神宮)에는 서불(徐市)의 무덤(墓)과 사당(祠堂)이 있었다고 한다. (7) 즉 이러한 기록(記錄)에서는 서불(徐市)이 지금의 남해도(南海島)에 도착했었다고 명시(明示)되지 않았으나, 남해도(南海島) 내의 여러 곳에 서불(徐市)의 전설(傳說)이 남아있어, 서불이 분명 이곳을 거쳐 갔으리라 생각된다. 오히려 기록으로 보기에는 여기의 암각(岩刻)을 주로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전각(篆刻)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서불(徐市)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지 않나 생각된다.
조선(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 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禮)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王)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旗)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8)
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로서는 신시(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발해(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倭)와 진(辰)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金+契'木)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 즉 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秦,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晋,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9)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秦)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열거(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10) 그리고 우서(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11)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卦)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12) 여기서도 효(爻)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秦)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13)
대부분의 고문자(古文字)들도 대부분 가로나 세로로 나열(羅列)되거나, 줄칸을 그어서 그 안에 채워 넣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남해도(南海島)에서 볼 수 있는 형식과는 구별(區別)이 된다. 특히 기념(記念)으로 새겨놓는 암각(岩刻)은 주로 암벽(岩壁)이나 비석(碑石)일 경우가 많다. 암각(岩刻) 비석(碑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암(李'品/山', A.D. 1296~1364)이 편찬(編纂)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B.C. 1833년 여름 4월, "황제(皇帝)께서 나라를 순시(巡視)하시다가 요하(遼河)의 왼쪽 강가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帝王)의 이름과 호(號)를 새기어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뛰어난 금석문(金石文)이다." (14) B.C. 1634년, "황제께서 태백산(太白山)에 올라가서, 비석(碑石)을 세우고 여러 성인(聖人)들과 임금들의 공덕(功德)을 새겼다." (15) 이 기록에서도 기념비(記念碑)는 비석(碑石)을 만들어 세우는 것이며, 다른 기록에서도 최소한 절벽(絶壁)에 암각(岩刻)하여 남기고 있다. 이 암각(岩刻)이 새겨진 위치(位置)가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절벽(絶壁)이 아니고, 금산(錦山)에서 내리뻗은 능선(稜線)에서 돌출(突出)되어 드러난 바위 위라는 점에서 오히려 풍수(風水)에서 말하는 기혈(氣穴)과 관계있는 장소(場所)이자, 하늘을 지향(志向)하여 만들어진 유적(遺蹟)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제천(祭天)이나 제의(祭儀)의 성격을 갖고있는 경북(慶北)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한들바위(또는 신선바위)의 암각화(岩刻畵)들과 성격상 상통(相通)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종합(綜合)하여 보면, 여기 남해도(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線)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암각(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天)' 자(字)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주민(住民)이 전하나 직접 찾아보지는 못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나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른다.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이라고는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암석(岩石)의 자연적(自然的)인 균열(龜裂)이 아닌가 생각된다. (邊光賢작성, 1988년 7월 촬영, 1997년 1월 작성, 1998년 3월 수정, 보완)
(1) 과거부터 전해지는 여러 기록에서의 서불(徐市)을 '서시'로 읽어왔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생활속의 한자' 433호에 보면, 서시에 대한 김언종(金彦鍾) 씨의 매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이글에서 김언종은 서복(徐福)도 아니며, 徐市로서 '앞치마 불'인 '서불'이라 읽어야 올바른 발음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호칭이야 어찌되었든 앞으로는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모두 '서불'로 하였다.
(2) "南海縣郎河里岩壁 有神市古刻" (太白逸史/ 神誌秘詞),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崔致遠嘗得神誌古碑 . . . 卽郎河里 岩刻的是皆實跡也" (太白逸史/ 三聖記 註).
(3) "聞 南海島 郎河里之溪谷 及 鏡珀湖 先春嶺與 夫烏蘇里 以外岩石之間 時或有發見 彫刻非梵非篆 人莫能曉"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리고 남해도 낭하리(郎河里)는 이 암각 소재 지역의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며, 경박호(鏡珀湖)는 현재 만주(滿洲) 연변(延邊, yanben) 북쪽, 흑룡강성(黑龍江省, heilongjiang)의 모란강(牧丹江) 상류(上流)에 위치하고 있다.
(4) "日本紀伊 有徐市題名之刻 伊國神宮 有徐市墓祠 云徐福一稱徐市 市福音混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기이(紀伊)는 지금의 일본(日本) 혼슈(本州, honshu)의 와가야마(和歌山, wakayama)縣이다.
(5)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146쪽 및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한 金彦鍾의 '생활속의 한자'(朝鮮日報 連載) 433호 참조.
(6) "至於徐福韓終 亦以淮泗之産 素有叛秦之志 至是入海求仙 爲言仍逃不歸"
회사(淮泗) 지방은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省, henan) 신양(信陽, xinyang) 지역으로 추정(推定)된다.
(7) "秦時徐市自 東冶海上直 至那覇經種島 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舊有 徐福墓祠 或曰亶州 徐福所居云"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그리고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참조.
나패(那覇)는 일본 규우슈(九州) 남쪽 난세이 제도에 딸린 오끼나와 섬 남단에 있다고 함. (임승국 번역, '桓檀古記', 정신세계사, 1987. 268쪽 참조)
(8) 황용훈,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민음사, 1987. 91~92쪽 참조. 그리고 정인보의 해석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다음 구절(句節)을 참고(參考)한 듯이 보인다.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9) 檀君世紀/ 蘇塗經典本訓에 소개된 三聖記 註釋 參考
그리고 숙신(肅愼)의 원음(原音)은 조선(朝鮮)이라 하며, 진(秦) 이전에는 동이족(東夷族)이 중국 대륙을 대부분 점유(占有)하였으나, 같은 동이족(東夷族) 출신(出身)인 진시황(秦始皇) 정(政)에게 패한 후, 여러 나라 왕족(王族)과 귀족(貴族) 대부분이 한반도(韓半島)와 일본(日本)으로 이주(移住)하여 피신(避身)하였다는 주장(主張)이 있다.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참조)
또한 진(秦) 시대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던 흉노족(匈奴族, Hun)는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동이(東夷), 북융(北戎), 동호(東胡), 예맥조선(濊貊朝鮮)과 부여(夫餘)와 숙신씨(肅愼氏)를 포함(包含)하여 통칭(統稱)하는 말로서, 대륙(大陸)에 퍼져있던 기존(旣存)의 여러 환족(桓族, Hwan)을 비하(卑下)하여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동중(元董仲)이 편찬(編纂)한 삼성기(三聖記全/ 下篇)에 보면 구약성경(舊約聖經)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인류의 조상(祖上)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아이사타(阿耳斯타)에서 처음 만나 천신(天神)의 가르침으로 결혼(結婚)하였으며, 그 후손(後孫)이 구환족(九桓族)이 되었다고 한다.
"人類之祖 曰 那般初與阿曼 相遇之處 曰 阿耳斯(駝-馬) 夢得天神之敎 而自成昏禮 則 九桓之族 皆其後也"
(10) 클로드 보데(Claude Baudez)/ 시드네이 피카소(Sidney Picasso), 김미선 옮김, '마야-잃어버린 도시들', 시공사, 1996. 참조
(11) "留記云 神劃曾在 太白山靑岩之壁 其形如ㄱ 世稱神誌仙人所傳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留記)
(12) 金東春, '天符經과 檀君史話', 가나출판사, 1987. 259~289쪽 참조
(13) 神代文字總覽 參考, 웹페이지 http://www.sannet.ne.jp/userpage/tsuzuki/sinmoji.htm (97-10-26)
(14) "帝巡國中 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 刻歷代帝王 名號而傳 之是金石之最也" (檀君世紀/ 12世檀君 阿漢 在位52年)
(15) "帝登太白山 立碑刻列聖群汗之功" (檀君世紀/ 15世檀君 代音 在位51年)
△ 서복의 고향인 중국 장쑤(강소)성 간위(감유)현 서복사당에 있는 좌상과 서복 일행이 내한할 때 이용했을 범선. 서귀포시 제주서복연구회,<정방폭포서복유적조사보고서>(1992년) 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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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어른들로부터 불로초를 구하러 진시황이 동남동녀 수천 명을 우리나라쪽에 보내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 선약을 구해 갔는지, 못갔는지는 저마다 하는 소리가 달라서 종잡을 수 없었고, 또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통 오리무중이었다. 그저 심심파적의 흥미거리로만 들렸다. 어쩌면 이것이 전설의 매력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매력은 허망만이 아닌, 사실의 투영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전설은 상상과 가공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정한 사실성과 역사성을 반영한다. 그래서 전설은 오래도록 전승되며, 또한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방증적으로 조명하게 된다. 이 불로초 전설의 중심에는 서복(徐福:일명 서불)이라는 방사(方士)가 서 있다. 사실 서복이 바다로 동쪽을 향해 갔다는 ‘출해동도(出海東渡)’는 기원전 3세기께 중국과 한국, 일본 세 나라의 관계에 얽힌 역사적 현장으로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일본 사람들은 서복을 고대 일본문명을 일으킨 문명의 개조(開祖)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여 관련 논문만도 200편 넘게 내놓았으며,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당사자인 우리는 거의 소외되어 있다. 2년 전, 섬 고장 서귀포에서 어렵사리 ‘서복과 동아시아 문화교류’란 이름 아래 3국 학술모임을 한번 열었지만, 뭍 사람치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앙 언론에 보도 한 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사람들의 무관심과는 관계없이 전설과 그 주인공은 오늘날까지도 이러저러한 문헌기록과 유적유물, 그리고 민간 구전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중국의 사서 <사기>와 <삼국지>, <후한서>에 나오는 서복의 동도와 관련된 7종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진시황은 방사 서복의 거듭되는 청을 받고 선약(불로초)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과 함께 오곡과 쇠뇌까지 지닌 각종 공장들을 바다에 들여보냈는데, 그들이 택한 행선지는 ‘가기에 멀지 않은’ 발해 한가운데에 있는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삼신산(三神山)이다. 그런데 선약을 구할 수 없게 된 서복 일행은 죽음이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회계(會稽) 바다 밖에 있는 단주(亶洲) 혹은, ‘평원광택(平原廣澤: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그 어느 곳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서귀포 정방폭포에 ‘이곳 지나가다’ 글 남기고 남해 금산 바위엔 ‘해 향해 예 올렸다’ 기록 한-중교류 서막이었나
이 내용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서복 일행의 내한(來韓)과 관련된 것이다. 당초 행선지로 잡은 삼신산과 그 산들이 소재하는 발해, 그리고 종착했다는 단주가 다 한반도 판도 내에 속한다. 단군 이래 우리 겨레의 고유 신앙체계인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삼신산은 오늘의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가리킨다. 또 진대의 발해는 오늘의 발해와 황해를 망라한 한반도 주변의 해역이다. 회계는 오늘의 중국 절강성 회계이고, 단주는 선인들이 사는 동해 상에서 회계와 교역을 하는 곳이라고 하니, 십중팔구는 한반도 내의 어느 곳일 것이다. 단,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이 있는 땅이 어디인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서복이 일본에 이르렀다는 유일한 증거로 삼으며, 거기에 봉래산을 부사산(鳧繭箚내세우며 한술 더 뜬다. 신빙성이 없는 억지주장일 따름이다. 이러한 문헌기록과 더불어 서복의 내한과 관련된 유적유물로는 마애각(磨崖刻:절벽에 새긴 글) 5점과 암각(岩刻:바위에 새긴 글) 1점, 총 6점이 있는데, 그 중 명문을 남긴 대표적 유물은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의 마애각과 경남 남해군 금산(錦山)의 암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이 옛 중국 문자의 하나인 올챙이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석학자이기도 한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인 1840~49년 탁본했다고 한다. 19세기 말의 <삼한금석록>과 제주도 설화 속에도 ‘서복과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기록과 전승으로 보아, 조선조 말엽 당시에는 마애각이 있었던 듯하며, 광복 뒤까지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암각은 폭포 위에 전분공장이 들어서면서 폐수가 흘러내려 지워졌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 지금도 또렷한 남해 암각은 금산의 한 평평한 바위 위에 새겨진 금석문(너비 1×0.5m)인데, 그 내용은 여태껏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16세기 전반 이맥(李陌)은 그 옛날 환웅시대의 수렵도 같기는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이 각문을 서복의 내한과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금석문 학자 오경석은 탁본을 해 가지고 중국에 간 뒤 상형문 학자인 하추도(何秋濤)로부터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즉 ‘서불이 일어나서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예를 올렸다’라는 해석을 받고 돌아왔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문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크게는 글자를 새겼다는 각문설(刻文說)과 그림을 새겼다는 각화설(刻畵說)이 맞서고 있다. 각문설에는 그것이 고문자이거나 상형문자, 혹은 진나라의 전자(篆字)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각화설에는 물형그림이나 수렵그림, 혹은 태양을 상징한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다.
진시황의 명 받자옵고 아직 동정인 수천명 데리고 뱃길이라 몇 만리 신선의 나라 찾은 서복
전설로만 남겨둘수야‥
이와 같이 아직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이 암각이 서복의 내한을 실증하는 유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유물로서 서복 내한의 전설적 요소가 깊이 배어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고장(남해도)의 서리곶을 비롯해 주변 가까이에 관련 전설이 여러 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 암각이 갖는 상징적 의미나 시사하는 바를 결코 무시 못할 것이다. 그밖에 서복의 내한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전설은 사실성을 한결 보강해준다. 서복이 제주도 영주산에서 ‘시로미’(한라산 1700m 이상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상록관목의 완두 크기만한 식용 과실)란 ‘불로초’를 구해서 득의양양한 채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데서 ‘서귀포’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지리산 어구에 자리한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마을은 서불과 동남동녀 500명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신산(지리산)에 가면서 이 마을에 들러 샘물을 마셔보니 물이 하도 차서 ‘냉천마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섬진강 지류인 구례의 서시천(徐市川, 서불의 불(市)자를 시(市)자로 오인) 이름도 같은 경우다. 이와 더불어 서복전설은 계발과 교훈을 보듬어주는 문학적 모티브로까지 승화하여 귀중한 민족문학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가사 묶음집인 <경세설(警世說)> <백발가(白髮歌)>에는 서복의 맹랑한 구약 허사를 빗대어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개탄한다. “서복의 동남동녀 돌어온지 뉘 들었노, 불사약 어디 있고 불로초 보았느냐, …가는 청춘 뉘 막으며 오는 백발 뉘 제할까‘. <심청전>에도 이러한 대목이 있다. ”동남동녀 실었으니 진시황의 불로초 캐러 가는 배인가, 방사 서시(서불의 오자) 없으니 한무제의 신선 찾는 배인가, 가는 길에 죽자해도 뱃사람들이 지키고, 살아가자 해도 돌아갈 나라는 멀고 아득하다“. 배에 실려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심청의 신세를 서복이 당한 비운에 비추어 애통해 하고 있다. 조선조 문인 신광한도 <기재기이(企齋記異)>에서 진시황의 허망한 꿈은 ”천하를 혼란시키고 만세에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면서 ”신선이 될 분수도 없으면서 신선이 되는 약을 먹는 자는 한갓 그 수명을 재촉하기에 족할 따름이다“라고 신랄한 풍자를 보내고 있다. 그밖에 유명한 ’금란굴 전설‘은 불로초를 구하려는 것처럼 헛된 망상을 안고 무모하게 이땅을 범접하는 자들은 죽임만 당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사실은 전설 속의 서복을 2천여 년 전 한중 교류의 역사적 현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물론, 진나라 이전 시대에도 고조선과의 인적 , 물적 교류가 있어왔지만, 서복 일행처럼 수천 명이 대선단을 만들어 곡식과 무기를 싣고 오간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중국 해양사에서도 서복의 출해동도는 원양 항해의 효시라고 평가한다. 서복 일행은 낭아란 곳에서 출항해 산동반도의 연해를 따라 북상한 다음 발해를 건너 요동반도의 남해안을 거쳐 한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해 제주도나 남해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테면 고대 한중 해로의 연해로를 따른 셈이다. 그 선단 규모에 관해 동남동녀 3000명을 포함해 승선인원을 약 5300명으로 계산하는 학자가 있다. 아무튼 전말이야 어떻게 되었든간에 서복은 고대 한중 교류의 여명기에 그 서막을 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중국 왕조별 약사-진(秦)의 흥망
시황제의 급진적 개혁정치와 대토목 공사, 그리고 계속된 전쟁 등은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반란을 신호로 각지에서 진나라의 타도를 외치는 반란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유방과 항우이다. 유방과 항우도 여러 제후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게 된다. 처음 유방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날이 갈수록 유리해져 유방은 마침내 궁지에 몰린 항우를 해하의 싸움에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오강에서 최후를 마치게 한다. [진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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