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6 : 녹도문과 갑골문]
[1.남해 낭하리 암각문 2.녹도문(신지문자) 3.창힐문자 4.윤가촌 신지문자 5. 갑골문자]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있었다.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다. 창일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있다. 그 왼쪽에 보이는 신지문자 이른 바 녹도문이다. 『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이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된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되었다.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이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이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겠다.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이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다요.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이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다.(위의 그림 오른쪽 아래)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다.
[이상백 교수가 1930년대 만주에서 탁본한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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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대명가필보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역대필적을 엮은 책으로 1926년 백두용(白斗鏞), 정도영(鄭道永)이 6책으로 만들었다. 표제는 오세창(吳世昌)이 썼으나 서문은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고 우리 역사 4,000년간의 고금명가의 필적 700점을 모았으며, 혹 주옥같은 것이 빠졌을지도 몰라 완벽은 훗일을 기한다고 했다. 이 책은 글씨의 변천과 인물들의 필적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서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왼쪽 내용에 병자호란시 그 참상을 기록한 「병자록(丙子錄)」의 저자 나만갑(羅萬甲)의 필적이 보인다 |
고조선 문자 신지전은 고대 히브리어의 변용 | 천손민족 이스라엘 | 2005/12/06 21:26 | ||||
http://blog.naver.com/pts9228/60020197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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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규진 (金圭鎭 1868~1933)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書法眞訣,1914년 간) 에 "고조선 신치체"로 기록. 참고로 김규진 선생은 고종의 황실서예스승이오.
[이덕일 사랑] 甲骨文과 漢字
한자(漢字)의 원형으로 알려진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된 것은 불과 1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1899년 학질에 걸린 청나라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왕의영(王懿榮·1845~1900)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처방에 따라 오래된 거북 뼈를 사서 달여 마시려다 용골(龍骨)이라 불리던 짐승 뼈에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금석학(金石學)에 조예가 깊은 유철운(劉鐵雲)이 뼈의 글자가 그때까지 알려진 금석문보다 더 오래된 것임을 알아냈다. 왕의영은 제자 유악(劉顎)과 함께 그 뼈의 출처가 하남성(河南省) 북쪽 안양현(安陽縣) 소둔(小屯)임을 밝혀냈다. 이곳은 다름 아닌 고대 은(殷) 왕조의 수도였던 은허(殷墟)였다. 그런데 근래 은나라를 중국 민족의 뿌리인 화하계(華夏系)가 아니라 동이계(東夷系)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어 주목된다. 은나라는 하북(河北) 등 발해 연안 지역에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갑골문도 동쪽으로 갈수록 다수 발견되는데 발해 연안과 산동(山東)·하남(河南), 그리고 요령(遼寧)과 길림(吉林) 지방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갑골을 동이계 문자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중국 학자들은 갑골문에 알타이어(語)의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갑골문은 복사(卜師)가 신(神)에게 미래의 일을 묻는 복문사(卜問辭)로서 부호가 아니라 그림으로 묘사한 상형문(象形文)이다. 상형문은 본래 고립어 구조로서 특정어의 요소를 찾기 어렵게 되어 있다. 주(周)나라가 은나라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한 것도 은나라는 동이족 국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인들이 불과 100여 년 전에야 한자의 기원을 알게 된 것도 은나라의 이민족(異民族)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숫자를 셀 때도 중국인들은 새끼줄에 매듭을 짓는 결승(結繩) 방식으로, 갑골문의 숫자를 사용했던 동이족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탈리아의 라틴어가 전 유럽의 언어가 된 것처럼 은나라의 한자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자가 되었다. 천자문(千字文), 생활한자(生活漢字) 등 한자 배우기 열기가 높아 가고 있는데 한자 학습을 넘어 그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한자는 중국만의 나?말?이 아닌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2.15 19:01 10' / 수정 : 2006.02.16 01:37 24'
최근 중국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 다녀왔다. 고대 은나라 수도인 은허(殷墟)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은허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적지 않다. 은허에서 대량 출토된 갑골문(甲骨文)이 한자(漢字)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중국인들은 20세기 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899년 청나라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 왕의영(王懿榮)이 학질에 걸리면서 가인(家人)이 특효약으로 구입해 온 용골(龍骨)이 갑골문이었다. 왕의영이 1900년 영국을 비롯한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해 광서제(光緖帝)가 태원(太原)으로 도주하자 항의 자결한 후 그의 문하생 유악이 갑골문 연구를 계속해 그 정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갑골문이 글자 한 자당 은자(銀子) 두 냥(兩)씩 할 정도로 가격이 치솟자 골동품상들은 그 출토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1903년 갑골문에 관한 최초의 저서 '철운장귀(鐵雲藏龜)'를 쓴 유악도 그 출토지를 안양현이 아니라 그 남쪽의 탕음현(湯陰縣) 고유리성이라고 적을 정도로 은허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史記)' 항우(項羽) 본기에는 항우가 "원수(洹水) 남쪽 은허 위에서 맹약했다〔洹水南殷虛上已盟〕"라고 적혀있다. 또한 '사기집해(集解)'를 비롯해 '원수는 안양현의 북쪽에 있다. 옛 은나라 수도이다'라는 등의 구체적 기사들이 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은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라 동이족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맹자주소(孟子注疏)'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는 "맹자가 말하기를 은나라 순임금은 제풍(諸馮)에서 태어나서 부하(負夏)로 이주해 명조(鳴條)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동이지인(東夷之人)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에서 성인(聖人)으로 떠받들고 있던 순임금이 동이족이라는 것이다. 고대 국가 은(殷)이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한족(漢族)들은 의도적으로 이를 의식 속에서 지워버렸고, 사서(史書)에 무수히 등장하는 은허는 20세기 초까지 베일에 싸여 있어야 했던 것이다.
서기전 17세기경 수립되었다가 서기전 11세기경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멸망한 은(殷)나라의 시조 설(契)은 은설(殷契)로도 불린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은(殷) 본기에서 이 사화(史話)를 전하는데, "은나라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유융씨(有女戎氏)의 딸로서 제곡의 두 번째 비(妃)였다.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을 때 검은 새〔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삼켰더니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은나라도 난생(卵生) 건국설화임을 말해준다. 은나라의 실재를 부인하던 중국학자들은 하남성(河南省) 은허(殷墟)에서 대량의 갑골문이 출토되자 은의 건국민족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징대 대리총장이었다가 타이완(臺灣)으로 가서 타이완대 총장이 되는 부사년(傅斯年)은 1920년대 은허 발굴을 주도했는데, 그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은설(殷契) 사화를 실으며 '이러한 난생 설화는 동북민족과 회이(淮夷)의 신화'라면서 '논형(論衡)'에 나오는 탁리국( 離國=부여) 시조 동명과 '위서(魏書)'의 고구려 시조 주몽, 그리고 고구려 '호태왕비'의 시조 추모왕의 난생설화를 원문대로 실어 은과 부여·고구려의 시조사화가 같음을 보여주었다.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의 명으로 아계(阿桂) 등이 1778년 완성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도 마찬가지다. "장백산(백두산) 동쪽에 포고리산이 있고 그 아래 포륵호리(布勒瑚?)라는 연못이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천녀(天女)가 목욕하러 왔다가 신작(神鵲:까치)이 입에 문 붉은 열매(朱果)를 둘째의 옷에 놓았는데, 둘째가 입에 물자 홀연히 뱃 속으로 들어와 한 남아를 낳았다" 는 것이다. 이 설화는 '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에도 실려 있다. 근래 중국에서 출간된 '사기해독(史記解讀)'이나 갑골문 연구자인 맹세개(孟世凱)가 출간한 '하상사화(夏商史話)'는 은나라를 이인(夷人), 또는 동이족의 가지〔分支〕라고 쓰고 있다. 동북공정의 뿌리를 무너뜨릴 '은=동이족 건국설'이 다름 아닌 중국사 연구에 의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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