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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7 : 농은 유집의 갑골 천부경]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3:35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27 : 농은 유집의 갑골 천부경]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발견

 

고려시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와 더불어

오은(五隱)중에 한사람인 농은(農隱)의 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문

 

출처 : 대종언어연구소(www.hanja.com), 일요시사 9월 29일자


< 특종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발견, 단군.환웅 실재성 높아 >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자리매김하는 가장 분명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비해 열등한 모습으로그리고 일본의 강점이라는 치부를 지닌 왜소화된 이미지로투영돼왔다.
이러한 데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결여, 여기에 편입한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 이로인해 찬란한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치부됐고,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실제 모습을 증거해줄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돼 향후 국내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의미와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의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기로 한다.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초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씨는 이같은 사실을 "뉴스피플"(2000년 1월17일)"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당사학계에 의해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접한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에 의해 비로서 가치를 발현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소장해온 고본을 찾는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공개돼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가치를 담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일요시사 기사원문 >



 

 

밝달민족은 동북아시아의 주인으로 밝달민족의 옛 글자인

"갑골문자(은허문 : 주문)로 쓴 '천부경(天符經)’발견"

갑골문자(은허문 : 주문)로 쓰여진 천부경이 발견됨으로써 한자가 본래 밝달민족의 글이며 중국 동부 북부도 밝달 민족이 살던 곳임이 증명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갑골문자 이후 한자라고 불리워진 한자가 본래 밝달민족의 글이었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시대에 漢나라에서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백제 신라가 진시황에 밀려 한반도로 건너왔기 때문에 漢나라와 동시대에 백제 신라가 한자를 쓴 것이라고 밖에는 추리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남해에 서블기예출 이라는 암각문 과 서귀포 정방폭포에 서블과차 라는 암각문은 진시황의 불로초 사신 서불이 써놓은 주문입니다. 漢나라 전의 글은 漢字가 아니라 주문(籌文)입니다.)

신라시대의 최치원이 갑골문자로 쓰여진 천부경을 한문으로 옮겨 적었다는 사실이 있고 이번에 갑골문자로 쓰여진 천부경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은 세계가 놀랄 일이며 동북아의 주인은 밝달 민족으로서 장차 세계를 지도해 나갈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갑골문자가 발견된 은허 즉 은나라는 商나라 라고도합니다. 장사를 잘하는 나라로서 商人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기자는 본래 상(은)나라 사람으로 商나라가 周나라에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 商人다웁게 장사를 잘하여 거상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명도전이라는 철기 화폐가 쓰여져 지금의 중국 . 한국 . 일본의 세도나가이 등에서 발굴되고 있습니다. 明刀錢이라 하면 "명나라의 칼모양의 화폐"라 할 것인데 후대의 명나라 말고 그 당시 명나라가 있었을 것입니다. 명은 밝을 明이라 밝은 나라는 밝달 나라일 것입니다. 殷나라는 商나라이고, 밝나라는 明나라이고 환한 나라 환국 입니다. 기자의 성씨가 한씨인 것도 무심치 않게 생각됩니다. 거상인 기자의 몇대 후손이 재물을 잘 써서 진조선의 왕이 되어 기자 조선이라 하게되었습니다. 가만히 동북아시아 지도를 놓고 보면 상고시대에 지금처럼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명확히 그어지고 여권 비자가 있어야 왕래하였겠습니까? 황해를 사이에 두고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고대 중국민족과 韓민족이 만리장성을 밀고 당기며 섞여 살았을 것입니다. 갑골문자로 쓰여진 천부경이 모든 언론매체에 공개되어 한자도 우리 글이고 중국 동부 북부도 우리땅이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져야 하겠습니다!

 

 


퍼온글 일요시사 제350호 26, 27페이지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초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씨는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당사학계에 의해 僞 . 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접한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에 의해 비로서 가치를 발현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소장해온 고본을 찾는 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공개돼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가치를 담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은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 중 환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C 57
~ A.D935)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중의 하나인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때 묻히게 됐다. 그러던 중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서 다시 맥을 잇게 됐다.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내부에서만 발견되는 종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 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1899년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박종진 기자.

 

 

우리나라에서 은문[갑골문]이 고려말 충신 농은 선생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1899년 중국대륙 하남성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이래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은허갑골문과 완전 동일한 형태의 문자 및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껏 발견되지 않은 갑골문자들이 우리나라에서 문서상의 기록을 통해 다수 발견되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1961년 두만강 유역의 함북 무산읍 호곡동을 시초로 하여 경남 김해시 부원동 및 김해시 봉황동, 삼천포시 륵도, 전남 해남군 군곡리 등에서 중국의 것과 재료, 방법, 행위 및 목적이 동일한 복골이 속속 발굴되어 왔지만 안타깝게도 문자가 새겨진 복골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려말 충신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자,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과 함께 6은으로 불리웠던 農隱 閔安富 선생의 유집에서 발견된 天符經文에서 중국대륙에서 발견된 것들과 동일한 글자, 즉 학계에서 갑골문자라 부르는 것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본론 부분에서 상술하겠지만 비교대조 결과, 천부경에 기록된 문자들은 대부분 명백한 갑골문자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갑골문은 1899년에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고, 『說文解字』를 지은 후한의 문자학자 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 전의 인물인 농은 선생이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했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이러한 사실은 갑골학 역사에 있어 일대 사건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농은유집 천부경이 갑골문이라 불리우는 殷文으로 작성되었음을 기존 갑골문 및 金文과의 비교를 통해 문자학적으로 고증을 하고 또 그러한 사실을 학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다수 발견·확인됨으로써 기존 갑골학계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농은유집 천부경 문자들을 분석한 결과, 약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존 갑골학의 일부 문제점들이 드러나 갑골학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성과가 있었고, 그동안 단군 시대의 石本 『三一神誥』 箕子 시대의 檀本 『三一神誥』와 함께 한 쌍으로 당연히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석본 및 단본 천부경문의 분실로 인해 고구려 이후 번역되고 한문으로 해석되어 전해 내려온 기존 천부경본들에 보이는 일부 오류 ― 예를 들어 ‘新三極’을 ‘析三極’이라 한 점 ― 및 그에 따른 오해들이 해소되어 상고사를 비롯한 제반 연구가 보다 활기를 띠게 될 것으로 예상되며, 금번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천부경문은 향후 갑골학계를 비롯한 세계어문학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오게 할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서문 중에서―

 


◆기존 태백일사본과 다른 글자는 총 네 개로 다음과 같았다.

 

농은유집본
태백일사본
新三極(삼극)ddd
析三極(삼극)ddd
大氣合(대합)ddd
大三合(대합)ddd
無궤從三(무궤삼)
無궤化三(무궤삼)
七八九衷(칠팔구)
七八九運(칠팔구)

 

◆농은유집 천부경 고문을 해독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新三極無盡本 신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從三 일적십거무궤종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大氣合六生七八九衷 대기합육생칠팔구충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Ⅳ. 結 論

 

세상의 풍파, 즉 전란과 국가지도자의 편향된 통치철학 및 이념으로 인한 기존 문물의 배척 등과 같은 이유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잊혀졌던 은허갑골문이 100여 년 전에 은나라의 도읍지 안양에서 발견된 데 이어, 금번 한국에서 갑골상이 아닌 지면상에서 은문으로 쓰인 천부경 81자 全文이 발견되었으니 이는 갑골학을 다시 쓰게 하기에 충분한 역사적 대사건이다.

 

본론 부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금번 새로이 발견된 농은유집 천부경본에 수록된 각각의 문자들을 중국대륙에서 기발견된 갑골문과 금문과의 비교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천부경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는 소위 殷文임을 확인하였다. 농은유집 천부경본은 한걸음 더 나아가 기존 갑골학계의 성과를 뛰어넘어 오류가 있는 것(예: 地)은 교정케 해주고, 不明인 것(예: 太, 環, 動)은 명확히 밝혀주며 미발견된 것(예: 衷, 妙, 極, 本, 鉅, ? 등)은 새롭게 발견됨으로써 그 스스로 진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실로 귀중한 문자학 자료였다.

 

이처럼 경전 전문이 현존 최고 동방문자로 알려진 은문으로 쓰여진 완벽한 형태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최소 600년 이상 전에 갑골 표면이 아닌 종이 위에 붓으로 기록된 예 또한 최초의 사건이다. 은허갑골문에서 발견된 문장들의 내용은 주로 점을 치는 것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이처럼 경전이 다양한 이체자와 함께, 그것도 한문으로 번역되어 오랫동안 전해내려 온 기존 해석본들이 있는 상태에서 발견된 점 또한 갑골학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따라서 농은유집 천부경문은 문자학계뿐 아니라 천부경을 연구하는 국내외 많은 인사들에게도 새롭고 보다 구체적인 자료 및 천부경 부흥에 있어 촉매제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속칭 한자라고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시원은 중국 25사에서 東夷로 표현되는 우리 민족에게 있다. 현금 각종 유물의 발견 등으로 인해 중국의 사학자 王玉哲, 張文 및 대만의 문자학자 李敬齋 등은 여러 가지 유물을 객관적으로 고증하여, 한자는 東夷族의 문화인 앙소문화, 대문구문화, 용산문화 등을 거쳐 약 3,400년 전의 은대 ‘갑골문’으로 발전된 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桓檀古記, 三一神誥奉藏記, 금번 발견된 농은유집 천부경 등과 같은 우리측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동방문자[漢字]는 殷文[甲金文]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은문은 다시 단군의 篆文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檀篆은 또다시 신시의 녹도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은문 천부경본 이전에 단군의 전문 천부경 석본 및 환웅의 녹도문 천부경본이 있었다고 했으니, 아직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은문 이전에 그 원형이고 그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판단되는 檀篆과 또 그 이전의 신시 녹도문이 있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농은유집본은 다른 본들과는 달리 최치원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에는 “천부경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문으로 그것을 기록케 했다. 崔孤雲 致遠은 역시 일찍이 (단군 때의) 신지가 篆文으로 쓴 것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농은유집본은 기자조선 당시에 王受兢이 은문으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최치원이 본 檀篆 천부경본과는 다르다.

 

글로 된 문화유물의 발견은 전설을 실제화할 수 있다.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설의 왕조에 지나지 않던 동철족의 殷왕조가 안양에서의 갑골문 발견으로 인해 사실로 입증되어 이제는 그 누구도 “은나라는 전설상의 나라에 불과하다”는 허언을 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번 발견된 은문 천부경본으로 인해 발해 文王이 증언한 『삼일신고봉장기』에 실려 있는 箕子와 王受兢에 얽힌 이야기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삼일신고봉장기』에 나오는 그 이외의 기록, 즉 환웅과 단군 시대에 관련된 내용도 은문 천부경본에 포함되어 있는 신시 숫자[산목]가 그 증거이니 한낱 전설적인 이야기 식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며, 부분적인 오류에 대한 비평이 아닌 『桓檀古記』 전체를 위서로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시대를 입증할 뿐 아니라, 기자가 단군의 천부경을 은문으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단군시대까지 실증하는 것이며, 또 단군은 환웅의 천부경을 이어받은 것이기 때문에 환웅까지도 역사의 실존인물로 증거하는 국보급 문화유물이자 세계유산이다.

 

마지막으로, 중국대륙에서는 소어깨뼈나 거북등껍질 등에서만 발견된 속칭 갑골문자가 우리나라에서는 지면 위에 필묵으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기록재료를 바탕으로 한 ‘갑골문’이라는 명칭은 재고되어야 하고 앞으로는 殷文으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2002년 9월  眞鋼  朴大鍾 출처: http://www.hanja.co.kr/

 

 

< 특종 “갑골문자 ‘천부경(天符經)’발견, 단군.한웅 실재성 높아 >
민족이나 개인에게 있어서 역사(歷史)는 존재의 정체성과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자리매김하는 가장 분명한 준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역사는 자주적인 역사를 이어왔음에도 주변의 중국역사에 비해 열등한 모습으로, 그리고 일본의 강점이라는 치부를 지닌 왜소화된 이미지로 투영돼왔다. 이러한 데는 우리 역사의 실체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의식의 결여, 여기에 편입한 강단사학(講壇史學)의 영향도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古代史)는 그러한 역사 관행의 피해를 본 대표적인 분야. 이로인해 찬란한 고대사를 증거해주는 사료(史料)는 위서(僞書)로 치부됐고, 재야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아왔다. 그런데 최근 우리 고대사의 실제 모습을 증거해줄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가 발견돼 향후 국내의 학계는 물론 역사의식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동방문자(漢子)의 기원인 갑골(甲骨)문으로 쓰여진 우리 선조의 유집 "농은유집(農隱遺集)"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갑골문의 뿌리가 단군조선 이전인 환웅(桓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낸 것. 이에 따라 본지는 "농은유집 천부경"의 의미와 박대종씨의 연구 성과가 갖는 의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기로 한다.

< 갑골문과 천부경 >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우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한편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중 한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임무를 전담하다가 혁덕이후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것이다.

 

단군숭배를 기초로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따르면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으로

- 조화경인 "천부경"과
-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는데

-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환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 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때 묻히게 됐다. 그러던중 1916년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서 다시 맥을 잇게 됐다.


< 농은유집 천부경의 발견 >
앞서 언급했듯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 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중 청나라 말기인 광서 25년(1899) 금석학자이자 국립대 총장인 왕의영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되었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일대 사건에 비유될만한 충격적인 일이다.

하나는
갑골문 하면 오직 중국대륙 내부에서만 발견되는 종래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전의 인물인 민안부가(조원길이?)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직접 갑골문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도은 이숭인, - 야은 길재, -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중
발해 문왕인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의 한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子)가 부여의 법학자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져있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펀주: 기자조선-고조선 변방의 한 지역.고조선의 진한 마한 변한 중에서 변한에 세워진 고조선의 제후국.)

이를 종합할 때 조원길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농은일 가능성이 많음)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년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원본의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단군, 나아가 한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 중국갑골문의 한계 >
중국한자의 근원은 갑골문과 고대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이다.
시기적으로는 은나라의 뒤를 이은 주나라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은문에 비해 발전적인 형태가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금문은 은문으로 칭해도 무방하다.농은유집 천부경문에는 은문이나 금문에서 발견되지 않는 글자가 있고, 은문, 금문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가 있어 천부경이 갑골문에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구체적으로 농은유집 천부경문에 기록되어 있는 중복을 제외한 총 46개의 문자중 은허갑골문에서 이미 발견된 글자들은 총 32자(69.6%)이다. 이중 갑골학을 지금껏 주도해오고 있는 중국학계에서도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거나 불명(不明)으로 취급한 문자들이 있다. 지(地), 환(環), 동(動), 태(太), 등이 그것이다. 동(動)자 안에 포함된 중(重)까지 합칠 경우 천부경문에 포함된 글자 중 미해독 글자는 총 다섯 글자가 된다. 특히 지(地)나 환(環)과 같은 고자(古字)의 발견은 기존 갑골학계의 연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은허문에 와 같은 글자가 발견됐지만 중국의 갑골문 권위자들은 을 지(地)가 아닌 다른 글자로 감정을 했다는 것이다. 곽말약은 그의 저서 "복사통찬(卜辭通簒)"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린 ‘떨어질 타(墮)’는 본 글자라고 고찰하였다. 서중서도 갑골문자전(甲骨文字典)에서 무너질‘휴’자로 곽말약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서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표현한 천부경문이 천지인이 아닌 천타인(天墮人) 일리 없다. 또한 환(環)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해독문자 또는 '그물견자’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박대종씨의 설명이다. 금문(金文)에서도 농은유집 천부경 내에 포함된 글자들중 五, 六, 七, 八, 九를 제외한 41자중 11자(26.8%)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미해독문자로 분류된 환(環)자는 농은유집 천부경문으로 해독되고 있다.


< 기존 천부경과의 차이 >
"농은유집 천부경"을 발견.해독하기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모두 다섯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연수가 발견한 묘향산 석벽본, 둘째는 최문창전집 ‘고운(孤雲, 최치원)선생, 사적’ 편에 나오는 최고운 사적본이며, 셋째는 노사(盧沙) 기정진(1798~1876)으로 전유하여 내려오던 노사전본이고 , 넷째는 단기고사본으로 일(一)이 2 번 중복되어 83 자로 수록되어 있으며, 다섯째는 조선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실려있는 태백일사본이 그것이다. 이상 여섯가지 중에서 태백일사본 또는 묘향산 석벽본은 한 자도 어긋남이 없이 전문이 일치하여 현재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
析三極無盡本
석삼극무진본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
一積十鉅無 化三
일적십거무궤화삼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
大三合六生七八九運
대삼합육생칠팔구운
三四成環五七一妙衍
삼사성환오칠일묘연
萬往萬來用變不動本
만왕만래용변부동본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
昻明人中天地一
앙명인중천지일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


그러나 태백일사본과 묘향산 석벽본은 농은유집 천부경과 네 군데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석삼극(析三極이 아니라 新(새로울 신)자를 쓴 신삼극(新三極)이었으며,
두 번째는
대삼합(大三合)이 아니라 氣(기운 기)자를 쓴 대기합(大氣合)이었고,
세 번째는
무궤화삼(無 化三)이 아니라

< 비교표 >



< 농은유집 천부경>



< 앞으로의 과제 >
"농은유집 천부경"은 농은 민안부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2000년초 문중인 민홍규씨가 송호수 박사에게 처음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민씨는 이같은 사실을 "뉴스피플"(2000년 1월17일)
"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당사학계에 의해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밝힌 바 있다.

민씨로부터 농은유집을 접한 송호수 박사는 유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저서 "한민족의 뿌리사상" 개정판에 영인본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당시 송박사는 농은유집의 천부경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못하였다. 농은유집은 언어학자 박대종씨에 의해 비로서 가치를 발현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민홍규씨가 소장해온 고본을 찾는것이다. 민씨는 고본에 대해 일본 전문감정서로부터 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빨리 고본이 공개돼 농은유집 천부경문이 고증학적 절차를 거쳐 역사적, 민족사적인 가치를 담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종(從, 좇을 / 나아갈 종)자를 쓴 무궤종삼(無 從三)이었고 ,
네 번째는
衷(가운데 / 통할 충)자를 쓴 칠팔구충(七八九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