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는 조선시대 르포 기자 | ||||||||||||||||||||||||||||||||||||||||||||||||||||||||||||
지방실정·관리비리 감찰하기 위한 왕의 밀사 | ||||||||||||||||||||||||||||||||||||||||||||||||||||||||||||
가족에게도 비밀…임무 마칠때까진 못돌아와 | ||||||||||||||||||||||||||||||||||||||||||||||||||||||||||||
어느 잡지에 모 기자가 이런 얘기를 써놓았다. “정치판을 욕하지만 싸움을 붙이는 쪽은 꼭 신문이다. 정말 지적해야 할 것은 못하고 말꼬투리 하나로 정치판, 나라판을 혼돈으로 몰아놓는다. 신촌에 지나가는 학생들 보고 물어보라. ‘정치인들이 나쁘냐, 언론인들이 나쁘냐’고. 백이면 백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욕한다.” 작금의 우리 언론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글은 뒤집어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언론은 투명한 비판과 감시의 기능, 그리고 민심의 흐름을 읽는 등의 사회의 공기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역할을 부여받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현대판 르뽀 기자 암행어사였다. 고려나 이조는 세습 군주제도로 모든 지배권이 왕에서 나오지만 백성을 통치하는데 왕 혼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왕도정치의 실현이 통치의 기본 이념이었다. 그러나 왕이 아무리 재능과 의욕을 갖고 있더라도 궁궐에서 나라 전반에 대한 일을 세세히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민심의 소재를 알아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언론의 길을 여는 것이다. 벼슬아치는 물론 일반 대중이 자기의 생각이나 건의를 조정에 낼 수 있었다. 당연히 모든 불평 불만을 처리하기 위해 민심을 전담하는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언관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언관의 기구로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있었다. 이를 삼사(三司)라 했다. 삼사가 맡은 일은 각각 다르나 언론의 소임이 주 임무였다. 그 중에서도 사헌부와 사간원이 언론의 주요 관청이었다. 사간원은 왕의 잘못을 간하고 벼슬아치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역할을 한다. 사헌부는 시정의 잘못을 따지고 벼슬아치들을 규찰하며 암행어사도 여기에 소속되었다. 암행어사는 사헌부 감찰이 주로 맡았고 감찰은 또 언관이 되었다. 홍문관은 외교문서의 작성, 유교 경전 등을 관리하면서 시정을 고문할 권한이 주어졌지만 사헌부나 사간원보다는 언관의 역할이 약하다. 〈한국인의 창작품 암행어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암행어사는 한국인의 창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어사라는 말 자체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의 측근을 대리인으로 지명하여 각 지방을 순행하면서 지방관의 정치를 감찰하게 했다. 이 황제의 대리인을 지칭하는 명칭은 여러 가지이나 가장 보편적인 명칭이 어사(御使)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처럼 비밀리에, 전국적으로 여러 명의 어사를 파견하여 그 보고사항을 토대로 국정 운영에 크게 반영했던 제도는 조선인들의 창작품이다. 이 특이한 방식의 어사를 ‘암행어사’라고 불렀다.
춘향전의 내용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시대라는 엄격한 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서로 다른 남녀의 사랑은 허용될 수 없는 일임에도 이들은 힘겨운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는 사랑을 획득한다. 기생의 몸으로서 하늘같이 높은 사또 자제를 넘본 것은 분수를 모르는 터무니없는 짓이었지만 목숨을 건 지조가 있었기 때문에 춘향의 사랑은 독자들의 공감을 받았다. 그러나 춘향전이 독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은 그 내용이 단순한 사랑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중대한 사회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변학도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관리를 설정하여 춘향으로 하여금 그에게 저항하도록 설정했다. 변학도에 대한 항거는 곧 불의한 관리에 대한 민중의 항거로 확대 해석되었다. 춘향의 승리에서 민중의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민중의 승리감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 데는 바로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는 국왕의 직속기관으로 백관의 규찰과 풍속 교정 등을 그 직무로 했지만 도성 안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멀리 떨어진 지방의 관리들을 감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헌부가 지방의 비리나 범법 사실을 인지하여 해당 지역 관찰사에게 이첩 조사케 하여도 관찰사가 사실을 은폐하거나 허위로 보고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사헌부에서 감찰을 각 지방에 파견하거나 지방에 분대를 설치하기도 했고 후에 분대를 분대어사라고 호칭하다가 성종 때부터는 어사라고 호칭했다. 중종 이후에는 사헌부 감찰을 지방에 거의 파견하지 않고 지방 관리 등의 규찰 임무를 어사가 담당하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암행어사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후 선조 때부터 19세기 말 고종까지 3세기 동안 암행어사가 지방 감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에는 왕이 적임자의 선택을 명령하고 이에 따라 삼의정(三議政)이 복수로 추천하면 왕이 그들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암행어사는 임무가 완수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공개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왕은 항상 청렴하고 강직하며 의협심과 정의감이 투철한 인물을 선정하고자 부심하였는데 대체로 자신을 보좌하던 측근 중에서 신진들을 선정했다. 암행어사로 결정되면 왕은 봉서, 사목, 마패 등을 직접 수여하여 임명했다. 봉서는 국왕이 종친이나 근신에게 내리는 사서인데 봉서에는 암행어사 임명 사실과 감찰할 대상 지역과 문제 등이 적시되었고 그의 임무와 암행 조건 등을 기재한 사목 등을 내려준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봉서가 내리면 집에도 들리지 못하고 즉시 출발해야 했는데 ‘남대문이나 동대문 밖에 나가서 뜯어보라’는 글귀나 임지에 도달해서 개봉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암행어사를 신화적으로 만든 것은 부모나 왕이 사망하는 절박한 사정이 생기더라도 자신에게 떨어진 사명을 마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암행어사는 이를 왕이 주는 철저한 사명감으로 알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를 받아드렸다.
마패는 암행어사의 가장 중요한 증표인데 병조에서 지급했다. 당시 교통기관으로는 역이라 불리는 관청을 두고 공무상 편의를 위해 역마를 관리했다. 어사는 소지한 마패에 조각된 수량만큼의 역마를 징발할 수 있었는데 1마패, 2마패, 3마패 등으로 나뉘어진다. 영조 때에는 암행어사에게 3마패를 주로 주었고 고종 때에는 주로 2마패를 주었다. 마패는 지름이 10센티미터 정도의 구리쇠로 만든 둥근 패로 연호 연월일과 ‘상서원인’이라 새기고, 한쪽 면에는 말을 새겼다. 또한 암행어사에게 지급된 마패는 어사가 인장 대신으로 사용했고 어사출두 때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도’라고 했다. 암행어사는 『춘향전』에서와 같이 흔히 거지처럼 꾸미고 다니면서 왕께 백성의 실태를 보고했다. 보통 관찰사와 대등한 권한을 가지고 전 현직 관찰사나 수령의 잘못을 파헤치고 올바른 민심을 파악하여 왕께 보고했다. 그러나 어사는 원래 품계가 낮았기 때문에 현격히 높은 관찰사나 그와 동급의 지방관의 비리 적발을 감히 하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그래서 왕은 암행어사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높여주기 위해 관찰사 급의 고급관료에게만 수여하는 부월(도끼)을 주었으며 수령(후대에는 관찰사와 병사도 포함)이 크게 잘못할 경우 즉시 그 관인(官印)을 빼앗아 파직을 명할 수 있었다. 불법 사실이 발견되면 ‘불법 문서의 현착→봉고→서계→파직’의 4단계를 거쳐서 처리했다. 또 지방관을 대신하여 재판하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특히 어사출두의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고소 고발하거나 민원 서류를 제출하도록 하여 이를 조사 처리했다. 그래서 학정이 심한 곳의 백성들은 암행어사의 출두를 고대했다. 특히 숨은 미담이나 열녀, 효자들의 행적도 낱낱이 살펴 민심을 고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이 암행어사를 신격화한 전설이 생기기도 한 이유로 영조 때 활약한 어사 박문수는 시대를 초월하여 백성들의 온갖 원한을 해결하는 해결사로 비치기도 한다.
〈변질되는 암행어사〉 암행어사의 파견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암행’의 보장이다. 누가 암행어사인지, 또 언제 어디로 무슨 목적을 갖고 파견되었는지가 비밀로 보장되어야 했다. 왕은 암행어사 파견을 비밀로 하기 위해 직접 봉서를 내리는 등 보안 유지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파견의 목적이 순수하게 감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방 수령들로 하여금 항상 경계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의미도 갖고 있었다. 누군가가 암행하면서 염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지방 관리들이 항상 긴장감을 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런 방법을 유지하기 위해 왕은 암행어사를 수시로 보내거나 비정규적으로 파견했다. 사실 암행어사란 의미가 바로 ‘몰래 살핀다’라는 뜻이므로 이런 불규칙성, 임시성이 파견의 효과를 높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바로 이 암행이 암행어사들에게 오히려 크게 부담이 되었다. 암행어사는 피감찰자가 암행어사가 파견되었음을 모르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암행어사가 혼자 다닐 수 없는 데다가 혼자서의 염탐은 효율이 떨어지고 정확한 민정을 파악하지 못할 우려가 많았다. 그러므로 암행어사가 직접 뽑은 각사의 서리들을 공식적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는데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무리를 데리고 다니다가 종적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후 암행어사는 한잡한 무리들을 수행할 수 없었고 군관들도 대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도 시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마련이다. 무소불위의 암행어사 제도가 초기부터 정착된 것은 아니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감사원의 임병준은 초기의 암행어사들이 겪은 고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첫째는 추생지의 수령들이 암행어사의 규찰 활동 자체를 고의로 방해하는 것이다. 중종 때 황해도 어사 조종경이 강령현에 갔는데 수령이 성문을 닫고 들여보내지 않자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성문을 열지 않은 이유는 수많은 불법 행위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둘째는 공용 임무를 수행하는 어사가 징구한 문서조차 소멸시키거나 훔쳐내기도 했다. 중종 때 강원도 어사 송기수는 강릉에 도착하여 불법 문서로 보이는 문서 3건을 압수했으나 도둑맞았다. 추후의 조사 결과 강릉부사 장계문이 불법 문서를 어사에게 압수 당하자 몰래 훔쳐낸 것이다. 그러나 암행어사 제도의 문제점은 암행어사가 1∼2개월간이나 지방에 가서 규찰해야 함에도 소요되는 여비 등의 지급이 불규칙했다는 점이다. 임명시에는 왕이 여비나 음식을 넣은 상자를 지급하기도 했으나 여비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 지급했다 하더라도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어사는 음식 등 필요한 생활물자를 현지에서 빌리거나 인근 수령에게서 얻어야 했다. 다만 추생지에서 양식 등을 받는 것을 뇌물로 간주해 엄격히 금했지만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주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야기했다. 암행어사의 자질도 문제였다. 암행어사들이 대부분 처벌 위주로 보고했으나 때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포상을 많이 하는 경우도 있어 포상이 취소되거나 암행어사가 처벌된 경우도 있었다. 영조 때에 충원 암행어사 이재건은 양진창에 곡식 6000석이 있어야 하는데 단지 16석만 있는 사실을 적발하고도 현감의 포상을 건의하기도 했다. 경험이 부족한 어사들이 단기간에 감찰함으로써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더구나 암행어사가 본래의 사명과는 달리 반대파를 공격하고 자기편을 두둔하는 당파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하자 암행어사의 본래 취지는 크게 퇴색한다. 비리가 있는 고관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심복을 시켜 어사의 뒤를 밟게 하는 것은 물론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심지어는 어사를 탄핵하기까지 했다. 암행어사로 오인하여 생기는 해프닝도 일어났고 실제로 암행어사를 사칭하는 사람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중종 14년(1519) 경상도 예천에서 군수가 자리를 비웠을 때 어떤 사람이 어졸들을 모아 점거하고 노비들을 모아 지방에 대한 각종 사건들을 질문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암행어사라고 생각하여 어쩔 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약재를 구하러 온 서리(書理)에 지나지 않았다. 전라도 암행어사 황혁의 보고에 따르면 그가 나주와 담양에 이르러 김국보라는 도적을 잡았는데 그는 어사라고 가칭하면서 관부(官府)를 협박하고 동료 도적을 탈출시키려고 했다. 요즈음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만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홍경래 난 때 유한순이 암행어사를 가칭하고 다니다가 탄로 났으며 황해도에서는 암행어사로 가장한 죄인 박광복이 효수되기도 했다. 함경도의 경우 가짜 암행어사가 나타나 수령의 죄를 따져 파면시키기도 했는데 도사(都事) 역시 가짜 암행어사의 공문에 속아 수령을 파면한 사유를 왕에게 장계로 올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가짜 어사가 전국을 돌아다닐 정도로 암행어사는 확인하기 어려웠다는 측면도 있지만 또 진짜 암행어사였다면 그만큼 위세가 등등했다는 뜻도 된다. 암행어사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는데 조선 시기에 암행어사란 이름을 달고 나타난 예는 총 613회에 달한다. 이는 본격적으로 암행어사가 파견되는 최초의 해인 명종 5년(1550)부터 고종 34년(1897)까지 348년 동안 파견된 모든 암행어사의 숫자를 합한 수치이다. 매년 평균 1.8회인데 가장 많이 파견한 해는 무려 28명이나 파견되었으며 명종 말기와 선조 초기의 약 20년 간은 단 한차례의 파견도 없었다. 〈언론을 대변하는 언관〉 언관은 대체로 암행어사로 나가 민심을 살피고 수령이 되어 지방 행정의 경험을 쌓은 뒤에 임명된다. 언관의 직무 수행 방법은 두 가지로 첫째는 어떤 주제를 정해 승정원에 올리면 승지들이 이를 정리하여 왕에게 올리는 것으로 이를 상소 또는 상차라고 한다. 둘째는 말로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계언 또는 상계라고 한다. 처음에는 비밀스러운 내용이나 큰 일에 관계되는 것도 글로 올렸지만 비밀로 지켜져야 할 내용들이 공개되어 당쟁으로까지 비화된 후부터는 왕에게 직접 말하는 계언이 주가 되었다.
어쨌든 이런 건의가 올라가면 왕은 어떤 형식이라도 가부간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것을 비답(批答)이라고 했다. 만약에 비답을 내리지 않고 지체하거나 묵살하면 언관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또한 부당한 비답이 내려지면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재차 항의했으므로 건의가 많으면 왕은 밤을 새워서라도 비답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왕의 직무가 남달리 고달팠음은 물론이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언관들을 왕이 좋아할 리 만무하지만 필요한 신하로 생각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바른 말로 간하거나 시정의 잘못을 따지는 언관들을 죽였고 그 정원을 줄이기도 했다. 연산군이 언관을 억누른 사실이 바로 후대에 폭군으로 낙인찍힌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중종은 조광조 일파가 줄기차게 올리는 개혁안에 짜증이 나자 이를 반대하는 간신들의 말에 솔깃하여 그들을 죽인 후 곧 후회를 하고 평생을 회한 속에서 보낸다. 민심을 전달하는 방법은 언관을 통하는 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상소는 벼슬아치라면 누구나 올릴 수 있었고 재야의 선비, 즉 양반들도 이 방법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글로 올리기 때문에 유식자에게만 이용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상소는 국가나 지방 또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자주 이용되었는데 연명으로 올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 수가 수십 명, 수백 명 또는 1만여 명이 되기도 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극단적인 행동도 불사했다. 대전(大殿) 문 앞에 도끼를 놓고 엎드려 상소를 올리는 것이다. 상소문을 받아줄 때까지 대궐 앞에서 잠을 자면서 만약 상소문을 받지 않으면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쳐서 죽이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상소가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상소는 벼슬아치와 유생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할 수 있었지만 글을 모르는 서민들이 제대로 이용했을리 만무했다. 그러므로 이들 상소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자기 파를 옹호하기 위해 무고를 하거나 모략을 벌이거나 과장된 사실을 적어 상대파를 매도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최고의 판사인 왕이 진위를 가리기 어려워 선정을 베푼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오늘날 매스컴과 같은 제도도 운용되었다는 점이다.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벼슬아치들에게 알려주는 방법으로 조보(朝報)가 매일 아침 발행되어 배달되었다. 조선 초에 이루어진 조보는 오늘날의 신문과 같다. 04/6/19 이종호(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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