乞食(걸식) 먹을 것을 구걸하며 陶淵明(도연명)
飢來驅我去(기래구아거) 기아가 닥쳐 나도 거리로 내몰렸구나!
不知竟何之(부지경하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行行至斯里(행행지사리) 걷고 걷다보니 이 마을에 이르러서,
叩門拙言辭(고문졸언사) 문 두드리려 더듬거리며 하소연한다.
主人解余意(주인해여의) 집 주인 내 뜻을 알아차리고,
遺贈豈虛來(유증기허래) 음식 내어주니 헛걸음은 아니로다.
談諧終日夕(담해종일석) 이 얘기 저 얘기로 하루해가 다하여,
觴之輒傾杯(상지첩경배) 술상 내어오니 잔 오는 족족 마신다.
情欣新知歡(정흔신지환) 어느덧 정들어 새로운 기쁨 솟아나고,
言詠遂賦詩(언영수부시) 기쁜 말 읊으니 賦가 되고 詩가 되네.
感子漂母惠(감자표모혜) 정성스런 은혜 고맙기 짝이 없고,
愧我非韓才(괴아비한재) 한신같은 인재 아닌 내가 부끄럽기만 하다네.
銜집知何謝(함집지하사) 마음속에 담아둘 뿐 감사할 길 없으니,
冥報以相貽(명보이상이) 저승이라도 반드시 만나 보답하리다.
*집: 그칠 집, 거두어 드릴 집(邑+戈)
도연명(365~427):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 심어두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다.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시상(柴桑)출생. 그의 증조부가 서진(西晉)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가 당시 동진(東晋)의 명사 맹가(孟嘉)였다고 하는데, 그의 부친은 이름 없는 선비에 불과하여 아직까지도 그 이름을 알 길 없을 정도로 그의 어린시절은 그리 풍족치 못한 한미한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 처음 관직으로 미관말직인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곧 사임하고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시달리며 한직에 머물다 41세시 누이의 죽음을 빌미로 팽택현(彭澤縣) 현령을 끝으로 평소에 늘 그리던 전원생활로 돌아갔다.
바로 팽택현 현령 사임사(辭任辭)가 바로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그 후 향리에서 전원생활로 일생을 스스로 괭이 들고 농사지으며 가난과 병으로 괴로운 나날 중에도 詩作을 게을리 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주의 전원시의 태두로 자리매김하면서 역대 중국의 4대 시인(굴원, 도연명, 이백, 두보)중 한명으로 천추에 길이 남아 오늘날에도 그의 시가 널리 애송되고 있다.
그의 주요작품으로 (귀원전거)(오류선생전)(도화원기)(귀거래사)(음주)등이 있다.
주1)구아거: 스스로 내어 몰리다.
2)첩: 번번이
3)표모혜: 빨래하는 노파의 은혜라는 뜻이나 여기에서는 정성스런 은혜로 표현했다.
4)한재: 漢의 명장 한신의 재주를 말한다. 한신은 젊어 불우한 생활을 겪어 저자거리에서 얻어먹거나 시정잡배의 웃음거리로 생활 한 적이 있다.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오늘의 문명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나라라면 마땅히 국민들의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국가가 책임짐이 마땅하다하겠다.
하나 그 옛날 도연명이 살던 그 시대에도 우리의 몇 십 년 전과 다름없어 홍수나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끊임이 없었고, 기근으로 인한 유리걸식은 시인이라 하여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아마 그 어느 해 도연명도 기근으로 인한 유리걸식의 경험을 이 시로 표현한 것 같다.
태풍나비로 인해 경, 남북 해안 일대를 수마가 할퀴고 간 자국이 선연하다.
졸지에 집과 재산을 잃어버린 수재민에게 우리 모두의 따뜻한 온정을 기대해보며 도연명의 이 시를 올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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