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신학자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의 실상과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 ||||
운명으로 몰아 세운 이종성 원장의 역사에 대한 기만 | ||||
* 칼빈신학자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의 실상과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1) 네 감독관의 죽음에 대한 이종성 박사의 왜곡된 주장 (1)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과 무고한 비난 칼빈 신학자 이종성 원장(기독교 학술원)은 ‘칼빈’이란 저서에서, 제네바에서 칼빈이 자신을 추방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으로 사형 시킨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3년 전에 칼빈을 괴롭게 하고 그를 추방했던 네 감독관은 이미 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두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한 사람은 성벽을 넘어 도망하려다가 재기 불능의 중상을 입었고 마지막 사람은 관원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이제부터 칼빈의 적들이 없어서 일이 순조롭게 추진될 것 같기도 했다’고(李鍾聖 op. cit. p.43) 주장하였다. 이종성 원장이 밝힌 앞의 네 감독관이 과연 어떠한 경위로 사형선고를 받고 또 죽어야 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실상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이종성 원장은 뒤에가서 칼빈을 추방했던 네 감독관에 대하여 ‘악질적’이라고 매도하엿는데, 과연 네 감독관이 그렇게 악질적이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역사적 본질을 바로 직시하고 아직도 왜곡된 역사가 활개하는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2)칼빈과 네 감독관 중 누가 과연 더 악질적이었나 이종성 원장이 ‘악질적’이라고 표현한 네 감독관이 악질적이었는지, 칼빈이 더 악질적이었는지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 가에 대한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져야만 한다. 그 역사적 진실을 잠시 사실 그대로 살펴 보도록 하자. 필자는 당시의 정황을 직접 목격하고 고발한 카스텔레오 목사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놓고자 한다. 1536년 6월경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잠깐 들른 기회에 제네바에서 구교를 무너뜨린 파렐(Willian Farel)의 방문과 초청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네바 시의 성서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에서 할 일은 제한되어져 있었으며 그의 임용조건은 성서강사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할 일은 성서를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이었다’는(Ibid. p.23) 것이다. 이종성 박사의 확인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칼빈의 일의 영역은 분명하였다. 이렇게 제네바 시에 성서강사로 초빙받은 칼빈은 석달만에 ‘교리문답서’와 ‘개신교 기본원칙 21개 조항’으로 만들어 제출하였다. 칼빈은 이를 토대로 제네바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적으로 강요하였고 교회에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칼빈의 이 같은 요구는 루터나 쯔빙글리도 요구한 적이 없는 것으로 시민들의 법적, 도덕적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과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際名)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그러한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Stefan Zweig. op. cit. p.44참조) ‘그(칼빈)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중략--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 들이고 그에 따르기를 맹세하는 일을 강요해 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하였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 벗어나도 제네바 성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중략--설교자 만찬에 초대 받지 못한 사람은 --바로 여기에 이 무게가 실려있다.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된다. 종교적 관청이 이용당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장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장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이렇게)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하였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갖지 못한 무기였다. –중략--대단히 합목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이러한 추방권을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 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형벌을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 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중략--(처음에 제네바 사람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대하여 동의를 표시하였다’(Ibid.)고 하였다. 또한 제네바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중앙광장에 모여 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형리의 감독 아래 갈레 선의 포로들처럼 열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 가 교회에서 21개조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중략--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흘러 들어온 망명자에 불과하였다. --(이에 불과한 사람이) 이제는 이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고용한 망명자가 이제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니!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는 맹세를 거부하자고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자기들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칼빈은) ‘작은 시의회’를 이용하여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중략--새로운 시의회의 다수파가 그에게 반대하면서 평화를 위해 이 거친 위협과 제명을 그만두고 베른 교회의 온전한 사상을 받아 들이자고 공손하게 설득해 왔지만 칼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타협도 그의 권위적인 천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시의회가 그에게 반대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상급관청에 대항하는 혁명가로 돌변해 버렸다. 공개적으로 그는 강단에서 ‘작은 시의회’를 욕하고 자기는 ‘주님의 성스러운 육체를 개들에게 던지기 보다는 차리리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하였다. 다른 설교자는 교회에서 시의회를 ‘주정뱅이 집합소’라고 불렀다. 칼빈의 추종자 무리는 바윗덩이처럼 꿈쩍도 않고 당국에 저항하였다. 시 당국은 사제단의 그토록 도전적인 거부를 참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설교단을 남용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라고 분명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칼빈과 그 일파는 이런 당국의 명령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 중에 가장 대담한 사람 쿠르토(Courtauld)가 공공연히 폭동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었다. --여기서 교회와 시의 당국의 공개적인 전쟁이 선포되었고 칼빈은 이 싸움을 당당히 받아 들였다(Ibid.)고 하였다. (3)압도적으로 찬성한 칼빈에 대한 추방결정 칼빈에 대한 제네바 시당국의 인내심은 끝났다. ‘당국은 최고 심급기관인 200인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시 당국은 당국의 명령을 일부러 무시한 칼빈과 공용된 사제들을 해임할 것인지 의결에 부쳤다.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사제들은 직위에서 해제되고 사흘안에 도시를 떠나라는 선고를 받았다. 칼빈이 지난 18개월 동안 이 도시의 수많은 시민들을 위협하였던 벌이 바로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다(Ibid. p.41~52참조). 그 결과,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 스위스의 제네바라는 나라에 초빙되어 일하게 된 18개월의 결과는 추방이라는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는 구교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신교를 추구하는 강력한 요구로 말미암아 다시 아미 페랑이 주도되어 칼빈을 재초빙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재초빙에 따른 칼빈이 요구한 조건이다. 그것은 제네바 시에 대한 강력한 통치권의 행사가 그것인데 칼빈의 재입성은 강력한 통치라는 조건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처음과 다른 양상이었다. (4)끔직하게 다시 시작된 칼빈의 통치 다시금 시작된 칼빈의 제네바 시에 대한 칼빈의 통치 결과는 이전과 비교될 수 없으리만치 끔찍한 양상으로 치닥데 되었다. 이미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그 살상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오늘날에도 고발되어지고 있다. 칼빈의 측근으로서 이를 지켜본 카스텔리오는 그 통치 결과에 대하여 일부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칼빈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조용하던 제네바 시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름 에 처참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피의 도시로 물들어 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너무도 잔인한 고문과 참변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칼빈의 측근으로 있던 사람들의 칼빈에 대한 저항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종성 박사 자신도 이에 대해 밝히기를 ‘제네바 시에서 직접적으로 반 칼빈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고, 동역자들이나 제자들도 있었다(李鍾聖 op. cit. p.59).’고 실토한 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종성 박사 자신이 지적하는 바에서 보듯이, 칼빈의 만행은 끔찍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저항은 곳곳에서 일어났고 앞서 말한 제네바 시의 4인 감독관들 역시 시민들이 죽고 참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에 대해 칼빈에 대한 저항을 드러낸 것이다. (5)네 감독관의 저항의 이유와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언도 우리는 여기서 이종성 박사가 밝힌대로 왜 칼빈의 친구들도, 동역자들도, 제자들까지 나서서 칼빈에게 저항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의 악행으로 인하여 네 감독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빈에게 저항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것이었다. 사건의 경위가 이러한데도 이종성 박사는 저항하는 그들을 ‘악질적’이라고 몰아 세우며 마치 저항자들이 죽을 죄라도 진 살인 죄인들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제네바 시의 네 감독관으로서는 불만일 수 밖에 없었으며, 1541년 5월 16일 저녁에 연회를 베풀고 기염(氣焰)을 올렸다. 그리고 감독관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남아 있던 무리들이 거리에서 데모하였다. 데모자들은 칼빈에게 동조적인 관리들과 프랑스에서 온 망명자 칼빈을 욕하고 폭언과 돌을 던졌다. 이것이 악화되어 유혈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 소요 사건에 가담한 일당을 일망타진하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6월 3일에는 그들(4감독관)에게 참수형이 선포되었고, 8월 6일에는 반델과 비텔리라는 시의원들에게 궐석재판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러자 한 사람은 잡혀 사형을 당하였고, 한 사람은 불구가 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도망을 하였다 (Ibid. p.58).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 시를 이와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이종성 박사는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두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한 사람은 성벽을 넘어 도망하려다가 재기 불능의 중상을 입었고 마지막 사람은 관원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이제부터 칼빈의 적들이 없어서 일이 순조롭게 추진될 것 같기도 했다’고(Ibid.p.43)하였다. 또한 데모대들에 대한 처형들과 데모진압을 두고 이종성 박사는 ‘일망타진’되었다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쳐부순 것을 자축하면서 “이렇게 하여 그렇게도 집요하고 악질적이고 만만치 않던 반 칼빈파의 세력은 근절되고 말았다. 제네바 시의 결전은 마침내 칼빈의 완전한 승리로 귀착되었다. 이제부터 제네바는 칼빈의 무대로 화하였으며(Ibid. p.59) --라고 주장한 것이다. 2) 이종성 원장이 왜곡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기만 두가지 (1)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이종성 원장 우리는 전자의 사건을 다루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자로서 기독교적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용납되어서는 안될 두가지 명백한 거짓을 주장하는 이종성의 파렴치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칼빈과 반델과 비텔리를 중심으로 한 네 감독관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가’에 대한 거짓된 증언이 그것이다. 두번째는 ‘운명’이라는 그의 교리적 신학적 사상에 대한 패괴한 적용과 주장이 그것이다. 전자의 ‘누가 더 악질적인가’에 대한 기만적 주장을 가려볼 필요가 있다. 이종성 박사는 칼빈 자신의 의견에 반대된다고 마녀사냥을 하며 무고한 시민들에게 가진 고문을 가하면 죽인 인원 수 만도 58명이다. 이를 수치상으로 보면 5년동한 한달에 한명 꼴로 죽였는데 그런 칼빈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칼빈의 그런 만행을 두고 볼 수만 없어 저항하는 시민들을 ‘악질적’이라고 하는 것은 엄연한 역사 왜곡인 것이다. 칼빈과 저항자들 이들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가? 살인을 밥먹듯이 명령하는 칼빈이 의롭고, 그런 고통을 당하며 학살 당하고 목이 잘려져 거리에 뒹구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항의하는 사람들이 악질적인가? 우리는 결코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가를 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사람 죽이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것을 항의하는 사람들이 악질적이라는 가르침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칼빈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감옥에 잡혀 들어와 ‘그(칼빈)의 분명한 권고에 따라 심문할 때에 나사로 엄지 손가락을 조이는 고문과 밧줄로 잡아 당기는 고문 외에 발바닥을 불로 지지는 고문까지 더했다’라는 칼빈이야말로 악질의 화신이 아닌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반대되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칼빈이 하늘의 성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종교개혁과 칼빈의 허구적인 교리를 앞세워 참혹한 살상과 인간사냥을 밥먹듯이 자행했으면서도 그 부당한 병체(病體)의 역사를 자성하거나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진의 편에서 상대방을 무력으로 무찔러 ‘일망타진되었다’고 하였다. 칼로 정복하고 살상을 일삼는 식의 칼빈식의 사상은 적어도 필자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원시초대교회의 세계관에는 없다. 이런 주장을 일삼는 사람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일망타진되었다’고 주장하는 바와 다를 바 없다. 칼빈에 대하여 기대하는 것은 종교개혁가로서, 신학자로서, 목사로서의 칼빈이지 정치가로서의 칼빈이 아니다. 칼빈이 정치가로서 사람을 죽였다면 차라리 필자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인물을 다루었을 것이다. 우리가 칼빈이 사람을 죽인 것을 정치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가로서, 목사로서의 칼빈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리를 앞세웠다고 하나 종교개혁가라고 하니 그가 행한 살상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바로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라니 예수의 세계관과 아무 상관없는 이러한 칼빈의 사상의 패괴함이 드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 (2)운명으로 몰아 세운 이종성 원장의 역사에 대한 기만 두번째는 이종성 박사가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이중적인 신학의 두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네 감독관들이 사형 당했거나 불구가 된 것을 두고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라고 43쪽에서 직접 주장하였다. 그런데 다른 책도 아닌 바로 그 책 다음 페이지 100쪽에서 ‘섭리 교리는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 시키는 어떠한 사상에도 반대할 뿐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나 또는 운명이나 행운이나 우연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나 미신자들에게도 반대한다’고((李鍾聖 op. cit. p.100) 하였다. 앞에서는 사람들을 죽여 놓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고 덮어 버리고 뒤에 가서는 또다른 주장으로 ‘운명이나 행운이나 우연을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운명론자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이었으면 ‘살인이었다’고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든지 해야만 한다. 사람 죽여 놓고 ‘운명’이라고 해 놓고 또 자신의 교리상의 주장에서는 ‘운명이 없다’고 하면서 운명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신학의 궤변인 것이다. 앞에서는 ‘운명이다’라고 외쳐놓고 뒤에 가서는 ‘운명을 반대한다’는 것은 신학이라는 말을 동원할 것도 없는 논리적인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하기야 사람 잡아 죽이는 고문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않고 죽지 않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라고 칼빈이 그러했듯이, 사람 죽여 놓고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다’라고 말해 놓고 뒤에가서 자신들은 운명이나 우연 따위는 반대한다고 하는 이중적인 주장도 그래서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수십명 아니 수백명 수천명도 죽이는데 말 한마디 거짓말 했기로서니 누가 그 자리에서 내쫓을 사람이 있겠는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도 없는 ‘운명’론을 펼쳤는데 이종성 원장의 운명론은 도대체 어떤 사상이며 일반 운명론과 무엇이 다른지 그 차이를 공개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는 사람 죽여 놓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하고 뒤에 가서는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앞의 운명론과 뒤의 운명론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한국교회 앞에 그 진상을 공개해야만 한다. 그리고 칼빈은 그의 주저(主著) ‘기독교 강요’에서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기독교 강요’ 1권 sec.1. 2) 분명하게 못박아 놓고 있는데 이종성 박사의 운명론과 칼빈이 말한 운명론의 교리와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해명해야만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칼빈의 정통교리에는 분명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교리는 운명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다르고 ‘어’다른데 이종성박사가 말하는 ‘운명’이라는 소리는 정통교리의 속성상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칼빈이 저지른 살상 행위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그들은 그런 운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칼빈의 손에 죽은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살인자이다. 이러한 칼빈의 행위에 ‘운명’으로 덮어 버린 것은 칼빈에 대한 모독으로서 이종성 박사는 자신의 교리적 원조자를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교리적 가면을 앞세워 수없는 사람들의 목을 자라며 불질러 화형해 죽이는 강도의 사상은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밝혀야만 한다. 이 사상은 과거에 문제로 역사적 논의가 끝난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엄연히 기독교의 대표적인 정통사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신들은 칼빈 시대와 같은 권력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반대세력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그들이다. 따라서 그 날이 오면 그 반대 세력들을 모두 죽이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마각적인 교리자들의 교리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당사자들에 의해 공개될 필요가 있다. <심상용 목사 - 월드크리스챤성경학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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