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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의 모든 것 / 2톤 돌덩이 230만개 어떻게 옮겼지?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9. 11:28

2톤 돌덩이 230만개 어떻게 옮겼지?..피라미드 비밀 풀린다

이영민 기자입력 2022.09.01. 08:50수정 2022.09.01. 08:56
 
이집트 북부 기자 피라미드 /AFP=뉴스1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피라미드의 미스터리가 풀릴 만한 증거가 발견됐다. 피라미드에 사용된 대형 석재들의 운반에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일강 지류의 흔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프랑스 '유럽 환경지구과학 연구교육센터'(CEREGE)의 환경지리학자 하데르 세이샤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이집트 북부 기자 피라미드 주변에서 나일강 지류의 흔적을 확보했다고 전날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발표했다. 지난 4500년 동안 피라미드 건축에 들어간 거대한 석재들이 어떻게 운반됐는지는 미스터리로 여겨졌다. 가장 규모가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석회암과 화강암 등 2t(톤)이 넘는 대형 석재 약 230만개가 사용됐다. 앞서 학계에선 피라미드로부터 약 7㎞ 떨어진 나일강이 건축 물자 운반에 이용됐고 건설 현장까지 수로를 팠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돼 왔으나 이를 입증하진 못했다.

지금은 없어진 나일 강의 쿠푸 지류 상상도. /사진=미국 국립과학원 회보

하지만 이번에 연구팀이 나일강 지류의 흔적을 확인하면서 대형 석재 운반 미스터리가 풀리게 됐다. 연구팀은 이집트 북부 기자 피라미드 주변에서 시추한 퇴적층에서 꽃가루 화석을 발견했고, 이 화석을 통해 기자 피라미드 인근을 흐르던 나일강 지류의 흔적을 확보했다. 연구팀은 이 지류를 통해 대형 석재들이 운반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구팀은 해당 지류의 이름을 이집트 제4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인 쿠푸왕의 이름을 따 '쿠푸 지류'로 명명했다. 이들은 '쿠푸 지류'의 수위가 나일강 본류에서 약 7㎞ 떨어진 피라미드 건설 현장까지 물자를 운반하기에 충분했다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쿠푸 지류가 기원전 1350년 무렵부터 수백년에 걸쳐 수위가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는 쿠푸 지류는 메마르고 해당 지역은 묘역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세이샤 연구원은 NYT에 "기자의 자연환경이 피라미드 건설에 이용됐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 고대 건축물을 둘러싼 많은 의문 중 일부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며 "환경에 관해 더 많이 알면 피라미드 건설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밝혔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피라미드에 들어가기에 앞서.......

 

불가사의 피라미드

기자의 3대 피라미드

현대과학자들 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이 놀랍고 장엄한 건축물 피라미드...!!!신석기 시대를 막 거친 원시 시대에 지나지 않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 어떻게 이런 엄청난 기념물을 건설하였을까?바퀴도 발명되지 않았고 말이나 노새 등 하역 동물도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 밑변의 네 모서리가 0.1%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거대한 돌들을 두부처럼 반듯하게 잘라 빈틈없이 맞추어 끼운 기술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피라미드가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개념들을 구체화시킨 것이라면, 어떻게 고대 이집트의 건축가들은 다른 문명에 비해 그처럼 앞선 지식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집트가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집트보다 먼저 선진 문명을 갖고 있었던 지역도 존재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다른 문명에 비해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여타 나라들과는 달리 아직도 4천 년 이상 된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는 피라미드는 압권이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어의 pyramis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생긴 깨로 만든 의식용 과자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다르게 표현했는데 음성학적으로 m’r 또는 mer로 표현된다.

 

수많은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원 위에 우뚝 서있는 3개의 거대한 피라미드, 일명 기자의 피라미드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사막의 유목민들은 피라미드에 도착하기 수 일 전부터 아득히 멀리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물을 볼 수 있었다. 먼 곳에서 보이는 피라미드는 지평선 상의 자그마한 삼각형이지만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완벽한 기하학적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쿠프의 대 피라미드는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되었다. 이 피라미드은 중량은 거의 7백만 톤이나 된다.

 벽돌 이음새의 경우 거의 일정하게 1/50인치(약 0.5mm 이하)인데 벽돌하나의 무게가 2톤이상이고 어느것은 20톤이 나가는 것도 있는것을 고려한다면 믿을수 없는 건축 기술이라 여겨진다.

 

지구표면에 있어서의 위치 역시 놀라운 점을 시사하는데, 죠셉 시즈와 그의 동료의 연구에 의하면 피라미드의 위치는 대륙의 질량 중심에 위치해 있고 지구 전체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4등분하는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즉 북남방향으로는 그리니치 동방 31도선인 가장 긴 경선과 동서방향으로는 북위 30도선으로 대륙의 가장 긴 축을 이루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종횡으로 가장 길게 나누는 지점은 유일할 것이고 그 지점에 거대 피라미드가 서 있다는 것은 기존의 피라미드에 관한 논의 이상으로 더 중요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
 대 피라미드가 건설된 당시는 철이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돌 블록을 연마하기 위한 연장은 돌과 구리로 된 것이 고작이었다. 연마한 돌을 운반하는 데 사용된 연장도 썰매와 밧줄, 도르래, 미끄러져 내리기 쉬운 진흙과 경사로를 만들기 위한 벽돌이 고작이었으므로 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을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B.C. 2600 ~B.C. 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높이가 148미터에 이른다.

(현재는 137미터) 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세번째가 멘카우레 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밑변의 길이 가 233미터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돌의 크기는 높이 1미터 폭 2미터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 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 개(또는 250만 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쌓을수 있다고 하며 높이 3미터 두께 30센티미터로 자른다면 프랑스의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피라미드 건설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수백명의 사람이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무거운 석재를 땟목에 올려 강을 건넜고 역시 강기슭에 도착한 석재를 건설현장 까지 운반하였다. 어쨋든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조물이 지금부터 4,800년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리면 그 무게가 엄청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무거운 건조물은 상당히 탄탄한 기초위에 세우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 건조물도 붕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800년의 기간 동안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진정 세기의 신비이며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거대한 피라미드군이 왜 세워졌는가?

돌은 어떻게 쌓아올렸는가? 건조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우리는 고대 이집트 왕들이 준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을 것인가? 자!! 한번 알아나보자...

 

 

불가사한 피라미드..

 고왕국 시대 건축의 가장  놀라울 만한 건축물인 피라미드는, 일찍이 기원전 2770년에  처음 건설되었고 이를 건설하기 위해서 막대한 노동력과 기술이 투입되었는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제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서 줄잡아 20년 동안 1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것의 높이는 481피트였고 230만개 이상의 석회석 덩어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돌덩이들은 어찌나 정밀하게 쌓아 올려 졌는지 면도칼도 안들어 갈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 돌들은  정과 쐐기로 암벽에서 분리된 다음 바퀴의 도움 없이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흙으로 된 경사로로 올려져 제위치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 졌던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래 전에 세워졌는데도 동서 남북 방향으로 정확히 곧게 서있으며 단지 진북방향으로 3분 빗나가 있는데, 현대에 잘지어졌다고 하는 파리천문대도 진북방향에서 6분정도 빗나가 있는걸 보면  그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1978년 "암호가 해독된 거대 피라미드"라는 책을 쓴 레이몬드는 그 조차도 지층의 함몰로 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많은 현대 건축가와 공학자들은 현대의 여하한 기술로도 이러한 건축물을 지을수는 없다는데 동의한다. 이는 인간의 지식과 기술의 진화 법칙이 잘못되어 과거에 더 정확한 과학적 건축이 지어졌다는 결론을 얻어 많은 과학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피라미드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는 고용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농업 , 광업, 상업의 자원들이 더 이상 전체 이민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이론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라미드 건설자에게 피라미드가 일차적으로 종교, 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피라미드는 또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피라미드는 분명히 정치적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 주었을 뿐아니라,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후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피라미등를 대신해 신전이 건축의 주요 형태로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왕국 시대에 건설된 카르나크(KARNAK)와 룩소르(LUXOR)의 거대한 신전들이었다. 그림들이 새겨진 거대한 수 많은 기둥들은 이집트인의 놀라운 건축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 신전의 특징은 그 거대한 규모에 있다. 카르나크 신전은 길이가 약 1300피트(약 400M)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종교 건축물이었다. 유럽의 고딕 성당중 아무리 큰 것이라도 이 신전의 중앙홀에 쏘옥 들어 갈수 있을 정도 이다.

 

 피라미드학의 두 학파

"고대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가 피라밋이 건축된 후 2천년 뒤에 이 건축물에 대해 학문적 논의를 제기한 이후 크게 두부류의 입장으로 나뉘어져 논의가 진행 되어 오고 있다. 첫번째 그룹은 피라미드가 신의 계시라는 입장이고 다른 그룹은 이에 반대하는 연구자들로 피라미드가 아틀란티스 시대에 잊혀진 과거의 지식과 기술의 산물 혹은 과거에 고도로 진보되고 번영한 그러나 현재에는 사라짐 어떤 문명에 의한 것으로 믿고 있다. 즉 이들은 노아에게 신이 방주를 만들게하여 신의 뜻을 알렸듯이 피라미드의 건축을 지시했다는데 반대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로는 아이작 뉴튼경, 죤 테일러, 스콧틀랜드의 천문학자 스미쓰, 죠셉 스위스, 러더포드 등이다. 이 관점에는 회의적이지만 거대피라미드에 열정적인 사람들은 페트리, 노르만 로키어 등이며 피라미드 파워(에너지 연구)를 연구한 사람은 보비스, 패트릭 플래나건이고 불가사의지역등 신비적인 관점에서는 에반스, 톰킨스등이 연구하였다. 현재의 연구 결과로는 거대피라미드의 건축자는 이집트의 파라오인 체옵스(Cheops, 쿠푸라고도 불림)였으며 그는 당시 예언자에게서 지시를 받아 건축을 했었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은 에리히 폰 데니켄의 이야기를 한번들어 봅시다..

 

   

고대 피라미드의 비밀들          

            

 

 에리히 폰 데니켄의 <미래의 수수께끼> "거인을 위한 무대" 중에서...

  

 현재 레바논에 있는 다마스커스의 북쪽에는 발베크의 단(壇)이 있다. 석재로 지어진 고대(高臺)인데 그 석재 중 몇개는 측면 길이가 20미터를 넘고,1무게는 거의 2,000톤이나 되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고고학에서는 누가, 왜, 어떻게, 발베크의 단을 지었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 교수인 아그레스트는 단의 잔재가 거대한 착륙장일 수도 있다고생각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그대로를 과감히 인정한다면 옛날 이집트인들은 갑자기 그리고 과도기 없이 환상적인 문명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된다. 거대한 도시들과 장대한 사원들, 강렬한 표현력을 가진 겨대한 조각상들과 멋진 상(像)들이 도열해 있는화려한 거리들, 완벽한 하수 장치들, 암벽에 깎아 만든 호화 무덤들, 압도적인 크기의 피라미드들....  이러한 많은 놀라운 것들이 마치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난 듯우리를 놀라게 한다.  한 나라에서 입증될 만한 어떤 태고사도 없이 갑자기 그런 업적이 가능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 아닐까?

 

고대 이집트에는 나일강의 삼각주와 강변 좌우의 좁다란 지대에만 비옥한 경작지 가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커다란 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의 인구가 5천만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이것은 기원전 3000년의 전세계 인구인 2천만 명에 명백히 위배되는 숫자다)

그런 환상적인 추측에서 몇 백만 명이 많고 적고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아야만 했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공사장 인부들과 석공들, 기술자들, 많은 선원들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노예들과 잘 무장된군대, 부유한 수많은 제사장 계급과 무수한 상인들, 농부들, 관리들, 그리고 -끝으로 중한 것은 - 왕족과 귀족들이 살았다.  나일강 삼각주에서 경작한 빈약한 농작물로 과연 그들 모두를 먹여살릴 수 있었을까?

 

이집트인은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 네모난 석재를 미끄럼 도르래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나무 도르래로! 하지만 그 당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긴 어려웠을 것 같다.  왜냐하면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으로 꼭 필요했고 그 줄기와 잎은 말라버린 대지에 그늘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수입한 걸까?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하려면 상당히 큰 선박이 필요하며, 선박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이로까지 나무를 운송해야 했을 것이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의 이집트인들은 말과 마차를 자유로이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가능한 운송 방법은 있을 수 없다. 기원전 1600년 제17왕조 때에야 비로소 말과 마차가 이집트에 도입되었다.

 

피라미드 건축가들의 기술에 관해서는 수수께끼만 있고 진정한 해답은 없다.....

 

1864년에 발간된 찰스 피아지 스미스의 <위대한 피라미드에서의 우리의 상속>이라는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에서 우리는 피라미드와 우리의 지구사이에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많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몇 가지 사실이 남아 있다 알려진 바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철저히 태양을 숭배했다.  그들의 태양신 라는 바르크(세 개의 돛대가 달린 범선)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고대 왕국의 피라미드 원문은 신들과 왕의 승천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물론 그들의 승천은 이 범선 덕택에 자유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신들과 이집트 왕들 또한 비행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

 케오프스 피라미드의 높이에 10억을 곱하면 대략 지구와 태양사이의 거리(149,504000) 와 일치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정말 우연 때문일까?  피라미드를 관통하는자오선이 대륙과 대양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눈다는 것 역시 우연일까? 피라미드의 밑면 둘레를 '2×높이'로 나누면 그 유명한 루돌프의 숫자인 파이(3.1416)가 되는 것 역시 우연일까?  지구의 중량에 대한 계산법과 건축물에 놓여진 암석바닥이 세심하고도 정확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일까?........

 

 피라미드는 대륙과 대양만 둘로 똑같이 나누는 게 아니라 아울러 대륙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리고 커다란 피라미드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북극까지의거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 이 사실을 믿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 피라미드의 건축부지는 지구의 공모양과 대륙과 대양의 분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어떤 존재에 의해 정해진 것이 분명하다 - 우리는 여기서 피리 레이스 제독의 지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1,000년 된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이집트 카이로를 중심으로 남극과 북극이그려져 있다)

 

이 모든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그들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어떤 기계와 기술을 사용하여 암석층을 수평으로 다듬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건축가는 갱도를 파나갔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갱도 안에불을 밝혔을까? 이곳에서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석 묘지에서도 횃불이나 그 어떤 유사한 조명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럽혀진 천장이나 벽도 없고, 그런 흔적이 제거됐을지도 모를 최소한의 증거조차 없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채석장에서 거대한 석재를 잘라냈을까?  날렵한 모서리와 매끄러운 옆면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운반하고 어떻게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포개놓았을까?

 

.....260만 개의 거대한 석재가 채석장에서 잘라지고 연마되어 운반되고, 건축부지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맞추어졌다.......인부들이 부지런해서 날마다 10개의 12톤짜리 석재를 쌓아 터무니없는 도급일을 달성했다면 그들은 - 신화같은 이론을 따른다면 - 약 250,000일(684년)에 걸쳐 대충 250만 개의 석재를 그 멋진 피라미드에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그 모든 것이 범상치 않은 파라오의 기분에 따른 부산물로 지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자신의 영감으로 시작한 건축물의 완성을 결코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끔찍하게 아름답고, 한없이 슬픈 이야기다

 

이 이론이 진지하지만 우스꽝스럽가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피라미드가 어느 왕의 무덤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믿을 만큼 순진무구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피라미드의 표식들을 여전히 순수한 우연이라고 여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대 피라미드를 볼 수 있는것은 영감의 제시자이자 건축주였던 파라오 쿠푸의 덕이라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왜 그럴까? 실제로 대피라미드에는 단 하나의 비문도 없다. 상형문자가 매우 빈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전능한 건축주인 쿠푸의 영웅적 행위를 입증해 줄만한 상형문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피라미드가 어느한 사람의 일생동안에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자!! 이제부터 피라미드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봅시다.

우선 먼저 초기 피라미드와 종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초기피라미드와 종류들

 

 


 

왕조 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이집트인들은 진흙 벽돌로 상부가 편편하고 옆이 경사지게 만든 무덤 '마스타파'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피라미드의 기원이 되는 마스터파는 직사각형의 묘로서 수갱을 통해 봉분과 연결된 지하의 현실(玄室, 관을 들여 놓는 방) 위에다 봉토를 한 다음 외장벽돌 등으로 표면을 단장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외장 벽돌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배열하여 마스터파를 장식했다. 또 묘의 지상부 또는 지하부에는 몇 개의 방을 만들고 그 중의 한 방에는 죽은 사람의 미라를 안치하고 다른 방에는 사자를 위한 물건들을 넣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큰 마스터파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높이가 5m에 달하는 것도 등장했다.

 제1왕조(기원전 3000년경)의 파라오는 가까운 사막의 절벽에서 절개한 석회석을 묘혈(墓穴) 바닥에 깔았고 제2왕조의 파라오는 묘실 내부 전면을 석회석으로 두르기도 하였다. 이후 이집트인들은 석회석을 대규모로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제 3왕조의 죠세르이다. 죠세르는 이름이 신성하다 찬란하다, 혹은 장엄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형문자는 홀을 쥔 우람한 팔과 세 개의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죠세르에는 떼어놓다 혹은 분리하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신들의 세계와 속세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임호텝이라는 재상을 시켜서 피라미드를 건축하게 한다. 임호텝 역시 후세에 신으로 추앙받는다.

 

우선 피라미드의 역사를 짚기전에 잠시 이집트인의 생각을 알아보자. 성경은 우주가 무질서에서 질서로 조직화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이집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계속 혼란해지는데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막기위해서 마아트를 실천해야 했다. 마아트는 이집트 문자로 타조의 깃털로 표현된다. 인간이 죽은 후 오시리스의 앞에서 심판받는 순간 양팔저울의 한쪽에 마아트가 놓이게 되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심장이 놓이게 된다. 의인으로 인정받아 불멸의 생을 얻으려면 그 심장이 마아트의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 마아트는 우주를 다스리는 영원한 법칙이다. 마아트는 인류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였고 인류가 사라진 뒤에서 영원히 있을 것이다. 마아트는 정의이고, 진리이고 질서이고 배의 방향을 받아주는 키이고 모든 것을 재는 잣대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는 마아트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집트인들의 무덤에는 그들의 관대함을 느끼게 하는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든지 단 하룻밤도 굶게 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일단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파라오와 이집트의 피라밋을 바라보야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도대체 저 옛날 누가 지었을까라는 것이다.

이미 알다시피 이집트의 피라밋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마스타바

사실 시체를 보관하는데 그들이 미라를 택한 것은 우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원래부터 건조한 사막지대인 이집트는 그냥 시체를 묻기만 해도 미라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그 시체는 동물에 의해서 훼손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관을 만들기 시작했고 무덤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한가지 문제는 시체가 미라가 되지 않고 썩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체를 적절하게 보관하는 기술이 발전했으며 가장 초기의 무덤인 마스터바가 만들어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마스타바라고 불리는 무덤에서 시작한다. 마스타바는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고 직사각형의 건물에 관을 들여 놓은 방의 위에 봉토를 하고 외장을 잘 꾸며 놓은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의 존재를 굳게 믿어 시신과 수장품들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장치를 갖춘 오랜 존속할 무덤을 짓는데 최선을 하했다,
사후의 생명이 육체의 보존에 의존한다고 믿어 부활의 날에 죽은자의 영혼 즉,"카" 가 다시 한 번 그의 몸속으로 들어 갈 것이기 때문에 몸은 거기에 온전하게 있어서 그 때를 맞아야 한다고 믿었다. 건조한 사막의 기후는 시체보존을  도와주었고 방부처리된 시체는 미이라로 견고한 무덤내부에 보존되었으며, 도굴로부터 안전하게 소장품들이 보관되도록 하기위한 각종 장치가 고안되었다.

 미이라의 영원한 삶의 공간은  마스터바 , 피라미드, 석굴분묘,의 세 형태가 있는데, 마스터바는 계단 모양의 측면들과, 평평한 정상부를 가진 소규모의 직사각형 구조물로 수직통로를 통해 외부와 연결되는 지하묘실 위에 세워졌다. 마스터바의 단순한 입체형태는 이집트인의 영원함과, 안전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데, 그 이면에는 존재와 삶을 영원히 이어가려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마스터바란 말의 뜻은 평탄한 탁상이라는 뜻으로 평면이 장방형이고, 남북으로 길게 되어 있고 외벽은 경사지게 되어있다.(분묘형식)고대 이집트인은 현세의 주택은 임시적인 것이고 사후의 주거는 영원한 주거로 여겼고 마스터바에서 좀더 상징적으로 발전된 피라미드는 계단형 피라미드, 굴절 피라미드, 그다음 일반적인common 피라미드로 형태가 변천해간다.


계단형 피라미드

위와 같은 형태의 마스터바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것도 역시 도굴을 당하여서 손상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좀더 도굴하기 어려운 형태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3 왕조의 죠세르시대에 임호텝이 만든 계단형 피라미드였다.

     

위의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일단 피라밋을 만들고 그 근처에 부속건물을 지었다. 위의 피라밋은 모두 6층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4층으로 짓고 다음에 2층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피라미드는 제세르(Zoser: 조세르라고 도 발음) 왕의 계단 피라미드다. 이 피라미드는 우선 마스타바 묘가 만들어지고, 그 후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가 그 위에 만들어졌다.  

 

사카라는 왕가의 묘소로서, 예로부터 마스타바 무덤 이라불리는 묘가 조성되어 왔다.   고왕국 시대 제3 왕조의 초대 왕 제세르는 파라오에 걸맞는 묘소의 건설을 재상 임호테프에게 명했다.임호테프는 우선 거대한 마스타바 무덤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때까지처럼 햇볕에 말린 흙벽돌이 아니라 석회암을 건재로 사용한 일이다.   그 후 마스타바는 4단으로 샇아올려지고 마지막에는6단,140m×128m, 높이60m의 거대한 석조 건조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계단 피라미드는 단독 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동서277m, 남북545m 의 주벽으로 둘러싸고, 그 부지내에는  계단피라미드외,세드 제전이나 신전 등을 배치하고 있다.  주벽의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천장이 있는 긴 열주랑 이 뻗어 있다.   벽 위쪽에 나 있는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면 갑자기 맑은 빛이 가득한 중정 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우뚝 솟아 있는 피라미드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졌다.

 

  어둠과 빛의대비를 계산해서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배열을 "피라미드 콤플렉스"라 한다.

높이 60미터 총 100만 톤의 석회암을 쌓아만든 제세르 피라미드는6층 계단으로 구성되어 ,수메르의 지구라트나 멕시코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사카라 지구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들 중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구조는 건설도중 여러 번의 변경을 했다.  처음에는 20만 톤의 돌을 써서 4층의 조그만 피라미드로 만들고, 나중에 추가로 80만 톤의 돌을 더 사용해서  지금 형태의 6층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점차 피라미드 제작 기술 노하우가 쌓였고, 노동력도 더욱 확보하게 된 증거라고 해석하기도한다.
 계단 피라미드에 사용된 돌의 크기는  1~2톤 정도의 무게로 5~6명이 돌 한 개를 충분히들수 있는 것들 이었다.   근처에  그보다 더 큰 돌이 발견되지 않은걸로 보아  건설은  기자의 피라미드 보다 쉽게 만들 수 있었던걸로 보인다.

 

임호테프

임호테프는 제세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를 설계.시행한 재상이다. 훗날 임호테프는 후세에 신으로 숭배되었다.
왜 임호테프는 종래의 마스터바 무덤을  쌓아올린 것일까?  파라오는 호르스 신의 화신으로서 군림하는 현인신 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왕족이나 귀족들과 똑같은 매장 시설에 매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파라오는 다른 귀족들과 격차를 두게 된 것이 분명한지도 모른다. 아마도 죽은 파라오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을 구현화 시킨 것인지도........

신으로 까지 숭상된 임호테프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이었다고도 전해지는데,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지구라트 즉 성탑 이라 불리는 건조물이 있고, 임호테프는 지구라트에서  힌트를 얻어 이집트 땅에 계단 피라미드를 세운 것이지도 모른다.


굴절 피라미드

이 시기가 끝나고 바로 4왕조의 시조 스네푸르 즉 쿠푸왕의 아버지가 건설한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스네푸르(Snefru)는 살아생전에 3기의 피라미드(혹은 4기, 어느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음)를 건설하였으며 제일 먼저 다슈르(Dahshur) 남쪽에 건설했으며 그는 계단식이 아니라 단순한 삼각형의 면을 갖도록 시도했다. 그는 처음에는 54도의 각도를 가지도록 시도했으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여 11도를 삭감하여 43도가 되게 만들어야 했다.

 

다슈르(Dahshur) 의 굴절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경 제4왕조 의 첫 번째 왕인 스네페루(Sneferu)왕 의 피라미드중의 하나이다.  이 피라미드는 사카라 남쪽 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붉은 피라미드옆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2개 (혹은 3개)의 피라미드를 더 지었다. 메이둠에서 피라미드를 짓은 후 다시 Red pyramid (아래 사진)라고 불리는 피라미드를 더 지었다.

 

굴절 피라미드는 높이는105m 길이는183.5m 이다.경사각은 아래위가 다르다.
위쪽 경사각은  43°22'    ,    아래쪽경사각은  53°27' 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처럼 피라미드가 굴절 된이유를 학계에서는,위에서 말한 것 외에메이둠 피라미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건설도중 서둘러 각도를 변경한 것이라든지.  건설도중 왕이 죽었다든지 하는설이 돌기도 한다.

 

굴절 피라미드에는 입구와 통로, 방이 2개씩 만들어져 있다. 북쪽의 입구는 지하의 방과 연결되어 있고, 서쪽의 입구는 기단부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북쪽 입구로부터의 통로는 북극성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성진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굴절 피라미드에 대한 정보는 기타 다른 피라미드에 비해 알려진게 별로 없다.
다슈르의 굴절 피라미드가 왜  굴절 돼어 있는지는 확실하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메이둠 피라미드

메이둠 피라미드는 3왕조의 마지막 왕인 후니(Huni)에 의해 지어졌다는 학설과,제4왕조의 첫 번째왕인 스네페루(Sneferu)에 의해 지어졌다는 학설이 있다.

   

 

 

 외형은 높이 93.5m 길이 147m , 경사각은 51°51'분의 가자 대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의 사각뿔 피라미드였으나.외장재가 다 무너져내리고, 원래 이 피라미드를 지을 때 내부에 만들었던 경사도가   높은7층의 피라미드 형태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함.
메이둠 피라미드의 외장이 붕괴된이유를 일부 학자들은 몰타르(Mortal)를, 이집트의 다른 피라미드에서 쓴 것 보다 불안정한걸 썼다고도한다. 


붉은 피라미드

다슈르(Dahshur) 의 붉은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경 제4왕조 의 첫 번째 왕인 스네페루(Sneferu)왕 의 피라미드중의 하나이다.  이 피라미드는 사카라 남쪽 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굴절 피라미드옆에 위치하고 있다.
돌 속에 함유된 어떤물질이 산화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붉은색 외장재를 썼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지금은 표면을 덮은 석회암은 전부 벗겨지고 붉은 석재가 노출돼어 있는상태이다.

Red Pyramid - (c) Copyright 1997 Andrew BayukPlan of the Red Pyramid

 

붉은 피라미드는 높이104m  길이220m  이고.  경사각은 43°22' 이다.돌 속에 함유된 어떤물질이 산화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붉은색 외장재를 썼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지금은 표면을 덮은 석회암은 전부 벗겨지고 붉은 석재가 노출돼어 있는상태이다.
붉은 피라미드는 높이104m  길이220m  이고.  경사각은 43°22' 이다.


 

붉은 피라미드 안에는 방이 세 개가 있다.세 방은 모두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대회랑과 같은 초엽 구조로 되어 있고,같은 공법이 적용되었다.
다른점 이라면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회랑은 26°경사각이고, 붉은 피라미드는 수평으로 제작됐다는 것이다.
붉은 피라미드에서 왕의 시체와 관은 발견돼지 않았

다.

 


기자 피라미드

스네프루왕의 다음의 왕인 쿠프는 피라밋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대 피라밋을 건설하였다. 그의 대 피라미드는 바닥 면적이 230.5 x 230.5m 높이는 146.60m 경사각은 50도 20분 25초이며 그의 통치기간 23년중 20년이 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쿠프의 아들인 케프렌도 같은 장소에 아버지와 비슷한 규모의 피라밋을 만들었다.

 

 

그의 피라밋이 아버지의 것보다 높은 지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높이가 143.5m로 약간 낮지만 실제로 보기엔 더 높아보인다. 이 피라미드엔 아직도 피라미드을 만들고 나서 발라두었던 외피가 남아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케프렌의 아들 미케리노스 (혹은 '멘카우레' 라고 불림)역시 거의 같은 장소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가장 규모가 작고 졸속으로 만들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보통 이 세 개의 피라밋을 기자의 피라미드라고 부르며 이중에서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대 피라미드로 부른다.

피라미드는 이 후에도 계속건설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쇠퇴하게 된다. 이제 피라미드를 어떻게 건설했는지를 알아보자.

 

 

다음은 피라미드에 관한 고대기록을 살펴봅시다.

 

피라미드에 관한 고대의 기록
자료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빌려왔음   출처: 미스테리 월드 
대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쿠프의 카르투슈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인류는 끊임없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거대한 구조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 거대한 과연 이 건물을 세웠을까? 만약 이것이 무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왜 무덤이라는 표식이나 또는 파라오의 부장품들, 특히 파라오의 미라를 발견할 수 없었을까?
피라미드가 알려진 바와 같이 무덤이 아니라면 진정한 용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건축되었을까?
그 당시의 기술 수준에 비추어 볼 때 동서남북에 정확히 일치하는 방향성, 놀라울 만한 건축상의 정확성, 더구나 그 높은 곳에서도 한치의 빈틈도 없이 거대한 돌들을 정확하게 맞추어 끼운 기술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대 피라미드가 복잡한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개념들을 구체화시켰다고 하는데, 이집트의 고대 건축가들만이 다른 문명에 비해 그처럼 앞선 지식들을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지구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대 유물 중에서 피라미드처럼 철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없다. 그럼에도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게다가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피라미드를 건설한 목적들이 너무나도 다양하게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들 모든 이론을 간명하게 한 틀로 묶을 수 없다는데 바로 피라미드의 진실한 신비가 있는 것이다.
 
 
헤로도토스   대부분의 이집트 연구가들은 쿠프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무덤의 용도로 웅장한 기념물인 대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수천 명이 힘들게 일한 노동의 결과인 이 거대한 건축물이 파라오 한사람의 무덤을 짓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 역사가인 쥴리우스 오노리우스는 대 피라미드가 곡물창고라는 특이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가설은 ‘창세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있다는 데 근거한다. 그리스 역사가인 헤리도토스는 대 피라미드에 관한 체계적 정보를 수집한 첫 방문객이었다. 그가 기자의 피라미드를 방문한 기원전 5세기는 이미 피라미드가 건설된 지 거의 2,000년이나 되었을 때였다. 그는 이집트인과의 대화를 통해 피라미드 건축 당시의 모습을 서술하였다. 그는 감춰진 입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와 대화한 사람들의 말대로 피라미드는 폭군인 쿠프가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무덤이며, 미라가 있는 방은 지하에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성에 저축하되 각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중에 저장하매 저장한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창세기 41장)

그러나 이 주장은 대 피라미드의 내부에 곡식을 저장할 만한 공간이 없다는 반론에 의해 폐기되었다.
이집트를 지배했던 아랍인들은 대 홍수 같은 재난을 두려워한 파라오들이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피라미드는 천체 운행 안내서와 예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도 있었고 심지어 피라미드를 휴화산으로 간주하는 작가도 있었다.
헤리도토스는 10만 명의 일꾼들이 피라미드에서 일을 했는데 3달마다 바뀌었고 강에서 고원에 이르는 경사를 만들기 위해 10년이 걸렸으며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했다. 인부들이 짧은 널판으로 된 기계를 이용하여 거대한 돌들을 벽을 따라 조금씩 들어올렸다고 했는데 이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또한 피라미드의 외부를 장식한 미끈하고 빛이 나는 돌들은 여러 가지 비문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후에 카이로를 세우기 위해 떼어냈다는 것은 상술하였다.
헤리도토스 다음에는 시실리의 디오도르(Diodore)가 대 피라미드에 대해 적었다. 그는 헤리도토스보다 더 많은 360,000명의 인부가 20년 동안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적었다. 그는 이집트에 머물면서 이집트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에는 규모가 작아 다소 경시되던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에 대한 것도 있다.
피라미드에 대한 고대의 연구라면 프린느를 제외할 수 없다. 그는 쿠프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재화를 그의 후계자나 그의 라이벌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그 돌들을 아랍에서 갖고 왔다고 했다. 그가 적은 피라미드 각 변의 길이는 231.53미터로서 실제의 거리와 거의 같지만 피라미드의 높이를 214.38미터로 실재보다 낮다. 그것은 그 당시에 정확하게 높이를 잴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역시 360,000명의 노동자가 20년 동안 일을 했다고 적고 있다.

 
  쿠프의 대 피라미드는 정복자인 아랍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은 대 피라미드에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대 피라미드가 도굴되었다 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도굴된 흔적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비아의 유명한 칼리프 아룬 알-라시드는 쿠프의 대 피라미드의 보물을 찾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의 작업은 956년에 사망한 여행가이자 학자인 알-마수디에 의해 기록되어 전해진다.

“그들은 왕의 방까지 도달하는 틈을 만들고 통로를 찾을 목적으로, 석회석을 녹이기 위해 많은 양의 식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이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성벽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중기와 기계들이 투입되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사람들은 수천 개의 금화가 있는 네모난 방에 도착하였다. 그 금화는 각각 1디나르(=4.25그램)의 무게를 가졌다. 이때 발견한 금화는 칼리프가 이 작업에 들인 예산과 거의 비슷했다. 금화가 발견된 후에도 발굴 작업을 계속하려고 했지만, 워낙 작업이 어렵고 입구 부분이 붕괴될 우려가 있어 쿠프의 현실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아룬 알-라시드의 아들인 칼리프 압둘라 알 마문(재위 812∼833) 역시 대 피라미드에 관심을 가지고 820년에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과학, 특히 천문학에 강한 흥미를 갖고 있던 그는 지구와 천체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발굴하다가 포기한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안에 아주 정확한 고대의 지도들과 피라미드 건축가들이 건설할 때 사용한 자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발굴하여 엄청난 보물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왕의 방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므로 그것을 자신이 직접 찾고자 하는 그의 열의는 대단하였다.
알 마문은 수많은 인원을 바그다드로부터 대 피라미드로 파견한 것은 물론 자신도 직접 현장에 방문하여 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그의 대 피라미드 탐사도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알-라시드는 매번 나타나는 커다란 돌들 때문에 결국 작업을 포기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무작정 외부로부터 돌을 깨면서 들어갔다. 방법은 알-라시드가 사용한 것과 같았다. 돌이 깨질 때까지 불로 가열한 다음 차가운 식초를 뿌렸다.
그렇게 300미터 두께의 벽을 파 들어간 후에 그들은 마침내 1.2미터 높이의 가파르고 비좁은 회랑에 도착했다. 그 회랑의 위쪽 끝에서 그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만든 입구를 발견했는데 그 입구는 지상으로부터 15미터 높이에 있었고 돌로 만든 문에 의해 막혀 있었다.

대 피라미드를 발굴하는 알 마문 일행 
그들은 이 돌들도 제거하고 회랑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제일 처음에 건설되었다가 포기되었던 방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쿠프의 피라미드 속에 전설처럼 막대한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면 다른 곳을 찾아야만 했다.
알 마문은 회랑으로 다시 돌아와 위로 향하는 또 다른 회랑을 찾았다. 다행하게도 곧 상부로 연결되는 회랑을 발견했다. 그러나 굴착 작업은 더욱더 어려웠다. 회랑을 막고 있는 커다란 화강암 돌덩이가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알 마문은 악착같은 작업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갔다. 상상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스러운 작업 끝에 위로 향하는 매우 낮은 회랑에 도착했다. 그 회랑에는 수평으로 된 통로가 교차되어 있었다.
이 수평 통로는 각 변이 5.5미터인 정사각형 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천장은 6미터 높이에 이중경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방이 바로 현재 왕비의 방이라고 불리는 방이다. 그러나 이곳에도 역시 왕비의 흔적과 보물은 없었다. 그들의 실망은 대단하였지만 보물과 수많은 자료가 있는 다른 방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믿음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소득이 있었다. 한 인부가 조그만 방을 찾아냈는데 그곳에는 푸른색의 돌로 조각된 남자 조각상이 있었다. 이 조각상은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칼이 있었고 그의 머리에는 달걀만한 루비가 있었다. 이 조각상은 알 마문이 자신의 궁전으로 갖고 갔는데 1117년에도 궁전에서 볼 수 있었다고 아랍의 역사학자 캐시가 적었다이에 고무되어 계속 다른 방을 찾던 그들은 수평 통로와 하향 회랑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또 다른 회랑을 발견하였다. 8.5미터 높이의 반들반들한 석회암으로 마감 처리가 된 대회랑이었다. 46.5미터 길이의 이 회랑은 계속해서 오르막길로 되어 있었는데 그 끝에는 일종의 대기실이 있었다.

'왕의 방'에 들어가는 알 마문 
이 방을 통하여 피라미드에서 가장 큰 방에 도달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쿠프의 현실이었다. 길이 10미터, 폭 5.2미터, 높이 5.8미터의 당당한 이 방은 후에 왕의 방으로 불린다. 알 마문은 손에 횃불을 든 채, 서둘러 왕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 역시 비어 있었다. 붉은 색의 화강암 벽을 따라 적갈색의 돌로 된 다소 파괴된 석관과 몇몇의 파손된 잔해만이 있을 뿐이었다. 석관의 규모가 입구보다 큰 것으로 보아 방을 만들기 전에 이미 놓여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실망한 알 마문은 벽과 바닥의 일부를 부수어도 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엇갈린 증언이 나온다. 한 증인은 쿠프의 석관 안에서 황금으로 덮이고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미라를 발견했고 머리 근처에는 달걀만한 루비가 놓여있었다고 증언했다. 반면에 어떤 증인은 쿠프의 현실에서 아무런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단지 미라만 있었다고 했다.
학자들은 두 번째 증인의 말에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알 마문이 피라미드를 뚫고 현실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대 피라미드가 도굴된 후였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쿠프의 현실 안에서 커다란 루비 등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은 알-라시드가 발견한 조각상에서 발견한 보물이 와전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음은 피라미드 근대적 연구에 관한 기록을 살펴봅시다...
 
피라미드에 관한 근대적 연구  
자료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빌려왔음   출처: 미스테리 월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한 진정한 연구는 알 마문이 피라미드에 들어간 후 8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물론 중세 시대에도 유럽인들의 이집트 탐험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이집트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여행 여건을 감안하면 단편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피라미드 속에 있다는 보물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 출발한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된 후부터 11세기까지의 500년간 서유럽은 대체로 암흑 시대였다. 오랜 세월 동안 특별한 접촉이 없었던 서유럽과 아랍 세계는 12세기에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접촉한다. 이 시기에 동양에서 발명된 제지법, 인쇄술, 나침반과 같은 중요한 기술이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십자군의 출발(파리, 국립도서관, 13세기) 
특히 나침반의 전래는 원양 항해에 대한 욕구가 드높였고, 부수되는 과학적 연구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해 항해와는 달리 먼바다로의 항해에는 천체 관측과 해도(海圖)가 필요하므로 정밀한 천문학적 지식과 지리학, 배 위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구의 개발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화약이 도입되면서 활과 칼을 이용하여 전투를 하던 유럽의 기사 계급이 몰락한다. 또한 화약과 대포는 중세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 체계를 변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포는 탄환의 폭발 현상, 탄환의 비행 문제 등을 계산하는 새로운 과학 분야를 열어 놓았다. 화약의 폭발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학과 물리학이, 폭발력의 연구에서 증기 기관의 아이디어가, 포신 제작을 위해서 제철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탄환의 운동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동력학이 등장했고, 이것은 수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과학 기술이 발달되고 있음에도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도 적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와 길이에 대한 정확한 기준과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기본 단위가 적혀 있을 고문서들을 뒤졌다. 자연스럽게 이집트에 건설되어 있는 신비의 피라미드가 그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대 피라미드야 말로 그들이 찾고 있는 도량형의 척도라고 생각한 것이다.17세기에 살았던 영국의 수학자 죤 그리브는 다소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후에 런던 그레삼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기하학을 가르친 정통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책에 기재되어 있는 지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그 당시 과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측량의 단위를 직접 찾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대 피라미드를 연구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브가 그린 대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그리브는 매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우선 대 피라미드를 연구하기 전에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로마의 유적들을 측정한 결과, 로마 시대의 피에(pied)가 영국의 피트(foot)보다 더 짧은 뿌스(약 27mm)였음을 발견했다. 여기에 자신을 얻은 그는 이집트의 기자를 방문했다. 고대 그는 이집트인들의 측량 단위를 발견하고자 알 마문에 의해 강제로 뚫린 개구부를 통하여 쿠프의 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다.그는 왕의 방과 석관을 상세히 측량하였다. 석관이 6.48피트의 길이를 갖은 것을 볼 때 사람의 크기가 변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그는 대회랑에서 좁은 수직 구덩이를 발견했는데, 이 구덩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쿠프의 미라를 안치시킨 후 대 피라미드 외부로 탈출할 때 사용한 통로라는 것이 정설이다. 즉 도굴꾼들을 막기 위한 통로 봉쇄용 돌덩어리를 정해진 위치에 안치시킨 후 작업 인부들 모두가 안전하게 외부로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브는 이 통로를 끝까지 탐험할 수 없었다. 박쥐와 희박한 공기 때문에 18미터까지 내려간 후 중도에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피라미드의 높이와 토대를 재면서 연구를 마친다. 그가 측정한 피라미드의 높이는 481피트(146.30미터), 토대 측면은 693피트(211미터)로서 추후에 확정된 정확한 측정치보다 거의 20미터나 짧다. 본국으로 돌아와 그는 『피라미도그라피아』라는 책을 출판했다. 비록 원래 목표했던 도량형의 근본적인 단위는 찾아내지 못했으나 그가 발간한 작은 책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피라미드의 전투(1798년 7월 21일)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유명한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그가 이집트 연구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1798년 7월에 나폴레옹의 군대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 부근에서 맘루크족을 정벌한 후 프랑스 학자들에게 대 피라미드의 비밀을 파악하도록 요청한다. 학자들은 대 피라미드 앞에서 1세기 반 전에 그리브가 가졌던 의문들을 다시 제기했다.
그들 중에서 젊은 공학도 후랑스와 죠마르는 당시 혁명 국가 프랑스에 의해 채택된 ‘미터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피라미드의 크기를 측정했다. 당시 프랑스는 새로운 미터 단위로 1미터를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1/4의 10,000,000분의 1이라고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죠마르와 그의 동료들도 피라미드 내부 탐사를 포기했다. 그리브와 마찬가지로 박쥐들에 의해 생긴 거대한 구아노 때문이었다. 어느 대령은 ‘이 동물들은 우리를 할퀴고 그들의 냄새로 우리를 질식시켰다’라고 증언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피라미드의 통로는 박쥐들의 거처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경사면은 매우 미끄러워 위험하였다.
학자들은 내부 구조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외부 구조와 형태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들은 북서쪽과 북동쪽에서 수많은 모래와 석고 부스러기를 치웠는데 바위 속에 뚫린 직사각형의 빈 공간 2개를 발견하는 개가를 얻는다. 이 발견은 그들의 연구를 획기적으로 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피라미드가 건설된 후 언젠가 사라졌지만 최초의 모서리 돌들을 끼워 넣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이 두 개의 측량 지점을 제공했으므로 피라미드 토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원정대가 그린 대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죠마르는 밑변의 한 측면을 측정하기 시작하여 230.90미터를 얻었다. 그는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갔지만 최상단부는 잘려 있었다. 죠마르는 꼭대기로부터 투석기를 이용, 밑변으로 돌을 쏘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다시 내려와 돌덩어리 하나 하나의 높이를 인내심을 갖고 측정하여 대 피라미드의 총 높이가 146.60미터임을 알아냈다. 이 두 개의 숫자로써 피라미드 경사가 51.19 분임을 계산해 냈고 그 변심 거리가 184.70미터임도 알아냈다.
죠마르는 꾸데라는 단위에 집중했다. 헤로도투스는 스타드(180∼190미터)라는 단위가 400꾸데와 같다고 했다. 죠마르는 변심 거리를 통해 얻어진 길이를 400으로 나누어서 1꾸데가 0.4618미터임을 밝혔다. 다른 한편 그리스의 다른 학자들은 피라미드의 4면 밑변 중 한 변이 500꾸데로 측정된다고 밝혔다. 1꾸데가 0,4618(현재는 일반적으로 약 50센티미터로 추정)이므로 500배를 하면 총 230.90미터가 되는데 이 길이는 피라미드의 밑변 길이와 정확히 일치된다.
고대의 기본적인 측정 단위 중 하나인 스타드(stade)는 600피트의 길이를 갖고 있다. 죠마르는 이 길이가 지구의 원 둘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죠마르는 이집트인들이 지구의 크기를 알고 있었고 또한 지구 둘레를 추론하였으며, 그들만의 거대한 측량 단위를 갖고 있었다고 추측했다.그러나 불행히도 죠마르는 불안정한 모래 사막에서 어림잡아 측정한 수치였기 때문에 왜곡될 가능성이 많았다. 피라미드의 4면 경사진 곳으로 모래가 밀려와 쌓이므로 피라미드의 밑변 부분을 측정하기 위해 모래를 걷어내는 작업만 해도 대단한 공사였다.그러므로 죠마르의 동료학자들간에 바닥과 높이를 측정한 데이터가 서로 달랐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문제점은 다른 어떤 고대 이집트의 유적 건축물에서도 죠마르가 제시한 꾸데의 단위가 도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절대 단위 척도를 이집트에서 찾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원정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프랑스에서 24권에 해당하는 자세한 잭을 출간하였다.
수학자 몽즈도 이 원정대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는 피라미드의 체적이 2,600,000세제곱미터나 되며 이것으로 프랑스의 국경을 3미터의 높이에 0.3미터의 폭으로 둘러 쌀 수 있는 양이라고 계산했다.

『이집트지』에 실린 그림들. 나폴레옹 원정대는 이집트의 유적뿐만 아니라 동·식물, 자연환경 등 이집트의 모든 것을 조사했다. 
나폴레옹에 의한 프랑스 과학자들의 파견과 이에 따른 자료들의 발간은 유럽에 있어 이집트에 관한 흥미를 폭발시켰고 곧바로 흥미 차원을 지나 신드롬 상태로 발전한다. 고고학자들 상호간에 미라, 조각, 오벨리스크에 관한 논쟁이 붙었고, 화가들은 그림의 배경으로 이집트의 각종 풍물을 그렸다. 황실의 재봉사도 이집트 문양을 사용했으며 장인들은 가구에 스핑크스와 악어를 조각했다. 영국 해밀톤의 10대 공작 알렉산더는 스스로 미라가 되었다. 미국 역시 그 물결을 타고 테네시 주에 하 이집트의 수도인 ‘멤피스’라는 도시가 생겼고 1880년에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장식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오벨리스크를 수입했다.
 
 
 피라미드’라는 주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더욱 유행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도입되는 과도기에 전통적인 연구 결과를 위협하는 시도도 동시에 이어진다. 피라미드라는 유적은 이 세상에 조물주의 신통력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자이며 비평가인 죤 테일러였다. 신앙심이 깊은 데다 교육을 많이 받은 테일러는 성서는 물론 수학, 천문학, 문학에 정통하였다. 서점 점원으로서 출발한 그는 1820년에는 『런던 매거진』의 편집부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한 번도 이집트에 방문한 적이 없지만 피라미드를 취급하는 전문 상점을 개설하여 그의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피라미드가 단지 무덤이었다는 가설에 반론하고자 죠마르와 다른 학자들의 자료를 조사했다. 놀랍게도 그는 피라미드 둘레를 2배의 높이로 나눈 몫이 π(3,14159……)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단위는 원둘레를 측정할 때 사용된다. 이 발견은 그에게 더욱 큰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의 건축가들이 이 π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수학 지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 피라미드에 나타난 로열큐빗과 신성한 큐빗 
테일러는 피라미드 건축가들이 지구 둘레뿐만 아니라 적도에서 북·남극에 이르는 거리 또한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피라미드에 π 단위로 적용한 결과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알고 있는 지구에 대한 정보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피라미드는 무덤의 기능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가 고대 이집트인들이 π를 비롯한 수학적 지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원시 시대나 다름없는 이집트 제4왕조 시대에 건설된 피라미드가 이집트인 스스로 축적한 건축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집트인들이 갖고 있는 고도의 지식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전수했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초기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높은 지적 능력의 일반적인 존재물은 높은 단계에서 전수된 것이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실 때 그 지식과 기술을 그에게 주신 것처럼 이집트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지식을 전수했다’라고 주장하였다.
테일러는 1859년에 78세의 나이로 『위대한 피라미드 왜 지어졌는가? 누가 지었는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의 책은 무자비한 혹평을 받았다. 피라미드를 신의 계시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커다란 반발을 받아 영국 왕실에서는 피라미드라는 주제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 것조차 거절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주장은 스코틀랜드의 천문학자인 플라찌 스미드라는 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스미드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학식은 테일러에 비견할 정도가 아니었다. 우선 그는 해군 제독의 아들이고 첫 번째 유성을 발견한 유명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크루세프 플라찌의 대자(代子)였다. 그는 26세이라는 젊은 나이에 천문학 분야에서 확고한 명성을 차지하고 있었고 12년 후에는 광학에 관한 연구로 모든 학자들이 선망하는 에든버러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테일러의 책을 읽고 스미드는 ‘피라미드의 신비’에 관한 학문이 다른 학문에 비해 경시를 당하고 있으며 그에게는 이를 살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미드는 종교적 측면은 물론 과학적인 분야까지 거의 맹목적이라고도 할 정도로 테일러에 공감하였다. 그는 피라미드의 기본 길이의 척도는 ‘피라미드 뿌스’로 신성한 꾸데의 1/25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주창하고 있는 미터 단위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근거로서 영국 과학자들에 의하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성경에 기술된 내용과 영국간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은 프랑스에서 만든 미터법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의 주를 이루는 앵글로색슨 민족이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스러운 후계자라는 생각도 팽배하여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증거를 찾는데 열심이었다. 결국 스미드는 열렬한 국수주의자로 변모한다.
1864년 말, 45세의 유명한 천문학자 스미드는 부인과 함께 테일러가 하지 못했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출발한다. 그는 스스로 피라미드를 정확히 측정하여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인 사진기를 휴대하였고 기자에 도착하여 절벽 근처의 버려진 무덤 안에 캠프를 쳤다.

대 피라미드의 위치 
스미드는 대 피라미드 정상에서 천체를 관측한 후 대 피라미드가 북위 30도 정도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춘분 때에 대 피라미드의 그림자가 사라지는데 스미드는 이것을 대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이 고도의 천체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대 피라미드 외부를 측정하여 π의 소수점 다섯째 짜리(3.14159)까지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스미드도 대 피라미드의 구조 안에는 고대 과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크기는 ‘지구에 살아 있었던 어떤 인간이 시도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감탄스럽다’고 주장했다. 테일러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미드는 피라미드가 길이의 척도뿐만 아니라 시간의 척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건물의 둘레를 피라미드의 뿌스로 표현할 경우 정확하게 일년을 의미하는 365.2의 100배라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당연했다. 스미드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과학 기초’보다도 이미 5,000년 전에 물리학에 있어 전능자의 은총에 의하여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도의 건축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대 피라미드의 유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직 신만이 대 피라미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대 피라미드에 의해 나타나는 측량 지식과 증거는 특별한 의도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며 대 피라미드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표현하는 도구라고 확신했다. 이 거리는 뿌스에 109를 곱하였을 때 얻어지는데 9/10의 비율은 피라미드의 높이와 폭에 대한 비이다.두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예수 탄생의 날짜가 왕비 방의 바닥에 나타나 있으며 대회랑의 입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쪽의 십자가가 기독교인들의 시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물론 이 땅위에 메시아의 재림일자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천재 지변, 전쟁, 지구의 최후 등 모든 계시를 피라미드의 복도와 현실 등을 측정함으로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스미드에 의하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해는 1979년이었다.

어셔 대주교 
당시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만든 날짜를 기원전 4004년으로 보고 있었다. 1650년에 아일랜드의 대주교 어셔가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토대로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아침 9시에 창조되었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10,000년 전에 살았던 이집트인들이 기독교를 알 수는 없는 법이며 특히 대 피라미드를 건설할 당시의 이집트인들은 신의 숫자가 무려 700이나 되는 다신교였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스미드의 책은 독특한 문체로 인해 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동료 과학자들을 납득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집트 학자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고, 에든버러 왕립학회는 그의 가정을 ‘연약한 여자들이나 믿을 만한 신빙성 없는 환상’이라고 단정했다.한 미국 학자는 숫자를 곱하여 어떠한 사실도 증명할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적정 척도를 만들어 런던과 미국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소도시와의 거리를 확인할 수 있고 수많은 거리까지도 심지어는 물고기의 평균 무게를 잴 수 있다’고 까지 하였다.
그러나 테일러와 스미드에 대한 이러한 비평이 오히려 피라미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깊이를 더해 갈수록 그 안에 숨겨진 정신적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877년에 미국인 목사 죠셉 세이스는 피라미드가 ‘크기, 무게, 각도, 온도, 지형적 문제 등 수치상의 커다란 체계’를 내포한다고 주장했다. 세이스는 피라미드에 5가 특별히 강조되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피라미드는 5개의 각과 바닥을 포함하여 5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5개씩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피라미드의 1뿌스는 1꾸데의 5배의 5배이다.그의 대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대 피라미드에서 교차하는 위도와 경도는(북으로 30도, 동으로 31도) 이 땅 위의 어떤 것보다는 더 확실하게 대 피라미드의 위치를 나타낸다. 그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이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선정하여 이 엄청난 건축물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대 피라미드를 신적인 영감에 의한 작품으로 간주하는 일부 광신자들의 주장은 마침 발표된 ‘종의 기원’을 신봉하는 진화론자들과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야기했다. 스미드와 그의 제자들은 기원전 4004년에 인간을 창조한 신적 존재의 부정할 수 없는 방법을 증명했다. 그 증명 방법이란 인류의 조상은 숲 속에 살고 있었던 원숭이와 같은 영장류가 아니라, 신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면서 건축물에 일찍 눈을 뜬 예술가들이라는 것이다.

윌리엄 매튜 프렌더 페트리 
과학자들과 접신론자(接神論者)들의 논쟁이 가열되자 이 논쟁을 종결시키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 피라미드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찾아 대 피라미드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1880년에 26세의 영국인 윌리엄 매튜 프렌더 페트리(William Mattew Flinders Petrie)는 대 피라미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많은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이집트로 떠났다.피라미드의 규모에 관한 모든 치수는 이집트 정부가 1925년에 최종적으로 내놓은 보고서를 제외하고는 페트리의 것이 가장 정확했다. 4면의 길이에 대한 최종 보고서와 페트리가 측정한 숫자와의 오차는 고작 21센티미터였다. 그가 측정한 피라미드의 크기는 남쪽 230.45미터, 동쪽 230.39미터, 서쪽 230.36미터, 북쪽 230.24미터이며, 높이는 146.60미터로 확인되었고 기울기는 51도 52분였다.
그러나 접신론자들의 반격은 거셌다. 페트리의 과학적인 반론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 연구가들의 각종 이론은 20세기에 새로운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영국의 기술자 다비드 데이비슨은 처음에는 무신론자였으나 25년 후에 열렬한 신자가 되더니 대 피라미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내 놓았다. 그는 스미드의 이론과 페트리의 이론을 결합하여 피라미드를 평면 상태뿐만 아니라 약간 굴곡이 있는 내부도 고려하여 새로운 인자(factor)를 만들었다. 그는 페트리는 피라미드 외부의 외피에 대하여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미드가 주장한 내용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 피라미드가 특정 숫자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그의 할아버지 매튜 프렌더 대위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을 통해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고, 테일러와 스미드의 저서에 매료된 그의 아버지 역시 열정적인 피라미드 연구가였다. 그는 피라미드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측량 기구를 제작하는 데 20년을 투여했다. 그의 장비는 실제로 대 피라미드를 측정하는 데 아주 효율적임이 추후에 판명되었다. 어린 페트리도 13세 때 이미 스미드의 책을 읽고 치수가 갖고 있는 단위에 매료되어 측량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페트리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대 피라미드를 측량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전 준비 작업을 위해 스톤헨지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건물을 꼼꼼하게 측량하였다. 그 후 어느 정도 측량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이 든페트리는 이집트로 향했다.
그는 쿠프의 대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케프렌, 미케리노스 피라미드도 측정하였다. 그는 열기와 먼지가 가득한 피라미드 안에서, 관광객이 떠난 밤에 발가벗고 작업을 했다. 페트리는 피라미드를 측정하면 할수록 건축물의 길이와 각도의 정확성에 놀랐다. 106미터 직선임에도 겨우 6밀리미터의 오차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부분의 마감 처리를 세심하게 검토하여 왕의 방 부근의 시공이 다른 부분에 비하여 현저하게 뒤떨어짐을 발견하였다. 그는 당초에 이집트 건축가들이 계획한 것과는 달리 미완성 상태에서 대 피라미드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쿠프가 대 피라미드를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파라오가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 공사는 곧바로 마감되고 미라가 안장된다. 이것이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이다. 새로운 파라오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이다.쿠프의 대 피라미드가 완공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워싱턴기념탑 
현재의 현실이 쿠프의 진정한 현실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자들은 이것이 쿠프의 현실이 이미 도굴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1883년에 출판된 페트리의 저서 『기자의 피라미드와 신전』은 피라미드를 두고 논쟁을 벌였던 진화론자들과 접신론자들의 싸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페트리 역시 피라미드 높이와 π의 관계를 확인했고 이 같은 관계는 파라오의 현실 길이와 둘레 사이에서도 나타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페트리는 스미드의 측정치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주장한 피라미드에 관한 모든 주장이 허구임을 밝혔다. 특히 스미드가 그렇게도 강조하였던 ‘피라미드 뿌스’는 어느 곳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고 또 ‘꾸데’의 길이도 달랐다. 그의 논문에 의해 접신론자들은 진화론자들과의 논쟁에서 참패했음은 물론이다.
고 그럴수록 테일러와 스미드의 이론은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지루한 논쟁은 가드너의 명쾌한 주장에 의해 종지부를 찍는다. 가드너는 미국의 워싱턴기념탑을 예로 들어 죠셉 세이스가 말한 숫자 5에 대해서도 논리 정연하게 반박했다. 이 기념물의 높이는 555피트와 5뿌스이며 밑변은 55피트이다. 창은 밑변으로부터 500피트에 있다. 가드너는 이러한 우연성이 있겠는가 하고 반론을 제시했다.

 
대 피라미드에 관한 과학적 조사는 고고학적인 실측뿐만 아니라 천문학 분야에서도 수없이 시도되었다. 페트리가 피라미드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있는 동안 일부 학자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인 천문학자 리차드 프록터는 고대 천문학이라는 명제를 걸고 피라미드 연구에 대한 새장을 열었다. 그는 대 피라미드가 완성되기 전에도 우주 관측소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내부 통로가 정남북향(正南北向)으로 되어 있고 또 26도로 경사지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 피라미드가 천체 관측 장소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학자들이 복도 북쪽의 개구부를 통하여 천체 현상을 연구하여 북쪽 하늘의 지도를 만들 수 있었으며 그럴 경우 하늘의 80도를 커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록터의 이론은 1894년에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헬륨을 발견한 노만 로키어가 그의 저서 『천문학의 입문』에서 피라미드와 별에 대해 서술하면서 지지를 받았다. 로키어는 피라미드가 해가 뜨고 지는 방향과 특정 별자리를 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그는 영국에 있는 스톤헨지의 거석과 피라미드를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약간 뒤에 미국인 리비오 스테시니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천문학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정확한 경도와 위도의 길이를 계산하였다고 발표했다. 경도와 위도는 유럽에서도 18세기가 되어서야 정확히 측정되었는데 이것은 대 피라미드가 세워진지 4,000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스톤헨지 
쿠프의 대 피라미드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가정은 기원전 5세기의 프로크뤼스가 천체를 관찰하기 위한 용도라고 기록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가설들은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들로부터 부정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천체 관측 수준을 볼 때, 겨우 몇 개의 조잡한 천체 기구를 설치하여 별을 보기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주장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특히 쿠프의 대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케프렌의 피라미드도 대형 기념물인데 천체 관측용으로 두 개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하는 반론에는 어느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프랑스인 화학자 죠셉 다비도비는 1974년에 이집트 건축가들은 대장장이이기보다는 화학자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돌로 만든 피라미드를 분석한 결과 피라미드는 잘라서 만든 것이 아니라 마치 벽돌을 만드는 것과 같이 커다란 돌들을 형틀에 넣어 찍어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이 같은 가설을 토대로 만든 돌을 보여 주었으나 고고학자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다음은 주류학계와 비주류학계의 피라미드 건축에 대한 서로의 연구한 주장을 살펴봅시다.
먼저 주류학계의 건축법 주장을 들어봅시다.
 


피라미드의건축법 주류학계 주장
 
 
 
 이제 피라미를 왜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건축물로 찬탄하는지 이집트 주류학계가 연구해온 주장에 대하여 알아보자.
가장 많은 질문은 인류의 역사로 볼 때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대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을 건설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는 금이나 구리는 발견되었지만 철은커녕 청동조차 사용되지 않았다.

 

 

  ■주류학계의 피라미드 건축법■

1. 기초 만들기

피라미드의 완성후 위로부터의 막대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암반위에세워졌다. 건설지의 가로, 세로로 수로를 파고,수면의 높이에 맞춰 지표의 요철을 깍는다. 마지막에 도랑을 메워 암반을 수평으로 한다.

 2. 방위를 잰다

 파라미드의 네 측면은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올바른 북쪽 위치 측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설지에는 원형의 벽이 만들어지고, 밤이 되면 관측자가 그 중앙에 서서 주극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별을 선정한다. 그 별이 벽 위에 나타난 위치와 진 위치에 표를 하고, 정확한 남북 방위를 측정한다.

 3. 현실은 만든다

현실이나 통로의 벽에는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돌쌓기와 병행하여 만들어졌다. 현실 천장의 합각머리 모양의 지붕은 현실에 모래를 채우고, 그 모래를 다시 빼내는 방법으로 꼭 겹쳐지게 하였다.

4. 결사로를 만들고 돌을 쌓아올린다

크고 무거운 석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든 경사로가 이용되었다. (경사로의 형태에 대해서는 나선형 등 몇몇 설이 있다) 기울기가 항상 일정해지도록, 돌을 높이 쌓아올라감에 따라 경사로도 길게 만들었다.

5.캡 스톤을 끼운다.

6. 화장석을 연마하여 완성

화장석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깎아서 연마해 간다. 이렇게 하여 번쩍이는 듯한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주류학계의 주장

쿠푸왕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풍부한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임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달한 이유의 하나로 나일강의 범람을 제시한다.

쿠푸왕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를을 건설했는가하는점이다. 우선피라미드를 만든 공구를 알아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같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이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은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 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한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석회암은 석화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공구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석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석회석은 석회질이 물밑에 쌓여서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이 쉬운 재료이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주 간단한 연장으로도 능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석회석을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었다.

한 예로, 시카고 대학의 레너 교수는 50명도 채 안되는 인원과3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0.75톤에서3톤에 달하는1백86개의 돌로 8층짜리 피라미드를 고대의 연장만으로 건설했다. 즉. 고대인들이 충분히 피라미드를 고대의 공구만으로도 건설할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 보다 단단한건 사실이지만,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어,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나기도한다.

 

대형 돌들을 채석장에서 절단하는 방법도 논란거리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땐에 나무 쇄기를 박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쐐기의 부피 증가로 간단하게 절단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몇 백 톤이나 되는 대형 오벨리스크가 절취되지 않은 미완성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 쐐기를 사용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피라미드 건설에 있어서 가장 큰 논란거리는 거대한 돌을 어떠한 방법으로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옮겼느냐이다. 소형 피라미드인 경우는 이집트에서 지금도 쓰이고 있는 용두레(샤두프)를 사용하여 커다란 돌을 임의로 옮길 수 있다고 추측한다. 반면에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방법은 적어도 30여 가지 가설이 있다. 그러나 근래에 내려진 결론은 너무나 간단하여 고고학자 당사자들조차 선뜻 믿지 않으려 할 정도이다. 그 방법이란 비탈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주로 벽돌로 만들어지는 경사로로 썰매에 얹혀진 돌덩어리를 상부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비탈길의 길이와 기저 부분의 폭은 늘어나는데 비탈길이 주저앉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사각은 항상 거의 10°를 유지하였다.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으로, 피라미드 주위를 돌아가면서 경사로를 만드는 이론과 단일 경사로 혹은 4면에서 같은 크기의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전자의 방안은 밑변의 길이가 150m 이상일 경우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현재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경사로로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길고 좁아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래 쿠프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조사에서 경사로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또 경사로의 길이도 정확히 합치하여 이제까지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물론 피라미드의 규모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을 선별적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제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말할 때마다 항상 경탄의 대상이 되는 건축 기술에 대하여 알아보자.

 제일 먼저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식만으로는 결코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증거로 왕의 현실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왕의 방으로 알려진 현실은 높이 5.8m, 길이 10.5m, 폭 5.25m로 바닥에는 열다섯 장의 두터운 화강석판이 깔려 있고 벽은 100여 개의 가공된 화강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벽에 사용된 화강석은 70톤 이상의 무게로 추정되며 또한 천장은 50톤의 무게의 화강석 아홉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엄청난 하중은 5층의 공간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대피라미드의 경이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오히려 이와는 상반되는 의견을 표명한다. 기계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압축력이 다소 적은 공간에 이와 같은 높고 단단한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엄청난 힘이 지붕에 가해졌다고 말한다. 즉 하중 분산용 공간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는 뜻이다. 현실의 수직벽은 강한 힘이 가해져 여러 군데 파손이 생겼고 서까래 윗부분은 마찰에 의하여 약간 북쪽으로 경사져 있다. 중간 부분과 아래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갈라진 틈은 경사가 질 때 일어나는 현상과 동일하다. 이 원인은 압력이나 부실공사 때문으로, 파라오의 현실이 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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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쿠프 왕 현실 상부의 균열 부분 사진    쿠프 왕 현실의 단면도쿠프 왕 현실의 균열은 화강석의 특질을 간파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결국 현실 위에 5개의 공간을 만들고서야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되었다.

 

 피라미드만 60년 이상 연구한 프랑스의 로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이집트인들이 화강석 재료의 특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화강석이 석회석보다 단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강석은 육각의 얇은 판 모양의 운모, 육각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 모양의 장석 등 세 가지 성분으로 되어 있지만, 세 성분이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는 화강석이 설탕과 같이 조각으로 부셔지기도 한다. 쿠프의 건축가들은 이미 여러 번 피라미드의 현실로 채택된 궁륭 시스템을 왕의 현실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의 천장으로 화강석 평판을 설치되자마자 건축가들은 화강석의 피로 현상을 알아냈다. 현재 보이고 있는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 사실에 쿠프의 건축가들은 놀랐고 그래서 현실 위에 두 번째, 세 번째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도 안정이 되지 않자 계속하여 네 번째, 다섯 번째 공간을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두 개의 경사면을 갖는 궁류을 설치하고서야 파라오의 현실이 외부의 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화강석 재료로 된 왕의 현실이 실패하였다는 것은 그 후에 한번도 쿠프의현실과 같은 구조가 다시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쿠프의 피라미드와 거의 같은 규모인 아들 케프렌의 피라미드조차 아버지와 같은 현실 구조를 채택하지 않았다. 쿠프의 피라미드는 다른 피라미들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의 내부가 다른 피라미드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와 특별히 다른 것은 없지만 특별히 규모가 크므로 유명할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와 다른 것도 당시의 건축가가 아직도 피라미드 평면에 대한 확실성을 갖지 못하고 건설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쿠프의 피라미드는 건설하는 도중에 두 번씩이나 평면을 변경하였다. 처음에는 현실을 지하의 바위를 뚫고 만들려고 하였는데 쿠프는 현실을 더욱 크게 만들 생각을 갖고 지하 현실을 포기했다. 곧바로 회랑과 왕비의 방이라 불리는 두 번째 현실을 만들었지만 이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자 다시 상부에 세 번째 현실을 만들었다. 그렇게 연속하여 피라미드 내부를 변경하다보니 당연히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로에 교수는 쿠프의 건축가들은 당시 배워야 할 것이 많았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수많은 기술적 문제들을 일일이 해결하여야만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제 대피라미드를 다른 측면에서 검토해보자. 가장 호사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하면서 천문한 및 기하학에서 매우 진보된 지식을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견지에서만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임의의 방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에서 보면 방위에 있어 평균 오차가 3'6"에 지나지 않았다. 케프렌의 경우는 5', 미케리노스의 경우는 14'의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오차는 놀랄만큼 정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엄밀한 정밀도를 요구하는 건축물 중에는 천문대가 있다. 오늘날 대표격인 천문대로는 파리 천문대와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데 이 천문대들은 자오선 방향에 대해 각각 6'과 9'씩 틀어져 있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 천 년 전부터 태양, 달, 별,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자료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시리우스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달력을 만들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날과 큰개자리 시리우스 별이 정해진 날짜의 동트기 직전과 직후에 나타나는 것을 정확히 탐지하여 일 년이 365.25일이 되는 것도 알았다. 한 달이 30일로 된 12개월에 여분으로 5일을 더해 1년으로 하였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체적과 표면적을 계산하고 수직을 세우는 것인데 이집트인들이 그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대피라미드를 살펴보면 이집트인들이 원주율=3.1416과 황금비율=1.618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피라미드의 내부에서도 의식적으로 기하학 지식을 적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근거는 현실을 들 수 있다. 현실은 바닥 면적이 20 X 10 꾸데이며 높이는 11.172꾸데이다. 이를 계산해 보면 서쪽과 동쪽 긴 단면의 대각선은 15꾸데가 된다.(그림 1). 이럴 경우 직각삼각형의 밑변이 10꾸데이고 높이는 루트5가 된다. 이 15꾸데의 대각선은 <그림 1>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긴 밑변과 긴 변 대각선이 3:4:5인 '신성한 직각삼각형'을 얻는다. 두 번째도 역시 피라미드의 현실에 관한 것으로 현실의 위치가 밑변의 절반이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측량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어진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면적이 2배인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쿠프 파라오의 현실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과학수준이 매우 초보적인 단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취한 업적은 그야말로 놀랄만하다. 우선 그들은 고도의 수학이 아니라 간단한 산수, 그것도 더하기와 빼기밖에 할 수 없었다. 곱하기와 나누기는 더하기와 빼기를 갖가지로 활용하여 얻었다. 이집트인이 계산할 때는 언제나 분수가 장애가 되었다. 그것은 분자가 1이 되는 분수, 즉 단위분수밖에 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간단하게 13/16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은 1/2+1/4+1/10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피라미드들을 건설한 고대 이집트인들이지만 그들이 숙지한 기하학은 경험적인 수치 단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피라미드의 경사각을 예로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집트에 건설된 거의 모든 피라미드들의 경사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측정된 다양한 경사각을 삼각함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1)tg.α=h/b=17/18, 7/6, 6/5, 5/4, 14/11, 4/3, 7/5, 3/2, 14/9, 2/12)tg.β=h/d=2/3, 14/17, 6/7, 8/9, 9/10, 1/1 만일 피라미드 건축에 높은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적용됐다면 다양한 경사각이 아니라 일률적인 값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피라미드에 얽힌 수많은 의문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조사에 의한 결론은 간단하다. 비전문가들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은 풀어야 할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면 가장 적절한 경험상의 지식을 적용하거나 변형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건설한 피라미드가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계산법과 초보적인 분수 표시법이 그들의 수학적 수준이었음에도 피라미드를 건축하였다는 것은 정말로 경이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라미드에 대한 신비 중에서 가장 큰 의문점은 쿠프 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을 원시 연장만 갖고 있던 신석기 시대에 왜 건설하였느냐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건설된 목적에 대하여 수많은 가설과 제안, 추측이 있었지만 피라미드 건설의 근본 목적인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통념적인 가설이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미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피라미드가 파라오를 매장하기 위한 무덤의 용도만으로 건설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은 피라미드의 건설 요인을 당시의 사회상과 연결하면 생각보다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겠지만 헤로도투스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십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동원되지는 않았다. 페트리 경은 케프렌 왕의 피라미드 서쪽에서 작업 인부들의 숙소터를 찾아냈는데 수용인원은 4,5천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산했다. 이것은 당시의 노동력을 감안하면 매우 타당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

 

 피라미드 건설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편견 가운데 하나는 수많은 노예-주로 이스렐인-들을 채찍으로 혹사시키는 폭군 파라오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는 엄청나게 커다란 돌을 잘 미끄러지게 하기 위해 나이 많은 여자나 어린 아이들의 피를 발랐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심하게 왜곡된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과 같이 채찍으로 노예를 위협하며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았다는 것을 수많은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다. 당장 이집트에서는 노예 제도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며, 노예라는 말은 가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할 뿐이었다. 영화에서 처럼 혹독한 조건 속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면 대번에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며, 결코 1천 년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구한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건설에 투입하였던 에너지와 정열을 순수한 의미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실로 엄처난 작업이었다..

 

쿠푸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17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높이까지 건조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높이는146.5m 이므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조의 노동력은 농민이었다. 왕은 나일강의 증수로 경지가 물에 잠기는 시기에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이다. 농한기에 식량과 의복, 일을 지급한다는 ,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 정책인 것이다.
피라미드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자대지의 단단한 암반 위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5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조는 파라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즉위하면 곳바로 착공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선 건설지가 선정되고, 설계도나 축소 모형도 작성되었다. 장소가 결정되면 우선 기초 다지기부터 시작하고 수로를 사용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하고, 별을 관찰하여 정확한 방위를 측정하였다, 피라미드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국내에서 농민들이 징용되고, 마침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일 강이 증수하여 경지가 물에 잠기게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였다. 노동자들에게는 주거와 의복, 식사가 제공되고,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에 실시되는 국가 사업이었다. 또 나일 강 수위의 상승은 석재를 운반하기에 적합하였다. 피라미드의 건재는 주로 석회암이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스완산 화강암도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기자 부근의 투라에서 좋은 질의 것이 채굴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약 270만개로 어림되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돌을 파 내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동제의 끌과쇄기로 돌을 파내고, 현장에 운반되고 나서 모양이 다듬어 졌을 것이다. 석재의 운반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가 사용되었다.

돌을 어떻게 해서 쌓아 올렸는가는 피라미드의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데, "람프"라는경사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유력한 주장이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진 람프에는 썰매가 잘 미끄러지도록 석고를뿌리거나. 역레일을 만드는등의 고안이 되어있었다.

 썰매에 실린 석재는 기울기10분의1(10m 에1m 오르는 기울기) 의 경사로로 운반되고, 위치를 결정할 때에는 산륜 이 사용되었다. 기울기는 항상 일정하게 되도록,높이가 높아지면 경사로의 길이도 연장된다. 내부의 구조도 돌을 쌓아올리면서 만들어 나갔다. 정상에 캡 스톤을 끼우면,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쌓아올린 석재를 발판으로 하면서 단을 깎고 표면을 연마하여 마침내 피라미드를 완성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 의해 밝혀진 피라미드 건설 요인과 작업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이 범람기는 최소한 3~4개월 가량 지속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거의 모든 농부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경작이 가능한 나일강 연변이 모두 홍수로 잠겨 버렸으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오는 범람기 동안 이집트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여기에서 피라미드 건설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즉 건장한 인부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짓게 하고 그 보답으로 곡식을 지급하는 것이다. 보수는 현물로 직접 지급했으며, 인부들이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인부들은 보수를 받는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주요 작업 내용은 돌을 캐거나 배에 돌을 싣거나 예정된 위치로 운반하는 것 등이었다. 조각을 하거나 측량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일은 전문적인 기술이므로 전문가들에 의해 대대로 상속되었다. 피라미드 공사장의 인부들이 보수를 제때에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업을 했다는 기록도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범람기가 끝나 물이 모두 빠지면 나일강 연변은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퇴적물에 의하여 더없이 비옥한 땅이 된다. 이때는 피라미드 공사가 중지되며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나 홍수 때문에 잠겼던 경작지에서 물이 빠지고 나면, 농민들은 예전의 자기 땅을 되찾는 것이 매우 골치 아픈 일이었다. 여기에서 측량 기술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땅이 비옥한 데다가 기후가지 적당하므로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항상 풍년을 이루었다. 특별히 홍수가 적게 들어 경작지가 줄어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급 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곡식을 수확한 후 다음 해까지 저장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막의 세찬 바람 때문에 창고는 대단히 견고하게 지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곡식을 저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피라미드가 곡식 창고의 역할을 했다는 설도 대두되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이 매우 적절한 통치 기법 중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는 곧바로 공사를 마감하고 선왕을 안장한다.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시급히 마감을 한 이유이다. 새로운 파라오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우선 나일강변 중에서도 범람기 동안에 침수되지 않은 높은 곳에 피라미드를 세울 대지를 선정한다. 그리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종사할 인부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인부들을 모집할 때는 많은 농부들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아주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군대의 막사 같은 곳에서 묵으며 양식과 옷을 지급받는다. 피라미드 건설의 노동자로 뽑히는 것은 매우 큰 혜택이자 영예였다.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피라미드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물질적인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 왕조에서는 파라오만이 미라가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라오는 평소에 아끼던 신하나 친족들에게도 피라미드 주위에 그들의 묘지를 건설하도록 은총을 베풀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파라오에게나 제공될 수 있는 장례 집기를 보장받으며, 미라가 될 수 있고, 영원한 음식물이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농부들은 미라가 되지도 못하고 또 좋은 무덤에 매장되지도 못한다. 단지 모래를 판 구덩이에 장신구 몇 점과 함께 묻힐 뿐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지하의 신이 된 파라오에 의하여 지하에서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피라미드는 9/10는 기아는 막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나머지 1/10은 종교적인 열정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회와 정신 모두가 결합된 결정품의 소산이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당시의 사회 생활상과 통치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시스템이다. 즉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일강의 범람기 동안에는 농부들을 기아에서 해방시켜 굶주림에 따른 국민들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반면에 파라오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묘지라는 개념보다도 이집트인들을 위한 대형 근로 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국력을 쏟을 수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에서 전 국가적인 에너지의 집합체로 만든 작품이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는 대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이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시 연장을 가지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파라오를 위하여 일한다는 데 보람과 긍지를 느껴 어느 노동자는 "누구 한 사람도 지치는 일도, 목 마르는 일도 없었다. 작업이 끝나면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마음껏 먹고 마셨다"라고 기술하였다. 피라미드 안에 적힌 낙서에 '장사 작업대' 혹은 '끈기 작업대' 등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였다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증빙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