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톤 돌덩이 230만개 어떻게 옮겼지?..피라미드 비밀 풀린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피라미드의 미스터리가 풀릴 만한 증거가 발견됐다. 피라미드에 사용된 대형 석재들의 운반에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일강 지류의 흔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프랑스 '유럽 환경지구과학 연구교육센터'(CEREGE)의 환경지리학자 하데르 세이샤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이집트 북부 기자 피라미드 주변에서 나일강 지류의 흔적을 확보했다고 전날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에 발표했다. 지난 4500년 동안 피라미드 건축에 들어간 거대한 석재들이 어떻게 운반됐는지는 미스터리로 여겨졌다. 가장 규모가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는 석회암과 화강암 등 2t(톤)이 넘는 대형 석재 약 230만개가 사용됐다. 앞서 학계에선 피라미드로부터 약 7㎞ 떨어진 나일강이 건축 물자 운반에 이용됐고 건설 현장까지 수로를 팠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돼 왔으나 이를 입증하진 못했다.
지금은 없어진 나일 강의 쿠푸 지류 상상도. /사진=미국 국립과학원 회보하지만 이번에 연구팀이 나일강 지류의 흔적을 확인하면서 대형 석재 운반 미스터리가 풀리게 됐다. 연구팀은 이집트 북부 기자 피라미드 주변에서 시추한 퇴적층에서 꽃가루 화석을 발견했고, 이 화석을 통해 기자 피라미드 인근을 흐르던 나일강 지류의 흔적을 확보했다. 연구팀은 이 지류를 통해 대형 석재들이 운반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연구팀은 해당 지류의 이름을 이집트 제4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인 쿠푸왕의 이름을 따 '쿠푸 지류'로 명명했다. 이들은 '쿠푸 지류'의 수위가 나일강 본류에서 약 7㎞ 떨어진 피라미드 건설 현장까지 물자를 운반하기에 충분했다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쿠푸 지류가 기원전 1350년 무렵부터 수백년에 걸쳐 수위가 낮아졌다고 분석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는 쿠푸 지류는 메마르고 해당 지역은 묘역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세이샤 연구원은 NYT에 "기자의 자연환경이 피라미드 건설에 이용됐다는 점을 밝혀낸 것이 고대 건축물을 둘러싼 많은 의문 중 일부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며 "환경에 관해 더 많이 알면 피라미드 건설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밝혔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피라미드에 들어가기에 앞서.......
불가사의 피라미드
현대과학자들 조차 당황하게 만드는 이 놀랍고 장엄한 건축물 피라미드...!!!신석기 시대를 막 거친 원시 시대에 지나지 않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 어떻게 이런 엄청난 기념물을 건설하였을까?바퀴도 발명되지 않았고 말이나 노새 등 하역 동물도 없었던 고대 이집트에서 밑변의 네 모서리가 0.1%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거대한 돌들을 두부처럼 반듯하게 잘라 빈틈없이 맞추어 끼운 기술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피라미드가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개념들을 구체화시킨 것이라면, 어떻게 고대 이집트의 건축가들은 다른 문명에 비해 그처럼 앞선 지식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집트가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이집트보다 먼저 선진 문명을 갖고 있었던 지역도 존재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다른 문명에 비해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여타 나라들과는 달리 아직도 4천 년 이상 된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는 피라미드는 압권이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그리스어의 pyramis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생긴 깨로 만든 의식용 과자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다르게 표현했는데 음성학적으로 m’r 또는 mer로 표현된다.
수많은 피라미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원 위에 우뚝 서있는 3개의 거대한 피라미드, 일명 기자의 피라미드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사막의 유목민들은 피라미드에 도착하기 수 일 전부터 아득히 멀리 보이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물을 볼 수 있었다. 먼 곳에서 보이는 피라미드는 지평선 상의 자그마한 삼각형이지만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더 완벽한 기하학적 모습으로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쿠프의 대 피라미드는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되었다. 이 피라미드은 중량은 거의 7백만 톤이나 된다.
벽돌 이음새의 경우 거의 일정하게 1/50인치(약 0.5mm 이하)인데 벽돌하나의 무게가 2톤이상이고 어느것은 20톤이 나가는 것도 있는것을 고려한다면 믿을수 없는 건축 기술이라 여겨진다.
지구표면에 있어서의 위치 역시 놀라운 점을 시사하는데, 죠셉 시즈와 그의 동료의 연구에 의하면 피라미드의 위치는 대륙의 질량 중심에 위치해 있고 지구 전체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4등분하는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즉 북남방향으로는 그리니치 동방 31도선인 가장 긴 경선과 동서방향으로는 북위 30도선으로 대륙의 가장 긴 축을 이루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종횡으로 가장 길게 나누는 지점은 유일할 것이고 그 지점에 거대 피라미드가 서 있다는 것은 기존의 피라미드에 관한 논의 이상으로 더 중요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
대 피라미드가 건설된 당시는 철이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돌 블록을 연마하기 위한 연장은 돌과 구리로 된 것이 고작이었다. 연마한 돌을 운반하는 데 사용된 연장도 썰매와 밧줄, 도르래, 미끄러져 내리기 쉬운 진흙과 경사로를 만들기 위한 벽돌이 고작이었으므로 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을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는 모두 제4왕조(B.C. 2600 ~B.C. 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높이가 148미터에 이른다.
(현재는 137미터) 다음으로는 카프레 왕의 것으로 136미터세번째가 멘카우레 왕의 것으로 62미터에 달한다. 밑변의 길이 가 233미터인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각 모서리가동서남북으로 향하고 있고 거의 완전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피라미드는 입구와 조그만 내실을 제외하면 모두 석회석으로 이루어 졌는데 돌의 크기는 높이 1미터 폭 2미터 길이는 각각 다르다. 평균 2.5톤의 이 돌을 밑변에서 꼭대기 까지는 210단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230만 개(또는 250만 개)의 돌이 필요하였다. 가령 이런 돌로 돌집을 쌓으면 12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전문가는 이런 돌을 30센티미터로 잘라 연결하면 지구의 2/3을 에워 쌓을수 있다고 하며 높이 3미터 두께 30센티미터로 자른다면 프랑스의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한다. 이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피라미드 건설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수백명의 사람이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무거운 석재를 땟목에 올려 강을 건넜고 역시 강기슭에 도착한 석재를 건설현장 까지 운반하였다. 어쨋든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조물이 지금부터 4,800년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리면 그 무게가 엄청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무거운 건조물은 상당히 탄탄한 기초위에 세우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 건조물도 붕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800년의 기간 동안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진정 세기의 신비이며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거대한 피라미드군이 왜 세워졌는가?
돌은 어떻게 쌓아올렸는가? 건조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우리는 고대 이집트 왕들이 준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을 것인가? 자!! 한번 알아나보자...
불가사한 피라미드..
고왕국 시대 건축의 가장 놀라울 만한 건축물인 피라미드는, 일찍이 기원전 2770년에 처음 건설되었고 이를 건설하기 위해서 막대한 노동력과 기술이 투입되었는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제에 있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서 줄잡아 20년 동안 1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것의 높이는 481피트였고 230만개 이상의 석회석 덩어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돌덩이들은 어찌나 정밀하게 쌓아 올려 졌는지 면도칼도 안들어 갈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그 돌들은 정과 쐐기로 암벽에서 분리된 다음 바퀴의 도움 없이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흙으로 된 경사로로 올려져 제위치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 졌던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래 전에 세워졌는데도 동서 남북 방향으로 정확히 곧게 서있으며 단지 진북방향으로 3분 빗나가 있는데, 현대에 잘지어졌다고 하는 파리천문대도 진북방향에서 6분정도 빗나가 있는걸 보면 그 정확성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1978년 "암호가 해독된 거대 피라미드"라는 책을 쓴 레이몬드는 그 조차도 지층의 함몰로 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많은 현대 건축가와 공학자들은 현대의 여하한 기술로도 이러한 건축물을 지을수는 없다는데 동의한다. 이는 인간의 지식과 기술의 진화 법칙이 잘못되어 과거에 더 정확한 과학적 건축이 지어졌다는 결론을 얻어 많은 과학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피라미드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이론 중의 하나는 고용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농업 , 광업, 상업의 자원들이 더 이상 전체 이민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이 이론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라미드 건설자에게 피라미드가 일차적으로 종교, 정치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라오의 권력이 강할수록 피라미드는 또한 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가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피라미드는 분명히 정치적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피라미드는 지배자들의 영광을 드높여 주었을 뿐아니라, 이집트 국가의 힘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양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후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피라미등를 대신해 신전이 건축의 주요 형태로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왕국 시대에 건설된 카르나크(KARNAK)와 룩소르(LUXOR)의 거대한 신전들이었다. 그림들이 새겨진 거대한 수 많은 기둥들은 이집트인의 놀라운 건축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집트 신전의 특징은 그 거대한 규모에 있다. 카르나크 신전은 길이가 약 1300피트(약 400M)에 달하는 역사상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종교 건축물이었다. 유럽의 고딕 성당중 아무리 큰 것이라도 이 신전의 중앙홀에 쏘옥 들어 갈수 있을 정도 이다.
"고대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가 피라밋이 건축된 후 2천년 뒤에 이 건축물에 대해 학문적 논의를 제기한 이후 크게 두부류의 입장으로 나뉘어져 논의가 진행 되어 오고 있다. 첫번째 그룹은 피라미드가 신의 계시라는 입장이고 다른 그룹은 이에 반대하는 연구자들로 피라미드가 아틀란티스 시대에 잊혀진 과거의 지식과 기술의 산물 혹은 과거에 고도로 진보되고 번영한 그러나 현재에는 사라짐 어떤 문명에 의한 것으로 믿고 있다. 즉 이들은 노아에게 신이 방주를 만들게하여 신의 뜻을 알렸듯이 피라미드의 건축을 지시했다는데 반대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관점을 가졌던 사람들로는 아이작 뉴튼경, 죤 테일러, 스콧틀랜드의 천문학자 스미쓰, 죠셉 스위스, 러더포드 등이다. 이 관점에는 회의적이지만 거대피라미드에 열정적인 사람들은 페트리, 노르만 로키어 등이며 피라미드 파워(에너지 연구)를 연구한 사람은 보비스, 패트릭 플래나건이고 불가사의지역등 신비적인 관점에서는 에반스, 톰킨스등이 연구하였다. 현재의 연구 결과로는 거대피라미드의 건축자는 이집트의 파라오인 체옵스(Cheops, 쿠푸라고도 불림)였으며 그는 당시 예언자에게서 지시를 받아 건축을 했었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은 에리히 폰 데니켄의 이야기를 한번들어 봅시다..
고대 피라미드의 비밀들
에리히 폰 데니켄의 <미래의 수수께끼> "거인을 위한 무대" 중에서...
현재 레바논에 있는 다마스커스의 북쪽에는 발베크의 단(壇)이 있다. 석재로 지어진 고대(高臺)인데 그 석재 중 몇개는 측면 길이가 20미터를 넘고,1무게는 거의 2,000톤이나 되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고고학에서는 누가, 왜, 어떻게, 발베크의 단을 지었는지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 교수인 아그레스트는 단의 잔재가 거대한 착륙장일 수도 있다고생각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그대로를 과감히 인정한다면 옛날 이집트인들은 갑자기 그리고 과도기 없이 환상적인 문명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된다. 거대한 도시들과 장대한 사원들, 강렬한 표현력을 가진 겨대한 조각상들과 멋진 상(像)들이 도열해 있는화려한 거리들, 완벽한 하수 장치들, 암벽에 깎아 만든 호화 무덤들, 압도적인 크기의 피라미드들.... 이러한 많은 놀라운 것들이 마치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난 듯우리를 놀라게 한다. 한 나라에서 입증될 만한 어떤 태고사도 없이 갑자기 그런 업적이 가능하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 아닐까?
고대 이집트에는 나일강의 삼각주와 강변 좌우의 좁다란 지대에만 비옥한 경작지 가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커다란 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의 인구가 5천만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이것은 기원전 3000년의 전세계 인구인 2천만 명에 명백히 위배되는 숫자다)
그런 환상적인 추측에서 몇 백만 명이 많고 적고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아야만 했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공사장 인부들과 석공들, 기술자들, 많은 선원들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노예들과 잘 무장된군대, 부유한 수많은 제사장 계급과 무수한 상인들, 농부들, 관리들, 그리고 -끝으로 중한 것은 - 왕족과 귀족들이 살았다. 나일강 삼각주에서 경작한 빈약한 농작물로 과연 그들 모두를 먹여살릴 수 있었을까?
이집트인은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 네모난 석재를 미끄럼 도르래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나무 도르래로! 하지만 그 당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긴 어려웠을 것 같다. 왜냐하면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으로 꼭 필요했고 그 줄기와 잎은 말라버린 대지에 그늘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수입한 걸까?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하려면 상당히 큰 선박이 필요하며, 선박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이로까지 나무를 운송해야 했을 것이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의 이집트인들은 말과 마차를 자유로이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가능한 운송 방법은 있을 수 없다. 기원전 1600년 제17왕조 때에야 비로소 말과 마차가 이집트에 도입되었다.
피라미드 건축가들의 기술에 관해서는 수수께끼만 있고 진정한 해답은 없다.....
1864년에 발간된 찰스 피아지 스미스의 <위대한 피라미드에서의 우리의 상속>이라는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에서 우리는 피라미드와 우리의 지구사이에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많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몇 가지 사실이 남아 있다 알려진 바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철저히 태양을 숭배했다. 그들의 태양신 라는 바르크(세 개의 돛대가 달린 범선)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고대 왕국의 피라미드 원문은 신들과 왕의 승천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물론 그들의 승천은 이 범선 덕택에 자유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신들과 이집트 왕들 또한 비행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
케오프스 피라미드의 높이에 10억을 곱하면 대략 지구와 태양사이의 거리(149,504000) 와 일치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정말 우연 때문일까? 피라미드를 관통하는자오선이 대륙과 대양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눈다는 것 역시 우연일까? 피라미드의 밑면 둘레를 '2×높이'로 나누면 그 유명한 루돌프의 숫자인 파이(3.1416)가 되는 것 역시 우연일까? 지구의 중량에 대한 계산법과 건축물에 놓여진 암석바닥이 세심하고도 정확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일까?........
피라미드는 대륙과 대양만 둘로 똑같이 나누는 게 아니라 아울러 대륙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리고 커다란 피라미드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북극까지의거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 이 사실을 믿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겠지만 - 피라미드의 건축부지는 지구의 공모양과 대륙과 대양의 분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어떤 존재에 의해 정해진 것이 분명하다 - 우리는 여기서 피리 레이스 제독의 지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1,000년 된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이집트 카이로를 중심으로 남극과 북극이그려져 있다)
이 모든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그들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어떤 기계와 기술을 사용하여 암석층을 수평으로 다듬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건축가는 갱도를 파나갔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갱도 안에불을 밝혔을까? 이곳에서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석 묘지에서도 횃불이나 그 어떤 유사한 조명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럽혀진 천장이나 벽도 없고, 그런 흔적이 제거됐을지도 모를 최소한의 증거조차 없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채석장에서 거대한 석재를 잘라냈을까? 날렵한 모서리와 매끄러운 옆면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운반하고 어떻게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포개놓았을까?
.....260만 개의 거대한 석재가 채석장에서 잘라지고 연마되어 운반되고, 건축부지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맞추어졌다.......인부들이 부지런해서 날마다 10개의 12톤짜리 석재를 쌓아 터무니없는 도급일을 달성했다면 그들은 - 신화같은 이론을 따른다면 - 약 250,000일(684년)에 걸쳐 대충 250만 개의 석재를 그 멋진 피라미드에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그 모든 것이 범상치 않은 파라오의 기분에 따른 부산물로 지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자신의 영감으로 시작한 건축물의 완성을 결코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말 끔찍하게 아름답고, 한없이 슬픈 이야기다
이 이론이 진지하지만 우스꽝스럽가는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피라미드가 어느 왕의 무덤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믿을 만큼 순진무구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수학적이고 천문학적인 피라미드의 표식들을 여전히 순수한 우연이라고 여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대 피라미드를 볼 수 있는것은 영감의 제시자이자 건축주였던 파라오 쿠푸의 덕이라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왜 그럴까? 실제로 대피라미드에는 단 하나의 비문도 없다. 상형문자가 매우 빈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전능한 건축주인 쿠푸의 영웅적 행위를 입증해 줄만한 상형문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피라미드가 어느한 사람의 일생동안에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자!! 이제부터 피라미드에 대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봅시다.
우선 먼저 초기 피라미드와 종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초기피라미드와 종류들
왕조 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이집트인들은 진흙 벽돌로 상부가 편편하고 옆이 경사지게 만든 무덤 '마스타파'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피라미드의 기원이 되는 마스터파는 직사각형의 묘로서 수갱을 통해 봉분과 연결된 지하의 현실(玄室, 관을 들여 놓는 방) 위에다 봉토를 한 다음 외장벽돌 등으로 표면을 단장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외장 벽돌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배열하여 마스터파를 장식했다. 또 묘의 지상부 또는 지하부에는 몇 개의 방을 만들고 그 중의 한 방에는 죽은 사람의 미라를 안치하고 다른 방에는 사자를 위한 물건들을 넣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큰 마스터파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높이가 5m에 달하는 것도 등장했다.
제1왕조(기원전 3000년경)의 파라오는 가까운 사막의 절벽에서 절개한 석회석을 묘혈(墓穴) 바닥에 깔았고 제2왕조의 파라오는 묘실 내부 전면을 석회석으로 두르기도 하였다. 이후 이집트인들은 석회석을 대규모로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제 3왕조의 죠세르이다. 죠세르는 이름이 신성하다 찬란하다, 혹은 장엄하다라는 의미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형문자는 홀을 쥔 우람한 팔과 세 개의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죠세르에는 떼어놓다 혹은 분리하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신들의 세계와 속세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임호텝이라는 재상을 시켜서 피라미드를 건축하게 한다. 임호텝 역시 후세에 신으로 추앙받는다.
우선 피라미드의 역사를 짚기전에 잠시 이집트인의 생각을 알아보자. 성경은 우주가 무질서에서 질서로 조직화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이집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은 계속 혼란해지는데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막기위해서 마아트를 실천해야 했다. 마아트는 이집트 문자로 타조의 깃털로 표현된다. 인간이 죽은 후 오시리스의 앞에서 심판받는 순간 양팔저울의 한쪽에 마아트가 놓이게 되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심장이 놓이게 된다. 의인으로 인정받아 불멸의 생을 얻으려면 그 심장이 마아트의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 마아트는 우주를 다스리는 영원한 법칙이다. 마아트는 인류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였고 인류가 사라진 뒤에서 영원히 있을 것이다. 마아트는 정의이고, 진리이고 질서이고 배의 방향을 받아주는 키이고 모든 것을 재는 잣대이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는 마아트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집트인들의 무덤에는 그들의 관대함을 느끼게 하는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든지 단 하룻밤도 굶게 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일단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파라오와 이집트의 피라밋을 바라보야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도대체 저 옛날 누가 지었을까라는 것이다.
이미 알다시피 이집트의 피라밋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마스타바
사실 시체를 보관하는데 그들이 미라를 택한 것은 우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원래부터 건조한 사막지대인 이집트는 그냥 시체를 묻기만 해도 미라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그 시체는 동물에 의해서 훼손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관을 만들기 시작했고 무덤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한가지 문제는 시체가 미라가 되지 않고 썩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체를 적절하게 보관하는 기술이 발전했으며 가장 초기의 무덤인 마스터바가 만들어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마스타바라고 불리는 무덤에서 시작한다. 마스타바는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고 직사각형의 건물에 관을 들여 놓은 방의 위에 봉토를 하고 외장을 잘 꾸며 놓은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의 존재를 굳게 믿어 시신과 수장품들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장치를 갖춘 오랜 존속할 무덤을 짓는데 최선을 하했다,
사후의 생명이 육체의 보존에 의존한다고 믿어 부활의 날에 죽은자의 영혼 즉,"카" 가 다시 한 번 그의 몸속으로 들어 갈 것이기 때문에 몸은 거기에 온전하게 있어서 그 때를 맞아야 한다고 믿었다. 건조한 사막의 기후는 시체보존을 도와주었고 방부처리된 시체는 미이라로 견고한 무덤내부에 보존되었으며, 도굴로부터 안전하게 소장품들이 보관되도록 하기위한 각종 장치가 고안되었다.
미이라의 영원한 삶의 공간은 마스터바 , 피라미드, 석굴분묘,의 세 형태가 있는데, 마스터바는 계단 모양의 측면들과, 평평한 정상부를 가진 소규모의 직사각형 구조물로 수직통로를 통해 외부와 연결되는 지하묘실 위에 세워졌다. 마스터바의 단순한 입체형태는 이집트인의 영원함과, 안전에 대한 갈망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데, 그 이면에는 존재와 삶을 영원히 이어가려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마스터바란 말의 뜻은 평탄한 탁상이라는 뜻으로 평면이 장방형이고, 남북으로 길게 되어 있고 외벽은 경사지게 되어있다.(분묘형식)고대 이집트인은 현세의 주택은 임시적인 것이고 사후의 주거는 영원한 주거로 여겼고 마스터바에서 좀더 상징적으로 발전된 피라미드는 계단형 피라미드, 굴절 피라미드, 그다음 일반적인common 피라미드로 형태가 변천해간다.
계단형 피라미드
위와 같은 형태의 마스터바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것도 역시 도굴을 당하여서 손상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좀더 도굴하기 어려운 형태로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3 왕조의 죠세르시대에 임호텝이 만든 계단형 피라미드였다.
위의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일단 피라밋을 만들고 그 근처에 부속건물을 지었다. 위의 피라밋은 모두 6층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4층으로 짓고 다음에 2층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피라미드는 제세르(Zoser: 조세르라고 도 발음) 왕의 계단 피라미드다. 이 피라미드는 우선 마스타바 묘가 만들어지고, 그 후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가 그 위에 만들어졌다.
사카라는 왕가의 묘소로서, 예로부터 마스타바 무덤 이라불리는 묘가 조성되어 왔다. 고왕국 시대 제3 왕조의 초대 왕 제세르는 파라오에 걸맞는 묘소의 건설을 재상 임호테프에게 명했다.임호테프는 우선 거대한 마스타바 무덤을 구축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때까지처럼 햇볕에 말린 흙벽돌이 아니라 석회암을 건재로 사용한 일이다. 그 후 마스타바는 4단으로 샇아올려지고 마지막에는6단,140m×128m, 높이60m의 거대한 석조 건조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계단 피라미드는 단독 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동서277m, 남북545m 의 주벽으로 둘러싸고, 그 부지내에는 계단피라미드외,세드 제전이나 신전 등을 배치하고 있다. 주벽의 남동쪽 모퉁이에 있는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천장이 있는 긴 열주랑 이 뻗어 있다. 벽 위쪽에 나 있는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면 갑자기 맑은 빛이 가득한 중정 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우뚝 솟아 있는 피라미드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졌다.
어둠과 빛의대비를 계산해서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배열을 "피라미드 콤플렉스"라 한다.
높이 60미터 총 100만 톤의 석회암을 쌓아만든 제세르 피라미드는6층 계단으로 구성되어 ,수메르의 지구라트나 멕시코의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사카라 지구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들 중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구조는 건설도중 여러 번의 변경을 했다. 처음에는 20만 톤의 돌을 써서 4층의 조그만 피라미드로 만들고, 나중에 추가로 80만 톤의 돌을 더 사용해서 지금 형태의 6층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점차 피라미드 제작 기술 노하우가 쌓였고, 노동력도 더욱 확보하게 된 증거라고 해석하기도한다.
계단 피라미드에 사용된 돌의 크기는 1~2톤 정도의 무게로 5~6명이 돌 한 개를 충분히들수 있는 것들 이었다. 근처에 그보다 더 큰 돌이 발견되지 않은걸로 보아 건설은 기자의 피라미드 보다 쉽게 만들 수 있었던걸로 보인다.
임호테프
임호테프는 제세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를 설계.시행한 재상이다. 훗날 임호테프는 후세에 신으로 숭배되었다.
왜 임호테프는 종래의 마스터바 무덤을 쌓아올린 것일까? 파라오는 호르스 신의 화신으로서 군림하는 현인신 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왕족이나 귀족들과 똑같은 매장 시설에 매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파라오는 다른 귀족들과 격차를 두게 된 것이 분명한지도 모른다. 아마도 죽은 파라오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을 구현화 시킨 것인지도........
신으로 까지 숭상된 임호테프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이었다고도 전해지는데,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지구라트 즉 성탑 이라 불리는 건조물이 있고, 임호테프는 지구라트에서 힌트를 얻어 이집트 땅에 계단 피라미드를 세운 것이지도 모른다.
굴절 피라미드
이 시기가 끝나고 바로 4왕조의 시조 스네푸르 즉 쿠푸왕의 아버지가 건설한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스네푸르(Snefru)는 살아생전에 3기의 피라미드(혹은 4기, 어느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음)를 건설하였으며 제일 먼저 다슈르(Dahshur) 남쪽에 건설했으며 그는 계단식이 아니라 단순한 삼각형의 면을 갖도록 시도했다. 그는 처음에는 54도의 각도를 가지도록 시도했으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여 11도를 삭감하여 43도가 되게 만들어야 했다.
다슈르(Dahshur) 의 굴절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경 제4왕조 의 첫 번째 왕인 스네페루(Sneferu)왕 의 피라미드중의 하나이다. 이 피라미드는 사카라 남쪽 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붉은 피라미드옆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2개 (혹은 3개)의 피라미드를 더 지었다. 메이둠에서 피라미드를 짓은 후 다시 Red pyramid (아래 사진)라고 불리는 피라미드를 더 지었다.
굴절 피라미드는 높이는105m 길이는183.5m 이다.경사각은 아래위가 다르다.
위쪽 경사각은 43°22' , 아래쪽경사각은 53°27' 으로 이루어져있다.이처럼 피라미드가 굴절 된이유를 학계에서는,위에서 말한 것 외에메이둠 피라미드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건설도중 서둘러 각도를 변경한 것이라든지. 건설도중 왕이 죽었다든지 하는설이 돌기도 한다.
굴절 피라미드에는 입구와 통로, 방이 2개씩 만들어져 있다. 북쪽의 입구는 지하의 방과 연결되어 있고, 서쪽의 입구는 기단부의 방과 연결되어 있다. 북쪽 입구로부터의 통로는 북극성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성진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굴절 피라미드에 대한 정보는 기타 다른 피라미드에 비해 알려진게 별로 없다.
다슈르의 굴절 피라미드가 왜 굴절 돼어 있는지는 확실하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메이둠 피라미드
메이둠 피라미드는 3왕조의 마지막 왕인 후니(Huni)에 의해 지어졌다는 학설과,제4왕조의 첫 번째왕인 스네페루(Sneferu)에 의해 지어졌다는 학설이 있다.
외형은 높이 93.5m 길이 147m , 경사각은 51°51'분의 가자 대피라미드와 같은 모양의 사각뿔 피라미드였으나.외장재가 다 무너져내리고, 원래 이 피라미드를 지을 때 내부에 만들었던 경사도가 높은7층의 피라미드 형태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함.
메이둠 피라미드의 외장이 붕괴된이유를 일부 학자들은 몰타르(Mortal)를, 이집트의 다른 피라미드에서 쓴 것 보다 불안정한걸 썼다고도한다.
붉은 피라미드
다슈르(Dahshur) 의 붉은 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경 제4왕조 의 첫 번째 왕인 스네페루(Sneferu)왕 의 피라미드중의 하나이다. 이 피라미드는 사카라 남쪽 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굴절 피라미드옆에 위치하고 있다.
돌 속에 함유된 어떤물질이 산화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붉은색 외장재를 썼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지금은 표면을 덮은 석회암은 전부 벗겨지고 붉은 석재가 노출돼어 있는상태이다.
붉은 피라미드는 높이104m 길이220m 이고. 경사각은 43°22' 이다.돌 속에 함유된 어떤물질이 산화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붉은색 외장재를 썼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지금은 표면을 덮은 석회암은 전부 벗겨지고 붉은 석재가 노출돼어 있는상태이다.붉은 피라미드는 높이104m 길이220m 이고. 경사각은 43°22' 이다.
붉은 피라미드 안에는 방이 세 개가 있다.세 방은 모두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대회랑과 같은 초엽 구조로 되어 있고,같은 공법이 적용되었다.
다른점 이라면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회랑은 26°경사각이고, 붉은 피라미드는 수평으로 제작됐다는 것이다.
붉은 피라미드에서 왕의 시체와 관은 발견돼지 않았
다.
기자 피라미드
스네프루왕의 다음의 왕인 쿠프는 피라밋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대 피라밋을 건설하였다. 그의 대 피라미드는 바닥 면적이 230.5 x 230.5m 높이는 146.60m 경사각은 50도 20분 25초이며 그의 통치기간 23년중 20년이 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쿠프의 아들인 케프렌도 같은 장소에 아버지와 비슷한 규모의 피라밋을 만들었다.
그의 피라밋이 아버지의 것보다 높은 지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높이가 143.5m로 약간 낮지만 실제로 보기엔 더 높아보인다. 이 피라미드엔 아직도 피라미드을 만들고 나서 발라두었던 외피가 남아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케프렌의 아들 미케리노스 (혹은 '멘카우레' 라고 불림)역시 거의 같은 장소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가장 규모가 작고 졸속으로 만들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보통 이 세 개의 피라밋을 기자의 피라미드라고 부르며 이중에서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대 피라미드로 부른다.
피라미드는 이 후에도 계속건설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쇠퇴하게 된다. 이제 피라미드를 어떻게 건설했는지를 알아보자.
다음은 피라미드에 관한 고대기록을 살펴봅시다.
■주류학계의 피라미드 건축법■
1. 기초 만들기
피라미드의 완성후 위로부터의 막대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암반위에세워졌다. 건설지의 가로, 세로로 수로를 파고,수면의 높이에 맞춰 지표의 요철을 깍는다. 마지막에 도랑을 메워 암반을 수평으로 한다.
2. 방위를 잰다
파라미드의 네 측면은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올바른 북쪽 위치 측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설지에는 원형의 벽이 만들어지고, 밤이 되면 관측자가 그 중앙에 서서 주극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별을 선정한다. 그 별이 벽 위에 나타난 위치와 진 위치에 표를 하고, 정확한 남북 방위를 측정한다.
3. 현실은 만든다
현실이나 통로의 벽에는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돌쌓기와 병행하여 만들어졌다. 현실 천장의 합각머리 모양의 지붕은 현실에 모래를 채우고, 그 모래를 다시 빼내는 방법으로 꼭 겹쳐지게 하였다.
4. 결사로를 만들고 돌을 쌓아올린다
크고 무거운 석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든 경사로가 이용되었다. (경사로의 형태에 대해서는 나선형 등 몇몇 설이 있다) 기울기가 항상 일정해지도록, 돌을 높이 쌓아올라감에 따라 경사로도 길게 만들었다.
5.캡 스톤을 끼운다.
6. 화장석을 연마하여 완성
화장석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깎아서 연마해 간다. 이렇게 하여 번쩍이는 듯한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주류학계의 주장
쿠푸왕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풍부한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임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달한 이유의 하나로 나일강의 범람을 제시한다.
쿠푸왕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를을 건설했는가하는점이다. 우선피라미드를 만든 공구를 알아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같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이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은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 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한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석회암은 석화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공구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석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석회석은 석회질이 물밑에 쌓여서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이 쉬운 재료이다. 그러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주 간단한 연장으로도 능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석회석을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었다.
한 예로, 시카고 대학의 레너 교수는 50명도 채 안되는 인원과3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0.75톤에서3톤에 달하는1백86개의 돌로 8층짜리 피라미드를 고대의 연장만으로 건설했다. 즉. 고대인들이 충분히 피라미드를 고대의 공구만으로도 건설할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 보다 단단한건 사실이지만,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어,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나기도한다.
대형 돌들을 채석장에서 절단하는 방법도 논란거리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땐에 나무 쇄기를 박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쐐기의 부피 증가로 간단하게 절단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몇 백 톤이나 되는 대형 오벨리스크가 절취되지 않은 미완성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곳에 쐐기를 사용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피라미드 건설에 있어서 가장 큰 논란거리는 거대한 돌을 어떠한 방법으로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옮겼느냐이다. 소형 피라미드인 경우는 이집트에서 지금도 쓰이고 있는 용두레(샤두프)를 사용하여 커다란 돌을 임의로 옮길 수 있다고 추측한다. 반면에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방법은 적어도 30여 가지 가설이 있다. 그러나 근래에 내려진 결론은 너무나 간단하여 고고학자 당사자들조차 선뜻 믿지 않으려 할 정도이다. 그 방법이란 비탈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주로 벽돌로 만들어지는 경사로로 썰매에 얹혀진 돌덩어리를 상부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비탈길의 길이와 기저 부분의 폭은 늘어나는데 비탈길이 주저앉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사각은 항상 거의 10°를 유지하였다.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으로, 피라미드 주위를 돌아가면서 경사로를 만드는 이론과 단일 경사로 혹은 4면에서 같은 크기의 경사로를 만드는 방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전자의 방안은 밑변의 길이가 150m 이상일 경우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현재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단 하나의 경사로로 피라미드가 높아질수록 길고 좁아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래 쿠프의 대피라미드에 대한 조사에서 경사로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또 경사로의 길이도 정확히 합치하여 이제까지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물론 피라미드의 규모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을 선별적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제 쿠프의 대피라미드를 말할 때마다 항상 경탄의 대상이 되는 건축 기술에 대하여 알아보자.
제일 먼저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식만으로는 결코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증거로 왕의 현실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왕의 방으로 알려진 현실은 높이 5.8m, 길이 10.5m, 폭 5.25m로 바닥에는 열다섯 장의 두터운 화강석판이 깔려 있고 벽은 100여 개의 가공된 화강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벽에 사용된 화강석은 70톤 이상의 무게로 추정되며 또한 천장은 50톤의 무게의 화강석 아홉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엄청난 하중은 5층의 공간으로 분산되어 있으며 대피라미드의 경이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오히려 이와는 상반되는 의견을 표명한다. 기계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압축력이 다소 적은 공간에 이와 같은 높고 단단한 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엄청난 힘이 지붕에 가해졌다고 말한다. 즉 하중 분산용 공간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는 뜻이다. 현실의 수직벽은 강한 힘이 가해져 여러 군데 파손이 생겼고 서까래 윗부분은 마찰에 의하여 약간 북쪽으로 경사져 있다. 중간 부분과 아래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갈라진 틈은 경사가 질 때 일어나는 현상과 동일하다. 이 원인은 압력이나 부실공사 때문으로, 파라오의 현실이 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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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쿠프 왕 현실 상부의 균열 부분 사진 쿠프 왕 현실의 단면도쿠프 왕 현실의 균열은 화강석의 특질을 간파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결국 현실 위에 5개의 공간을 만들고서야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호되었다.
피라미드만 60년 이상 연구한 프랑스의 로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쿠프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이집트인들이 화강석 재료의 특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화강석이 석회석보다 단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강석은 육각의 얇은 판 모양의 운모, 육각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 모양의 장석 등 세 가지 성분으로 되어 있지만, 세 성분이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는 화강석이 설탕과 같이 조각으로 부셔지기도 한다. 쿠프의 건축가들은 이미 여러 번 피라미드의 현실로 채택된 궁륭 시스템을 왕의 현실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의 천장으로 화강석 평판을 설치되자마자 건축가들은 화강석의 피로 현상을 알아냈다. 현재 보이고 있는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 사실에 쿠프의 건축가들은 놀랐고 그래서 현실 위에 두 번째, 세 번째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도 안정이 되지 않자 계속하여 네 번째, 다섯 번째 공간을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두 개의 경사면을 갖는 궁류을 설치하고서야 파라오의 현실이 외부의 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이다. 화강석 재료로 된 왕의 현실이 실패하였다는 것은 그 후에 한번도 쿠프의현실과 같은 구조가 다시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쿠프의 피라미드와 거의 같은 규모인 아들 케프렌의 피라미드조차 아버지와 같은 현실 구조를 채택하지 않았다. 쿠프의 피라미드는 다른 피라미들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의 내부가 다른 피라미드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와 특별히 다른 것은 없지만 특별히 규모가 크므로 유명할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다른 피라미드와 다른 것도 당시의 건축가가 아직도 피라미드 평면에 대한 확실성을 갖지 못하고 건설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쿠프의 피라미드는 건설하는 도중에 두 번씩이나 평면을 변경하였다. 처음에는 현실을 지하의 바위를 뚫고 만들려고 하였는데 쿠프는 현실을 더욱 크게 만들 생각을 갖고 지하 현실을 포기했다. 곧바로 회랑과 왕비의 방이라 불리는 두 번째 현실을 만들었지만 이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자 다시 상부에 세 번째 현실을 만들었다. 그렇게 연속하여 피라미드 내부를 변경하다보니 당연히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로에 교수는 쿠프의 건축가들은 당시 배워야 할 것이 많았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수많은 기술적 문제들을 일일이 해결하여야만 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제 대피라미드를 다른 측면에서 검토해보자. 가장 호사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하면서 천문한 및 기하학에서 매우 진보된 지식을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견지에서만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임의의 방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쿠프의 대피라미드에서 보면 방위에 있어 평균 오차가 3'6"에 지나지 않았다. 케프렌의 경우는 5', 미케리노스의 경우는 14'의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오차는 놀랄만큼 정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엄밀한 정밀도를 요구하는 건축물 중에는 천문대가 있다. 오늘날 대표격인 천문대로는 파리 천문대와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는데 이 천문대들은 자오선 방향에 대해 각각 6'과 9'씩 틀어져 있다. 더욱이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몇 천 년 전부터 태양, 달, 별, 행성들의 운동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자료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시리우스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달력을 만들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나일강의 홍수가 시작되는 날과 큰개자리 시리우스 별이 정해진 날짜의 동트기 직전과 직후에 나타나는 것을 정확히 탐지하여 일 년이 365.25일이 되는 것도 알았다. 한 달이 30일로 된 12개월에 여분으로 5일을 더해 1년으로 하였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체적과 표면적을 계산하고 수직을 세우는 것인데 이집트인들이 그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대피라미드를 살펴보면 이집트인들이 원주율=3.1416과 황금비율=1.618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피라미드의 내부에서도 의식적으로 기하학 지식을 적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근거는 현실을 들 수 있다. 현실은 바닥 면적이 20 X 10 꾸데이며 높이는 11.172꾸데이다. 이를 계산해 보면 서쪽과 동쪽 긴 단면의 대각선은 15꾸데가 된다.(그림 1). 이럴 경우 직각삼각형의 밑변이 10꾸데이고 높이는 루트5가 된다. 이 15꾸데의 대각선은 <그림 1>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긴 밑변과 긴 변 대각선이 3:4:5인 '신성한 직각삼각형'을 얻는다. 두 번째도 역시 피라미드의 현실에 관한 것으로 현실의 위치가 밑변의 절반이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측량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주어진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면적이 2배인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쿠프 파라오의 현실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과학수준이 매우 초보적인 단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취한 업적은 그야말로 놀랄만하다. 우선 그들은 고도의 수학이 아니라 간단한 산수, 그것도 더하기와 빼기밖에 할 수 없었다. 곱하기와 나누기는 더하기와 빼기를 갖가지로 활용하여 얻었다. 이집트인이 계산할 때는 언제나 분수가 장애가 되었다. 그것은 분자가 1이 되는 분수, 즉 단위분수밖에 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간단하게 13/16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은 1/2+1/4+1/10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피라미드들을 건설한 고대 이집트인들이지만 그들이 숙지한 기하학은 경험적인 수치 단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피라미드의 경사각을 예로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집트에 건설된 거의 모든 피라미드들의 경사각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측정된 다양한 경사각을 삼각함수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1)tg.α=h/b=17/18, 7/6, 6/5, 5/4, 14/11, 4/3, 7/5, 3/2, 14/9, 2/12)tg.β=h/d=2/3, 14/17, 6/7, 8/9, 9/10, 1/1 만일 피라미드 건축에 높은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적용됐다면 다양한 경사각이 아니라 일률적인 값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피라미드에 얽힌 수많은 의문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피라미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조사에 의한 결론은 간단하다. 비전문가들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은 풀어야 할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면 가장 적절한 경험상의 지식을 적용하거나 변형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건설한 피라미드가 평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계산법과 초보적인 분수 표시법이 그들의 수학적 수준이었음에도 피라미드를 건축하였다는 것은 정말로 경이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라미드에 대한 신비 중에서 가장 큰 의문점은 쿠프 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을 원시 연장만 갖고 있던 신석기 시대에 왜 건설하였느냐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건설된 목적에 대하여 수많은 가설과 제안, 추측이 있었지만 피라미드 건설의 근본 목적인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통념적인 가설이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미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피라미드가 파라오를 매장하기 위한 무덤의 용도만으로 건설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은 피라미드의 건설 요인을 당시의 사회상과 연결하면 생각보다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겠지만 헤로도투스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십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동원되지는 않았다. 페트리 경은 케프렌 왕의 피라미드 서쪽에서 작업 인부들의 숙소터를 찾아냈는데 수용인원은 4,5천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산했다. 이것은 당시의 노동력을 감안하면 매우 타당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
피라미드 건설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편견 가운데 하나는 수많은 노예-주로 이스렐인-들을 채찍으로 혹사시키는 폭군 파라오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는 엄청나게 커다란 돌을 잘 미끄러지게 하기 위해 나이 많은 여자나 어린 아이들의 피를 발랐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심하게 왜곡된 것이다. 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과 같이 채찍으로 노예를 위협하며 피라미드를 건설하지 않았다는 것을 수많은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다. 당장 이집트에서는 노예 제도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며, 노예라는 말은 가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할 뿐이었다. 영화에서 처럼 혹독한 조건 속에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면 대번에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며, 결코 1천 년이나 되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장구한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건설에 투입하였던 에너지와 정열을 순수한 의미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실로 엄처난 작업이었다..
쿠푸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17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높이까지 건조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높이는146.5m 이므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조의 노동력은 농민이었다. 왕은 나일강의 증수로 경지가 물에 잠기는 시기에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이다. 농한기에 식량과 의복, 일을 지급한다는 ,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 정책인 것이다.
피라미드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자대지의 단단한 암반 위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5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조는 파라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즉위하면 곳바로 착공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선 건설지가 선정되고, 설계도나 축소 모형도 작성되었다. 장소가 결정되면 우선 기초 다지기부터 시작하고 수로를 사용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하고, 별을 관찰하여 정확한 방위를 측정하였다, 피라미드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국내에서 농민들이 징용되고, 마침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일 강이 증수하여 경지가 물에 잠기게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였다. 노동자들에게는 주거와 의복, 식사가 제공되고,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에 실시되는 국가 사업이었다. 또 나일 강 수위의 상승은 석재를 운반하기에 적합하였다. 피라미드의 건재는 주로 석회암이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스완산 화강암도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기자 부근의 투라에서 좋은 질의 것이 채굴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약 270만개로 어림되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돌을 파 내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동제의 끌과쇄기로 돌을 파내고, 현장에 운반되고 나서 모양이 다듬어 졌을 것이다. 석재의 운반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가 사용되었다.
돌을 어떻게 해서 쌓아 올렸는가는 피라미드의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데, "람프"라는경사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유력한 주장이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진 람프에는 썰매가 잘 미끄러지도록 석고를뿌리거나. 역레일을 만드는등의 고안이 되어있었다.
썰매에 실린 석재는 기울기10분의1(10m 에1m 오르는 기울기) 의 경사로로 운반되고, 위치를 결정할 때에는 산륜 이 사용되었다. 기울기는 항상 일정하게 되도록,높이가 높아지면 경사로의 길이도 연장된다. 내부의 구조도 돌을 쌓아올리면서 만들어 나갔다. 정상에 캡 스톤을 끼우면,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쌓아올린 석재를 발판으로 하면서 단을 깎고 표면을 연마하여 마침내 피라미드를 완성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각종 자료에 의해 밝혀진 피라미드 건설 요인과 작업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했다. 이 범람기는 최소한 3~4개월 가량 지속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거의 모든 농부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경작이 가능한 나일강 연변이 모두 홍수로 잠겨 버렸으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파라오는 범람기 동안 이집트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바로 여기에서 피라미드 건설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즉 건장한 인부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짓게 하고 그 보답으로 곡식을 지급하는 것이다. 보수는 현물로 직접 지급했으며, 인부들이 가족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인부들은 보수를 받는 대신 노동력을 제공하는데, 주요 작업 내용은 돌을 캐거나 배에 돌을 싣거나 예정된 위치로 운반하는 것 등이었다. 조각을 하거나 측량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일은 전문적인 기술이므로 전문가들에 의해 대대로 상속되었다. 피라미드 공사장의 인부들이 보수를 제때에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업을 했다는 기록도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범람기가 끝나 물이 모두 빠지면 나일강 연변은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퇴적물에 의하여 더없이 비옥한 땅이 된다. 이때는 피라미드 공사가 중지되며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나 홍수 때문에 잠겼던 경작지에서 물이 빠지고 나면, 농민들은 예전의 자기 땅을 되찾는 것이 매우 골치 아픈 일이었다. 여기에서 측량 기술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일단 씨를 뿌리고 나면 땅이 비옥한 데다가 기후가지 적당하므로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항상 풍년을 이루었다. 특별히 홍수가 적게 들어 경작지가 줄어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급 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곡식을 수확한 후 다음 해까지 저장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막의 세찬 바람 때문에 창고는 대단히 견고하게 지어지지 않으면 제대로 곡식을 저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피라미드가 곡식 창고의 역할을 했다는 설도 대두되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이 매우 적절한 통치 기법 중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죽으면 그의 피라미드는 곧바로 공사를 마감하고 선왕을 안장한다. 수많은 피라미드들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시급히 마감을 한 이유이다. 새로운 파라오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우선 나일강변 중에서도 범람기 동안에 침수되지 않은 높은 곳에 피라미드를 세울 대지를 선정한다. 그리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종사할 인부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인부들을 모집할 때는 많은 농부들이 지원하여 경쟁률이 아주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군대의 막사 같은 곳에서 묵으며 양식과 옷을 지급받는다. 피라미드 건설의 노동자로 뽑히는 것은 매우 큰 혜택이자 영예였다.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이 피라미드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물질적인 보수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 왕조에서는 파라오만이 미라가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라오는 평소에 아끼던 신하나 친족들에게도 피라미드 주위에 그들의 묘지를 건설하도록 은총을 베풀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정신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파라오에게나 제공될 수 있는 장례 집기를 보장받으며, 미라가 될 수 있고, 영원한 음식물이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농부들은 미라가 되지도 못하고 또 좋은 무덤에 매장되지도 못한다. 단지 모래를 판 구덩이에 장신구 몇 점과 함께 묻힐 뿐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지하의 신이 된 파라오에 의하여 지하에서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피라미드는 9/10는 기아는 막는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나머지 1/10은 종교적인 열정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회와 정신 모두가 결합된 결정품의 소산이라는 뜻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당시의 사회 생활상과 통치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시스템이다. 즉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일강의 범람기 동안에는 농부들을 기아에서 해방시켜 굶주림에 따른 국민들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반면에 파라오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묘지라는 개념보다도 이집트인들을 위한 대형 근로 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국력을 쏟을 수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이집트에서 전 국가적인 에너지의 집합체로 만든 작품이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는 대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이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시 연장을 가지고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파라오를 위하여 일한다는 데 보람과 긍지를 느껴 어느 노동자는 "누구 한 사람도 지치는 일도, 목 마르는 일도 없었다. 작업이 끝나면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마음껏 먹고 마셨다"라고 기술하였다. 피라미드 안에 적힌 낙서에 '장사 작업대' 혹은 '끈기 작업대' 등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하였다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증빙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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