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의 고대문명 수메르 문명
신과 인간이 함께 살았을 때
인류문명의 제 단계
샤니다르 동굴
그림설명: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인 소를 끌고가는 마리인"BC 3000 프레스코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수메르와 그 주변 산악지대가 선사시대부터 문명의 발원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라크 북방티그리스강 상류지역 자그로스 산맥 북쪽에 '샤니다르 Shanidar 동굴'이 있었다. 오늘날 민족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족의 피난처가 되고 있는 이 동굴은 지난 10만 년 이상 인간의 거주 흔적이 시기적으로 잘 보존된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이다.
1957년 콜럼비아대학의 랠프 솔레키 Ralph L. Solecki 교수는 이 동굴을 조사하여 9인분의 초기 인류 유골을 발견했다( 그 중 4인은 동굴 내부에서 떨어진 낙석으로 죽은 곳으로 판명되었다.). 발굴을 계속한 결과 1만 년 전에서 멀리 10만 년~ 13만 년 전에 이르는 초기 인류의 주거 흔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연대에 따른 계통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놀랍게도 인류문화는 차차 진보해 왔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퇴보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곧 어떤 표준시대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세대들은 전보다 덜 발전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서기전 27000~11000년 사이에 이 퇴보가 심했고, 게다가 거주자까지 점차 사라진 듯 마지막 시기에는 거의 무인지경이 되었던 것이다.(수메르의 전승에는 당시 빙하기의 막바지로 극심한 추위와 가뭄으로 인간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사나워지고 세상이 어지러웠기에 곧바로 대홍수가 닥쳐서 징벌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돌연 서기전 11000년 무렵 이해할 수 없는 진보된 수준의 문명생활이 시작되었던 증거가 드러났던 것이다. 그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교사가 이곳에 와서 새로운 문화생활을 가르쳐준 것처럼 보였다.
고고인류학자들은 터키 중부 차탈휘유크와 유고슬라비아의 레페스키비르와 팔레스타인의 예리코 등지에 실로 9천년 전 이전에 형성되었던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수메르 문명보다 앞섰던 문명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은 실제로 샤니다르 동굴이나 그 주변 '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시작되었던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지역적으로 국한된 점조직 같은 문명 유적으로, 그것들이 더 발전, 확장되었던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농업혁명
인류 최초의 조직적인 농업활동은 중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Fertile Crescent 지대' 주변의 산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연구가들이 정교한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이용하여 밝혀 낸 결과. 보리와 야생 '엠메르 Emmer' 종의 밀이 인류가 최초로 재배한 곡물이었으며. 서서히 농업 기술을 터득하여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기르며 진보해 왔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잘못된 것 같다. 놀랍게도 샤니다르 동굴에서 채취한 아주 초기의 곡물은 이미 종으로서 고도로 특화(特化)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고도의 유전공학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근동에서는 보리와 밀과 함께 기장(millet), 라이(rye)밀, 스펠트밀(spelt)밀 같은 주식이며. 섬유를 얻고 열매로 기름을 짜는 아마(亞麻)와 갖가지 식용 과일이 열리는 관목과 과수가 빠른 속도로 펴져서 재배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이것들은 유럽에 알려지기 실로 몇천 년 전부터 중근동에서 재배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놀랍고 돌연한 농업의 진보는 마치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에 의하여 중근동 지방이 일종의 식물 유전자 실험장이 되었던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 야생포도의 재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북부 산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놀랄 것도 없이<창세기>실린 노아가 홍수후 첫 포도 재배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인류 문명의 첫발생지였던 것이다.
사과, 배, 올리브, 무화과, 아몬드, 호도 등 과일나무도 중동이 원산지로 그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창세기>에서 '에덴'을 과수원으로 표현한 것은 결코 과장도 비유도 아닌 것이다.
가축사육은 어떠했는가?
인간이 처음으로 사귀어 가축으로 만든 동물은 개였다. 이것은 서기전 9500년 무렵의 일로, 가장 오래된 개의 뼈가 이란, 이라크 및 이스라엘에서 발굴되었다. 양과 염소는 개와 거의 동시에 사육되었으며, 서기전 9000년 무렵의 양의 유골이 샤니다르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그 다음 돼지와 뿔 달린 가축이 길들여졌다.
석기와 토기의 발명과 갑작스런 문명의 출현
이처럼 몇만 년 전에서 서기전 11000년 무렵 문명이 중근동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시기까지를 학자들은 구석기 지대 Paleolithic Age라고 보고 있다(유럽에서는 이보다 약2천 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돌로 된 동굴집에서 살며 돌연장으로 씨를 뿌리며 동시에 가축사육자가 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바위에 새겨진 고글을 쓴 '신'의 보습도 대충 이때(서기전10000년경)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중석기 시대 Mesolithic Age가 대충 3천5백 년쯤 지속되었다가 서기전 7500년 무렵 신석기 시대 Neolithic Age가 도래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토기를 빚어 만들이 시작했다. 서기전 5000년 무렵 중동에서는 상당히 수준이 높고 세련되고 환상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는 토기 제품이 출현했다.
그러나 서기전 4500년 무렵 문화가 일시적으로 퇴보한 듯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러났다. 토기 제품은 전보다 단순한 것으로 변모되었고 석기가 다시금 우위를 차지했다. 토기 제작이 위축되고 제작지가 버려진 것이 유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곧 서기전 4000년 무렵 예측할 수도 없이 돌연히 중동지방에서 빛나는 문명이 출현했다. 앗시리아 학자 헨리 프랭크포트Henry Frankfort에 의하면 한마디로 '놀라운 것' 이며, 앙드레 빠로는 '돌연히 타오른 불길'이라고 표현하고, 신화학자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은 '놀라운 돌발성…이 좁은 수메르의 진흙바닥에 세계의 고등문명의 씨앗이 발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수메르 문명
돌연히 일어난 문명
18세기 말까지 오랫동안 서양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자기네 무명의 기원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옛 그리스의 학자들은 더 앞선 문명이었던 옛 이집트에 원정했을 때 서기전 196년에 제작된 '오제타 석비' 같은 고대 유물을 발굴, 연구하여 이 옛 문명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은 실로 그리스 문명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서기전32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 문명의 시조는 옛 이집트였던가? 그리스 학자들은 이집트 문명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리스어는 원래 이집트가 아닌 중동에서 생겨나 그리스 문명보다 앞섰던 '미노아 Minda '(트레타) 문명과 미케네 Micenae' 문명을 거쳐 그리스 본토로 도입되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서기전 1300년경 도리아인의 그리스 본토 침입과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침입했던 시기가 거의 동시임에 착안한 학자들은 셈족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서로 닮은 것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메사추세츠 주 브랜다이스대학의 고고역사학자 사이러스 고든 Cyres H. Gordon 교수는 <망각된 기록: 미노아어의 증거 Forgotten Scripts : Evidence for the Minoan Language>에서 셈어로 밝혀진 초기 미노아어[선형(線型)A/Linear A 문자)를 해명하여 이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이로써 히브리어와 미노아문명이 서로 상당히 공통된 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 예로크레타가 미노아어로 'ke-re-ta'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ke-re-et'('성벽의 도시')이며 셈족의 가나안의 '케레트'왕 이야기와 일치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로마자와 현대 서양문자의 근원인 그리스 알파벳도 근동에서 온 것이었다. 옛그리스인들은 '카드모스 Kadmds' ('옛날의'란뜻)라는 페니키아왕이 알파벳을 가지고 왔으며(카드모스 는 전설적인 테베시의 건설자였다.). 원래 그 수효나 순서가 히부리 문자와 같았지만 서기전 5세기경 케오스의 '시모니데스' Simonides of Keos시대에 26자로 증가했다. <자료75>를 보면 옜 가나안(히브리)문자로부터 라틴문자까지 변천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스가 서기전 1000년 무렵 중동과 접촉을 시작하여 서기전331년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할 때까지 페르시아에 관한 많은 기록이 축적되었다.
옛 그리스문헌에 나타난 페르시아 왕들, 예컨대 '키루스 Cyrus'. '다리우스 Darius'. '크세르크세스 Xerxes'등은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원래 서기전 2000년대 말기에 카스피해 근처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아리안족의 한 파임이 확인되었다. 그 무리들은 각기 서쪽 소아시아로, 동남쪽으로는 성서에서 말하는 '메데아'와 '파르시'로,동쪽으로는 인도로 이주했다. 그들이 낯선 이민족이었음에도 북구하고 이상하게도《구약성서》에서는 그들을 동족의 일원인 양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에즈라서>에 의하면, 키루스왕은 그 자신을 '야훼에 의해서 기름부어진 자'로 생각했고 야훼를 '청산의 신'으로 믿었으며, 예루살렘의 신전을 재건 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와 그밖에 페르시아인들은 스스로 '아케메니드 Achae-menids'라고 불렀는데, 그 원어는 '하캄 Hacham-Anish' 로 아리안어가 아닌 완전한 셈어(히브리어)로 '현명한 인간' 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유대아로 들어온 페르시아의 세력과 함께 그 신앙인 미트라 Mithra 신앙 -세계는 최종적으로 광명과 암흑의 투쟁으로 끝날 것이라는 종말관을 가진 신앙 - 의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의 의 종말론(Eschatology)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사상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
히브리인의 주인인 야훼와 아케메이드인들이 불렀던 '현명한 주님'은 여러 점에서 유사하며, 이중에서 후자는 날개 달린 구체로 표시되어 있다(자료76). 이것은 다리우스왕의 문장(紋章)에 나타난 그림이다. 옛 페르지아 제국의 문자와, 종교와 역사적 근원은 그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 성과
1686년 페르시아의 옛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찾았던 엥겔베프트 캄퍼 Engelbert Kampfer는 왕들의 기념비와 문장에 나타난 이 지역 일대의 공통문자로 확인되었다. 1843년 프랑스의폴 에밀 보타 Paul E. Botta 는 처음으로 이라크 근처에 있는 '호르사바드 Khorsabad'를 선정하여 조직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곳은 원래 '두르 새루 킨 Dur Sharru Kin'으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이 곳은 앗시리아와 사르곤 2세의 도읍지로, 이말 자체는 셈어로 '정의로운 왕의 성곽도시' 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 앗시리아왕의 수도에는 중앙에 웅장한 왕궁이 있었고, 연장1마일이 넘는 부조 조각 장식이 붙어 있는 기다란 성벽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도시 전체와 왕궁 건물을 호령하듯 높은 지구라트가 세워져 있었다(자료77). 이것이 바로 신들을 위한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 이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의 모든 것이 단 5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3천년 전 하나의 제국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왕궁, 성벽과 성문, 신전, 일반 주택 등 하나의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1850년대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Austen H. Layard가 호르사바드에서 10마일쯤 내려와 티그리스 강변의 '쿠윤지크 Kuyunjik'를 발견한 결과 이 곳이 성서에 나온 '니네베 Nineveh'임을 확인했다. 《구약성서》〈열왕기 하〉18:13에, "헤제키아왕 14년에 앗시리아왕 세나테리브가 유다야에 침입했으나, 야훼의 천사가 이들을 단 하룻밤 동안 전멸시키고 세나케리브는 되돌아가 니네베에 돌아갔다." 는 기록이 있듯이 니네베는 앗시리아의 마지막 세 왕 시절의 수도였다. 레이어드에 의해서 또 다시 박굴된 곳은 <창세기>에 나오는 '님르드 Nimrud'로 앗시리아의 군사본부였던 곳이다.
독일의 발터 안드레 Walter Andrae 발굴 팀은 1903년~1914년 사이에 앗시리아의 신앙의 본거지였던 '아수르 Ashur를 발굴했다. 이와 동시에 로베르트 콜데바이 Robert Koldewey 팀은 바빌론을 발굴하여 광대한 왕궁, 신전, 그리고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 정원의 유적과 지구라트를 찾아 냈다. 이로써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앗시리아라는 두 대제국의 역사를 밝혀 줄 문헌들이 속속 발굴되고 해독 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라는 두 제국은 서기전 1900년 무렵 일어나기 시작하여 약1천 5백 년간 전쟁과 공존을 거듭하며 흥망성쇠의 역사를 누려왔다. 결국 서기전 612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아수르와 니네베가 함락되어 앗시리아는 멸망했고, 또 바빌론도 성서의 예언대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의 공격으로 서기전539 년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이 두 제국은 시종 전투적인 라이벌이었지만 문화나 물질 문명은 별 다른 차이가 없었고 또 앗시리아의 주신은 ' 아수르'( '천리안을 가진신')이고 바빌론의 주신은 '마르둑'(청정한 언덕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두 신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자료78).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들은 이들 옛 제국의 페허에서 약탈한 장식품-예컨대 의식용 성문(城門), 날개 달린 황소, 조각(bas-reliefs), 전차, 가구, 보석, 인물상 등 풍부한 유물을 자랑하고 잇지만 진정한 보물은 역사적 기록 문서들이다. 그것은 실로 몇만 장이 넘는 설형문자판들 - 우주 창생 전승, 서사시, 왕들의 역사, 신전 기록문서, 상업계약서, 혼인 및 이홍서류, 천문기록, 점성술 예언서, 수학공식집, 지리학 서적, 문법과 어휘 교과서, 신들의 존칭, 능력, 및 의무를 기록한 문서 등등 많은 기록들이다.
이 두 제국의 문화와 종교적 공통성을 이어 주는 언어는 '아카드 Akkad'어였다. 이것은 셈어로서,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및 가나안어의 선구였다. 하지만 바빌론-앗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이 언어를 고안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그들이 남긴 많은 문서에는 전의 어떤 원어(原語) 것이라고 주(註)가 많은 문서 말미에 붙어 있었다.
아카드어, 아카드 제국
그렇다면 누가 이 쐐기 문자를 최초로 고안했고 그처럼 풍부하고 자세한 어휘와 문법을 발전시켰던 것인가?
<창세기>10장 27절을 보자.
"쿠쉬(키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느데 …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 그의 나라는 세나르(수메르) 지방인 바벨과 에렉(우르크)과 '아카드'에서 시작되었다.…그(님로드)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나와서 넓은 거리가 잇는 니네베를 세우고, 니네베와 '할라흐' 사이에 '레센'이라는 큰 성을 세웠다."(레센은 아직 미발굴인 곳으로, 대규모 왕실 군마 사육장이 있었던 곳 같다.)
여기에 나오는 아카드가 두 제국에 앞서 있었던 왕도였던가? 발굴된 문서에는 실제로 그 옛적에 '샤루킨 Sarrukin'('의로운 통치자')이라는 이름의 왕이 세웠던 '아카드' 왕국이 있었음을 나타냈다. 또 그는 자신의 제국이 " '엔릴'신의 은총으로 아랫 바다(페르시아만)에서 윗 바다(지중해?)까지 달하는 대제국을 세웠으며, 아카드의 부둣가에 먼 나라들에서 온 배를 정박하게 했다."고 호언하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경악했다. 실로 5천 년 전인 기원전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 놀라운 대제국이 있었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두르샤르킨(사르곤 2세)으로부터 아카드의 사르곤(1세)왕까지 실로 2천년의 도약이 일어났다. 또 계속 발굴된 유적에도 바빌론/앗시리아보다 아주 오래 전에 빛나는 문예와 과학과 정치와 상업활동을 가졌던 문명이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결국 바빌론/앗시리아는 이 아카드 문명이라는 큰 줄기의 가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아카드의 사르곤왕의 업적과 족보를 기록한 비명(碑銘)이 발견되자 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수께끼는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 비명에는 사르곤왕의 명칭이 '아카드의 왕, 키쉬의 왕' 으로 나타났는데, 그가 왕이 되기 전 '키쉬의 통차자'의 자문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키쉬의 왕국이라는 것이 아카드에 앞서 존재했던가?
앞서 <창세기>의 구절을 보자. "쿠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는데…."학자들은 아카드의 사르곤이 이 님로드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키쉬를 '쿠쉬'로 해석하기만 하면 사르곤이 말했듯 키쉬가 님로드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사르곤 비명의 나머지 부분을 문면 그대로 믿기로 했다. "그는 우루크를 공격하여 그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우르'의 주민과 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 그는 '라가쉬'에서 바닷가까지 모든 지역을 굴복시켰다."
성서의 '에렉'은 이 우루크와 같은 곳이었던가? 오늘날 '와르카 Warka' 라는 이라크 남부 지역을 발굴한 결과 사실 그대로 임이 드러났다. 또 우르는 바로<창세기>에 나온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실로 발굴로 드러난 사실과 성서 기록이 서로 일치했을 뿐 아니라 서기전 3000년대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번듯한 국가와 도시와 문명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남은 의문은 문명이 얼마만큼 먼 고대로 소급되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수메르어, 수메르 문명
연구가 축적된 결과 학자들은 이윽고 성서와 히브리어이며 아카드어로 된 바빌론/앗시리아의 지명과 인명에도 각기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예컨대 '아브라함'은 '열국(列國)의 선조', '샤루킨' 은 '정의의 통치자'라는 뜻처럼].그런데 사르곤 이전 시대의 이름들은 전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사르곤 자신이 자문관으로 봉사했던 왕의 이름인 '우르자바바 Urzababa'라던가, 에렉의 통치자였던 '루갈자게시 Lugalzagesi' 같은 것이 그 예였다. 이에 1853년 헨리 로린슨경 Sir Henry Rawlinson은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셈어도 인도-유럽어도 아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언어 그룹이나 민족에 속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들 미지의 언어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학자들은 아카드어 비명들을 다시금 검토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설형문자인 아카드어 문장은 음절(音節)문자로서, 각 문자 부호는 각기 하나의 완전한 음절(ab, ba, bat 따위)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음절이 아니면서도 '신', '도시','나라','생명', '고상한' 따위의 뜻을 가진 부호들이 광범위하게 쓰여져 있었다. 이 의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이 부호들이 그림문자로 사용됐던 , 더 앞선 문자의 흔적인 것 같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카드어 이전에 이집트의 그림문자를 닮은 문자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더욱 이른 시대에 문자 형태가 아닌 어떤 형태의 언어가 있었음이 명백해졌다. 학자들은 아카드어 문서에 많은 차용어가 있음에 착안했다[이것은 가령 영어의 weekend(주말)를 프랑스인들이 그대로 쓰는 것 같은 말이다.]. 특히 과학기술 용어에 이런 차용어가 많았으며, '신'과 '천계(天界)'에 관한 종교기록에도 그러했다. 또 A. H. 레이어드 경이 발굴했던 아슈르바니팔 왕 도서관에서 실로 2만 5천 장이 넘는 점토판 문서가 나왔는데, 그 중 많은 것에 '옛날의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예컨대 23장으로 된 한 묶음의 점토판 문서에는, "23번째 판, 수메르어에서 그대로 복사함"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또 다른 문서에는 아슈르바니팔 왕 자신이 기술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서기(書記)들의 신께서 그의 재능의 지식의 선물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나는 기록하는 비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나는 슈메르어 Shumerian로 된 난해한 문서를 읽을 수 있다. 나는 홍수 이전에 있었던, 돌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구절, 곧 '슈메르어'로 된 홍수 이전 기록을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신비를 두껍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69년 줄 오페르 Jules Oppert는 프랑스 고전학(古錢學) 및 고고학 협의회에서 전(前) 아카드 시기에 어떤 언어와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미지의 민족과 그들의 땅을 '수메르인' 및 '수메르'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실로 '슈메르'대신 '수메르'로 잘못 쓴 것을 제외하면 오페르가 옳았던 것이다. "바벨과 아카드와 에렉이 '시나르 Shin'ar'땅에 있었다."는 기록에 있는 시나르가 곧 수메르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자마자 연구가 급진전되었다. 아카드 기록에 인용된 '옛날 텍스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가 됐으며, 기다란 단어들이 이어진 점토판 문서들은 다름아니라 아카드/수메르어 사전임이 판명되었고, 이로써 바빌론/앗시리아에서 최초로 필기에 쓰여진 언어인 수메르어를 배우게 되었다.
또 이 사전의 도움으로 발굴된 방대한 점토판 서적들을 해독할 길이 트였다. 또 수메르는 반쯤 굳어진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씌어졌는데, 이것은 문명의 환경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곧 옛 이집트에서는 강변에 무성한 파피루스 줄기가. 중국에서는 대나무 조각(竹簡) 이나 비단이 필기 재료로 쓰여졌듯이 중동에서는 주변에 흔한 찰흙판이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고 거기에 기록하기 편하게 둥글거나 네모진 그림글자에서 쐐기형 문자로 간편하게 정형화되었던 것이다.(자료79)
신들의 전권시대
수메르어의 해독은 중동의 기나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였다 그런 이유로 북부가 아닌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속속 개시되었다. 1877년 프랑스 발굴단은 처음으로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서 '텔로흐 Telloh'('언덕')하고 불리우는 '라가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곳은 아카드의 사르곤왕이 정복했다고 호언한 도시였는데, 발굴된 물량이 너무나 엄청나서 1933년까지도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다.
이 곳은 사르곤왕의 칭호와 똑같은 수메르어 칭호 '엔시 EN. SI(정의 의 통치자)'가 다스렸던 도시로, 이 왕조는 실로 서기전 2900년전 부터 시작되어 650년간 43인의 엔시들이 단절 없이 통치했다고 한다. 각 엔시의 이름, 족보, 재위 기간이 가지런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또한 곡물의 순조로운 성장과 풍작을 신에게 기원하며 농토에 제대로 물을 대어 주어 곡식이 자라서 익게끔 기원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조직적인 농업과 완비된 관개시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 곡물 창고의 감시자'인 한 여신에게 봉헌된 컵에는, 곡물의 양이 재어지고 창고에 저장되고 또 거래되었음을 기록한 그림문자 표시판이 새겨져 있다(자료80). 또 ' 에안나툼'이라는 '엔시'는 수메르의 통치자들이 신의 승인이 있어야만 권좌에 오를 수 있었음을 점토벽돌에 새겨놓았다. 또한 그가 다른 도시를 정복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약5천년 전인 서기전 3000년경에 이미 여러 도시가 존재하고 번성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여기에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치자의 정치적 정통성과 전쟁과 국방 및 외교에는 신들의 승인이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인 통차자들은 신들의 집사나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다른 도시나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다른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점토판 문서를 연구한 결과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의 수메르의 멸망기인 서기전200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곧 수메르 시대는 한마디로 '신들'(외계인들)의 전권시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또한 앞서 말한,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견되었던 고도로 특화된 보리와 밀의 종자를 보급하여 인류의 농업혁명을 촉진시켰던 '신들' 이었던 것 같아. 수메르 전승에서는 니누르타가 바로 그런 농업의 신이었다고 한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수메르 문명은 외계인 '신'들에 의하여 지도된 문명이었던 것이다.
수수께끼의 고대문명 수메르 문명 2
수메르의 역사와 문화
로켓의 신의 땅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강 사이의 좁고 기다란 평야지대는 옛 그리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두 강사이의 땅')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시리아 북부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을 합쳐서 그렇게 부른다.
엄밀히 말해 이 지역최초의 문명은 서기전 5000년~4300년경 번영했던 시리아 북부의 옛 도시 '텔 할라프'에서 일어난 비수메르계의 '할라프 Halaf 기' 문화라고 보는 것이 옳다.
사진설명: 우르 발굴현장
이곳은 1927년~1929년 사이 독일의 오펜하임 Oppenheim 이 발굴했던 신석기 초기 시대의 도시 유적으로, 보리재배, 가축사육과
함께 구리 제품과 칠무늬 토기를 만들었던 문화기였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 이후문명은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기선을 잡았다.
늦어도 서기전 3500년~3000년 사이에 분명히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수메르인은 원래 이 지역 원주민이 아니라 이르게는 서기전 4000년 무렵 중앙아시아의 어디에선가 이 곳으로 이주, 정착했던 것이 분명하다.
'수메르'라는 호칭은 원래 북부의 아카드인이 부르던 두 강 사이 하류지역 '낮은 땅' 을 뜻하는 이름이었는데, 수메르인은 스스로 '키 엔 기르 KI. EN. GIR'의 주민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GIR는 로켓( 및 '게 crab ') 이라는 뜻이다. 곧' 로켓의 신의땅'이란 뜻이다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들이 자기네 땅에서 신들이 로켓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또 '게'는 황도 12궁의 하나인 거해궁(巨蟹宮)을 뜻하는 '기르탑 GIR. TAB'에서 나온 말이다.].
발굴의 역사
가장 남쪽에 있는 '에리두 Eridu'는 전승에 의하면 대홍수 이전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곳인데. 발굴자들이 깊이 파들어 가자 과학과 지식의 신 엔키를 모시는 신전 터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은 단 하나가 아니라 층위에 따라 서기전2500년, 2800년, 3000년 등 연대순으로 여러 번 재 건축됐던 것이 드러났다. 고고학에서는 이것을 '에리두 기(期)'라고 부른다.
1919년 영국의 홀 H.R. Hall과 푸에 레오너드 울리 경 Sir C. Leonard Woolley은 서남부 사막지대에 있는, 우르 서북쪽4마일 거리의 '엘 우바이드' 라는 촌락에서 고대 유적을 발굴했다. 이 곳이 '엘우바이드'라는 촌락에서 고대 유적을 발굴했다. 이 곳이 '엘 우바이드 El-Ubaid 기'의 표준 유적지로 알려진 곳인데. 서기전5000년~35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측되며 에리두 기에 이어 두 번째 오래된 문화기로 알려졌다.
이 곳에서 최초의 접토 벽돌, 모자익 장식, 벽돌 장식 묘지, 기하학적 무늬의 채색 토기와 구리 거울, 전투용 구리 도끼, 옷감, 가옥의 흔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물인 신전유적이 드러났다. 또한 1922년~1937년 울리 경이 발굴을 지휘했던 바그다그 동남방 3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우르' 에서는 수많은 호화로운 보석류, 무기, 전차, 군기(軍旗), 금, 은, 청동제 투구들이 왕묘에서 발견되고 직조공장터와 법원 기록이며 거대한 지구라트 유적이 드러났다.
이 곳이야 말로 수메르 역사의 왕도(王都)로 흥망성쇠가 거듭되었던 곳이다
1913년~ 1939년 사이 독일 오리엔트학회에서 15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발굴했던 '우르크'는 역사를 서기전 4000년대로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게 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곳은 영웅 길가메쉬의 고향이었으며, 여신 아난나가 수호신으로 모셔진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도가니에서 구운 최초의 채색 토기와 최초의 석회암 포장도로 흔적이
발굴되었다.
또 최고신 아누를 모셨던 백(白)과 적(赤) 신전이며, 매우 중요한 최초의 문자판(원문자판)과 원통 인장이 나타났다.
이 문자판은 늦어도 서기전 3100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모두 570장에 달한다(자료82). 또 발굴된 원통인장도 기적처럼 놀라운 고고학적 보물로 찬사를 받았다. 이 우루크의 유적을 표준 유적으로 하는 '우루크 기'는 정통학계에서 가장 오래 기록된 역사시대로 인정되고 있다.
그 다음은 '젬데트 나스르Djemdet Nasr 기'(우루크 근처의 유적 발굴지 이름)로, 엄밀하게 말해 대략 서기전 2800년~2700년경 본격적인 '도시 혁명'이 일어났던 도시국가 시대였다. 이 때의 도시들인 니푸르에서는 3만 장의 각종 문서가 발견되었고 '수루파크 Shuruppak'에서는 첫 학교건물이 발굴이 발굴되었다
이 시대에 도시들은 저마다 수호신을 모시고 통치자들은 그 대리자로서 '엔시' 또는 '루갈 LU.GAL'('큰 어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후기 바빌론/앗시리아의 왕들에 비하면 아주 겸손하고 부드러운 칭호였다.
본격적인 도시 문명의 시작
서기전 3000년 ~2340년 무렵의 도시국가 시대는 후대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다른 점은 각 도시의 주권자가 신으로, 이를테면 신권(神權) 사회주의 사회였다고 부를 수 있다.
당시 대표적 도시로서 라가쉬 Lagash, 움마Umma, 우르 , 우루크, 니푸루, 슈루파크, 에리두 등이 있었고, 각 도시에는 필수적으로 먼저 인공적으로 구축된 고지대에 신전이 세워지고 그 주위의 성역에 창고, 작업장, 서기들의 방이, 다시 그 주변에 주택이 밀집하는 등 철저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 도시에는 다양한 종류의 귀금속 세공인, 대장장이, 피혁공, 목수들이며 심지어 각기 먼 바다.
담수, 은하, 늪에서 일하는 어부 등 여러 전문 어부에 이르기까지 세분되었고, 원거리 통상에 종사하는 상인('우르의 상인'은 뒤의 페니키아의 상인만큼 활동범위가 넓었다.)들과 여러 직급의 서기와 관리가 있어서 신전 직할지가 분배되었으며 신전, 성벽, 운하 같은 공공건물의 보수 팩임을 맡았다.
또 심지어 가축 사육에도 전문분야가 있어서 각기 소, 당나귀, 양, 염소, 돼지를 기르는 전문직으로 세분되었다니 수메르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사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도시국가들 중 두드러진 우르의 제1왕조시대는 거시전 2500년~2340년 사이 다섯 왕이 통치한 뒤키쉬 출신인 아카드의 사르곤 왕이 수메르의 '루갈자게시'를무찌르고 '수메르 아카드 왕국'을 세워 서기전 220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나 동북쪽 자그로스의 산악민족인 '구티움'족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그 약 90년 후인 서기전 2110년경 우루크의 통치가 '우투헤갈'이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 신하 우르남무'가 우르 제3왕조를 세웠다. 이때 유서 깊은 라가쉬에서 영주(英主) 구데아 Gudea'가 출현하여 수메르 민족을 부흥시킨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닌기르수 Ningirsu'(니누르타)를 수호신으로 모셔 그 독실한 믿음으로 유명한 통치자였다(자료 83). 이 우르 제3왕조 시대는 전 시대에 이어 세계적인 통상무역이 융성해지고 정치적으로 관료조직에 의한 통치가 행해졌으며,
또 가장 오래된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 Code of Urnammu>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도 다섯 왕이 다스린 뒤 앞서 말했듯 신들 사이의 갈등과 전쟁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수메르 민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수메르어는 제3왕조 이후부터 사어(死語)가 되어 갔지만, 이후에도 문화어, 학술어로 중세의 라틴어 같은 구실을 했으며, 대역(對驛)된 어휘표(사전)가 중동 각지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수메르의 농업과 직조기술
수메르는 원래 기본적으로 농업경제사회였다. 예나 지금이나 강우가 아주 적고 뜨거운 이 지역에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 시스템이 발전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그들의 일상식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푸짐하고 넉넉했던 것 같다.
주식은 밀과 보리로, 이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발효시키든가 그대로 빵, 죽, 케익, 비스킷을 만드는 방법이 문서에 적혀 있다. 소, 양, 염소 등 가축에게서 짜낸 우유로 음료와 요리와 요구르트, 버터, 크림과 치즈를 만들었으며, 각종 육류, 특히 돼지고기가 선호되었다.
한 텍스트에 의하면, 신전에 보리와 엠메르 밀 빵, 꿀과 크림, 대추야자, 과자, 맥주, 포도주, 우유가 바쳐졌으며, 특히 구운 쇠고기는 최고의 봉헌 음식이었다고 한다. 살구, 버찌 같은 과일이며, 양파, 콩 오리, 양배추와 상추는 식탁의 필수품이었다.
특히 맥주는 현대인도 놀랄 정도로 흔했는데, 건조한 지대에서 맥주 원료인 보리농사가 적합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종류도 흑맥주, 갈색 맥주, 쓴 맥주, 단 맥주, 흰 맥주, 강한 매주 등 16종이나 되었고 거리에 비어 홀이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관개농업 발전은 곧 정비된 행정관료조직을 낳았으며 이것이 정치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농업과 함께 어업도 발전했다. 페르시아만과 두 강의 지류와 수많은 늪지와 호수들이 자연의 양어장 구실을 했으므로 앞서 말했듯이 어부의 직종이 세분될 정도로 어류가 풍부하고 다양했던 것이다.
농업과 더불어 천연섬유 작물을 원료로 하는 직조 기술도 발달했다. 그것은 실로 그 4천 년 후인 1760년대의 영국의 산업혁명을 무색하게 하는 업적이었다. 이미 서기전 3800년경에 아마와 양털로 만든 정교한 의류 제품들이 나타났으며, 그로써 시민들은 상당한 사치를 누렸던 것이다.
그 당시의 의류제품들이 어찌나 우수했던지 수메르 멸망 1천년이 지난 뒤 씌어진《구약성서》<여호수아 서> 7장 21절에는 약탈을 자행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를 무릅쓰고 유대의 병사들이 '시나르'(수메르)로 들어가 옷감을 입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이와 유사한 우수한 직조기술이 옛 이집트에도 있었다. 1950년대에 하바드 대학의 월터 에머리 Walter B. Emery 교수의 발굴팀은 사카라의 왕묘에서 오늘날 섬유공장에서 짜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우수하고 가는 아마제 직물천을 발굴했다고 한다.)
수메르에서는 원유와 아스팔트를 이용한 화학공업도 발달하여 각종 염료와 의약품을 생산해 냈지만, 오늘날 같은 '오염'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신들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무절제한 공업 생산을 절제했던 것일까?
발달한 공업기술과 무역
전쟁은 과학과 기술 발정을 비약시키는 돌파구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수메르인들에게는 신전 건축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것 같다. 천상의 그들의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신전 건축에 필요한 불에 구운 벽돌과 점토제 일용품을 만들려면 우선 크고 강한 도가니가 필요하고 그 연료로 원유와 역청이 필요하게 된다. 신전 건축은 그래서 요업과 건축기술과 기하학과 인력동원을 위한 효율적인 행정조직 체계까지 발전시켰다.
또한 신전을 장식할 금, 은 ,동, 청금석(靑金石)-아프가니스탄에서만 산출된다.- 같은 귀금속을 조달하려면 멀리 해외로 무역활동을 해야 했다. 더욱이 금속재련 기술은 용광로를 발명하게 하고 금속의 주조법과 경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5천 년 전인 서기전 3000년경에 이런 기술과 무역이 번창했던 것이다.
금속가공 기술은 고대에 있어서 놀라운 기술 문명의 한 단면이었다. 도가니가 만들어져 강한 열과 합께 온도를 임의로 조절하고 불순물 없는 정련된 금속을 채취하 수 있었다. 이미 8천 년전에 동북부 자그로스와 타우루스 산지에서 자연 금이나 은, 구리 원광을 녹이고 두드려 원하는 금속을 얻었다.
그러나 과학사가 포브스 R. J. Forbes의 《고대의 금속 기술》에 의하면, 고대 중동에서 자연동의 공급은 어느 틈에가 급속히 사라지고 대신 함량이 낮은 동광석을 채취해야 했으며 이를 채굴하고 분쇄, 정련하는 기술이 도가니 같은 용광로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급속히 진전되었다고 한다. 구리에 주석을 섞어 더욱 주조하기 쉽고 단단하며 가소성이 있는 청동을 만들었다. 수메르인들은 대충 구리와 주석을 6 : 1 ~ 9 : 1의 비율로 섞어 우수한 청동제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석이었다. 주석은 정련하기 힘들고 또 산출지가 제한 된 금속으로, 중동에서 가까운 곳이라곤 중부 유럽의 다뉴브강 유역이나 체코의 삭소니아 등지였지만 고대에 이미 산출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버마나 말레이지아 같은 먼 동쪽에서 구했던 것도 아니었다. 전세계에서 주석의 원광인 석석(錫石)이 노천 채굴되었던 곳은 영국의 콘월 반도와 남미 안데스 산지의 볼리비아뿐인데, 이 중에서 전자는 이미 고대에 소진되었고 후자는 '주석이 산'이란 별칭이 붙은 수도 라파즈 동남방에 있는 산지가 그 산출지이다. 또 티티카카호 동부연안에 깔린 원광이 있었다.
Z. 시친에 의하면, 이 볼리비아의 '주석의 산'이 수메르 문서에 묘사된 주석 산출지와 유사하며, 또 티티카카호 주변에 옛 수메르의 닌하르사그 여신과 비슷한 조각상이 발견되었고, 남미에서는 고대에 청동기 문명의 흔적이 전연 없었다는 등 많은 증거와 연구가들의 서적을 인용하여 놀랍게도 옛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먼 거리에서 주석 원광을 채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앞서말한 옛 지도에 관한 의문이라든가 기원전 6세기경 체니키아인들이 신대륙과 브라질을 탐험했다는 주장(사이러스 H. 고든 박사가 주장했다.) 도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길지 모른다. 또 마야 문명 유적에 나타난 메부리코를 가진 셈족을 닮은 인물상이 수수께끼라든지 멀리 잉카족의 문화영웅 '비라코차' 전승의 수수께끼도 풀릴지 모른다.
이처럼 먼 거리를 주파하는 해양무역은 필시 아눈나키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또 이렇게 정련하고 구리와 혼합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술적 노하우를 축적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청동제 천문시계의 제작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카드어로 번역된 선박 기술서에는 크기, 행선지와 사용 목적에 따라 105종이나 되는 수메르의 선박의 종류가 나타났으며, 또 선박 제조와 운용에 관한 69종의 용어가 적혀 있다. 필시 그들은 금속, 석재 목재와 그밖에 국내에 조달할 수 없는 물품을 원양 항해용 선박으로 해외에서 운반했을 것이다.
교육과 문예
벌써 5천 년 전 본격적인 교육이 보급되었던 듯 슈루파크의 지하에서 학교 건물 유적이 발굴되었다. 교육은 우선 왕실과 신전 운영 기록을 담당하는 서기를 양성하는 목적으로 시행되었고, 나아가 다양한 상거래를 기록하고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교육받은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학교는 '에두바 E. DUBA', 곧 '점토판의 집' 이라고 물렀는데, 처음에는 서기 양성을 목표로 했었고 또 이들은 신전 서기, 공공기관 서기, 상업 서기, 학교 서기 등 어부만큼이나 직종이 세분되었으며 교사로서도 활약했다. 학교에서는 읽기, 쓰기는 물론 수학, 신학, 지리학, 동 식물학과 음악과 미술을 가르치고 신화나 서사시, 신을 찬양하는 찬가와 애가(哀歌)도 배웠으며, 고등교육으로 고전작품을 복사하고 연구하는 과정도 있었다.
교원은 '움미아 ummia '라고 하는 전문 교사가 있었는데, 수메르어나 그림을 담당하는 움미아뿐 아니라 회초리를 담당하는 움미아도 있어서 학생들은 심하게 매를 맞았던 것 같이, S. N.크레이머가 소개한 <학교의 나날>에서는 , 한 학생이 학교에서 수시로 매를 맞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교장 선생에게 좀 더 많은 급료를 주세요. 그러면 나에게 도 친절하게 해 줄 거예요'라고 부탁하고 있다.
아버지는 즉시 교장 선생을 초대하여 향유를 뿌리고 새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며 급료를 올려 주었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 이 학생은 교장 선생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그 장래를 축복 받았다고 한다.
교육과 함께 민중 예술도 번창했다. 신전에서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환영을 받았다. 하프와 리라 같은 악기도 흔했으며, 서기전 2000년 무렵 이미 오늘날 똑같은 7음계의 악보가 발명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서양 음악의 기원이 그리스가 아니라 수메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한다.
개혁과 사회복지
수메르는 우리가 생각하듯 결코 유토피아적 사회는 아니었다. 하찮은 어부나 서기의 직업조차 세분될 정도로 산업활동이 왕성했던 만큼 부패와 비리도 심했던 모양이다. 절대권을 쥔 신일지라도 인간의 일에 간섭하여 자질구레한 행정법령으로 백성을 묶어 둘 수는 없었다.
벌써 서기전 2600년 무렵 엔시(왕) '우르카가나 Uriahina'는 자유, 평등, 정의에 대한 개념을 명문화시켰다. 곧 그는 사업장의 월권과 부당한 착취, 공권력 남용, 독과점 집단의 가격 조작 등에 대한 개혁령을 선포했다. 예컨대 당나귀 한 마리나 집 한 채 값도 임의로 정할 수 없으며, 강자가 약자를 억압해서는 안되고 또 빈민과 과부와 고아는 물론 이혼당한 여자도 법의 보호를 받도록 조치했다. 그렇다면 수메르 문명이 얼마나 오래 되었기에 그런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수메르의 법령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상업사회의 병폐인 경제 범죄에 관한 규정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식량 가격, 량, 선박, 가축의 임차료, 부동산, 재산 상속, 노사관계와 세금에 대한 이의 신청 절차가 나타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범죄와 처벌보다는 예방과 복지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법정에서 판사는 심판자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배심원 같은 역할을 했으며, 보통3~4인의 판사가 심리를 밭았는데, 그 중 1인은 왕실 법원 판사이고 나머지는 36인 위원회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천상의 신이 지상에 정의를 보장하기 위하여 왕을 임명했다는 믿음으로 법률을 정의의 개념에서 이해했다. 곧 왕일지라도 그가 얼마나 많은 땅을 정복했는가 또는 얼마나 부유한가로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가 정의로운가 아닌가 하는 윤리적 기준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히브리 성서에서 야훼가 임명한 판관(judge)이 왕 이전에 백성을 다스렸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수메르와 히브리 민족에게 똑같이 이 판관은 '정의의 양치기'로 불려졌다. 다윗왕이 바로 그런 양치기 출신이었다.
퇴보하는 문명
신화를 날조한다
수메르가 서기전 2000년 무렵 멸망하고 마르둑이 바빌론에서 신위에 오르자, 처음으로 서둘러 행했던 일은 신년 경축의식 Akitu 이었다. 이것은 우주의 생성 신화와 아눈나키('하늘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로 조작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는 의도에서 베풀어진 새해 첫날의 축하연이었다.
<창조의 서사시 Epic of Creation>는 그런 이유로 마르둑이 날조했던 가장 큰 신화였다. 이것은 그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 곧 '옛날 옛적 저 높은 곳에… When high…' 라는 뜻인 <에누마 엘리쉬 Enuma Elish>로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이것은 원래 수메르의 우주 창생신화(cosmogony)로, 태양계 행성들의 생겨남, 제12행성 '니비루'의 출현, 이것과 '제5행성'의 충돌과 폭발로 인한 소행성대의 출현과 지구와 달의 탄생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길고 방대한 비유적인 서사시라고 Z. 시친은
주장하고 잇다.
우선 태양계의 맹주인 12번째 행성 '니비루'란 이름이 '마르둑'으로 바뀌어 우주 최고신이 된 것이다. 이 아눈나키의 별이며 '아누의 거처'인 니비루에서 아누가 쫓겨나(물론 상징적으로) 천왕선(우라누스)으로 옮겨지고 아버지 엔키는 해왕성(넵튠)으로 옮겨졌다. 엔릴의 아들 이슈쿠르/아다드[중동 북서부의 '바알(폭풍)신]의 별인 수성(머큐리)은 자기 자식인 '나부'의 별로 바뀌었고 이난나/ 이슈타르의 별인 금성은 배우자인 '사르파니크'에게 옮겨지기로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중동 신화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12신전의 멤버들이 각기 특정한 별에 고정되어 관련된 것은 아니었으며, 멤버가 아닌 니누르타는 토성신, 네르갈은 화성신으로 알려졌다.
[원래 수메르시대부터 '운명을 결단하는 일곱 신'이란 주요 신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누, 엔릴, 엔키, 닌하르사그(모신), 샤마슈(태양신), 신(달의신) 및 이슈타르(금성신)등이었다].
엔릴은 너무나 막강한 신이었기에 그의 지위(지구)를 바꾸는 대신 숫자로 표시된 그의 지위[60진법에 따라 아누=60, 엔릴=50, 엔키=40, 난다/신(달의 신)=30, 샤마슈(태양신)=20등]를 마르둑에게 옮겨 스스로 '50의 지위 Rank of Fifty'이니, '50의이름 Name of Fifty'이니 하고 부르게 바꿔 놓았다.
비록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는 적대자일지라도 다른 신들을 처벌하거나 권력을 제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권력이 자신에게 종속된 것처럼 존칭을 바꿔 놓았다. 예컨대 농업의 신인 나누르타는 '마르둑의 괭이', 네르갈은 '마르둑의 공격자', 엔릴은 '마르둑의 주권과 자문역', 난나르/신은 '밤을 밝게 해주는 마르둑'등으로 바꿔 놓았다.
신들 가운데 으뜸 신
마르둑은 또한 다른 신들을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바빌론으로 초청하여 각자 민중의 숭배를 받는 신전 성소를 건립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연회를 열어 엔릴, 엔키 같은 원로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위신과 정통성을 과시했다.
그래서 이들 신들의 뻔질난 출입으로 바빌론 Babylon은 문자 그대로 '신들의 출입문 Bab-ili'이 된 것이다. 하기야 그 자신 앞서 아누, 엔릴 등 원로들의 회합에서 마음내키지 않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주권신으로 승인을 받았으니 형식상 정통성은 이미 갖추었던 것이다.
마르둑은 드디어 '신들 중의 으뜸 신' (God of Gods)이 되었고 따라서 엔티-마르둑-나부로 이어진 가계를 찬양하는 새로운 신앙이 강조되었다. 마르둑 MAAR. DUK이란 이름은 학자에 따라 '청정한 땅의 아들', '우주의 신의 아들' '찬란한 날의 아들' '빛의 아들', '진정한 아들'로 해석되고 있다.
2천 년간 지속된 우주적인 신들의 시대 대신 국가적인 신이 출현하여 정치와 종교는 더욱 밀접하게 결합하게 되었다. 이렇듯 신들이 너무나 초연하고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자. 왕과 신관들은 변하는 천체의 징조와 예언 같은 것을 신들의 가르침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근거 삼아 국가와 민중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로써 점성술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이때는 바로 2160년간 계속된 '금우궁(金牛宮 Taurus)의 시대'가 끝나고 '백양궁(白羊宮 Ram)의 시대'가 된 때와 일치한다.
아누, 엔릴, 엔키 등 일곱 명의 조요 안누나키가 인간과 지구의 운명을 관장했던 시대는 물러가고 천체의 징조와 예언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한 시대가 왔다(이7이란 숫자는 명왕성으로 부터 차례로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를 가리키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점성술의 시대
수메르 말기에 기록된 '예언 텍스트'에는 주요한 신들이 천체의 징조의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기록하고 잇다. 이런 경향이 더욱 확대되어 바빌론 시대에는 행성들이 합(合 conjunction), 일식과 월식, 달무리, 행성의 12궁도에서의 위치 같은 천체의 변동과 징조가 신들의 가르침 대신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이끄는 지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이런 예언을 전담하는 신관도 생겨났다. 앞서 우르 제3왕조 시대에 기록된 예언은 이러하다.
"달과 목성에 광휘가 둘러싸이면 '아후루'의 군사들이 침입할 것이다.
태양이 그 천정(天頂) 자리에 달하여 어두워지면 이 땅의 불의한 자들이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금성이 마갈궁(磨蝎宮 : 염소자리)에 가가워지면 독기를 품은 바람이 이 땅에 닥칠 것이다.
목성이 새해 시작에 나타나면 곡물의 수확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바빌론 시대에는 행성들이 황도12군의 특정한 위치에 출현하는 현상이 이행성이 가져올 길· 흉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 특히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더욱 성좌와 별과 각 달(月)들은 여러 신들과 관련된 것으로 믿어졌기에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예컨대 " '아야루'달에 달무리(halo)가 끼는 것이 세 번째 관측되면… 엘람의 왕이 스스로 칼을 맞아 쓰러지리라. …그의 아들은 왕위를 잇지 못하리라. … "하는 것이다.
바빌론에서 발굴된, 12권으로 된 한 문서 텍스트에는 각 특정 달에 무었을 해도 좋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예를 들면 "왕은 다만 '쉐바트'와 '아야루' 달에 신전을 건축하거나 성소를 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바빌론 신이 하루도 한 나절씩 나누어 길흉을 가렸으며, 이로써 시집오는 신부를 하루의 어느 시각에 데려와야 좋은가 점을 쳤을 정도이다.
이런 징조와 예언과 지침이 중요시되자 민간에 12궁도 점성술의 예언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어떤 사람이 병에서 쾌유될 것이다. 임신한 어머니가 건강한 아기를 낳을 것인가, 때가 좋지 않든지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면 어떻게 예방해야 좋을까 하는 것이 그 예였다. 이를 위해 주문을 외우는 것이 유행했고, 심지어 윤기 나는 수염의 빛깔이 퇴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빛의 별'에 기도하며 주문을 외우는 일도 있었다.
이래서 액운을 막아 주는 문구가 새겨진 부적이 생겨나고 또 이것들은 대개 끈에 꿰어 목에 거는 것이었다. 이 부적을 만든 재료가 무엇인가도 중요한 것이었는데, 예컨대 적철석(赤鐵石)으로 만든 것은 '얻은 재물은 쉽게 얻을 수도 있다'는 자중(自重)과 근신을 상징하는 것이고, 라피스 라줄리(청금속)부적은 '세력을 떨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아슈르바니팔왕 도서관에서 2천 장이 넘는 이런 징조와 예언 을 기록한 문서가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해몽법이며 기름방울을 물에 떨어뜨려 그것이 풀어지는 모습으로 점을 치는 '기름과 물 예언법'과 신전 희생 가축을 잡을 때 내장(특히 간)의 모습으로 점을 치는 법까지 기록되었다(자료84). 수메르 시대에 천문학 이었던 것이 점성술(astroology)로 변질했고, 이것은 또 다시 그 밖의 주술과 마법으로 변질되었다. 천문학은 인간의 이성과 노력으로 이룩한 진정한 과학이었으나. 그 다음 것들은 불안한 시대의 삶을 반영하듯 미신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퇴보하는 과학
왜 이 새 시대(백양궁 시대)에 과학이 이렇게 퇴보된 것인가? 그것은 그 전 2천 년간 시종일관 지속되어 온 신-신관-왕이라는 굳건한 사회의 뼈대가 붕괴되었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곧 백성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나날의 일과 세상의 사건들이 그런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줄 통치 귀족계층, 신관, 지식인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막강했던 옛날의 신들이 신정에서 사라졌으니 백성들은 그처럼 격동의 시대에 천체의 징조와 유언비어 같은 예언에 의존해서라도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현대 천문학의 기원이 된, 수학원리와 방정식과 계산법과 개념으로 기록된 수메르의 천문학은 바빌론 시대에 이르러 창조력을 잃게 되었다. 더욱이 바빌론 제1왕조 창립 이후 1천 3백 년이 지난 서기전 5세기 이후 그리스인들이 찬탄하고 선망했던 서기전 800년경의 칼데아(신 바빌론니아)의 천문학조차 수메르의 그것과는 먼 것이었다.
이 수메르 이후 '새 시대'는 새로운 진전이라곤 거의 없는 과학의 공백기였다.
저명한 오리엔트 학자 오토 뉴지보어 Otto Neugebauer 교수는 《고대의 진정한 과학 The Exact Scence in Antiquity》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수학이론이 실체 관측치와 비교해 본 측면에서 바빌론 천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 관측수치에 근거한 방정식에 의존하지 않고 금성의 궤도 운동 수치를 한 장, 한 장 또 한 장 꼼꼼이 기록한 마야의 천문학 두루마리와 다르지 않게 바빌론의 천문도표도 태양, 달과 눈에 보이는 행성들의 예정된 위치들을 극히 정밀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바빌론의 경우 이 천체 위치 조견표(早見表 ephemerides)(자료 85)를 작성함에 있어서 이를테면 월식이 태양과 달의 궤도 속도와 그 밖의 요소에 의하여 50년 뒤 언제 일어날지 계측할 수 잇는 근거가 되는 수학공식 교과서를 가지고 이것에 의거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주의 깊게 계산되어 작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지보어 교수는 《상형문자의 천문학 텍스트》에서 또한 "이 계산 교과서는 진정으로 수학적 '이론'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정밀한 계획 없이 그러한 고도로 복잡한 수치계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수학이론이 원래 바빌론 이전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지적하며, "결국 바빌론 천체력 작성에 이용된 수학공식 교과서는 이미 그 이전에 완성되어 정확, 치밀하게 기술된 것을 복사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 " 이 천체력에 사용된 계산 단위는 수메르인이 고안한 60진법이었고, 황도대의 성좌, 달[月]의 이름들과 50개가 넘는 천문학 용어는 순수한 수메르어이며, 따라서 바빌론인들은 단지 수메르의 천문학 기록을 배우고 익혔을 따름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인 서기전 8~7세기 무렵에야 실제 관측의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씌어진 《천문학자의 일기》란 책이 있었는데, 그리스와 페르시아인들이 이 기록으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던 것이다. 오늘날 천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옛 바빌로니아인들은 실제로 그 이전 수메르인들로부터 모방했을 뿐인 것이다.
http://kimzzz.com.ne.kr/main.htm
수수께끼의 고대문명 수메르 문명3
평화의 그림(좌) 전쟁의 그림(우)BC 2700,
수메르런던 대영박물관(Britsh Museum, London)
쇠퇴하는 문화 일반
천문학의 쇠퇴와 변질은 과학 일반과 문화, 예술, 법률, 사회 기본구조의 퇴보를 상징하는 병리적 증상이었다. 수학의 60진법은 바빌론시대에서 더 나아진 것이 없었으며, 발달된 의학지식과 심지어 방사선 치료법을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의료기술까지 가지고 있었던 수메르의 의학은 이 시대에 이르러 마술로 전락했다.
설형문자는 더욱 자체(字體)가 일그러진 형태로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으며, 학교, 선생의 직분, 숙제 같은 교육에 관한 수메르인의 관심은 이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림설명: "수메르 이크 샤마간상"앨러배스터BC 3000
또한 많은 지혜의 말, 시가, 속담, 비유담이며, 태양계의 생성과 천계와 지구, 아눈나키('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온 사람들')의 인간의 창조에 관한 자료를 보여 준 신화 비숫한 이야기 같은 문학적 창조성도 사라졌다.
이런 문학 장르는 실로 1천 년이 지나서야 히브리 성서에서 다시 부활되었던 것이다.
수메르의 왕들은 신전을 짓고 운하를 파내며 예술품을 창작한 것을 자랑스레 기록했지만, 바빌론의 왕들은 전쟁과 정벌 기록, 이를테면 많은 포로를 잡고 많은 적병의 머리를 베어 낸 것을 뽐내는 기록들을 남겼을 뿐이다.
전 시대의 열정과 우아함은 거칠고 조잡함으로 바뀌었다. 바빌론 법전(예컨대 함무라비 법전)은 죄와 별을 규정했을 뿐이지만, 전 시대에는 약자의 보호와 윤리 규정이 법률의 주지였다. 이 수메르의 법개념은 그 6백 년이 지난 뒤 성서의 모세 십계명에서 다시금 부활되었다. 옛 통치자들은 '엔시 EN. SI' 곧 '정의의 목자'라는 타이틀을 몹시 바랐지만, 바빌론의 왕들은 '사방 세계의 왕'이나 '왕 중 왕'을 '백성들의 목자'대신 선호했다.
수메르에서는 부드러운 사랑과 정사를 묘사한 시가들이 많았다. 그 중 이난나와 신랑인 두무지 Dumuzi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며, 인간 왕과 신인 배우자들의 사랑, 평민 신랑 신부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한 노래들이 많았다. 그러나 필시 마르둑의 개성으로 인하여 이러한 민중의 의식구조가 후대에 변질되었던 같다. 이와 같은 수메르의 문학예술의 장르는 다시금 1천 년이 지나서 히브리《성서》에서 다시 부활되었다(엄격한 윤리서인 《성서》에 어찌하여 노골적으로 여체를 찬미한다든가 성애를 노래하는<솔로몬의 아가(雅歌)>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이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메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실을 뽑고 옷감을 짜고 우유를 짜는 일, 가족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가수, 댄서는 물론 의사, 조산원, 간호원, 가정교사, 선생, 미장원 주인 등 전문직에도 나타났다. 통치자의 가정 출신으로 가족 농지를 관리하고 경영하며 농산물을 거래하는 직책을 맡은 여성도 있었다.
왕실 귀족의 아내들은 광대한 신전토지를 관리하기도 하고 여성 사제로도 일했는데, 그 달들은 3계층의 신관의 하나로서 고등 여신관도 있었다. 사르곤왕의 딸은 신전에 바치는 찬가를 짓고 우르의 난나/신 신전에서 고등신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영주 구데아의 어머니는 라가쉬 신전의 고등 신관이었다. 수메르시대에 여왕 또는 여성 통치자가 몇 명쯤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래 수메르 신화에서 여신들은 처음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엔릴('명령하는 주님')의 배우자는 '닌릴 NIN.LIL'('명령 하는 여주인'). 엔키('대지의 주')의 배우자는 '닌키'('대지의 여주인')이었고, 어머니 여신인 닌하르사그는 엔키가 인간을 창조할 때 공동 창조자였다. 이들은 12신 판테온의 당당한 멤버들이었다. 또 수메르 전승에는 문화예술과 생활기술을 가르쳐 준 많은 여신들이 있어서 이를테면 맥주의 여신, 방직의 여신, 필기의 여신들이 있었다고 한다(이들은 신화적 가공인물이 아니라 실제적 '문화 영웅'들이었다.).
바빌론 시대에는 이러한 평등풍조가 사라졌다. 그 예로서 마르둑은 '니사바'가맡았던 필기의 여신 역할을 아들인 '나부'가 대신하도록 조작했다고 한다. 단순하고 전투적인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뿐 아니라 문화 일반이 모두 쇠퇴해 갔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기독교 초기 시대인 기원 전후부터 되풀이되었다.
발달된 수학과 천문학과 철학이며 호메로스부터 시작된 문학적 재능과 창조적인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일어난 그리스 문명은 서기전 5~6세기부터 본격화되어 3세기경 알레산드로스 대왕의 대원정에 힘입어 멀리 동쪽 인도지역까지,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의 명성을 떨쳤다. 여성의 지위도 꽤 높아 올림포스 판테온의 여성신들과 델포이, 도도나의 신탁소(神託所)의 여사들이며 사포 Sappho(BC 610?~580?)같은 여류 시인의 존재는 당시 여성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민주적 시민정치체제, 자유스럽고 이지적인 학예풍토, 그리고 전후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비교적 높았던 여성의 지위 같은 것이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세력인 로마의 국가 종교로 공인된 서기4세기 초 이래 이러한 그리스 문명의 향기는 사라지고 신권(神權)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학문과 예술이 도그마적 이론과 교리에 의해 창조성이 사라지는 암흑시대가 르네상스 때까지 1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것이다.
수메르 문명이 바빌론 시대 이후 변화한 과정을 살펴보면, 원래 과학이었던 것이 미신 과 주술(呪術)로 변질되고 이것이 다시 종교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신화학자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제기했던 문화의 발달과정, 곧 주술→종교→과학이라는 과정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거의 모든 주류 학자들이 이런 점에서 인류의 문명발달 과정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잇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예컨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이 일종의 신앙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 과학으로 그 실체가 규명된 것을 예를 들어 주술→종교→과학이라는 도식으로 정리했지만, 필자는 수메르 문명의 예를 들어 이것을 과학→주술→종교에서 다시 과학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전반부에 제시된 고대의 과학적 발명도 이같은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곧 태고적 옛날에 과학이었던 것이 어느 틈엔가 사라져 전설적인 옛 이야기가 되어 미신화된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것이 정리되어 다시금 교리화된 종교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또 다시 오늘날 과학으로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난민들
수메르의 많은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국제적 패권 쟁탈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수메르 시대에는 기나길게 지속된 시대의 특징인 거대한 통합된 정치 문화체제가 와해되고 종교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내셔널리즘이 붕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시대에 공통되게 많은 파난민들이 생겨나 세계의 인구지도가 재편되었다. 수메르가 사라질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전쟁 난민을 뜻하는 '문나브툴루 Munnabtulu'('문자 그대로는 파괴로부터의 도망자')란 말이 나타났다.
이것은 "와해된 종족의 잔존자' 라고 해석된다. 가정과 직업과 생계를 잃고 나라마저 사라져 난민이 된 사람들이다.
수메르가 사라지자. 생존자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기 시작했다. 의사, 교육자, 천문학자. 건축 조각가 서기 같은 지식인들은 새로 이주한 지방에서 문화의 전파자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계획, 대의(代議) 제도, 법전, 학교, 원양 무역, 천문학 등 많은 문화 업적을 이루었던 수메르인들은 또한 최초의 '디아스포라 Diaspora'(유랑하는 난민)가 된 것이었다.
아브라함 일가가 우르를 떠난 처음 이주했던 북방 아나툴리아 가까운 하란 Harran이 아마도 유민들이 처음으로 향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이 곳은 유명한 우르의 상인들의 거점으로, 그들은 그 동, 서, 북방으로 광대한 캐러뱀 무역로를 개척했었다.
그 곳에서 수메르 이후 히타이트, 후르리아/ 미탄니 민족과 동북방 코카서스 산맥의 인도-유럽민족들과 만나고 ,또 동남쪽으로 인더스 계곡 엘람 지방, 서쪽으로 이집트로도 이주했을 것이다. 멀리 동쪽으로 인더스 계곡가지 가서 아리안 민족과 섞여 수메르 신화가 스며들었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멀리 발트해까지 이주하여 핀란드, 에스토니아, 헝가리인의 선조가 되었을 것이라고 시친은 주장한다. 곧 메소포타미아 동북쪽으로는 흑해 연안의 그루지아를 거쳐 볼가 강변옛 사마라 Samarra (현대 쿠이비쉐프 시)를 세우고 다뉴브강을 따라 멀리 발틱해까지 이주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위의 민족들이 교착어인 우랄-알타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외에 이를 입증할 다른 증거가 없다. 아니, 이와 반대로 특히 헝가리 민족의 경우 서기 896년 이후 유럽사에 등장하기 이전 원래 신강성 위구르 지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몽고인종과 가까운 인종이라는 증거가 1986년 이후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헝가리인들의 말의 억양과 매운 것을 좋아하는 식성은 우리 한국인과 똑같다고 한다. ).
신앙과 과학적 이성의 전통
이 '새 시대'에 주변 국가들에 확산된 수메르 판테온의 영향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서기전 18세기 이후 하타이트의 12신 판체온은 수메르의 강한 영향을 이것이 '흐르리아' 신화와 함께 수메르와 그리스 신화를 이어 주는 중개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신화와 문명은 미케네- 미노아 문명을 거쳐 역시 그리스 문명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가나안의 '탐무즈 Tammuz 신화'는 원래 수메르의 이난나-두무지의 사랑과 두무지의 죽음의 기록한 이야기였지만, 이것이 결국 대지와 식물의 성장, 결실, 죽음, 부활을 상징하는 종교적 농경신화로 알레고리컬하게 변형되어 이집트의 오시리스-이시스 신앙과 혼합되고 다시 여러 지역으로 퍼져서 탐무즈 -아티즈 신화(가나안, 시리아)와 아도니스 신화(그리스)로 변했다.
(《황금가지 Golden Bough》를 쓴 신화인류학자 J. G. 신화의 백을 잇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마이클 베이젠츠 등의 《서혈과 성배 Holy Blood. Holy Grail》을 보면, 필시
<신약성서》필자들이 예수를 신격화 시켜 적대자인 로마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독교 자체를 위대하고 장엄하며 신비스럽게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예수의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성서를 조작했으며, 또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도 이런 동기에서 생겨나 강조되었고, 죽음을 극복하는 영적 신비와 능력을 강조하는 부활적 의식도 이교도들의 춘분의식에 때를 맞춰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지어 말하자면, 신과 인간의 합일과 조화라는 수메르의 신앙 전통은 긴 단절을 거져 아브라함 이후 히브리인들에 의해 계승되어 결국 민족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 곧 유대-기독교 신앙 Judeo - Christianism으로 발전, 승화되었고, 한편 수메르의 합리적 이성과 과학 전통은 빛나는 그리스 문명과 크스모폴리턴한 헬레니즘으로 부활, 발전했던 것이다.
이 두 문명 지류가 현대에 이르는 서구 문명의 정신적 지류가 되어 온 것이다.
청금석과 실크로드
수메르인들은 수많은 신전 내부를 치장하기 위해 금, 은, 청동, 터키석, 홍옥수 같은 귀금속과 보석을 구하려고 노력했었다. 특히 청금석 Lapis Lazuli는 군청색 바탕에 황금색 가루가 뿌려진 듯 아름다운 보석인데, 이집트와 수메르인들은 이것을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상징하여 주로 신전 내부의 천정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신전이 한두 곳도 아니었으니 그 소요량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프가니스탄의 산지에서만 산출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운반했을까?
아마도 그 첫 길은 수메르에서 서북방 무역 도시 하란을 거쳐 다시 동북방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지금 이란 북부를 횡단한 다음 다시 험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와 카블까지 가서 구했을 것이다(이 종착지에서 다시 북으로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즈를 거쳐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면 중국의 돈황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가 된다.).
둘째로, 페르시아만에서 배로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인도양 연안을 따라 하라파와 모헤조다로 가까운 해안에 도착하여 다시 육로로 북상하여 카이버 고개를 넘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어느 길이든 험하고 고생스러웠지만, 목적한 청금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수메르인들이 그 옛날 중국인들과 접촉한 길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었을까?
남대서양과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와 안데스의 주석을 구했던 수메르인들이 더 가까운 중국과 접촉하지 못했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서기전 6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실크로드의 왕래가 그 훨씬 이전인 서기전 20세기 이전부터 있었을지 모른다.
수수께끼의 고대문명 수메르 문명4
동·서의 두 문명
학자들은 수메르인이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거주했다가 중동으로 이주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
또 수메르와 중국 문명의 유사점에 주목햇다. 이미 1913년 영국의 볼 C. J. Ball은 옥스포드대학의 후원으로 출판한 《중국인과 수메르인》에서 수메르 원문자와 한자 고문(古文)의 유사성을 제시했다.
사이러스 H. 고든 교수도 가지고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후 적지 않게 이와 비슷한 연구
결과가 나왔으며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심지어 수메르인이 옛 동이족의 일파라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여튼 두 문명 상에 유사점과 왕래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사진설명: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
그러나 중국과 수메르의 두 문명이 동일한 기원을 가진 것이라는 점은 의심스럽다.
첫째로 수메르 신화는 기본적으로 한국이나 중국 신화와 유사한 점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둘째로 중국의 천문학 전통이 수메르나 서양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옛 중국의 천문학에서 나온 역법은 처음부터 태음태양력을 사용했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경칩, 춘분, 입추, 대한 같은 24절기는 벌써 서기전 5 ~ 6세기경 춘추시대에 생겨났다.
중국인들은 기본적으로 하늘을 우주와 그것을 따르는 원리의 지배자이며 인간사회의 진정한 지배자로 생각하여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지배를 대행하는 천자(天子 , 황제)로 나타난다고 생각해 왔다.
이 하늘에 대한 뿌리깊은 공경심은 막연한 가운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필시 수메르의 경우처럼 '하늘에서 온 존재'(이를테면 아눈나키)와의 접촉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생성되고 신앙화 되었을 것이다.
천자는 군왕이자 제사장이기도 하였는데, 하늘의 덕은 천체의 운행으로 나타나므로 그 운동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무가 있었다. 그래서 달력과 함께 중동에서와 같이 일·월식과 행성의 운동을 예보하는 천체력이 만들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법은 농사와 사회생활의 편의를 위함과 동시에 왕조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1912년 서양식 그레고리력이 채용되기까지 5천 년의 역사에 실로 50여 차례의 개력(改曆)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옛 이집트, 수메르,바리론, 칼데아,그리스 로마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곧 왕조와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달력도 바뀌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물론 점성술이 발달했었다. 그러나 서양과는 달리 길고 긴 하늘(天)
과 지상의 왕조와의 끈끈한 유착으로 인하여 중국이 점성술은 처음부터 황제, 대신, 장군 같은 관리와 국가의 운명을 접치 공적인 점성술이었다는 점이 중동이나 서양의 개인 운명 점성술과 달랐던 것이다.
또 중국에는 10간(干) 12지(支), 하루를 12시로 나누는 것 같은 12진법이 있었지만, 그 별자리 체계는 자연적인 별자리 모임과 천체 기준이 되는 28수(宿)를 만들었다.
이것은 천계와 인간사회가 서로 감응한다는 생각에서 지상의 지역, 관료조직, 벼슬자리, 왕궁건물을 상징하여 만든 별자리(星宿)였다.
따라서 이것은 메소포타미아나 서양의 별자리 체계와는 전혀 모습이 다른 것인데,
이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생겨난 독자적인 천문학 사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천문학뿐 아니라 두 문명의 그 자체의 근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최근의 역사학계의 생각이다. 세계의6대 문명, 곧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인더스, 중남미 잉카-마야 문명 및 중국의 문명이 서로 유사하며 원래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진 문명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학계에서 주장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중국의문명이 다른 지역의 문명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것이 최근의 정설이 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옛 중국 문명의 주역이 중국인이 아니라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는 주장이 지금 정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이족이 옛 중국의 하(夏), 은(殷) 문명의 주역이었음은 물론 한자도 종전에 알려진 서기전 13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1천 년이나 앞선 4천 3백 년 전 하(夏)시대에 동이족의 의해서 고안되었다는 주장을 독자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천문학은 물론 중국의 민중신앙인 도교 곧 신선사상도 원래 한국인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그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중동과 서양 문명의 시초가 수메르인에의한 것이었듯이 옛 동양문화는 우리 옛 한국인이 주역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정설로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유수한 한국 학자들은 21세기에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사상으로서 '한'사상의 우월성을 상조하고 있고 필자도 이점에 공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더욱
우리의 전통신앙이인 천도교의 개벽사상이며, 증산도의 선천·후천 사상, 또 지금까지 상극(相剋)하는 시대에서 원한을 풀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解寃相生) 새 세상이
온다는 믿음이야말로 서양의 어느 종말 신앙보다도 뛰어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최근 범람하고 있는 국수적 전통주의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곧 ' 옛 전통으로 돌라가지'고 외치며 마주 벌판을 지배했던 고조선 왕국 이야기나 원자탄을 만들어 우리도 강국이 되자고 했던 애국자들을 치켜세우는 이야기를 쓴 책들은 솔직히 말해 호전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과거의 위대한
전통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현재 정치적, 문화적으로 서양에 패권을 내주고 있는 우리들의 열등의식을 반사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일뿐, 그것을 너무 과대 평가함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열들의식을 벗어나 광대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주시대'의 진정한 뜻
아득한 옛날 수메르와 중국(아니 우리 동이족의 나라)의 시대는 신과 이간이 이 땅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았던 것 같다[이것이 ' 황금시대'하는 시적(詩的)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 같다.].
그런데 이 '신'들은 필자가 확신하건대 외계에서 온 인류들이었을 것이다. 역사학자나 종교신화학자들은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넌센스로 치부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필자는 나름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자와 연구가는 낡은 기존 학설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고 대담한 가설을 세워 일대 지적 모험을 감행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00년 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고 트로리의 유적을 발굴했던 하인리히 쉴리만의 경우는 이미 잘 알려진 일이고, 현대에 와서 로버트 템플은 시리우스의 백색왜성 전승이 태고적 이집트의 신화와 문명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그리스와 그 밖의 근동 신화와 문명에도 깊은 잔향(殘香)을 남겼음을 8년간의 연구 끝에 과감하게 발표했다.
필자 역시 외계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느끼는 점으로 지구가 고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말처럼 태초부터 우주사회의 일원이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지구는 처음부터 우주라는 대양에 외롭게 떠 있는 고도(孤島)가 아니었다. 또한 아득히 먼 옛날 외계의 문화사절이 각기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남쪽에 있는 동양 민족과 수메르인들에게만 문명의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고 본다.
아르메니아인이나 뉴질래드의 마오리족도 자신들이 하늘에서 온 존재에 으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전세계에 걸쳐 있는 , 민족의 선조가 하늘에서 왔다는 수많은 전승은 일일이 그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 입증되지 않더라고 진실일 수 있는 것이다.
서기 1500년대 초 코페르니쿠스는 그 때까지 1천 년 이상 믿어 왔고 또한 기독교에 의해 지지되어 왔던 천동설(天動說)을 뒤엎는 이대 지적 혁명을 제창했다. 그리하여 지구는 신이 창조한 유일한 지적 피조물이 살고 있는 천체로서 태양계의 중심이 라는 생각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전무후무했던 일대 사상 혁명이었다. 교황청도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 이 혁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뉴튼이나 갈릴레오도 새로운 이론으로써 자신의 아론들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인으로 카톨릭 사제였던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는 그보다 한층더 용기가 있었다.
그는 밤하늘에 보이는 무수한 별에 우리 인류와 같은 '신의 피조물'이 살고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그러나 용기의 대가로 그는 사제직에서 파문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화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용기 있는 주장은 코페르니쿠스의 그것만큼 혁신적이었음에도 불고하고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럴 나한 '객관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근대 과학이 발달한 지난 500년이래 지금까지 이어진 주류 학계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때 우리는 이런 화석화된 기존 관념을 바꿔야 할 것 같다. 곧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5세기 전에 예언되었던 바와 같이 외계 우주에도 우리와 같은 인류가 존재함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감한 의식의 전환이다.
현대 과학 기술도 이런 전환을 받아들 일 만큼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
극히 최근, 곧 80년대부터 지구의 바로 이웃인 우리 태양계의 가까운 행성에도 이것을 입증할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다음 장부터는 이 점을 상세히 설명하려 한다.
진정한 ' 우주시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적, 사상적으로 지구 중심적인 쇼비니즘을 벗어나 우리 바로 이웃 외계에도 우리 인류와 같은 지적 종족과 또한 우리와 비슷한 문명이 있을 수 있다는 혁명적 사고의 변환이 요청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인류가 아직도 낡고 비효율적인 화학연로 로켓을 이용하여 달과 화성을 탐험하고 태양계의 거의 보든 행성들을 근접 촬영하고 탐색하는 개가를 올렸다고 해서 진정한 우주시대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어떻게 보면 결과적으로 먼 옛날 저질렀던 바벨탑의 우(愚)를 재현하는 행위일지 우가 알 것인가?
다가올 21세기 보병궁 시대 Age of Aquarius는 할퀴어지고 황폐화한 지구라는 대지와 왜곡된 인간성을 바로잡아 회생시키기 위한 우주와 역사가 원시반본(原始返本)하여 다시금 새로운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우주시대가 시작되는 때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혁명적 영적 각성과 물질적 진보가 어울리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다.
확신하건대 이 새로운 시대는 인류가 외계 우주의 '동포'와 교류하여 의사가 통하며 그로써 지금까지 수 없이 나타난 UFO라든지 그 밖의 외계 문명의 존재가 무엇인가 확인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상극과 갈등과 생존환경의 황폐화라는 종말적 상황은 거대한 영적 혁명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한 최후의 (그러나 무서운) 시련인 것 같다.
http://kimzzz.com.ne.kr/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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