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원한.. 마야문명의 신비
사라진 마야문명
1519년 11월 8일, 스페인의 헤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es)장군은 400여명의 스페인 군인과 6000여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대를 이끌고 아즈테크 왕국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당도하였다. 코르테스 장군의 앞에서는 아즈테크 왕국의 황제인 목테스마 2세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코르테스 장군은 목테스마 2세의 장신구와 옷차림을 탐욕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르테스 장군은 스페인 국왕에게 보물을 찾아 돌아가겠노라 약속을 맺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그 곳에 도착했다.그는 목테스마 2세의 차림을 본후 많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결론을 내렸다. 서구인들은 항상 문명을 이해하려기 보다는 발견과 탐색, 약탈을 위해서 였고,이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르테스는 성당을 세울 수 있도록 목테스마 2세에게 요청을 했고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멕시코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멕시코 인들이 원시적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인들에게는 건장한 남자의 심장을 도려내어 높은 제단 위에 놓고 독수리나 매들이 날아와 그 심장을 뜯어먹는 종교의식이 있었다. 하늘에 있는 태양신은 젊고 힘있는 인간의 심장을 먹고 힘을 얻는다는게 그들의 신앙이었다. 이러한 의식을 스페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피라미드의 북동쪽에 위치하는 '전사의 신전'의 최상부에 만들어진 '차코모르'라 불리는 조각상이다. 차코모르는 '신과 인간의 사자'라고 한다. 배 위에 얹혀 있는 접시는 산제물을 바칠 때 심장을 올려 놓고 태양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사산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많이 있었다. 치첸이차는 240년 동안이나 '피비린내 나는 종교 도시'로서 번영한 다음에 조용히 막을 내렸다.
축제를 하던 날, 스페인 군대에게 멕시코 사람 600여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멕시코인들은 격분하여 코르테스 장군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코르테스 장군은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멕시코인들이 다리와 제방을 모두 부셔 버려 빠져 나갈 수 없었다. 코르테스가 데오카리 신전을 불태우자 멕시코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때, 목테즈마 2세가 국민 앞에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다.
그림설명: 테오티우아칸은 올멕을 근간으로 하여 기원전 2세기경에 멕시코 고원에 문화의 꽃을 가꾸기 시작했다. 외형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축조기법은 "탈루드-탈블레로"방식 각 단별로 경사도가 차이가 있지만 데체로 43.5도이다. 현존 계단은 254개, 높이 64m, 밑변은 정사각형으로 한변의 길이는 224m, 전체크기는 약 2백50만m2가 된다. 테오티우아칸인들은 춘-추분날 한낯이면 완벽한 직선 그림자가 서면의 아랬단에 나타나도록했다. 이를 발견한 아즈텍인들은 그래서 "해"의 피라미드라 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테오티우아칸 도시의 한창 때의 인구를 12만에서 20만정도로 추산하고 있다.이는 해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를 축조하는데 드는 노동력을 산출하여 도시의 규모를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마음이 그에게서 떠난 뒤였다. 그에게 돌이 날라 들었고, 1520년 그는 그렇게 죽어 갔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마야 왕국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보물에 혈안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1839년, 두 미국인에 의해 중앙 아메리카 유카탄 반도의 정글 속에서 찬란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의 신전, 넓은 도로와 궁전, 그리고 천문대, 원형 경기장 등이 발견되었다. 땅은 메마르고 강도 흐르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곳은 정글 지대였다. 3년후 이들은 상세한 그림을 곁들여 책을 펴냈고 이러하여 마야 문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81년에 이 지역을 여행하던 영국인에 의해 마야유물들이 수집되어 대영 박물관에 기증됨 으로써 많은 자료가 공개되었다. 마야의 사회구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진다. 지배층은 상당히 폐쇄적이었으며,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사제들의 신전이나 귀족들의 궁전은 대부분 높은 구릉 위에 요새처럼 구축되었다. 이 건물들 주변에 평민들이 사는 오두막 집이 조밀하게 붙어 있었다.
중간계층은 없으며,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평민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야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평민들은 그들의 수확물의 2/3를 귀족 과 사제들에게 바쳤고 나머지 1/3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마야인들은 밀림에 도시를 건설하고 넓은 도로를 만들었다. 마야인들은 높이 70m에 이르는 피라미드와 전체 500만톤에 이르는 성채, 그리고 길이 16km의 직선 도로 등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작업을 하는데 별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속 도구를 가지지 못했고 수레도 없었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그 밀림 속에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마야인들은 건축술뿐만 아니라 천문, 수학, 의학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천문학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년의 정확한 길이는 365.2422일인데 마야인들은 356.2420일로 알고 있었다.또 보름달의 간격을 29.53020일로 계산했는데 실제 29.53095일과 별 차이 없다.
그들의 건축물에 나타나는 돌조각의 모양이나 절단은 윤년이나 윤달의 삽입이라고 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역법에 의해 일정한 주기로 지었다고 한다. 마야에서는 이러한 천문학을 바탕으로 주기가 다른 3개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을 기준으로 하는 장기력인데 왜 이 날이 기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260일력과 365일력도 함께 사용하였다.
260일력은 1에서 13의 숫자가 20개의 날과 연결되어 한 주기를 이루는 달력이다.
그리고 365일력은 18개월이 각각 20일이며, 나머지 5일이 별도의 1개월을 이루어 19개월이 한 주기가 된다.
마야의 이런 역법은 고도로 발달되고 복잡하여 제대로 설명하자면 책 한권은 된다고 한다.
치첸에 있는 천문대는 최초이자 최고인 마야의 원형건축물이다.
이 복구된 건물은오늘날에도 현대의 천문대처럼 작동한다. 이 원형건물은 밀림 너머 세개의 단구위로 우뚝 솟아 있다.
내부에서는 나선형 층계가 꼭대기 망루로 이어진다. 둥근지붕은 천창(天窓)과 입구가 별들을 향해 배열되어 별이 반짝이는 하늘의 감명 깊은장면을 밤마다 보여준다......
......마야인들은 천왕성과 해왕성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치첸 천문대의 망루는왜 가장 밝은 별들을 향해 배치되지 않았을까?
세계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수수께끼의 문명을 들라면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마야 문명을 지목한다. 어째서 마야 문명을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가장 신비한 수수께끼 문명이라고 평가하는 것일까? 마야 문명은 중앙아메리카의 중심부인 현재의 멕시코, 벨리즈,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 걸쳐 있었으며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힌 페텐 지구, 다른 하나는 우수마신타 분지와 파시온 강 지구, 나머지 하나는 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그 면적은 남한의 3배 정도인 약 30만km2이다.
기원전 2500년에 시작한 마야족은 기원전 300년까지는 형성기였으며 그 뒤에 전고전(前古典) 시대가 이어진다.
마야족은 서기 68년경에 이미 지금의 온두라스에 우와하쿠톤이라는 도시를 지었다.
그들은 약 120년간 그곳에 살았으며 그후 2km쯤 떨어진 페텐, 특히 티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전성기를 맞아 그곳에서 5세기 초까지 거주했다.
그후 마야족은 도읍을 건립했다가 버리고 또 건립했다가 버리는 일을 되풀이했고 이 고전시대는 9세기 말까지 이어진다. 한편 유카탄에서는 5세기부터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50년 후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유카탄 도시들이 페텐의 고전 문화를 물려받는다. 유카탄의 마야문명은 8~9세기에 전성기를 구축한다.
마야 문명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도시를 건설한 곳이 그야말로 인간이 살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열대 우림 속이라는 것이다.
마야인들의 우주관에 의한 세계의 중심지인 팔렌케조차 열대 우림 속에 있다.
그들은 팔렌케야말로 여러 신과 사람, 옥수수의 기원인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그토록 척박한 밀림 속에 그토록 웅장한 건축 문화를 건설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세계의 중심지라고 믿었던 팔렌케조차 9세기부터 방치되었음은 물론 마야 문명을 구성하였던 사람들조차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마야
마야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표기법을 갖춘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 글자는 소리글자와 뜻글자가 복잡하게 뒤섞인 형태의 문자였다. 마치 우리나라가 한글과 한자가 섞인 문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마야인은 1000여개의 문자를 사용했는데 오늘날 그 일부가 해독되었으며, 그들이 남긴 기록의 뜻을 대체로 파악하게 되었다.마야에는 수천권이 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권만이 전해진다.대부분의 글자는 건축물이나 비석, 조각에서 발견된다.이렇게 고도의 문명을 뽐내던 마야문명의 최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마야인들은 평안한 도시에서 어느날 갑자기 이곳을 버리고 황량한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어느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도시는 인적이 끊어지고 건물이 정글 속에 묻혔으며 온간 잡초가 뒤덮었다.
조사에 의하면 마야문화권은 과테말라에서 유카탄 반도로 또 다시 멕시코 시티를 지나
이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왜 이렇게 이동을 해야만 했을까? 천재지변에 의한 이동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렇다면 천재지변이 끝난 후에는 그 화려했던 도시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았다는 주장을 한다.
역시 여기에도 뚜렷한 증거는 없다. 기후의 이상으로 생존이 어려웠다는 주장은 이동한 장소와의 거리가 400km밖에 안 된다는 점이 헛점이다.
농민들의 반란이나 다른 민족의 침입, 농토의 황폐화로 인한 식량부족 등에 대한 주장도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뚜렷한 설명을 할 수 없다.
화려한 마야의 문명을 뒤로 한 채 그 선조들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마야의 후손들. 답답하지만 언젠가 밝혀질 그 날이 올 것이다.
마야 문명에 대한 의문은 대충 다음과 같이 나뉘어 진다.
우선 마야인들이 고대의 어떤 문명과도 견줄 수 있는 기술과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도 왜 밀림에 도시를 세웠을까 하는 점이다.
이들이 도시를 세운 열대 우림 지역은 평균 3m나 되는 풀이 무성해 있으며 마호가니 등의 거목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낮에도 햇빛이 닿지 않는다. 정글에는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린다.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고 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등의 고대 문명이 하나같이 하천이 운반해 준 비옥한 토양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야 문명은 지옥과 같은 조건 아래 도시를 이룩한 셈이다.
두 번째 의혹은 그들이 건축한 거대한 석조 도시군의 비밀이다. 마야인들의 건축은 인근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났고 규모도 컸다. 페텐의 밀림 속에 있는 티칼은 신대륙 최대의 유적이며 마야 최고의 대도시이다.
그곳에는 신전, 궁전, 승원(僧院) 등 석조 건축군이 무려 1km2 당 약 200개의 비율로 3,000개 이상이나 발견되었다.
신전 피라미드는 높이가 70m 이상이며 외측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경사가 60°나 되는 계단이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마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다.
여기에서 발굴된 ‘시간의 석비’에는 가장 오래된 날짜의 기록으로 292년, 최신의 것으로도 879년 날짜가 새겨져 있다.
유카탄의 수도 우즈만에 있는 총독 궁전이라고 부르는 건물을 받치기 위해 마야인들은 총 46만m3의 자재를 사용하여 길이 183m, 너비 156m, 높이 13m의 토대를 축조했다. 이 거창한 토대 위에 다시 길이 120m, 너비 26m, 높이 4m의 테라스를 만들었으며 이 테라스 위에 길이 92m, 너비12m, 높이 10m에 달하는 궁전을 세웠다. 전체 건조물을 위해 100만 톤에 가까운 자재가 들어갔다. 코판에 건설된 인공 아크로폴리스의 성채는 면적이 5ha나 되고 총 부피는 230만m3, 500만 톤에 이르는 자재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면서도 마야인들은 도시와 밀림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바퀴의 이용법을 알고 있었지만(무덤 속에서 바퀴 달린 장난감이 출토되었다) 무슨 까닭인지 달구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짐을 운반하는 가축도 없었으므로 모든 돌과 설비는 사람들이 날랐다. 도시에 따라서는 그와 같은 거석을 수십 킬로나 떨어진 곳으로부터 운반해 왔을 것이다.
그들의 노고에 경탄을 보낼 수밖에 없지만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세 번째 미스터리는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월등한 수준의 정확한 역법, 천문학, 수학을 어떻게 익혔는가하는 점이다. 마야 문명을 경탄스럽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들의 과학에 대한 지식이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마야인들은 3세기부터 이미 0을 포함한 20진법 숫자 체계를 갖고 계산했다.
0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백 년, 아라비아 상인들보다는 7백 년 정도가 앞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숫자를 가지고 하늘의 운행, 시간의 경과들을 계산하였다. 현대인들도 놀랄 만한 태양력도 만들었고 훌륭한 미술 작품도 남겼다.
마야의 천문학은 매우 발달하여 1년이 365와 1/4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브라는 윤년을 갖고 있는데 아브는 각기 20일로 이루어진 18개월과 5일로 이루어진 ‘짧은 달’이 있고 이것이 합쳐진 365.2420일이 기본 단위였다.
근대의 엄밀한 계산에 의해 일 년을 365.2422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의 달력과는 불과 17.28초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마야인들은 금성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 584일 주기의 금성력(金星曆)까지 만들어 냈는데, 그들은 태양력의 8년 동안에 금성력이 꼭 0.4일 어긋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은 그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 버렸는가이다. 정글에서 수 세기를 살아오면서 막상 마야 문명으로 보아 최전성기를 누렸다고 생각될 때 갑자기 소멸해 버린 것이다.
고전기의 마야의 도시는 이카튼(7,200일)의 종료 때마다
기념비를 남겼는데, 서기 790년에는 19개의 밀림 도시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어 810년에는 12개 도시로 줄었으며 830년에는 불과 3개의 도시만이 남았다.
하나의 민족이 전쟁에 의해 멸망하는 예는 역사상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야에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난 흔적이 없다. 정글에서 다른 지방으로 이동한 것 같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설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물론 마야 문명의 후손들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다. 유카탄 반도의 시빌찰툰의 유적에서는 이 도시가 기원전 1500년부터 스페인들이 침략한 15세기까지 3,000년을 존속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정글에 살고 있던 마야인들이 시빌찰툰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마야인들이 자신들이 세운 찬란한 밀림 문명 속에서 더 이상 번성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새로운소식
마야에 인류최초 사우나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공중목욕탕이 등장하기 400년전, 그리고 로마가 거대한 대리석으로 공중목욕탕을 건설하기 900년전인기원전 900년에 마야에는 이미 대중 사우나가 있었다고 선데이 타임스가 1일 보도했다.
영국 태생 고고학자인 미국 보스턴대학의 노먼 해먼드 교수는 대학저널인 컨텍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마야 마을인 벨리세에서 기원전 9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형태의 사우나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마을광장 가장자리에서 발견된 이 사우나는 지붕이 돔 형식으로 돼있는 폭과 길이 각각 2.4m 정도, 지붕높이 1.8m 정도의 건물로 약 50㎝ 정도 깊이의 도랑이 건물밖에 있는 화로에 연결돼있었고 이 도랑에는 재가 가득차 있었다고 해먼드 교수는 말했다.
해먼드 교수는 마야인들의 사우나가 현대의 사우나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됐을 것이라며 화로안에 돌을 넣어 덥히고 이로 인해 생긴 뜨거운 공기가 도랑을 통해 사우나 내부로 들어갔으며 가끔 덥혀진 돌에 물을 뿌려 증기를 만들기도 했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뜨거운 돌에 닿지 않도록 가장 자리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사우나를 즐겼다고 설명했다.
마야인들은 사우나를 몸을 깨끗이 하는데만 쓴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을 준비하거나 사냥이나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남자들이 여자를 멀리하고 땀을 흘림으로써 몸을 다듬는데 사용했다고 해먼드 교수는 말했다.
에리히 폰 데니켄 <미래의 수수께끼> " 신을 위한 민족의 이동 "
마야문명은 현재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의 전역과 온두라스 일부에 퍼져있으며, 과테말라 북부 페텐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문명이다.
마야문명은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것은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힌 페텐 지구, 우수마신타 분지의 파시온 강 지구, 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마야문자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이곳 팔렌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3세기경부터이고 7세기초 까지는 아직 소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603년에 태어나 12세에 왕에 오른 ‘파칼왕’과 그의 대를 이은 아들 ‘찬발룸’에 의하 여 급속히 성장하여 692년경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 이곳의 눈앞에 펼쳐진 유적들 모두가 이 시대의 것들이다. 그러나 771년 이 후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820년경에는 완전히 몰락하여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고 이곳은 밀림에 묻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 니까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의 일들로써 그 원인에 대해 구구한 학설이 나돌지만 아직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해 궁 금증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치첸 이차, 티칼, 코판, 팔랑케 등에 있는 모든 건축물들이 마야의 전설적인 달력에
따라 지어졌음이 오늘날 증명되었다. 인간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피라미드를 세운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필요로 해서 사원을 지은 것도 아니다. 인간이 피라미
드와 사원을 지은 것은 달력이 매 52년마다 한 건축물에 정해진 숫자의 층계를 완정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돌 하나하나가 달력과 관계가 있으며 완성된 모든 건축물은 천문학적으로 정밀하게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서기 600년에 발생한 일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수많은 사원과 예술적인 피라미드들과 입상이 빙 둘러선 광장과 웅대한 스타디움이 있는 공들여 튼튼히세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떠나버렸다.
밀림은 건물과 거리를 삼켜버렸고, 벽을 무너뜨렸고 모든 게 섬뜩한 페허로 변해 버렸다.
주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이 사건을 고대 이집트로 한 번 옮겨보자. 이집트에서도 여러 세대에 걸쳐 달력의 날짜에 따라 사원과 피라미드 도시와 거리가 세워졌다.
소박한 도구를 이용해 공들여 만든 놀라운 조각품들이 화려한 건물에 놓여졌다. 1000년도 더 걸려 이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살던 곳을 떠나 황량한 북부로 이동했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게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만 늘어날 뿐이다.
우선 마야인들이 낯선 침입자들에 의해 쫓겨났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절정에 다다른 마야인들에 필적할 만한 상대가 누구였을까?
전투 같은 대결 양상과 연결지을 만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강력한 기후의 급변이 민족의 대이동을 야기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전체적으로 볼 때 고
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구(舊) 왕국의 영토에서 신 왕국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마야인의 행로는 일직선상으로 약 350킬로미터- 기후의 급변이라는 대참사를 피해 도망가기에는 불충분한 - 에 불과하다.
파괴적인 전염병이 마야인들을 움직였을지 모른다는 해석고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러나 이 해석이 여러 가지 설명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다는 것 외에는 이에 관한 최소한의 증거물도 없다........
.......유적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마먀인 중 단 한 명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성전의 유물을 지킬 사람도 없이 성전을 밀림 속에 남겨두고 전민족이 갑자기 이주해 버린 것이다.
많은 의견들의 협주곡 속에 새로운 목소리를 참여시키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 많은
가설들 중 명확한 사실을 밝혀줄 만한 해석은 하나도 없다.
에리히 폰 데니켄 <미래의 수수께끼> " 신비한 팔렝케의 모 덮개판 "
.... 멕시코의 유명한 고고학자인 알베르토 루스 루일리에르 박사는 1949년 부터1952년에 이르는 연구 기간 동안 팔렝케에 있는 '비문의 사원'에서 현실(玄室)을 발견했다.
계단식 피라미드의 제일 높은 고대(高臺)에 있는 사원 전실로부터 경사진 습기로 인해 미끄러운 층계가 약 25미터 깊숙이 지표면에서 2미터 아래까지 내려가있었다.
그 층계는 엄폐되어 내리막 경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방의 크기와 길이는 '마술 같은 혹은 상징적인 연출' 이라는 마르셀 브리온의 표현에 걸맞게 환상적이다.
고고학자들이 조수들과 함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의 길을 드러내는 데에는 꼬박 3년이 걸렸다.
방바닥은 환상적인 부조가 있는 길이 3.80미터, 폭 2.20미터인 통돌로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도 정교한 석상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돌판에는 마야 상형문자가 상감되어 직사각형을 빙 둘러싸고 있는데 그 문자들은 현재 아주 일부분만 해독되었을 뿐이다.
돌판은 마야 문학과 마야 석비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상형문자들로 장식되어 있다.
거기에는 생명의 나무(혹은 생명의 십자가)와 제왕의 가면을 쓴 인디언 한 명이 있다.
머리의 깃털 장식, 비취 지팡이, 레이스, 그리고 -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 신성한 케트살(중앙아메리카 산(産)의 꼬리가 긴 새) 머리가 둘 달린 뱀 한마리와 상징적인 가면들이 있다.
고고학자 폴 리벳은 돌판에 새겨진 인디언은 제단에 앉아 있는 모습이며 그 뒤로는 '신의 특징인수염' 이 조각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 고상하게 가공된 통돌 밑 자홍색으로 색칠된 관 속에서 해골이 발견되었다.
얼굴 위에는 금가면이 놓여 있었고, 해골 옆에는 비취 같은 몇 개의 보석 장신구와
의식에 쓰이는 제기와 기탁된 제물 등등이 있었다.
팔랑케에서 이 묘 덮개판을 본 이후로 나는 그것을 공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 판이 가로 그림으로 간주되느냐 아니면 세로 그림으로 간주되느냐는 사소한 문제
이다. 문제는 그 그림이 우주 비행을 하고 있는 우주비행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여덟 번에 걸친 나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해당 관청은 조명등과 카메라 작업을 30분간 허락했다. 그 덕분에 나는 그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독자들에게- 내가 첫번째 책에서 기록한 것보다 -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묘 덮개판은 하나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틀 중앙에 어떤 인 물이 몸을 앞으로 숙이고 (마치 인공위성 조종실에 있는 우주비행사처럼) 앉아 있다
이 독특한 인물은 헬멧을 쓰고 있는데, 그 헬멧에서 두 줄기의 호스가 나와 뒤쪽으로 넘어간다. 코 앞에는 산소 기구가 있다. 그는 두 손으로 어떤 제어장치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로 올린 한 손은 마치 바로 앞에 있는 단추를 눌로미세한 조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래쪽 손에서는 네 개의 손가락을 알아볼 수있다. - 새끼손가각은 구부러져 있다. 이 손으로 오토바이의 가스 조종관 비슷한 구조물을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뿐만 아니다. 왼발 뒤꿈치로는 여러 단계로 된 폐달을 밟고 있다.
팔렝케의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인물이 현대풍의 옷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턱 바로 아래 목의 파인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스웨터의 목 부분을 접어 입고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몸에 꼭 달라붙는 웃옷은 양쪽 손목의 접힌 부분까지 이어진다. 허리에는 안전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넓은 허리띠가 둘러져 있고 굵게 짜여진 바지와 발목을 조인 타이즈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 우주 비행사는위에서 아래까지 완벽하게 옷을 입고 있다.
긴장한 우주비행사가 무릎을 구부리고 들어앉아 있는 장치가 내 눈에는 그 다음의 공학적인 특징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안전벨트를 맨 우주비행사 앞에는 중앙 산소호흡기, 에너지 공급장치, 통신장비, 수동 조작장치, 우주선 밖을 관찰하는 장비 따위가 놓여 있다. 우주선의 선수 즉 중앙통제장치 앞에 있는 커다란 자석을 분간 할수 있다.
그것들이 우주선 덮개를 둘러싸는 자기장을 형성해 우주선이 높은 속도로비행할 때 미립자들이 튀어오르는 것을 막아준다.
우주 비행사 뒤로는 핵융합 통제장치가 보인다. 두 개의 원자핵이 도식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수소와 헬륨인 것 같다.
그림 테두리 바깥쪽인 우주선 선미에는 로켓 광선이 단순화되어 그려진 것 같다.
내가 해석한 그림 옆에는 마야 상형문자가 묘 덮개판의 테두리를 빙 둘러싸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마야인들이 '신의 사자(使者)'들로부터 받은 소식을 전하고 마야인들이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으로 그 역사를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외계의 존재가 머물고 간 후 인디언들은 그 황공스런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모든 장비를 총동원하여 부조로 영원히 새기려는 '자연스런'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당시의 석공들이 공학적인 지식을 몰랐다는 점은 제쳐놓더라도 이 일인용 우주선같이 공학적으로 복잡한 장치를 맨눈으로 보고 돌에 조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들은 하늘의 손님에게 조언을 부탁했을까?
외계인들이 마야의 예술가들에게 우주 차량의 단순한 설계도를 건네주었을까?
외계인들이 왜 그들의 지식과 비밀을 내놓았겠느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림을 자세히 보자
그것은 후대에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물을 남기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억측일지는 몰라도 나는 현재 부분적으로 해독된 상형문자들이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묘 덮개판의 그림이 일상적인 마야의 상징을 그린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 부조가 공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문학적 근거 또한없다. 시대에 뒤진 연구 가설 앞에 부동자세를 취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은 없다.
현재의 고고학은 우주비행 과학의 지식을 참조하기를 거절한다.
따라서 나의 견해를 거부하는 것은 편협한 짓일 뿐더러 묘 덮개판이 마야 문학으로부터 만족스런 설명을 들을 수 없다면 당연히 공학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나의 이론은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마음대로 상상해 보시길....^^
팔렝케에 있는 로켓을 타고 가는 신의 돌 문양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4억만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계산하고있는 마야의 달력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누가 이 믿을 수 없는 천문학적 지식을 전달했는가?
이 모든 사실이 마야의 정신문화의 우연한 산물인가? 아니면 이 모든 사실 뒤에- 특히 이 모든 사실을 하나로 엮은 것 뒤에 - 그 당시의 견해에서 보면 아주 먼 미래에 대한 기저를 뒤흔드는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kimzzz.com.ne.kr/main.htm
팔렝케에 대한 반론.. 팔렌케 우주인..
멕시코 치아파스(Chiapas)주의 유카탄 만에 있는 고대 마야도시 팔렌케(Palenque)에는 70피트 높이의 피라미드가 서 있는데, 이것을 '비명사원(Temple of the Inscription)'이라고 부른다. 1949년까지 그 내부는 탐험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그러던 것이 멕시코의 고고학자 루스(Alberto Ruz Lhuillier)가 커다란 바닥 판에 손가락 크기 만한 구멍을 발견하여 돌을 들어올려 숨겨진 계단을 발견하였다.
문제는 무덤 덮개를 장식한 돌 조각(stone carving) 때문이었다.
"무덤을 덮고 있는 석판 위에는 놀라운 조각된 양각그림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일종의 틀이 있다.
폰 데니켄은 이와 같이 무덤 덮개의 그림이 외계 우주인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으나 좀 더 자세히 전체 디자인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별개로 조사해보면 외계 우주인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사실상 이 무덤은 기원 683년에 사망한 마야 왕 로드-실드 파칼(Lord-Shield Pacal)의 무덤이다. 파칼 왕조의 역사는 이미 대리석 석판 뚜껑의 틀에 조각된 그림들, 팔렌케 사이트의 다른 사원에서 발견된 다른 그림들을 증거로 하여 이미 잘 확립되어 있다.
소위 '팔렌케 우주인(The Palenque astronaut)'의 내용을 좀 더 설명해 보자.
조정간은 손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배경에 있는 마야 태양신(Maya Sun God) 측면 그림에서나온 요소이다.
폰 데니켄의 외계 우주인은 이렇게 간단히 허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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