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녹동서원은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장수 모하당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3년(1789)에 건립한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84년 훼철되었다가 1914년 중건하였으며, 1971년 이전 하였다.
김해김씨(우록김씨) 시조 김충선 사야가(沙也可)의 일생은 우리에게 남다른 감흥을 준다.
[충절관(忠節館)]
전시관은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해 있으며, 김충선의 일생을 담은 영상도 보여주고 유물에
관한 설명도 해준다.
모하당 문집, ‘강화서-박진에게 보낸 투항의 글’ 등 여러 상소문과 교지, 칼, 활, 조총
등도 전시되어 있다.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되는 병조판서 교지는 사후 300년인 1892년(고종29) 받았다.
그는 전쟁 영웅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와 옳음에 대해 고민하던 한 인간에 불과했기에 당시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서서히 잊혀져갔지만, 고국 일본에선 매국노로 치부된 사야가(沙也可)
명분 없는 전쟁을 거부한 평화주의자로 재인식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일본사람들이 이곳을
더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신도비]
침략군이 되기를 거부한 일본인 사야가(沙也可)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세운 전쟁의 명분이란
것은, 단지 전쟁의 부당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침략을 하는 이도 저항을 하는 이도 모두 알고 있던 옳지 못한 명분이었지만, 조선을 침략해
들어온 20만 일본의 무사들은 그 부당한 전쟁의 명분에 침묵할 뿐이었다.
그들이 자랑하던 정의와 신의의 무사도 정신이란 것은 권력자의 강요 앞에선 보잘 것 없었다.
옳은 무사도가 사라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조선 백성을 향한 무차별 살인 그리고 권력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불의에 대한 굴욕뿐이었다.
임진왜란이 남긴 비극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향양문(向陽門)]
녹동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향양문이라 한다.
[임진왜란은 잘못된 전쟁이다]라는 신념을 가진 한 무사가 있었다.
그는 그 신념을 위해, 명예를 버리고, 동료를 버리고, 그리고 국가까지 버렸다. 그리고 그는 살육
의 전쟁에서 조선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들은 사야가(沙也可)를 재 조명하고 있다고 한다.그의 정의
로움을 연구하는 단체도 생겼다 한다.
기념관 뒷산으로 20분 정도 산길을 가면 김충선의 묘가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치만 묻고
돌아가지만 일본인들은 반드시 올라가 본다고 한다.
머나먼 일본에서 그를 보려 이곳까지 왔으니 당연할 것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라도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영달을 버리고 귀화해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준 그를 생각해서라도 그의 묘소
참배는 해야겠다.
무더위가 한창인 때에 찾아간 우리도 다른곳의 일정도 빠뜻하고 또 지쳐서 올라가보진 못하였다. 그러나 다음을 기약하고 되돌아섰다.
[좀더 가까이서 찍은 향양문(向陽門)]
녹동서원이 일본인 관광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김충선 장군의 귀화 배경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사야가(沙也可)장군이 평화와 인륜을 명분으로 조선에 자진 귀화한
것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녹동서원은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일본에는 김충선 연구모임까지 결성돼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현재 우록리에는 귀화 때 임금으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 장군의 후손 30여명이
살고 있다.
[녹동서원(鹿洞書院)]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명분 없는 전쟁
이라며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권율·한준겸·이순신장군과 서찰을 주고받으며 전술을 논하고 조총 만드는 기술도
가르쳐 주었으며, 또한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 13년 간 압록강 국경방어
를 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에게 내려진 벼슬도 가선대부, 자헌대부, 정헌대부 등이 있다.
김충선이란 이름은 조정에서 하사하였으며 목사 장춘점의 딸과 혼인. 이후 우록 일대에는 그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있다.
[오른쪽에서 찍은 모습]
400년 후인 지금,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한결같은 신념을 추모하고 배우고자 하며,
그를 배신자로 치부하던 일본인들마저 그의 발자취를 찾고 있다.
사야가(沙也可) 한국 이름 김충선, 그는 참 영웅이 였다.
그는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인이었고, 침략군이었지만 평화주의자였다.
또 그는 자신의 신념으로 옳지 못함을 옳음으로 바꾸었다.
[왼쪽에서 찍은 모습]
그가 한평생 남긴 '평화'와 '신념'에 대한 애착은 옳지 못함을 거부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그는 누구였으며,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힘이 없다는 이유로 부당한 전쟁을 거부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400년 전 그가 발휘한 용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녹동서원 현판글씨와 숭의당(崇 堂)]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20만 왜군 중 한 젊은이가 있었다.
나이는 스물 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일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좌 선봉장이자 젊은 나이의 무인으로 휘하에 수천 군사를 둔 장군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훗날의 명성과 지위는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의와 신의의 무사도를 가진 그는 조선을 침범한 임진왜란의 부당성에 대해
고뇌했다.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
그는 옳지 못한 전쟁을 거부하고 1592년 음력 4월 20일 수백 군사들과 함께 조선에 투항해
귀화하였다.
명성과 지위 그리고 국가까지 버려야 하는 선택이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선택이었기에 그의 고뇌와 고통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었으리라
그 고통은 그가 투항하며 쓴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처마]
옳지 못함을 거부하며 조선에 귀화한 그는 또 한번 어려운 선택을 한다.
바로 옳지 못한 침략으로 고통받는 조선 백성들을 위해 일본군과 스스로 맞서 싸운 것이다.
그는 곳곳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운다.
몰려오는 침략군에 맞서 자신의 의지로 동족인 일본 무사들을 베고, 또 죽였다.
스스로 자신의 민족을 베고, 죽여야만 한 그의 슬픔을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서원안에서 밖을 보고]
명분을 좇았지만 떠나온 고향 땅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김충선이 남긴 시문에는 그 애절한 향수가 곳곳에 배여 있다.
그가 남긴 詩로 그 슬픔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술회가(述懷歌)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
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
슬픈 마음 설운 뜻이 없다 하면 빈말이라
남풍유감(南風有感)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
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
홀연히 바람 소리만 날 뿐 볼 수가 없네
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
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이 없어
글로 서러워하노라
[충절관(忠節館)옆 녹동서원으로 통하는 출입문]
옳지 못함을 거스를 줄 아는 그였지만, 자신의 동족에 맞서야 했던 그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로
괴로웠으며, 아팠으리라...
일본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던 그의 신념 속에는 약하디 약한 한
인간의 고뇌도 함께 들어있었을 것이다.
[사당앞의 논]
그는 후손들에게 이같은 가훈을 남겼다.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짓고 살라. 여유 있을 때 틈틈히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
우록동은 후손들이 일궈낸 논밭으로 온통 녹색이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같은 파아란 벼. 논밭 전체가 바람따라 푸른 물결이 일렁인다.
오늘날의 이 눈부신 푸름도 김충선장군님의 옳바른 신념이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무조건 배타적인 선입견을 가진 나.
이런 휼륭한 생각과 올바른 정신을 가진 김충선 장군이 계셨다는 걸 알고는 그분의 올바른
생각과 정의로움에 과연 범인으로서 흉내라도 낼 수 있었을까?
아니 감히 생각이라도 해 볼 수 있었을까?
많은 생각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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