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조선의 정궁 경복궁(景福宮)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3:29

 

 

 

조선의 정궁 경복궁(景福宮)

 

복궁(景福宮)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된 조선의 법궁(法宮)이다.
1392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는
이듬해 1393년 10월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한양성(漢陽城)으로 천도하면서
맨 먼저 경복궁과 종묘, 사직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은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고, 이어(移御)는 태조 4년 1395년 12월이었다.


경복궁이라는 명칭은 삼봉 정도전이 시경(詩經)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궁궐 전각의 이름 대부분을 그가 지었다고 한다.
당시 궁내에 준성 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은 한양에 위치한 5대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경운궁) 중에
으뜸 궁궐이며, 도성의 북쪽에 있어서 북궐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복궁 건립은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면서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정종은 곧 궁성(宮城) 쌓는 일을 끝냈다.
태종 12년(1412)에는 박자청으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를 크게 다시 짓고
세종 8년(1426)에는 근정전을 고치고, 11년 4월에는 사정전(思政殿)을,
13년에는 광화문(光化門)을 고쳐짓고, 16년에는 광화문에 종을 달았다고 한다.


그 밖에 세종 15년엔 신무문의 중건과 강령전을 다시 짓고,
20년에는 흠경각을 준공하고, 25년에는 계조당을 신축했다.
그러니까 경복궁은 세종대왕(1397~1450)에 의해서 법궁 체제가 완비된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 38년(1543)에 동궁이 불타고
명종 8년(1553)에는 사정전과 흠경각, 왕의 침전인 강령전 일곽이 소신되었다.


명종 9년에는 불탄 건물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았지만,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전각들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영조 48년(1772)에 문소전 자리에 비와 비각을 세웠을 뿐,
고종에 이르기까지 273년간 빈터로 남아있게 된다.
참으로 슬프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고종 2년(1865년) 흥선 대원군의 주도하에 경복궁 중창이 시작되어
4년 만에 정궁(正宮)의 위용을 갖추었다. 이때 중창된 건물이 330여 동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이 다시 나 사라진 교태전과 자경전을 고종 13년에 복구했으나
또다시 불이나 이번에는 내전 830여 칸을 일시에 잃었다.
고종 25년 불타 없어진 건물을 다시 지으니 전각은 5,792간반, 궁성의 길이가 1,762간 이었다.


경복궁은 불에만 화를 당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하 때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의하여 헐리고 뜯겨
대부분의 전각이 사라지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궁궐은 헐어 내기 시작하였고,
1917년 창덕궁 침전이 불타자 일본인들은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을 헐어다가 창덕궁의 대조전과 희정당을 지었다.
게다가 연생전, 연길당, 경성전, 응지당, 원길헌, 함흥각, 건순각, 함원전, 홍복전, 광원당, 다경각 등
부속 행각들까지 200여 칸을 더 헐어내었다.
또 그것도 모자라 동문인 건춘문에서 서문인 영추문까지 궁성을 헐어내었고,
1926년에는 대한제국 국권의 상징적 건물인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웠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1990년부터는 경복궁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복원 되었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2001년에는 홍례문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세자궁인 비현각을 비롯하여 건청궁, 태원전 일원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경복궁!


정부중앙청사 14층에서 늘 바라보는 궁궐이다.
꽃이 피던, 비바람이 불던, 단풍이 들던, 눈이 내리던 왜 그 모습은
그리도 쓸쓸해 보이는 것일까?
한동안 근정전 보수 공사로 인하여 천막에 가려진 근정전을 또 몇 년이나
쓸쓸히 바라보았던가!


화요일이면 관람객이 없다(휴관). 그때도 쓸쓸하다.
사람 사는 곳에는 사람들이 찾아들고 북적거려야 집이고 궁궐이다.
궁궐은 박제된 건물이 아니다.
근정전의 뜰과 월랑을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담긴 선조의 이야기를 듣고,
건물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문화의 맥(脈)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는 나라를 외세에 내어 주거나 궁궐을 불태우고 헐어버리는 불행한 역사를
우리 손으로 다시 써서는 안 되겠기에.

 

사진은 경복궁 안내서 표지

 

 

 

 

 

 

 

 

 

 

 

 

 

 

 

 

 

 

 

  

경복궁 교태전(交泰殿)과 아미산(峨嵋山)


임금님의 침전인 강령전(康寧殿) 바로 뒤는
왕비의 침전이자 왕비가 내명부의 일을 처리하던 중궁전(中宮殿)이다.
그래서 왕비(王妃)를 중전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왕비전(王妃殿)의 이름은 교태전(交泰殿)인데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루는 태괘(泰卦)에서 따왔다고 한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양의문(兩儀門)이다.
쉽고 가볍게 여닫을 수 있도록 당판문으로 만들었으며
궁궐의 여느 대문과는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문 하나에서도 여성을 위한 세심함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부분이다.
보는 눈을 높여 가면서 터득하는 재미가 솔솔하니 기분이 좋다.


양의문 가운데 열린 문으로 교태전을 바라다본다.
강령전 전면과 같은 석보계(石補階) 방단이 보이지 않는다.
창덕궁의 왕비전인 대조전(大造殿) 앞에는 나지막하고 널찍한 방단이 있었는데
교태전에는 없다.
그 대신 가지런하니 세 개의 돌계단이 다섯 충으로 놓여있다.


너무나 정갈하고 이쁘다.
‘저 돌계단 아래로 남색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은 무수리가 도열해 있고,
왕비는 임금님을 맞으려 치맛단을 살며시 들고 돌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곤 따스한 봄빛과도 같은 미소로 나의 시선을 이끈다.‘
상상만 하여도 기분 좋은 모습이다.


교태전도 강령전과 같이 지붕꼭대기에 용마루를 설치 않았다.
이렇게 등마루가 없는 집을 무척당(無脊堂)이라고 하는데 임금과 왕비의 침소인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과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도 용마루가 없다.
그런데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에는 용마루가 있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났을 때 일인들이 불탄 것을 복구한답시고


경복궁에 있는 강녕전을 헐어다 지으면서 용마루를 올렸다고 한다.
한국의 현대사를 보면 과거 일인들의 만행에 피가 거꾸로 흐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침전에 용마루를 두지 않은 것에 관하여 그 의미가 정확히 확인된 정설(定說)은 없다.
다만, 중궁전만은 어김없이 용마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의 가설이 유력하다.
임금과 왕비의 동침은 종묘사직을 이어갈 왕자를 생산하는 행위이므로 예사롭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합방의 길일(吉日)을 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고 음양의 정기가 잘 조화되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게 보았다.
그래서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짓는 용마루가
경우에 따라 하늘과 땅의 교합(交合)을 막는다고 보아 용마루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 그럴 듯한 가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태전은 강령전 보다 규모가 크다.
사실 단일 건물로서는 교태전이 작으나, 교태전 동편의 원길헌과 서쪽의 함홍각
그리고 뒤로 ‘ㄱ’자형으로 달아낸 건순각까지 합치면 크다는 예기이다.
교태전 대청에 올라 중전의 침전을 들여다보고는 툇마루에 앉아 아미산(峨嵋山)을 바라본다.
감회가 새롭다. 금년 3월부터 강령전과 교태전 대청을 개방하여 누리는 호사다.


'아미산'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마당에 화원을 꾸미지 않아 후원이 발달하였다.
아미산은 경사면에 길게 다듬은 돌을 4단으로 쌓아 꽃계단을 만들고,
단 위에는 반송(盤松)을 심고 매화와 모란, 앵두, 철쭉 등 화목(花木)을 얕얕하게 심어
원림(園林)을 만들고 사이사이에는 석분(石盆), 석연지(石蓮池), 세심대(洗心臺)를 두었다.


아직은 벌 나비가 날지 않아 운치가 깊지는 않지만 아미산의 굴뚝은 선명히 다가온다.
그전에는 교태전 함향문을 지나 아미산 앞마당을 지나면서
무수리의 시선으로 아미산을 구경하였는데
지금은 중전의 눈높이에서 아미산을 바라본다.
마당에서 서성이는 무수리의 거동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교태전 툇마루에는 중전도 임금님도 없다.
고운 무늬로 장식한 등메도 깔려있지 않지만 엉덩이가 시리지만
지금은 내가 중전인 것이고 임금인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미산의 굴뚝이다.
굴뚝은 모두 4개로 붉은 기운이 도는 육색 전돌(벽돌)로 육각형으로 쌓아 올렸다.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
십장생과 사군자 그리고 장수 부귀 등 길상(吉祥)의 무늬와
화마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을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다.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는데 나오는 그림마다 한결같이 소박하고 그 의미가 깊다.
민족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경복궁 보기(강녕전/교태전)

 

 

강녕전康寧殿) : 아미산후원을 보려면 강녕전과 교태전을 거처야 한다.강녕전은 왕의 침전이다

 

 

교태전(交泰殿) : 궁궐의 중심에 있어 중궁전 이라고도 하는데 중전마마인 왕비의 침전이다

 

 

아미산 후원은 교태전의 뒤에 있다.수석과 식물들로 아름답게 꾸민 계단식 화단이다.(왼쪽이 교태전 뒷난간)

 

 

 

 

 
Amsterdam Sur Eau / Claude Ci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