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處女) 시절
[편집] 당대 최대의 명문가이자 세도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남
한씨의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면서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작위를 하사받은 조선 최고의 세도가였다.
또한 한씨의 큰 고모는 명나라 제 3대 황제 영락제 태종(永樂帝 太宗)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였으며, 작은 고모 역시 명나라 제 5대 황제 선덕제 선종(宣德帝 宣宗)의 후궁인 공신태비(恭愼太妃)였다. 큰고모가 영락제 사후 순사되었는데,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명나라 선덕제는 그의 둘째 고모를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씨의 둘째언니는 세종의 둘째 서자인 계양군(桂陽君)의 부인으로 한씨의 가문은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의 외교관으로서 명나라의 총애를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편집] 도원군부인(桃源君夫人) 시절
[편집] 수양대군의 맏며느리가 되다.
1450년, 문종이 병약하고 어린 세자사이에서 황보인, 김종서등과 대립하고 있었던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 큰아들인 도원군과 세도가 한확의 막내 여식인 한씨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인 계양군의 처제였고, 시어머니가 될 정희왕후의 형부인 홍원용의 생질녀(누이의 딸)였고, 외종언니인 강녕부부인(홍이용의 딸)은 평원대군(세종의 일곱번째 왕자)의 정실이었으므로 여러모로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한씨는 나이 13살에 수양대군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편집] 군부인 책봉, 월산군을 낳다
도원군과 혼인하여 도원군부인 한씨(桃源君夫人 韓氏)가 되었다. 남편이 대군(大君)의 아들로 승습(承襲)하지 않았음으로 한씨의 품계는 정 2품(正二品)이었고, 작호는 없었다.
1454년 갑술년에는 잠저에서 첫 번째 자녀인 월산군을 낳았다.
[편집] 왕세자빈(王世子嬪) 시절
[편집] 궁궐에 들어감, 세자빈이 되다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하고 아들인 도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자신도 왕세자빈이 되었다. 그해 동궁(東宮)에서 두 번째 자녀인 태안군주를 낳고, 익익년(翌翌年) 1457년에는 세 번째 자녀인 자산군(훗날 성종)을 낳았다.
[편집] 폭빈이라 불림
왕세자빈 한씨는 젊어서부터 빈틈이 없고, 시부모(세조와 정희왕후) 섬기는 일엔 극직해서 세조로부터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늘 들었지만 두아들 월산군과 자산군에겐 엄한 어머니였다. 사소한 과실만 있어도 추호도 감싸는 법 없이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조(수양대군), 중전 윤씨(정희왕후) 내외가 농담 삼아 부르게 된 별명이 폭빈(暴嬪)이었다.
[편집] 남편의 죽음
1457년, 친정아버지 한확의 객사와 함께 남편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녀의 연이은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세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궁궐에서 살도록 허용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였다.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면서 시아버지 세조로부터 정빈(貞嬪)의 작호를 받아, 정 1품(正一品) 정빈 한씨(貞嬪 韓氏)가 되었으나, 을유년인 1465년에 세조가 교지를 통해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세자빈(世子嬪)이 되었을 때 정빈(貞嬪)으로 책봉(冊封)하였으나, 수빈(粹嬪)으로 고친다는 명으로 그녀의 작호가 수빈 한씨(粹嬪 韓氏)가 되었다.
[편집] 수빈(粹嬪) 시절
[편집] 시아버지 세조의 맏며느리 사랑
남편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죽음으로 두 아들과 함께 출궁해야만 했던 며느리를 안타깝게 여기던 세조는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사당 옆에 수빈 한씨의 집을 마련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이다.
또한 1467년에는 수빈 한씨가 병으로 자신의 둘째 언니인 계양군부인(桂陽君夫人)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시아버지이자 임금이었던 세조가 궁궐에서 몸소 나와 계양군부인(桂陽君夫人)집에 문병차 거둥하였다. 그리고 병조(兵曹)에 명하여, 군사(軍士) 10명을 보내어 수빈(粹嬪)이 요양하고 있는 계양군부인(桂陽君夫人)집을 지키고 호위(護衛)하게 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다시 문병을 갔는데 왕비(王妃)윤씨와 동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땅을 하사하였다.
[편집] 권신 한명회와 사돈을 맺다
남편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죽음으로 중전(中殿)의 꿈을 접어야만 했지만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당대의 권신 한명회의 넷째 딸(한씨(훗날 공혜왕후))와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또한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睿宗)이 승하한 후에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 대신 자산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편집] 임금의 형수
1468년 시아버지 세조가 시동생인 해양대군(예종)에게 양위하고 곧 승하하였다. 왕의 맏며느리에서, 왕의 형수로 처지가 바뀌었지만 영향력과 위세는 여전히 대단했다.
임금(예종)이 병조(兵曹)에 전지하여 "수빈(粹嬪)에게 대군(大君)의 예(例)에 의하여 반인(伴人)을 지급하라."고 명하였고 1469년에는 엽관운동(獵官運動), 즉 분경(奔競)이 심했는데 임금이 교지로 "대비(大妃)와 중궁(中宮),수빈(粹嬪) 이외에 벼슬을 자청(自請)하는 자는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했을정도였다.
[편집] 둘째 아들이 보위에 오르다
시동생 예종이 재위기간 14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죽자 조정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논의가 있었으나, 예종의 맏아들인 제안대군은 나이가 겨우 3살밖에 되지 않아 무리가 있었고, 권신 한명회(자을산군의 장인), 신숙주등과 왕실의 어른 정희대비의 결정으로 의경세자(懿敬世子)와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된다.
[편집] 모후(母后) 시절
[편집]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함
수빈 한씨(粹嬪 韓氏)의 아들(성종)이 왕위(王位)에 올랐으나 그녀는 아들의 인사(人事)를 받지 못하였다. 임금의 어머니(모후)가 되므로 마땅히 인사를 받아야 했지만, 성종은 생부(生父)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아닌 작은아버지가 되는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王位)의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수빈 한씨(粹嬪 韓氏)가 성종의 어머니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성종의 법적 어머니가 되었다. 따라서 수빈 한씨(粹嬪 韓氏)는 국왕의 모후(母后)가 되는 왕대비(王大妃)의 자격이 아니라 그저 왕세자(王世子)의 부인으로써 정 1품(正一品) 빈(嬪)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신관계(君臣關係)상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한 것이다.
다만 국왕의 생모(生母)가 되므로, 궁궐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녀의 호(呼)를 붙여 수빈궁(粹嬪宮)이라 했다.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저(덕수궁)는 그녀의 장남인 월산군(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편집] 왕비(王妃)냐 대비(大妃)냐
수빈 한씨(粹嬪 韓氏)가 왕(성종)의 어머니임에도 인사(人事)를 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자 조정에서 이 일이 논의 중에 있었다. 문제는 그녀를 왕비(王妃)로 추숭하느냐, 왕대비(王大妃)로 추숭하느냐였다.
이 문제는 그녀의 남편인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왕(王)으로 추숭하느냐,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의경세자를 단순히 왕(王)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비(王妃)가 되는 것이었고, 의경세자를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대비(王大妃)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대신들의 의견이 엇갈린 상황에서 신숙주(申叔舟)가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추숭(追崇)하여 의경왕(懿敬王)을 삼으나 종(宗)이라 일컫지 말며, 수빈(粹嬪)은 다만 인수왕비(仁粹王妃)라고만 일컬어 (인혜왕대비 : 예종 비)와 구별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여 그대로 되었다.
[편집]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다
결국 조정의 논의 끝에 수빈 한씨(粹嬪 韓氏)가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어 아들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왕비(王妃)라 함은 왕(王)의 부인을 일컫는 것인데, 한씨는 왕(王)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대비(王大妃)가 되야 마땅했다.
[편집]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와의 서열문제
왕실에는 성종의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 법적 어머니인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 친어머니인 인수왕비(仁粹王妃). 이렇게 세 분의 윗전이 있었다. 왕실 서열 1위는 할머니가 되는 자성대왕대비(慈聖大王大妃)로 문제가 없었으나 왕실 서열 2위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냐 인수왕비(仁粹王妃)의 서열을 놓고 문제가 있었다.
당시 사관(史官)이 성종에게 아뢰길 "예종조에 예종비(睿宗妃)였던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는 당시 중전(中殿)이었고, 인수왕비(仁粹王妃)는 정 1품(正日品) 수빈(粹嬪)으로 군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인혜왕대비를 윗전으로 해야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원상(院相)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길 "인수왕비는 이미 존호(尊號)를 높이어 명위(名位)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마땅히 형제(兄弟)의 서열로 차서를 하여야 합니다." 하였고, 자성대왕대비의 또한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 의 서차(序次)가 일찍이 인수왕비(仁粹王妃)의 위에 있었으나, 그러나 세조(世祖)가 항시 인수왕비에게 명하여 예종(睿宗)을 보호하게 하고 시양(侍養)이라고 일컬었으며, 또 장유(長幼)의 차서(次序)가 있으니, 그 위차(位次)는 마땅히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의 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수왕비(仁粹王妃)는 왕실 서열 2위가 되었고 예종비(睿宗妃)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는 왕실 서열 3위가 되었다.
[편집] 마침내 대비(大妃)에 오르다
왕실 서열 2위의 인수왕비(仁粹王妃)였지만, 그녀에게는 왕대비(王大妃)에 오르는 것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었다. 1474년, 마침내 성종의 의지로 생부(生父)인 의경왕(懿敬王)을 추봉(追封)되었고, 그 결과 의경왕(懿敬王)이 덕종(德宗)의 묘호를 받았다. 왕의 생모(生母)가 되는 인수왕비(仁粹王妃) 또한 왕대비(王大妃)로 진봉되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되었다.
[편집] 삼대비(三大妃)를 위해 창경궁 건축
왕실에 세 분 윗전 자성대왕대비(정희왕후), 인수왕대비(소혜왕후), 인혜왕대비(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건축하였다.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등이 건립되었으며 인수왕대비는 이 중 경춘전(景春殿)에서 거처하였고 그곳에서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편집] 아들의 죽음과 대왕대비(大王大妃) 진봉 후 손자와의 갈등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소혜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휘호는 자숙(慈淑)이였다.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 자숙대왕대비(慈淑大王大妃)로 불렸다. 왕세자 시절 자신이 정현왕후의 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즉위 이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貴人 鄭氏)와 귀인 엄씨(貴人 嚴氏)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고 그 뒤에도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을 강제로 대왕대비전으로 끌고가 인수대비에게 술잔을 강제로 따르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인수대비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이는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원수인 할머니에 대한 처절한 부르짖음이자 응징이었다.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다. 이에 인수대왕대비는 얼마 후 그 충격으로 6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인수대왕대비가 승하한 뒤에도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장례를 간략하게 치르고 계모인 자순대비(정현왕후)에게도 행패를 부리는 등 패륜의 극치를 보이다 소혜왕후 승하 2년 뒤인 1506년에 박원종과 유순정 등에 의해서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편집] 기타
인수대비의 성격은 강직했던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성종의 정비(正妃)인 공혜왕후의 승하 이후 계비로 책봉된 중전 윤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급기야는 성종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내는 지경에 이르자 진노한 인수대비는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았으며 폐비 윤씨를 투기하였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과 함께 성종으로 하여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수대비는 당시 원자이자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의 왕위 계승에도 부정적이었으며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의 소생 진성대군(晉城大君)을 편애하였다.
[편집] 유일한 왕비 상위릉(경릉)
소혜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위치한 경릉(敬陵)으로 남편인 덕종과 같은 묘역에 묻혀있으며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왕비가 우측(누워있는 시신 기준)에 안장된 능으로 조성되어 있다. 본디 왕릉을 쓸 때는 우측에 왕을, 좌측에 왕비를 안장한다. 살아있을 때는 좌측(앉아있는 사람 기준)이 상석이니 죽으면 그 반대라고 여겼던 것인데[출처 필요], 경릉은 부인인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덕종의 경우는 승하할 때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의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편 덕종의 무덤에는 석물도 문인석만 서 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이라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세자빈 이하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다. 소혜왕후 능상의 석물은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편집] 저서
소혜왕후는 생전에 독실한 유교인텔리임과 동시에 불교신자였으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 한어(漢語), 국어(國語) 3자체(三字體)로 서술한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내훈》(內訓)을 남겨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편집] 불교 옹호
성종은 즉위 직후 성리학적 왕도정치에 입각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의 제자와 길재학파의 사류를 적극 등용했다. 이들은 왕도정치의 한 방법으로 불교, 도교, 무속 등의 종교행사를 미신으로 간주, 미신타파를 부르짖었다. 한편 소혜왕후는 불교신자이자 불교 옹호론자로 사림의 미신타파 주장과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 반발하였다. 또한 세종과 세조가 불당에 출입한 고사를 들어 궐내 법당을 철폐하려는 사림의 주장에 맞서곤 했다. 궁궐에 설치한 불당은 선조대에 가서야 철폐된다.
[편집] 가족관계
- 시아버지 : 세조(世祖)
- 시어머니 :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 아버지 : 좌의정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 한확
- 어머니 :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 홍씨
- 외조부 : 홍여방
- 외조모 : 정씨부인 - 정창손의 고모
- 외숙부 : 홍이용
- 외사촌언니 : 강녕부부인 - 평원대군의 처 : 시숙모이기도 하다
- 외숙부 : 홍원용 - 세조의 동서
- 외숙모 : 윤씨부인(홍원용의 처) -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언니
- 외숙부 : 홍이용
- 남편 : 덕종(德宗)
- 첫째언니 : 이계녕의 처(이직의 며느리, 덕종의 숙부 영해군의 처외조모)
- 둘째언니 : 정선군부인 한씨(덕종의 숙부 계양군의 부인) - 인수대비와는 시숙모-질부의 관계이기도 하다.
- 셋째언니 : 김자완의 처
- 넷째언니 : 최정의 처
- 다섯째언니 : 권집의 처
- 오빠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서성군(西城君) 한치인(韓致仁)
- 한치인의 증손자인 한경록는 중종의 딸 의혜공주와 결혼하였고, 한치례의 증손자 한경우는 중종의 딸 정신옹주와 혼인하였다. 한경록과 한경우는 팔촌간이면서 동서간이기도 하다.
- 첫째 남동생 : 청양군(淸陽君) 한치의(韓致義)
- 둘째 남동생 : 서릉부원군(西陵府院君) 한치례(韓致禮)
- 올케 : 안씨(한치례의 처) - 정의공주(세종의 딸)와 안맹담의 딸
- 조카 : 한익 - 박중손의 사위이자 월산대군의 동서이기도 하다. 한익과 월산대군은 내외종 4촌간이면서 동서간이다.
- 올케 : 안씨(한치례의 처) - 정의공주(세종의 딸)와 안맹담의 딸
- 사촌오빠 :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한치형(韓致亨)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위
- 사촌남동생 : 한충인(韓忠人) : 중종비 단경왕후의 외조부
- 숙부 : 한질(한치형의 부), 한전(한충인의 부)
- 숙모 : 김씨(한전의 처이자 태종의 증손녀, 문종의 휘빈김씨의 조카) - 태종의 2녀 경정공주가 조대림(개국공신 조준의 아들)과 혼인하여 낳은 딸이 김오문(문종의 장인)의 아들인 김중엄과 혼인하여 낳은 딸
- 8촌오빠 : 한백륜 - 예종왕비 안순왕후의 생부
- 사돈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 장순왕후(章順王后),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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