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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 무신정권 연대기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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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260년 2년 무신정권기 유일한 문인 실권자.일반적으로 문인이기에 무신정권 계보에서 빠진다. 9대 김준 1258년(1260년) 1268년 10년(8년) 원종 10대 임연 1268...

 

 

1258년 1260년 2년 무신정권기 유일한 문인 실권자 . 일반적으로 문인이기에 무신정권 계보에서 빠진다. 9대 김준 1258년 (1260년) 1268년 10년 (8년) 원종 노비 자손...

 
 

고려 무신정권 계보 (1): 1170~1270,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 중도교정 한국 / 세계사-상식 족보 2012/05/02 18:45* 외통수 : 무신정권의 시기는 1170~1270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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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정권의 앞서 1170~1270년

     

     그 시기 최고의 실권자였던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머리글자를 따 '정경이'로,  

    그 뒤를 이은 최충헌-최우-최항-최의의 최씨 정권은 이름을 따 '충우항의'로,  

    그 뒤를 이은 김준, 임연-임유무는 머리글자와 이름을 따 '김임연유'로 하여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로 만들어 외운다.

     

    그리고 당시 무인들이 정사를 펼치던 중심기구인 중방, 도방, 교정도감, 정방 순서를 ‘중도교정’으로 하여 외운다.

     

     

    0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은

    100년 동안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로,

     

    정중부(1106~1179),

    경대승(1154~1183),

    이의민(?~1196),

    최충헌(1149~1219)-

    최우(?~1249)-

    최항(?~1257)-

    최의(?~1258),

    김준(김인준. 1258~1268),

    임연(?~1270)-

    임유무(?~1270)로 이어졌다.

     

     

    고려 귀족문화의 번영기를 지나면서 임금과 문신들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는 가운데 무신에 대한 무시와 핍박이 극심해져갔다.

     

     급기야 1170년 의종 24년 무신에 대한 천대를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중심이 되어 보현원에서 오병수박희를 열어 무신의 노고를 위로하려 만든 자리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뢰에게 구타당하자 격분하여 난을 일으켜 임금과 태자를 축출하고 문신들을 대거 죽이거나 쫓아냈다.

     

    곧이어 인종의 셋째아들이자 의종의 동생인 명종(1170∼1197)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 고려는 고구려에 이어 수박(태견, 태권도의 전신)으로 무예를 단련하였는데, 그 날도 무신들끼리 1대1 대결을 펼쳤는데 이소응이 젊은 상대에게 패하자 한뢰가 그를 조롱하며 때린 것이 무신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다.

     

    - 문신 김돈중은 김부식의 아들로 촛불로 나이든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으며, 당시 그 아비인 김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라 정중부는 두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새겨 두게 되었다.

     

     1167년 의종 21년 때 ‘화살 사건’이 일어나 또다시 김돈중은 무신 쿠데타의 결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나들이를 즐기던 의종이 행차하는 도중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잘못하여 어느 무사의 말과 충돌하여 그로 인해 화살통에서 화살 한 대가 왕의 가마 옆에 떨어졌다.

     

    의종은 이를 암살 미수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김돈중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후 화살의 주인을 찾으려 소동을 벌였지만 별다른 상황이 없자 당시 호위를 맡았던 무인들인 견룡∙순검∙지유 가운데 14명이 희생양 비슷하게 귀양을 가게 되어 무신들이 분노가 끓어 올랐다.

     

    또한 보현원에서 무신난이 일어나자 김돈중은 재빨리 도망쳤는데,

     의당 개경으로 돌아가 사태를 진압했어야 했지만 감악산으로 도망가 숨었다가 자기 종자의 신고로 잡혀 죽는다.

     

    - 무인들은 정변 이후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무신세력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

     1171년 이의방이 함부로 발호하던 이고를 제거했다.

     

    이 와중에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 집권 타도를 위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죽였다.

     

    이듬해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또다시 난을 일어났다.

     

     그러자 당시 일인자로 행세하던 이의방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이의방 또한 정치에 서투른데다 하급 무사에 대한 처우개선을 하지 않는가 하면 불교계를 탄압하며 민심을 잃어 갔다.

     

     이 때를 틈타 정중부는 1174년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 정중부(1106~1179)가 실권을 잡았지만 조정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조위총의 난도 2년이 더 지나 평정되는가 하면 공주에서 망이∙망소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전국에서 끊임없는 변란이 이어졌다.

     

    이에 정중부는 중앙의 안정을 위해 문신을 우대하고 지방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막후정치를 주도하면서 국정을 전횡하다 결국에는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정균(정중부의 아들)∙송유인(정중부의 사위)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 경대승(1154~1183)은 젊고 청렴하며 원칙이 분명한 무인이었는데, 무신들의 횡포와 부패에 분노하여 정중부와 그 일당들을 타도하며 집권했다. 이후 그는 정중부 지지 세력이 잔존하던 중방을 무력화하고 특수 무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만들어 무력을 장악하는 한편 왕권 강화 정책을 중시했다. 또한 함께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허승과 김광립이 발호하자 1180년 제거했고,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는 한편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에는 예외없이 처벌하여 국가질서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183년 경대승이 30살의 나이로 갑자기 병사하자 그의 정권도 무너지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그 이후 경주에 가 있던 이의민이 개경으로 올라와 정권을 잡는다.

     

    - 이의민(?~1196)은 천민 출신으로 경군(京軍)에 있다 수박을 잘 해 의종의 총애를 받으며 별장이 되면서 급성장하였으나,

     

    경대승이 집권하자 잠시 경주로 피신 겸 낙향해 있다가 그가 죽자 명종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 집권한 것이다.

     

    그러나 이의민은 원래부터 인품이 좋지 못해 횡포와 착취를 일삼았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 이지영이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아 가자 그의 형인 최충헌이 분노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 있는 것을 알고 쫓아가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출처] 고려 무신정권 계보(1): 1170~1270,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 중도교정

      

    무신>에서 불태운 팔만대장경, 사실일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무신>, 아홉 번째 이야기
    12.06.25 21:06 ㅣ최종 업데이트 12.06.25 21:06 김종성 (qqqkim2000)

      
    몽골군에 의해 불타는 팔만대장경. 고려 스님들이 대장경과 함께 불에 타고 있다. 드라마 <무신>의 한 장면.
    ⓒ MBC
    팔만대장경

    MBC 드라마 <무신>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고려-몽골 전쟁(여몽전쟁) 중에 불교계가 국난 극복을 위해 보여준 헌신적 희생들을 보여주고 있다. 무신정권과 보조를 맞춘 불교계는 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어 서민대중에게 희망을 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신정권과 고려 불교의 반대편에 있었던 것은 몽골 침략군이다. 몽골군은 대구 부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파괴했음은 물론이고, 경기도 흥왕사를 불태우고 경주 황룡사 구층탑까지 파손했다. 23일 방영된 제37부에서 몽골 진영은 "불교나 부처에 관한 것은 모두 불태워버린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라며 위협하기도 했다.

     

    불교에 대한 드라마 속 몽골 사람들의 태도는 무지하고 야만스럽기 그지없다. 팔만대장경이나 사찰이 불탈 때마다 그들이 짓는 험악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은 불교나 석가모니에 대해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야만인들의 표정과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시청자들의 눈에는 여몽전쟁이 '불교 대 야만'의 대결처럼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몽골은 고려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불교를 아낀 나라였다. 여몽전쟁 중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 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몽골족이 몽골초원의 지배자로 떠오르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그 초원이 몽골초원이라 불리기 이전부터 초원지대와 인근에서는 다양한 종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곳에서는 전통적인 샤머니즘(무속신앙) 외에 가톨릭과 불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니, 13세기 이전에 가톨릭이 몽골초원에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은 이미 당나라(618~907년) 때 중국에까지 전파됐다.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보다 끔찍하게 불교를 아낀 나라, 몽골

     

      
    오늘날의 몽골초원. 사진은 내몽골 초원의 모습.
    ⓒ 김종성
    몽골초원.

    다만, 아시아에 알려진 가톨릭은 정통 가톨릭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출신인 네스토리우스(?~451?)의 성경 해석을 따르는 교파였던 것이다. 그는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는 하지만, 신의 어머니는 아니다'라는 비(非)성모설을 주장했다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유목민족의 역사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1885~1952)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몽골제국 등장 이전에 중국-중앙아시아 접경지대나 몽골초원에서는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함께 불교·네스토리우스파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이전만 해도 이 지역이 초원길이나 비단길을 통해 유라시아대륙의 동서 문화교류를 주도적으로 매개했으므로, 이곳이 한반도보다 훨씬 더 빨리 가톨릭을 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칭기즈칸이 속한 몽골족은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을까? 몽골초원을 정복하기 이전에, 몽골족은 초원 동쪽에 있는 삼림지대에 살았다. 이들이 유목민으로 전환된 것은 초원에 진입한 이후였다.

     

    몽골초원 주변의 삼림민족이 초원에 진입한 뒤 유목민족으로 전환되었다가, 중국 농경지대에 진입한 뒤에는 농경민족으로 전환되는 것이 동아시아 민족이동의 일반적 패턴이었다. 이런 패턴은 박혁거세 신화나 김수로 신화 같은 한국 고대 신화에서도 곧잘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삼림지대에서 가장 강력했던 신앙은 샤머니즘이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무속신앙이 특히 강했던 이유 중 하나도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산악이 많은 지역은 샤머니즘의 전파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샤머니즘에서는 천신이 산을 통해 인간 세상에 하강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산악을 신성시하고 숭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악지대 주민들은 샤머니즘을 수용하기가 수월했다. 삼림지대에 살던 당시의 몽골족이 샤머니즘을 숭상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의 전설이나 설화에서 산신 할아버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오늘날의 무속인들이 수행을 위해 산을 찾는 것이나 한국 사찰에서 산신각을 짓는 것에서도 샤머니즘적인 산악숭배의 잔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등산을 좋아하는 것이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몽골족은 본래 샤머니즘을 숭상했지만, 몽골초원에 진입한 뒤부터 새로운 종교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초원과 그 주변에서 유행하던 불교나 네스토리우스파와 만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새로운 종교문화에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 수용하기까지 했다는 점은, 여몽전쟁 중에 벌어진 획기적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 힘 빌려 세계정복 정당성 구축하려 하기도

     

      
    북경에 있는 티베트불교 사찰인 옹화궁.
    ⓒ 김종성
    옹화궁

    고려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240년, 몽골은 티베트고원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티베트는 통일적 정치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티베트불교(라마교)의 분파들이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티베트는 군사적 측면에서는 몽골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전쟁 초반의 승세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몽골 병사들이 티베트 고원의 혹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행군·작전수행·보급 등에서도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이 창안해낸 전략은 티베트와의 타협이었다. 티베트불교의 최대 종파인 사캬파와 제휴하여 간접 지배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티베트불교의 최대 종파는 겔룩파이고 겔룩파의 지도자는 달라이라마라고 불린다. 13세기 당시에는 최대 종파가 사캬파였고 사캬파의 지도자는 사캬라마라고 불렸다. '라마'는 스승이란 의미다.

     

    몽골의 전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몽골은 사캬파에게 티베트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사캬파는 몽골의 패권을 인정하고 종교적 차원에서 몽골의 세계정복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이른바 윈-윈 전략이었던 것이다.

     

    몽골제국은 티베트를 간접 지배하는 선에서 그치되 티베트불교의 종교적 힘을 빌려 세계정복의 이론적 정당성을 구축하고자 했다. 서로마제국이나 프랑크왕국이 로마교황청을 보호해주는 대신에 로마교황청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 전례를 응용한 것이다.

     

    티베트인민출판사에서 사캬파의 세계(世系, 계보)를 정리할 목적으로 발행한 <사캬세계사>에 따르면, 몽골의 전략이 현실화된 것은 여몽전쟁이 한창이던 1247년부터였다. 1247~1259년 기간에는 몽골 지방정부와 사캬라마 사이에서 이런 제휴관계가 존재했고, 1260년 이후에는 몽골 카칸(황제·대칸·칸)과 사캬라마 사이에서 이런 관계가 존재했다. 여몽전쟁이 진행될 때 몽골과 불교의 관계가 한층 더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이 단순히 불교를 보호하거나 이용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불교국가까지 지향했다는 점은, 여몽전쟁(1231~1270)이 종반에 접어든 1260년 이후의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나라 즉 몽골 역사서인 <원사>의 '파스파 열전'에 따르면, 몽골제국 카칸인 쿠빌라이는 1260년에 제5대 사캬라마인 파스파를 국사(國師)에 임명한 데 이어 1269년에는 그를 대보법왕(大寶法王)으로 추대했다. 사캬라마를 일종의 교황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조치들을 발판으로 불교국가 몽골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해 갔다.

     

    훗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에 티베트불교를 적극 권장한 것도 몽골제국의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티베트불교가 유목민족의 세계정복을 뒷받침했던 선례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몽전쟁, '불교와 야만의 충돌' 아닌 '불교와 불교의 충돌'

     

      
    옹화궁 법륜전에 있는 불상. 사진 출처는 중국 외문출판사가 발행한 옹화궁 도록.
    ⓒ 중국 외문출판사
    옹화궁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인들은 드라마 <무신>에서 비쳐진 것처럼 불교에 대해 무지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몽전쟁 초기에 그들은 불교를 한창 알아가는 중이었고, 여몽전쟁 중반에 이르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를 숭상하는 민족이 되었다.

     

    티베트불교는 고려 불교와 완전히 딴판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불(成佛)의 방법론에서만 차이를 보였을 뿐 양자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불교였다. 고려불교는 타인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을 더 중시한 데 비해 티베트불교는 타인 구제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인도에서 쇠약해진 불교를 되살리고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티베트불교였고, 그런 티베트불교를 적극 보호하고 뒷받침한 것이 몽골제국이었다. 몽골민족 역시 불교 사랑에 관한 한 우리 민족 못지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여몽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고려는 물론이고 또 다른 당사자인 몽골 역시 불교국가였다. 따라서 여몽전쟁은 종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불교와 불교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불교와 야만의 충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여몽전쟁 중에 몽골군이 고려의 불교문화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을 근거로 몽골과 불교의 관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이것은 20세기 세계대전에서 기독교 국가들이 상호 투쟁한 것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는 문제다. 기독교 국가가 기독교 국가를 침공했다고 해서 기독교에 대해 무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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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실록] 김준과 임연의 말기 무신정권

     

    1258년 3월 최씨 무신정권의 4대 계승자 최의가 유경, 김인준, 임연 등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려 무신정권은 전환기를 맞받는다고고 합니다. 그리고, 60여 년간 지속되던 최씨 일가의 권력 독점이 종결되고 형식적이나마 정권이 왕에게 돌아가면서 무신정권은 말기적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지만 80년 이상 지속되던 무신정권의 틀은 쉽게 무너지지 않받는다고고 합니다. 그리고,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실세로 등장한 유경, 김인준 등이 여전히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무신정권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이어지던 제1기 형성기와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로 세습된 제2기 심화기를 지나 제3기 해체기로 접어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3기 무신정권을 주도한 사람은 유경과 김인준이었어요. 그리고, 물론 초기에는 대사성으로 있던 유경이 제1등 공신에 올랐고 별장 출신인 김인준은 그 아래 있었어요. 그리고,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김인준의 힘이 강해졌고 결국 1260년 6월에 공신 1위였던 유경이 제5위로 전락하고 김인준이 제1위로 되면서 정권은 김인준의 차지가 되었어요. 그리고,

     


    김인준은 최충헌의 노비 김윤성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김윤성에게는 인준과 승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인준은 기골이 장대하고 궁술에 능한 인물이었어요. 그리고, 최이의 측근 박송비와 송길유는 김인준의 이 같은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최이에게 그를 추천하였어요. 그리고, 그 후부터 김인준은 최이의 충실한 심복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하지만 김인준이 최이의 애첩 안심과 간통하는 바람에 고성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된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는 고성에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다시 최이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개경으로 돌아온 그는 최이의 서자 최항을 극진히 대접하였어요. 그리고, 그리고 최이가 후계자를 결정할 때 최항을 적극 추천하였어요. 그리고, 이 공로로 최항이 권좌에 오른 후 장군 바로 아래 직위인 별장에 임명된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그러나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세습한 후에는 찬밥신세가 된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최의는 최양백. 유능 등을 신임하고 김인준은 멀리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불만을 품은 김인준은 1258년 6월 유경, 박송비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넘겨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최씨 무신정권을 몰락시킨 김인준은 장군직에 제수되고 위사공신 칭호도 받받는다고고 합니다. 그리고, 하지만 그의 공훈은 제2위였어요. 그리고, 대사성으로 있던 유경이 일등공신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최의 제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무장 세력을 움직일 힘도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그는 1260년에 유경을 5등 공신으로 밀어내고 일등공신에 오르게 된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이때부터 이름도 김준으로 개명한다고 합니다고 하네요. 그리고, 또한 그의 아우 김승준도 권신의 반열에 끼면서 이름을 김충으로 개명한다고 합니다고 하네요.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그 후 1264년에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군권 및 감찰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1265년에는 문하시중에 오르면서 동시에 해양후에 책봉된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실로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정사의 결정권은 왕에게 있었어요.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곧잘 원종과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여야 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특히 개경환도 문제에서는 정치 생명을 건 한판 승부를 예고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원종은 태자시절에 몽고를 방문한 이후 줄곧 친몽 정책을 펴며 몽고의 요구대로 적극적으로 개경환도를 추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하지만 김준은 개경환도 이후에 몽고의 입김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판단에 따라 되도록 개경환도를 늦추고 있었어요. 그리고,

     


    하지만 김준의 그 같은 계획에도 한계는 있었어요. 그리고, 이미 조정에 대한 몽고의 압력이 극도에 달해 있었고 조정 대신들 역시 태반이 친몽 세력으로 교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구나 최의를 제거한 직후 자신이 직접 몽고에게 출륙환도를 약속한 마당이기에 강화도를 고수한다고 합니다고 하네요는 것은 무리였어요. 그리고, 그렇게 환도 문제를 놓고 원종과 치열한 대립을 하고 있는 가운데 원에서 그와 아우 김충에 대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쿠빌라이는 양자강을 버팀목으로 삼고 끝까지 항전하고 있던 남송을 몰락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고려에 대해서도 송나라 공략을 위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였어요. 그리고,

     


    김준과 김충은 바로 그 고려 원군을 이끌고 가야 할 입장이었어요. 그리고, 하지만 김준은 몽고에 입조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몽고 내부에는 고려에서 귀화한 세력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고려의 무신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어요. 그리고,

     


    이 때문에 자칫하면 김준은 몽고 입조 중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몽고 입조를 감행할 그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는 차라리 자신의 입조 명령서를 들고 온 몽고 사신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그래서 원종에게 몽고 사신을 죽이고 다시 한 번 몽고와 항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그리고, 하지만 원종은 그의 의견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이때 장군 차송우가 그에게 원종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내심 원종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런 건의를 받자 김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단번에 국왕 폐립 모의를 세웠다. 그리고, 김준은 우선 녹사 엄수안을 시켜 아우 김충에게 모의 사실을 통보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그런데 엄수안은 오히려 김충을 설득하여 국왕 폐립 모의를 중지하도록 하였어요. 그리고, 이 바람에 김준은 하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몽고에 입조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가 다행히 별탈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러나 몽고에서 돌아온 김준은 그 후부터 몽고사신을 지나치게 냉대하여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면 걸핏하면 몽고사신을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곤 하였어요.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원종은 드디어 김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원종은 낭장 강윤소를 불러 김준 제거에 앞장설 인물을 물색했고 임연을 적임자로 삼았어요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강윤소는 임연을 찾아가 원종의 뜻을 전하고 김준을 제거할 것을 종용했다고 하네요고 하네요.. 그리고,

     


    임연은 한때 김준을 무척 따랐던 인물이었어요. 그리고, 그래서 주위에서는 임연을 김준의 양자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임연은 최의를 죽일 때도 많은 공을 세웠고 김준과 함께 위사공신 칭호도 받았어요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공으로 추밀원 부사에까지 올랐는데, 이때부터 김준과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出處: http://blog.daum.net/10root2/7103755

    [원종실록] 김준과 임연의 말기 무신정권

     

     

     

    [류동학의 한·중인물열전] 최우와 김준

    2012.06.14 11:27 등록

    고려 무신 정권기,노비 출신으로 최고권력자가 되는 김준과 그를 둘러싼 무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MBC 역사 드라마 ‘무신(武神)’의 최우와 김준. (사진=MBC)

     

    고려시대를 크게 양분하는 시기가 1170년에 발생한 무신의 난이자 정중부의 난이다. 경인년에 발생해서 경인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문벌귀족들이 지배했던 전기를 청산하고 고려후기의 시작점을 알린 무신들의 난은 이후 무려 100년간 무신들이 지배자를 교체하면서 집권했다. 이 시기에 왕들인 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원종 등은 무신들에 의해서 교체되던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무신정권은 크게 3기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무신정권 1기(1170년~1196년)는 이고,  이의방,  정중부(1170~1179)→경대승(1179~1183)→이의민(1183~1196)순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무신정권2기(1196년~1258년)는최충헌(1196~1219)→최우(=최이,  1219~1249)→최항(1249~1257)→최의(1257~1258)로 교체되면서 최씨무신정권이 무려 62년간 지배했다. 최씨 정권은 1258년 최의가 김준에게 살해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신정권 3기 (1158년~1270년)는 유경과 김준(1158~1268)→임연(1268~1270)→ 임유무(1270~1270)로 교체되다가 결국 1270년에  왕정으로 복귀하면서 원간섭기(1270∼1351)에 들어가게 된다.


    최충헌(1149∼1219)과 김일성(1912∼1994)은 모두 무인출신으로 24년간과 47년간(1948∼1994) 권력을 장악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아들에게 권력을 계승한 공통점이 있다. 최우와 김정일(1942∼2011)은 모두 문인의 기질이 강하여 최우는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하여,  김생, 유신, 탄현 등과 더불어 신품사현의 한명이면서 이규보와 최자등의 문신들을 서방(書房)이라는 기구를 활용하여 등용했다. 김정일은 신상옥감독과 배우 최은희를 납치할 만큼 영화광에다가 음악적인 취미도 있는 인물로 최우와 같이 문인의 기질이 강했다.


    최우는 정실인 하동정씨 정숙첨의 딸과 혼인하여 딸 최송이를 낳았다. 하동정씨는 1231년 죽고,  최송이는 김약선과 혼인하여 아들인 김미와  나중에 원종의 비가 되는 정순왕후를 낳았다. 정순왕후는 충렬왕의 모친이다. 김약선의 동생이 김경손장군이다. 김경손장군은 1231년 살리타이의 몽고 1차 침입때 자주성의 최춘명장군과 귀주성에서 박서장군과 더불어 대몽항쟁의 영웅이었다. 살리타이는 몽고 2차 침입때 처인성에서 승장인 김윤후에게 사살당한다.


    최우는 하동정씨 부인이 죽자,  계실로 과부였던 대집성(大集成)의 딸을 부인으로 삼는다. 대집성의 사위이자 최우의 동서가  상장군 주숙(周肅)이다. 최우는 최선의 손녀를 후실로 들였다. 그러나 결국 천기 서연방(瑞蓮房)에게서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낳는데,  이들은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만전이 최항(崔沆)으로 최우의 뒤를 이어 집권하면서 김경손장군,  주숙,  최우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을 모두 죽인다. 권력투쟁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김정일은 1966년 홍일천과 결혼했으나 영화배우 성혜림(1937∼2002)과의 사이에 김정남(1971∼현재)을 낳았다. 그후 김영숙과의 사이에 김설송과 김춘송을 두었다. 그후 재일교포 출신의 무용수 고영희(1953∼2004)사이에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은딸인 김여정을 낳으면서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역할을 한 인물이 고영희이다. 고영희사후 김옥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의 3남인 김정은체제가 들어섰다. 과거 최우의 아들과 손자인 최항과 최의로 이어지는 정권이 1258년 김준과 유경에 의해서 10년만에 무너졌듯이 북한정권도 어떤 변화가 있을 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권력의 수성이 매우 힘들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다.


    1948년부터 현재까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65년간의 김씨가의 북한정권의 원조격인 1196년부터 1258년까지 유지되었던 최충헌·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진 62년 간의 최씨무인정권을 종결시킨 인물은 다름아닌 최충헌의 가노출신인 김윤성의 아들 김준(金俊)이었다.


    김준은 박송비(朴松庇)와 송길유(宋吉儒)의 천거로 최우의 호위무사가 된다. 최항이 최우의 동서이자 상장군인 주숙(周肅)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이공주·최양백·김준 등 70여 명의 최씨가의 가노(家奴)들이었다. 이후 이공주·최양백·김준 등은 별장이 되어 최항정권을 지탱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그러나 최항이 1257년에 죽자 최양백을 위시한 류능·선인열·채정·최영 등이 야별초·신의군·서방·도방을 이용하여 최의가 집권하는데 공헌한다.


    집권한 최의는 김준을 소외시키자,  불만을 품은 김준은 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인 김승준, 아들인 김대재·김용재·김식재 등과 유경.박희실.이연소.박송비.임연을 모아놓고 선수를 치기로 작전모의를 한 다음 휘하의 신의군과 야별초 및 도방을 동원하여 최의의 집을 급습하여 최의를 참수하고 최양백을 제거한다. 이 사건이 ‘무오정변(戊午政變)’으로써 최씨 4대 62년간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난이다.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유경과 박희실 등을 제거하여 권력을 독점한다. 또한 임연등을 소외시킨다.  1264년 8월 원종이 몽골에 가자  최충헌때 설치하여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최고기관이었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장(長)인 교정별감(敎政別監)에 임명되어 왕의 부재시에 국정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최고 권력자로서 10년 간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으나 전횡을 일삼아 도처에 정적(政敵)을 만들었다.


    이에 왕권강화를 위해 대몽관계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원종은 김준을 없애기로 결심,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임연(林衍)과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김준을 살해하도록 했다. 이 정변이 1268년에 일어난 ‘무진정변(戊辰政變)’이다. 현재 모방송국에서 방영중인 무신의 김준은 이러한 김준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각색하여 보여주고 있다.


    김준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임연은 처음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고,  1258년(고종 45년) 유경,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원종을 폐하여 안경공 창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과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죽고 아들인 임유무가 권력을 계승했다. 1270년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한 원종은 그동안 최우 이후 천도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하였다. 그러나 임유무는 원종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러자 원종에 의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송송례,  홍문계(洪文系) 등에게 살해당했다. 홍문계는 임연의 사위이자 임유무의 매형이었다. 한편 임유무의 어머니 이씨와 형 유간(惟幹),  아우 유거(惟柜)‧유제(惟提) 등은 모두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임유무가 죽음으로써 무신정권 1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고려는 원의 간섭기에 접어들어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행되기 까지 반식민지상태에 놓였다.

     

    인물 열전의 저자 혜명 류동학 선생은 현재 혜명동양학아카데미 원장과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원 명리학 고전반 교수, 대전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며 영동방송(강원) ‘재미있는 역학이야기’와 ‘조선시대이야기’, 매일신문(대구) ‘류동학의 동양학이야기’ 등 각종 매체에 다수의 저작을 연재했고, 현재 대구 영남일보에 ‘혜명 류동학의 동양학산책’을 연재 중입니다. ―편집부


    혜명 류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