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위성 사진 백두산 천지 전체 중국령으로 표시
이미 얼마 전에 maps.google.com의 미 전역 위성사진 탐색 소개에서 언급한대로 구글은 세계 지도를 서비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소는 earth.google.com이며 free 인스톨을 하면 한국은 물론 세계 모든 지역의 작은 집까지 모두 나옵니다. 특히 earth 구글 서비스는 입체사진으로 측면에서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정밀 공중 폭격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군사용으로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오늘 뉴스가 되고 있는대로 청와대 사진도 earth 구글에서 볼 수 있고 다운로드도 가능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고싶은 명산대천도 공중사진과 측면사진을 입체 동영상으로 직접 볼 수 있어 저공비행으로 현장에 가는 기분을 낼 수 있습니다. 해외에 나와 있는 동포들은 고향산천을 earth 구글 서비스를 통하여 뒷동산 앞동산 동네 집까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백두산? 물론 옆에서도 원근따라 마음대로 크기를 조절하며 볼 수 있어서 마치 헬기 타고 한바퀴 도는 기분이 납니다.
그러나 백두산 천지는 반이 중국령이 아니라 완전히 중국령으로 표기되어 있어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그 이름도 백두산이되 발음은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참조)
earth 구글은 군사적 위협 수단으로 역할할 수도 있지만, 세계지도의 새로운 규정이 되기 때문에 이곳 저곳 논란꺼리를 많이 낳을 수 있습니다. 다만 생활적으로 도움이 되어 maps 구글에서 지도와 길이 나오는 면과 위성사진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 사진 위에서 도로 표지나 경계선 인근 지역 식당 모텔까지 모두 볼 수 있습니다.
GPS? 그냥 무선 인터넷만 되면 언제든지 가능한 서비스입니다. 인근 지역에 가볼만한 곳, 명소 등 그냥 영화처럼 동영상으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앞서가는 풍경카페 회원들은 이러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으면 생활에서나 비지니스에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08/30/05 오두방정)
⊙백두산 지형도
1. 장군봉(일명:병사봉) : 2,750m 2. 향도봉 : 2,711m 3. 쌍무지개봉 : 2,625m 4. 자하봉 : 2,618m
5. 천문봉 : 2,670m 6. 철벽봉 : 2,595m 7. 용문봉 : 2,595m 8. 관일봉 : 2,510m
9. 지반봉 : 2,603m 10. 백운봉 : 2,691m 11. 옥주봉(일명:청석봉) : 2,664m
12. 마천우 : 2,691m 13. 제운봉 : 2,543m 14. 와호봉 : 2,566m 15. 관면봉 : 2,533m
16. 제비봉 : 2,549m
⊙천지개요
1. 위치 : 해발 2189m(북한2190.15m)
2. 둘레 : 14km 남북길이:4.55km
3. 동서길이 : 3.35km
4. 수면면적 : 9.82km2(북한9.15km2)
5. 평균수심 : 213m 최고수심 : 384m
6. 물의양 : 20억m3( 지하수 60.2% 강수량 32.2% 사면 유수량 7.6%)
2. 백두산 천지못
백두산(2,744m)은 배달민족의 성지이며 7천만 민족의 영산으로 우리 민족 혼이 발아되어 5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웅지의 꿈을 폈던 곳이다.
백두산은 중생대부터 신생대 초에 걸쳐 1,000 내지 1,500 미터의 융기 고원상에 형성되었다가 다시 신생대 제 3기 말부터 제4기 초에 다량의 현무암이 분출하여 반경30리에 걸쳐 최초 종상화산을 형성한 뒤 차차 냉각됨에 따라 균열이 생기고 산정 부분이 함몰하여 칼데라호인 천지를 형성하였다.
백두산 천지못. 칼데라호인 백두산 천지 못은 년중 물이 마르지 않는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천연 호수이다.(좌) 천지못은 북쪽 중국의 풍구지역으로 흘러 나가 장백폭포의 절경을 이룬다. 호수가 그렇다면, 2744m의 고도에 위치한 천지 못은 왜 마르지 않는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백두산 천지 못을 두루고 있는 주변 산지(옥설봉:2593m, 마천우:2564, 청석봉:2662m, 백운봉:2737m, 백암봉:2741m, 비류봉:2527m, 쌍흥봉:2651m 등)는 수면으로부터 약 500m의 고도를 이루는 높은 봉우리들이다.(우) 따라서, 백두산 정상부의 고도를 감안한다면 이들 산지의 유역면적에서 공급되는 수량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백두산 정상부가 년중 기온이 매우 낮은 이유로 인해 1년중 여름철 2-3달을 제외한 나머지 달에는 눈과 함께 강수량이 매우 많은 편이다. 그리고, 증발량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호수의 물은 쉽게 마르지 않는 것이다.
천지는 천지 창조의 신비함을 간직한 천상의 호수라는 뜻으로 대택, 대지, 용왕담, 달문담, 신분, 용궁지, 천상수, 달문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북한의 '지리상식백과'(1986년)에 의하면 천지는 넓이 9,165 제곱킬로미터, 둘레 14,4 킬로미터, 최대수심 384미터, 최대 넓이 3.55 킬로미터, 평균너비 1.975킬로미터, 수체적 19만5,500만 세제곱미터, 수면표고 2190.15미터 (1981년 7월 관측)로 되어있다.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는 '티티카카호'(최고수심 304미터)와 2위인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있는 '라도가호'(225 미터) 보다도 더 깊어 세계 최심의 산상 호수로 밝혀졌다.
천지는 물이 불어도 수위가 50센티미터 이상을 넘지 않으며, 그 이상이 될 때는 북쪽의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달문을 통해서 '승사하'라는 계곡을 통해서 흘러 넘친다. 달문은 천지의 유일한 유출구로 폭이 약 30미터가량 되는 협곡으로 만주인들은 '대궐문'이라고 부른다. 이곳을 통해서 유출된 물줄기는 약 900미터 하류로 흘러가 높이 64미터의 장백폭포(비룡폭포)로 떨어져 만주의 송화강 지류인 '이도백하'로 유입된다. 장백폭포를 뒤로 하고 500여미터 내려가면 섭씨82도 정도의 '조천' 유황 온천이 나온다.
천지 주변에는 16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7개는 북한에, 9개는 중국에 속해 있으며, 천지 수면은 5분의 3이 북한에, 5분의 2가 중국에 속한다. 천지의 수원은 빗물이 69.14퍼센트 천지 밑 호저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수 및 광천수가 30.86퍼센트이다. 칼륨, 마그네슘 등 광물질이 1리터당 2,000밀리 그램 이상으로 풍부하고 투명도가 14미터나 되는 등 맑고 깨끗하여 식수로도 이상적이다.
천지의 7월의 평균수온은 섭씨 9.4도, 깊은 곳의 평균온도는 섭씨 4도로 웬만한 생물은 살지 못한다. 호수의 물은 10월 중순부터 다음해 6월중순까지 결빙된다. 얼음두께는 약 3미터이며 그 위에 다시 3미터의 눈이 쌓인다. 천지는 연중 270여일이 구름과 안개 바람에 휩싸이고 여름철에는 비가 자주 온다. 연 강수량은 1.500미터로 다우지에 속하며, 바람이 약 20미터 이상 심하게 불면 1내지 1.5미터 이상의 호파가 일어난다.
먼 옛날에 살던 압록 송화 도문의 세 처녀가 천지 경관에 반하여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목욕하러 왔다가 도문 선녀의 옷이 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승천하는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를 안 천왕이 진노하여 천지의 물을 세 갈래로 갈라 놓아. 오늘날의 압록강, 송화강, 도문강이 되었다는 전설이 깃든 천지 호반에는 눈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만병초를 비롯하여 126종의 식물이 분포한다. 또한, 산천어를 비롯한 한두 가지 종류의 물고기와 몇 종의 식물성 플랑크톤과 이끼류가 살고 있다.
백두산이 명승지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천지가 있기 때문이다. 천지의 물은 담청색을 띨정도로 맑고 투명하여 천지 호면이 고요히 가라않을 때에는 화구벽의 미려한 조면암이 물 가장자리에 거꾸로 비치는데 그 양상이 안개, 구름,태양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하여 아주 신비스럽고 장엄하다.
백두산의 화산폭발 기록과 전망
첫 번째 : 1000만~200만 년 전, 이 때에 지금의 백두산 바닥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데 땅 속에서 주로 분출된 것은 알칼리현무암이었고, 이 흔적은 백두산 형제폭포 바닥에서 발견된다.
- 두 번째: 신생대 제3기, 한반도에서도 공룡이 멸종하고 매머드가 살았던 시기인데 한반도에서 화산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
- 세 번째:이 폭발로 지금의 백두산 봉우리가 생겼는데 이 봉우리들은 끈적끈적한 조면암 용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네번째:신생대 제4기에는 백두산 봉우리에서 다시 현무암이 용암의 형태로 녹아 분출되었는데 이 때의 분출로 용암 대지가 생겼고 현재의 천지가 만들어졌고 이 무렵부터 현재의 백두산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이후부터 백두산은 휴식기에 들어갔으나 이 사이에도 대연지봉과 소연지봉 같은 작은 기생 화산에서는 계속해서 현무암 분출이 있었다.
- 마지막으로 커다란 화산 폭발이 있었던 것은 1000년 전인데 이 때에는 주로 부석이 분출되었는데 백두산에는 아직도 그 때 타다 남은 숯들이 남아 있다.
- 역사 기록:<조선왕조실록>(제 37책 현종대왕실록 권지14)을 보면 1668년 6월 2일에 대포 소리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큰 돌들이 비처럼 쏟아졌고 붉은색의 흙탕물이 넘쳐흘렀다고 기록(현종9년 음력 4. 23)되어 있고 1668년과 1702년(숙종2년 음5.14: 1702년 6월 3일 실록 제 280책 숙종대왕실록 권지36)그리고 1903년(유건봉의 장백산강강지략: 청나라 광서 29년 )에도 백두산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백두산을 앞으로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휴화산이다. 이처럼 백두산 일대의 지질은 생성 연대가 짧고 구멍이 많이 뚫린 현무암으로 되어 있어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다.
-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을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추정하기도 한다.
- 1985년 설치된 화산지진 관측소(연변조선족자치주 지진변공실관리)에 따르면 1992년까지 78회, 1991년 6월부터는 30회이상 호산성 지진과 미동이 관찰되었다.
- 중국의 화산학자들의 추정: 2000년~2050년 사이에 제 2의 대폭발(?)이 있을 가능성 제기
참고자료:웅진출판사, KBS다큐멘타리 '한반도 30억년의 비밀',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학생과학백과사전'
http://www.baikdoo.pe.kr/
http://www.koreasanha.net/san/baegd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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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조공(朝貢) 티베트 사신이 640년 당나라 수도 장안에 왔다. 황금 5000냥과 보석 수백 개를 ‘조공(朝貢)’으로 내놓더니 대뜸 당나라 공주를 티베트 왕의 아내로 달라고 했다. 당 황제는 ‘오랑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군사력 막강한 ‘토번(吐蕃)’ 왕국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다. 황제는 고민 끝에 친딸이 아닌 ‘문성공주’를 보냈다. ‘정관(貞觀)의 치(治)’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태종 때 일이다. 티베트는 중국을 위협해 공주까지 뺏어갈 만큼 힘센 조공국이었다. ▶문약했던 송나라도 겉으론 이웃나라에서 공물을 받고 신하로 책봉하는 조공 질서를 지켰다. 송나라는 11세기 황제를 칭한 서하(西夏)를 치려다 실패했다. 1044년 화의가 이루어졌는데 서하군주는 스스로를 중국황제의 아들로 칭했다. 송은 그 대가로 서하에 매년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3만 근을 하사품으로 줘야 했다. 형식상 조공관계를 유지하려다 나라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고려가 중국에 신하를 칭하는 것은 화풍(華風)을 흠모하고 답례품의 이익을 탐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고려를 불러들이는 것은 먼 나라 사람을 구슬려 태평성대로 꾸미려 했기 때문이다.” 송나라 학자 마단림(馬端臨)은 고려는 문화·경제적 이유로, 송은 정치적 이유로 조공관계를 지속했다고 꿰뚫어봤다. ‘송사(宋史)’는 “고려 조공품이 도착하면 관리들이 값을 매겨 대가를 치렀다”고 썼다. 조공이라는 이름만 붙었지 국가 간 무역과 다름없었다. ▶중국 정부가 백두산 관광객이 다니는 지린(吉林)성 안투(安圖)현 길가에 ‘당(唐) 발해국 조공도(道)’라는 비석을 세웠다.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동북공정의 선전용 소품이다. 발해 왕들이 당에게 ‘발해국왕’으로 책봉받고 조공을 바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공과 지방정권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베트남과 일본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지만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조공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는 중국 황제가 주변 나라의 지배자를 책봉하고 하사품을 내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다. 황제의 지배권은 거의 상징적인 이름뿐이었고 조공국은 번듯한 독립을 지켰다. 이런 조공 질서는 19세기 서양의 침입과 함께 소멸됐다. 사회주의 중국이 봉건시대 산물인 조공까지 동북공정에 동원하는 모양새가 우습고 딱하다. 2006/09/23 06:06: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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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은 ‘날조공장’ 중국측 4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 중국측이 최근 수위를 높인 ‘동북공정’의 새로운 왜곡 내용에 대해 국내 학자들은 “정치 논리에 의해 기본적인 사료 비판조차 무시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들에 대한 반박을 요약한다. 1. 기자조선은 역사적 실체 아닌 전설 ―기자조선은 중국 은(殷)나라의 후예들이 한반도에 건립한 지방정권이었다. 기자조선이 있었기에 위만조선·고구려·발해도 있었다.(중국측 주장) “기자조선 관련 사료는 신빙성이 없어 학계에서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역사가 아닌 전설까지 끌어들이는 것이다.”(조법종 우석대 교수) “설사 기자·위만이 중국의 망명객이었다 해도 이들은 중국 정부가 파견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중국의 논리는 후지모리가 페루에서 대통령을 했다고 페루가 일본사가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서길수 고구려연구회 이사장) 2. 한강유역은 당연히 우리 땅이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기원전 5~3세기) 연(燕)나라 영토는 한반도 한강 유역까지 확대됐다.(중국측 주장) “연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일부 유물이 랴오둥(遼東) 지역 등에서 출토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적으로 왕래한 흔적일 뿐 직접 이 지역을 지배했다고 볼 수는 없고, 한강 유역까지 지배했다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다. 한강 유역은 삼한(三韓) 중 마한의 땅이었다.”(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 3. 발해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독립국 ―발해는 당나라에 귀속된 일개 지방정권이었으며, 정권을 세울 당시 ‘말갈’을 정식 국가로 사용한 말갈족의 국가였다.(중국측 주장) “발해는 ‘말갈’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측 사서에서 발해를 ‘말갈’이라 부른 것은 초기에 일방적으로 낮춰 부른 것이고, 서기 713년 정식으로 국교를 튼 이후엔 ‘발해’라 제대로 불렀다. 당시 당나라가 발해왕을 ‘책봉’한 것은 통상적인 외교적 승인 행위에 불과하다.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왕을 황상(皇上)이라 부르는 등 매우 자주성이 강한 독립국이었다.”(한규철 경성대 교수) 4.백두산 정계비가 가짜라는 주장은 억지 ―1713년 조선이 국경 경계비석(백두산 정계비)을 세울 때 멋대로 장소를 변경하는 국제적 사기를 저질렀다.(중국측 주장) “중국의 주장은 백두산 정계비의 존재에 대해 당혹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간도 영유권 문제가 국제법상으로나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고대사인 기자조선부터 부여·고구려·발해까지 모두 중국 역사라고 왜곡해 간도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다. 동북공정의 목적이 역사 문제에 그치지 않고 영토와 조선족 문제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조법종 교수) 2006/09/23 06: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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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白頭山(1)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이라고 한다. 왜 백두산이 영산인가? 우선 한자의 영(靈)자를 분석해 보자. 땅(_)과 하늘(ㅡ)을 가운데에서 연결하면 공(工)자가 된다. 공(工)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좌우에 사람 인(人)자가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무(巫)자이다. 땅과 하늘을 연결해 주는 사람이 바로 무(巫)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이 무당(巫堂)이 입(口)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중얼 주문을 외운다. 무(巫)자 위에 입 구(口)자 세 개가 올려져 있다. 그러고 나면 비(雨)가 오는 것이다. 이것이 영(靈)자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영험하다는 의미의 가장 꼭대기에는 비가 자리 잡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가뭄이다. 전쟁은 당사자만 죽지만 가뭄이 들면 모두 죽는다. 그래서 비가 중요하고, 물이 중요한 것이다. 백두산이 영산이라는 일차적인 이유는 꼭대기에 물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天池)라고 하는 엄청난 깊이를 지닌 호수가 있다. 높은 산 정상에 이처럼 깊고 푸른 호수를 가진 산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특히 물을 신성시하였다. 물이 없으면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이 다 죽는다. 그래서 고대의 북방 유목민들은 물에서 함부로 손도 씻지 않을 정도로 물을 숭배하였다. 물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이처럼 신성한 물이 평지도 아니고 높은 산 정상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신성(神聖)이었다. 북방 유목민족의 후손인 한민족이 고대부터 백두산의 천지를 신성한 장소로 여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신성시되었던 호수가 바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이시쿨 호수이다. 천산(天山)의 해발 1600m 높이에 자리 잡고 있다. 가로 180km, 세로 60km 크기의 호수인데,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때문에 북방 유목민의 성지로서 추앙 받았다. 이곳을 현장 답사했던 시인 김지하는 이시쿨 호수 옆에서 열렸던 바자르(시장)를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신시(神市)라고 주장한바 있다. 제주도 한라산이 영산인 이유도 역시 산 정상에 있는 백록담(白鹿潭) 때문이다. 산 자체도 성지(聖地)인데, 산꼭대기의 물은 ‘성중성(聖中聖)’으로 대접해야 한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09.12 22:32 16' 2006/09/23 06:1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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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白頭山(2)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부부가 네모진 연못에 헌화하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 되었다. 9·11테러 5주년을 맞아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북측 빌딩 터에 만들어 놓은 ‘추모의 연못’에 헌화하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의 포인트는 직사각형 형태의 ‘추모의 연못’이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물에다 꽃을 띄우는 방법은 일리가 있다. 이 연못을 누가 기획했는지 몰라도 상당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물은 종교적 의미가 다양하게 함축되어 있다. 첫째로 이 빌딩에서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용도이므로 물이 있어야 맞다. 육신이 불에 타면서 얼마나 고통을 겪었겠는가. 이 영혼들을 위해서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너진 빌딩 터에 추모의 연못을 설치한 것은 물로 불을 꺼준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물은 정화(淨化)하는 작용을 한다. 기독교의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물을 사용한 것은 정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정화를 하는 수단으로 물을 이용한다. 흔히 쓰는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도 먼저 물로 정화한다는 뜻이 있다. 셋째로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희랍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이 물에서 왔다”고 했다. 동양의 상수학(象數學)에서도 시작을 상징하는 숫자인 1은 물을 지칭한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살 수 있다. 넷째로 물은 기(氣)를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 풍수에서 이 부분을 특히 중시한다. 배산임수(背山臨水)에서 ‘배산’이 화기(火氣)에 해당한다면 ‘임수’는 수기(水氣)에 해당한다. 수기는 화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저장하고 감싸주는 기능을 한다. 그래야지 그 터가 오래간다고 본다. 물이 없고 화기만 왕성한 터는 일어설 때는 급속하게 일어서지만, 망할 때는 순식간에 망한다고 본다. 이처럼 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종교적·생태적 의미가 심중하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장독대 위에 정화수 한 사발을 떠놓고 매일 새벽마다 남편 잘되고 자식들 잘되라고 기도한 것도 물이 지닌 이러한 영성(靈性)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러한 영수(靈水)가 장독대가 아닌 2700m 백두산 꼭대기의 높은 제단에 올려 져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얼마나 장엄하고 신성한 산인가!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09.14 23:28 17' 2006/09/23 06: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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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白頭山(3)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에 고기가 많이 모이듯이, 이질적인 음(陰)과 양(陽)이 섞이면서 묘용(妙用)이 발생한다. 백두산의 천지(天池)는 바로 이러한 묘용을 보여주고 있다. 산꼭대기에 있는 물은 양중음(陽中陰)이다. 백두산이라고 하는 불 속에 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태풍 한가운데의 고요함과 같다. 이런 곳은 기도발이 받는다. 그래서 산 위에 물이 있는 곳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기도터로 여겨졌다. 그러나 백두산과 같이 자연적으로 산 위에 연못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고대인들은 산 위에 물이 없으면 인공적으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구멍을 팠다. 높은 바위절벽이나 암봉(巖峰) 위에다가 바가지 크기나 세숫대야 혹은 주먹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홈을 팠던 것이다. 이런 구멍 내지는 홈을 ‘알터’ 또는 ‘컵마크(cup mark)’라고 부른다. 고대인들의 기도터이다. 필자는 지난 십 몇 년 동안 이런 곳을 찾아서 답사하였는데, 공통적으로 산 정상 부근이나 높게 솟은 바위 꼭대기에 인공적으로 판 이런 구멍이 발견되었다. 이 바위 구멍 속에는 물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백두산 천지와 같은 기능을 하는 ‘양중음’의 장치를 바위 기운이 강하게 내려오는 곳에다가 인공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부산의 금정산(金井山)에 뾰쪽뾰쪽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 꼭대기를 올라가 보면 세숫대야 크기만 한 홈이 파여 있다. 물론 고대인들이 기도를 하기 위한 용도로 파 놓은 것이다. 속리산(俗離山) 문장대(文藏臺)도 거대한 화강암이 힘차게 뻗은 곳으로, 바위에서 방사되는 불기운이 지글지글 끓고 있는 지점이다. 이 문장대 바위의 꼭대기 부분에도 역시 알터가 있다. 대구 팔공산(八公山)도 산 전체가 지글지글 끓는 화기(火氣)가 충만한 산이다. 그 화기가 뭉친 지점에 그 유명한 갓바위 부처상이 조성되어 있다. 갓바위 부처상 뒤쪽의 바위에도 올라가 보면 고대인들이 파놓은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이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런 지점은 이미 영험한 기도터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알터는 전국 바위산 꼭대기 부근에 수백 군데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백두산 천지는 가장 거대한 알터인 것이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09.17 22:30 37' 2006/09/23 06:1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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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살롱(279)] 백두산(4)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 흰 ‘백(白)’이 들어가는 산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백두산을 비롯하여 단양군과 영주시에 걸쳐 있는 소백산(小白山·1439m), 강원도 태백시의 태백산(太白山·1567m)이 대표적이다. 한민족은 옛날부터 흰색을 숭상하여 왔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다. 왜 흰색을 성스러운 색깔로 여겼을까. 이는 시베리아, 몽골에 사는 북방 유목민족의 흰색 숭배 전통과 궤를 같이한다. 북방의 광활한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높은 산 정상에 녹지 않고 쌓여 있는 흰 눈은 성스러운 대상이었다.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초원을 여행하면서 설산(雪山)을 바라다보면 흰색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흰색이 지닌 순결함과 높은 산이 주는 고소(高所)의 성스러움, 그리고 녹지 않는 눈에서 그 어떤 영원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는 유럽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몽블랑 만년필의 외형적 특징은 끝부분의 흰색 마크인데, 이게 트레이드마크이다. 흰색 마크는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4807m)에 쌓여 있는 만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시베리아에서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특별한 성목(聖木)으로 여긴다. 시베리아 샤먼들은 자작나무 껍질을 태우면서 굿을 한다. 자작나무 껍질이 흰색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흰색 숭배도 이러한 북방의 전통이 그대로 계승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태백산과 소백산은 정상 부근에 봄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눈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바라다보면 꼭대기의 흰색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백두산은 소백산이나 태백산보다 훨씬 높고, 정상 부근에 눈이 오랫동안 쌓여 있다. 정상 부근에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어서 백두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름에 ‘백’자가 들어간 가장 주된 이유는 흰 눈 때문이 아닌가 싶다. 등산장비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백두산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그 대신에 올랐던 산이 백두산의 두 아들에 해당하는 소백산과 태백산이다. 정감록(鄭鑑錄)을 보면 소백과 태백의 중간지역인 ‘양백지간(兩白之間)’을 특별히 주목한다. 난리가 났을 때도 여기에 가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백산숭배(白山崇拜)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조용헌·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09.19 19:32 21' / 수정 : 2006.09.20 08:31 42' 2006/09/23 06:1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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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백두산(5) 백두산은 중국 한족(漢族)을 제외한 동북아시아 유목민족 모두에게 공통된 성산(聖山)으로 여겨져 왔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청(淸)나라이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여겼던 청은 백두산을 신성시하여 일반인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금(封禁) 조치를 취하기까지 하였다. 왜냐하면 백두산의 1258m 지점에 위치한 연못에서 청나라의 시조가 탄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 있는 그 연못 이름은 그들 이름으로 ‘포륵호리’였고, 한자로 표기하면 ‘원지(圓池)’이다. 옛날에 세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까치가 날아와 붉은 열매를 막내 선녀의 옷에다 놓으니, 막내가 이 열매를 먹고 임신을 하여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 사내아이가 바로 그들 민족의 시조로서, 그 성씨(姓氏)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원지를 지난 1993년에 답사한 백두산 전문가 이형석(69) 박사에 의하면 연못의 둘레는 1.2km이고, 그 위치는 백두산 동쪽자락에 있다고 한다. 이는 또 두만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 내용은 청나라 관찬사서(官撰史書)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는 이 시조신화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백두산을 성지로 여겼던 것이다. 청의 전신이 후금(後金)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금(金)나라이다. 이들은 모두 ‘애신각라’의 후손들인 것이다. 하필이면 성씨를 ‘애신각라’라고 정했다는 점도 대단히 흥미롭다. ‘애신각라’의 뜻을 풀어보면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가 된다. 말하자면 이들 오랑캐들은 ‘경주 김씨’ 후손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여진족이 세운 금·후금·청은 오랑캐가 아니라, 신라의 후손들이 만주에 이민 가서 성공하여 세운 형제의 나라였던 것이다. 백두산의 원지와 비슷한 맥락에 있는 연못이 바로 태백산의 ‘황지(潢池)’이다. 태백시의 해발 700m에 있는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이다. 강의 발원지는 생명의 발원지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황지의 옛날 이름은 ‘천황(天潢)’이었다고 한다. 천지(天池)와 같은 의미이다. 백두산과 태백산은 그 무대장치(?)가 유사하다.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성산이기 때문이다. 조용헌·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09.21 22:44 38' 2006/09/23 06:16:2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