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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대전 이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대치하던 냉전의 시절이 있었다. 이 때 사회주의 진영의 한 축을 형성했던 중국의 폐쇄정책을 일컬어 ‘죽의 장막’이라 불렀다. 구소련의 폐쇄정책을 칭하던 ‘철의 장막’에 빗대어 중국을 표현한 말이다.
중국은 그때까지 오랜 시간 외부 세계와 교류가 단절된 탓에 대나무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대나무가 중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했다.
70년대 말 시작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개혁개방정책은 중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눈부신 경제 성장과 개발로 중국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나무는 중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 국보(國寶)로 여기는 팬더의 주식도 다름 아닌 대나무다. 이렇듯 중국과 대나무의 밀접한 관계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중국이 대나무의 나라로 알려진 것은 그만큼 자생지가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세계에서 사용하는 대나무 제품의 주요 공급원이기도 하다. 대나무가 잘 자랄 만한 온화한 기후를 지닌 땅이 중국에는 상당히 많다. 특히 기후가 온화한 중남부 지역에 대나무 자생지가 밀집해 있다.
사천성(四川省)의 촉남죽해(蜀南竹海)는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지정된 대나무 자생지역이다. 이곳은 절강성의 안길죽해(安吉竹海), 호북성의 함안죽해(咸安竹海), 귀주성의 노장죽해(老場竹海) 등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대나무 산지로 알려져 있다. 총 면적이 120㎢로 우리나라의 한라산 국립공원과 비슷한 크기다. 500여 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악지대로 거의 전 구역에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보기 드문 곳이다.
촉남죽해는 중국의 아름다운 숲 10곳 중 하나로 꼽는다. 보전이 잘 되어 있고 풍치가 뛰어나 AAAA급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안개가 피어나고 햇볕이 들면 대숲 전체가 옥빛으로 변하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보면 대나무숲이 푸른 색 바다를 연상케 ‘죽해’(竹海)라 부른다.
촉남죽해는 음을 풀어보면 의외로 간단한 의미를 지녔다. 먼저 蜀 자는 사천성이 삼국시대 촉나라의 땅이라는 뜻이고, 南은 이곳이 운남성과 접한 사천성 남부라는 의미다. 竹은 중국의 대표적인 자생종이라는 뜻이며, 海는 대나무가 바다를 이루고 대나무 동산 사이에 바다 같은 호수가 있다는 의미다.
이곳에 자생하는 대나무는 남죽(楠竹)을 중심으로 면죽(面竹), 화죽(花竹), 나한죽(羅漢竹), 향비죽(香妃竹) 등 50여 종이 넘는다. 또 대나무 사이로 죽계(竹鷄)라고 불리는 조류와 죽청개구리, 탄친개구리 등 희귀동물도 살고 있다. 숲에는 죽손이라는 귀한 버섯과 죽순 등 음식 재료로 쓰이는 여러 가지 부산물이 자란다.
- ▲ 1.5km 바위벽에 그림을 새겨둔 천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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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관광지답게 많은 명소가 산재하고 있는 촉남죽해에는 모두 134곳의 명승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천황사(天皇寺), 천보채(天寶寨), 선우동(仙寓洞), 청룡호(靑龍湖), 칠채비폭(七彩飛瀑), 관운정(觀云亭), 비취장랑(翡翠長廊), 차화산(茶花山), 화계13교(花溪13橋), 고대 전쟁터를 10대 명소로 꼽는다. 이들 명소는 대부분 도로가 놓여 있어 차량을 이용한 답사가 가능하다.
중국 4대 대나무 자생지 가운데 한 곳
- ▲ 그림 6 '비취장랑'의 아름다운 모습
- 대나무 천국 촉남죽해로 가기 위해선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성도는 중국의 삼국시대 때 촉나라의 수도로 오랜 영화를 누려온 곳이다. 이곳은 4개의 강(四川)이 흘러 물이 풍부한데다 땅까지 비옥해 작물이 잘 자란다. 게다가 적의 공격을 막기에 유리한 지형이라 한 나라의 수도로 삼기에 안성맞춤이다.
성도는 해를 보기 어려운 독특한 기후를 지녔다. ‘촉나라 개는 해를 보면 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맑은 날이 드물다. 사천에 미녀가 많은 것도 자외선이 적은 날씨 덕분이라고 한다. 기자가 포함된 한진-티앤씨여행사 답사팀이 사천성을 방문한 며칠 동안도 한결같이 날씨가 흐렸다.
오후 늦게 성도에 도착해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부터 서둘러 촉남죽해 관문격인 의빈(宜賓)으로 향했다. 성도에서 의빈까지는 4~5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 땅이 넓다보니 300~400km 정도는 사실 멀다고 말하기 어렵다. 직선으로 뻗은 한적한 고속도로를 쉴 새 없이 달린다. 차창에 기대어 한참을 졸다보니 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간다.
의빈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자공(自貢)이라는 곳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곳은 1942년 자류정(自流井)과 공정(貢井)이라는 마을을 통합해 만든 중국 제1의 소금 산지다. 바다도 없는 내륙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흥미로운 곳이다. 이곳의 제염법은 대단히 독특한데, 깊이 1,000m 이상의 샘을 파서 지하 염수를 퍼올린 뒤 끓여서 소금을 만든다. 지금도 심해정이란 곳에서 재래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제염법은 이미 4세기경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당(唐) 때에 상당한 규모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연생산량은 120만 톤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염업박물관에는 1,000m 깊이의 샘을 파는 당시의 채굴법과 소금 생산공정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지금도 자공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춘 제염공장들이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자공은 공룡화석 발견지로도 유명하다. 1982년 도심지에 주차장을 만들다 처음으로 화석이 발견됐으며, 그 자리에 그대로 박물관을 세워 1987년 개장했다. 이곳은 미국, 캐나다와 함께 세계 3대 공룡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박물관 내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실제 공룡화석을 조립해 세워두었다. 발굴 장소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아직도 땅 속에 많은 화석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공은 촉남죽해 가는 길에 반드시 들러볼 만한 곳이다.
자공에서 남쪽으로 70km쯤 떨어진 의빈은 중국의 대표적인 명주(名酒) 오량액(五粮液)의 산지면서 장강(長江)이 시작되는 첫 도시다. 촉남죽해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친다. 도심지를 빠져나오니 도로변에 대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대나무 바다’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다.
30분 후 죽순 모양을 본떠 만든 건물이 인상적인 에덴호텔에 도착했다. 5성급 호텔로 중국의 유명 관광지 숙박시설 치고는 대단히 고급스러운 곳이다. 이곳에서 하루 동안의 긴 여정을 마쳤다.
- ▲ (왼쪽) 사람 얼굴을 닮았다는 인면죽. (오른쪽) 계단을 이루며 쏟아져내리는 자그마한 폭포를 바라보는 탐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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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여정에 흥미로운 볼거리 많아
촉남죽해 탐방은 차량과 도보 이동이 모두 가능하다. 답사팀은 중국의 산촌 문화도 접해볼 수 있는 트레킹을 겸한 도보 답사를 선택했다. 당초에는 에덴호텔부터 시작해 관운정까지 걷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간밤에 내린 비 탓에 길 사정이 좋지 않아 중간지점까지 차량으로 이동했다.
대노촌이라는 마을을 지나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다랑이 논이 즐비한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허물어질 듯 소박한 농가와 대나무숲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물소를 몰고 논갈이를 하는 농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쉽게도 안개가 짙다. 이곳 날씨는 안정성이 뛰어나 한번 좋으면 며칠 이어진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나빠진 날씨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대노촌이라는 마을을 거쳐 관운정(觀雲亭)까지 가는 길이 일차 난관이다. 희미한 안개 사이로 마을 뒤편에 솟은 산이 보인다. 이 산비탈을 올라야 관운정에 닿는다.
마을을 벗어나 투박한 계단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등 뒤로 농촌 풍경이 서서히 가라앉아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심박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길을 인도하고 있는 현지 가이드 아줌마의 얼굴에는 땀 한 방울 안 보인다.
계단을 조심스레 걷다보니 고사리가 지천에 널려 있다. 사람 키보다 큰 것도 눈에 띤다. 대나무만 많은 곳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키 작은 활엽수와 풀도 제법 많았다. 드물긴 했지만 소나무도 간간히 자라고 있었다. 아침 안개에 젖은 싱그러운 숲을 걷는 느낌이 상쾌하다.
가파른 계단길이 끝날 무렵 번듯한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구름을 보는 곳, 관운정이다. 가파른 벼랑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이곳은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산자락 아래로 다랑이 논 일색의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지나가는 구름 사이로 희끗희끗하게 보이긴 해도 그 규모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관운정 뒤편의 짙은 대나무 밭 앞에는 찻길이 지나가고 있다. 관광객들은 차로 이곳까지 올라와 산 아래 경치를 조망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이곳 이정표에 한국어 안내문이 붙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직은 한국 관광객이 많지 않은 곳인데도 지난해부터 이런 안내판을 설치하고 있단다. 촉남죽해 풍경구 관리국의 대외 홍보를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찻길을 따라 동쪽으로 200m 정도 오르막을 오른 뒤 다시 오른쪽 샛길을 통해 숲으로 접어든다. 임도를 따라 걷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대밭이 주변을 감싼다. 여기 저기 돋아나는 죽순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다 같아 보이는 대나무지만 종류가 수십 가지라니 참으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