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스톤 (Rosetta Stone)
-이 성호-
이집트 중남부의 룩소 부근에 위치한 ‘왕들의 계곡’의 한 무덤에서 1903년 신원 미상의 여성 미이라를, 1920년에는 다른 무덤에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이름이 새겨진 빈 석관을 발굴했다. 최근 CT 촬영을 통해 하트셉수트 여왕의 석관에서 부러진 치아와 내장이 들어있는 항아리를 발견했고, 이 치아는 1903년 발견된 미이라의 빠진 어금니와 일치함을 확인하였으며, 항아리 속 내장의 DNA검사 결과 고대 이집트 왕족과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집트 정부에서 공식발표를 한 것이다. 하트셉수트는 BC1503년 서출인 투트모시스(Ththmosis)3세를 대신하여 섭정하다가 즉위하여 BC1482년까지 22년간 이집트 제18왕조를 통치했다.
그런데, 어떻게 3500년 전의, 문헌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않은 고대 이집트의 왕조를 알아 냈을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역사적 경로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A. 로제타 스톤 (Rosetta Stone)
이집트의 고유물위원회는 1970년 이후 해외로 밀반출된 이집트 고문화재 목록을 작성하고 환수 노력을 벌여왔다. 또 밀수 문화재 반환 요청에 응하지 않는 외국 박물관들과는 협력을 거부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통해 자국 문화재의 보호와 전승에 힘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최근 영국으로부터 원형대로 보관된 목관과 그리스 시대 부적 및 그릇 등 600여점의 밀수 문화재를 돌려 받았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 문자 해석의 열쇠로 그 가치가 지대한 문화재인 로제타 스톤(대영박물관 소장)의 반환만은 번번이 거부되어왔다. 그렇다면 영국이 그토록 강력히 반환을 거부하는 로제타 스톤은 무엇이며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가. 로제타 스톤의 발굴
높이 114Cm, 너비 72Cm, 두께 28Cm로 검은 현무암 돌판인 로제타 스톤은, 오랜 세월 마모된 체로 방치되어있다가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빛 현무암에는 반질반질한 쪽에 각기 다른 세 가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첫째 단 14행은 이집트 상형문자로, 둘째 단 32행은 민용문자(民用文字·상형문자가 세속과 종교에 두루 쓰인 승용문자(僧用文字)로 바뀌었다가 더 단순한 흘림체로 바뀐 것.일반 국민에게 널리 쓰임)로, 셋째 단 54행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나. 로제타 스톤의 해독
당시에 이 돌판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부분인데, 해독 결과 BC 196년에 제작된 이 돌판에는 당시 열두살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왕을 기리는 칙령을 그리스어로 만들어 돌에다 새겨 넣은 것이었다 두 개의 다른 언어로 기록된 부분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을 것으로 유추되었다. 세계의 수많은 언어학자들이 이 돌을 통해 이집트 유물들에 새겨진 상형문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해독에 진력하였으나, 오로지 프랑스의 천재 서지학자였던 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만이 해독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의미’(표의문자)만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언뜻 보기에 그림이나 다름없는 이집트 유물에 적혀진 부호들을 그림문자. 즉 기호나 상징으로 보아,굽이치는 선 3개가 ‘물’을 나타내고, 깃발이 ‘신(神)’을 나타낸다고 풀이한 것을 누가 의심하였겠는가. 반면 샹폴리옹은 어쩌면 ‘소리’(표음문자)를 나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믿음(belief)이라는 단어를 벌(bee)과 잎(leaf) 그림을 맞붙여 표기했다는 식으로. 마치 신라의 설총이 한자의 음을 빌어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게 한 것처럼 말이다.
샹폴리옹은 로제타 스톤을 조사하면서, 이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공덕비이므로 상형문자에도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을 것이며, 그리스어로 적힌 부분의 프톨레마이오스가 타원형으로 둘러 쌓여 있는 것의 숫자와 상형문자 부분의 타원형으로 둘러 쌓인 부분의 숫자가 같은 것을 발견함으로써, 그리스어 알파벳 자음들에 해당되는 상형문자를 찾을 수 있었다. 샹폴리옹은 1815년 발굴되었으며 제2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리는 필레의 오벨리스크(Obelisk, ‘이집트 역사’ 앞부분을 참조)를 해독하면서 그의 연구가 옳았음을 증명하였다. 필레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기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로 쓰인 글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기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었다.
샹폴리옹은 이것과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 기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단어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단어에 다 나오는 발음기호는 P,O,L이니,그 기호들이야말로 P,O,L을 소리내는 발음 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그 후 1822년 9월14일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왕)의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다 밝혀냈다. 그날 아침까지 그는 파라오 이름 25개를 풀었다. 마지막 남은 2개를 놓고 씨름하던 그에게 점심 때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SS와 M까지 풀고 나서 문득 콥트어에서 태양신을 Ra(라)라고 하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MSS 앞에 RA를 놓고,거기에 이집트어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RAMSES가 되었다.
아, 이것은 저 유명한 람세스 대왕의 이름이 아닌가. 곧 이어 토트메스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집트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보다 닷새 앞서 그는 132개 문자로 이루어진 상형문자 알파벳을 발표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하나였다. (우리는 그 나이에 무엇을 했지?) 연구실에서만 지낸 샹폴리옹이 마침내 이집트를 탐사한 때는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기의 상형문자 풀이가 옳음을 확인했다.멤피스의 폐허에서 그는 각각 다른 시기의 건축물들을 한눈에 구별했다.사카라에서는 오노스라는 왕의 이름을 발견하고 즉시 초기 이집트시대에 속한다고 정확하게 연대를 짚어냈다.
한 서지학자의 노력으로 수천년간 베일에 쌓여있던 인류 최초의 문명인 이집트 문명이 밝혀진 것이다. 인류최초 문명의 비밀을 간직한 이 작은 돌판에 그토록 집착하는 영국이 이해될 만하다. 샹포리옹은 살아서 로제타 스톤의 원판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로제타 스톤은 영국 외로 반출된 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그것은 샹폴리옹의 추모제때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2200년간 말없이 묻혀있던 하나의 돌판과, 비록 죽은 후이지만 그것을 알아본 천재 서지학자의 만남…. 그 순간을 상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 오벨리스크 (Obelisk)
카르나크에 있는 하트솁수트 오벨리스크의 아래쪽에는, 채석장에서 이 거석(巨石)을 깎아내는 데 7개월이 걸렸다고 새겨져 있다. 테베에 있는 하트솁수트 사원에는 나일 강을 통해 나룻배로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장면이 나와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인부들은 흙으로 만든 경사로를 이용해 따로 떨어진 발판 위로 오벨리스크의 몸체를 들어올리고 그것을 좌우로 움직여 자리를 잡아주었다. 페니키아인과 카나안인 등 다른 민족들도 이집트인들을 따라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으나 1개의 돌덩이로 만들지는 못했다. 로마 제국 동안 이집트에서 지금의 이탈리아로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가 옮겨졌다.
적어도 12개 정도가 로마 시로 옮겨갔으며, 그중 하나가 투트모세 3세(BC 1504~1450 재위)에 의해 카르나크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광장에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고대 오벨리스크로서 높이는 32m, 밑바닥 4면체 길이는 2.7m이며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져 꼭대기의 4면체 길이는 1.88m이고 그 무게는 약 230t에 이른다. 19세기말 이집트 정부는 1쌍의 오벨리스크를 둘로 나누어 미국과 영국에 각각 하나씩 주었다. 그 중 하나는 지금 뉴욕 시의 센트럴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런던 템스 강변에 서 있다. 이 2개의 오벨리스크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져 있지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BC 1500년경 투트모세 3세가 헬리오폴리스에 세운 이 오벨리스크는 그와 람세스 2세(BC 1304경~1237경)를 위한 비문에 새겨져 있다. 전형적인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1.2m이고 밑바닥은 직4각형으로 가로 2.36m, 세로 2.33m이고 무게는 180t에 이른다. 이런 돌기둥들을 채석해 세웠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역학적 천재성과 무한한 인력 동원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가 되고 있다. 오늘날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로서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워싱턴 기념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884년 워싱턴 D. C.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169m로서 전망대와 내부계단 및 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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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이집트 역사
가. 고대 이집트 (파라오 왕조)
1. 개요
BC 8000년부터 나일강 유역에 농경생활을 시작하여 최초의 고대문명을 탄생시켰으며 BC 3100년(Menes 왕이 최초로 남.북 이집트 통합, Memphis에 도읍)부터 BC 332년(Alexander 대왕의 이집트 정복)까지 약 2800년간 지속되었다. 고대 파라오 왕조는 30개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는데 통상 고왕조 시기, 중왕조 시기 및 신왕조 시기의 3기로 시대를 구분한다.
▷ 고왕조 시기(BC 3100-2040, 약 1000년간) : 10개의 왕조(1-10왕조)가 변천하는 기간 중 약 40명의 왕이 통치
▷ 중왕조 시기(BC 2040-1567, 약 500년간) : 7개의 왕조(11-17왕조)가 변천하는 기간 중 약 30명의 왕이 통치
▷ 신왕조 및 후기왕조 시기(BC 1567-332, 약 1200년간) : 13개의 왕조(18-30왕조)가 변천하는 기간 중 약 80명의 왕이 통치
2. 고왕조 시기 (BC 3100-2040)
▷ 1왕조의 Menes왕은 최초의 파라오로서 남.북 이집트 통합 후 Memphis에 도읍(BC 3100경)
▷ 3왕조 Zozer 왕은 공사장 Imhotep의 도움으로 Saqqarah 지역에 최초의 피라미드(계단식)을 건축하고,시나이 반도 정벌
▷ 4왕조 Khufu왕, Khafre왕, Memdaure왕은 Giza 피라미드 건축
▷ 5왕조 Unas왕부터 피라미드에 문자기록(Pyramid Text)를 남기기 시작
- 5왕조 기간중 리비아, 누비아, 시나이 등을 정벌한 기록
- 태양신 Ra를 숭배한 기록
▷ 6왕조부터 왕권이 쇠퇴하여, 7-10왕조 기간 중에는 지방 토호세력들이 할거
3. 중왕조 시기 (BC 2040-1567)
▷ 11왕조 Menthuhotep 2세는 남.북 이집트를 재통합
▷ 12왕조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
- Senusert 3세는 지방 족벌들을 평정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확립
- 12왕조 기간중 리비아, 누비아, 시나이, 시리아, 푼트 지역을 정벌
- 12왕조 시대부터 왕과 왕위 계승자간 공동 통치(Co-Regency) 관행 정립
▷ 13-17왕조는 힉소스 등 외적의 침입으로 쇠퇴기
4. 신왕조 및 후기왕조 시기 (BC 1567-332)
▷ 18왕조부터 국력이 다시 번성하여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 남쪽으로 수단까지 지배
- Hatshepsut 여왕은 Thebes(현재의 Luxor)지역에 최초의 신전 건축
- Ththmosis 3세(Hatshepsut 여왕의 조카) 통치 기간중 최대 영토 확장
- Amenhotep 3세는 Luxor 신전, Memnon 거상 등 건축
- Amenhotep 4세는 Akhetaten (Amarnah) 지역으로 일시 천도하고, 전통적 Amun 신 숭배에서 벗어나
Aten 신을 숭배(기존의 제사장 그룹과 갈등을 피하고 정치에도 무관심)
- Amenhotep 4세와 왕비 Nefertiti 사이에서 태어난 Tutankhamun 왕(Tutnkhamun왕 묘지의 발굴을 20세기 세계고고학계의 최대사건으로 불리고 있다)이 요절하고, 그 뒤를 이은 Ay 왕도 단명함에 따라 Horemheb, Ramses 1세등 장군 출신들이 왕위를 계승 (18왕조 멸망)
▷ 19왕조는 국력을 정비하고, 신전 건축 등을 통해 고도의 문화 창달
- 19왕조 Seti 1세는 아시아 지역을 정벌하고, Abydos 신전 등을 건축
- Ramses 2세(Seti 1세의 아들)는 Hittites의 침입을 격퇴(Kadesh 전투)하고, Abu Sinbel 신전 등을 건축.
▷ 20왕조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함에 따라 왕권이 약해진 반면 제사장의 권한이 강화됨.
▷ 22왕조에 이르러 왕권은 Delta(나일강 하류) 지역에만 미치고, Upper Egypt(상 이집트, 나일강 상류)는 제사장들이 관할
▷ 25왕조 시기에 Assyria의 침입을 받은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
▷ 27-30왕조 기간은 Persia의 속국으로 전락
- Persia 출신 파라오가 통치
나. 그리스, 로마 시대
1. Ptolemies 왕조 (BC 332-30)
▷ Alexander 대왕은 이집트 정복후 Ptolemy 장군을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하고, Alexandria에 새로운 수도 건설
- Alexandria는 Hellenism 문명의 중심지로 발전
- Fayyum을 농업 중심지로 개발
- Ptolemies 왕조의 해군은 지중해 및 홍해의 해상활동 지배
▷ Ptolemies 왕조는 국가 통합차원에서 파라오 왕조시재의 건축 양식을 답습한 신전을 건축하고(Dendarah, Philae, Edfu 지역), 파라오 왕조시대의 이집트 신들을 모방한 그리스 신화 도입.
2. 로마 제국시대 (BC 30-AD 337)
▷ 로마 황제 Octavian이 로마 장군 Antony와 이집트 여왕 Cleopatra의 연합군을 Actium 해전에서 물리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합병 (BC 30)
- 이집트는 로마의 식량 공급기지 및 로마와 인도간의 중계무역지 역할 담당
- Philae, Dendarah, Esna 지역에 신전 건축
- 기독교의 유입으로 콥틱어 사용이 유행하고, 수도원이 창설됨 (전통종교 몰락)
- Constantine 황제, 기독교 포교를 승인 (AD 312)
- 성 마가 이집트 포교 (4세기 초)
▷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이 동로마제국(Constantinople)으로 넘어간 후 리비아, 누비아, 페르시아 등의 침입이 5-6세기까지 지속
다. 이슬람 시대
1. 이슬람군의 이집트 정복 (AD 640-969)
▷ Khalif(이슬람 수장) Umar의 명령에 따라 Amr Iban Alas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이 동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 (AC 640)
▷ 이후 Ummayya(다마스커스) 왕조 및 Abbasd(바그다드) 왕조 등으로 파견된 이슬람 총독이 이집트를 지배
- 이 기간 중 많은 콥틱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가 콥틱어를 대체
- Tulun 총독 시기에는 바그다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반독립적 세력 형성(Tulun 왕조)
2. Fatimah 왕조의 이집트 지배 (AD 969-1171)
Fatimah 왕조는 예언자 Muhammad의 사위인 Ali(예언자의 딸 Fatimah와 결혼)를 정통 Khalif로 인정하는 시아파 이슬람 왕조로서 순니파 Ummayya 및 Abbasid 왕조의 Khalif 승계에 도전하였으며, AD 969년 이집트를 정복
- 초기에는 Fatimah 왕조의 Khalif들이 직접 이집트를 통치하였으나, 후기에는 군출신 총독을 파견
- Alexandria에서 Cairo로 천도
3. Ayyub 왕조 (AD 1171-1250)
이집트를 침입한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Saljuk Turkey의 Sultan이 파견한 Salah Al Din이 십자군을 물리친 후 이집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
- Fatimah 왕조를 폐지하고 Abbas 왕조를 전통 Khalif 승게자로 인정 (시아파 척결)
- 십자군의 공격에 대비해 카이로 주변에 Citadel 축조 (십자군은 Demietta, Mansurah 지역 점령)
4. Mamluk 왕조 (AD 1250-1517)
▷ Ayyub 왕조는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터키계 노예출신인 Mamluk족을 수비대로 활용하였으나, Mumluk 족의 반란으로 몰락 (AD 1250)
▷ Mamluk 장군 Baybar(후에 Sultan직 승계)는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십자군 세력, Ayyub 왕조잔당, 아르메니아, 우비아 등을 정벌한 후 순니회교의 보호자 역할 수행
▷ Mamluk 왕조 시대에는 터키어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내정은 불안하였으나 대외적인 관계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체로 안정 유지
5. Ottoman Turkey의 지배 (AD 1516-1805)
Ottoman 왕조의 Salim 1세가 Mamluk 왕조를 멸하고, 이집트를 정복 (AD 1517)
- Ottoman 왕조에서 파견한 총독 Pasha가 이집트 지배(후기에는 군출신 귀족 Bay들이 사병의 힘을 토대로 Pasha의 권위에 도전)
- 이집트는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쇠퇴하였으나, 이슬람 종교 중심지로서의 중요성 확보
라. 근대 이후
1. 19세기의 변천
▷ 프랑스의 이집트 지배 ( 1798-1801)
-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 (1798)
- 프랑스 군인들에 의한 ‘Rosetta Stone’의 발견(1799) 등 많은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 발굴
▷ 이집트 근대 왕조 성립
-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는 원래 프랑스의 이집트 침입에 대항하기위해 터키왕조에서 파견한 장군이었으나 이집트 정착 후 정치, 군사, 경제개혁 단행, 근대 이집트 건설의 기초를 닦고, 수단 정벌(1820), 팔레스타인 지역 및 아라비아 반도 파병 등을 통해 세력 확장
- Ali의 장손 이스마일(Ismail the Magnificent, 1863-79)은 대규모 국토종합계획(수에즈 운하건설, 철도, 통신, 공장, 관개수로 등)을 추진함으로써 외채가 누적(1875년 영국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43% 매입)
- 1876년 외채 상환이 정지됨에 따라 공채정리위원회(영,불,동,이,오)에 의한 국가재정관리 실시(식민지화)
▷ 영국의 군사점령과 통치 (1882-1936)
- 1882 영국군의 알렉산드리아 상륙(Arabi 등 민족주의 그룹이 주도한 알렉산드리아 반영 폭동 진압) 및 카이로 점령 이후 영국 총영사에 의한 실질적인 국정 수행
- 1914 영국 보호령 선포(1차 대전 중)
- Wafd당(Saad Azgloul 등이 주도)의 범이슬람주의, 입헌제 운동(1919 혁명)
-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쟁취, 국제연맹가입(1936까지 영국의 실지적 지배 지속)
2. 독립 이후
▷ 2차 대전 당시 영국을 도와 연합군에 참전
- 1942년 Al Alamayn 전투에서 독일군 침공 저지
-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참전
-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1947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에 반대한 아랍국가들이 이-팔간 내전에 개입,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배
▷ 1952년 Nasser 중령 휘하의 자유장교단 혁명
- 왕정 폐지, 이집트 아랍공화국의 건립
- BC 341이래 약 2300년간에 걸친 이민족 지배를 종식
▷ 1956년 Nasser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 영,불 및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으로 제2차 중동전쟁 발발, UN의 중재로 휴전(아랍의 자존심 회복, Nasser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
▷ 1958년 이집트-시리아 아랍연방공화국 결성 (1961 시리아 탈퇴)
▷ 1967년 6월 전쟁 (제3차 중동전쟁)
- 소련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등이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팔레스타인 지원, 이스라엘의 Tiran항 봉쇄 조치 등을 취하자, 미,영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이집트 등을 기습 공격
- 시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가자 지구, 요르단 서안 및 골란고원 점령
- 1970년 사다트 대통령 취임 (낫세르 대통령 병으로 사망)
- 친서방 온건노선 추구
▷ 1973년 10월 전쟁 (제4차 중동전쟁)
- 시나이 반도 등 실지 회복을 위해 이집트 등 아랍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으나 실패(이집트 측은 승전 주장)
-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협상의 계기 마련 (아랍에 대한 서구 및 이스라엘의 인식 전환)
▷ 이집트.이스라엘 관계 정상화
-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 (미국 중재)
-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
- 1989년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 철수 완료
▷ 1981년 10월, Mubarak 대통령 취임 (사다트 대통령 피살)
- 낫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와 사다트의 친서방주의의 장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중도주의를 지향
▷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항, 걸프전 참전
-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결이래 이집트는 아랍권으로부터 소외당하였으나, 걸프전 참전계기로 아랍권의 중심으로 재부상 (1979년 평화협정 체결 당시 아랍연맹본부를 이집트에서 튀니지로 옮겼으나 걸프전 직후 아랍연맹본부를 카이로로 다시 옮김)
▷ 1997년 Luxor 테러사건 발생 (외국인 58명 희생)
▷ 1999년 이집트 최대 이슬람 과격단체 Gamma Islamiya가 대정부 투쟁종식 선언
▷ 1999년 10월, Mubarak 대통령 4선 당선 (6년 임기)
▷ 2005년 9월 Mubarak 대통령 5선 당선 (6년 임기)
█ 피라미드 텍스트 (Pyramid Text)
고대이집트 장례문서의 하나로 카이로 남쪽 약 25㎞의 사카라에 있는 고왕국(古王國) 말기 제 5-7 왕조 피라미드 내부 벽에 새겨져 있다. 죽은 왕,·왕비의 영생과 부활을 돕기 위한 주문·서문(誓文) 및 신에 대한 찬가 등을 모은 것으로, 제5왕조 마지막 왕인 우나스의 것이 가장 많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는 주문도 있으나, 대부분 고왕국시대 장례의식 관행을 반영하고 있다. 죽은 왕의 운명에 대해서는 태양신으로의 승천, 별로의 변신, 오시리스로의 변용(變容) 등이 혼재하여 통일된 내세관은 보이지 않는다.
중왕국시대 <코핀텍스트(Coffin Texts)>, 신왕국시대 <사자(死者)의 서(書)>는 이것이 발전한 것이다.
C. Photographs
D. 후기
길고 지루할 수 있는 얘기를 여기까지 읽어준,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친구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저 자신도 이 곳들을 수 차례 다니면서, 게으른 관계로 단편적으로만 알던 내용들을 정리하고 보니 좋은 공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다시 꺼내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친구들과 함께 –인류문명의 시원을 찾아서-라는 테마로, 이 곳을 방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친구들에게, 영광 있으라 !!
고대 이집트 문명의 비밀을 풀었다<세계일보>
나폴레옹 원정군 병사가 발견한 돌덩어리 로제타스톤에 쓰인 이집트 신성문자 언어 천재 샹폴리옹 수년간 칩거 끝에 해독 그리스·로마 역사가 최고라고 자부하던 유럽인들에게 이집트 문화는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럽 역사밖에 몰랐던 유럽인들에게 이집트 문화는 수천 년이나 앞선 선진문명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냥으로 먹고살던 시절 이미 이집트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문명의 선진대국이었다. 피라미드 하나만 해도 2t짜리 돌 250만개가 기하학적으로 쌓인 거대 건축물이다. 콧대 높은 유럽인들은 놀라자빠질 수밖에…. 그러나 유럽인들은 이집트 문명의 속살은 끄집어낼 수 없었다.
적어도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1790∼1832)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이집트 문자의 의미는커녕 읽을 수조차 없었다. 장대한 유물 유적을 눈으로만 볼 수 있으되 속뜻은 하나도 풀 수 없는 까막눈이었다.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 요새를 쌓을 때 한 병사가 발견한 것이 이 돌덩어리다.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빛 현무암의 반질반질한 한 쪽에는 세 종류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첫째 단 14행은 이집트 상형문자였고, 둘째 단 32행은 민용문자(民用文字·상형문자를 일반 국민이 두루 쓰도록 쉽게 바꾼 문자), 셋째 단 54행은 그리스어였다. 풀어보니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 신관(神官)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찬양한 글이다. 그러나 이집트 문자를 알 수 없으니 어떤 내용인지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당대 영국과 프랑스의 최고 언어·역사·고고학자들이 총동원돼 이집트 문자를 풀려고 했으나 어느 누구도 풀지 못했던 것이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로제타스톤. 고대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치적과 당시 제도를 세 가지 언어로 기록해 놓았다. |
이 책은 2000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판됐다. 원서 제목은 ‘이집트의 열쇠: 성각문자 판독으로 가는 여정’(The Keys of Egypt: the Race to Read the Hieroglyphs). 제목이나 부제 어디에도 샹폴리옹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이 책은 그의 평전이나 다름없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비밀을 풀어낸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클레오파트라 미라. |
저자들은 그들이 군대를 따라 어떤 일을 했으며, 로제타석을 어떻게 입수했고, 또 그것을 넬슨이 이끄는 영국군이 어떻게 빼앗았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정리하고 있다. 저자들은 프랑스혁명에 이은 나폴레옹의 집권, 유럽 침공전쟁, 제국의 몰락 등 시대 흐름을 따라가면서 샹폴리옹이 불후의 업적을 낸 과정을 드라마처럼 엮어낸다. 나폴레옹이 1801년 영국과 치른 아부키르 해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로제타석 등 이집트 유물들을 몽땅 영국에 넘겨줘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지만, 나폴레옹이 로제타석을 발견한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고고학은 막연히 어렵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주는 학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고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과거 신비의 역사를 풀어내는 학문인지 독자들에게 친절히 안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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