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소설같은 삶을 아시나요?

이름없는풀뿌리 2016. 4. 1. 08:22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소설같은 삶을 아시나요?

 

1461년(세조 7년) 10월 22일, 순천 부사 여사신은 아침나절 관아 앞마당에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우두커니 북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여종을 보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다른 노비들이 마당을 쓸고 대청마루를 닦느라 부산한 시간이었다. 한데 여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아이와 함께 대청에 오르더니 여사신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나라 조선의 공주다. 난데없이 흉사를 당해 이 꼴이 되었지만 너는 선왕의 신하로써 어찌 내게 이토록 무엄한가?”

 

그 말을 들은 여사신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바로 문종의 딸이며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였다. 그녀는 몇 해 전 남편 영양위 정종이 귀양살이 하던 광주에서 아들을 낳았고 새로이 생명을 잉태한 상태에서 세조의 명을 받은 전라도 관찰사 함우치의 조치에 따라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 비로소 경혜공주를 알아본 여사신은 정중하게 예를 표한 다음 그녀에게 노비처럼 일하는 흉내라도 내달라고 간청했다. 광주 목사 유곡이 부마인 영양위 정종의 감시를 소홀히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가솔이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공주 때문에 자신도 그런 모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방에 세조의 눈과 귀가 있던 시절이었다. 여사신의 말을 들은 경혜공주는 사내아이를 한쪽으로 물러서게 한 뒤 걸레를 집어 들었다. 남편 정종이 역모 혐의로 능지처사 당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구차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것은 아들 정미수와 태중에 숨 쉬고 있는 생명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현주에서 공주가 되다

조선의 국왕 가운데 가장 가엾은 인물로 단종이 손꼽힌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숙부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결국 목숨마저 빼앗겼던 그의 짧은 인생은 실로 애잔하기 짝이 없다. 한데 그 시절 단종 못지않게 기구한 삶을 보내야 했던 여인이 있었다. 바로 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였다.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이다. 1436년(세종 18년)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세자였지만 어머니는 후궁인 종4품 승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정3품 현주(縣主)에 봉해졌다. 그녀의 신분은 세자의 서녀로서 어머니보다 품계가 높았다. 그해에 세자빈 봉씨가 폐출되었고 이듬해인 1437년(세종 19년) 2월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녀는 동궁인 경복궁 자선당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7세 때인 1441년(세종 23년) 어머니가 남동생 홍위를 낳다가 산욕을 이기지 못하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정2품 평창군주였던 그녀는 권씨 가문의 여종 어리니(於里尼)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없어도 비교적 행복했다. 왕실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고, 어린 왕자와 군주들의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여러 숙부들의 눈길도 따스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5세 때부터 운명이 꼬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도 세종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녀의 혼사를 서둘렀다. 자칫 국상이 선포되면 왕실이든 사가든 간에 3년 동안 혼인이 금지된다. 시기를 놓치면 그녀는 18세 이후에나 시집갈 수밖에 없다. 조혼 풍습이 보편적이었던 당대의 풍습으로 볼 때 18세의 늙은 나이로는 혼처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부마로 낙점된 인물이 전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鄭悰)이었다.

 

정충경은 효령대군의 장인이었던 정역의 맏아들이며 세종의 여덟째 왕자인 영응대군의 장인이다. 해주 정씨는 조선 건국 이래 태종·세종·문종·단종·중종·인조까지 여섯 명의 임금과 사돈관계를 맺은 유서 깊은 가문이다. 평창군주와 정종은 1450년(세종 32년) 1월 24일 혼사를 치렀고, 그로부터 52일 만인 2월 17일 세종이 승하했다. 그해에는 1월과 2월 사이에 윤1월이 끼어 있었으므로 날짜가 그렇게 된 것이다. 실로 아슬아슬한 혼인 작전이었다.

 

국상 중이었던 2월 22일 아버지 문종이 보위에 오르자 어머니 권씨는 현덕왕후로 추존되었고 그녀는 자동적으로 공주가 되었다. 공주와 정종 부부가 정식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동거하기 시작한 때는 1년 뒤 소상(小祥)이 끝난 1451년 봄이었다. 당시 문종은 경혜공주의 저택을 수리하게 했지만 오래 되고 기울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양덕방(陽德坊)에 저택을 짓게 했다. 그런데 사헌부 지평 윤면이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고 민가를 철거해서는 안 된다며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경혜공주가 집이 없으니 지어주려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백성들의 실태를 감안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문종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윤면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희들은 30여 채의 민가를 헐고 영양위의 집을 짓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의 고초가 여간 아닐 것이고, 영양위도 집이 없는 것이 아니니, 근방이나 다른 인가를 사들여 개조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무렵 여러 대군들의 저택이 매우 크고 화려해서 세간의 비난을 사고 있었다. 문종은 공주와 부마가 구설수에 오를까봐 걱정하여 윤면에게 헐리는 민가의 수효를 줄이고 또 다른 폐단이 있는지 살피도록 명했다. 문종의 딸 사랑은 실로 지극했다. 1452년(문종 2년) 중추원 부사 조유례가 할머니의 허물 때문에 사직서를 내놓자 윤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2품의 관직에 제수했다. 경혜공주가 어린 시절 재액을 피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한 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의 돌풍 속에서

경혜공주에게 과연 꿈같은 신혼시절이 있었을까. 할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마저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남동생 홍위가 1452년(단종 즉위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그녀의 나이 18세 때였다.

본래 미성년인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성년에 이를 때까지 대왕대비나 대비가 섭정을 맡는 것이 정상이다. 한데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앞서 세상을 등졌으므로 왕실에는 섭정을 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나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 사칙 양씨 등에게는 애초에 섭정의 자격이 없었다. 할아버지 세종은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김종서황보인을 비롯해 집현전 출신 신료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단종을 보위하며 황표정사(黃票政事)를 통해 조정을 이끌었다. 황표정사란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국왕은 그 위에 형식적으로 다시 점을 찍음으로써 추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로 인해 조정 신료들은 두 고명대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자들은 두 사람의 독주에 크게 반발했고 성삼문·신숙주·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 신료들도 의정부의 비정상적인 권한 확대에 우려를 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 드나들자 김종서와 황보인은 온건파인 안평대군을 끌어들여 그를 견제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단종의 고명 사은사를 자처함으로써 경계심을 약화시킨 다음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밤 권남·한명회·홍윤성·양정 등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다.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였다. 그날 단종은 마침 누나 경혜공주를 만나러 영양위궁으로 출타하여 궁에 없었다. 수양대군은 무장 유숙·양정·이을운 등을 데리고 북촌에 있는 김종서를 찾아가 일가를 피바다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어서 곧장 궁궐에 들어가 황보인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들을 척살했다.

 

거사의 성공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에 앉히고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이어서 그는 동생 안평대군을 붕당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로 유배한 뒤 사사했고, 이징옥의 난까지 진압한 뒤 왕위를 이어받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왕실 회유에 나섰다. 1453년(단종 1년) 12월 26일, 수양대군은 압수한 황보인과 김종서, 정분, 허후 등의 땅을 난신전(亂臣田)으로 삼아 공신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혜빈 양씨와 경혜공주에게 각각 150결, 경숙옹주에게 1백결, 봉보부인 이씨와 궁녀, 내시들에게 70결에서 10결까지 직분에 따라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 때문에 어린 임금의 처지가 몹시 옹색해졌다.

 

정난세력은 왕실을 우군으로 삼기 위해 이후에도 계속 선물 공세를 펼쳤다. 1454년(단종 2년) 8월 5일 수양대군은 정효전의 간사한 음모를 고했다는 이유로 영양위 정종에게 노비 10구, 영천위 윤사로에게 노비 6구, 판내시부사 이귀에게 노비 4구, 상궁 박씨에게도 노비 5구를 주었다. 이듬해인 1455년(단종 3년) 1월 24일에는 지방의 정적들로부터 빼앗은 노비를 나누어 혜빈 양씨에게 노비 1백 구, 신빈·숙빈·숙의·정의공주에게 노비 20구, 경혜공주에게 노비 5구, 경숙옹주에게 노비 30구, 봉보부인과 상궁 박씨에게 노비 5구, 판내시부사 윤기에게 노비 5구, 행 내시부 좌승직 복회에게 노비 4구를 주었다.

 

동생 때문에, 숙부 때문에

1454년(단종 2년) 정월, 단종은 송현수의 딸 송씨를 왕비로 맞이했다. 하지만 어린 국왕과 왕비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양대군의 심복들은 수시로 단종을 강압하며 양위를 요구했다. 단종이 이를 거부하자 이듬해인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은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상궁 박씨를 비롯해 수많은 궁인, 신하들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형에 처했다. 이때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단종은 환관 전균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통보하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그의 나이 15세, 재위 3년 2개월 만에 일이었다. 이때 경혜공주는 병석에 누워 세조의 조치에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대군 시절 그녀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던 세조였기에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주의 소식을 전해들은 세조는 정종을 서울로 불러들였다가 수원으로 이배했다. 그러자 공주는 짐을 싸들고 남편을 따라갔다.

 

그해 8월 13일 세조는 경기 관찰사에게 명하여 경혜공주가 데리고 간 노비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고 공주가 서울에 왕래하고자 하면 잘 대접하라고 명했다. 9월에는 포천의 사냥터에서 잡은 사슴고기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이듬해인 1456년(세조 2년) 6월 27일에는 이배된 정종을 따라 광주까지 내려간 공주에게 교자를 쓰게 하도록 했다. 그처럼 세조는 따뜻한 숙부의 심정으로 경혜공주를 살폈다. 이런 배려에 안식을 얻었던지 경혜공주는 현지에서 아들 정미수를 낳았다.

 

그해 윤6월 성삼문과 박팽년을 위시한 집현전 유신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시도한 상왕복위사건이 발각되었다. 세조의 전제권 강화에 대한 반발이었다. 평소 그들이 자신을 지지하지는 않아도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세조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리하여 여태까지 내밀었던 당근을 채찍으로 바꾸었다. 국법에 따르면 역적은 친가·외가·처가의 8촌까지 3족을 멸하게 되어 있지만 왕실과 반가의 혼맥이 실타래처럼 엉겨있는 조선의 지배체제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때문에 통상 대역죄인은 능지처참,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살, 16세 이하의 아들·어머니·처첩·조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첩은 공신가의 노비로 삼았다. 또 재산은 몰수하여 공신들에게 분배하고 백·숙부와 조카는 3천리 밖 유배형에 처했다.

 

예외적으로 남자 80세 이상, 중병에 걸린 자, 여자 60세 이상자, 정혼한 남녀, 자손으로서 양자로 출계한 자는 연좌를 면했다. 또 죄인 아들의 약혼녀, 딸의 약혼남은 그 가문의 사람이 아닌 것으로 규정해 처벌하지 않았다.

 

그 결과 거사를 도모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 역신들을 능지처참되었고 그 가족들을 한명회, 신숙주 등 64명의 공신들에게 분배되었다. 밀고자 김질의 장인인 정창손은 성삼문의 한 살 된 조카를 차지했고, 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와 딸 내은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돌아갔다. 이개의 아내 가지는 강맹경에게, 김문기의 딸 종산은 대사헌 최항에게, 유성원의 아내 미치와 딸 백대는 한명회에게 배정되었다.

 

이들의 거사에 동조하거나 방조했던 왕족에 대한 처분도 뒤따랐다.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 가두었고, 수원에 있던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의 가산을 몰수하고 전라도 광주로 이배한 다음 노비들은 모두 변방의 공노비로 만들었다. 경혜공주는 일국의 공주 신분에서 역적 정종의 아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6월 28일 세조는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엄명했다.

 

“도내 함양에 안치된 한남군 이어, 금산에 안치된 화의군 이영, 임실에 안치된 영풍군 이전, 광주에 안치된 부마 정종 등의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

 

세조의 명이 떨어지자 영양위 정종과 경혜공주의 유배처에는 목책이 설치되고, 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가두었다. 식량은 열흘에 한 차례씩만 공급했다. 심지어 집 안에 우물을 파주고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막았다. 이듬해인 1457년(세조 3년) 9월 유배 중이던 금성대군 이유가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상왕복위를 계획하다 관노의 고발로 발각되었다. 분개한 세조는 모든 사건의 근원인 노산군을 서인으로 재차 강봉한 다음 10월에 사사했다.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1461년(세조 7년) 7월, 영양위 정종은 광주에서 승려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혹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야말로 충신이라고 소리쳤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10월 20일 정종을 능지처참하고 아내 경혜공주를 순천부의 관노로 삼았다. 왕족은 대역죄인이라도 고문하지 않고 노비로 삼지 않는다는 국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광주에 있다가 졸지에 노비 신세가 된 경혜공주는 피눈물을 훔치며 3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부로 향했다. 살아있는 것이 지옥이었지만 어린 자식을 그곳에 홀로 남겨둘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순천부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사면을 받고 천역에서 벗어났다. 정희왕후 윤씨가 강경하게 남편 세조를 닦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극적인 상황 뒤에는 어린 시절 공주의 유모였던 어리니가 있었다. 그 무렵 자산군의 유모였던 어리니는 세조의 며느리 수빈 한씨를 통해 정희왕후에게 공주의 선처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녀가 돌보던 자산군은 훗날의 성종이다.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 올라온 공주는 얼마 후 딸을 낳았다. 젖이 떨어질 무렵 공주는 정희왕후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절에 들어가 남편 정종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세월이 지나자 예전의 따뜻한 숙부로 되돌아간 세조는 그녀를 극진하게 보살폈다. 1462(세조 8년) 2월 14일 세조는 한성부에 명하여 충익사(忠翊司)를 경혜공주의 거처로 내주었다. 그해 5월 4일에는 형조에 명하여 공노비 50구를 내렸다. 7월 19일에는 가을부터 생활에 필요한 녹봉을 지급하게 했고, 이듬해 3월 25일에는 하성위 정현조에게 그녀가 편히 살만한 집을 구하게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67년(세조 13년) 7월 8일에는 전지를 지급하기도 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은 1469년(예종 1년) 4월 10일 경혜공주에게 황금 2정과 백금 6정을 돌려주었다. 과거 세조가 그녀의 재산과 노비를 모두 돌려주었지만 보물만은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틀 뒤 예종은 신료들에게 선왕의 유훈이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역적의 후예가 아니라 종친으로 대접하도록 했다.

 

예종으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은 성종 역시 경혜공주를 각별하게 모셨다. 그는 어린 시절 유모 어리니로부터 그녀의 고통스런 역사를 들어 알고 있었고, 아들 정미수와는 한집에서 살기까지 했다. 경혜공주는 1473년(성종 4년) 12월 30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고양의 대자골에 마련되었다. 문신 이승소는 〈경혜공주묘지〉에 이렇게 썼다.

 

“살아생전 모든 곤욕을 맛보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불평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머니의 후광, 아버지의 흔적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는 서울에 올라온 뒤 정희왕후 윤씨의 배려로 어린 성종과 함께 사가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공주의 자식이기에 앞서 대역죄인의 아들이었으므로 늘 조심스럽게 살았다. 세조의 유훈이 없었다면 평생 노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경혜공주의 고난에 찬 세월을 목도했던 그는 지극한 효성을 바쳤다. 공주가 병석에 누웠을 때 달인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간호하면서 옷 띠를 풀지 않았다. 심지어 배변을 맛보아 용태를 살피기도 했다.

 

1476년(성종 7년), 정미수는 소꿉동무인 성종의 배려로 문과에 합격한 뒤 돈령부 직장, 형조 정랑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서거정, 신숙주 등의 공신들이 그를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수시로 탄핵했지만 성종의 비호로 현직에 머물 수 있었다. 정미수는 성종에게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양자가 되기를 허락받은 뒤 그녀를 친자식처럼 받들어 모셨다. 이에 화답하여 정순왕후는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과 노비를 그의 아들 해림군 정승휴에게 물려주었다.

 

성종은 1476년과 1477년 두 차례에 걸쳐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여동생 정씨의 혼인예물을 내려주었다. 또 1487년(성종 17년)에는 경혜공주를 끝까지 모셨던 사노비 강선을 면천시켜 첨지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 정지가 개국 이래 천례에게 양반 관직을 제수한 전례가 없다며 반대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 정미수는 선전관·승지·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공조판서를 역임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찬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06년 우찬성 재임 시절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해평부원군에 제수됨으로써 가문의 오점으로 남아있던 아버지 정종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데 성공했다.

 

집필자

이상각 | 직업시인, 작가.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대한민국항공회 항공역사서 저자 겸 항공역사서 편찬 자문위원. 오랫동안 동서고금의 고전을 재해석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교양서 집필에 몰두해 왔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민항공사를 정리한 항공역사서를 집필하였고, 조선시대 역관이나 화원 등과 같은 전문가 집단과, 백정이나 광대, 노비 등 핍박받던 천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교양역사서를 다수 저술했다. 저서로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이도 세종대왕>, <이경 고종황제>, <효명세자>,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1910년, 그들이 왔다>, <꼬레아러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선팔천>, <조선역관열전>, <조선노비열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