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16)정도전 삼봉집 제1권 /오언고시(五言古詩) /가을밤[秋夜]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18. 08:14

가을밤[秋夜]

 

신해년(1371) 가을 7월에 공은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였다는 말을 들고 개경(開京)에 달려왔다. 이때에 왕은 신돈을 처형한 연유를 들어 태묘(太廟)에 고하는데, 무릇 예수(禮數)와 악절(樂節)에 있어서는 공에게 명하여 의론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전(前) 지후(祗侯)로서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제수되고 전선(銓選) 관장하기를 무려 5년이나 했다.

 

나는 본래 산야의 사람으로 / 以我山野人

돌아가 숨을 마음 보상 못하고 / 未償丘壑心

먼저 흙 속에서만 헤매노라니 / 營營塵土間

지칠 대로 지쳐서 견디지 못하겠네 / 倦矣不能任

저물녘에야 휴식으로 나아가서 / 嚮晦方就休

편안히 앉아 어느덧 밤이 깊었네 / 宴坐到夜深

갑자기 청상의 소리 있어 / 忽有淸商聲

창 북쪽 숲속으로 몰아치누나 / 廻薄牕北林

처음에는 생학(笙鶴)이 왔나 의심되고 / 初疑笙鶴來

또 교룡이 우는 것도 같더니 / 又訝虬龍吟

일어나 보니 아무것도 없고 / 起視意無有

해맑은 기운만이 옷섶에 스며드네 / 灝氣襲衣衿

이윽고 산에 달이 솟아오르니 / 少焉山月上

정원의 수목들 성긴 그늘 펴네 / 庭柯布疎陰

한 순간 해묵은 병이 물러가 버리고 / 恍然沈痾痊

평화와 담박이 가슴속에 우러나네 / 冲澹生胸襟

옛동산이 그리워져서 / 因之懷舊山

평상 위 거문고를 둥둥 탄다오 / 彈我牀上琴

가을바람 남쪽으로 부니 / 秋風吹南去

바람을 의탁하여 유음을 부치노라 / 託此寄遺音

 

 

또[又]

 

오늘은 분명히 어제는 아닌데 / 今日非昨日

내일 아침은 다시 언제일까 / 明朝復何時

음과 양이 기틀을 멈추질 않아 / 陰陽無停機

사시는 서로 밀고 옮기네 / 四時相推移

백 년이란 얼마나 되는 건가 / 百年能幾何

속절없이 내 마음만 서러울 따름 / 徒令我心悲

슬프다 저 명리에 허덕이는 사람 / 哀哉名利人

노경에 이르러도 아직 모르네 / 至老猶未知

고귀한 자는 자연 교만하고 고집 세고 / 貴者自驕固

비천한 무리들은 벌 붙는 짓 많네 / 卑者多詭隨

영화란 번갯불을 좇는 것이다 / 榮華逐電光

죽은 뒤엔 기롱만이 남게 되는 걸 / 身後有餘譏

아름다운 저 군자와 선비를 보소 / 彼美君子士

속마음은 닳거나 변함이 없네 / 中心無磷緇

높고 높다 운월의 정 / 高高雲月情

희고 흰 빙설 같은 모습이로세 / 皎皎氷雪姿

모쪼록 썩지 않는 사업 남기어 / 庶將垂不朽

천추를 내다보며 기약을 하네 / 千載以爲期

여기에 느껴서 긴 노래를 부르노라니 / 感此發長謠

가을바람 으시시 처량도 하네 / 秋風颯凄其

 

[주]생학(笙鶴) : 선학(仙鶴)의 이름.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 진(晋)이 칠월 칠석날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후산(候山)의 마루에 머물러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했다.

[주]닳거나 변함이 없네 : 원문의 인치(磷緇)는 변질됨이 없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굳은 것이 있지 않느냐! 갈아도 엷어지지 않고, 흰 것이 있지 않느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느니라[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