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61)정도전 삼봉집 제1권 /오언절구(五言絶句) / 매화를 읊다[詠梅]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1. 07:08

매화를 읊다[詠梅]

 

아득하고 아득하다 강남의 꿈이 / 渺渺江南夢

날리고 날리어라 재 밖의 혼이 / 飃飃嶺外魂

상사에 잠겨 부질없이 서 있노라니 / 想思空佇立

더더군다나 갓 떠오른 황혼일레라 / 又是月黃昏

 

 

또[又]

맑고 청명한 소리 거문고 줄이라면, 어떤 본에는 사(絲)가 현(絃)으로 되었음. / 泠泠孤桐絲

한들한들 물에 잠긴 연기로구려 / 裊裊水沈煙

희고 희다 벗님의 옥 같은 얼굴 / 皎皎故人面

밤이라 창문 앞에 갑자기 왔네 / 忽到夜牕前

 

 

천지가 궁음에 막히었으니 / 窮陰塞兩間

어디서 봄빛을 찾아볼 건가 / 何處覔春光

몹시 마르고 여위었지만 / 可憐枯瘦甚

빙상을 물리치긴 넉넉하다오 / 亦足郤冰霜

 

 

잔설을 밟아라 나막신 신고 / 著屐踏殘雪

이 강물 기슭을 거닐어가네 / 行此江之濱

뜻밖에 찬자(粲者)를 만나고 보니 / 忽然逢粲者

그윽한 사람에게 위안을 주네 / 聊可慰幽人

 

 

한 굽이 시냇물은 맑고 얕은데 / 一曲溪流淺

삼경이라 달그림자 저물었구나 / 三更月影殘

손님네 어서 와서 옥피리 불어라 / 客來吹玉篴

홀로 서서 추위를 이기지 못해 / 獨立不勝寒

 

 

재너머는 봉우리 첩첩 포개고 / 嶺外疊峯巒

바위가엔 얼음 눈이 많기도 하네 / 巖邊足冰雪

옥혼이 먼 시골에 떨어졌으니 / 玉魂落遐荒

서로 보자 둘이 다 시름 극하네 / 相看兩愁絶

 

 

오랜 세월 이별했다 이제 와 보니 / 久別一相見

초초하게 검정 옷을 입었군 그래 / 草草著緇衣

【안】 이는 묵매(墨梅)를 읊은 것이다.

풍미 있음을 알면 족하지 / 但知風味在

옛 얼굴 아니라고 묻지 마오 / 莫問容顔非

 

 

먼 곳 사자 어느 때 출발했는가 / 遠使何時發

만 리 밖에서 처음 돌아왔구려 / 初從萬里廻

봄바람은 아무튼 정다워라 / 春風也情思

불어 불어 손아귀에 들어오네 / 吹入手中來

 

 

 


정백자(貞白子)는 옥결선생(玉潔先生)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시(詩)를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시를 배우는 것은 선(禪)을 배우는 것과 같다는 옛사람의 공안(公案)이 스스로 있는데, 선생은 무슨 점으로 인해 시를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네가 선(禪)을 다 배우고 나면 그때 가서 너에게 일러 주마.”

“배운다는 것은 묻지 못하겠거니와, 청컨대 배워서 안 되는 점을 묻고자 합니다.”

“말을 하면 부딪치는 것이요, 말을 하지 않으면 등지는 것이니, 부딪치면 이쪽에 떨어지는 것이요, 등지면 나변(那邊)에 떨어지는 것이라, 부딪침이 아니요, 등짐도 아니요, 중(中)을 중으로 삼아 들어가야만 바야흐로 본분의 풍광(風光)을 엿보았다고 할 수 있다.”

“제자는 근(根)과 기(機)가 낮고 용렬하여 때와 연(緣)도 오지 않았는데, 지금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마치 모기나 등에가 철우(鐵牛)를 깨무는 것과 흡사합니다. 청컨대 선생은 방편(方便)을 아끼지 마시고 한 마디 전어(轉語)를 내려 주시어 끝내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선생은 말없이 한참 있다가 위의 팔절(八絶)을 가늘게 읊으니, 정백자는 듣고는 몸이 오삭하여 하나의 이회(理會)하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곧 게(偈)를 다음과 같이 올리었다.

 

 

옥을 가늘게 누벼 의상을 짓고 / 縷玉製衣裳

얼음을 마시어 성령 기르네 / 啜氷養性靈

해마다 눈서리를 펴고 있으니 / 年年帶霜雪

봄빛의 변영을 알길 없구나. 어떤 본에는 소(韶)가 소(昭)로 되어 있다. / 不識韶光榮

【안】 뒷사람의 평에 이는 세상을 은둔하는 뜻이라 하였다.

 

 

밤은 고요해라 눈이 처음 개니 / 夜靜雪初霽

맑은 달이 반공에 비끼었구나 / 淡月橫半天

애가 다 끊어진 강남 나그네 / 腸斷江南客

시를 읊으며 홀로 잠 이루지 못해 / 哦詩獨不眠

선생은 너는 내 피육(皮肉)을 얻었구나 하였다.

파사한 광한전의 밤이라면 / 婆娑廣寒夜

냉담한 초택의 가을일레라 / 冷淡楚澤秋

기미야 똑같이 맑다 하지만 / 一般淸氣味

풍류는 호올로 차지했는걸 / 獨自占風流

 

 

 

 

밝은 창에 빛난 궤 비끼었으니 / 明牕橫棐几

소진의 침범을 허하지 않네 / 不許素塵侵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 燕坐讀周易

그야말로 천심이 보이고 말고 / 端的見天心

 

선생은, “너는 나의 골수(骨髓)를 얻어갔구나.” 하였다. 정백자는 흔연히 즐거워하며, “역시 잘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를 물어서 셋을 얻었습니다. 시(詩)를 듣고 선(禪)을 듣고 또 군자의 마음이 노파(老婆)보다 자상함을 들었습니다.”

 

서호(西湖) 사람이 아니 보이니 / 西湖人不見

천지도 부질없는 봄이로구려 / 天地徒爲春

천 년이라 동떨어진 오늘에 있어 / 曠然千載下

정과 신이 몰래 어울렸구려 / 冥會精與神

 

선생은 넌지시 말했다. “정백은 족히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만하다. 그 교한 것은 기왕이요 그 안 것은 장래이다.” 선생은 이로부터 다시 시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만약 청해 묻는 자가 있으면 “정백자가 있느니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