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236)정도전 삼봉집 제3권/소(疏) / 공양왕에게 올리는 소 신미 4월 [上恭讓王疏 辛未四月]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3. 18:32

공양왕에게 올리는 소 신미 4월 [上恭讓王疏 辛未四月 ]

 

【안】 공양왕이 구언(求言)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덕을 닦음이 제일이고, 정치를 잘하는 요령은 바른말을 구하는 데 있다. 옛날에 송경공(宋景公)이 말 한 마디를 잘함으로써 형혹성(熒惑星)이 3사(舍 1사는 30리)를 물러나게하였으니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感應)하는 것이 이처럼 빠르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내가 조종(祖宗)의 영(靈)에 힘입어, 신민(臣民)의 위에 있게 되어, 이른 아침 깊은 밤에 근심하고 힘써서 좀더 풍부하고 태평한 세상을 기필하려고 하지마는 지능(智能)이 미치지 못하고 학문이 밝지 못하여서 정치(政治)와 교화(敎化)에 있어 매양 방책이 없으니, 마치 큰 냇물을 건너는데 그 건너는 방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다가 요즈음 일관(日官)이 상언(上言)하기를, ‘천문(天文)이 경계를 보여서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을 범하고 화요성(火曜星)이 여귀성(輿鬼星)에 들어갔다.’ 고 하니, 변이(變異)가 매우 커서 조심되고 두려움이 더욱 심하다. 이는 나의 덕이 닦여지지 않아서 상제(上帝)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정령(政令)에 잘못이 있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못해서인가? 상벌[賞刑]의 방법이 정도에서 어긋나서인가? 사람을 임용(任用)함에 사정(私情)을 따라서인가? 아랫사람의 정이 위에 통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펴지지 못해서인가? 민폐(民弊)가 다 없어지지 않고 재용(財用)이 부당하게 소비되어서인가? 준수하고 특이한 재주로써 등용되지 않은 자 누구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내치지 못한 자 누구인가? 이와 같은 폐단을 어찌 나 한 사람이 두루 살필 수 있겠는가?

이에, 곧은 말 하는 길을 활짝 열어서 나의 총명을 가리는 폐풍을 없애겠다. 나무꾼[蒭蕘]의 말도 채택할 만한 것이 있거늘, 하물며 경대부(卿大夫)ㆍ백집사(百執事)로서 천위(天位 하늘이 내려준 벼슬)를 같이 누리고 천록(天祿)을 같이 먹는 이들의 말이겠느냐? 이제 그대들과 함께 치화(治化)를 새롭게 하여 천심(天心)을 우러러 보답하고자 한다.

아! 상벌(賞罰)이 밝고, 예악(禮樂)이 일어나며, 음양(陰陽)이 화하고 비바람이 철에 맞으며, 관리는 그 직무를 완수하고, 백성들은 그 생활을 즐겁게 하도록 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느냐? 이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인(仁)이라고 할 수 없으며, 말을 하더라도 다 말하지 않는다면 곧[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대들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실봉(實封)으로 올려서 과인(寡人)의 과오와 시정(時政)의 득실, 그리고 민간의 이익과 폐해가 되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라. 그 말이 쓸 만하면 내가 즉시 상을 내릴 것이요 말이 적합하지 않더라도 죄는 주지 않을 것이다.”

이 교서는 《고려사》에 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신(臣) 정도전(鄭道傳)은, 삼가 교서에서, 상이 위로는 천문(天文)의 변이(變異)를 삼가시고, 아래로는 신서(臣庶)들의 바른말을 구하시며, 팔사(八事)로써 자신을 책하시는 것을 읽었습니다.

신은 이 교서를 재삼 읽고 감탄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의 견고(譴告)를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시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그 과실을 들으려고 하셨으니, 옛날의 밝은 임금이라 할지라도 이에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잘 보필하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군부(君父)께 근심을 끼쳐 드려서 이런 교유(敎諭)까지 내리게 하였으니,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일찍이 이르기를, ‘임금은 머리[元首]이고 신하는 팔다리[股肱]다.’ 하였으니,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실은 한몸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창도(倡導)하면 신하는 화답하고, 신하가 말을 하면 임금은 들어주어서 더러는 왈가왈부(曰可曰否)도 합니다만, 이는 옳은 정치를 기필하자는 것뿐입니다. 그러하다면 하늘의 견고는 신 때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이(災異)가 있으면 삼공(三公)이 사면을 꾀했으며, 대신도 자리를 피하여 덕 있는 이에게 양보(讓步) 어떤 본에는 양(禳)으로 되어 있음. 를 했으니, 청컨대 신의 직위도 해면시켜서 재해를 그치게 하소서.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니, 옛날의 대신들은 물러가기를 청할 때에는 반드시 임금에게 진계(陳戒)하는 말이 있었는데, 더군다나 지금은 교서까지 받들고서 어찌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어리석음일지라도 만의 하나 채택하여 쓰시도록 올리지 않을 수 있으리까?

삼가 교서를 읽어 보니, ‘나의 덕이 닦아지지 않아 상제(上帝)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정령(政令)에 잘못이 있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지 않아서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덕(德)이란 얻는 것[得]이니 마음에 얻어지는 것을 말하며, 정(政)이란 바루는 것[正]이니 자신을 바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덕이란 것은 품부(禀賦) 초에 얻어지는 것도 있고, 수양을 쌓은 뒤에야 얻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대도(大度)가 너그러우시고 천성(天性)이 자애로우시니 품부 초에 얻어진 것은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평일에 글을 읽어 성현의 성법(成法)을 고찰하지 않으시고, 일을 처리하여 당세의 통무(通務)를 알지 못하시니, 어떻게 덕이 닦아지고 정령에 잘못이 없겠습니까?

한성제(漢成帝)는 조회에 임할 때에 침착하고 아늑하여 인군의 도량이 있었으나 한나라가 망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없었으며, 양무제(梁武帝)는 사형수를 대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먹지 않아 인자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강남(江南)의 난리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한갓 천질(天質)의 아름다움만 있고 덕정(德政)의 닦음이 없어서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품부(禀賦)의 아름다움을 자부하지 마시고 수양이 이르지 못한 점을 경계하소서. 그러면 덕이 닦여지고 정령이 시행될 것입니다.

또 교서(敎書)를 읽으니, ‘사람을 임용(任用)함에 있어 사정을 따라서인가? 상벌의 방법이 정도에서 어긋나 그런가?’하고 하셨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임용된 사람이 공정하게 선발되었느냐, 사정에서 나왔느냐는 전하께서 스스로 알고 계실 것이지, 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제목(除目 관리를 임명하는 조서(詔書). 발령장)이 내려오면 외인(外入)들이 그것을 보고 지적하기를, ‘누구는 친구이고 누구는 외척(外戚)이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바깥 의논이 이러한 것으로 보아서 신은 사정에 따른 것이 섞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상(賞)이란 공 있는 이를 권장하는 것이며, 형(刑)이란 죄 있는 이를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천명(天命), 형(刑)을 천토(天討)라고 하니, 이는 하늘이 상을 주고 형을 주는 권리를 인군에게 주어 인군이 하늘을 대신하여 행할 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이나 형은 비록 인군에게서 나간다손 치더라도 인군이 마음대로 내고 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상(賞)을 받고 형(刑)을 받은 사람들이 같은 사건인데도 다르게 처리된 자가 있으니, 김저(金佇)의 말이 한 가지인데,

 

【안】 이에 앞서 신우(辛禑)를 여흥(驪興)으로 귀양보냈다. 대호군(大護軍) 김저(金佇)는 최영(崔瑩)의 생질이었는데, 전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와 몰래 신우를 가서 보았다. 그러자 신우는 울면서 하는 말이, “역사(力士) 하나를 얻어 이 시중(李侍中 이성계(李成桂))을 해치우면 우리 일이 잘 될 것이오.” 하며 칼 하나를 내어 주었다. 그래서 김저는 곽충보(郭忠輔)를 시켜 거사하게 했으나 충보는 거짓 응낙하고서 우리 태조[我太祖 : 이태조]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김저를 가두고 국문하니, 김저는 “변안열(邊安烈)ㆍ이임(李琳)ㆍ왕안덕(王安德)ㆍ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신우를 맞아오려는데 왕이 내응(內應)하기로 했다.”고 말하였다.

 

극형(極刑 사형)에 처한 자가 있는가 하면 발탁해서 쓴 자도 있으며.

 

【안】 변안열은 죽이고 왕안덕은 판삼사사(判三司事)로 발탁하였다.

 

김 종연(金宗衍)이 감옥에서 탈출한 것이 한 가지인데,

 

【안】 김종연의 일은 부록(附錄) 사실(事實)에 보인다.

 

그 감옥을 지킨 관리를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기용하였으며,

 

【안】 그때 종연(宗衍)이 도망쳤는데 체포하지 못하자, 감시를 엄하게 못하였다는 이유로 당직(當直)한 영사(令史)는 베고, 순무(巡撫) 이사영(李土穎)은 순군(巡軍)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석방하여 임용하였던 것이다.

 

도피(逃避)해 있으면서[在] 어떤 본에는 재(在)자가 두 번 있음. 난리를 도모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같이 꾀하고 용접(容接) 어떤 본(本)에는 접(接)자가 은(隱)으로 되어 있음. 한 사람들이 혹은 살고 혹은 죽었습니다.

 

【안】 산 사람은 우현보(禹玄寶) 등이며 죽은 사람은 윤유린(尹有麟)ㆍ최공철(崔公哲) 등이다.

 

어리석은 신으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형을 받고서 죽은 자가 죄가 있었다면 발탁되어 쓰인 자는 무슨 다행이며, 발탁되어 쓰인 자가 죄가 없어서라면 형을 받고 죽은 자는 무슨 죄이옵니까?

우(禑)ㆍ창(昌)은 우리 왕씨(王氏)의 왕위를 빼앗았으니 실로 조종(祖宗)의 죄인입니다. 왕씨의 자손이나 그 신서(臣庶)라면 다 원수로 여겨야 할 바이므로, 그 친족이나 당여(黨與)는 형으로 베지 않는다면 사예(四裔 사방의 국경)로 내쳐야만 인신(人神)의 마음을 상쾌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무재인(武才人)은 당고종(唐高宗)의 왕후로서 그 아들 중종(中宗)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 오왕(五王)이 거의(擧義)하여 무씨(武氏)를 물리치고 다시 중종을 복위시켰습니다. 무씨(武氏)는 어머니이고 중종은 아들이니 친어머니가 아들의 자리를 빼앗았는데도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는 오히려 오왕이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무씨와 그의 종족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을 기롱하였습니다.

하물며 우(禑)ㆍ창(昌)은 왕씨와는 무씨(武氏)처럼 친족의 관계도 없고, 무씨의 죄가 있으니, 그의 친족과 당여(黨與)에 대해서는 무씨의 종족처럼 다스려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대간(臺諫)의 상언(上言)으로 그들을 밖으로 유배시켰으니,

 

【안】 공양왕 기사년(1389)에 간관이 이색(李穡) 등의 죄를 논하여 밖으로 유배시켰다.

 

비록 천주(天誅)를 밝게 보이지는 못했지만 조종(祖宗)과 신서(臣庶)의 설분이 조금은 되었다고 하겠사오나, 몇 달이 되지 않아 그들은 모두 소명을 받고 경성(京城)에 모여서 출입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간관의 말을 들어 몇 사람 방축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억지로 따르시어 망설이고 애석해하는 뜻이 있었으니, 이러하시는 것이 어떠한 뜻에서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모든 장수가 회군(回軍)한 뒤에 왕씨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화(禍) 구본에는 과(過)로 되어 있음. 를 뉘우치고 조종(祖宗)이 가만히 왕씨가 부흥할 기회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어늘, 그 의논을 저해하여 마침내 아들 창(昌)을 세워서 왕씨를 부흥하지 못하게 한 자가 있으며 이색(李穡)을 가리킴. 신우(辛禑)를 맞아다가 길이 왕씨를 끊어버리려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난적(亂賊)의 무리로서 왕법(王法)에 용납되지 못할 바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들의 목숨을 살리셨으면 먼 곳에 방치하는 것이 옳을 일인데, 이제 모두 집으로 소환하여 위안시키시어,

【안】 공양왕 경오년(1390)에 우현보(禹玄寶)ㆍ이색(李穡) 등을 사면하여 마음대로 살게 하였다.

그 죄가 무함인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 왕씨를 저해하고 가짜 창(昌)을 세우려던 것은 여러 장수가 다 아는 일일 뿐더러, 직접 자복(自服)하여 명확한 증거가 있으며, 그 신우(辛禑)를 맞이하여 왕씨를 끊으려 한 것은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가 앞서 말하였고, 이임(李琳)ㆍ이귀생(李貴生)이 뒤에 초(招) 어떤 책에는 초(招)가 상(相)으로 되어 있음. 하여 승복한 증거가 확실합니다. 그래도 이것을 무함이라고 이른다면 천하에 토죄할 만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하는 바란, 공의(公議)에 알맞지 않으면 반드시 사정(私情)에 합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일을 공의에 알맞다고 한다면 우ㆍ창의 무리는 모두가 조종의 죄인일 것이며, 사정에 합하다고 한다면 우ㆍ창의 무리를 머물게 해서 뒷날에 걱정 끼치기를 마치 윤이(尹彝)ㆍ이초(李初)가 친왕(親王)에게 청하여 천하의 군사를 움직이러던 것과 같을 것인데 무엇이 인정에 편하겠습니까?

혹시, ‘죄 있는 자를 놓아주면 그 은혜가 막대하므로 뒷날 반드시 그의 힘을 입을 것이요, 그러하면 인심도 저절로 편안해져서 화란(禍亂)도 저절로 그칠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형법(刑法)이란 어지러움을 금하는 것이며, 임금이 이를 믿고서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형법이 만일 한번 흔들리게 되면 어지러움을 금하는 기구가 먼저 무너져서 힘을 얻기 이전에 재화가 먼저 이르고, 마음이 편안하기 이전에 어지러움이 그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당중종(唐中宗)과 무삼사(武三思)의 일을 들어서 밝히려 하옵니다. 무씨(武氏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무리에서 가장 용사(用事)를 한 자가 삼사(三思)인데, 중종은 어머니의 친조카라 하여 벌주지 아니하고 대우가 심히 두터웠습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오왕(五王)이 무씨의 아들(중종을 이름)을 세워서 황제로 삼았기 때문에 삼사가 도마 위에 놓인 고기 형세를 면한 것이니, 오왕은 비단 중종에게만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삼사에게도 천지에 재조(再造)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사는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서, 스스로 그 죄악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까 의심하여, 밤낮으로 오왕을 참소하기를, ‘권세가 중하고 공로를 믿는다.’ 하여 중종의 마음을 의혹하게 했습니다. 중종은 삼사가 자기를 사랑한다 하여 친근히 하고, 오왕은 권세가 중하다고 하여 꺼려했으므로 오왕은 날로 소원해지고 삼사는 날로 친밀하게 되었는데, 끝내는 삼사에게 오왕은 죽고 중종은 시해(弑害)당했습니다. 설사 중종이 그릇된 시책을 했다 하더라도 공신(오왕)을 보전하지 못함에 불과할 뿐 자신이 삼사의 손에 시해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친족으로 따지면 어머니의 조카요, 은혜로 따지면 목숨을 살린 터인데, 그의 힘은 얻지 못하고 화만 입었으니, 참소하는 자의 마음이란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참소하는 자의 계책은 그 처음에는 자기의 몸을 보전하려는 데에 불과하지만, 악한 짓을 그치지 않고 한다면 그 방법에 익숙하여 남의 몸을 망치고 남의 집과 나라를 멸하며,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패하고 마는 것이니, 삼사와 같은 자는 어찌 고금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의 관계란 털끝만큼도 사이가 날 수 없어서, 길흉(吉凶)ㆍ재상(災祥)이 각각 유(類)로써 응하는 것입니다. 지금 안으로는 백관이 알맞은 직을 받고 서민들은 편안히 종업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중국[上國]이 화통(和通)되고 섬 오랑캐(일본을 가리킴)가 굴복하였으니, 어지러움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본디 참소하는 사람이 아래에 얽혀져 있으면 걱정하는 형상이 위에서 나타나는 것이오니, 객성(客星)이 자미성(紫微星)에 침범한 것은 신은 삼사(三思)가 옆에 있어서가 아닐까 두렵고, 화요성(火曜星)이 여귀성(輿鬼星)에 들어감은, 신은 삼사의 화가 끝내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등은 비록 오왕(五王)같은 해를 당한다손치더라도 족히 근심될 것이 없사오나 왕씨의 이룩된 왕업을 생각하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혹 ‘이런 일이 결코 없는데 말하는 자가 망령되어서다.’고 하실지 모르나 저 중종의 마음엔들 어찌 굳힌 바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후인의 조소를 샀으니, 신은 후인이 현재를 비웃을 것이 지금에 옛날을 조소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천심(天心)은 인군을 사랑하기 때문에 먼저 재이(災異)를 내려 경고하니, 이는 두려워하여 반성하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등용하고 형벌을 내릴 때에, 그 친소나 귀천을 따지지 말고 하나같이 공ㆍ죄(功罪)의 유무로써 처리하여 각기 공평하고 서로 넘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하면 임용(任用)이 공정하고 상벌이 바르며, 인사(人事)가 잘되고 천도(天道)가 순할 것입니다.

삼가 교서를 읽건대, ‘민폐가 제거되지 않고 재용이 부당하게 소비되어서인가?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미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펴지지 못해서인가? 뛰어난 재주로써 등용되지 않은 자 누구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내치지 못한 자 누구인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듣건대, ‘삼사(三司 고려 때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會計)를 맡아보던 관아) 회계(會計)에서 불신(佛神)에 관한 비용이 가장 많았다.’고 하니 재용을 망령되게 허비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의 해(害)는 예부터 분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불도(佛徒)들은 이르기를, ‘이는 좋은 일이고 착한 일이어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자는 나라가 부(富)할 수 있으며, 백성이 수(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임금된 자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그 재력(財力)을 다하여 부처에게 아첨하여 섬깁니다.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곧 대답하기를, ‘나의 부처 섬김에 대해 저가 그르다고 하니, 나는 착하고 저는 악하며, 나는 도(道)이고 저는 마귀이다. 내가 부처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백성을 오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고 합니다. 이 말을 가지고 그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도량(道場)이 궁궐보다 높았고 법석(法席 설법하는 회합의 자리)을 절[佛宇]에 상설했으며, 도전(道殿)의 기도가 무시로 있었고 무당(巫堂)의 제사가 번거롭고 어지러웠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이것을 좋은 일로 여기고 실상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이며, 이것이 나라를 부(富)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고 실상은 나라가 메마르게 되는 것을 몰라서이며, 이것이 백성의 수명을 오래 살게 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백성이 궁곤해짐을 알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말씀을 드리는 자가 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올바른 말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이 말한 ‘착한 일이다. 복이 된다. 수명이 연장된다.’는 등의 말이 먼저 머리에 들어가 있어서입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는 만승(萬乘) 천자의 몸을 굽혀서 세 번이나 몸을 바쳐 절집의 종[奴]이 되었으며, 강남(江南)의 재력을 탕진시켜서 불탑(佛塔)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 마음에 어찌 이롭지 않다고 여기고서 구차하게 이런 일을 하였겠습니까마는, 한 필부(匹夫 후경(侯景)을 가리킴)가 난(亂)을 일으키매 몸이 욕을 당하고 자손을 보전하지 못하여 국가가 따라서 망하였으니, 불씨(佛氏)의 이른바, ‘선(善)을 닦아 복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다른 세대(世代)의 일이라 하겠습니다만, 공민왕[玄陵]께서도 불교를 숭상하여 친히 중들에게 제자(弟子)의 예를 행하셔서 궁중의 백고좌(百高座)와 연복사(演福寺)의 문수회(文殊會) 등이 없는 해가 없었으며, 운암(雲菴)의 단청[金碧]은 산골을 비추고 영전(影殿)의 기둥은 하늘에 솟구쳐서 재력이 역갈(力竭) 역갈(力竭)이 구본에는 갈력(竭力)으로 되어 있음. 되고 원망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아랑곳없이 부처를 섬겼으니 가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한데, 끝내는 복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밝은 전감(前鑑)이 아니겠습니까?

주(周)나라 말기에 신(神)이 유신(有莘)의 땅에 내리니, 태사(太史) 과(過)가 이르기를, ‘장차 흥할 국가는 사람에게 맡기고, 장차 망할 국가는 신에게 맡긴다.’고 하였다더니, 주나라가 과연 망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하더라도 부처를 섬기는 것이나 신을 섬기는 것은 이익이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사(有司)에게 거듭 명하여 사전(祀典)에 기재된 것을 제외하고는 중외(中外)의 모든 음란하고 더러운 일들을 일체 금단하소서. 그리하면 재용이 절약되고 망령되게 허비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사람이 혹 죄를 범할지라도 불문에 붙이기도 하고 방면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한 자로 신원되지 못한 자는 없는 듯하오나, 사면이란 본시가 간인(姦人)에게는 다행한 일이지만 선인(善人)에게는 적(賊)이 되는 것이고 보면, 자주 사면을 하는 것이 바로 원통하고 억울한 것의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대간(臺諫)이 종묘 사직의 대계(大計)를 글로 올려 논집(論執)하다가 모두 추방을 당하였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신원되지 못하고 뛰어난 재주가 뽑혀지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이란 그 자취가 숨겨지고 언어가 은밀하여서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허물이 있을 때에 밝게 다투고, 남이 죄가 있을 때에는 면대(面對)하여 꺾으며, 세정과 뜻이 맞지 않고 우뚝이 홀로 서서, 다른 사람의 의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이고, 그의 종적을 감추어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말하지 않았다가 홀로 임금을 대할 적에 고자질하는 자가 간사한 사람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밖으로 사대부(士大夫)를, 안으로는 소신(小臣)ㆍ환시(宦寺)를 시험삼아서, 신의 말로써 참고하여 보신다면 그 간사한 속셈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더라도 모두 자기는 사랑할 줄 알며, 그 처자의 생계를 위하는 그런 마음이야 누가 없겠습니까? 옛날 한성제(漢成帝) 때에 일식(日食)의 변이 있었는데, 언관(言官)들이 모두 외척(外戚)이 용사(用事)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자, 성제는 의문이 나서 장우(張禹)에게 물었습니다. 장우는 자신이 늙고 자손들이 미약하니, 사실대로 말하면 외척에게 혹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그 까닭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왕망(王莽)에게 한(漢) 황실(皇室)이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곡영(谷永)의 무리들은 성제에게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곧장 공격하면서도 왕씨(王氏)의 용사(用事)에 대해서는 두려워 피하고 말하지 않다가 한실(漢室)이 마침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처자들을 위하여 계책을 하느라고 한실에는 겨를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안】 《고려사》 본전(本傳)에는 ‘숙무시심(孰無是心)’ 아래에 ‘석한성제(昔漢成帝)’ 이하의 48자가 있는데 본집(本集)에는 빠져 있으므로 지금 첨입하였다.

신이 비록 광망(狂妄)하오나 풍병(風病)은 들지 않았는데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홀로 뭇 원망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으니, 이 말이 나가면 화가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숨기지 않으시고 물으시니, 신이 감히 바른말로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신이 화를 얻어 자신이 구원되지 못하더라도 간절하게 말씀드리고 숨기지 않는 까닭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여기에 두시어 채택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신이 몸을 잊고 공사에 힘쓴다는 뜻을 살펴주신다면 천만 번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上恭讓王疏 辛未四月○按。恭讓王求言敎曰。弭災之道。莫如修德。爲政之要。惟在求言。昔宋景一言之善。致熒惑三舍之退。天人之際。感應斯速。予以眇躬。荷祖宗之靈。託臣民之上。憂勤夙夜。期底豐平。而智能不逮。學問不明。其於政敎。動昧施爲。若涉大川。罔知攸濟。今者日官上言乾文示儆。客星孛于紫微。火曜入于輿鬼。變異甚鉅。兢惕益深。將涼德未修而不孚於帝心歟。政令有闕而不協於輿望歟。刑賞之道有乖於正歟。任用之人或徇於私歟。下情未盡達。而冤抑有所未伸歟。民弊未盡除。而財用有所妄費歟。茂異之才未擧者誰歟。讒佞之徒未斥者誰歟。如斯之弊。豈予一人所能徧察。肆開讜直之路。以消壅蔽之風。蒭蕘之言。亦有可採。矧卿大夫百執事之臣。共天位食天祿者哉。玆欲共新於治化。庶以仰答於天心。於戲。賞罰明而禮樂興。陰陽和而風雨時。吏稱其職。民樂其生。其要安在。知而不言。不可謂之仁。言而不盡。不可謂之直。惟爾大小臣僚。竝上實封。寡躬過誤。時政得失。民間利病。毋有所諱。其言可用。予卽有賞。言而不中。亦不加罪。事見麗史。

 

政堂文學臣鄭道傳伏讀敎書。上以謹天文之變。下以求臣庶之言。而以八事自責。臣讀之再三。不勝感歎。殿下以天之譴告。引而歸之於己。開廣言路。冀聞過失。雖古哲王。未之或過也。臣待罪宰相。無所匡輔。以貽君父之憂。至煩敎諭之丁寧。臣實赧焉。嘗謂君爲元首。臣爲股肱。比之人身。實一體也。故君倡則臣和。臣言則君聽。或曰可。或曰不可。期於致治而已。然則天之譴告。由臣所致也。古者有災異。三公策免。爲大臣者亦避位而讓 一本作禳 之。請免臣職。以弭災異。然念古之大臣。當請退之時。必有陳戒之辭。況今獲奉敎書。安敢不效一得之愚。仰備採擇之萬一。伏讀敎書曰。涼德未修而不孚於帝心歟。政令有闕而未協於輿望歟。臣愚以爲德者得也。得於心也。政者正也。正其身也。然所謂德者。有得於稟賦之初者。有得於修爲之後者。殿下大度寬洪。天性慈仁。得於稟賦之初者然也。殿下平日未嘗讀書以考聖賢之成法。未嘗處事以知當世之通務。安敢保德之必修。政之無闕也。漢成帝臨朝淵默。有人君之度。無補漢室之亡。梁武帝臨死刑。涕泣不食。有慈仁之聞。不救江南之亂。徒有天質之美。而無德政之修故也。伏望殿下毋以稟賦之善自恃。而以修爲之未至者爲戒。則德修而政擧矣。伏讀敎書曰。任用之人或徇於私歟。賞罰之道有戾於王歟。臣愚以爲任用之人出於公私。在殿下自知之耳。臣何足知之。然除目旣下。外人目而議之曰。某也故舊也。某也外戚也。外議如此。臣恐徇於私者。雜之也。賞者。勸有功也。刑者。懲有罪也。賞曰天命。刑曰天討。言天以賞刑之柄。付之人君。爲人君者。代天而行之耳。賞刑雖曰出於人君。固非人君所得私而出入之也。殿下卽位以來。蒙賞受刑之人。有事同而施異者。金佇之言 按。先是遷辛禑于驪興。大護軍金佇。崔瑩甥也。與前副令鄭得厚潛往見之。禑泣曰。得一力士。害李侍中。吾事可濟。仍授一劍。使郭忠輔擧事。忠輔佯諾而告我太祖。囚佇鞫之。佇曰。邊安烈,李琳,禹玄寶,禹仁烈,王安德,禹洪壽。共謀迎驪興王爲內應。 一也。有置于極刑者。有加擢用者。按謂誅邊安烈。擢王安德判三司事 金宗衍在獄致逃 按金宗衍事。見附錄事實。 一也。其監守官吏。一誅一用。按。時宗衍在逃不獲。以防禁不嚴。斬當直令史。囚巡撫李士穎于巡軍。卒乃釋而用之。 其在 一本有兩在字 逃謀亂一也。同謀容接 一本作隱 之人。或生或死。按。生者禹玄寶等。死者尹有麟,崔公哲等也。 臣愚不知刑誅而死者爲有罪耶。則擢用而生者獨何幸歟。擢用而生者爲無罪耶。則刑誅而死者獨何辜歟。禑,昌竊我王氏之位。實祖宗之罪人。而爲王氏之子孫臣庶所共讎也。其族姻黨與。不加刑誅。則屛諸四裔而後快於人神之心。昔武才人以高宗之后。奪其子中宗之位。五王擧義。退武氏復立中宗。武氏母也。中宗子也。以母之親。奪子之位。胡氏尙譏五王不能斷大義。誅其罪而滅其宗。況禑,昌之於王氏。無武氏之親。有武氏之罪。則族姻及其黨與。奚啻武氏之宗也。頃者臺諫上言。逐之於外。按恭讓己巳。諫官論李穡等罪。流之於外。 縱不能明示天誅。庶幾小雪祖宗臣庶之憤也。曾未數月。俱承寵召。聚會京城。出入無禁。今雖以諫官之言。放其數人。殿下黽勉從之。有遲留顧惜之意。不知此擧果何義也。諸將回軍。議立王氏。此上天悔禍。舊本作過 祖宗陰相。王氏復興之機也。有沮其議。卒立子昌。使王氏不復興者。指李穡 有謀迎辛禑。永絶王氏者。其爲亂賊之黨。王法所不容也。殿下旣全其生。置之遠方可也。今皆召還于家。慰而安之。按恭讓庚午。宥禹玄寶,李穡等任便居住。 若以其罪爲誣也。其沮王氏而立僞昌者。諸將之所共知也。親自招服。明有辭證。其迎辛禑而絶王氏者。金佇,鄭得厚言之於前。李琳,李貴生招 一本作相 承於後。辭證甚明。此而謂之誣也。天下安有亂臣賊子之可討者也。大抵人之所爲。不合於公議。則必有合於私情。殿下此擧以爲合於公議。則禑,昌之黨。皆祖宗之罪人也。以爲合於私情。則留禑,昌之黨。以遺後日之患。如尹彝,李初之請親王動天下兵。亦何便於人情哉。若曰有罪者赦之。恩莫大焉。佗日必得其力矣。人心自安而禍亂自止矣。臣愚以爲刑法。所以禁亂也。人君所恃以存安者也。刑法一搖。禁亂之具先毀。力未得而禍先至。心未安而亂不止矣。請以中宗三思之事明之。武氏之黨最用事者三思。中宗以母之親姪。誅討不加。待遇甚厚。自今觀之。五王旣立。武氏之子爲帝。故三思得免其机上之肉。則五王不惟有功於中宗。於三思亦有天地再造之恩也。彼三思曾不是思。自疑其罪爲世所不與。日夜譖五王曰。權重恃功。以惑中宗之心。中宗以三思愛己而親之。以五王爲權重而忌之。五王日疏。三思日密。卒之五王戮而中宗弑。使中宗謬計。不過曰不能保全功臣而已。豈知親見弑於三思之手乎。以親則母之姪也。以恩則活其生也。不得其力而得其禍。讒人之難保也如此。讒人之謀。其初不過自保其身而巳。爲惡不止。則馴致其道。至於亡人之身。滅人家國。以底自敗而後已。如三思者。豈有古今之殊也。天人之際。間不容髮。吉凶災祥。各以類應。今內則百官受職。庶民安業。外則上國和通。島夷讋服。亂何由生。讒人交構於下。則虞憂之象著於上。客星孛于紫微。臣恐三思之在於側也。火曜入于輿鬼。臣恐終有三思之禍也。臣等雖遭五王之害。無足恤也。爲王氏已成之業惜之也。若曰。保無此事。言之者妄也。彼中宗之心。豈不爲保也。卒貽後人之笑。臣恐後人之笑今。猶今之笑古也。董子曰。天心仁愛人君。先出災異以譴告之。欲其恐懼修省之也。伏望殿下當用人刑人之際。不論其親疏貴賤。一視其功罪之有無。處之各當其可。使不相陵。則任用公而賞罰正。人事得而天道順矣。伏讀敎書曰。民弊未除而財用妄費歟。下情未達而冤抑未伸歟。茂異之才未擧者。誰歟。讒佞之徒未斥者。誰歟。臣聞三司會計。佛神之用居多焉。財用之妄費者。莫斯若也。然佛神之害。自古難辨也。爲其徒者曰。此好事也。善事也。歸我者國可富也。民可壽也。爲人君者聞是說而樂之。殫其財力。諂事佛神。人有言之者。則以爲我事佛而彼非之。我善而彼惡也。我道而彼魔也。我之事佛神。爲富國也。爲壽民也。非爲我也。持是說以固其心。而人之言莫得以入也。殿下卽位以來。道場高峙於宮禁。法席常設於佛宇。道殿之醮無時。巫堂之祀煩瀆。此殿下以爲善事而不知其實非善事。以爲富國而不知國實瘠。以爲壽民而不知民實窮。雖有言之者。擧皆不納。不自以爲咈諫。是臣所謂爲善福壽之說先入之也。昔梁武帝屈萬乘之尊。三舍身爲寺家奴。殫江南之財力。大起佛塔。其心豈以爲非利而苟爲之也。匹夫作亂。身遭霸辱。子孫不保。而國家隨之。佛氏所謂修善得福者。果安在哉。此猶異代也。玄陵崇尙佛敎。親執弟子之禮於髡禿之人。宮中之百高座。演福之文殊會。無歲無之。雲菴之金碧。輝映山谷。影殿之棟宇。聳于霄漢。財殫力竭。力竭舊本作竭力。 怨讟竝興。而皆不恤。事佛可謂至矣。卒不獲福。豈非明鑑乎。周末。神降于有莘。太史過曰。國家將興。聽於人。國家將亡。聽於神。周果以亡。由是言之。事佛事神。無利而有害可知矣。伏望殿下申命有司。除祀典所載外。凡中外淫怪諂瀆之擧。一皆禁斷。則財用節而無所妄費矣。殿下卽位以來。人或犯罪。有不問者。有放免者。疑若無冤抑之未伸者也。然赦者姦人之幸。良善之賊也。則其數赦。乃冤抑之所在也。近者臺諫以宗社大計。上書論執。皆遭放逐。臣恐冤抑之未伸。茂才之未擧者。此其時也。至於讒佞之人。蹤迹詭祕。言語隱密。難可得而料也。大抵君有過則明爭之。人有罪則面折之。落落不合。矯矯獨立。不畏他人之議者。正士也。祕其蹤迹。惟懼人知。在衆不言。獨對浸潤者。讒佞之人也。殿下於外而士大夫。內而小臣宦寺。試以臣言觀之。讒佞之情可得矣。人雖至愚。皆知自愛。至於妻子之計。孰無是心。昔漢成帝時。日有食之。言者皆以爲外戚用事之象。成帝疑之。問於張禹。禹以身老而子孫微弱。恐得禍於外戚。不明言其故。卒使王莽移漢鼎。谷永輩直攻成帝。略無忌憚。至於王氏之用事。畏避不言。漢室卒以亡。亦爲妻子計而不暇及漢室也。按麗史本傳。孰無是心下。有昔漢成帝以下九十四字。佚於本集。今添入。 臣雖狂妄。不至病風。敢不自恤乎。臣以一身。孤立於群怨之中。非不知言出而禍至。然殿下以不諱問。臣敢不以切直對。此臣所以寧得禍而不恤。切言而不諱者也。伏望殿下留神採擇。以白臣忘身徇公之意。萬死無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