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부사로 도임하여 상께 감사하는 전 을축 [到南陽謝上箋 乙丑 ] 우왕 11년
신 도전(道傳)은 은혜를 입어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제수받아, 금월 17일에 이미 도임을 마쳤습니다. 신이 공경히 윤음(綸音 임금의 명령)을 받잡고 해향(海鄕)에 나아가 지키게 되니 부끄럽고 감격됨이 서로 얽혀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신같이 한미한 자가 본시 조그마한 장점도 없는데, 선왕(先王)의 지우(知遇)를 입어서 시종(侍從)의 반열에 발탁되었었습니다. 그 후 역적 신돈(辛旽)이 복죄(伏罪)되고 그 사유를 태실(太室)에 고할 적에 신에게 음률(音律)을 상고하여 고정하고 제의(祭儀 제사지내는 절차)를 익히게 하셨는데 제사가 끝나도록 예절에 별다른 어긋남이 없어서, 선왕께서는 능하다 칭찬하시고 예조 학관(禮曹學官)을 겸임시키고, 이어 부보(符寶)와 고원(誥院)에서 시초(視草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됨을 이름)를 맡게 하셨으니, 그 은혜가 지극히 두터웠습니다.
그 후 선왕께서 세상을 버리셨을 적에는 신이 그때 예의랑(禮儀郞)으로서 예무(禮務)를 관장하였고, 조정의 명령을 받아 백관(百官)을 규합하여 대업(大業 우왕의 등극을 뜻함)을 정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시고 뭇 정사가 다 새로운데, 신에게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ㆍ지제교(知製敎) 등을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소(恩召)를 입어 서연(書筵)에 들어가 「대학(大學)」의 글을 강의하셨사온데, 그 중 ‘목목(穆穆)하신 문왕(文王)이시여! 아아 끊임없이 밝으시어 안온히 머무르셨다.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물고,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孝)에 머물고, 남의 아비가 되어서는 자(慈)에 머물고, 나라 사람들과 사귐에는 신(信)에 머물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신이 간곡하고 정녕(丁寧)하게 강론드렸더니 전하께서는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신은 그 알아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말을 숨김없이 하다가 재상의 뜻에 거슬려서 남쪽 변방으로 쫓겨가서 더위와 장기(瘴氣 열병의 원인이 되는 산천에서 나오는 나쁜 기운)에 시달려 죽을 뻔한 생활을 거의 3년을 하고서 예(例)에 따라 고향으로 옮겨왔으며, 또 4년을 지나서 서울 밖에서 편리한 대로 살기를 허락하셨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신에게 재생(再生)의 은혜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한산(閑散)한 곳에서 스스로의 분수를 달게 여기고 성대(盛代)에 묻혀 사는 백성[逸民]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년(우왕 10 1384)에 전하께서 문하 평리(門下評理) 정몽주(鄭夢周)를 명하여 천수성절(天壽聖節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하시므로, 신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서 명경(明京)에 조회를 갔었습니다. 이에 앞서 명경에 갔던 몇 사신이 모두 구류(拘留)되어 그 생사를 알 수 없으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가기를 다 꺼렸습니다만, 신은 정평리(鄭評理 정몽주를 이름)를 따라 명을 받들고 곧 출발하여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착하여, 그 시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조빙(朝聘 중국과의 통교(通交))이 트이고 구류된 자들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정성으로 대국을 섬기시고 뭇 신하들이 받들기를 부지런히 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신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신이 돌아오는 날에 곧 신에게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ㆍ지제교(知製敎)를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王位) 계승하기를 명(明)에 청할 때에도 신으로 하여금 표문을 초하게 하시고, 명의 조서[詔誥]를 맞이할 때에도 신으로 하여금 그 의주(儀注 예식을 행하는 절차)를 익히게 하셨습니다. 천자(天子)는 그 표문을 보고 가상히 여겨, ‘표문의 말이 간절하고 성실하다.’ 했으며, 중국 사신은 그 의주를 보고서 ‘예의(禮儀)가 볼 만하다.’ 했습니다. 방금 우리 나라는 문치(文治)가 성하게 열려서 유신(儒臣)들이 많이 있는데,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러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또한 전하께서 신에게 썩지 않을 은혜를 주신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교시(典校寺)는 본디 비서성(秘書省)으로 도서(圖書)가 있는 곳이어서 교정하는 책임이 중하온데, 신을 학식이 있다고 하여 여기에 있게 하셨으니 서생(書生)으로는 그 영광이 또한 지극합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생활을 영위하는 꾀가 졸렬하여 먹을 것은 적은데 식구는 많습니다. 그래서 외임(外任)을 구하여 남은 세월이나 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물러가기를 구할수록 자급(資級)이 더욱 높아지고 영화를 사양할수록 총애가 스스로 이르리라는 것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은 대개 주상 전하께서 충신(忠信)으로 뭇 신하를 체찰(體察)하시어 신의 뜻에 다른 것이 없음을 알아주셨기 때문이오니, 신은 우둔하지만 더욱 힘써 상의 덕의(德意)를 펴서, 기아와 질병으로 헤매는 백성들을 어루만져, 그 큰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어찌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到南陽謝上箋 乙丑
道傳蒙恩除南陽府使。已於今月十七日到任上訖。祇承綸命。出守海鄕。愧感交騈。罔知所措。竊念以臣之微。本無寸長。蒙先王之知。擢從臣之列。當逆旽伏罪。告謝太室。俾臣考校鐘律。肄習祭儀。比及卒事。禮無愆違。先王稱之曰。能。禮曹學官。命臣兼之。仍尙符寶。視草誥院。恩至渥也。及先王棄群臣。臣於是時。以禮儀郞職掌禮務。承命廟堂。糾合百官。以定大業。殿下初卽位。庶政俱新。除臣成均司藝,藝文應敎,知製敎。蒙恩召入書筵。講大學書。至穆穆文王。於緝煕敬止。其於爲人君止於仁。爲人臣止於敬。爲人父止於慈。爲人子止於孝。與國人交止於信。懇懇辨論。以致丁寧。殿下納之。臣感知遇之恩。言無避諱。觸忤時宰。斥去南荒。間關炎瘴。濱於死者幾至三年。例徙于鄕。又過四年。許於京外從所便宜。是則殿下賜臣以再生。甘自分於閑散。爲盛代之逸民。歲在甲子。殿下命門下評理鄭夢周賀天壽聖節。臣爲書狀官奉表朝京師。前此二三行李。皆被拘留。存亡未知。在廷之臣。憚莫肯行。臣從鄭評理受命卽行。達于金陵。不失其期。朝聘始通。拘留者歸。是在殿下事大以誠。群臣奉承之勤也。臣何力之有焉。使還之日。卽授臣成均祭酒知製敎。殿下請承襲則俾臣草表文。迎詔誥則俾臣習儀注。天子嘉之曰表辭誠切。使臣稱之曰禮儀可觀。方今文理盛開。儒臣林立。顧臣何人。獨有是榮。此又殿下賜臣以不朽也。惟典校寺。本祕書省圖書所在。讎校任重。謂臣有學爲令。於是書生之榮。其亦極矣。顧惟臣營生謀拙。食貧口衆。故求外寄。以盡餘年。豈期求退而資益高。辭榮而寵自至。玆蓋伏遇主上殿下以忠信體群下。諒臣志之無他也。臣敢不益勵駑鈍。宣上德意。撫綏疲瘵之餘民。仰酬洪造之萬一。
'09 정도전 三峯集'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9)정도전 삼봉집 제3권/전(箋)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는 전 (0) | 2018.01.23 |
---|---|
238)정도전 삼봉집 제3권/전(箋) /어휘 표덕설을 지어 올리는 전 임신 [撰進御諱表德說 壬申 ] 태조(太祖) 원년(1392). (0) | 2018.01.23 |
236)정도전 삼봉집 제3권/소(疏) / 공양왕에게 올리는 소 신미 4월 [上恭讓王疏 辛未四月] (0) | 2018.01.23 |
235)정도전 삼봉집 제2권 /악장(樂章) /치어 몽금척 수보록과 통용하다. [致語 夢金尺受寶籙通用] (0) | 2018.01.23 |
234)정도전 삼봉집 제2권 /악장(樂章) /수보록 서도 함께 씀. [受寶籙 幷序] (0) | 2018.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