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의 동루에 올라서 부로들에게 효유하는 글 을묘 [登羅州東樓諭父老書 乙卯 ] 금남잡제(錦南雜題)임.
도전이 언사(言事)로 재상에게 거슬려서 회진현(會津縣)으로 추방되어 왔다. 회진현은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므로 길이 나주를 거치게 되어, 동루(東樓)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배회하며 사방을 바라보니, 산천이 아름답고 인물이 부서(富庶)하매 남방의 일대 거진(巨鎭)이다.
나주가 주(州)로 된 것은 국초(國初 고려 국초를 이름)였으며, 또 공로가 있었다. 우리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총합할 적에 군국(郡國)이 차례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백제(百濟 후백제를 이름)만이 그 지방이 험원(險遠)하고 인마(人馬)가 강하며 양곡이 많은 것을 믿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나주 사람들은 역(逆)과 순(順)을 밝게 인식하고서 솔선하여 내부(內附)하였다. 태조가 백제를 취하는 데는 나주 사람들의 힘이 컸으므로 태조는 친히 이 고을에 납시어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안】 천복(天復) 계해년(903)에 고려 태조가 금성(錦城)을 공격하니 금성 사람들은 온 성을 들어 항복했으므로 금성을 나주라고 고쳤다. 목(牧)으로 승격한 것은 고려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남쪽 여러 고을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포양(褒揚)하는 뜻에서였다.
그때 혜종[惠王]은 몸소 갑주(甲冑)를 입고 태조를 전후 좌우에서 도왔다. 그래서 공로가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많았다.
【안】 금성(錦城)의 싸움에서 혜왕이 태조를 따라 백제를 치는 데 분용하여 먼저 올라 공이 제일이었다.
대업(大業)을 정하고는 왕위를 이어받아 백성과 사직을 차지하였다. 창업(創業)을 도운 일과 지수(持守)의 공로로 태묘(太廟)에서 혈식(血食)을 받는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사당이 되었으나, 이것은 권련(眷戀)한 옛 고을에서 묘향(廟享)을 받게 된 것이다.
【안】 혜왕의 사당이 흥룡사(興龍寺)에 있어 그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냈다.
현종[顯王]이 남으로 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흥복(興復)의 공훈을 이루게 되었다.
【안】 현종 경술년(1010)에 글안(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글안의 군사가 물러가니 서울로 돌아와서 나주를 목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내렸는데, 서울의 의식과 비할 만하였다. 아! 도전이 두 번이나 예부랑(禮部郞)이 되어서 태상(太常)의 직을 겸했었다. 그래서 종묘와 조회(朝會)의 일을 관장하였었는데, 기금 불측한 죄를 짓고 남으로 몰락되어 왔다. 서울을 멀리 떠나 왔으니 비록 눈으로 한 번만이라도 종묘와 하집사(下執事)의 말석이라도 보려 한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리 밖의 고을에 있어 조종(祖宗)의 성대한 공덕을 얻어 듣고 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다름이 없다. 당시에 천병만마[千乘萬騎]가 이 가운데서 주둔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사당의 빛나는 모습을 우러러보매, 고신(孤臣)의 못잊어 애타는 가슴을 위로해 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저 나주 사람들이 그 밭을 갈고 그 집에 살면서 생업을 편안히 즐긴 지가 벌써 5백 년이 되니, 어찌 모두가 조종의 휴양(休養)하고 생식(生息)하는 은혜가 아니랴? 역시 부로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서 극히 변두리이며 멀다. 그래서 근심되는 것이 왜구(倭寇)보다 더한 것이 없다. 연해(沿海)한 다른 고을들은 혹 포로가 되어 갔거나 혹 이사를 가서, 소연히 사람이 없으므로 토지를 지키고 공부(貢賦)를 바치지 못한다. 그들이 판적(版籍)에 기재된 호적, 사람이 휴식하는 집과 재부(財賦)가 나오는 토지 등을 모두 초목이 번성한 곳이나 여우ㆍ토끼가 사는 굴같이 내버리고 유산(流散)하다가 사망하는 것을 모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모두 왜 때문이다. 그런데 나주는 그 속에 끼여 있으면서도 평상시와 같이 번성하여 상마(桑麻)가 풍부하고 벼가 들에 깔렸으며, 백성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화기에 찬 밝은 표정으로 그 삶을 즐긴다. 그리하여 나그네들이 이 누에 올라, 산천과 원야(原野)를 돌아보고는 유람의 즐거움을 한껏 즐기고, 인물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부한 것을 보고는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는 까닭에 행역(行役)의 고달픔과 귀양살이의 감회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 고을은, 잔파(殘破)하여 유랑하는 이웃 고을들 가운데에 처하여 강포한 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안연히 홀로 온전하게 있는 것은, 마치 만 길 언덕이 거센 물결을 가로막아 서서, 아무리 심한 파도가 출렁이고 부딪쳐도 끄떡없이 서 있는 것과도 같으니 이 백성들이 믿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어찌 조종의 은덕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깊어서가 아니며, 다른 고을의 백성처럼 항산(恒産)이 없어서 항심(恒心)도 없는 데 비할 바가 아니니 이는 수목(守牧)이 적격자여서, 능히 덕의(德意)를 베풀어 민심을 맺어서 흩어지지 못하게 한 덕이 아니랴? 그리고 부로들이 소양 있게 가르쳐 백성들이 의리로 향할 줄 알아서일 것이다. 아! 가상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요사이 왜구들이 더욱 날뛰어 그 형세가 날로 더하고 쇠하지 아니하니 부로들은 지금까지의 무사했던 것에 젖지 말고, 자제를 격리해서 기계를 수리하고 봉화(烽火)를 삼가고, 그래서 주(州)와 현(縣)을 안보하여 국가에서 남쪽을 걱정함이 없게 하라. 도전이 비록 죄를 진 것이 몹시 중하지만 지금부터 내 생애가 끝날 때까지 편안히 살고 여유 있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나주 사람들의 은혜가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登羅州東樓。諭父老書。錦南雜題○乙卯
道傳以言事忤宰相。放來會津縣。縣羅屬也。道過羅。登東樓。徘徊瞻眺。山川之勝。人物之富庶。抑南方一巨鎭也。羅爲州始自國初。且有功。我太祖一三韓。郡國次第平。惟時百濟。恃其險遠。人馬糧穀之強且富。不卽歸命。羅人明識逆順。率先內附。太祖之取百齊。以羅人之力與有多焉。親駕是州。陞之爲牧。按天復癸亥。麗祖攻錦城。錦人擧城歸附。仍改錦城爲羅州。陞牧在顯宗時。 以長南諸州。蓋所以褒之也。惠王躬擐甲胄以先後左右。功多子列。按錦城之役。惠王從太祖討百濟。奮勇先登。功爲第一。 大業以定。丕承厥位。保有民社。有創業之助。有持守之功。血食大廟。爲百世不遷之室。乃眷戀舊邦而廟享焉。按惠王祠在興龍寺。州人祀之。 顯王南巡至此。遂成興復之功。按顯王庚戌。避契丹南巡至州。契丹師退。乃還都。陞爲牧。 賜州八關禮。以比本京。噫。道傳二爲禮部郞。皆兼太常。職掌宗廟朝會之事。今得罪不測。落南而來。違遠京國。雖欲目一覩宗朝。與下執事之末。其可得乎。然予心則未嘗忘也。今在千里外州。獲聞祖功宗德之盛。登樓以望。山川如古。想見當時千乘萬騎頓住於其中。又覩廟貌炳然臨照。得慰孤臣拳拳之懷。何其幸也。嗟夫。羅人田其田宅其宅。安生樂業。將五百年于玆。何莫非祖宗休養生息之恩。亦父老所知也。然是州濱海極邊以遠。所患莫倭寇若也。沿海州郡。或虜或徙。騷然無人。不能守土地修貢賦。版籍所載。生齒所息。財賦所出。皆棄於草木之所蕃。狐兔之所穴。而其人之流散死亡。皆莫之恤。倭故也。而羅介於其中。繁庶如平日。桑麻之富。禾稻被野。其民晝作夜息。怡怡煕煕。以樂其樂。以及行旅登樓。顧望山川原野。極遊覽之娛。人盛物阜。仰聖德而歌遺風。不知行役之勞。遷逐之感也。是州之在四隣殘破蕩析之中。劇寇侵略之內。而安然獨全。如萬丈之陂以障橫流之衝。雖有奔蕩激射。極其怒勢。而其爲陂自若。民恃無恐。豈非祖宗之德入人者深。非若他州之民無恒產無恒心比也。豈非牧守得人。能宣德意。以結民心。使不散也。抑父老之敎有素而民知向義也。吁可嘉矣。然近來倭寇尤橫。其勢日進不衰。父老母狃已往之無事。勵子弟修器械。謹烽火以保州若縣。不爲國家南顧之憂。道傳雖負罪深重。自今至未死之日。而得優遊暇食。羅人之賜不旣多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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