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250)정도전 삼봉집 제3권/서(序) /전교 김 부령에게 주는 시의 서[贈典校金副令詩序]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3. 18:57

전교 김 부령에게 주는 시의 서[贈典校金副令詩序]

 

선비가 이 세상에 나와서 그 출처와 거취(去就)가 어찌 일정하겠는가? 마땅히 크게 쓰이게 되면 크게 행하고, 적게 쓰이게 되면 적게 행하며 쓰이지 못하게 되면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할 따름이지만, 실제가 몸에 배어서 참으로 내외(內外)ㆍ경중(輕重)의 구분을 아는 자가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벗 김군 의경(金君義卿)은 글을 읽어 선비가 되고는 때를 기다려서 움직일 양이었는데, 계사년(공민왕 2 1353)을 당하여 익제 이 문충공(益齊李文忠公 이제현(李齊賢))ㆍ양파 홍 문정공(陽坡洪文正公)

【안】 홍 문정공의 이름은 언박(彦博)이니 곧 공의 좌주(座主)이다.

이 노성한 덕과 중한 명망으로 종장(宗匠 도덕과 학예(學藝)가 출중한 사람)의 자리를 오로지하여 선비를 뽑는 권한을 잡으니, 선비로 기특한 꾀를 기르고 원대한 식견을 가지고도 깊이 파묻혀 나오지 않던 자들이, 모두 나가기를 생각하고 서로 뛰며 분발하여 말하기를, ‘이제야말로 때가 왔으니,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굽을 포개어 권형(權衡 품평(品評)하는 것)의 아래로 섞여 나가 경중(輕重)을 겨루는 시험을 치르겠다.’ 하였다. 김의경도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 선생과 함께 웃으며 일어나 걸음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가니, 과거보러 온 무리들이 공수(拱手)하고 물러서서 멍하게 보더니 ‘우리는 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선비를 밀어내고 앞줄에 서서 높게 병과(丙科)로 발탁되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은가? 그 후 문학에 능하다는 명망으로 교서(校書)의 직에 들어가 교정[讐校]의 임무를 전담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서 충직하고 강건하다고 알려져 좌정언(左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제배(除拜)되어, 정사(政事)의 잘잘못을 다 말하게 되었고 사람을 등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또한 언론이 서서 받아들이고 물리쳤으니 거의 크게 쓰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김의경의 재주와 학문이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또 이른바 큰 것에 대해서는 시험도 못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늙은 어버이 때문에 사퇴하고 남쪽으로 돌아와서 어버이께 아침 저녁 문안을 올리고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쓰임에도 뜻이 없고 행하는 데도 뜻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상국(相國) 하공(河公)이 전라도 원수(全羅道元帥)의 직임을 받아 부임하여 말하기를, ‘한 지방의 책임도 중하려니와 군민(軍民)의 사무가 번잡하니 다스리는 법과 정벌하는 모책에 있어서 마땅히 어질고 식견이 있는 이에게 자문해서 행하여야 하겠다.’ 하고, 김의경을 청하여 유악(帷幄 참모부)에 두고 상빈(上賓)으로 접대하였다.

김의경은 그 국사(國士 나라에서 제일 가는 선비)로 대우하는 것에 감동되어,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음이 없고 계획한 것은 잘못된 계책이 없어, 삼군(三軍)의 호령이 정제하였고 한 지방의 부세와 송사가 공정했다. 그래서 군사들은 승전의 공이 있었으며 백성들은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김의경이, ‘지금 이와 같이 이루어진 것은 주인이 어질기 때문이다.’고 하자 상국은, ‘나의 공이 아니라 막빈(幕賓)이 도와서이다.’하고 사양하였다.

이에 장계로 아뢰어, 봉선대부 전교부령 보문각 직제학(奉善大夫典校副令寶文閣直提學)을 제배하니, 이는 공로를 정표(旌表)하여서였다.

김의경이, 조정에 시행하려고 하던 것을 거두어 막부(幕府)에 써서 그 도가 시행되어 주인이 과연 성공을 하였으니, 그 도가 이처럼 어디에나 맞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이다. 옛날 당(唐)나라 때 노공 매(盧公邁)ㆍ정공 여경(鄭公餘慶)ㆍ조공 종유(趙公宗儒)ㆍ고공 소련(顧公少連)이 모두 하남(河南)의 막객(幕客)으로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니, 당시의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어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소문이 넘쳐 흐른다.

나는 듣건대, ‘재상은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긴다.’고 하니, 후일 상국이 조정에 돌아왔을 때, 숨은 인재를 열거하고 현준(賢俊)함을 천거하게 된다면, 김의경의 이름이 맨 먼저일 것이다. 어찌 당나라의 하남 막객(河南幕客)만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겠는가? 도전이 비록 폐(廢 원문에 글자가 빠졌음) 되었으나 다행히 죽지 않았으니, 장차 김의경을 위하여 눈을 씻고서 그가 크게 쓰이고 크게 행하는 것을 보고 말리라.

 

贈典校金副令詩序

 

士之生斯世。其出處去就。何常。當大用則大行。小用則小行。至於不用則不行。如此而已矣。然非實有諸己。眞知內外輕重之分者。不能也。吾友金君義卿。讀書爲儒。待時而動。當歲在癸巳。益齋李文忠,陽坡洪文正。按洪文正名彥博。卽公之座主。 以舊德重望。專宗匠之席。柄擇士之權。士之蓄奇謀抱長識。深藏而不售者。莫不謳吟思效。踊躍自奮曰。此其時矣。相與騈肩累足。雜進權衡之下。以爭輕重之試。而義卿與今韓山牧隱先生。談笑而起。鼓行直前。朋徒拱手。却立環視。則莫我敢當。於是排多士。進立前列。高擢丙科。何其奇也。以名能文學。入校書。專讎校之任。未幾。以忠讜鯁直聞。拜左正言知製敎。使盡言政事得失。至於用人當否。亦得論而進退之。幾於大用。然義卿之才之學。不宜止此。且其所謂大者未試也。一朝以親老引而南歸。朝昏定省。不離于側。固無意於用。而亦無意於行也。今相國河公秉全羅原帥之節。至則曰方隅任重。軍民務殷。理法征謀。宜咨賢有識達者然後行事。請義卿參帷幄。待以上賓。義卿感國士之遇。知無不言。算無遺策。三軍之號令整齊。一方之賦訟平允。戎有捷功。民以底寧。義卿曰。今玆有成。主人之賢也。相國曰。非我也。賓客之贊也。於是狀聞。拜奉善大夫典校副令,寶文閣直提學。以旌其庸也。義卿斂其所以用之於朝者。以用之幕府而行。主人果有成功。其無所不可也如是。昔在有唐。盧公邁,鄭公餘慶,趙公宗儒,顧公少連。俱以河南幕客。入朝爲宰相。時人榮之。至今綽有休聲。吾聞宰相以人事君。佗日相國之還朝也。論列遺材。薦進賢俊。則義卿之名居先矣。豈可使河南幕客專美有唐哉。道傳雖廢 缺 矣。幸未死。將爲義卿拭目見其大用而大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