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252)정도전 삼봉집 제3권/서(序) /양광안렴 유 정랑을 전송하는 시의 서[送楊廣按廉庾正郞詩序]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3. 18:59

양광안렴 유 정랑을 전송하는 시의 서[送楊廣按廉庾正郞詩序]

 

내가 친상[家憂]을 당하고는 그대로 영주(榮州)에 사노라니, 남방의 학자들이 많이 종유(從遊)하였는데, 지금의 양광도(楊廣道 경기도) 안렴부사(按廉副使) 유공(庾公)도 그 중에 있었다. 유공은 동배들 가운데서 나이는 가장 젊었지만, 도리(道理)나 고금(古今)의 일을 말하면 묵묵히 마음으로 이해하고 정사나 이치(吏治)를 논하면 하나하나 받아들여 물러갈 적에는 꼭 소득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그를 달리 보고서 제생(諸生)들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후일에 반드시 유용한 인재가 되리라.’고 하였더니, 그 뒤 그는 과거 공부를 버리고서 문묵(文墨)에 종사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더러 통민(通敏)한 인재라고 해서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제수하였다.

평양(平壤)은 서북(西北) 지방의 도회하는 곳이라서 군ㆍ민(軍民)의 사무가 복잡하여 윤공(尹公) 어떤 본에는 공(公)자가 없음. 이 중신(重臣)으로서 나가 다스리는데, 유공이 그의 판관(判官)이 되어 막부(幕府)에서 보좌했다. 그 재능이 알려져 내직(內職)으로 들어가 형조 정랑(刑曹正郞)이 되어서는, 옥(獄)에는 원통한 죄수가 없었으며, 또 음죽(陰竹 충주(忠州)의 속현)의 둔전(屯田)을 맡으매 세입(歲入)이 전보다 배는 되었다. 이어서 일도(一道)를 찰방(察訪)하고 겸하여 군수(軍須)를 관리하자 간활한 자들이 외복(畏服)하여 창고가 가득 찼으니, 공 같은 이는 인재라고 할 만하다.

일찍이, 유자[儒]와 관리[吏]를 논한 학설에 이르기를, ‘도덕이 몸과 마음에 온축(蘊蓄)한 것을 유자라 이르고, 교화(敎化)를 정사에 베푸는 것을 관리라 이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 온축한 것이 바로 시용(施用)의 근본이 되는 것이며, 그 시용도 온축에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고 보면, 유자와 관리는 한사람이며 도덕ㆍ교화는 두 가지 이치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낮아짐으로부터 도덕은 사장(詞章)으로 변하고 교화는 법률로 바뀌어서, 유자와 관리가 갈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자는 관리를 속되다 배척하고, 관리는 유자를 썩었다고 나무라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 교화는 모두 쓸모 없는 물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간혹 유술(儒術)로써 이치(吏治)를 가식하는 자도 있으나 역시 자기 사욕만을 채우려는 데 불과할 뿐이다.

나는 학식이 퍽 고루하지만 나를 따르는 이 가운데에는 비서성 판사(秘書省判事) 안공(安公) 같은 이가 있어 양광도(楊廣道)를 안찰하고, 대호군(大護軍) 이공(李公)은 경상도를 안찰하며 중서(中書) 성공(成公)ㆍ사농(司農) 김공(金公)은 교주도(交州道)를 안찰하여 모두 탁월한 성적이 있었으니, 지금에 판도(版圖) 유공(庾公)이 또한 중선(重選)으로 양광도를 안찰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유자로서 본받을 만하고 관리로서 순량(循良)한 이들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배워서 우수함이 있으면 벼슬하고, 벼슬해서 우수함이 있으면 배운다.’고 하였으니, 이는 벼슬과 학문이 서로 필수가 되는 것이다. 두세 분들은 그 재질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하여 힘써 매진한다면 뒷날에 성취되는 것이 참으로 쉽게 예측하지 못할 것이며, 또 이 세상으로 하여금 진유(眞儒)와 순리(循吏)가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대제(待製 보문각(寶文閣)의 정5품 관직) 윤공(尹公)은 성품이 경직하여 좀처럼 남을 허여하지 않았는데 유공(庾公)과는 본래 서로 좋게 지냈으며 혼인 관계도 있으므로 시를 지어 전송했다. 그 시에,

 

 

회상하매 우리 집 정헌공께서 / 念昔吾家正獻公

지원(至原) 중에 양광도 안찰사 되셨네 / 觀風楊廣至原中

지금에 외손서가 또 다시 가게 되니 / 外孫玄婿今持節

옛집이라 봄빛에 생각이 무궁하리 / 舊宅春光思不窮

 

라고 했다. 그래서 대사성(大司成) 권 봉익(權奉翊 봉익은 봉익대부(奉翊大夫)의 약칭) 이하 28명이 그 운(韻)으로 시를 짓고, 도전에게 옛 친의가 있다고 해서 서문을 위촉하였다.

 

 

送楊廣按廉庾正郞詩序

 

予丁家憂。因居榮州。南方學者。多從之遊。今楊廣道按廉副使庾公亦在焉。於儕輩年最少。與之語道理古今事。默然心解。至論政事吏理。一一領略。退充然若有得。予固目異之。謂諸生曰。此子他日必爲有用之才矣。後棄科擧業。從文墨。朝廷以公有通敏才。拜監察糾正。平壤乃西北都會之所。軍民務劇。尹公 一本無公字 以重臣出。公爲判官佐之。幕府稱其能。入典法爲正郞。獄無冤滯。又督陰竹屯田。歲入倍前。仍察訪一道兼軍須。姦猾畏服。府庫充盈。若公者。可謂才矣。嘗論儒吏之說。道德蘊之於身心。斯謂之儒。敎化施之於政事。斯謂之吏。然其所蘊者卽所施之本。而所施者自其所蘊者而推之。儒與吏爲一人。道德與敎化非二理也。自世道之降。道德變爲詞章。敎化易爲法律。而儒吏於是乎判矣。此斥彼爲俗。彼訾此爲腐。世之言道德敎化者。皆爲無用之長物。其間或有以儒術緣飾吏理者。亦不過自濟其私而已。予學且陋。然從予遊者。若祕判安公按楊廣,大護軍李公按慶尙,中書成公,司農金公按交州。卓有成績。及今版圖庾公。亦以重選按楊廣。皆儒之效吏之循也。語曰。學而優則仕。仕而優則學。是仕與學相須也。二三子若因其才質之美。勉進不已。他日成就。固未易量也。且將使斯世知眞儒循吏之在此而不在彼矣。前待制尹公。性狷直少許可。於庾公素相善。且有姻。故作詩送其行曰。念昔吾家正獻公。觀風楊廣至原中。外孫玄壻今持節。舊宅春光思不窮。大司成權奉翊已下二十八人。分韻賦詩。謂道傳有舊。屬以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