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254)정도전 삼봉집 제3권/서(序) /약재유고 서(若齋遺稿序) 갑자년 이후 작임.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3. 19:01

약재유고 서(若齋遺稿序) 갑자년 이후 작임.

 

도전(道傳)이 하루는 망우(亡友) 약재(若齋 김구용(金九容) 자는 경지(敬之))의 유고(遺稿) 몇 권을 얻어서 눈물을 지으며 읽고는 이내 붓에 먹을 묻혀서 그 책 머리에 쓰기를, ‘동국 시인 김경지(金敬之)의 소작이다.’하였다.

그 글씨가 끝나기도 전에 손님이 힐책하기를,

 

“김 선생의 학술과 행의(行義)가 어찌 시인에 그칠 뿐이겠는가? 선생은 명문[世族] 집 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였고, 학문에 뜻을 둔 뒤에는 포은(圃隱) 정공(鄭公 정몽주(鄭夢周))ㆍ도은(陶隱) 이공(李公 이숭인(李崇仁))ㆍ정언(正言) 이순경(李順卿) 등과 우의가 더욱 돈독하여 아침 저녁으로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 의리(義理)의 학이 이 두세 분으로 하여서 제창된 것이다.

국가에서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옛 제도를 경장(更張)하고 생원(生員)의 수를 더하여, 재상인 한산(韓山) 이공(李公 이색(李穡))을 사석(師席)의 맹주(盟主)로 하고 명유(名儒)들을 뽑아서 학관(學官)을 삼았는데, 선생이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직강(直講)을 겸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經)을 가지고 수업하는 자들이 앞에 열을 지었으며, 비록 휴가[休沐]중일지라도 질문하는 자들이 집에 잇달아 와서 많이 배우고 갔으니, 선생의 학술의 올바름이 어떠한가?

그리고 갑인(공민왕 23 1374)과 을묘(우왕 1 1375) 연간에 국가에 일이 많았는데 당시의 정승이 용사(用事)하므로, 선생이 글을 올려 그 잘잘못을 힘써 말하다가 답은 얻지 못하고 죽주(竹州 광주(廣州)의 속현임)로 정배(定配)되었으며, 준례에 의하여 외가인 여흥(驪興) 고을로 이사를 하였다. 그래서 ‘여강어부(驪江漁夫)’라 자호(自號)하고 그 거실에는 육우당(六友堂)

【안】 육우는 강(江)ㆍ산(山)ㆍ풍(風)ㆍ화(花)ㆍ설(雪)ㆍ월(月)을 말한다.

이라고 편액한 다음, 강산(江山)과 사시(四時)의 풍경을 즐긴 것이 무릇 7년이었다.

국가가 그 풍의(風義)를 고상히 여겨 불러들여 간관(諫官)을 제배하였다가 얼마 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을 제수하였는데 언책(言責)과 관수(官守)가 둘 다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또 선생은 사신[專對]이 될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예를 드리게 하였는데, 때마침 명(明)은 조정의 명으로써 사교를 허하지 아니하고, 선생을 운남(雲南)에다 유치하게 하여, 길을 떠나 사천(四川)의 노주(濾州)에 이르러서 병으로 여사(旅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 신우 갑자년(1384)에 의주 천호(義州千戶) 조계룡(曹桂龍)이 요동에 가니, 도지휘(都指揮) 매의(梅義) 등이 속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 일에 늘 마음을 써서 도와주는데 너희 나라에서는 어찌 치사(致謝)를 않느냐.’는 말을 전해 듣고 신우가 구용(九容)을 행례사(行禮使)로 삼았다. 구용이 글을 받들고 요동에 가니, 매의와 총병 반경(潘敬) 등이 말하기를, ‘남의 신하는 사교가 없는 것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하고 포박을 지어 경사(京師)로 갔다. 그러자 황제가 대리위(大理衛)로 유배시켰는데 노주(濾州) 영녕현(永寧縣)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선생이 처음 길을 떠날 때부터 병들어 죽을 때까지 험난한 만리 길을 가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조금도 걱정하거나 애달파하는 기색이 전연 없었으며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내가 집에서 아녀자(兒女子) 손에서 죽었으면 누가 알 것인가? 지금 만리 밖에서 왕사(王事)를 수행하다 죽게 되어서 중국 사람까지 나의 성명을 알게 되었으니 죽을 곳을 얻었다 할 만하다.’ 하고는 집안 일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행의 높음이 어떠한가?”

하였다.

도전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지마는 김경지의 학술과 행의는 사책[史牒]에 갖추어 실려 있고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었으니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모두 알지 않겠는가?

그런데 시도(詩道)는 말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 오래이다. 아(雅)ㆍ송(頌)이 폐기된 뒤로 시인의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이 성하였고,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문선(文選)》이 행해지자 그 폐단이 섬약(纖弱)에 치우쳤는데 당(唐)나라에 이르러 성률(聲律)성률은 구본에는 율성(律聲)으로 되어 있음. 이 시작되면서 시체(詩體)가 크게 변하였으니 이태백(李太白)ㆍ두자미(杜子美)가 가장 탁월하다는 자이다.

송(宋)나라가 흥하여 진유(眞儒)가 쏟아져나와 경학과 도덕이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를 따라갈 만하였다. 시(詩)에 있어서는 당률(唐律)을 계승해 받았으니, 근체시(近體詩)라 하여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인데, 세상에서 시를 쓰는 자들이 혹은 그 소리만 얻고 그 맛은 잃기도 하며, 혹은 그 뜻은 있으나 그 문사(文詞)가 없으니, 과연 성정(性情)에서 나와 물(物)로써 흥(興)하고 유(類)로써 비(比)하여, 시인의 지취에서 어긋나지 않은 것은 거의 드물다고 하겠다. 중국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변두리 먼 곳이야 말할 나위나 있겠는가?

김경지의 외할아버지 급암(及菴) 민공(閔公 사평(思平))이 사학(詞學)을 잘하는데 더욱 당률(唐律)에 능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ㆍ우곡(愚谷 정이오(鄭以吾)) 같은 분들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김경지가 아침 저녁으로 곁에서 모셨으니 눈에 젖고 귀에 익어, 느끼고 열리어서 자득된 것이 더욱 많을 것이다.

도전이 일찍이 김경지가 시 짓는 것을 보았는데, 그 생각하는 것이 막연하여 사색하는 것이 없어 보이는데 써놓은 것을 보면 넘쳐서 자득(自得)한 듯하였다. 그 시를 쓰는 데는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나는 듯하였으나, 그 시가 이뤄지면 청신하고도 아름다워서 자못 그의 인품과 유사하였으니, 김경지는 시도(詩道)에 있어서 가위 완성되었다 할 만하다.”

고 하니, 손님이 옳다고 하여 마침 이를 써서 서문으로 삼는다.

 

若齋遺稿序 甲子後

 

道傳一日得亡友若齋遺稿若干卷。泣且讀。因濡翰書其端曰。此東國詩人金敬之所作也。書未訖。客詰之曰。金先生學術行義。豈但詩人而止歟。先生生世族。幼而聰敏。旣就學。與圃隱鄭公,陶隱李公及故正言李順卿。義愛尤篤。朝夕講論切磋不少怠。吾東方義理之學。蓋由數公倡之也。國家崇重正學。更張舊制。增廣生員。宰相韓山李公主盟師席。拔薦名儒爲學官。而先生以佗官兼直講。諸生執經受業。列于席前。雖告休沐。從而質問者相繼于家。多所進益。先生學術之正爲如何。當甲寅乙卯之歲。國家多故。時相用事。先生上書。力言得失。不報竄竹州。例徙居母鄕驪興郡。自號驪江漁父。扁其所居堂曰六友。按六友。謂江山風花雪月。 以樂江山四時之景凡七年。國家尙其風義。召拜諫官。尋長于成均。言責官守。兩無所愧。又以先生有專對才。行禮遼東都司。適有朝命不許私交。置先生雲南。行至四川之瀘州。得病卒于旅次。按辛禑甲子。義州千戶曹桂龍至遼東。都指揮梅義等紿曰。我於爾國事。每盡心行之。爾國何不致謝耶。禑以九容爲行禮使。奉書幣往遼東。義與摠兵潘敬等曰。人臣無私交。何得乃爾。遂執歸京師。帝命流大理衛。行至瀘州永寧縣病卒。 先生自始行至病卒。間關萬里。備嘗艱難。略無顧慮自惜之意。臨絶曰。吾在家死兒女手。誰肯知者。今在萬里外。死於王事。至使中國人知吾姓名。可謂得死所矣。無一言及家事。先生行義之高。又爲如何。道傳攬涕而言曰。子之言誠是也。敬之學術行義。備諸史牒。播於人口。奚待予言哉。詩道之難言久矣。自雅頌廢。騷人之怨誹興。昭明之選行而其弊失於纖弱。至唐聲律 聲律。舊本作律聲。 作。詩體遂大變。李太白,杜子美尤所謂卓然者也。宋興。眞儒輩出。其經學道德。追復三代。至於聲詩。唐律是襲。則不可以近體而忽之也。然世之言詩者。或得其聲而遺其味。或有其意而無其辭。果能發於性情。興物比類。不戾詩人之旨者幾希。在中國且然。況在邊遠乎。敬之外祖及菴閔公 思平 善詞學。尤長於唐律。與益齋,愚谷諸公相唱和。敬之朝夕侍側。目濡耳染。觀感開發而自得尤多。道傳嘗見敬之之作詩。其思之也漠然無所營。其得之也充然若自得。其下筆也翩翩然如雲行鳥逝。其爲詩也淸新流麗。殊類其爲人。敬之之於詩道。可謂成矣。客曰然。卒書以爲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