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255)정도전 삼봉집 제3권/서(序) /포은의 봉사고 서 병인 [圃隱奉使藁序 丙寅]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3. 19:03

포은의 봉사고 서 병인 [圃隱奉使藁序 丙寅 ]

 

도전이 16~17세 때에 성률(聲律)을 공부하느라고 대우(對偶)를 만들고 있었는데, 하루는 여강(驪江) 민자복(閔子復)

【안】 자복은 민안인(閔安仁)의 자(字)이다.

이 도전에게 하는 말이,

 

“내가 정 선생 달가(鄭先生達可)를 뵈었더니, 선생이, ‘사장(詞章)은 말예(末藝)이고, 이른바 신심(身心)의 학문이 있는데 그 말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두 책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시기에, 이순경(李順卿)과 두 책을 가지고 삼각산(三角山) 절집에 가서 강구하고 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아는가?”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두 책을 구하여 읽었더니 비록 잘 알지는 못하겠으나 못내 기뻤다. 그때 마침 국가에서 빈흥과(賓興科)를 베풀어서, 선생은 삼각산에서 내려와 연속 삼장(三場)에서 장원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나는 급히 찾아가 뵈었더니, 선생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평생의 친구처럼 하시고 드디어 가르침을 주셔서 날마다 듣지 못한 바를 들었다.

그 후 아버지의 초상을 당하여 영주(榮州)로 내려가 2년을 살았는데 이어 어머니 상을 당하여 그곳에서 5년을 지냈다.

 

【안】 제학공(提學公)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지정(至正) 병오년 정월에 제학공이 졸하고 이해 12월에 부인 우씨(禹氏)가 졸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아버지의 초상에 분상(奔喪)하여 2년을 지냈고 이어 어머니의 초상이 있어 5년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두 곳 중 한 곳은 반드시 잘못이 있다.

 

그 사이 선생이 《맹자(孟子)》 한 부를 보내 주셔서 삭망전(朔望奠)을 지내고 겨를이 있으면 하루에 한 장 또는 반 장을 읽었는데, 알 듯하다가도 의심이 나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생각하였다.

상기를 끝마치고 송경(松京)에 돌아오니, 목은(牧隱) 선생이 재상으로서 성균관을 영도하여 성명(性命)의 학설을 제창하고 부화(浮華)의 학습을 배척하였는데 선생(정몽주)과 이자안(李子安)ㆍ박자허(朴子虛)ㆍ박성지(朴誠之)지(之)자는 부(夫)자로 하여야 함. ㆍ김경지(金敬之) 등을 천거하여 학관(學官)으로 삼고 경학(經學)을 강론하게 하였다.

선생은 《대학》의 제강(提綱)과 《중용》의 회극(會極)에서 도를 밝히고 도를 전하는 뜻을 얻었으며, 《논어》ㆍ《맹자》의 정미(精微)에서 그 조존(操存)ㆍ함양(涵養)하는 요령과, 체험(體驗)하고 확충(擴充)하는 방법을 얻었다. 《주역(周易)》에 있어서는 선천(先天)ㆍ후천(後天)이 서로 체ㆍ용(體用)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서경(書經)》에서는 정일 집중(精一執中)이 제왕의 전수한 심법임을 알았다. 그리고 《시경(詩經)》은 민이(民彛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물칙(物則)의 교훈이 근본이 되고, 《춘추(春秋)》는 도의(道誼)ㆍ공리(功利)의 구별을 분변한 것임을 알았으니, 우리 동방 5백 년에 이 이치를 안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여러 생도들이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설(異說)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분석하여 설명을 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를 본 목은(牧隱) 선생께서는 기뻐하며 칭찬하기를, ‘달가(達可)는 호방하고 탁월하여서 횡설수설(橫說堅說)이 모두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도전이 간간이 가서 그 강의를 들었더니 뜻밖에도 고루한 내가 얻은 것과 이따금 서로 합치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공의 추천을 받아 학관의 자리에 끼게 되어, 출입을 선생과 함께 하였으며, 그 후로는 오래도록 종유(從遊)하여 보고 느낀 바도 깊었으니, 비록 선생을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하여도 참람한 말은 아닐 것이다.

선생의 학문이 날로 높아가니 시(詩)도 그와 같이 향상해 갔다. 그 젊었을 때는 지기(志氣)가 바야흐로 날카로와 곧게만 보고 말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 말이 방사(放肆)하였는데, 경력이 오래되어서는 수렴(收斂)의 공이 곁따랐고, 시종(侍從)이 되어서는 바른말을 드리고 논하여서 왕화(王化)를 윤색한 까닭에 그 말이 정중하여 법받을 만했다. 남쪽 변방으로 축출을 당해서는 우환 가운데에 처해 있었으나 의(義)와 명(命)의 분수에 편안하였던 까닭에 그 말이 화평하고 담담하여 원망하거나 과격한 말이 없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는 험난한 파도를 건너 만리 타국에 있으면서도 그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외교 문서를 수식하여 나라의 미를 떨쳐서,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우리를 우러러 사모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명백하고 정대하여 군색스럽거나 움츠리는 기운이 없었다. 그리고 명(明)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사해가 같은 정령(政令)에서 살게 되자, 선생은 세 번이나 사명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으니 대개 선생은 문견이 더욱 넓고 조예가 더욱 깊어져 그 발하는 바가 더욱 높고 원대하였다. 발해(渤海)를 건너 봉래각(蓬萊閣)에 올라 요동의 광막한 들을 바라보고, 바다의 우람한 파도를 보고는 그 가슴이 부풀어서 말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려 해도 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 공관(公館)에서 투숙하다.’라는 시와, ‘봉래역(蓬萊驛)에서 한 서장관(韓書狀官 한상질(韓尙質))에게 보이다.’라는 시가 있었다. 용산(龍山)을 지나 꾸불꾸불 회ㆍ하(淮河)를 건널 때, 배를 타고 범광호(范光湖)를 지날 때, 대강(大江)을 건너 용담(龍潭)에 이를 때에 모두 제영(題詠)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객지의 밤에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등의 시는 철따라 변하는 물건을 보며 행역(行役)의 고됨을 느낀 작품이고, ‘동양역(潼陽驛)의 벽에 붙은 응웅도(鷹熊圖) 노래’는 늠름하여 생기가 돈다. ‘종성(宗誠)과 종본(宗本 포은의 두 아들 이름임)을 생각한 시’는 자상한 생각을 다하였고, ‘도은(陶隱)ㆍ삼봉(三峰)ㆍ둔촌(遁村)을 생각한 시’는 친구 사랑하는 정이 독실하였다. ‘북고산(北固山)을 바라보며 김약재(金若齋 김구용(金九容))를 애도한다.’는 시는 죽고 사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니 후한 도인 것이다. ‘한신(韓信)을 조문하는 시’는 회옹(晦翁 주자(朱子))의 말을 주로 하여 그가 무죄인 것을 밝혔으며, ‘표모(漂母)를 읊은 시’는 금은 사양했지만 이름이 전했으니 보답이 안된 것은 아니다.’하였고, 즉묵(即墨)을 지나다가는 악의(樂毅)가 먼저 연혜왕(燕惠王)을 저버렸다고 책망을 했는데, 이것은 희미한 것을 드러내고 깊숙한 것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그 ‘황도(皇都)’ 구본에 황조(皇朝)라고 된 것은 잘못이다. 4수(首)와 ‘입경(入京)’ㆍ‘출경(出京)’ 2절(絶 절구시)은 성천자(聖天子)께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고 먼 지방을 안아 주는 인자함을 그려냈고, 공신ㆍ장상(將相)들이 부귀하고 존대받으며 영화롭게 사는 것과 성곽ㆍ궁실의 크고 아름다움이며 인물의 번화한 것을 모두 시에 담지 않은 것이 없으니, 후일 시를 뽑는 자가 이것을 사관[太史氏]에게 갖다가 준다면 그 명나라의 아악(雅樂)이 될 것이 의심가지 않는다. 그 밖에 주고받은 시와 제영한 시들이 모두 고상하고 묘하나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도전이 홍무(洪武) 18년(우왕 11 1385)에 선생을 따라서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러 갔었는데, 지금 그 시를 읽으면서 그 일을 되새기고 그 땅을 생각하매 완연하게 눈 속에 있으니, ‘시로써 가히 관찰할 수 있다[詩可以觀 《논어》에 나옴].’는 말이 어찌 미덥지 않은가?

아! 선생의 학문이 후세에 공이 있고 선생의 시가 세교(世敎)에 관련되는 것이 이러하니 어찌 우리 도를 위해서 중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 점이 내가 비졸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즐거이 지껄이는 것이며, 선생에게서 얻은 것을 인하여 나도 의탁해서 썩지 않으려는 것이다. 홍무(洪武) 19년(우왕 12 1386) 6월 하한(下澣 하순(下旬))에 서(序)를 한다.

 

[주]대우(對偶) : 한문 문장에 쓰는 수사법(修辭法)의 하나인데, 대개 사람 마음의 향배(向背)와 연우(聯偶)의 자연 추세에서 구성되는 것임. ‘부자자효(父慈子孝)’, ‘구밀복검(口蜜腹劒)’, ‘천향국색(天香國色)’ 등을 들 수 있다.

 

圃隱奉使稿序 丙寅

 

道傳十六七。習聲律爲對偶語。一日。驪江閔子復 按子復。閔安仁字。 謂道傳曰。吾見鄭先生達可。曰。詞章末藝耳。有所謂身心之學。其說具大學,中庸二書。今與李順卿携二書。往于三角山僧舍講究之。子知之乎。予旣聞之。求二書以讀。雖未有得。頗自喜。屬國家設賓興科。先生來自三角山。連冠三場。名聲藉藉。予亟往謁。則與語如平生。遂賜之敎。日聞所未聞。後奔父喪榮州居二年。繼有母喪。凡五年。按提學公行狀曰。至正丙牛正月。提學公卒。是年十二月。夫人禹氏卒。此云奔父喪居二年。繼有母喪。凡五年。兩處必有一誤。 先生送孟子一部。朔望之暇。日究一紙或半紙。且信且疑。思欲取正於先生。喪畢還松京。牧隱先生以宰相領成均。倡性命之說。斥浮華之習。擧先生及李子安,朴子虛,朴誠之,之當作夫 金敬之充學官。講論經學。先生於大學之提網。中庸之會極。得明道傳道之旨。於論孟之精微。得操存涵養之要。體驗擴充之方。至於易。知先天後天相爲體用。於書。知精一執中爲帝王傳授心法。詩則本於民彝物則之訓。春秋則辨其道誼功利之分。吾東方五百年。臻斯理者幾何人哉。諸生各執其業。人人異說。隨問講析。分毫不差。牧隱先生喜而稱之曰。達可豪爽卓越。橫說豎說。無非的當。道傳間往聽之。不意孤陋所得。往往默契焉。獲被諸公薦。側於學官之列。出入與俱。自是從遊之久。觀感之深。雖曰知先生甚悉。非僭也。先生之學。日以長進。詩亦隨之。當其少時。志氣方銳。直視無前。故其言肆以達。更踐旣久。收斂有加。其爲侍從也。獻納論思。潤色王化。故其言典以則。其見逐南荒也。處優患之中。安義命之分。故其言和易平淡。無怨悱過甚之辭。其奉使日本也。涉鯨濤之險。在萬里外國。正其顏色。修其辭令。揚于國美。使殊俗景慕。故其言明白正大。無局迫沮挫之氣。皇明有天下。四海同文。先生三奉使至京師。蓋其所見益廣。所造益深。而所發益以高遠。渡渤海登蓬萊閣。望遼野之廣邈。觀海濤之洶湧。興懷敍言。不能自已。於是有渡海宿登州公館詩。蓬萊驛示韓書狀 尙質 詩。道龍山邐迤逾淮河。登舟沿范光湖。絶大江至龍潭。皆有題詠。如客夜聞鶯等詩。覽時物之變。感行役之遠。潼陽驛壁鷹態圖歌。凜凜有生意。憶宗誠,宗本。圃隱二子 則極慈祥之念。憶陶隱,三峯,遁村。則篤友愛之情。望北固山悼金若齋。則不以存亡易其心。厚之道也。弔韓信。主晦翁以明其非罪。詠漂母以金易名。不爲無報。過卽墨。責樂毅先負惠王。微顯闡幽之義也。其皇都 舊本作朝。誤。 四首。入京出京二絶。鋪張聖天子字小懷遠之仁。功臣將相富貴尊安之榮。與夫城郭宮室之巨麗。人物之繁華。無不備載。採詩者以此陳於太史氏。其爲皇明之雅無疑矣。其佗酬唱題詠。又皆高妙。難可殫記。道傳於洪武十八年。從先生賀天壽聖節。今誦其詩。卽其事。想其地。宛然在目。詩可以觀。不其信歟。噫。先生之學。有功於後世。先生之詩。有關於世敎如此。寧不爲吾道重也。此予所以不揆鄙拙。樂爲之道。因以及得於先生者。託不朽焉。洪武十九年六月下澣。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