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256)정도전 삼봉집 제3권/서(序) /화엄종사 우운을 전송하는 시의 서[送華嚴宗師友雲詩序]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3. 19:04

화엄종사 우운을 전송하는 시의 서[送華嚴宗師友雲詩序]

 

【안】 우운(友雲)은 바로 주공(珠公)의 호이다. 제생군(濟生君)을 봉받았다.

 

화엄종사 우운은 바로 시중(侍中) 죽헌(竹軒 김륜(金倫)의 호임) 김공의 아들이며, 시중 식재공(息齋公 김경직(金敬直)의 호)이 그의 형이다.

그는 어려서 화엄종(華嚴宗)에 투신하여 머리를 깎고서 현수(賢首 비구(比丘)를 높여 부르는 말)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그 학이 통하자, 그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遼東)ㆍ심양(瀋陽) 등지를 경유하여 북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드디어 남으로 강절(江浙)에 노닐고 오회(吳會)까지 갔다. 몇 만리를 가고 오는 동안에 이르는 곳마다 존숙(尊宿 학업이 높고 수행이 뛰어난 고승(高僧))들이 허여를 하고 제배(儕輩)들도 추앙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한 게(偈)와 증별(贈別)한 시가 행장(行裝) 속에 가득 찼으니, 그는 선재동자(善財童子 불(佛) 제자의 이름)의 기풍을 듣고 흥기한 자가 아니겠는가?

그는 귀국한 뒤로 아우 조계 잠공(曹溪岑公)과 함께 이름이 있어서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받아 이름난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늙은 뒤에는 경주[鷄林]의 단암(檀菴)으로 물러가서 5~6년간 산수를 즐겼는데, 국가에서 억지로 그를 나오게 하여 대공산(大公山) 부인사(符仁寺)의 주지를 삼으니, 그 절은 실로 큰 사찰이었다. 얼마 안 가서 그를 송경(松京) 법왕사(法王事)로 맞아다 화엄종사로 삼아서 교종(敎宗)의 풍기를 부식(扶植)시키고 후배들을 깨우치게 하였는데, 겨우 1년이 지나고는 떠나기를 간절하게 구하므로 국가에서는 부득이 그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한산 목은 선생이 시를 지어 그를 전송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를 이어 화답하는 자가 많았다. 그의 문인인 의침(義砧)이 선생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서문을 청하였다. 그러나 도전이 민첩하지 못하니 어떻게 지을 수 있겠는가?

김씨는 본디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으로 시서(詩書)ㆍ예악(禮樂)을 가정의 교훈으로 삼았으니, 공의 소양은 기본이 있다 하겠고, 화엄(華嚴)은 법을 융화시켜 일체(一體)가 되고 이치에 통달하면 두 갈래가 없으니 공의 학문은 크다 하겠으며,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널리 산천을 보고 많은 인물을 겪었으니 공은 관감(觀感)하여 얻은 것이 깊다고 하겠다. 이 세 가지를 가졌으니 어디에 간들 뜻을 얻지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공은 더없이 순진하고 미련없이 돌아가며 담박하여 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없으니, 그 행실이 높다 하겠다. 공이 물러가면 사람들은 나오게 하고, 공이 떠나가면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이것이 제공들이 시를 노래하게 된 뜻이요, 도전이 감히 이로써 서문을 삼는다.

 

 

送華嚴宗師友雲詩序 按友雲。卽珠公號。封齊生君。

 

華嚴宗師友雲。乃侍中竹軒 金倫號 金公之子。而侍中息齋 金敬直號 公。其兄也。幼投華嚴宗祝髮。學賢首敎。觀旣通。過鴨綠江。由遼瀋北入于燕都。遂南遊江浙至吳會。往返幾萬里。所至尊宿許之。儕輩推之。拈示之偈。留贈敍別之什。盈於囊橐。其聞善財之風而興起者歟。及東還。與其弟曹溪岑公俱有名。大爲玄陵知遇。歷住名刹。旣老。退休于鷄林之檀菴。優游於山水間者五六年。國家強起之。住于大公山之符仁寺。實巨刹也。未幾邀至松京法王寺。爲華嚴宗師。扶樹宗風。開悟後學。僅一朞辭去甚切。國家不得已從之。韓山牧隱先生首爲歌詩。贈其行。諸公繼而和之者多矣。其門人義砧。以先生之命。來徵序文。道傳不敏。烏能言哉。惟金氏本三韓大族。以詩書禮樂。爲家庭之訓。公之所養有素矣。夫華嚴融法。相爲一體。達理事無二致。公之學大矣。遊歷諸方。廣覽山川。多閱人物。公之得於觀感者深矣。挾是三者。焉往而不自得。而公委然其順。頹然其歸。泊然而無所求於世。其行高矣。宜乎公退而人進之。公去而人思之。此諸公所以歌詩之意也。而道傳亦敢以是爲序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