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국이 새로 지은 도평의사사청기 기사 [高麗國新作都評議使司廳記 己巳 ]
홍무(洪武) 22년(1389, 공양왕1) 12월 병오일에 전하께서 신(臣) 도전(道傳)에게 명하시기를, ‘도평의사(都評議使)는 실로 상신(相臣)들이 과인의 몸을 보좌하는 요직이다. 내가 정사를 처음 맡고 사사청(使司廳)이 때마침 완성되었으니, 그대는 그 전말을 기록하여 밝게 후세에 보여 주게 하라.’고 하시므로 신 도전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국가에서 문하부(門下府)를 설치, 정치와 법을 맡기고, 삼사(三司)를 두어 전곡(錢糓)을 맡기고, 밀직(密直)을 두어 군사를 맡깁니다. 그래서 각기 직책을 맡지만 큰일이 있으면 삼부(三府 문하ㆍ밀직ㆍ삼사)가 한데 모여 의논하니, 이를 일러 도평의사사라 합니다. 그러나 일에 따라 설치하기도 하고 혁파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대개 《주례(周禮)》에 관청끼리 연합하던 제도입니다.
근래에는 사사(使司)의 직위가 여러 관사를 관장하며 항상 설치해 있고 혁파하지 아니하므로, 그 직임과 관질이 진실로 일반 관원보다는 이미 중한데도 일정한 청사가 없더니 이제야 새로 청사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 청사의 건립에 있어서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우인열(禹仁烈), 평리(評理) 설장수(偰長壽)ㆍ김남득(金南得), 정당문학(政堂文學) 김주(金湊),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유화(柳和),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이염(李恬), 자혜부윤(慈惠府尹) 유광우(兪光祐) 등이 감독을 맡아, 모든 재목을 자르고 기와를 굽는 일들은 다 고직(雇直)들에게 시켜 공사를 부지런히 하도록 독려하였으나, 달포를 일하는 동안 백성들은 괴로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높다랗게 중앙을 차지하고 서 있는 것이 사사청(使司廳)이요, 날아갈 듯이 좌우에 마주 서 있는 것이 수령관청(首領官廳)인데, 수령관이란 곧 옛날 경사(卿士)의 직위입니다. 수령관청을 이어서 행랑을 짓고 담장을 둘렀으며, 심지어 부엌ㆍ곳간까지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비로소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ㆍ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국휘(李國諱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말함)로 판사(判事)를 삼고, 삼사에서는 판사 왕안덕(王安德) 이하로, 문하에서는 찬성사(贊成事) 정몽주(鄭夢周) 이하로 동판사(同判事)를 삼고, 밀직에서는 판사 김 구본에는 전(全)으로 되었음. 사안(金士安)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루자, 사사(使司)의 소임은 더욱 중하여졌습니다. 당(唐)나라에서 다른 관원이 동평장사(同平章事)의 일을 대동(帶同)하게 되면 재상(宰相)이 된 것이 바로 이 제도인 것입니다.
신 도전이 외람되이 용렬하고 소루한 자로서 동판사사(同判使司)가 되었거늘, 신을 명하여 기문(記文)을 쓰라고 하시니 신의 불민함으로써 무슨 말을 하오리까만, 《논어》에 ‘가까운 데서 비유를 취한다.’고 하였으니 신은 이 청사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당우(堂宇)는 비유하면 임금이요, 동량(棟樑)은 비유하면 정승이요, 기초(基礎)는 비유하면 백성입니다. 기초는 마땅히 기당(基當)이 구본에는 당기(堂基)로 되어 있음. 견고해야 하고 동량은 마땅히 편안하고 높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라야 당우가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 동량은 위로 지붕을 받들고 아래로 기초에 의지하니, 마치 재상이 군부(君父)를 받들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는 위를 위하여 덕을 펴고 아래를 위하여 백성을 가르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청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지붕을 보면 우리 임금 받들 바를 생각하고, 그 기초를 보면 우리 백성에게 후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그 동량을 보면 자신의 직책에 손색이 없을 것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옛날에 천자를 잘 도운 이로는 고요(皐陶)ㆍ기(夔)ㆍ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 같은 이가 있고, 열국(列國 여러 나라. 즉 제후들)에는 숙향(叔向)ㆍ공손교(公孫僑) 같은 이가 있었는데, 모두가 명상(名相)이었습니다. 비록 천자의 나라와 열국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결국 천시(天時)를 순하게 하고 생민(生民)을 도우며, 임금을 받들고 서관(庶官)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 직책이 한가지입니다.
저 고요와 기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만, 방현령은 계책을, 두여회는 결단을, 숙향은 곧은 것을, 공손교는 은혜 베풀기를 잘했습니다. 대개 계책이 아니면 일을 시작할 수 없고 결단이 아니면 일을 이루지 못하며, 곧음이 아니면 백성이 굴복하지 않고, 은혜가 아니면 백성이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상 몇몇은 그 직책을 잘 이행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어도 아직 미진한 데가 있으니, 반드시 선유 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의 호)이 정승의 할 일을 논한 것처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자신을 바로해야 한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임금을 바루려고 하면 먼저 스스로가 발라야 할 것이요, 자신이 이미 발라지면 모름지기 사람을 아는 총명도 있게 되어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나라는 국운이 중흥하고 명군과 양신이 서로 만나, 위에서는 성심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하고 아랫사람은 성심으로 위를 섬기니, 이것은 동방의 일대 성세(盛世)인 것입니다. 정승이 된 자가 각각 스스로 면려하여 위에서 등용해 준 의사에 부합하도록 한다면, 사사(使司)의 설치는 아주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기(記)를 씁니다.
高麗國新作都評議使司廳記 己巳
洪武二十二年十二月丙午。殿下命臣道傳曰。都評議使。實予相臣。左右我寡躬者也。當政之始而使司廳適成。爾宜記其顚末。明示後世。臣道傳拜手稽首而言曰。國家置門下府掌理典。三司掌錢穀。密直掌軍旅。各司其職。有大事則會三府以議之。謂之都評議使司。因事置罷。蓋周禮官聯之遺意也。近來使司專總衆職。常置不罷。其職任禮秩。固已重於百僚矣。而無定署。至是新作署宇。門下贊成事臣禹仁烈,評理臣偰長壽,臣金南得,政堂文學臣金湊,同知密直司事臣柳和,簽書密直司事臣李恬,慈惠府尹臣兪光祐。實董其役焉。凡削材塼瓦。皆役雇直之徒。而督勤工繕。經營於旬月之間。民不知勞。其巍然而據于中者曰使司廳。翼然而拱于左右者曰首領官廳。首領官。卽古卿士之職也。承以廊廡。繚以垣墻。以至廚庖府藏。無不周完矣。殿下始以門下侍中臣沈德符,守門下侍中臣李國諱爲判事。三司則判事臣王安德以下。門下則贊成事臣鄭夢周以下爲同判事。密直則判事臣金 舊本作全 士安以下爲使。正其名稱。使司之任益重矣。唐以他官帶同平章事者,得爲宰相。卽其制也。臣道傳亦濫以庸疏。同判使司。而命臣以記文。臣不敏。何足以言哉。語曰。能近取譬。臣請卽此廳而言之。堂宇譬則君也。樑棟譬則相也。基譬則民也。基當 基當。舊本作堂基。 堅厚。樑棟當安峙。然後堂宇得以固緻矣。樑棟。上以承其宇。下以藉其基。猶宰相奉君父而撫民庶也。書曰臣。爲上爲德。爲下爲民。此之謂也。入此廳者。視其宇。思所以奉吾君。視其基。思所以厚吾民。視其樑棟。思所以稱吾職可也。古之善相天子者。有若咎,夔,房,杜。其在列國。有若叔向,公孫僑。皆名相也。雖有天子列國之殊。所以順天時遂民生。奉君上理庶官。則其職一也。咎,夔不可尙已。房以謀。杜以斷。叔向以直。公孫僑以惠。蓋非謀事不集。非斷事不成。非直民不服。非惠民不懷。若數子者。亦善其職矣。然猶有所未盡也。必若先儒眞西山之論相業。曰格君曰正己曰知人曰處事。然後可也。夫格君者。亦自正而已。身旣正矣。須有知人之明。處事之方。乃可濟也。幸今國祚中興。明良相遇。上以誠待下。下以誠事上。此東方一盛際也。爲相臣者宜各自勉。以副登庸之意。則使司之設。其庶幾矣。於是乎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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