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00)정도전 삼봉집 제5권 /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 심성의 변[佛氏心性之辨]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4. 08:01

불씨 심성의 변[佛氏心性之辨]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기(氣)로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아, 한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요, 성(性)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이(理)로서 순수(純粹)하고 지극히 착하여 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개 마음은 지(知)와 위(爲)가 있으나 성(性)은 지도 위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능히 성(性)을 다할 수 있으나 성은 마음을 검속(檢束)할 줄을 알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은 정(情)과 성(性)을 모두 통합한 것이다.”

는 말도 있고 또 말하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신명(神明)의 집[舍]이요, 성(性)은 그 갖추어진 바의 이치[理]이다.”

라는 말도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마음과 성(性)의 분변(分辨)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저 불씨(佛氏)는 마음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하고서 그 설을 구하다가 되지 않으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혼미[迷]하면 마음이요, 깨달으면[悟] 성(性)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과 성의 이름이 다른 것은 안(眼)과 목(目)의 명칭이 다른 것과 같다.”

하였다. 《능엄경(楞嚴經)》에 말하기를,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명묘(明妙)는 원성(圓性)이다.”

 

【안】 《능엄경》에 “너희들은 본묘(本妙)를 잃어 버렸도다.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보명(寶明)은 묘성(妙性)이니라. 깨달음을 얻은 경지에서는 말이 필요하지 않으니, 마음은 묘로부터 명(明)을 일으키는지라, 그 원융(圓融)하게 비춤이 거울의 광명과 같으므로 ‘원묘는 명심’이라 하고, 성품은 그 자체가 곧 명(明)하며 묘(妙)한지라, 엉기어 고요하고도 맑음이 거울의 본체와 같으므로 ‘보명은 묘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하니, 이는 명(明)과 원(圓)을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보조(普照)는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佛]가 없으며 성(性) 밖에 법(法)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또한 불(佛)과 법(法)을 나누어 말한 것이다. 이는 통찰[見]한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모두가 방불(髣髴)한 가운데 상상(想象)으로 얻은 것이요, 활연(豁然)히 진실되게 본 것이 없어, 그 설에 헛된 말[遊辭]이 많아 일정한 논(論)이 없으니 그 실정을 알 수 있다.

우리 유가(儒家)의 설에 말하기를,

 

“마음을 다하면 성(性)을 안다.”

하였으니, 이것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씨(佛氏)의 설에서는 말하기를,

 

“마음을 관(觀)하면 성(性)을 보나니 마음이 곧 성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따로 한 마음을 가지고 이 한 마음을 본다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둘이 있단 말인가?

저들도 스스로 그 설의 궁함을 알았는지라 이에 둔사(遁辭)를 하여 말하기를,

 

 

“마음으로 마음을 관(觀)하는 것은 입으로 입을 씹는 것과 같으니, 관하지 않는 것으로써 관해야 하느니라.”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또 우리 유가의 말에,

 

“한 가슴[方寸]의 사이가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衆理]를 갖추어 만사에 응(應)한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성(性)이요, ‘만사에 응한다.’고 하는 것은 정(情)이다. 오직 이 마음이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으므로, 사물(事物)의 오는 것에 응(應)하여 각각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이니, 사물의 마땅하고 마땅치 않은 것을 처리함에 있어 모든 사물이 다 나의 명령을 듣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유가(儒家)의 학이 안으로는 마음과 몸으로부터 밖으로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근원으로부터 말류(末流)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관통되어 원두(源頭 근원처(根源處))의 물이 만 갈래로 흘러도 물 아님이 없음과 같고, 눈금이 있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의 경중을 저울질하면 그 물건의 경중이 저울대의 저울눈과 서로 맞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원래부터 간단(間斷)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불씨(佛氏)는 말하기를,

 

“공적(空寂)한 영지(靈知)는 연(緣)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

 

【안】 불씨는 말하기를, “진정(眞淨)한 마음이 연(緣)을 따라 변하는 것은 상(相)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성(性)이니, 마치 한 진금(眞金)이 크고 작은 그릇을 따르는 것은 곧 연(緣)을 따르는 상이고, 진금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은 곧 성(性)인 것과 같다.” 하니, 말하자면 하나의 진정한 마음이 선악을 따라 더럽혀지거나 깨끗해지는 것은 곧 연(緣)을 따르는 상이고, 본래의 진정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은 성(性)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이른바 이(理)란 것이 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사물을 대함에 막힌[滯] 것은 끊어 버리고자 하고 트인[達] 것은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데, 그 끊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 원래 잘못이거니와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또 그의 말에,

 

“연(緣)을 따라 되는 대로 하고, 성(性)에 맡겨 자연스럽게 한다.”

 

하니, 이는 그 물(物)의 하는 대로를 따를 뿐이요, 다시 그 물에 대한 시비를 절제(節制)하여 처리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고, 그 마음의 응함은 천강(千江)의 달그림자와 같으니, 달은 참된 것이요, 그림자는 헛된 것이어서, 그 사이에 연속됨이 없는 것이며,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아, 그 가볍고 무겁고,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은 오직 물건에 따를 뿐, 자기가 행동하여 칭량(稱量)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씨(釋氏)는 허무이고 우리 유가는 진실이며,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이며, 석씨는 간단(間斷)이 있고 우리 유가는 연속(連續)되는 것이다.”

하는 것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밝게 분변(分辨)해야 할 것이다.

 

 

 

佛氏心性之辨

心者。人所得於天以生之氣。虛靈不昧。以主於一身者也。性者。人所得於天以生之理。純粹至善。以具於一心者也。蓋心有知有爲。性無知無爲。故曰。心能盡性。性不能知檢其心。又曰。心統情性。又曰。心者。神明之舍。性則其所具之理。觀此。心性之辨可知矣。彼佛氏以心爲性。求其說而不得。乃曰。迷之則心。悟之則性。又曰。心性之異名。猶眼目之殊稱。至楞嚴曰圓妙明心。明妙圓性。按楞嚴經曰。汝等遺失本妙。圓妙明心。寶明妙性。認悟中迷。言心則從妙起明。圓融照了。如鏡之光。故曰。圓明妙心。性則卽明而妙。凝然寂湛。如鏡之體。故曰寶明妙性。 以明與圓。分而言之。普照曰。心外無佛。性外無法。又以佛與法分而言之。似略有所見矣。然皆得於想象髣髴之中。而無豁然眞實之見。其說多爲遊辭而無一定之論。其情可得矣。吾儒之說曰。盡心知性。此本心以窮理也。佛氏之說曰。觀心見性。心卽性也。是別以一心見此一心。心安有二乎哉。彼亦自知其說之窮。從而遁之曰。以心觀心。如以口齕口。當以不觀觀之。此何等語歟。且吾儒曰。方寸之間。虛靈不昧。具衆理應萬事。其曰。虛靈不昧者。心也。具衆理者。性也。應萬事者。情也。惟其此心具衆理。故於事物之來。應之無不各得其當。所以處事物之當否。而事物皆聽命於我也。此吾儒之學。內自身心。外而至於事物。自源徂流。一以通貫。如源頭之水。流於萬泒。無非水也。如持有星之衡。稱量天下之物。其物之輕重。與權衡之銖兩相稱。此所謂元不曾間斷者也。佛氏曰。空寂靈知。隨緣不變。按佛氏以爲眞淨心。隨緣是相。不變是性。如一眞金。隨大小器物。等是隨緣相也。本金不變是性也。一眞淨心。隨善惡染淨。等是隨緣相也。本心變性也。 無所謂理者具於其中。故於事物之來。滯者欲絶而去之。達者欲隨而順之。其絶而去之者。固已非矣。隨而順之者。亦非也。其言曰。隨緣放曠。任性逍遙。聽其物之自爲而已。無復制其是非而有以處之也。是其心如天上之月。其應也如千江之影。月眞而影妄。其間未嘗連續。如持無星之衡。稱量天下之物。其輕重低昂。惟物是順。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故曰。釋氏虛。吾儒實。釋氏二。吾儒一。釋氏間斷。吾儒連續。學者所當明辨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