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19)정도전 삼봉집 제6권 /심기리편(心氣理篇) /이가 심과 기를 타이름[理諭心氣]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5. 05:25

이가 심과 기를 타이름[理諭心氣]

 

이 편(篇)은 주로 유가(儒家)의 의리(義理)의 바른 것을 말하여 노ㆍ불(老佛) 이씨(二氏)를 타일러서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한 것이다. 이(理)라는 것은 마음이 품부(稟賦)한 덕(德)이요, 기(氣)는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아, 목목(穆穆)한 그 이(理)여! 천지(天地)보다 앞에 있어, 기(氣)는 나[我 이(理)를 말함.]로 말미암아 생기고 심(心)도 또한 품수(稟受)하였도다.

 

오(於)는 탄미(歎美)하는 말이요, 목(穆)은 지극히 맑음이다. 이 이(理)가 순수(純粹)하게 지극히 선하여 본래 잡된 바가 없으므로 탄미하여 말하기를 오목(於穆)이라 한 것이요, 나[我]라는 것은 이(理)가 자기를 일컬은 것이다.

앞서 심(心)과 기(氣)를 말함에 바로 나[我]ㆍ나[予]라 이르고, 이곳에는 이(理)를 표적(標的)하여 탄미(歎美)한 후에 나[我]라 일컬었으니, 그것은 이(理)가 공정한 도(道)로 그 존귀(尊貴)함이 상대가 없어서, 노ㆍ불(老佛) 이씨(二氏)가 각각 편벽된 소견을 지켜 서로 피아(彼我)를 구별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것은 이(理)가 심(心)과 기(氣)의 본원이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이 이(理)가 있은 후에 이 기(氣)가 있고, 이 기(氣)가 있은 후에 양기(陽氣)의 경청(輕淸)한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음기(陰氣)의 중탁(重濁)한 것은 아래로 엉겨 땅이 된 것이다.

사시(四時)가 이에 유행(流行)하고 만물이 이에 화생(化生)하니, 사람이 그 사이에 있어 천지의 이(理)를 온전히 얻고 또 천지의 기(氣)를 온전히 얻어, 만물 가운데에서 가장 존귀하므로 천지와 더불어 천ㆍ지ㆍ인(天地人) 삼재(三才)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천지의 이(理)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성품[性]이 되고, 천지의 기(氣)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형체[形]가 되며, 심(心)은 또 이(理)와 기(氣)를 겸하여 얻어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理)가 천지보다 앞에 있어 기(氣)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마음도 또한 품수하여 덕(德)이 된 것이다.

 

 

심(心)이 있고 내[我 이(理)를 말함. ]가 없으면 이해에만 달려갈[趨] 것이요, 기(氣)만 있고 내[我]가 없으면 혈육만의 구체(軀體)로 준연(蠢然)하게 금수(禽獸)와 한길로 돌아갈 것이니, 아아, 그 중에서 조금 다를 자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준연(蠢然)은 지각(知覺)이 없는 모양이요, 기희(幾希)는 적다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지각(知覺)과 운동(運動)의 준연(蠢然)한 것은 사람이 동물과 같으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순수한 것은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

하였다.

 

이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바는 그 의리가 있기 때문이니, 사람이고서 의리가 없으면 그 지각(知覺)하는 바가 정욕(情欲)과 이해(利害)의 사사로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그 움직이는바 또한 준연(蠢然)히 한갓 살아 있을 따름이니, 비록 사람이라고 하나 금수(禽獸)에서 얼마나 멀 것인가? 이것이 유자(儒者)가 존심(存心)ㆍ양기(養氣)하는 데 반드시 의리로써 주(主)를 삼는 까닭이다.

저 석ㆍ노(釋老)의 학은 적멸(寂滅)과 청정(淸淨)을 숭상하여 비록 이륜(彛倫)의 중대한 것과 예악(禮樂)의 아름다운 것도 반드시 제거하여 멸절(滅絶)하고자 한다. 그 흉중에 욕심이 없는 자는 이해에 달려가는 자와 다른 듯하나 천리(天理)의 공정(公正)함을 주장하여 인욕(人欲)의 사(私)를 제재할 줄을 알지 못하므로, 그 일상 언행이 매양 이해(利害)에 빠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또 사람의 욕구하는 바가 삶보다 더한 것이 없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이제 그들의 학설을 보건대, 석씨(釋氏)는 반드시 사생(死生)에서 벗어나려 하니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노씨는 반드시 장생(長生)을 구하고자 하니 이는 삶을 탐하는 것인즉, 이해(利害)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그 가운데에 의리(義理)의 주장함이 없으니, 효연(_然 빈 모양)히 얻음이 없고 명연(冥然)히 알지 못할 뿐이니 이는 구각(軀殼)에 존재된 것이 혈육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네 구절은 비록 범연(泛然)히 중인(衆人)을 가리켜 말한 것이나, 노ㆍ불 이가(二家)의 실지 병통에 절실하게 맞는 것이니, 독자는 상세히 살펴야 한다.

 

저 어린아이가 포복(匍匐)하여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측은한 정이 생기나니, 그러므로 유자(儒者)는 정념(情念)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방금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면 놀랍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다.”

하였다. 이는 측은한 정이 내 마음의 고유(固有)한 데 근본함을 _하여 불가(佛家)의 생각을 없애고 정(情)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밝힌 것이다.

대저, 사람이 천지의 호생(好生)하는 마음을 얻어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른바 인(仁)이다. 이 이치(理致)가 실지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감을 보면 그 측은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서 막지 못하나니, 이 마음을 미루어 확충하면 인(仁)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며, 사해(四海)의 안을 모두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자(儒者)는 정념(情念)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천리(天理)가 나타나는 자연을 따를 뿐이니, 어찌 불가의 정념(情念)이 일어나는 것을 두렵게 여겨 억지로 제어하여 적멸(寂滅)에 돌아갈 따름인 것과 같으랴!

 

죽을 자리에 죽는 것은 의(義)가 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여 인(仁)을 해침이 없고,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룸이 있다.”

하였다. 이는 의(義)가 중하고 생명이 경한 것을 말하여 노자의 기(氣)만 양(養)하고 생(生)을 탐하는 실수를 밝힌 것이다.

대개 군자가 실지의 이치를 보아 얻으면 마땅히 죽을 자리를 당하여는 그 몸이 차마 하루라도 삶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나니, 사생(死生)이 더 중한가, 의리(義理)가 더 중한가? 그러므로 유자(儒者)는 임금이나 어버이의 난(難)을 구(救)할 때를 당하여는 신체와 생명을 버리고 달려가는 자가 있으니, 노씨(老氏)의 한갓 수련에만 종사하며 삶을 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성인(聖人)이 지나가신 천재(千載)에 학(學)이 거짓되고 말이 방잡(_雜)한지라, 기(氣)로써 도(道)를 삼고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는도다.

 

방(厖)의 뜻은 난(亂)과 같다.

이들 이단(異端)의 학설이 성행하게 된 까닭은 성인(聖人)의 세상이 이미 멀어져 도학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씨(老氏)는 기(氣)가 이(理)에 근본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기(氣)로써 도(道)를 삼고 있으며, 석씨(釋氏)는 이(理)가 심(心)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노ㆍ불 이가(二家)에서는 스스로 무상고묘(無上高妙)하다고 말하면서도, 형이상(形而上)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마침내 형이하(形而下)만을 가리켜 말하여 천근(淺近)하고 오활(迂闊)하며 편벽된 가운데에 빠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의롭지 못하고 장수(長壽)하면 거북이나 뱀 따위일 것이요, 눈 감고 앉아만 있으면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해(形骸)일 뿐이다.

 

갑연(_然)은 앉아 조는[坐眼] 모양이다. 앞의 두 구절은 노씨(老氏)를 책망한 것이요, 뒤의 두 구절은 석씨(釋氏)를 책망한 것이다. 곧 앞 장(章)에 심(心)만이 있고 내[我]가 없으며, 기(氣)만 있고 내[我]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 장은 범연히 여러 사람을 말한 것이요, 이 장(章)은 오로지 이씨(二氏)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내[我]가 너[爾]의 심(心)에 주재하고 있으면 형철(瑩澈)하고 허명(虛明)할 것이요, 내[我]가 너[爾]의 기(氣)를 기르면 호연(浩然)의 기가 생길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나의 호연(浩然)한 기(氣)를 잘 기른다.”

 

하였다.

이는 성인(聖人)의 학(學)이 안팎으로 사귀어 기르는 공(功)을 말한 것이다.

의리(義理)로써 심(心)을 간직하여 함양(涵養)하면 물욕(物欲)에 가려짐이 없어 전체(全體 심지체(心之體))가 허명(虛明)하고 대용(大用 심지용(心之用))이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요, 의(義)를 모아 기(氣)를 길러[養氣] 확충하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剛)한 기(氣)가 호연(浩然)히 스스로 생겨 천지에 가득 찰 것이다. 본말(本末)이 겸비(兼備)되고 내외(內外)가 서로 양(養)하는 것이니, 이는 유자(儒者)의 학이 바른 것이 되어 노ㆍ불(老佛)이 편벽된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선성(先聖)의 가르침에 ‘도(道)에는 두 갈래로 높은 것이 없다.’ 하였으니 심(心)이여 기(氣)여, 공경하여 이 말을 받을지어다.

 

호씨(胡氏)가, 《예기(禮記)》의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도(道)에는 두 가지 길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도술(道術)이 하나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윗글에서 논한 바가 모두 성현의 유훈(遺訓)에 근본한 것이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며, 그 도(道)의 존귀(尊貴)함이 더불어 둘이 될 것이 없어 심(心)과 기(氣)의 비(比)할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심(心)과 기(氣)를 특별히 불러 경계하였으니 그 권권(拳拳)히 열어 보인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다.

 

심(心)ㆍ기(氣)ㆍ가(理) 3편(三篇)은 삼봉(三峯)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선생은 항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 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천지(天地)의 이(理)를 받아 성(性)이 되었고, 그 형체[形]를 이룬 바는 기(氣)이고,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능히 신명(神明)한 것은 심(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이(理)를 주(主)로 하여 심(心)과 기(氣)를 다스리니, 그 하나를 근본으로 하여 그 둘을 기르는 것이요, 노씨(老氏)는 기(氣)를 주로 하여 양생(養生)으로써 도(道)를 삼고, 석씨(釋氏)는 심(心)을 주로 하여 부동(不動)으로써 종(宗)을 삼아, 각기 그 하나를 지키고 그 둘을 버린 것이다. 노씨는 무위(無爲)를 원하여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모두 제거한다. 이는 그 몸의 수고로움 때문에 그 기(氣)를 해칠까(어떤 본(本)에는 폐(蔽)라 썼다) 두려워함이니, 기(氣)가 잘 길러진다면 정신이 안정되어 비록 하는 일이 있어도 나의 삶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석씨(釋氏)는 무념(無念)을 원하여 생각의 선악(善惡)을 막론하고 모두 버린다. 이는 그 정신의 수고로움 때문에 그 마음이 움직일까 두려워함이니, 마음이 잘 안정되면 본체가 항상 공적(空寂)하여 비록 일의 변화에 응하더라도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모두 하지 않는 바가 있다가 마침내는 모두 하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대개 그 하지 않는 바가 있을 때에는 이치[理]에 당연한 바도 또한 끊어 버리고, 그 하지 않는 바가 없을 때에는 비록 이치[理]에 마땅히 해서는 안 될 바도 또한 한다.

따라서 이가(二家)의 학설은 고고(枯槁)하고 적멸(寂滅)한 데 빠지지 않으면 반드시 방사(放肆)하고 종자한 데에 흘러들어, 그 인의(仁義)를 해치고 윤리를 멸절(滅絶)하여 성문(聖門) 대중(大中 지극히 중정(中正)한 도(道))의 가르침에 죄를 얻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 유도(儒道)는 그렇지 않으니, 하늘이 명(命)한 성품(性稟)이 혼연(渾然)한 일리(一理)로써 만 가지 선(善)이 모두 갖추어졌는지라 군자(君子)가 이에 항상 경외(敬畏)하고 반드시 성찰(省察)을 더하여 마음에 싹트는 것이 이(理)에 본원(本源)한 것이면 확충(擴充)하고, 욕심에서 생겼으면 막고 끊어 버리며, 기(氣)에서 움직이는 것이 의리에 합하여 곧으면 용맹스럽게 나아가 하고, 곧지 않으면 겁내어 물러간다.

그 심(心)을 길러 의리(義理)를 보존하고, 그 기(氣)를 길러 도의(道義)에 합하므로 무릇 생각하는 바가 의리에 당연하지 않음이 없고, 무릇 동작하는 바가 자연 비벽(非僻)의 간여가 없어 그 마음의 영(靈)이 사물의 이(理)를 주관하고, 그 기(氣)의 큰 것이 천지 사이에 가득하나 모두 의리(義理)가 주인이 되어 마음과 기(氣)가 매양 명령을 듣는다.”

하였다.

이는 ‘유자(儒者)의 도(道)가 인륜(人倫)과 일용(日用)의 평상(平常)한 데 갖추어져 있어 천하 만세(萬世)에 행하여도 폐단이 없는 것이다.’ 하여 선생이 항상 학자들에게 말하던 것이다.

비록 사람에게 의리(義理)가 있어 진실로 매우 큰 것이 되나, 심(心)은 내 몸의 주인[主]이요, 기(氣)도 또한 내 몸이 얻어서 태어난 것으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 노씨(老氏)와 석씨(釋氏)가 명심(明心)ㆍ양기(養氣)의 설을 표절하여 어리석은 세속을 속이고 유혹하므로 사람들이 즐겨 듣고 신종(信從)하는 자가 많아, 이따금 도(道)를 아는 자가 비록 역설하여 물리치기는 하나 다만 우리 도(道)에 맞지 않음을 배척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오히려 누가 옳고 그른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직 선생은 먼저 이씨(二氏)의 취지를 밝히고 우리 도(道)의 바른 것으로써 절충하였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소연(昭然)하게 깨닫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이단(異端)의 무리 또한 좇아 화(化)하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선생이 명교(名敎)에 크게 공(功)이 있는 것이다.

이에 또 그 뜻을 기술하여 3편(篇)을 지어 학자들에게 보였으니, 그 심(心)과 기(氣)를 말한 것이 모두 이씨(二氏)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취지를 밝히고 그 온오(蘊奧)한 데에 이르기까지 적실하게 말하였으며, 또 그 말이 혼후하여 배척한 자취가 보이지 않으므로, 비록 그의 무리들이 이것을 볼지라도 또한 모두 정밀하고 적절하다 하여 즐겨 복종하였던 것이다.

급기야 이(理)로써 형용하여 말한 후에 우리 도(道)와 이단(異端)의 바르고 편벽됨이 변설(辨說)할 것도 없이 자연 밝혀졌으니, 저들이 비록 말하려 하나 무엇을 가지고 말할 것인가? 이는 선생이 이씨(二氏)를 물리침에 있어 범연하게 논설을 늘어놓는 자와 비교가 되지 않으며, 또 언성(言聲)을 높이고 안색을 변하여 극구(極口) 저훼(_毁)하는 자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한갓 그 배척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르기를,

“삼교(三敎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가 일치하므로 선생이 이를 지어 그 도(道)의 동일함을 밝힌 것이다.”

하는데, 이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간략히 주석(註釋)을 하였으며, 또 그 단서를 이끌어 선생에게 들은 바를 써서 밝히는 바이다.

홍무(洪武 명(明)태조의 연호(年號)) 갑술(甲戌 1394, 태조3) 여름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서(序)한다.

 

 

 

理諭心氣

 

此篇。主言儒家義理之正。以曉諭二氏。使知其非也。理者。心之所稟之德而氣之所由生也。

於穆厥理。在天地先。氣由我生。心亦稟焉。

 

於。嘆美之辭。穆。淸之至也。此理純粹至善。本無所雜。故嘆而美之曰於穆。我者。理之自稱也。前言心氣。直稱我與予。而此標理字以嘆美之。然後稱我者。以見理爲公共之道。其尊無對。非如二氏各守所見之偏而自相彼我也。○此言理爲心氣之本原。有是理然後有是氣。有是氣然後陽之輕淸者上而爲天。陰之重濁者下而爲地。四時於是而流行。萬物於是而化生。人於其間。全得天地之理。亦全得天地之氣。以貴於萬物而與天地參焉。天地之理在人而爲性。天地之氣在人而爲形。心則又兼得理氣而爲一身之主宰也。故理在天地之先。而氣由是生。心亦稟之以爲德也。

有心無我。利害之趨。有氣無我。血肉之軀。蠢然以動。禽獸同歸。其與異者。嗚呼幾希。

 

蠢然。無知貌。幾希。少也。朱子曰。知覺運動之蠢然者。人與物同。仁義禮智之粹然者。人與物異。○此言人之所以異於禽獸者。以其有義理也。人而無義理則其所知覺者。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矣。其所運動者。亦蠢然徒生而已矣。雖曰爲人。去禽獸何遠哉。此儒者所以存心養氣。必以義理爲之主也。若夫釋老之學。以淸淨寂滅爲尙。雖彝倫之大。禮樂之懿。亦必欲屛除而滅絶之。是其胸中無欲。與趨於利害者。疑若不同矣。然不知主天理之公。以裁制人欲之私。故其日用云爲。每陷於利害而不自知也。且人之所欲無甚於生。所惡無甚於死。今以兩家之說觀之。釋氏必欲免死生。是畏死也。老氏必欲求長生。是貪生也。非利害而何哉。又其中無義理之主。則枵然無得。冥然不知。是軀殼所存。亦不過血肉而止耳。此四句雖泛指衆人而言。切中二家之實病。讀者詳之。

見彼匍匐。惻隱其情。儒者所以。不怕念生。

 

孟子曰。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又曰。惻隱之心。仁之端也。此言惻隱之情。本於吾心之固有。以明釋氏無念忘情之失。夫人得天地生物之心以生。所謂仁也。是理實具於吾心。故見孺子匍匐入井。其惻隱之心油然自生而不可遏。推此心以擴充之。則仁不可勝用。而四海之內可兼濟也。故儒者。不怕念慮之生。但循其天理發見之自然。豈如釋氏畏怕情念之起。而強制之歸於寂滅而已哉。

可死則死。義重於身。君子所以。殺己成仁。

 

論語曰。志士仁人。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此言重義輕生之事。以明老氏養氣貪生之失。蓋君子見得實理。則當其可死也。其身不忍一日安於生。是死生爲重乎。義理爲重乎。故儒者當救君親之難。有隕軀隕命以赴之者。非如老氏徒事修鍊以偸生也。

聖遠千載。學誣言厖。氣以爲道。心以爲宗。

 

厖。猶亂也。○此言異端之說所以得熾者。以聖人之世旣遠。而道學不明也。故老不知氣本乎理。而以氣爲道。釋不知理具於心。而以心爲宗。此二家自以爲無上高妙。而不知形而上者爲何物。卒指形而下者而爲言。陷於淺近迂僻之中而不自知也。

不義而壽。龜蛇矣哉。瞌然而坐。土木形骸。

 

瞌然。睡貌。上二句責老。下二句責釋。卽前章有心無我。有氣無我之意。然前章泛言在衆人者。此章專指二氏而言也。

我存爾心。瑩徹虛明。我養爾氣。浩然而生。

 

孟子曰。我善養吾浩然之氣。○此言聖學內外交養之功。以義理存心而涵養之。則無物欲之蔽。全體虛明。而大用不差矣。集義養氣而擴充之。則至大至剛之氣。浩然而自生。充塞天地矣。本末兼備。內外交養。此儒者之學。所以爲正。而非若二氏之偏也。

先聖有訓。道無二尊。心乎氣乎。敬受斯言。

 

胡氏引禮記天無二日。土無二王之語。以爲道無二致。欲道術之歸于一也。○此言上文所論。皆本聖賢之遺訓。而非我之私言。其道之尊。無與爲二。非心氣之可比也。故於其終。特呼心氣以警之。其拳拳開示之意。至深切矣。

 

序[權近]

 

心氣理三篇者。三峯先生所作也。先生常以明道學闢異端爲己任。其言曰。人之生也。受天地之理以爲性。而其所以成形者氣也。合理與氣。能神明者。心也。儒主乎理而治心氣。本其一而養其二。老主乎氣。以養生爲道。釋主乎心。以不動爲宗。各守其一而遺其二者也。老欲無爲。不計事之是非而皆去之。恐勞其身以弊 一本作蔽 其氣也。氣苟得養則精神凝定。雖有所事。而不害吾之生。釋欲無念。不論念之善惡而皆遣之。恐勞其神以動其心也。心苟得定則體常空寂。雖有應變。而不擾吾之中。故其初也。皆有所不爲。而其終也皆無所不爲也。蓋當其有所不爲也。雖理之所當爲者。亦絶之。當其無所不爲也。雖理之所不當爲者。亦爲之。是二家之學。不陷於枯槁寂滅則必流於放肆縱恣。其賊仁害義。滅倫敗理。得罪於聖門大中之敎則一也。若吾儒道則不然。天命之性。渾然一理。而萬善咸備。君子於此。常存敬畏。而必加省察。萌於心者。原於理則擴而充之。生於欲則遏而絶之。動於氣者。自反而直則勇往爲之。不直則怯然而退。養其心以存義理。養其氣以配道義。凡所思慮。無非義理之當然。凡所動作。自無非僻之得干。其心之靈。管乎事物之理。其氣之大。塞乎天地之間。皆以義理爲之主。而心與氣每聽命焉耳。此儒者之道。具於人倫日用之常。行於天下萬世而無弊。先生常以語學者也。雖然。義理之在人。固爲甚大。而心乃吾身之主。氣亦吾身之所得以生者。不得不重之也。彼老釋竊明心養氣之說。誑誘愚俗。故人多樂聞而信從之。往往知道者雖力言以闢之。但斥其不合於吾道者而已。故聞者猶未知其孰爲得失也。唯先生先明二氏之旨而後折以吾道之正。故聞者莫不昭然若發矇。異端之徒亦有從而化之者矣。此先生之大有功於名敎者也。於是。又述其意。作此三篇。以示學者。其言心氣者。皆用二氏之語以明其旨。盡底其蘊奧而的言之。且其語意渾然。不見其有斥之之跡。故雖使其徒觀之。亦皆以爲精切而悅服之也。及以理形之。然後吾道異端之偏正。不待辨說而自明。彼雖欲有言。其將何以哉。此先生闢二氏。固非泛然論列者比。又非大厲聲色極口詆毀者之比也。抑或有人。徒見其不斥也。以爲三敎一致。故先生作此以明其道之同耳。則非知言者也。故愚不揆鄙拙。略爲註釋。又引其端。以所聞於先生者明之耳。洪武甲戌夏。陽村權近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