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51)정도전 삼봉집 제7권/ 습유(拾遺) / 전(箋) /공양왕조에 우군총제사를 사양하는 전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6. 06:50

공양왕조에 우군총제사를 사양하는 전 신미 봄[恭讓朝辭右軍總制使箋 辛未春 ] 《고려사(高麗史)》 본전(本傳)에 보인다.

 

신이 남에게 비난 듣는 일은 이루 다 아뢰기 어렵고 전하께서 잘 아시는 것만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에게 삼군도통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統制府右軍總制使)로 맡기실 적에 신은 면전(面前)에서 청하기를, “제장들이 사병을 데려다가 사역(私役)을 시켜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제도를 고치면, 구가 세족(舊家世族)들은 하는 일이 없이 수입만 받아먹은 지 오래 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그 이름이 병적(兵籍)에 올라서 직접 신역(身役)을 하게 되면, 신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이 모두 신을 원망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장수의 제도를 개혁한 것은 헌사(憲司)에서 말한 것이요, 삼군(三軍)을 설치한 것은 내가 단정한 것이니,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여기에 대한 비난은 절대 없도록 내가 보장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신은 다시 아뢰기를, “신이 만약 비난을 듣게 되면 반드시 전하께 들릴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전하도 신이 까닭 없이 듣는 비난은 모두 이런 것들임을 아시게 되고, 신이 다른 일에 비난 듣는 것도 사실과 다름이 증명되겠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닙니까?” 하였습니다. 신이 임명을 받은 뒤에 과연 비난하는 사람이 생겨서 말하기를, “도전이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니, 이것은 오군 도독(五軍都督)의 법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구가 세족이 지금부터 모두 천역(賤役)을 하게 되었다.” 하며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하여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호적(戶籍)을 만든 것은 당신(堂臣 당상관(堂上官))들이 건의하며 전하께서 재가(裁可)하신 것으로, 그 일은 신이 중국에 갔던 사이에 생긴 것이며, 장님과 무당의 아들들을 전의시(典儀寺) 악공(樂工)에 충당시킨 것은 전하의 명령을 받들어서 시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호적이 없이 아무 이름이나 사용하고 돌아다니던 무리들은 호적이 저에게 귀찮게 되었다고 원망하기를, “도전이 만든 것이다.” 하며 장님과 무당은 이 제도가 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사전(私田)을 개혁한 건의는 신이 처음에 계획하기를, 토지는 모두 국유(國有)로 만들어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군량미(軍糧米)도 넉넉하게 하며, 사대부(士大夫)의 녹(祿)도 주고 군역(軍役)들도 먹여서 상하(上下)에 모자라는 근심이 없게 하려는 것이 신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결국 시행되지 않으므로 그 즉시 전하께 “제조관(提調官)을 사면하게 해주소서.”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토지 분배가 고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원망은 모두 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일로서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것인데도 신으로서는 변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일이 크고 원망이 깊은 것이야 비록 신이 모르는 것이라도 신이 어떻게 스스로 모면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신이 최원(崔源)을 중국에 보낼 때에 죽었으면 안으로 선군(先君)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바로잡아 드렸을 것이고, 위로는 천자(天子)를 속이지 않았을 것이며, 서명(署名)하기를 싫어하던 사건에 죽었으면 넉넉히 위신(僞辛)이 현릉(玄陵 공민왕)의 자손이 아님을 밝혔을 것이며, 오랑캐의 사신을 물리칠 때에 죽었으면 위로 군부(君父)의 악명(惡名)을 벗기고, 아래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시군(弑君)의 죄를 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신의 몸은 비록 죽었어도 이름은 살아 있을 것이니, 어찌 영화로운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 참소하는 말에 넘어가 죽는다면 위로 군부에게 공신을 보전하지 못했다는 누명을 끼쳐 드리고 아래로는 명철보신(明哲保身)하지 못했다는 나무람을 들을 것이니, 신으로서는 몹시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의 현직을 해임시키셔서 여생(餘生)을 보존하게 해주소서.

 

恭讓朝辭右軍摠制使箋 辛未春○麗史本傳

 

臣之得謗。難可悉陳。請以殿下之所明知者言之。殿下以臣充三軍都統制府右軍摠制使。臣面請曰。諸將用軍士爲私屬。其來尙矣。一日革之。舊家世族。無其役而食其田久矣。一日名屬軍籍。役加於身。臣恐大小歸怨於臣也。殿下曰。將帥之革。憲司言之。三軍之設。斷自予心。卿何與焉。保無此謗也。臣復曰。臣若得謗。必達於聰聞。則殿下亦知臣無其事而得其謗。皆此類也。而臣之他謗亦明。豈非幸之中者乎。臣受命後。果有謗之者曰。道傳回自中原。而三軍之府遽設。此以五軍都督之法而爲之也。舊家世族。自此皆服賤役矣。萬口一談。牢不可破。戶口成籍。堂臣言之。殿下可之。其事出於臣在中原之時也。刷盲人巫師之子。充樂工典儀寺。奉殿下之命而行之者也。無籍冒名之徒。怨戶籍之不便於己者曰。道傳之所爲也。盲人巫師以此議爲出於臣而詛之。革私田之議。臣初以爲皆屬公家。厚國用而足兵食。祿士夫而廩軍役。俾上下無匱乏之憂。臣之志也。而志竟不行。尋請殿下免提調官久矣。而分田不均之怨。皆歸於臣。然此小事也。殿下之所明知。臣不得辨焉。況事之大而怨之深者。雖非臣之所知。臣何自而免也。臣死於崔源之遣。則內以正先君之終。上以不欺於天子矣。死於不肯署名之事。則足以明僞辛非玄陵之後矣。死於胡使之却。則上以脫君父之惡名。下以免一國臣民與弑之罪矣。臣身雖死。有不死者存。豈非榮乎。若夫陷於讒謗之口。則上以遺君父不能保全功臣之累。下以招不能明哲保身之議。臣甚懼焉。願殿下解臣見職。以保餘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