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흥 삼군부 사인소 청벽기 략 정축 (義興三軍府舍人所廳壁記略 丁丑 )
권근(權近)
삼가 상고해 보건대 주제(周制)에 대사도(大司徒)의 직책은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로 만민(萬民)을 가르쳐빈흥(賓興)시켰다. 무릇 선비에 어진 사람이 있으면 향대부(鄕大夫)가 그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사도(司徒)에게 올리고, 사도는 또 그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태학(大學)에 올리고, 대악정(大樂正)은 또 그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서 사마(司馬)에게 올렸으니 이것을 진사(進士)라 한다. 사마는 진사 중에 우수한 사람을 뽑고 그 명단(名單)을 써서 임금에게 올리면, 왕은 두 번 절하고 받은 다음, 천부(天府)에 올라가서 그 사람의 적당한 벼슬자리를 의논하여 의논이 결정된 뒤에 벼슬을 주고, 그 자리가 결정된 뒤에 녹(祿)을 주어서 사람 뽑기를 이렇게 자세히 했다. 또 궁백(宮伯)은 왕궁(王宮)의 사서(士庶)로서 등록(登錄)된 사람들을 관리했으니, 적자(嫡子)를 사(士)라 하고, 차자(次子)를 서(庶)라 한다. 왕족(王族)이 아닌 공신의 자손이나 평민(平民)의 준수한 사람들도 모두 태학에 들어가서 도(道)와 예(藝)를 가르치고 궁정(宮庭)의 시위(侍衛)로 보충하여, 모시고 시중드는 사람들까지도 정당한 사람이 아님이 없었다.
지금 대소 관리들의 자제들이 어릴 때에는 제각기 해당한 학교에서 배우고 자라서 벼슬하게 되면 또 삼군부(三軍府)에 오르니, 이 삼군부는 곧 옛날 사마(司馬)의 자리다. 도와 예를 가르쳐서 숙위(宿衛)에 보충하고, 각각 그 재주를 전형한 뒤에 벼슬을 주게 하여 어진 인재는 억울하게 뒤처지는 걱정이 없고 요행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주관(周官)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영문(英文) 신무(神武)하신 자질로 창업하여 왕통을 전하시며, 판부사(判府事) 봉화백 정공 도전은 인후(仁厚)한 덕과 고명(高明)한 학식으로 전하를 도와서, 1대(代)의 법전(法典)을 만들었다. 무릇 만들어 놓은 것은 반드시 주관(周官)의 법도를 근본으로 하였으며, 나라를 세운 규모는 크고도 원대하여 이것을 보면 그 나머지는 환하게 알 수 있다. 정공이 나에게 명하기를, 사인소(舍人所) 벽에 기를 써 붙여서 전하의 어진 사람 찾는 뜻과 사람 만드는 덕을 무궁한 장래에까지 알리게 하라 하므로 근(近)은 감히 문장이 변변치 못하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대강 지금의 제도가 주관(周官)의 제도와 같다는 뜻을 서술하여 기(記)로 삼는다.
義興三軍府舍人所廳壁記略 丁丑○權近
謹按周制大司徒之職。以六德六行六藝。敎萬民而賓興之。凡士之有善。鄕先論其秀者而升諸司徒。司徒又論其秀而升諸學。大樂正又論其秀而升諸司馬曰進士。司馬論進士之賢者。獻其書于王。王再拜受之。登于天府。辨官論材。論定然後爵之。位定然後祿之。擇士取材。如此之詳。又宮伯掌王宮之士庶凡在版者。士謂嫡子。庶謂支庶。非王族則功臣之世。賢者之類。莫不咸在。敎之道藝。以充宮庭之衛。陪僕暬御。無非正人。今大小臣僚子弟之少也。各學於其學。稍長而可仕也。又升於三軍府。今三軍府。卽古司馬之職也。敎以道藝。且充宿衛。各論其材而後爵之。則賢材無沈抑之患。仕進塞僥倖之路。無非周官之遺意也。恭惟我殿下以英文神武之資。創業垂統。而判府事奉化伯鄭公道傳以仁厚之德。高明之學。實贊襄之。以興一代之典。凡所設施。必本於周官法度。立國規模。宏大且遠。擧此可觸其餘矣。鄭公命予誌所壁。以昭殿下求賢之意。作人之德於無窮。近不敢以鄙拙辭。略敍今日之合於周官之意者以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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