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도전 三峯集

368)정도전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중간한 삼봉집의 발 정미 [重刊三峯集跋 丁未]

이름없는풀뿌리 2018. 1. 26. 07:24

중간한 삼봉집의 발 정미 [重刊三峯集跋 丁未 ]

 

 

삼봉의 시문집ㆍ《경제문감》ㆍ《경국전》ㆍ불씨변설과 심ㆍ기ㆍ가 3편은 우리 증조(曾祖) 봉화백 공이 지은 것이다. 공은 고려(高麗) 임인년(1362, 공민왕1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니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서 학문에 힘을 기울여 왔었다. 일찍이 목은 이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니 그때에 호걸(豪傑)들로서 포은 정선생, 도은 이선생, 동헌(桐軒) 윤선생(尹先生 이름은 윤소종(尹紹宗)), 정재(貞齋) 박선생(이름은 의중(宜中)), 호정(浩亭) 하(河)선생(이름은 윤(崙)), 양촌(陽村) 권선생(이름은 근(近)), 척약재(惕若齋) 김선생(이름은 구용(九容)) 같은 이들로 더불어 사우(師友)가 되어 연구 토론하여 들은 것이 더욱 많아지고, 보는 것도 더욱 올바르게 되었으니, 그것이 우러나 말이 되고 문장이 된 것은 왕양혼후(汪洋渾厚)하고 박대기위(博大奇偉 넓고 큰 모습)하여 옛날 사람의 풍도가 있으므로 여러 선생들이 모두 밀어올리고 양보하였다.

고려의 운수가 이미 쇠퇴하고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곳이 생기자,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고 천운을 도와 개국했으니, 계획을 세우고 모든 일을 도와서 법을 만들고 기율(紀律)을 정하며 제례 작악(制禮作樂)한 것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으니, 《경국전(經國典)》이 바로 그것의 대략(大畧)이요,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같은 것은 특별히 여사(餘事)로 된 것이다. 그리고 불씨변설(佛氏辨說)과 심ㆍ기ㆍ가(心氣理) 3편(篇)에 있어서는 성정(性情)의 원리(原理)를 발휘하고, 이단(異端)의 허탄(虛誕)한 것을 배척하여 오도(吾道 유교(儒敎))의 정당한 것과 이단의 편벽된 것을 밝혔으니, 참으로 성인(聖人)의 집 울타리로서 명교(名敎 유교)에 큰 공이 있는 것이다.

 

《경제문감(經濟文鑑)》은 위에서 당ㆍ우(唐虞)로부터 아래로 송ㆍ원(宋元)과 고려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의 상업(相業)과 군도(君道)의 잘하고 잘못한 일들 가운데 모범될 만한 일과 징계할 만한 일들은 모두 엮어 놓았으며, 또 성현의 격언을 그 끝에 붙였으니, 진실로 신하가 되고 임금이 되는 데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치도에 관계되는 바가 지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문집에 다만 시문을 가지고 잘되었느니 못되었느니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 여러 편(篇)들이 옛날에는 판본(板本)이 있었으나 중간에 흩어져 없어진 것이 많았다. 문형(文炯)이 지나간 갑신년(1464, 세조10) 겨울에 외람되게도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은총을 받아 특별히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제수받고, 여러 편들을 한데 모아 1질(帙)로 만들고 안동부(安東府)에서 출간하였다. 그 뒤 수십 년 동안에 서울과 외방으로 벼슬을 옮겨다니며 혹은 그 고을 누대(樓臺)에 써붙인 것을 베껴 오기도 하고, 혹은 친구들이 보관하고 있는 것도 베껴 왔으니, ‘안변루 운을 차함[次安邊樓韻]’ 이하의 시부(詩賦) 1백여 수(首)와 경제문감 별집(經濟文鑑別集)은 간행하려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병신년(1476, 성종7) 겨울에 또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어서 도임하는 날로 즉시 각공(刻工)에게 명령하여 1백 20여 장을 속간(續刊)하고, 안동부에 있는 판본과 합하여 보관하였다.

아! 공이 일찍이 지으신 시에,

 

다만 없어지지 않을 사문을 받아 두는 것은 / 只消不朽斯文在

후일에 마땅히 정가 성 가진 사람이 나올 것일세 / 後日當生姓鄭人

하였으니, 후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었다. 불초한 나는 다행히 집안의 계통을 이어 우연히 등과하여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으니 나의 분수에 너무 지나친 일이다. 그러나 재주가 능히 선조의 뜻을 감당하지 못하고 애오라지 사문(斯文)이나 장래에 전해서 이 큰 기대를 자손 후세에 붙이려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대아 군자(大雅君子)가 있어서 그 사이에 취사(取捨)할 바가 있을 것이다.

 

성화(成化) 23년 정미(성종 18 1487) 3월 하한(下澣).

 

증손(曾孫) 자헌대부(資憲大夫) 행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行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문형(文炯)은 삼가 발함.

 

 


重刊三峯集跋 丁未 [鄭文炯]

三峯詩文集,經濟文鑑,經國典,佛氏辨,說心氣理三篇。我曾祖奉化伯公所著也。公高麗壬寅科進士。少有大志。力學自強。早遊牧隱李先生之門。一時豪傑如圃隱鄭先生,陶隱李先生,桐軒尹先生,貞齋朴先生,浩亭河先生,陽村權先生,惕若齋金先生。師友講論。所聞益廣。所見益正。發而爲言語文章者。汪洋渾厚。博大奇偉。有古作者之風。諸先生咸推讓之。麗運旣衰。天命有歸。推戴我太祖。翊運開國。經綸贊襄。立經陳紀。制禮作樂。皆出公之手。經國典乃其大略也。如詩文雜著。特緖餘耳。若夫佛氏辨說心氣理則發揮性情。擯斥虛誕。以明吾道異端之偏正。眞聖門之藩籬。而其有功於名敎大矣。經濟文鑑則上自唐虞下至宋元。逮及高麗。編列其相業君道之得失可法可戒者。又採聖賢之格言。以附其後。實可謂爲君爲臣之龜鑑。而有關於治道者至矣。非如諸家集只詩文工拙之如何耳。諸篇舊有板本。散落不完。文炯去甲申冬。濫蒙世祖大王恩遇。特受慶尙道觀察使。裒集諸篇爲一帙。刊于安東府。厥後數十餘年間。宦遊京外。或採於州郡之樓題。或得於僚友之所藏。次安邊樓韻以下詩賦百餘首曁經濟文鑑別集。欲刊之者有年。而丙午冬。又爲江原道監司。到界之日。始命工續刊百二十餘張。合置于安東府。嗚呼。公有詩云只消不朽斯文在。後日當生姓鄭人。其期望後嗣者重矣。不肖幸承家緖。偶登科第。輪至宰輔。固已踰分。然才不能以負荷先志。聊壽斯文於將來。付此重望於子孫後世云耳。其必有大雅君子有所取捨於其間者夫。成化二十三年丁未春三月下澣。曾孫資憲大夫行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文炯。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