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병(衛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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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 궁위(宮衛)이다.
궁정(宮正)은 왕궁의 계령(戒令)과 규금(糾禁)을 관장한다.
○ 왕씨(王氏)는 이렇게 말하였다.
“계(戒)는 그 태만하고 소홀함을 경계하는 것이요, 규(糾)는 그 완만하고 산란(散亂)함을 나누어 살피는 것이며, 영(令)은 그렇게 하도록 함이요, 금(禁)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 왕소우(王昭禹)는 이렇게 말하였다.
“시위(侍衛)가 엄하지 않으면 비상에 대비함이 없고, 좌우가 바르지 않으면 근습(近習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을 삼갈 수가 없는 것이니, 하물며 왕궁이란 것은 일을 다스리는 관청이 모두 여기에 모이는데 그 제도를 엄하게 하지 않고서 어떻게 근습을 삼가고 비상에 대비하겠는가? 그래서 선왕(先王)이 인재를 택하되 바른 자로써 하고, 또한 이로 하여금 계령(戒令)과 규금(糾禁)을 맡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한즉, 궁중에 있는 자로서 공정한 선비요,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이 아닌 자가 없을 것이며, 그르고 편벽된 마음이 열릴 곳이 없게 되고, 간악한 변고가 만들어질 데가 없을 것이다.”
내외(內外)를 분변하여 때를 금한다.○ 왕소우는 이렇게 말하였다.
“왕궁의 관부(官府)와 차사(次舍 숙위하는 곳과, 숙위하는 사람이 쉬는 곳)의 사람으로 밖에 있는 자와 안에 있는 자를 분별한다.”
○ 유집중(劉執中)은 이렇게 말하였다.
“궁 안에 있는 자는 판(版)이 있으며, 궁 밖에 있는 자는 적(籍)이 있으니, 적(籍)이 없이 들어오거나, 판(版)이 있으면서도 숙위(宿衛)하지 않는 자는 분변해내어 이를 금하되, 그 때를 잃지 않는다.”
그 십(什 2오(伍)를 십(什)이라고 함)ㆍ오(伍 5인을 1오(伍)라고 함)를 모아서 도예(道藝)를 가르친다.○ 왕소우는 이렇게 말하였다.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쉬우니, 오로지 남을 사랑한 연후에라야 임금을 가까이 모시게 할 수 있으며, 오로지 부리기를 쉽게 한 연후에라야 숙위로서 책임[責]을 어느 본에는 ‘귀(貴)’로 되어 있다. 맡길 수가 있는데, 먼저 그 십(什)ㆍ오(伍)로 모으지 않고서는 서로 권면하고 독려하며 배움에 힘쓰지 않을 것이다.”
궁백(宮伯)은, 왕궁의 사서자(士庶子)로서 무릇 판적[版]에 있는 자를 관장한다.공경(公卿)ㆍ대부(大夫)의 자제가 왕궁에서 수직(守直)하는데, 왕궁의 호위는 스스로 안팎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사서(士庶)는 노침(路寢 정전(正殿), 또는 정침(正寢)) 안에서 지키며, 호분(虎賁)의 관속들은 침문(寢門) 바깥에 있다.
○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자)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士)는 적자(嫡子)를 말하고, 서(庶)는 지서(支庶 장남 이외의 아들과 서자)를 말하는 것이다.”
○ 왕씨(王氏)는 이렇게 말하였다.
“왕족이 아니면 공신(功臣)의 세대로서 어진 사람의 부류인데, 임금이 스스로 가까이하여 호위하도록 하는 까닭에, 군신(君臣)과 국가의 휴척(休戚)이 한 몸이 되어서 상하가 친밀하여 안팎을 살핀다.”
○ 왕소우는 이렇게 말하였다.
“평소에 이들에게 도예(道藝)를 가르쳐서 궁정(宮庭)을 호위하는 데 충당하는 것은 합당하다.”
팔차(八次)ㆍ팔사(八舍)의 직사(職事)를 준다.○ 정강성(鄭康成)은 이렇게 말하였다.
“왕궁을 호위하는 자는 반드시 네 모서리[四角]와 네 가운데[四中]에 거하여 순찰[徼巡]하기에 편리하도록 한다. 차(次)는 그들이 숙위하는 곳이요, 사(舍)는 그들이 휴식하며 목욕하는 곳이다.”
도전(道傳)은 상고하건대, 궁정(宮正)과 궁백(宮伯)은 모두 총재(冢宰)의 소속인데, 선왕(先王)이 병위(兵衛)를 진설(陳設)하면서 모두 총재로 하여금 거느리도록 하였으며, 소공(召公)이 서백(西伯)으로 상(相)을 삼고, 중환(仲桓)ㆍ남궁모(南宮毛)를 명하여 제후(齊侯)여급(呂伋)을 이끌도록 하였는데, 여급은 대사마의 소속이니 또한 명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라, 대개 재상이 숙위를 거느림에 이것이 가장 뜻이 있는데, 유왕(幽王)이 무도하기에 이르러 궁정ㆍ궁백의 직무를 닦지 않고 배복(陪僕 근시(近侍))과 설어(暬御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이 원망하여 흩어지지 않는 자가 없어 주(周)나라가 마침내 쇠약하게 되었다.
한(漢) 남ㆍ북군(南北軍)이다.
남군(南軍)
광록훈(光祿勳)
삼서랑(三署郞)좌서(左署) 기(騎) 80인을 주장한다.
우중랑장(右中郞將)우서(右署) 1천 5백 인을 주장한다.
오관 중랑장(五官中郞將)
좌중랑장(左中郞將)좌서 1백 80인을 주장한다.
거 우기삼장(車右騎三將) 우기(右騎) 9백 인을 주장한다.
이상은 전문 내병(殿門內兵)을 주장한다.
위위(衛尉)
공거사마(公車司馬)관문(關門)의 병(兵)을 주장한다.
남궁위사(南宮衛士) 5백 37인이다.
북궁위사(北宮衛士)4백 72인이다.
우도후(右都候)검극(劍戟) 4백 16인을 주장한다.
좌도후(左都候)검극 3백 83인을 주장한다.
남궁 남둔사마(南宮南屯司馬) 1백 3인이다.
북궁 창룡사마(北宮蒼龍司馬) 동문(東門)을 주관하며, 40인이다.
현무사마(玄武司馬)무문(武門)을 주관하며, 38인이다.
북둔사마(北屯司馬)북문(北門)을 주관하며, 38인이다.
남문 주작사마(南門朱雀司馬) 남액문(南掖門)을 주관하며, 1백 24인이다.
동명사마(東明司馬)동문을 주관하며, 1백 80인이다.
삭평사마(朔平司馬)북문을 주관하며, 2백 17인이다.
이상은 전문 외병(殿門外兵)을 주장한다.
북군(北軍)
중루교위(中壘校尉)
월기교위(越騎校尉)7백 인이다.
보병교위(步兵校尉) 7백 인이다.
장수교위(長水校尉)7백 36인이다.
야성교위(射聲校尉)7백 인이다.
둔기교위(屯騎校尉)7백 인이다.
이상은 경성병(京城兵)을 주장한다.
한 제도에 남ㆍ북군(南北軍)으로 서로 유지하게 하였는데, 여녹(呂祿)은 북군을 관장하였고 여산(呂産)은 남군을 주장한 것과 같은 것이다.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이미 북군을 들여 놓았는데 아직 남군이 있으므로 감히 공언(公言)하여 산(産)을 죽이지 못하고, 위위(衛尉)에게 고하여 산(産)을 전문(殿門)에 들이지 말도록 하니, 산이 미앙궁(未央宮)에 들어와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들어올 수 없었다. 이것이 남군ㆍ북군이 서로 견제한 증험이었다. 무제(武帝)는 정벌하기를 좋아하여 장정군(長征軍)을 두었는데 남ㆍ북군의 제도가 무너져 한실(漢室)이 마침내 이 때문에 쇠약해졌다.
당(唐) 부병제(府兵制)이다.
절충도위(折衝都尉)좌과의도위(左果毅都尉)와 우과의도위(右果毅都尉)이다.
상부(上府) 1천 2백 인.
절충도위. 좌과의도위와 우과의도위이다.
중부(中府) 1천 인. 관중(關中) 5백.
절충도위. 좌과의도위와 우과의도위이다.
하부(下府) 8백 인.
당(唐)의 부병제도는 자못 일컬을 만한 것이 있으니, 그 거처(居處)ㆍ교양(敎養)ㆍ축재(畜財)ㆍ대사(待事)ㆍ동작ㆍ휴식이 모두 절목(節目)이 있었는데, 후세의 자손들이 교만하고 나약하여 그 제도를 삼가 지키지 못하여 부병(府兵)이 폐지되고 방진(方鎭)의 군사가 크게 성하였다.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거동할 적에 겨우 1천여 명이 호위하였고, 숙종(肅宗)이 영무현(靈武縣 숙종이 즉위한 곳.)에 이르렀을 적에 위사(衛士)가 1백도 못 되었으며 덕종(德宗) 건중(建中) 4년에 백지정(白志貞)에게 조서를 내려 신책군(神策軍)을 삼고, 군사를 모집하여 보충하도록 하였는데, 지정이 남몰래 저자 사람[市人]으로 이를 보충하여 이름을 군적(軍籍)에 예속시켰으나 몸은 시사(市肆)에 거하다가 급기야는 경(涇)의 병졸이 난을 일으킴에 금군(禁軍)이 적고 미약하여 비상의 사태에 대비할 만하지 못하였으므로 당나라가 마침내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송(宋) 금군(禁軍)이다.
전전사(殿前司)
봉일지휘(捧日指揮)38
효기지휘(驍騎指揮)32
시위사(侍衛司)
천무지휘(天武指揮)38
용기지휘(龍騎指揮)41
황성사(皇城司)
효건지휘(驍健指揮)42
신위지휘(神衛指揮)46
충좌군사(忠佐軍司)
호익지휘(虎翼指揮)51
웅무지휘(雄武指揮)33
매 1지휘(指揮)마다 보병 1백 19, 기병 72이다.
송(宋)나라는 제도(諸道)의 장리(長吏)에게 조서하여 효예(驍銳 날쌔고 날카로움)한 병사들을 뽑아 궐중(闕中)에 보내도록 하고, 굳센 병사를 경사(京師)에 모아서 친히 군제(軍制)를 정하되 기율을 완비하여 ‘친위전금(親衛殿禁)’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 영(營)에 용호(龍虎)ㆍ일월(日月)의 호칭을 세워서 전전 시위(殿前侍衛) 등 제사(諸司)에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또한 그 등급이 서로 범하는 데 대한 형벌을 준엄하게 만들어서 ‘계급(階級)’이라 하여 윗자리를 범하려는 마음을 끊어 놓았다. 3년에 1수(戍)를 갈마들게 하여 안팎의 경중(輕重)을 고르게 하였다. 숭관(崇觀 숭녕(崇寧)과 대관(大觀)으로 송휘종(宋徽宗)의 연호) 이후로 병폐(兵弊)가 날로 자심하여 계급이 무너지자 기율(紀律) 또한 망했으니, 동관(童貫)이 병권(兵權)을 거머쥐자 패한 것을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금병(禁兵)이 열에 두세 명도 남지 않아, 송나라가 망하였다.본조(本朝) 부병(府兵)이다.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
의흥 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 5영(領)
의흥 친군우위(義興親軍右衛) 5영
응양위(鷹揚衛) 5영
금오위(金吾衛) 5영
좌우위(左右衛) 5영
신호위(神虎衛) 5영
흥위위(興威衛) 5영
비순위(備巡衛) 5영
천우위(千牛衛) 5영
감문위(監門衛) 5영
매 1위(衛)마다 상장군(上將軍) 1원(員), 대장군(大將軍) 2원이고, 매 1령(領)마다 장군 1원, 중랑장(中郞將) 3원, 낭장(郞將) 6원, 별장(別將) 6원, 산원(散員) 8, 위(尉) 20, 정(正) 40인데, 10위 50영으로써 합계 4천 2백 30원이다. 근시(近侍)ㆍ충용(忠勇)으로 명칭한 각각 4위는 이 숫자에 들어 있지 않다. 부병(府兵)을 많지 않게 한 것은 아니나 시위(侍衛)가 허술한 것은, 전조(前朝 고려) 말년의 폐단을 이어받아 그 실상을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은 까닭이다.
본조의 부병(府兵) 제도는 대체로 전조의 구제(舊制)를 이어받았는데, 전조가 융성할 때에는 오로지 부병 외에 다른 군(軍)의 호칭이 없었으면서, 북쪽으로 대요국(大遼國)이, 동쪽으로 여진(女眞)이 외부로부터 침략해 들어오고, 또한 좀도둑[草賊]이 왕왕 나라 안에서 일을 일으켰으니, 밖에서 공격하고 안에서 지키면서 4백여 년을 전해내려 왔은즉, 당시의 부병이 흥성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나라에 큰일이 없으면 병법을 익히고, 일이 일어나되 작은 일이면 낭장(郞將)과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평정하고, 큰일이면 상장군ㆍ대장군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아냈으니, 당시의 부ㆍ장(府將)이 흥성함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을 섬긴 이래로, 매양 조정 안에서 환시(宦寺)와 부녀(婦女)와, 사신으로 오는 자들의 청탁으로 인하여 관작(官爵)이 넘쳤는데, 청탁된 사람들이 모두 부위(府衛)의 관직에 제수되면 세력을 믿고 교만하여 제멋대로 행하면서 숙위(宿衛)를 하려고 들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부위의 법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릇 숙위의 직무를 받은 자가 나라의 녹봉[天祿]만을 도식(徒食)하면서 할 일을 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경시(更始)하셨으매, 백사(百事)가 유신(維新)되었으나 오로지 부위(府衛)의 법만큼은 구습을 인순(因循)하니 그 폐단 또한 여전하여, 신은 적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이 일찍이 전조(前朝)의 역사를 읽고 말하기를,
“사람이 공이 없으면서 녹을 먹을 것 같으면, 벌레가 솔잎을 먹으며 가뭄과 벌레의 재난이 되는 것인데, 전조의 말년에 송충이 크게 번지고 가뭄이 해마다 빈번히 일어났으니, 대개 부위(府衛)의 원(員)ㆍ장(將)이 천록을 도식하면서 그 직분을 다하지 않아서 그 징조가 이와 같았다.”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하늘의 명을 받아 정사를 베풂이 혁연하시니, 의당 구폐를 혁파하고 나라의 근본을 무겁게 하여 천재(天災)가 없어지게 하여 유신(維新)의 다스림에 이르도록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폐단을 개혁하는 것은 강명(剛明)한 임금과 영렬(英烈)한 보좌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 한문제(漢文帝)는 송창(宋昌)을 위장군(衛將軍)으로 임명하여 남ㆍ북군(南北軍)을 진무시켜서 나라의 세력이 크게 떨쳐졌으며, 당순종(唐順宗)은 한태(韓泰)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았는데, 금군(禁軍)의 여러 장수가 이르지 않고, 모르는 자들은 모두 태(泰)가 사람을 가벼이 여긴다 하여 불복하고, 아는 이들은 순종이 군정(軍政)에 실패하였음을 웃었으니, 이제, 주상(主上)께서는 강명(剛明)한 임금이신데 신은 범용(凡庸)한 재질로 중한 소임을 맡았으매, 한태와 같은 웃음거리를 끼쳐드릴까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송창과 같이 위혜(威惠)와 지용(智勇)이 있는 자에게 명하시어 부위(府衛)의 구폐를 혁파하시고 일대(一代)의 정제(定制)를 세우도록 하신다면 나라에 큰 다행이겠습니다.본조의 부병 개제(府兵改制)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는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로 개정한다.
의흥친군우위(義興親軍右衛)는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개정한다.
응양위(鷹揚衛)는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개정한다.
금오위(金吾衛)는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로 개정한다.
매 1사(司)마다 각각 중(中)ㆍ좌(左)ㆍ우(右)ㆍ전(前)ㆍ후(後)의 5영(領)을 두고, 중군(中軍)에 소속시킨다.
좌우위(左右衛)는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로 개정한다.
신호위(神虎衛)는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로 개정한다.
흥위위(興威衛)는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로 개정한다.
매 1사마다 또한 각각 5영을 두고, 좌군(左軍)에 소속시킨다.
비순위(備巡衛)는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로 개정한다.
천우위(千牛衛)는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로 개정한다.
감문위(監門衛)는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로 개정한다.
매 1사마다 또한 각각 5영을 두고, 우군(右軍)에 소속시킨다. 이상의 시위(侍衛)와 순위(巡衛) 10사(司)에, 매 1사마다 인신(印信) 1과(顆)를 만들어 주고, 도위사(都尉事)가 관장하게 한다.
상장군(上將軍)은 도위사(都尉使)로 개정한다.
대장군(大將軍)은 도위첨사(都尉簽事)로 개정한다.
도호(都護)의 여러 위장군(衛將軍)은 중군사마(中軍司馬)로 개정한다.
좌군사마(左軍司馬)ㆍ우군사마이다.
장군은 사마(司馬)로 개정한다.
중랑장은 사직(司直)으로 개정한다.
낭장은 부사직(副司直)으로 개정한다.
별장은 사정(司正)으로 개정한다.
산원은 부사정(副司正)으로 개정한다
위(尉)는 대장(隊長)으로 개정한다.
정(正)은 대부(隊副)로 개정한다.
도부(都府) 외에는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중군 사직 1, 부사직 1, 사정 2, 부사정 3, 대장 20, 대부 20.
좌군 사직 1, 부사직 1, 사정 2, 부사정 3, 대장 20, 대부 20.
우군 사직 1, 부사직 1, 사정 2, 부사정 3, 대장 20, 대부 20.
매 1사마다 도위사 1, 도위첨사 2.
매 1령마다 사마 1, 사직 3, 부사직 5, 사정 5, 부사정 7, 대장 20, 대부 20.
예부터 나라를 위하는 자는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였으니, 이 두 직분은 사람의 양팔과 같아서 기울거나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조에 이미 백사(百事)ㆍ서부(庶府)가 있고, 또 여러 위(衛)와 각 영(領)이 있음은 문무(文武)의 직분을 갖춘 것인데,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저 전조의 옛제도를 이어받았으매, 전조가 융성할 시기에는 부병(府兵)이 자못 당제(唐制)의 뜻을 얻어 볼 만한 것이 있었으나, 오래 되고 보니 그 제도가 크게 무너져 마침내는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습니다.전하께서 하늘의 명을 받으사, 하시는 바가 혁연(赫然)하시매, 의당 구폐(舊弊)를 혁파하고 나라의 형세를 무겁게 하여 유신(維新)의 다스림에 이르게 되어야 할 것인데, 사람의 견문이 옛것에 익숙하여 쌓이고 쌓인 폐단을 혁파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자(王者)가 하늘의 명을 받아 임금이 되면 반드시 복색을 바꾸고 휘호(徽號 정기(旌旗)의 등속)를 바꾸었음은 한 가지로 듣고 봄이 옛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세우기 위한 까닭이었으니, 이리하여 송태종(宋太宗)은 아름다운 명칭으로 금군(禁軍)의 옛 호칭을 바꾸어 고쳐 사기를 새로이 진작시켰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이미 동반(東班)의 관명(官名)과 직호(職號)를 하나같이 모두 고쳐 정하여 명칭에 따라서 실제의 직분을 맡기시매 백관이 일을 쫓아 공(功)에 이르렀으나, 오로지 부위(府衛)의 칭호만큼은 남겨두어 구폐 또한 여전히 남았은즉, 신의 직분이 삼군(三軍)을 관장함에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10위(衛)를 시위(侍衛)ㆍ순위(巡衛)의 여러 사(司)로 나눈 것은 대개 한조(漢朝)의 남북군(南北軍)의 유제(遺制)를 법받은 것이니, 한(漢)의 남군은 궁문의 시위를 관장하고, 북군은 도성(都城)의 순검을 관장토록 하였은즉, 이에 안팎이 서로 견제하여 길이 다스려지고 오래도록 태평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았음은 이미 밝히 징험된 바입니다.
이제 의흥(義興)ㆍ충좌(忠佐)ㆍ웅무(雄武)ㆍ신무(神武)를 시위사(侍衛司)로 삼아 중군(中軍)에 예속시켜서,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로써 하고, 도위사(都尉使)ㆍ도위첨사(都尉簽事)가 각각 그 영(領)을 통솔하여, 사마(司馬) 이하가 궐내를 번갈아 시위하게 하였으니, 이는 한(漢)의 남군의 제도를 본뜬 것이며, 용양(龍驤)ㆍ용기(龍騎)ㆍ용무(龍武) 및 호분(虎賁)ㆍ호익(虎翼)ㆍ호용(虎勇)을 순위사(巡衛司)로 삼아 좌ㆍ우군(左右軍)에 예속시키고 도위사ㆍ도위첨사가 그 영(領)을 부려서, 사마 이하가 4대문에서 파수하며 교대로 순찰하되 번갈아서 당직에 들어 순찰[巡綽]하게 하였으니, 이는 한(漢)의 북군의 제도를 본딴 것으로서, 그 당번이 된 각 사(司)는 도위사 이하 의흥(義興) 3군부가 시각을 정해 명령을 내려서 알려주어, 이를 어기거나 잘못되지 않도륵 하고, 무릇 입직하는 자는 까닭없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여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줄 것입니다.
周宮衛宮正掌王宮之戒令糾禁
王氏曰。戒。戒其怠忽。糾。糾其緩散。令。使之有爲。禁。使之勿爲。○王昭禹曰。侍衛不嚴。無以備非常。左右不正。無以謹近習。況王宮者。百官之治事皆會于此。不嚴其制。何以謹近習而備非常。先王擇人以爲之正。又使之掌戒令糾禁焉。如此則在宮中者。無非公正之士。忠義之人。非僻之心。無自而啓。姦宄之變。無自而作。
辨內外而時禁王昭禹曰。王宮之官府。與夫次舍之人。在外者在內者。○劉執中曰。在內者有版。在外者有籍。無籍而入。有版而不宿衛者。辨而禁之。不失其時。
會其什伍而敎之道藝王昭禹曰。君子學道則愛人。小人學道則易使。惟愛人然後可以使之近君。惟易使然後可責 一本作貴以宿衛。然不先會其什伍則莫相勸督而務學。
宮伯掌王宮之士庶子凡在版者公卿大夫之子弟。守在王宮。王宮之衛。自分內外。士庶之守。在路寢內。虎賁之屬。在寢門外。○鄭康成曰。士謂嫡子。庶謂支庶。○王氏曰。非王族則功臣之世。賢者之類。王以自近而衛焉。故君臣國家。休戚一體。上下親而內外察。○王昭禹曰。平時敎之道藝。以之充宮庭之衛宜也。
授八次八舍之職事鄭康成曰。衛王宮者。必居四角四中。於徼巡便也。次。其宿衛所在。舍。其休沐之處。道傳按。宮正,宮伯。皆冢宰之屬。先王陳設兵衛。皆使冢宰統之。召公以西伯爲相。命仲桓,南宮毛俾爰齊侯呂伋。呂伋大司馬之屬。亦須命而後行。蓋宰相統宿衛。此最有意。及幽王無道。不修宮正宮伯之職。陪僕暬御。莫不怨而散之。周遂以衰。
漢南北軍南軍
光祿勳
三署郞主左署騎八十人右中郞將主右署千五百人五官中郞將左中郞將主左署百八十人車右騎三將主右騎九百人
右主殿門內兵
衛尉
公車司馬主闕門兵南宮衛士五百三十七人北宮衛士四百七十二人右都候主劍戟四百十六人左都候主劍戟三百八十三人南宮南屯司馬百三人北宮蒼龍司馬主東門四十人玄武司馬主武門三十八人北屯司馬主北門三十八人南門朱雀司馬主南掖門百二十四人東明司馬主東門百八十人朔平司馬主北門二百十七人
右主殿門外兵
北軍
中壘校尉
越騎校尉七百人步兵校尉七百人長水校尉七百三十六人射聲校尉七百人屯騎校尉七百人
右主京城兵
漢制。南北軍以相維持。如呂祿將北軍。產將南軍。太尉周勃已入北軍。尙有南軍在。未敢誦言誅產。告衛尉毋納產殿門。產欲入未央宮爲亂。不得入。此南北軍相制之驗也。及武帝好征伐。置長征軍。而南北軍制壞。漢室遂以衰。唐府兵制折衝都尉左果毅都尉。右果毅都尉。上府千二百人折衝都尉左果毅都尉。右果毅都尉。中府千人關中五百折衝都尉左果毅都尉。右果毅都尉。下府八百人
唐府兵之制。頗有足稱。其居處敎養畜財待事動作休息。皆有節目。後世子孫驕弱。不能謹守其制。府兵廢而方鎭之兵太盛。玄宗幸蜀。纔千餘人。肅宗赴靈武。衛士不滿百。德宗建中四年。詔以白志正爲神策軍。使募兵蒐補。志正陰以市人補之。名隸軍籍而身居市肆。及涇卒作亂。禁軍寡弱。不足備非常。而唐卒至於亡。宋禁軍殿前司
捧日指揮三十八驍騎指揮三十二
侍衛司
天武指揮二十五龍騎指揮四十一
皇城司
驍健指揮四十二神衛指揮四十六
忠佐軍司
虎翼指揮五十一雄武指揮三十三
每一指揮。步兵百十九。騎兵七十二。
宋詔諸道長吏。送其驍銳於闕中。聚勁兵於京師。躬定軍制。紀律詳盡。製親衛殿禁之名。其營立龍虎日月之號。分領於殿前侍衛等諸司。又峻其等級相犯之刑。謂之階級。以絶其犯上之心。三年一戍。更出迭八。內外輕重均矣。崇觀以後。兵弊日滋。階級旣壞。紀律亦亡。童貫握兵。恥於言敗。禁兵十無二三而宋亡。本朝府兵義興三軍府
義興親軍左衛五領義興親軍右衛五領鷹揚衛五領金吾衛五領左右衛五領神虎衛五領興威衛五領備巡衛五領千牛衛五領監門衛五領
每一衛。上將軍一員。大將軍二員。每一領。將軍一員。中郞將三員。郞將六員。別將六員。散員八。尉二十。正四十。以十衛五十領。合計四千二百三十員。名其近侍忠勇各四衛。不在此數。府兵不爲不多。而侍衛虛疏。承前朝季世之弊。不核其實故也。
本朝府兵之制。大抵承前朝之舊。然前朝盛時。唯府兵外無他軍號。北有大遼。東有女眞。侵掠於外。又有草賊往往竊發於中。外攻內守。傳至四百餘年。當時府兵之盛可知。無事則肄習兵法。有事小則遣郞將別將平之。大則遣上大將軍將軍禦之。當時府將之盛。亦可知矣。自忠烈王事原以來。每因中朝宦寺婦女奉使者之請。官爵泛濫。皆以所託之人除府衛職。恃勢驕蹇。莫肯宿衛。由是府衛法始壞。凡受宿衛之職者。徒食天祿。不事其事。遂至失國。今殿下受命更始。庶事維新。唯府衛之法因循舊習。弊亦如前。臣竊惜之。某嘗讀前朝之史曰。人無功食祿。蟲食松葉。旱蟲爲災。前朝之季。松蟲大蕃。旱氣頻年。蓋府衛員將徒食天祿。不事其職。厥徵如是。今殿下受命。赫然有爲。宜革舊弊。重國本弭天災。以致維新之治可也。然革深弊者。非剛明之主。英烈之佐。不能也。昔漢文帝拜宋昌爲衛將軍。鎭撫南北軍。國勢大振。唐順宗拜韓泰爲行軍司馬。禁軍諸將不至。不知者皆謂泰輕人不服。知者笑順宗之失軍政也。今上有剛明之主。臣以凡庸當重任。恐貽韓泰之譏。伏望殿下命有威惠智勇如宋昌者。革府衛之舊弊。立一代之定制。國家幸甚。本朝府兵改制義興親軍左衛改義興侍衛司義興親軍右衛改忠佐侍衛司鷹揚衛改雄武侍衛司金吾衛改神武侍衛司
每一司。各置中左右前後五領。屬中軍。
左右衛改龍驤巡衛司神虎衛改龍騎巡衛司興威衛改龍武巡衛司
每一司。亦各置五領屬左軍。
備巡衛改虎賁巡衛司千牛衛改虎翼巡衛司監門衛改虎勇巡衛司
每一司。亦各置五領屬右軍。右侍衛巡衛等十司。每一司印信一顆鑄給。都尉使掌之。
上將軍改都尉使大將軍改都尉簽事都護諸衛將軍改中軍司馬
左軍司馬右軍司馬
將軍改司馬中郞將改司直郞將改副司直別將改司正散員改副司正尉改隊長正改隊副都府外
改中軍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
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
左軍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
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
右軍司直一副司直一司正二
副司正三隊長二十隊副二十
每一司都尉使一都尉簽事二每一領司馬一司直三副司直五
司正五副司正七
隊長二十隊副四十
自古爲國者。文以致治。武以戡亂。兩職如人兩臂。不可偏廢。故本朝旣有百司庶府。又有諸衛各領。所以備文武之職也。然府兵之制。大抵承前朝之舊。前朝盛時。府兵頗得唐制之意。有足觀者。及其久也。其制大壞。遂至失國。殿下受命。赫然有爲。宜革舊弊。以重國勢。以致維新之治。然人見聞習熟。積弊難革。故王者受命。必變服色。易徽號。所以一視聽。革舊而鼎新也。是以。宋太宗以美名改易禁軍舊號。作新士氣。今我殿下。已將東班官名職號。一皆更定。循名責實。百官趨事赴功。獨於府衛稱號仍舊。弊亦如前。臣職掌三軍。不可不慮。今將十衛分爲侍衛,巡衛諸司。蓋法漢朝南北軍之遺制也。漢南軍掌宮門侍衛。北軍掌京城巡檢。此內外相制。長治久安。禍難不生。已然明驗。今將義興,忠佐,雄武,神武爲侍衛司。屬中軍。以寅申巳亥。都尉使都尉簽事各率其領。司馬以下。闕內輪番侍衛。以效漢南軍之制。龍驤,龍騎,龍武及虎賁,虎翼,虎勇爲巡衛司。屬左右軍。都尉使都尉簽事使其領司馬以下。於四大門把截更巡。輪番上直巡綽。以效漢北軍之制。其當番各司都尉使以下義興三軍府以時知委。毋致違誤。凡入直者。不許無故出入。違者罪之。
[주D-001]팔차(八次) : 왕궁을 숙위하는 여덟 곳. 궁궐의 네 모퉁이와 중앙 네 곳.
[주D-002]팔사(八舍) : 왕궁(王宮)의 동ㆍ서ㆍ남ㆍ북과, 동북ㆍ동남ㆍ서남ㆍ서북의 여덟 모퉁이에 있는 휴목(休沐)하는 장소.
[주D-003]현종(玄宗)이 촉(蜀)으로 거동할 적에 : 당현종(唐玄宗) 14년(755)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듬해 입관(入關)하자 현종은 촉(蜀)으로 피난한 사건.
[주D-004]백지정(白志貞) : 원문에는 백지정(白志正)으로 되어 있으나 《당서(唐書)》에 ‘貞’으로 되어 있다.
[주D-005]경(涇)의 병졸이 난을 일으킴 : 당덕종(唐德宗) 4년(783) 이희열(李希烈)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王)을 참칭하자, 경원(涇原) 등지의 군사로 이를 쳤으나 실패했다. 뒤에 덕종이 봉천(奉天)으로 피난하려 하자, 이들 군인들이 절도사 장일(張鎰)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唐書 卷12 德宗本紀》
[주D-006]동관(童貫)이 병권(兵權)을 거머쥐자 패한 것을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 동관(童貫)은 송휘종(宋徽宗) 때 환관.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병권을 장악하여 흉노를 치러 하롱(河隴)으로 들어가 고골룡(古骨龍)에 이르러 장수 유법(劉法)을 시켜 삭방(朔方)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이겼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다. 그 후 군정이 문란해져 금군(禁軍)이 다 도망하였다. 《宋史 卷468 童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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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6]동관(童貫)이 병권(兵權)을 거머쥐자 패한 것을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 동관(童貫)은 송휘종(宋徽宗) 때 환관.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병권을 장악하여 흉노를 치러 하롱(河隴)으로 들어가 고골룡(古骨龍)에 이르러 장수 유법(劉法)을 시켜 삭방(朔方)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이겼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다. 그 후 군정이 문란해져 금군(禁軍)이 다 도망하였다. 《宋史 卷468 童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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