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공(上供)
인군은 광대한 토지와 많은 인민을 전유하니, 그 소출의 부(賦)는 무엇이든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게 없고, 무릇 나라의 경비도 무엇이든 자기의 소용이 아닌 게 없다. 그러므로 인군에게는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상공(上供)과 국용(國用)을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음식과 의복은 왕의 봉양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요, 분반(匪頒)은 왕의 사여(賜與)를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요, 진보(珍寶)는 왕의 완호(玩好)를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상공이라고 부른다.
《주례》로 상고하면, 각기 담당 관리를 두어서 상공에 필요한 물품의 출입과 회계를 맡게 했으나 인주가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소비가 무절제하게 될지도 모르고, 또 담당 관리가 부정한 짓을 행하여 재물이 축나게 될지도 모를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총재로 하여금 총괄하여 절제하게 하여, 비록 인주가 사사로 쓰는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유사의 경리와 관계를 갖도록 하였다.
한나라와 당나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천자가 사유 재산을 갖게 되어, 군국의 재정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재산의 출처를 보면, 산해(山海)나 어장에서 나오는 물산으로부터 세로 받아들인 것, 또는 주군에서 바친 사적인 헌물, 또는 백성들이 바친 상부(常賦)에서 액수가 초과되어 남은 것 등으로서, 국가의 경리에서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통섭(統攝)하여 국가 재정과 서로 엇갈리지 않게 하였으며, 흉년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그 재산을 내어서 굶주리는 사람과 군인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식자들은 천자가 사유 재산 가진 것을 비난하여,
“인군이 가인(家人)이나 근신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하여 사인(私人)을 두게 되고, 사인을 두게 되니 사비(私費)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사유 재산을 갖게 되는 것인데, 만사의 폐단은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게 없다.”
하였으니, 경계함이 이렇듯 지극하였다.
전조에서는 요물고(料物庫)를 두어 왕실에 대한 식량 조달을 관장하게 하고, 사선서(司膳署)로 하여금 각종 반찬을 장만하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사온서(司醞署)에서는 술과 단술을 맡게 하고, 내부(內府)에서는 포백(布帛)ㆍ사면(絲綿)을 맡아서 의복을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사설서(司設署)에서는 장막과 요[褥]를 맡아서 포설(鋪設)을 제공하게 하였다. 이들 관서는 모두 조사(朝士)가 맡게 하였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수시로 감독하여 물품의 남고 모자라는 수량을 조사하게 하였으니, 《주관(周官)》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할 만하다.
충렬왕(忠烈王) 이래로 원(元)나라를 섬기기 시작하여 대대로 공주(公主)를 맞이하자 궁중 하인에 대한 비용이 많아지고, 연경(燕京)에 친조(親朝)하거나 그곳에 머무르면서 시위할 적에는 노비 등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덕천고(德泉庫)ㆍ의성고(義成庫) 따위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소속된 토지ㆍ노비ㆍ재산 등은, 혹은 내탕(內帑)의 일부를 떼어 팔아서 마련하거나, 혹은 왕씨 외가(外家)의 세업이거나 소출, 혹은 죄인에게서 몰수한 재산이거나 하여 국가의 경리와는 관계가 없었는데, 마침내는 인주의 사유 재산이 되어 버렸다.
전하는 잠저에 있을 때부터 헌의(獻議)하여, 이러한 사유 재산을 모두 혁파해서 국가 재산으로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당시의 집권자가 이것을 완강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혁파된 것이 열에 네댓은 더 되었다. 즉위한 뒤에는 5고(庫)와 7궁(宮)을 모두 공용으로 귀속시켰다.
옛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부(少府)의 금전(禁錢)을 혁파하여 대사농(大司農)에 귀속시켜 공용으로 충당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사신(史臣)이 이를 칭송하여,
“능히 한 사람 개인의 사사로움을 극복하였다.”
하였다. 이제 전하의 처사를 옛날의 광무제의 그것에 견주어 보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다만 즉위 초에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무척 많고 그에 따라서 용도도 크게 불어났으나, 출납할 즈음에 유사가 지나치게 법문에만 구애되어 충분히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일의 기회를 놓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법문을 적당히 가감 손질하였으니, 즉위 초에 내린 교서(敎書)와는 같지 않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편의를 따른 것뿐이고, 그 성법은 고치지 않았다. 신은 여기에서 상공에 관한 것을 적고 따라서 그 내용을 설명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절검을 존중하고 사리사욕을 극복한 전하의 훌륭한 뜻을 알게 하는 바이다.
上供
人君。專土地之廣。人民之衆。其所出之賦。何莫非已分之所有。凡國之經費。何莫非已分之所用。故曰人君無私藏。此書曰上供曰國用。岐而言之。亦有說乎。飮膳衣服。所以供王之奉養也。匪頒。所以供王之賜與也。珍寶。所以供王之玩好也。是數者。今皆謂之上供。考之周禮。各置司存以掌其出入會計之數。尙慮人主侈心之生而費之無節。掌吏肆其姦欺而失於滲漏。於是。以冢宰摠而制之。雖似人主之私用。實通於有司之經理。至漢唐。始有天子私藏之名。與軍國之用不相通。然其財之所出。或稅山海澤藪之物產。或得州郡之私獻。或稱常賦之羨餘。未嘗取於經理之賦。而猶有統攝。不相侵紊。其遇凶荒軍旅之事。出其財而贍之。識者尙且非之曰。人君不能正其家人。近習之故而有私人。旣有私人。不能無私費。於是有私財。萬事之弊。莫非由此而出。其爲戒也至矣。前朝之制。置料物庫。掌饋食之粟。司膳掌饔餼膳羞之烹熟。司醞掌酒醴。內府掌布帛絲綿以供衣服。司設掌帳幕床褥以供鋪設。皆以朝士職之。憲司以時體察。稽其盈縮之數。可謂得周官之意矣。自忠烈以下。臣事原朝。世降公主。宮掖之費爲多。或朝燕京。留侍都下。其道路之費。盤纏之用。在所當辦。於是始置德泉義成庫之屬。然其田口貲資。或損內帑以鬻之。或出於王氏外家之世業。或出籍沒之家。不在經理之數。而遂爲人主之私藏也。殿下在潛邸。獻議欲盡革之。歸之國用。當國者持之甚力。故不克如志。然因是而革去者不啻十四五。及卽位。以五庫七宮。悉歸之公用。昔光武罷小府禁錢歸之大司農。以充公用。史臣美之曰。能絶一己之私。以今方古。實無愧焉。第緣卽位之初。草創更始。庶事繁浩。用度甚廣。而其出納之際。有司拘於文法。或不能給。事機多失。於是斟酌損益。與卽位之敎不同者有焉。然權一時之宜耳。其成法則未嘗改也。臣於此。一以上供書之。從而著其說。俾後之人。知殿下節儉克私之美意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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