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 여행 13_1) 가보지 못한 곳, 그리고 우리의 산야와의 비교
13_1_1) 장가계 Scheme - 정리할 겸 -
후난성 면적 21만㎢, 한반도 면적 22만㎢ 서로 비슷,
산과 구릉80%, 평야20% 구성비도 비슷,
인구는 후난성 6,440만명, 한반도 약7,500만으로 비슷,
상당히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라 하겠다.
후난성은 41개의 민족으로 구성, 그 중 90%(5,800만)가 한족 임.
장가계시의 풍경명승지 전체 면적은 500㎢로 서울의 8배,
총 인구는 153만명이며, 20여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총 인구의 69%가 우리 겨레인 동이족(東夷族)계인 토가족(土家族, 93만명),
백족(白族, 10만명), 묘족(苗族, 2.7만명) 등 소수민족이란다.
이 중에서도 무릉원 풍경구는 면적이 392㎢로, 동서 길이가 31㎞, 남북이 15.5km.
장가계시의 대부분이 무릉원 풍경구에 속함.
무릉원은 장가계, 삭계욕, 천자산 및 양가채 풍경구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장가계 풍경구를 지칭하는 말이란다.
이 풍경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의 면적은 264㎢,
풍경구내에서 가장 높은 곳은 토끼 모양의 망월봉으로 해발 1,264.5m,
가장 낮은 곳은 삭계하곡으로 해발 320m로 표고차가 940m에 이른단다.
풍경구는 300여 개의 경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암으로 이루어진 3,000여 개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있으며,
산지의 80%이상이 석영사암(石英沙岩)으로 되어 있어 침식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사암의 봉림(峰林, 봉우리 숲)과 협곡을 형성,
각기 우뚝우뚝 솟아 수백 가지 형상을 이루어 천여 개의 못, 호수, 시내, 폭포 등이
함께 어우러져 천하절경의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단다.
장가계 풍경구는 중국인들도 계림, 구채구(九寨溝), 황산과 함께
최고의 경치가 있는 자랑스러운 자연문화의 遺産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13_1_2) 가 보지 못한 곳
이렇게 방대한 장가계 면적 중 우리가 둘러 본 곳은
주로 무릉원구에 속한(천문산은 무릉원구 밖)
보봉호(寶峰湖), 황룡동, 대협곡,
십리화랑, 원가계(미혼대, 천생교),
황석채(黃石寨, 오지봉, 적성대)등이었는데
아쉽게도 최근 개발 되었다는 양가계(楊家界)는 케이블카로 지나치는 정도였고
십리화랑 못지 않게 계곡 양 옆으로 수 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금편계(金鞭溪)마저도
입구에서 봉우리 몇 개 바라보는 일정이어서 아쉬웠다.
이외에도 우리가 가 보지 못한
무릉원내의 천자산, 비파계(瑟琶溪), 사도구(沙刀溝), 요자채(腰子寨), 양가채(楊家寨)등과
무릉원 밖의 옥황동(玉黃洞), 구천동(九天洞), 팔대공산(八大公山), 오뢰산(五雷山),
모암하(茅巖河), 하용고거(賀龍故居)등의 명승지가 500㎢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장가계 전체 면적의 10%정도만 관광지로 개방하고 있다고 하니
장가계가 얼마나 방대한지 짐작할 것 같다.
13_1_3) 우리의 산야와 비교
장가계는 3억8천만년 전 바다였던 지형이
오랜 지각 변동과 지질 작용으로 융기, 침식되어 현재의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장가계 기반이 석영사암(石英沙岩)질의 부석부석하고 연약한 지질이지만
우리의 지질은 약 2억년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지하 4-12km이하에서 용암이 관입하여 거대한 압력으로 굳어진 화강암 기반이다.
그러한 화강암 기반을 누르고 있던 지표 4-12km의 어머어마한 겉껍질이
오랜 지각 변동과 지질 작용으로 벗겨지고 풍상에 침식, 마모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화강암(花崗岩)질의 봉우리들이 노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강도가 약한 장가계 지질과 암석중 제일 단단하다는 화강암 기반을
가진 우리의 지질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장가계가 석회암계의 천하절경임에 틀림없으나
화강암으로 역시 천하절경을 자랑하는 우리의 금강산, 설악산, 속리산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으며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본다.
더구나 장가계 물은 석회암질이 물에 계속 녹아들고 있어 먹을 수 없지만
화강암 기반을 흐르는 우리의 계곡수나 지하수는 얼마든지 직접 먹을 수 있다.
장가계가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자연문화유산이라지만
절벽잔도, 케이블카등으로 산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알량한 사람 위주로, 혹은 돈 버는 상혼주의로 개발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시설물을 함부로 내지않고 절벽잔도 같은 것은 생각도 않는다.
가령 삼각산 인수봉에 케이블카가 생기고
잔도(棧道)가 건설되었다고 가정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그런 끔찍한 일이 강서성 삼청산, 안휘성 황산등지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나(支那)의 실정이다.
바라건대 10%만 개발 되었다는 장가계에서는
이쯤에서 그런 개발은 멈추고 나머지 90%는 그대로 두던지
친자연적인 개발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화강암에는 지자기(地磁氣)가 흐르고 있어
입산하여 항상 마당바위에 앉아 수련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화강암을 가진 우리이기에 산수가 좋고 인재가 좋아
공자(孔子)님도 동이(東夷)의 나라에 가 살고 싶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배달9215/개천5916/단기4351/서기2018/04/28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장가계 가 보지 못한 곳
■ 양가계(楊家界)
삼림 공원 입구에서 양자제쒀다오(杨家界索道)행 셔틀버스를 타고
룽펑옌샤(龙凤庵下) 정류장 하차, 룽펑옌상(龙凤庵上) 정류장으로
10분 정도 도보 이동하여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케이블카 탑승장에서 하차.
가장 늦게 개발되어서 호젓한 분위기가 남아 있다. 원가계와 톈쯔 산에서
북적이는 인파에 지쳤다면 이곳에서 한숨 돌릴 수 있다.
다른 풍경구의 봉우리들이 야구 방망이처럼 둥그스름한 반면,
양가계는 마름모와 부채꼴 등 다양하고 거친 매력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다.
2014년에 케이블카를 설치해서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안전을 위한 잔도와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지만, 좁고 경사진 길이 많아서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에는
추천하지 않으며, 어른들도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삭도를 타고 내려오며 보니 발 아래 천연장성으로 부터 내려가는 길이 보였는데 삭도를
타지 말고 걸어 내려가면서 양가계 명소를 보아야 양가계에 왔다고 할 것임을 알겠다.)
양가계는 원가계와 천자산 중간 지대에 위치한 비경지로
북송시대 때 양씨성의 장군이 산적을 토벌하러와서 이곳에 진영을 구축했는데
전투가 길어지자 양씨 가문이 여기서 자손을 낳게 되고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어 촌락을 이루자 1,000년이 넘도록 살게되어
여기를 양가계로 했다고 한다. 양가계에는 양천봉을 비롯해
8개의 웅장한 석봉(石峰)이 있는데 양씨 가문의 8명 장군을 상징한다.
천연장성(天然長城)
천파부(天波府)
오룡채 옆에 있는 고공 전망대.
경사가 90°에 가까운 철계단을 따라 절벽을 올라간다.
좁은 전망대에 서면 360°로 양가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게 매력이다.
구름이라도 낀 날에는 하늘에 홀로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묘한 느낌이 든다.
오룡채와 천파부를 돌아보는데 2시간쯤 걸린다.
오룡채(乌龙寨)
일찍이 산적들의 요새였던 오룡채는 해발 1,142m에 위치했다.
약 1km 가파른 산길을 따라 허리를 숙이고, 때로는 게처럼 옆으로 절벽에
바짝 붙어서 걸어야 한다. 양가계에서 제일 험한 구간으로, 천혜의 요새라는게 실감난다.
일보등천(一步登天)
‘한 발 내딛으면 하늘로 오른다.’라는 뜻의 봉우리로,
해발 1,130m이며 32개의 철계단이 정상으로 안내한다. 평평한 정상에는 길이 15m,
폭 4m에 달하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다채로운 모양의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동남쪽으로 황석채 풍경구가 보인다.
공중주랑(空中走廊)
일보등천에서 돌계단 길을 20분 걸어 도착한다.
길이 300m 가량의 잔도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이곳을 공중주랑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왔던 길을 되돌아 30분쯤 가면 왼편에 길 하나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서 15분 정도 걸으면 오룡채 교차로가 나온다.
거기서 셔틀을 타고 톈쯔 산의 허룽 공원으로 이동한다.
■ 금편계(金鞭溪)
금편계곡은 장가계 삼림공원의 동부에 위치해 있고,
금편이라는 이름은 금편암을 지나서 흐른다는 데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서쪽으로는
비파계로 모여들고, 동쪽으로는 삭계로 들어가는 한줄기의 깊고 요한 협곡이다.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늘어서 있는 돌길은 전체 길이가 7.5KM로,
통과하는 데에 약 2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른 아침 금편계곡을 따라
2시간여 걷는 산책길은 가히 무릉도원을 느끼게 한다.
금편 대협곡이라고도 한다. 삼림 공원 입구에서 ‘수요사문(水绕四门)’까지
길 양쪽으로 기이한 봉우리들이 이어지며 무척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천리상회(千里相会)’, 낙타를 닮은 ‘낙타봉(骆驼峰)’이 특히 유명하다.
부부암, 묘자채, 문성암(로신 소설가), 쌍구탐계(거북이 두 마리가 시냇물을 바라봄),
화과산(손오공 탄생), 천리만남 (남녀 형상화), 중환수(헤어져 다시만남)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장가계삼림공원 입구에서 바라보면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데 부부암(夫妻岩)이라고 불린다. 하나는 남자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모양으로 서로 몸을 기대고 있으며 눈, 코, 머리카락, 입술 등이
똑똑하게 구분된다. 입구에서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다.
옆에 천여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고,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공기가 상쾌하며 한적하다.
금편계곡을 따라 걷다가 쭉 올라가면 원가계로 이어집니다.
산책로를 따라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드리운 나무들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에 마음의 때가
씻겨 내려간 것처럼 상쾌해서 걷기 좋다. 걷다가 힘들면 가마를 이용할 수도 있는데,
바가지를 쓰지 않으려면 금액을 확실히 정하고 출발하자.
나무 그늘이 많아서 미끄러운 구간이 있으니 주의할 것.
중간에 지나는 원숭이 숲(猴子林)에는 실제로 원숭이가 무척 많다.
간식이나 물건을 빼앗기지 않도록 유의하자.
1) 금편계곡으로 내려옴.
2) 이제 금편계곡 입구로...
3) 여기도 원숭이 세상
4) 다 가보지 못한 금편계의 아쉬움
5) 금편계의 편안한 모습
■ 장가계삼림공원의 하이라이트 천자산
'봉림지왕' 천자산 풍경구
老屋场에 가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들어간다.
- 추천코스
천자산 케이블카 → 어필봉 → 선녀산화 → 점장대 → 대관대 → 관교대
천자산은 1920년까지는 토가족중 신분계층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신성시 되는 지역이며
3천5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릉도원의 하이라이트라 불리운다. 천자산에는
지난 1997년 케이블카가 설치되 2천 84미터 천자산 정상까지 손쉽게 오를수 있게 되어
관광객들이 큰 어려움 없이 기암 괴석들을 감상 할 수 있다.
천자산풍경구는 무릉원 북부에 위치해 있다.
시야가 넓고 '강이 팔백, 봉우리가 삼천 개(江八百 峰三千)'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봉우리가 모여 있어 산세가 매우 깊고도 웅장하다.
이곳 토착 민족인 토가족(土家族) 사람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으로
본래 이름은 청암산(靑岩山)이었으나, 토가족이 과거 지도자였던
향대곤(向大坤)을 왕천자(王天子)라고 부른 것에서 지금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천자산은 1920년까지는 토가족 중 신분계층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신성시 되는 지역이며
3천5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무릉도원의 하이라이트라 불리운다.
뾰족뾰족한 기암 괴봉들이 빽빽 하게 솟아 있고
그 사이로 깊은 계곡이 뻗어 있는 모습은 마치 수만대군의 열병의식을 연상시키며,
구름과 안개가 떠다니는 풍경과 달 밝은 밤 그리고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과 눈 내린 겨울 풍경이 특히 멋지다고 알려져 있다.
천자산 케이블카(天子山索道)
해발 2,084미터의 천자산은 케이블카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발품을 팔아 3,500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야 그 비경을 감상할 수 있었던 곳이다.
1997년 케이블카가 설치된 이후 정상까지 편안하고 빠르게 이 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자산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케이블카의 편도 이동거리는 약 2km이며 약 6분 정도 소요된다.
한 대의 케이블카에는 8명까지 탑승이 가능하고 편도 요금은 72위안.
천대서해(西海)
서해는 수오시 위(索溪峪)풍경구의 서부에 있다.
황제를 호위하는 천군만마의 기세에 의해 솟았다는 봉우리가
운무에 휩싸이면 바위 숲이 바다를 이룬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그 정도로 봉우리가 수도 없이 이어져 있으며 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석림들로 바다를 이루었다는 서해, 이 망망한 석림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바로 두개의 작은 바위사이에 끼여 있는 조그만한 돌이다. 이 신비한 돌은
해마다 한번씩 기적을 일으키는데 바로 빛을 뿌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폭죽마냥
빛을 사방에 뿜어 신탕만 일대를 밝게 비추는데 이때의 서해는 대낮처럼 밝다.
빛은 약 3, 4분 강하게 비추다가 점덤 약해지며 나중에 천천히 소실된다.
어필봉(御筆峰)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세 봉우리의 바위 위에
푸른 소나무가 자란 모습이 마치 붓을 거꾸로 꽂 아 놓은 모양을 연상시킨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쟁에서 지고 돌아온 황제가 쓰던 붓을 하늘을 향해
집어던진 것이 땅에 꽂혀서 만들어진 봉우리라 하여 어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선녀산화(仙女散花)
어필봉에서 반대 방향을 바라보면 그곳에 선녀가 꽃 바구니를 들고
세상에 꽃을 뿌리는 형상을 한 ‘선녀산화’가 있다.
얼핏 봐서는 어느 것이 선녀산화 인지 찾기 힘들지만 설명을 듣고 나면
바위 위로 또렷한 선녀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고 바위 위에 자란 소나무는
머리 장식이, 오른편 작은 바위 위에 자란 소나무는 여지없이 꽃이 된다.
공중전원(空中田園) 노옥장(老屋場)
공중전원은 말 그대로 공중에 밭이 있는 형상이고
노옥장의 신병집회는 하늘의 병사가 열병한다고 이름지어진 곳.
아직 제대로 개발이 안되어 보호난간도 없고 아슬아슬 합니다만
정말 뭐라 표한하기 힘들 정도의 아름다운 절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집니다
점장대(点将台)
'장군이 명령을 내리는 곳'이라는 의미로 점장대에서 바라보면
천자산의 험준한 봉우리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풍경이 마치 명령을 기다리며
도열하고 있는 병사들처럼 보인다. 점장대는 어필봉 전망대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어
이 곳에서 바라보는 어필봉이 더 웅장하게 느껴 진다.
관교대(观桥台)
천자산풍경구는 원가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원가계 안에서 원가계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시각으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다리를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관교대에서는
원가계의 명소 중 하나인 천하제일교를 감상할 수 있다.
천하제일교의 위용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반드시 방문해야할 곳.
대관대(大观台)
점장대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전망대로
이름 그대로 천자산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점장대에서 봉우리 들의 기세가 포효하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졌다면
대관대는 깊고 아득한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곳이다.
기 타
허룽 (1896년)
허룽(중국어 간체자: 贺龙 1896년 3월 22일 ~ 1969년 6월 8일)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이자 농민게릴라의 사령관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의 직위까지 올랐다.
생애
허룽은 1896년 후난 성(湖南省) 쌍즈 현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무인으로 16세 때 이미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기 위해
산 속에서 부하들을 모으고 무장 세력을 규합하는 '의적(義賊)'이 되었고
21세 때에는 휘하에 1만9천명의 병력을 거느리는 농민군의 장군이 되어있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을 폭도에서 일반군사로 사면한 뒤
돈을 주고 해산시켰다.
허룽은 쑨원 박사와 손을 잡으려 하였고 제1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던 1926년
국민당 군 제20군단장이었는데 이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장제스와 국민당 우파가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탄압하자
1927년 8월 1일 저우언라이·주더 등과 함께 난창 봉기를 일으켰고
당시 홍군 제2방면군을 총지휘하였으나 봉기가 실패한 후 상하이로 달아났다가
후난성 일대에서 게릴라 군사 활동을 지휘하였다.
1936년에는 마오쩌둥과 장궈타오의 분쟁에서는 마오의 편을 들어
장궈타오의 패배를 결정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으로 홍군이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고
이후 항일전쟁과 제2차 내전의 모든 기간 중에 야전군 사령으로 있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공화국의 주요 요직을 거치고
1955년 인민해방군 원수가 되었다.
최후
군사위 부주석, 1956년 제8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실각되고 반당분자로 낙인 찍혀 투옥되었다가
1969년 감옥에서 죽었다. 그의 명예는 1974년에 다시 복권되었다.
후난 성 출신의 허룽을 기리기 위해 장자지에(장가계)에
허룽공원(하룡공원)과 허룽기념관(贺龍記念館)이 있고,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 백장협(百丈峽)
백장협(百丈峽)은 호남성 상덕(常德)시에 있는 백장협은
무릉원(武陵源)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삭계곡 풍경구에 있는 고대 전쟁터다.
반마춘(磐馬椿), 마도석(磨刀石) 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고대 전쟁과 연관이 있는 곳인데, 고대에 백장협을 다른 글자로 百杖峽이라 쓰기도 했다.
백장협은 15km 길이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황량한 지역으로
높은 봉오리와 깊은 협곡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삭계욕 동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백장협, 동가욕, 왕가욕 등 3개의 협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장협은 높이가 백장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설이 있으며
장가계 전통 소수민족인 토가족의 농민봉기를 일으킨 수령향 대군이
백장협에서 관군들과 백번이나 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자리현지(慈利县志)』에 협곡이 백장이나 된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높이가 백장이나 되는 협곡은 중국에서도 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옛 전쟁터인 만큼 다양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지역으로
다양한 문인이 방문한 지역이기도 하다.
■ 토가풍정원
1999년에 토가족의 오래된 산간마을을 개조, 복구하여 만든
장가계 토가풍정원(장가계 민속원)은 인문경관과 자연풍경이 서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곳으로 토가족의 농경문화, 전투문화, 건축예술, 공예미술, 표현예술, 민속풍경과
음식문화를 두루 접할 수 있는 대형 민족민속문화 관광구이다.
토가풍 정원에서 주로 전시하는 것들은 토가족 혼인풍속이나
장신구, 납염색, 직조, 은장, 석장, 조각등 진귀한 문물들이다.
또한, 토가족의 민속예술을 그대로 느낄 수있는 여러 공연 프로그램이 진행되는데
울음혼례 재연, 모고사 춤, 동령 춤, 파수 춤 등이 공연된다
■ 부용진(芙蓉鎭, 푸룽쩐)
푸룽진(芙蓉镇 fu long zhen 부용진)
장가계에서 남서측 80km지점에 위치하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동네 8 중 순위 5위에 속하는
부용진(芙蓉镇)에 도착하면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이 든다.
산세를 따라 다락방같은 적각루(吊脚樓)들이 첩첩하고 그 속으로 뻗은
반들반들한 청석길에서는 세월의 빛이 엿보인다.
부용진 원 이름은 왕촌(王村)이였으나,
1980년대에 중국 영화 <부용진> 속 촬영 무대가 된 이후 부용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화 <부용진> 촬영 감독은 왕촌에 이르자 마자 첫눈에 반해
영화촬영지로 왕촌을 정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가 제작완료되여 방영되면서
흥행성공을 거두었고 그로 인해 왕촌이라는 옛동네도 베일을 벗고
부용진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으로 세상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요한 부용진의 모든 길에는 청석이 깔려 역사를 기록하고
손에 손잡은 조각루들은 토가(土家)족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며
연기에 거멓게 그을린 대들보는 세월의 흔적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네를 안고 도는 물길만은 오랜 세월동안 변함이 없다.
뒤에 산을 업고 삼면으로 강물이 흐르는 부용진에 들어서면
그 순간 세월을 거꾸로 지나 어제로 돌아간듯 착각하게 된다.
어제날의 청석길은 변함없이 물가의 나루터로부터 산위로 뻗어 있고
길 양쪽의 건물도 여전히 옛스럽다.
과거 영국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지은 교회당이
지금은 부용진의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그리 크지 않은 전시홀에 사진과 직물 등이 전시되고 중앙에 "계주동주"가 눈길을 끈다.
서기 940년에 초(楚)나라 왕이 부용촌이 속한 계주의 칙사(勅使)와 교전을 벌여
양쪽 모두 큰 사상자를 내게 되였다. 싸움끝에 쌍방은 평화를 회복하기로 하고
평화협상을 구리기둥에 적어 경계선에 세웠다.
팔면의 속이 빈 구리기둥 계주동주에는 상호 불가침의 지역을 정하고
초나라 왕은 계주칙사 관활지에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하고
군대를 모집하지 못한다는 등 내용으로 2천여글자가 새겨져 있다.
봄날 부용진에는 항상 물안개가 몽롱하다.
그 때 청석길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면 고요한 동네의 이야기들이 소곤소곤 들려온다.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는 멀리에서는 또 바닥을 쓰는 소리와
빨래하는 소리 등이 정답게 들려온다.
반백년전 이 곳의 나룻터에는 상선들이 운집해 번화함을 연출했고
그래서 이 곳은 작은 남경(南京)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오늘날은 온 세상의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또 다른 번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부용진은 몇백년전이나 몇십년전이나 변함없이
그만의 고요함을 유지했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아무리 많아도 더없이 고요한 부용진이다.
부용진에서는 옛길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골동품이나 도자기, 나무뿌리 조각물, 석각물 등 현지의 특산물이
거의 모두 집중되여 부용의 경치를 보는 동시에 쇼핑도 겸할수 있다.
현지의 정통음식으로는 영화 부용진에도 나오는 쌀두부이다.
부용진에는 쌀두부가게가 아주 많은데
가장 전통적인 집은 패방 근처의 113호 미(米)두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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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n`y a pas d`amour heureux - Francoise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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