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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여행 ① 낙산사(洛山寺) - Last Night Serenade/Cees Tol & Tomas Tol - / 목련/이원규

이름없는풀뿌리 2019. 3. 19. 15:17
양양 여행 ① 낙산사(洛山寺) (1)경로 2019. 3. 8 둘째와 양양 하조대행 서울-양양 EXP를 휘달려 연수원에서 1박 후 (낙산대-경포해변-오죽헌-테라로사) 바람 쐬었더라. (2)일출 아침에 일어나 고운 모래의 해변에 나갔더라. 멀리 외설악의 봉우리는 흰 눈에 덮여 있더라. 하얀 포말을 일렁이며 파도치는 망망대해 위로 붉은 햇살을 천지사위로 흩뿌리며 서서히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한 해의 무사 건강을 빌었더라. (3)낙산사 78세까지 장수한 의상이 창건한 천년 고찰 – 그 만큼 설화와 보물이 많더라. 응향각에서 제공하는 보이차 한 잔을 마시고 홍예문을 지나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양 최대라는 해수 관음보살, 복수초가 만개한 언덕 아래 보타전을 지나 홍련암을 지나 의상의 전설이 서린 의상대에서 다시 동해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가슴 속 응어리를 날려 보내고 왔더라. 배달9216/개천5917/단기4352/서기2019/03/09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설악산 줄기 송암산은 잔설에 덮혀있고 2) 미세먼지 하나 없는 양양 해변은 푸른 파도가 넘실대고 3) 역시 푸르른 양양 하늘 4) 2005년의 끔찍한 화재로 아직도 불탄 내가 조금 나는 듯 5) 응향각, 빈일루 6) 칠층석탑, 원통보전 7) 보타전을 내려다 보며 해수관음상으로 가는 중 8) 송암산을 배경으로 동해를 내랴다 보는 해수관음상(화강암) 9) 동해(東海) 10) 보타전 뒤편 언덕에 만개한 복수초 11) 꽃대궐인 보타전 12) 의상대 가는 길 o o o Rising / Lhasa De Sela o o o 낙산사(洛山寺) 유래 보타낙가산 (寶陀洛伽山)에서 유래함.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산. 범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인도에서 관세음보살 신앙이 형성된 시기는 1세기말 무렵이다. 현세 이익을 주는 보살로서 영향력이 대단하여 인도는 물론 중국과 한국ㆍ일본ㆍ티베트에서 널리 신봉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관세음보살의 거주지는 곳곳에 등장한다. 인도에서는 남쪽 끝의 마라야산 동쪽 구릉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락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다. 중국의 승려인 현장도 인도에 다녀와서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이 산이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꿈이 이루어지는 낙산사 양양군 북쪽 해안에 위치한 낙산사(洛山寺)는 오봉산(五峰山)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 고승 의상대사(625–702, 원효617-686)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은 절이다. 의상이 하루는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몸소 친견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왔다.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서 여러 날 기도한 의상이 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고 관음보살로부터 수정 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곳이 낙산사다. 훗날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紅蓮庵)이라 했다. 이곳은 오늘날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觀音聖地)로서 불교신도들이 많이 참배하고 있다. 참고로 4대관 음성지(觀音聖地)는 ①낙산사 홍련암 ②강화도 석모도 보문사 ③남해군(南海郡) 금산(金山) 보리암(普提庵) ③통천군 금란굴(金蘭窟)이다. 1977년에 오봉산 자락 신선봉 정상에 동양 최대 해수관음보살을 세웠다. 낙산(洛山) 주위의 경관을 다시 여덟곳으로 나누어 낙산팔경이 전해오고 있다. 낙산팔경은 ① 낙산사의 저녁 종소리(洛迦暮鐘) ② 설악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雪岳返照) ③ 광석에서의 한밤중 다듬이 소리(廣石夜瞻) ④ 기동에서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基洞暮煙) ⑤ 망월대 앞 동해 모래사장에 내려오는 기러기떼(平沙落雁) ⑥ 멀리 망월대 앞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遠浦歸帆) ⑦ 길게 뻗어내린 남대천의 물줄기(九萬長川) ⑧ 망월대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정취(望亭秋月)이다.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 3대 명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이르는 보타낙가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역대로 지위와 신분을 떠나 관음진신을 친견하려는 참배객들의 간절한 발원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낙산사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풍광과 부처님 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 천수관음상 칠관음상 등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 창건주 의상대사의 유물이 봉안된 의상기념관 등 숱한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어 관음성지이자 천년고찰로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낙산사는 지난 2005년 4월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당우가 소실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경관이 크게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낙산사를 아끼고 사랑해주신 국민들과 불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제 새롭게 천 년 고찰 불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낙산사의 성보문화재 1.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 혹은 관음전이라고 불리며, 관세음보살님을 주불로 봉안합니다. 2. 건칠관음보살상(보물 제1362호)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 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 초기의 작품임을 짐작케 해줍니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좋고 특히 얼굴 표정이 빼어날 뿐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3.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조선 시대 석탑으로 현재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낙산사는 조선 세조 때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그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 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 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됩니다. 4. 원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 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이 있습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합니다. 이 원장은 법당을 둘러싼 성역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습늬다. 5. 보타전 원통보전,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불전입니다. 불전 내부에는 7관음, 32응신, 1500관음상을 봉안하였습니다. 6. 해수관음상 낙산사 성보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해수관음상입니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빠짐없이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7. 공중사리탑(보물 제1723호) 공중사리탑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172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005년 대형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될 때 공중사리탑도 손상을 입어 2006년 해체 보수하던 중 부처님 진신사리를 비롯한 사리장엄구가 출현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중기인 1692년에 석경스님 등이 대원을 발하여 세웠다고 전합니다. 8. 동종 조선 시대인 1469년에 낙산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이 만들게 한 범종입니다. 2005년 대형산불로 소실된 것을 2006년 10월에 복원하여 현재 종각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시대 범종 가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9.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홍예문은 1467년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나,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되고 2006년에 다시 지었습니다. 축조될 당시에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10. 의상대(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의상대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 수행처라고 전합니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 해안 언덕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둘러 보는 곳이 되었습니다. 11.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찰을 지키면서 사부대중을 돕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사천왕을 모신 문입니다. 1950년 6.25전쟁과 2005년 대형 산불의 재난 속에서도 이 문과 사천왕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12. 홍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본 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장소이며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당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부터 멀리 이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파랑새를 만났는데, 파랑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친견한 후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 이름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의상(義湘, 625년 ~ 702년)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고승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또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며, 속성은 김(金: 혹은 박(朴)씨라고 함)이다.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이다. 아버지는 신라의 진골 귀족 김한신 장군이다 20세에 출가하여 650년(진덕여왕 4년)에 사형(師兄)인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당항성의 어느 동굴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이때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도의 길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그와 헤어진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 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현수(賢首: 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당나라에 체류 중 그의 설법에 참석하던 여성 중 그를 사모하는 선묘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던 날, 선묘의 집에 찾아갔지만, 선묘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접한 이 선묘는 자신이 죽어 그를 지켜주겠다며 황해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에 의상이 영주 봉황산에 산사를 지을 때, 지역 주민들이 와서 집단으로 들고 일어서자 어느 날 사람 수백 명의 머리를 덮고도 남을 크기의 바위가 공중에 떠다니면서 주민들을 따라다녔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였고, 의상은 사찰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관음굴(觀音窟: 낙산사)에서 백일을 기도하고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봉황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교학을 강술하여 화엄종(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년(효소왕 1)에 현수는 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탐현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문하에게 이것을 나누어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전심하다 죽었다. 사망 당시 향년 78세였다. 후일 고려 숙종은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 시호하였다. 의상의 문인으로 뛰어난 10대덕과 전교(傳敎)의 10대찰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를 사형(師兄)으로 섬겨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당나라는 삼국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여제(麗濟) 양국을 공취한 것에 노하여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을 잡아 가두었다. 당 고종(高宗)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明朗)이 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범어사의 전설에 따르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金井山)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거 있는 것은 아니다. 의상은 많은 사찰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영주의 부석사가 유명하다. 토에 정통한 승려로서 신라와 고려에서는 국사로 추존되었으며, 민간 신앙에서도 무속의 신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의 일부 무당들로부터 숭배되었다. 의상 대사는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처음으로 전한 신라 시대의 승려입니다. 19살에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어요. 의상 대사는 중국에서 종남산 지상사에 있는 지엄을 만났지요. 지엄은 전날 밤 특별한 꿈을 꾸었어요. 동쪽에서 큰 나무 한 그루가 나더니 그 가지와 잎이 중국까지 덮었답니다. 그 위에 마니보주(여의주)의 밝은 빛이 비쳤다고 하니 예사 꿈이 아니지요. 그래서 특별히 의상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의상은 화엄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어요. 그 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알리려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에게 기도하였어요. 그뒤 부석사를 세우기까지 화엄 사상을 전하려고 전국을 두루 다녔어요. 그에게는 3천 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황복사와 부석사에서 법회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어요. 668년(문무왕 8)에 7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효(元曉, 617년 ~ 686년) 617년(1세)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남쪽(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땅의 불지촌 북쪽 밤실의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 할아버지는 잉피공, 아버지는 담나내말.(『삼국유사』권4) 625년(9세) 진평왕 47년. 십 세 미만의 나이인 이 무렵 출가하다. 법명은 원효(元曉) (『송고승전』권4). 출가 후에 낭지(朗智)화상 등에게 사사할 때까지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이 해에 의상(義湘)이 태어나다.(『삼국유사』권4) 633년(17세) 선덕여왕 2년. 이 무렵 십 세 미만의 나이인 의상이 출가하다. 647년(31세) 진덕여왕 원년. 이 무렵 낭지(朗智)화상에게 사사하고 자신의 처녀작인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여 은사(隱士) 문선(文善)을 시켜 낭지(朗智)화상에게 바치다.(『삼국유사』권5) 650년(34세) 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현장(玄奘) 삼장과 자은사 문중을 흠모하여 입당(入唐)을 꾀하다. 압록강을 건넜으나 요동에서 고구려 수비군에 발각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다.(『삼국유사』권3, 권4) 660년(44세) 무열왕 7년. 백제가 멸망하다. 661년(45세) 문무왕 원년. 의상과 함께 제2차 입당(入唐)을 시도하여 당주계 근처의 땅막에서 하루를 보낸 뒤 이튿날 밤 무덤에서 자다 동티를 만나 고투하면서 그것이 일심(一心 : 아뢰야식)의 차별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의 무의미함을 확인한 뒤 신라로 되돌아오다. 의상은 입당하여 화엄종 2조인 지엄화상의 문하에 들어가다. 신라에 남았던 원효는 포항의 오어사(吾魚寺)에 머무르면 보살행을 하는 혜공(惠空)과 교유하면서 여러 경론에 관해 토론을 벌이며 많은 영향을 받다. (『삼국유사』권4,『송고승전』 권4) 667년(51세) 문무왕 7년. 이 무렵 요석공주를 만나다. 얼마 후 공주가 설총을 낳다. 이후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스스로 일컫고 무애(無碍)의 보살행을 하다.(『삼국유사』권4,「탑비」) 668년(52세) 문무왕 8년. 김유신이 소정방이 보낸 암호 난독회에 대해 원효에게 자문을 구하다. 이 해에 고구려가 멸망하다.(『삼국유사』권2) 671년(55세) 문무왕 11년. 『판비량론』을 저술하다. 의상이 귀국하다.(『삼국유사』권4) 672년(56세) 문무왕 12년. 이 무렵부터 분황사에서 『십문화쟁론』, 『법화종요』, 『미륵상생경종요』, 『무량수경종요』, 『법화종요』등을 저술하다(「탑비」) 675년(59세) 이 무렵 사복의 모친이 죽자 고선사에 있던 원효가 축원을 해주다. 또 광덕과 엄장이 원효에게 사사하다.(『삼국유사』권4, 권5) 681년(65세) 신문왕 원년. 이 무렵 다시 분황사에 머물면서 다수의 주석서와 저서를 저술하다.(「탑비」) 682년(66세) 신문왕 2년. 이 무렵 대안(大安)법시와 교분을 맺으면서 『금강삼매경론소』를 짓고 황룡사 백고좌법회에 초청되어 사자후를 토하다(『삼국유사』 권4,『송고승전』권4) 686년(70세) 신문왕 6년. 『화엄경』제4「십회향품소」까지 저술하고 절필하다. (『삼국유사』권4) 이 음력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세수 70, 법랍 60여 세로 입적하다. (「탑비」) 설총이 아버지의 유해로 소상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다(『삼국사기』권46) 785년 원성왕 원년. 원효 열반 100주기를 기념하여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건립하다. 1101년 고려 숙종 6년. 원효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의 시호를 내리다(『고려사』권11) 1171년 고려 명종때 한문준이 지은 화쟁국사탑비(和諍國師塔碑)를 분황사에 건립하다. (『동국여지승람』권21) [출처] 원효대사 연보 관음보살(觀音菩薩) 가장 폭넓고 깊고 친숙하게 신봉되는 유명한 보살이 관음보살입니다. 대승불교가 번성한 지역이면 어디에나 관음보살이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이 보살은 관세음(觀世音),관자재(觀自在),광세음(光世音)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러한 명칭 자체가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관음보살 또는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는 쪽이 훨씬 더 부드럽고 친근한 감이 있어 그렇게들 부르고 있습니다. 이 보살은 이 세상의 생명체, 즉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명호을 부르면, 곧바로 그 소리를 보고서 그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소리를 보는 것이 이 보살이 맡은 큰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본다는 말이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여래의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다섯 감각기관이 서로 그 대상을 바꾸어 작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여래는 눈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귀로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래의 초능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련된 인격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위 명의는 손으로 만져만 보아도 병을 알고, 탁월한 연주가는 악보를 보기만 하여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낀다고 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구제하는 탁월한 능력을 관음이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과 같은 분은 중생의 눈을 보기만 하여도 그 호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관음이라는 말이 보다 심오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이상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관음보살의 뛰어난 구제력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으로는 손과 눈이 천개나 되는 천수천안(天手天眼)관음, 중생의 고통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얼굴이 11개나 있는 자비의 상징인 십일면관음 등이 있습니다. 보타낙가산 (寶陀洛伽山)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산. 범어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것이다. 인도에서 관세음보살 신앙이 형성된 시기는 1세기말 무렵이다. 현세 이익을 주는 보살로서 영향력이 대단하여 인도는 물론 중국과 한국ㆍ일본ㆍ티베트에서 널리 신봉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관세음보살의 거주지는 곳곳에 등장한다. 인도에서는 남쪽 끝의 마라야산 동쪽 구릉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경』「입법계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던 중 보타락가산에 도착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이라 하였다. 중국의 승려인 현장도 인도에 다녀와서 스리랑카로 가는 바닷길 가까이에 이 산이 있다고 기록한 바 있다. o o o - Last Night Serenade/Cees Tol & Tomas Tol - / 목련/이원규 o o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