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②현절사) –- 현절사(顯節祠) -
욱하는 심정으로 斥和를 말한 건 아냐
식량이 바닥나고 추위에 떨지언정
앙 버틸 튼튼한 성곽 두려운 게 뭐였나?
십만의 근왕병과 壬亂의 의병들도
벌떼로 일어나고 疫病도 덮쳐오면
紅夷砲 꽝꽝 쏴대던 오랑캐들 내뺏을걸
나약한 主和論者 나라를 지켰다지만
임금님 受降 치욕 끌려간 60만포로
백성이 떠난 나라가 무슨 의미 있더냐?
오랑캐 달콤한 말 끝끝내 거부하다
瀋陽에 저잣거리에 효수된 이 한 목숨
朝鮮의 안녕이라면 기쁨으로 바친다만
生死를 알 수 없는 老母는 어찌하고
뱃속의 아기 앞날 뉘있어 보살필까
그 하나 걱정이 되어 이 골짝을 떠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위 時調는 현절사에 배향된 五學士중 秋潭 吳達濟의 독백 형식을 빌어 쓴 것으로 선생은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홍문관 정6품 수찬으로 재직하고 있던 胡亂 당시에 28세의 실력있고 전도
양양한 조선의 열혈 청년으로 싸워보지도 않고 講和부터 하려는 主和派에 맞서 31세였던 부교리 윤집
과 더불어 斥和를 주장하다가 젖비린내 나는 어린 놈 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청나라에 스스로 잡
혀가 오랑캐의 온갖 회유에도 죽음을 택하였으며 심양으로 끌려갈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딸이었는데
낳자마자 죽었다고 하며 현재 그의 후손은 絶孫된 상태로 아쉬움을 더하며 또한 詩,書,畵에 두루 능
하였으며 특히 숙종과 영조가 御製하신 墨梅圖가 유명하며 이국땅에서 夭折하기엔 너무 아까운 조선의
청년 인재로 임진왜란의 생생한 민초기록인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吳希文)이 바로 선생의 친조부이다.
덧붙임)
산성길8(광주향교길1)(2) 행궁-演武館-顯節祠-북문(戰勝門)
(+43=43분(08:17-09:00), +1.5=1.5km)
산성센터 맞은편에서 왼 쪽 알림목대로 따라가니
단풍이 절정인 경건한 계단 위의 현절사 지붕이 숙연하다.
병자호란(1636) 주요 관련자들의 호란 당시의 나이를 정리하여 보았다.
청태종(홍타이지, 1592 ∼ 1643) 45세
용골대(잉굴다이, 1596 ∼ 1648) 41세
인조 (1595 ∼ 1649) 42세
최명길(1586 ∼ 1647) 51세
홍익한(1586 ∼ 1637) 51세
윤집 (1606 ∼ 1637) 31세
오달제(1609 ∼ 1637) 28세
김상헌(1570 ∼ 1652) 67세
정온 (1569 ∼ 1641) 70세
이서 (1580 ∼ 1637) 57세
김류 (1571 ∼ 1648) 66세
김자점(1588 ∼ 1651) 49세
나만갑(1592 ∼ 1642) 46세
원두표(1593 ∼ 1646) 45세
김준룡(1586 ∼ 1642) 51세
임경업(1594 ∼ 1646) 43세
정두원(1581 ∼ ?) 56세
윤집과 오달제는 척화를 주장하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심양에 끌려가 죽었으나
호란 52년 후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산성 현절사에 배향되어
김상헌, 정온과 함께 대대로 존숭 받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만
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역의 북풍한설 속 타국에서 효수되었다니 참으로 애석타.
삼학사에 대하여 신흥강대국 청나라의 시대에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고지식하게 斥和만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하지만
明의 인구가 1억5천만, 朝鮮 인구가 1천만, 後金은 겨우 30만이었고
그들 침략군이 10만 군대였다고 하지만 여진, 몽고, 한족등 연합군이었고
조선만 하더라도 14만 정도의 군대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결사의 항전을 주장할 수 있는 당위성이 있었고,
항복으로 인한 삼배고구두례의 치욕은 차지하고라도
호란 후 60만명(전인구의 6%)이나 되는 포로가 끌려가고,
그리고 패전국으로서 각종 조공품 상납, 명과의 전쟁 지원,
쇄환 포로로 인한 사회문제, 이혼, 고아들에 대한 문제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회 붕괴 현상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결사항전을 주장한 그들이 전혀 터무니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만일 정규군 14만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고
임진왜란 때와 같이 세자로 하여금 分朝활동을 하고
점점 일어나고 있던 후방의 의병들을 잘 활용했더라면
백마산성등 많은 성을 우회하여 한양과 임금 생포라는 목표만으로
고립무원으로 진격한 그들에 대하여 충분히 승산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그들 군영 내에는 북방에서 경험하지 못한 천연두가 발생하여
오로지 한시바삐 전쟁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슴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북문으로 향하여 가니
고즈넉한 오솔길에 단풍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유난히 스산한 바람과 더불어 현절사에 봉안된 우국지사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쨋튼 겨우 한번 전쟁에 쓰려고 이런 성곽을 쌓고 중수했는지
평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만사 유비무환이란 말이 실감나며
산성이야말로 그러한 정신을 대변한다고 절실히 느끼다.
이윽고 북쪽 성곽이 나타나 오늘 가야할
산성 너머의 고골계곡 아래 상사창리를 내려다보니
남한산성 입성 후 최초의 승리를 거둔 북문 담당 원두표 장군이 생각나고
승첩 11일만에 체찰사 김류의 대책없는 법화골 출전으로
몰살당한 8명의 지휘관과 200명의 사졸들 넋이 생각나고
청군이 망월봉에서 홍이포를 쏘아대는 포탄에
상사창리의 司倉 지붕이 날아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호란 140여년이 지난 1779년 정조는 이곳에 들려 김류의 대참패를 상기하면서
다시는 이런 참혹한 패배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북문을 최초로 全勝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현절사입구(08:30, 현절사0.1k,벌봉1.8k,지수당0.1k,동문0.6k,종로0.4k,북문0.6k,수어장대1.6k)
2) 현절사 앞 마당의 단풍
3) 숙종14(1688) 유수 이세백 주도 삼학사 배향, 숙종19사액, 숙종37 김상헌, 정온 추배
4) 현절사(08:37, 세계유산센타0.2k, 북문1.0k, 동장대터0.8k, 벌봉1.3k)
5) 현절사 뒤편의 고즈넉한 오솔길에서 만난 단풍과 참빗살나무열매
6) 산성현절사갈림목(08:47, 북문0.7k, 현절사0.5k, 동장대암문0.6k,)에서 고골계곡 조망
7) 북문이 보이고(09:00)
□ 현절사(顯節祠)
병자호란(1636) 때 3학사 윤집·홍익한·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3학사는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참형을 당하였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를 주장한 남한산성 기슭에 지었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할 목적으로 지었으므로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에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 장소로 옮겨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지낼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퇴칸으로 개방하였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을 달고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현절사에는 삼학사의 눈물이 있다. 이곳에서 삼학사의 위폐만 모시다가
후에 좌의정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 되었다.
병자호란 때 오달제, 윤집, 홍익한은 조선 선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청에 맞서
최후 1인까지 의리와 명분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다. 仁祖가 청태종에게
항복할 때 청의 요구조건이 척화신(斥和臣)을 청에 보내라는 것이었다.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에서는 김상헌, 정온, 윤황 부자, 오달제, 윤집,
김수익, 김익희, 정뇌경, 이행우, 홍탁 등 11명을 선정하게 된다.
이때 좌의정 홍서봉이 여러 사람이 사지로 끌려갈 필요는 없다고 항의하자
결국 오달제, 윤집, 홍익한만 끌려가 심양의 서문에서 처형된다.
윤집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척화를 주장했던 정뇌경이다.
정뇌경은 윤집이 홍문관으로 있을 때 윤집과 함께 처음부터 척화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윤집이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자 밤새 눈물을 흘리며
시문으로 화답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의(義)에 죽는 그대, 이제 슬퍼할 것 없네.
나는 오성에 꽂은 항복(降服) 깃발을 보았네.
이별할 때 정녕 칼을 넘겨준 것은
백년이 지나도 친구의 뜻 저버림을
부끄러이 알게 함이려니.
- 정뇌경이 윤집과 헤어지며 읊은 시 -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9월 23일 갑자 1번째기사 1636년
수찬 오달제 등이 오랑캐에 사람을 파견하지 말라는 글을 올리다
수찬 오달제·이도(李禂)가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오랑캐에 사람을 보내는 일은 크게 불가한 바가 있습니다.
아, 이것 역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까? 교활한 오랑캐가 창궐하여 더욱 방자하게
공갈을 치고 제멋대로 참호하며 감히 와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으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이 성충(聖衷)을 계도하여 흉서(兇書)를 발송하지 아니하고 오랑캐의 사신을
준엄하게 배척한 다음 팔도에 포고하니 사기가 배가되고 상국에 전주하니 의성이 충분히
들리었으며, 칙사가 광림하고 장유(奬諭)가 돈독하니 온 동토 전역이 눈을 씻고
서로 하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요즈음 여기저기서 이론이 생겨나
정탐을 칭탁하여 차사를 보내고 책유(責諭)를 핑계하여 서신을 통하였습니다.
이에 모책(謀策)이 불량하여 의리가 막히고 떠도는 소문이 자자하여 인심이 이미
흩어졌으며, 비방하는 의논이 흉흉하여 국사가 장차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미처 살피지 못하신 것입니까.
지금 의논드리는 자는 권변(權變)을 칭탁하고 이해로 움직여서 위로는 천청(天聽)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묘산(廟算)을 현란시켜 반드시 다시 화친을 닦아 구차스럽게
편안하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아, 너무 심합니다. 대체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자강책을 강구하지 않고 오로지 고식적인 것만 힘쓰며 의리를 돌보지 않고
치욕을 달게 여기면, 위로 명조를 섬김에 어떻게 변명하며 아래로 신민에 임함에
어떻게 충성을 권하겠습니까. 만세에 기롱을 끼칠 뿐 목전의 급함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득실의 기미를 어찌 지혜로운 자라야 알겠습니까. 인심이 분노하여 허물을 위에 돌리고
사기가 쇠약해져 목숨을 바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니,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신민에게 충의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지경에 이른 후에는 의논한 자의 살을 씹어 먹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봄 화친을 끊은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우리가 먼저 끊지 않으면
어찌 족히 의리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도리어 사람을 보내고 서찰을 통하여
먼저 끊지 않은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 참역(僭逆)한 오랑캐는 참으로 당연히
우리 스스로 먼저 끊어야 할 것인데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기에 이처럼 꼭
변명하고자 하십니까? 구차한 거조는 차마 말할 수 없고 묘당의 성산(成算)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차사를 보내는 것은 본디 간첩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간첩을 행하는 일을 중지하였은즉 다시 무슨 명분을 빌리겠습니까?
본의가 서신을 통하는 데 있으면서 반드시 겉으로 가리고자 하니, 이처럼 정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역관을 보내고
서신을 통한다는 명을 속히 중지하여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
"격서를 보내어 적정을 탐색하는 것은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으니
그대들은 자세히 살피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0월 1일 임신 1번째기사 1636년
오달제가 최명길을 논박하는 상소로 파직되다. 일의 전말을 적은 사론
수찬 오달제가 상소하기를,
"지난번 최명길이 사신을 보내어 서신을 통하자는 의논을 화의(和議)를 거절한 후에
발론했고, 또 삼사의 공론이 이미 제기되었는데도 오히려 국가의 사체(事體)는
생각지 않고 상의 의중만 믿고서 경연 석상에서 등대한 날 감히 황당한 말을 진달하여
위로는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고 공의(公議)를 견제하였으며, 심지어는 대론(臺論)이
제기되었더라도 한편으로 사신을 들여보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 ‘한 마디의 말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 봅니다.
그 말의 전도됨이 몹시 해괴합니다. 옥당(玉堂)이 대면하여 책망하고 중론이 격분하여
일어나기까지 하였으니, 명길은 의당 황공해 하고 위축되어 물의를 기다리는 것이
도리일텐데, 오히려 태연하게 차자를 올려 이치에 어긋나는 논리를 다시 전개하여 오히려
강화하는 일이 끊기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면서 의리가 어떠한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대각(臺閣)의 의논은 체면이 몹시 중한 것입니다. 비록 대신의 지위에 있더라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불안한 뜻을 보이는 것인데,
명길은 어떤 사람이기에 유독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단 말입니까.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죄를 바로잡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런 의향을 본관(本館)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여러 번 발론하였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발론했으나 견제가 이와 같으니 신을 파직하소서."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대체로 사람이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된 것만 책망하는 것은 옳지만
만약 경중을 살피지 않고 또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기회를 틈타
마음내키는 대로 매도하는 것은 몹시 옳지 못한 것이다. 판윤 최명길은 1품 중신으로
사직에 공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이 설사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절대로 멸시하고
욕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인데,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도 모욕을 주니,
오늘날 국가 풍습은 과연 한심스럽다 하겠다. 오달제를 우선 파직하라."하였다.
정원과 헌부가 함께,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주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달제가 차자를 올려 명길을 논박하려고 하자
교리 김광혁은 ‘이 논핵은 없을 수 없다.’ 하여 몹시 힘을 주어 말했는데, 그 후에 말하기를
‘나의 처가 명길의 처와 족분(族分)이 있으니 혐의가 있어 논의에 참석할 수 없다.’ 하였고,
수찬 이도는 처음에는 함께 상의하였으나 뒤에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으니,
달제가 분개하여 마침내 상소하여 대항한 것이다. 달제가 후일 화를 당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도의 부정함은 참으로 논할 것도 없지만,
광혁은 평소 기개가 있다고 일컬어진 사람으로 명길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상의 뜻이 명길에게 향한 것을 알아차리고 또 홍처후 등이 명길을 논핵하였다가
견책당한 것을 보고는 당초의 소견을 바꾸어
억지로 법 밖의 일로 인혐하니, 물의가 그르게 여겼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8일 무신 1번째기사 1636년
부교리 윤집이 최명길의 죄를 논한 상소
부교리 윤집(尹集)이 상소하기를,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 나라가 살아서 숨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형세가
크게 확장하여 경사(京師)를 핍박하고 황릉(皇陵)을 더럽혔는데,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는 이때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력이 미약하여 모두 출병시켜 정벌에 나가지 못하였지만,
또한 어찌 차마 이런 시기에 다시 화의를 제창할 수야 있겠습니까.
지난날 성명께서 크게 분발하시어 의리에 의거하여 화의를 물리치고 중외에 포고하고
명나라에 알리시니, 온 동토(東土) 수천 리가 모두 크게 기뻐하여 서로 고하기를
‘우리가 오랑캐가 됨을 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장려하는 칙서가 내려지자마자 부정한 의논이 나왔는데
차마 ‘청국 한(淸國汗)’이란 3자를 그 입에서 거론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승지와 시신(侍臣)을 내보내라고 한 말이 있으니, 아, 너무도 심합니다.
국정을 도모하는 것은 귓속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군신간에는 밀어(密語)하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일이라면 천만 명이 참석하여 듣더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으며 만일 의롭지 못한 것이라면 아무리 은밀한 곳에서 하더라도
부끄러운 것이니 비밀로 한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는 진회(秦檜)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홍처후의 계사와 오달제의 상소는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준엄한 견책을 당하여 사정(私情)을 따라 모함하였다고 지척하고,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으로 지목하였으며, 심지어는 신상(申恦)을 의망(擬望)하였다는
이유로 특별히 전관(銓官)을 파직시키기까지 하여 만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하였으니,
천둥 같은 위엄에 억눌려 꺾이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삼사의 직책을 가진 자가 벌벌 떨면서 모두 입을 다물었고
심지어 이민구 같은 이는 관직이 높은 간장(諫長)으로서 스스로 성상의 총애만 믿고
공의는 생각지 아니하여 글을 얽어 인피하고 갑자기 지난번 올린 계사를 중지하여
위로는 성상의 뜻에 영합하고 아래로는 명길에게 아첨하고 있으니,
기타 신진 후배 중 이시우(李時雨) 같은 사람들이 간사하게 아첨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얻기 전에는
얻으려고 걱정하고 얻은 후에는 잃을까 걱정하는 그들의 작태를 살피고 계십니까?
신이 명길의 차자를 취하여 보니, 사설을 장황하게 하여 성상의 귀를 현혹하고 있기에
다 훑어 보기도 전에 눈언저리가 찢어지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국가의 대계(大計)는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연소한 무리가 감히 참여하여
알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정치가 대각(臺閣)에 돌아가고 부의(浮議)에 제재당한다는 등의 말은
은연 중 대각을 협박하고 공의를 저지하려는 흉계가 있는 것이니,
아, 간교하고 참혹스럽습니다. 옛날에 좋지 못한 일을 하는 자는 남이 알까봐 숨기려고
하였는데, 지금 명길이 화의를 주장함에 있어서는 팔뚝을 걷어올리고 나서서
조금도 기휘(忌諱)함이 없이 방자하며, 마침내 주희(朱熹)·호안국(胡安國) 두 현인과
우리 나라의 몇몇 명현을 들어서 구실을 삼았습니다. 또 지난번 화의를 물리친 것을
성상의 과오로 지적하였고, 심지어는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였으며,
계속하여 말하기를,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종묘 사직이 혈식(血食)을 하지 못할 것이라
고 하여, 말을 변화시켜 성심(聖心)을 동요케 하였습니다. 대체로 밖으로 도적의 강성한
세력을 업고서 안으로 자기 임금을 겁주었으니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대론이 제기되었더라도 한편으로 서찰을 보내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전하를 위해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입니까?
신은 듣건대, 이것도 명길이 경연에서 드린 말이라고 합니다.
조정을 무시하고 대각을 무시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이 말 역시 전하의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 죄를 바로잡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말을 들어주어 합계(合啓)가
한참 펼쳐지고 있는데 국서(國書)는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아, 국가가 대간을 설치한 것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독단하여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대론(臺論)을 생각지 않으며
부정한 의논만을 따르고 아첨하는 신하만을 의지하여 결국 나라를 잃게 한 후에 말 것이니,
이것은 명길이 계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머리털이 곤두섭니다.
이행건(李行健)의 피혐하는 말에 이르기를 ‘대론이 조정되기 전에
지레 들여 보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만일 시비를 몰랐다면
이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니 크게 책망할 것이 못되거니와,
혹 시비를 알고도 일부러 이런 모호한 말을 하였다면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속이고 밖으로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태화(鄭太和)는 공의(公議)가 한참 펼쳐질 당시에 부정한 의논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곡진히 아첨하다가 청의(淸議)에 버림을 당했는데 전하께서 특별히 집의를 제수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신하들에게 아첨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전하의 이목(耳目)이 되고 전하의 유악(帷幄)에 있는 자 중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직간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하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지은 것인데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 조종조의 부여한 책임과 신민의 커다란 소망이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모여 있는데,
뜻을 영합하는 부정한 말에 현혹되시어 직간하는 자가 있으면 온 힘을 기울여 진노하여
물리치시고, 성의(聖意)를 살피어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자는 미치지 못할 듯이 높여
권장하고 총애하여 발탁하시니, 신은 천하 후세에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이르며
나라를 어떤 지경에 놓아 두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당당하던 수백 년의 종묘 사직을
결국 명길의 말 한 마디에 망하게 하시렵니까? 신은 대정(大庭)에서 통곡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고 망녕되어 때에 따라 맞추어
나가지 못하니, 차마 오늘날의 삼사와 더불어 행동을 같이하여 구차스럽게 마음에 들도록
결코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사판에서 깎아내어 공사(公私)간에 편케 하소서."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대내에 머물려 두었다.
이에 대사간 이민구는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양사의 많은 관원도 서로 뒤를 이어 인피하였으며,
옥당은, 삼사는 한몸이니 감히 처치할 수 없다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집(尹集)이 삼사를 꾸짖어 욕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싶고
옥당이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것도 소견이 있는 듯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처럼 걸핏하면 허물을 얻는 자는 진퇴시키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윤집으로 하여금 양사를 처리하게 하든지 해조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라. 그리고 판윤
최명길은 당일의 말이 중신을 침범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몹시 부당하다.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여 시비를 함부로 논하여 국가에 해를 끼친 죄를 징계하라."하였다.
대개 지난날 경연 석상에서 명길이 조경(趙絅)의 일로 인하여
김상헌(金尙憲)의 단점을 말하였는데, 윤집은 상헌의 일가 사람이다.
상은 그가 상헌에게 편당하여 명길을 공박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으므로
이런 하교가 있은 것이다. 정원이, 양사가 윤집의 상소로 인하여 인피하였는데
윤집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니,
이에 이조가 옥당 신하들로 하여금 처치하게 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교리 조빈(趙贇), 수찬 이도(李禂)·이만(李曼) 등이 마침내 차자를 올리기를,
"사람들의 말이 실정 밖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처신을
구차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신들이 얼굴을 치켜들고 무릅쓰고 나온 것도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대간이 된 자는 반드시 남의 비방을 당하고도
그대로 재직하는 이치가 없으니, 함께 체차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이미 말이 실정 밖에서 나왔다고 하고는 또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고금에 어찌 이런 공론이 있는가. 그대들은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중함을 삼지 않고
다만 꾀를 부려 피하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참으로 몹시 한심스럽다. 위로는 임금의 손을 묶어놓고 아래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자의
혀를 붙들어 맨 뒤에야 마음이 상쾌하겠는가. 모두 계사에 따라 시행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기미 3번째기사 1637년
이조 참판 정온의 최명길이 나라를 팔아 넘겼다는 내용의 차자
이조 참판 정온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된 말을 듣건대,
어제 사신의 행차에 신(臣)이라고 일컬으며 애걸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말 맞습니까? 만약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는 필시 최명길의 말일 것입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간담이 다 떨어져 목이 메어 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후에 걸쳐 국서는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왔는데,
매우 비루하고 아첨하는 말 뿐이었으니, 이는 곧 하나의 항서(降書)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래도 신(臣)이라는 한 글자를 쓰지 않아 명분이
아직은 미정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신이라고 일컫는다면 군신(君臣)의 명분이
이미 정하여진 것입니다. 군신의 명분이 이미 정해졌으면 앞으로 그 명령만을 따라야 할
것인데 저들이 만약 나와서 항복하라고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나가서 항복하시렵니까?
북쪽으로 떠나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북쪽으로 떠나시겠습니까?
옷을 갈아 입고 술을 따르도록 명한다면 전하께서 장차 술을 따라 올리겠습니까?
따르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군신의 의리를 가지고 그 죄를 따지며 토벌할 것이고,
따른다면 나라가 이미 망한 것이니, 이러한 처지에 이르러
전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최명길의 생각으로는, 한번 신이라고 일컬으면 포위당한 성도 풀 수 있으며
군부도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이와 같이 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부녀자들이나 소인의 충성 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절대로 이럴 리도 없음이겠습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하의 국가가
길이 보존되기만 하고 망하지 않은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릎을 꿇고 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정도(正道)를 지키며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 번 결전을 벌인다면
성을 완전하게 하는 방법이 없지 않은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 명나라에 대한 우리 나라의 입장은
고려 말엽의 금(金)나라나 원(元)나라의 경우와 같지 않은데, 부자와 같은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군신의 의리를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법인데 최명길은 두 개의 태양을 만들려고 하며,
백성들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최명길은 두 임금을 만들려 합니다.
이런 일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은 몸이 병들고 힘이 약하여 비록 수판(手板)으로 후려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같은 좌석 사이에서 서로 용납하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최명길의 말을
통렬히 배척하여 나라를 팔아 넘긴 죄를 바로잡으소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거든
속히 신을 파척(罷斥)하도록 명하시어 망언을 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지 않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8번째기사 1637년
전 교리 윤집과 전 수찬 오달제가 상소하여 오랑캐에게 가서 죽을 것을 청하다
전 교리 윤집(尹集), 전 수찬 오달제(吳達濟)가 상소하였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묘당이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수(自首)하고 가게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군부의 위급함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조정에 있는 어느 제신(諸臣)인들 감히 나가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지난해 가을과 겨울에 상소를 올려 최명길의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으니
이는 바로 더욱 드러나게 화친을 배척한 것입니다.
오랑캐 진영에 가 한 번 칼날을 받음으로써
교활한 오랑캐의 한 건의 요청을 막도록 하소서.
다만 듣건대 묘당의 의논이 신들로 하여금 짐승들에게 사죄시키려 한다고 하니,
묘당의 뜻 역시 슬프기만 합니다. 신들에게 이미 사죄할 것이 없고
또 명을 받든 신하도 아닌데, 어떻게 노적(虜賊)과 수작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6번째기사 1637년
이조 참판 정온과 예조 판서 김상헌이 자결 시도와 사론
이조 참판 정온이 입으로 한 편의 절구(絶句)를 읊기를,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하고, 인하여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吏曹參判鄭蘊口號一絶曰:
"砲聲四發如雷震, 衝破孤城士氣恟。 唯有老臣談笑聽, 擬將茅舍號從容。"
又曰: "外絶勤王帥, 朝多賣國兇。 老臣何所事, 腰下佩霜鋒。" 又作衣帶誓辭曰:
"主辱已極, 臣死何遲? 舍魚取熊, 此正其時。 陪輦投降, 余實恥之。一劍得仁, 視之如歸。"
因拔所佩刀, 自刺其腹, 殊而不絶。
禮曹判書金尙憲, 亦累日絶食, 至是自縊, 爲子所救解, 得不死, 聞者莫不驚歎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9일 기사 1번째기사 1637년
윤집·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최명길(崔鳴吉)·이영달(李英達)을 파견하여 국서(國書)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보내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인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잡아 보내었다.
윤집 등이 하직 인사를 하자,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그대들의 식견이 얕다고 하지만 그 원래의 의도를 살펴 보면
본래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오열(嗚咽)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다시 이르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하고,
목이 메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단지 전하께서 성에서 나가시게 된 것을 망극
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뜻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대들에게 부모와 처자가 있는가?"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아들 셋이 있는데, 모두 남양(南陽)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부사(府使)가 적을 만나 몰락하였다고 하니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하고,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단지 70세 된 노모가 있고 아직 자녀는 없으며
임신 중인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참혹하고 참혹하다."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들은 떠나갑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세자와 함께 나가신다면
성 안이 무너져 흩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이점이 실로 염려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세자를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함께 나가지 마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차 죽을 곳에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가.
그대들이 죄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만,
만일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는 마땅히 돌보아 주겠다. 모르겠다만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의 연세는 얼마이며, 그대들의 나이는 또 얼마인가?"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어미의 나이는 무진생(戊辰生)이며 신의 나이는 무신생(戊申生)입니다."하고,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단지 조모가 있는데 나이는 지금 77세입니다.
신의 나이는 정미생(丁未生)입니다."하고,
드디어 절하고 하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앉아라.“하고,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술을 대접하게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사신이 벌써 문에 나와 재촉하고 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와 같이 급박하게 제촉하는가."하였다.
두 신하가 술을 다 마시고 아뢰기를,
"시간이 이미 늦었습니다. 하직하고 떠날까 합니다."하니,
상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소중히 하도록 하라.
혹시라도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하자,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나아가니 조금도 유감이 없습니다."하였다.
이 날 새벽에 김류(金瑬)·이홍주(李弘胄)·최명길(崔鳴吉)이 청대(請對)하여
상이 침전(寢殿) 안에 들어갔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 밖에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이루어진 말을 기록할 수 없었다.
상이 이경직(李景稷)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오늘의 말은 원래 중대한 일과는 관계가 없으니,
사관이 책(策)에 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하였다.
국서(國書)에,
"소방에 일찍이 일종의 근거없는 논의가 있어 국사를 무너뜨리고 그르쳤기 때문에,
작년 가을에 신이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자 약간 명을 적발하여
모두 배척해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수창(首倡)한 대간 한 명은
천병(天兵)이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임명하고
그 날로 즉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촉하였는데,
혹 군사에게 잡혔는지 아니면 샛길로 부임하였는지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성 안에 있는 자는 혹 부화뇌동한 죄는 있다 하더라도
앞서 배척을 당한 자에 비교하면 경중이 현격히 다릅니다.
그러나 신이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게만 여긴다면
폐하께서 본국의 사정을 살피지 못하고 신이 숨겨주는 것으로 의심하시어
신의 진실한 마음을 장차 밝힐 수 없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조사해 내어 군전(軍前)에 보내면서 처분을 기다립니다."하였다.
최명길이 두 사람을 이끌고 청나라 진영에 나아가니,
한(汗)이 그들의 결박을 풀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최명길 등을 불러 자리를 내리고
크게 대접할 기구를 올리게 하면서 초구(貂裘) 1습(襲)을 각각 지급하게 하였다.
최명길 등이 이것을 입고 네 번 절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5일 갑진 1번째기사 1637년
홍익한의 졸기
청나라 사람이 홍익한(洪翼漢)을 죽였다.
홍익한은 일찍이 장령이 되어 노사(虜使)를 베어 대의를 밝히자고 상소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병이 침입하여 서울을 떠나는 날 묘당에서 건의하여
홍익한을 평양 서윤으로 차출하여 속히 부임하게 하였다.
오달제(吳達濟)와 윤집(尹集)이 잡혀가게 되자 조정에서 평안 도사에게
홍익한을 함거에 실어 함께 노진(虜陣)에 보내게 하였는데, 심
양에 들어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죽을 때 지필을 구하여 글을 지어 그 뜻을 말하고
노인(虜人)을 꾸짖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명 조선국의 잡혀온 신하 홍익한이 화친을 배척한 뜻을 역역히 진달할 수 있으나,
다만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힌다.
무릇 사해의 안이 모두 형제는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버지가 둘인 자식은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숭상하고 간신(諫臣)은 오직 직절(直截)로 기풍을 삼는다.
그러므로 지난해 봄에 마침 언책(言責)의 임무를 부여받고,
금(金)나라가 맹약를 어기고 황제라 칭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만일 과연 맹약을 어겼다면 이는 패역한 형제이며
만일 과연 황제라 칭했다면 이는 두 천자가 있는 것이다.
한 집안에 어찌 패역한 형제가 있을 수 있으며,
천지간에 어찌 두 천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금나라는 조선과 새로운 교린(交隣)의 조약이 있는데 먼저 배반하였고
명나라는 조선에 옛부터 돌보아준 은혜가 있어 깊이 맺어졌다.
그런데 감히 맺어진 큰 은혜를 망각하고 먼저 배반한 헛된 조약을 지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의리에도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맨 먼저 이 논의를 주장하여
예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이는 신하의 직분일 뿐이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자의 분의는 충과 효를 다할 뿐인데, 위로는 임금과 어버이가 있으나
모두 보호하여 안전하게 하지 못하였고 왕세자와 대군을 포로가 되게 하였으며,
노모의 생사도 알지 못한다. 진실로 쓸데없는 상소 한장을 올림으로써
가정과 나라에 패망을 초래하였으니, 충효의 도리로 헤아려 보면
비로 쓸어버린 듯이 없어진 것이다.
나의 죄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죽어야 하고 용서될 수 없다.
비록 만번을 도륙당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달게 받을 뿐,
이 밖에 다시 할 말은 없다. 오직 속히 죽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19일 무자 3번째기사 1637년
윤집과 오달제가 문초 당하다 오달제가 죽은 일
윤집과 오달제는 청나라 병사의 후진(後陣)에 있어서 이달 15일이야 심양에 도착하였다.
19일에 용골대가 재신과 강관을 아문에 불러들여 두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황제의 말로 묻기를,
"그대들이 화친을 단절하자는 의논을 앞장서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 하겠지만 특별히 인명이 지중하여 살려주고자 하니
너희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서 살겠는가?"하니,
윤집이 대답하기를,
"난리 이후에 처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니,
천천히 들어보고 처신하겠다."하였고,
달제는 대답하기를,
"내가 참고 여기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다시 보려는 것이었다. 다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속히 나를 죽여라."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저것이 황제가 살려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항거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이제는 다시 용서할 수 없다."하였다.
재신 박황(朴潢)과 궁관(宮官) 이명웅(李命雄)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라 다만 임금과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하여
함부로 생각하였던 것을 말한 것이니 아무쪼록 그를 용서해 주시오."하면서,
간절히 부탁해 마지 않았다. 박황이 이어 뒤돌아보고 달제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유독 서서(徐庶)의 일039]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대의 노친에게 그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게 하는 것이
비록 이역에 있다 하더라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하니,
달제가 대답하지 않고 다만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호인(胡人)이 즉시 묶어다가 서문 밖에서 죽였다.
시체를 수렴하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달제가 끌려가는 도중에 시(詩)를 지어 그의 노모와 형에게 부쳤는데,
그 절구 1 수에 이르기를,
孤臣義正心無怍,
聖主恩深死亦輕。
最是此生無限慟,
北堂虛負倚門情。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하였는데, 이 글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039] 서서(徐庶)의 일 : 모친을 위하여 절개를 굽혔던 일.
조조(曹操)가 형주(荊州)에서 패배하고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아 서서를 부르니,
서서가 패업을 맹세했던 유비를 하직하고 노모를 찾아 조조에게로 간 일을 말함
《삼국지(三國志)》 권35(卷三十五).
□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8일 을사 2번째기사 1637년
심양에 배종한 재신이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이 살해당한 정상을 치계하다
심양(瀋陽)에 배종(陪從)한 재신(宰臣)이 치계하여,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이 살해당한 정상을 말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매우 슬픈 일이다. 전에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하였다. 그
래서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의 늙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월름(月廩)을 내렸다.
□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7월 4일 경오 1번째기사 1637년
사은사에게 청의 실정과 삼학사 등의 일을 묻고 술 마신 일을 문책하다
상이 사은사 이성구 등을 소견(召見)하여 이르기를,
"저들의 기색이 어떠하던가? 대우하는 것은 또한 어떠하던가?"하니,
이성구가 대답하기를,
"신들이 40일 동안 관소(館所)에 머물렀는데 20일 이전은 출입하지 못하였고,
그 뒤에야 비로소 서로 만날 수 있었으나 그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기를 돋우어 상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점점 화평하여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배례(四拜禮)는 반드시 행하게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도 예부에서 사배례를 하는가?"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장예충(張禮忠)이 ‘중국에서도 그러하였다.’ 하였고,
저들도 ‘중국의 예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하고,
도승지 김수현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하는 예는 숙배(肅拜) 때 오배(五拜)하고
예부에서는 사배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두례(叩頭禮)가 있던가?"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삼고두(三叩頭)였습니다."하고, 김수현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상서(尙書)는 앉아서 절을 받고 낭중(郞中)은 사신과 맞절하고
서장관(書狀官)에게는 읍(揖)만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서로 나누어 앉는가?"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처음 만날 때에는 저들이 북쪽 벽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에는 동서로 나누었습니다.
또 동궁(東宮)의 체후(體候)가 아주 편안하니 이것은 기쁩니다마는,
가져간 주문(奏文)은 끝내 바치지 못하였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주문 가운데에 있는 말은 분의(分義)를 거론하였을 뿐이고 사세를 논하지 않았으니,
실로 저들이 성낼세라 염려되므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감히 바치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언제쯤 서쪽으로 침범한다 하던가?"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혹 7월쯤에 군사를 움직인다고도 하고 올해에는 쉰다고도 하나,
군기(軍機)가 매우 비밀스러워 군중(軍中)에서도 모른다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에게서 군사를 징발하려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서로 통하겠습니까.
저들은 우리 나라 포수(砲手)가 정예하여 가도(椵島) 싸움에서 이에 힘입어
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잡혀간 자 1천 6백 인을 뽑아
해주위(海州衛)에서 포를 익히고 있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달제(吳達濟) 등의 일은 슬프다.
종관(從官)들이 구제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는가?"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신이 남이웅(南以雄)에게서 들으니, 용장(龍將)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이 두 사람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내가 살리려 하였는데,
그들이 반드시 죽으려 하므로 죽였다.’하더라 합니다.
문답할 때 그 뜻을 따랐으면 혹 살 길이 있었을 것인데,
오달제의 말이 ‘죽음을 참고 있는 까닭은 만일 살아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늙은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잡혀 있게 된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저들이 성내었고,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그들의 죽은 자가 장관(將官) 3백 인과 갑졸(甲卒) 7천인인데
죽은 자의 처자가 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밤낮으로 호소하므로 면할 수 없었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죽이지 않았으므로 혹 보전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면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슬프다."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서문 밖에 사람을 죽이는 곳이 있는데 뼈가 쌓여 있는 가운데에서
주검을 찾을 길이 없으므로 그 종을 시켜 초혼(招魂)하여 왔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가엾고 또한 아름답다. 대신이 말한 것을 따라
뜻을 굽혀 애걸하였더라면 혹 살길이 있었을 것인데, 되[虜]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의리 때문에 죽도록 굽히지 않아서 나라에 빛이 있게 하였다."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윤집(尹集)은 말하는 것이 오달제처럼 명백하지 못하였다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달제의 말은 매우 아름답다. 죽고 살 즈음에
명예와 절조를 잃지 않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하니,
김수현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이 공초한 말은 매우 명백하고 정당하여 보기에 어엿합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심양에서도 이런 말이 있던가?"하니,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신도 보았습니다마는, 심양에 들어간 뒤에 물었더니 몰랐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에는 본디 공초받는 일이 없으므로 공초한 말이라 하는 것은
헛되이 전해진 것인 듯하고, 글에는 각각 다른 체가 있는데
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던가?"하니,
채유후가 아뢰기를,
"글씨는 비슷합니다마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김수현이 아뢰기를, "그 종이 그 공초한 말을 얻어 왔다 합니다."하고,
이성구가 아뢰기를,
"윤집·오달제 두 사람은 다 나라의 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가엾이 여겨 돌보는 은전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시행하였다. 또 오달제의 형 중에 수령의 망(望)에 든 자가 있으니,
내가 곧 제수하여 그 늙은 어미를 봉양하게 하겠다.
배종(陪從)한 신하들은 다 한때에 가려보낸 사람인데,
이제 방자하게 술을 마시고 삼가지 않는다고 한다. 경은 친히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금지하지 않을 뿐더러 함께 마셨으니, 무슨 까닭인가?"하였다.
채유후가 나아가 아뢰기를,
"그때에 술마시고 실수한 것은 신 혼자뿐입니다. 매우 황공합니다."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말이 없다가 이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박로(朴𥶇)는 심양에 들어간 뒤로 한 번도 술잔을 잡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자신이 스스로 담당하였다 한다. 그 충성이 아름다우니
털옷 한 벌을 장만해 보내어 내 뜻을 나타내라. 저곳에 있는 종신(從臣)도
나중에 죄를 다스리겠거니와, 나온 자는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하였다.
드디어 전 사서(司書) 이회(李禬)와 전 익위(翊衛) 서택리(徐擇履)를
잡아다 추문하고 이어서 정배(定配)하게 하고, 또 사신은 파직하고
서장관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 인조실록 40권, 인조 18년 5월 20일 경자 2번째기사 1640년
평안 감사 정태화를 인견하여 사신·잠상의 일 등에 관해 의논하다
구봉서(具鳳瑞) 또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에게 유복(遺腹)의 딸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의 형인 오달승(吳達升)이 고원 군수(高原郡守)로 있을 때
달제가 가까이한 관창(官娼)이 있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북쪽 태생이어서 감히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몹시 애처롭다. 면천(免賤)하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9월 15일 계사 1번째기사 1640년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원군에 관해 의논하다
호조 판서 이명(李溟)에게 이르기를,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의 부모와 처자에게 다달이 늠료(廩料)를 지급하는가?"하니,
이명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흉년을 당해서 내가 더욱 걱정되니, 경이 잘 헤아려서 더 지급하도록 하라."하고,
또 이르기를,
"홍익한(洪翼漢)은 죄를 범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타국에서 죽었으니, 또한 매우 가엾고
측은하다. 그의 처자에게도 윤집·오달제의 처자와 똑같이 늠료를 지급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41권, 인조 18년 9월 16일 갑오 3번째기사 1640년
홍익한의 가족에게 늠료를 지급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윤집 등의 죽음을 특별히 진념하시어 은혜가 그들의 가족에게 미치니,
그 말을 들은 자가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윤집·오달제·정뇌경(鄭雷卿) 등의
어미와 아내에게는 각각 쌀 12두, 콩 2두씩 주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았습니다.
홍익한에게는 처음부터 주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아직 시집가지 않은 손녀를 데리고 현재 평택(平澤)에 있다고 하니,
그에게도 윤집 등의 관례에 따라 똑같이 늠료를 지급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8월 23일 무인 2번째기사 1644년
대신과 비국 당상 및 문학 이래를 인견하여 정사를 논의하다
석윤이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 때 신은 외방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일을 몰랐습니다.
그 후 정원에 와서 병자·정축년의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니,
오달제(吳達濟) 등을 북으로 보낼 때에 성상의 교지에서 진정으로 그를 측은하게 여기시어
심지어는 ‘너희들의 처자를 잘 보살펴 주겠다.’는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집(尹集)의 조모는 나이 90에 가깝고,
달제의 어미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모두 집이 빈한하고 자질(子姪)들이 고단하여
봉양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만일 지난날 하교하신 뜻에 따라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또 그들의 제질(弟姪)들을 벼슬자리에 채용한다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 모두 매우 감격할 것이요,
또한 국가에서 충신을 포상하여 장려하는 도리에도 합당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매월 봉록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지금은 그것을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는가?
물어서 처리하라. 벼슬자리에 채용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조금 천천히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의 노모가 살았는지의 여부를 비록 알 수 없으나,
의당 또한 오달제·윤집과 똑같은 예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그에 대해서도 하교가 있었다."하고,
□ 효종실록 2권, 효종 즉위년 11월 18일 계유 3번째기사 1649년
오달제의 노모가 죽어 해조에게 물건을 내리게 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의 노모(老母)가 죽었으니, 휼전(恤典)을 행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미처 듣지 못했다. 실로 매우 불쌍하니, 해조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넉넉히 내리게 하라. 정뇌경(鄭雷卿)의 노모에게 일찍이 선조왕 때
두루 보살피라는 특명이 있었으니, 역시 해조로 하여금 계속 거행하게 하라."하였다.
□ 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5월 14일 갑자 3번째기사 1671년
고 교리 오달제의 집에 상을 치를 물품을 내리다
고 교리 오달제(吳達濟)의 집에 상(喪)을 치를 때 필요한 물품을 내렸는데,
오달제의 처자가 여역으로 열흘 안에 잇따라 죽었기 때문이다.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오달제의 어미와 처자는 일찍이 인조 때에 늠급(廩給)의 은혜를 받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그의 처자가 한꺼번에 모두 죽었으니 매우 가엾은 일입니다.
돌봐주는 은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그 뒤에 이단하(李端夏)의 청으로 인하여 3년 동안 늠료(廩料)를 주게 하였다.
□ 영조실록 88권, 영조 32년 11월 1일 갑오 1번째기사 1756년
동지를 맞아 재신을 거느리고 명정전에서 망배례를 행하다
이날은 동지였다. 임금이 황조(皇朝)를 감념(感念)하여 문안(問安)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명정전(明政殿)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이 해가 거듭 돌아오자 풍천(風泉)165) 의 생각에 신충(宸衷)이 갑절이나 격동되어
향을 피우고 망배(望拜)하면서 옥루(玉淚)가 얼굴을 덮으니,
족히 지사(志士)와 충신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대사성 오연유(吳彦儒)가 선조(先朝)께서 어제(御製)하고 충렬공(忠烈公)
오달제(吳達濟)가 그린 묵매 장자(墨梅障子)를 올리니,
임금이 제찬(題贊)을 이어 써 하사하였다. 오언유는 곧 오달제의 증손이었다.
□ 길공구님 홈페이지에서
청실록, 내국사원당, 만문노당, 이조실록, 승정원일기, 병자록. 산성일기, 심양장계 망라
https://blog.naver.com/gil092003/221167712845
□ 바다루님의 부흥네이버대표 역사까페 “양고리 열전”
https://cafe.naver.com/booheong/159031
1) 인조 항복 결정과 淸 진영 천연두 발병
2) 삼학사 처형 전후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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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grace / 플룻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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