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①연무관 演武館) –- 연무관 演武館 -
찬바람 일렁임은 軍兵의 軍號소리
奉化路 낙엽 소린 장터의 소란스럼
발길을 잠시 멈춰서 눈을 감고 듣는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봉화로(奉化路) : 한양에서 봉화 태백산사고까지 이르는 조선 6대로의 하나로
산성구간은 (동대문-전곶교-송파진-학암동-남한산성-검북참-경안리)로 이어지는데
남한산성 연무관 아래를 지나면서 장터가 들어섰다고 한다.
덧붙임)
산성길8(광주향교길1)(1) 탐방계획
산성 근처에 살며, 산성에 오른다는 것은 幸福.
좋아하는 야생화의 寶庫이다보니 더더욱 애정이 가고,
산성의 歷史를 공부하며 재미를 붙이다 보니
산성 주변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져가고
급기야는 그 궁금증에 직접 답사하는 주말로 이어진다.
연금이능선(산성 - 연주봉 - 금암산 – 이성산성)과
벌객샘능선(산성 - 벌봉 - 객산 – 샘재)을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교산신도시 개발로 곧 사라진다는
그 고골을 관통하는 광주향교길을 가보기로 하고
지도를 보고 탐방 계획을 세워 본다.
행궁에서 현절사 앞을 지나 북문으로 가서
고골길을 경유 상사창동으로 내려간 후
다시 벌봉 방향으로 올라 연자방아를 둘러보고
법화사지까지 올라간 후 다시 내려와
덕풍천변 향교길과 춘궁로로 연결되는 마을길을 가로질러
선법사 마애불, 광주향교, 동사지등을 둘러보고
지난 번 연금이 종주시 이성산 정상과 동문지만 보았기에
이성산성을 한 바퀴 일주하기로 대략 계획을 세우고
20/11/07 토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다.
(2) 행궁-演武館-顯節祠-북문(戰勝門)
(+43=43분(08:17-09:00), +1.5=1.5km)
먼 길이 예상되어 해장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채우고
가을 속으로 깊숙이 침몰해가는 행궁 앞을 출발하여
산성 종로거리를 지나노라니 왼편에 30여 년 전 암사동 살 때
얘 엄마와 다투고 큰 애와 버스를 타고
고분다리에서 산성에 들어와 놀았던 연무관이 보인다.
그 앞은 옛 한양으로 집결되던 조선 6대로 중
봉화로(봉화-한양)가 지나는 길목으로
산성 내에만도 1,000여 호가 살았으므로
온갖 물산이 모여드는 장터였다고 하지만
이제는 빈 마당에 이른 아침 가을 낙엽만 뒹굴고 있다.
길 가에 신기전화차, 중포, 대장군포등
옛 무기들의 모형품을 전시하여 놓았는데
남옹성이 인조16년(1638년) 축성되었으며
호란의 결정적 패인인 홍이포가 영조7년(1731) 시제품이 제작되었으므로
이런 대장군포 정도가 남옹성에 배치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행궁앞(08:18, 행궁0.2k, 북문0.4k, 서문1.3k, 남문0.7k, 수어장대2.1k, 상사창동3.9k)
2) 행궁로(08:21, 영월정0.6k, 행궁0.4k, 수어장대1.2k, 지수당0.2k,동문1.1k, 검복리주차장2.1k)
3) 연무관(08:24) 봉화로가 내려다 보이는 무예훈련, 무예시험을 보았다 함.
4) 조선 6대로의 하나인 봉화로 옆 산성장터, 송파장, 수원장과 더불어 번창
4) 연무관 앞 산성장터에 전시된 조선의 화약무기 – 하만 청군의 홍이포에는 속수무책
5) 노랑색(연금이능선, 산성 - 연주봉 - 금암산 - 이성산성) 기답사산행도
빨간색(벌객샘능선, 산성 - 벌봉 - 객산 – 샘재) 기답사산행도
백색(광주햔교길, 북문-상사창동-연자방아-법화사지-선법사-광주향교-동사지-이성산성
6) 조선시대 6대로(신경준, 『도로고』, 1770)
7) 대동지지(1864년) 원형 노선
남한산성 옛길(봉화로) 전체(한양 ∼ 봉화 총 500리, 196km)
(한양) 전곶교 → 신천진 → 송파진
(경기) 율목정 → 남문 → 검북참 → 경안역 → 쌍령점 → 곤지애 → 이천 → 장해원
(충북) 오갑 → 용당 → 충주 → 황강역→ 수산역 → 장위점 → 단양 → 죽령
(경북) 창락역 → 풍기 → 창보역 → 영천→ 내성점→ 봉화
8) 자전곶교지광주략도에 나타난 남한산성 옛길
□ 봉화로(奉化路) -사고(史庫)로 통하는 길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70년에 그의 저작 '도로고'(道路考)에서
처음으로 조선의 간선도로를 6대로(大路)로 파악하였고,
이후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4)는 1860년대에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그것을 10대로(大路)로 확대해 규정한 바 있다. 약 100년 사이에 네 개의 대로가
추가된 셈이다. 이 중 첫 번째 대로(大路) 즉, 조선시대 7대로가 곧 '봉화로'(奉化路)이다.
봉화로에 대로의 자격이 부여된 때는 19세기 초반으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와
'산리고'(山里考) 등의 자료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봉화로의 출발점이 한양인 것은 다른 대로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종점이
보통의 고을이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라는 특정 지점인 것은 이채롭다.
이 사고가 설치된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의 각화산 산중이다.
조선의 실록은 처음에 춘추관과 충주사고에서 보관했는데, 세종 대에 증설의 필요를
느껴 경북 성주와 전북 전주에 사고를 더 설치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전주본을 제외한 다른 실록이 소실되었고, 이에 전주본을 바탕으로 명종까지의 실록을
다시 만든 후 평북 영변의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해 전주본을 옮기고,
강릉 오대산과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에 사고를 더 지어 새로 간행한 실록을
분산·보관하기 시작했다. 전주본은 이후 1628년(인조 6)에는 강화의 마리산으로,
1660년(현종 1)에는 같은 섬 안의 정족산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500년을 써 내려온 역사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에 조선왕조실록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더불어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으며,
2001년 9월에는 승정원 일기와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체요절(하권)이
추가로 지정됐다. 세계기록유산은 2004년까지 세계적으로 총 90건이 지정돼 있다.
봉화로의 종점이 하필 태백산사고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주·무주·강릉·강화 등이 각기 통영로·제주로·평해로·강화로 본선 또는 지선이 지나고
있으므로 사고는 기본적으로 대로로 연결되는 주요 지점으로 인식되었던 듯 하다.
대강의 봉화로 경로를 살펴보면, 한성의 동대문이나 광희문을 나선 봉화로는
살곶이다리로 청계천을 건넌 후 송파진, 광주 경안동과 곤지암·이천·음죽을 경유해
경기도를 벗어난다. 이 후 충주·단양·죽령·풍기·영주 등을 지나 봉화까지 이어진다.
봉화로는 경기도 이천과 충청도 충주의 가흥창 및 서창에서 분기하는 3개의 1차 지선이
있는데, 여주·제천·영춘·청풍·순흥·예안 등이 이들 지선으로 연결된다. 봉화로에 대한
도로관리는 한성에서 음죽까지는 경안도(慶安道)에서, 이후의 구간은 연원도(連原道)에서
담당했다. 오늘날 봉화로 노선은 대체로 서울에서 장호원까지 3번 국도가,
장호원에서 충주까지는 38번 국도가, 충주에서 죽령까지는 36번 국도가,
죽령 이후 봉화까지는 5번 국도 및 36번 국도가 계승하고 있다.
'대동지지'에 의거한 경기도내의 봉화로의 노선은 다음과 같다.
'경도(京都)~전곶교(箭串橋, 10리)~신천진(新川津, 10리)~송파진(松坡津, 5리, 가장 가까운
남쪽의 율현까지 15리, 추령까지 30리, 용인까지 20리, 가장 가까운 남쪽의 나루인 심정까지
20리, 이보현까지 5리, 신현까지 15리, 경안역까지 10리)~검북참(黔北站, 15리)~경안역(慶安
驛, 15리)~쌍령점(雙嶺店, 10리)~곤지애(昆池厓, 10리)~광현(廣峴, 15리)~이천(利川, 20리,
서울에서 130리, 분기점)~장등점(30리, 광현으로 진입하지는 않고, 이천까지 직진거리로
45리)~음죽(陰竹, 20리, 서울에서 180리, 동북방향의 여주까지 50리)~장해원(長海院, 10리)'
'대동지지'의 '정리고' 성내분로조(城內分路條)에 따르면 도성에서 살곶이다리(箭串橋,
서울시 사근동)까지의 길은 흥인문, 동묘, 영도교, 왕십리, 차현을 지난다. 영도교는
청교천 본류에 가로 놓인 다리로 황학동에 있었고, 황학동에서 중앙시장을 지나
왕십리길을 통해 살곶이다리까지 이어졌다. 차현은 수레의 왕래가 빈번해 붙은 이름으로
현재 한양대학교 교내에 편입돼 있다.
살곶이다리는 중랑천에 놓인 다리이고 이를 건너면 뚝섬(살곶이벌), 자양동,
신천진(서울시 신천동)으로 이어진다. 신천진은 잠실도(蠶室島)의 북안에 위치한 나루로,
남안에는 잠실이 있었고, 여기서 다시 한강을 건너면 송파진에 닿았다. 지금은 신천진
자리에 잠실대교가 놓였고, 송파진은 송파대로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1890년
중반에 측도된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남영우 편, 1996, 성지문화사 영인본)와
1910년대에 일제가 제작한 5만분의 1 지형도에 잘 나타나 있다.
송파진을 건넌 이후의 봉화로는 문정동까지 송파대로와 일치하고, 올림픽훼밀리타운 아파트
단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파세무서, 서울여학생 생활교육원,
하남시 학암동, 남한산성까지, 남한산성부터는 308번 지방도로를 따라 검북참(광주 중부면
검북리), 오전리, 새우고개(蝦峴), 목현리, 경안리까지 이어진다. 광주는 1626년(인조 4)에
남한산성을 쌓고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있던 치소를 성안으로 옮겼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읍격이 유수부로 승격하였다. 읍치가 성 밖 경안리로 나온 것은
1906년으로, 경안리는 오래 전부터 경안역, 파발막, 관청, 장시가 밀집한 광주의 중심지였다.
경안리에서 장호원까지는 3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대쌍령과 소쌍령으로 이어지는 쌍령은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그 너머에 쌍령점이 있으므로 오늘날 쌍동리에 해당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경안천의 지류인 곤지암천이 합수한다. 곤지애(실촌면 곤지암리) 역시 경안동과
마찬가지로 5일장의 역사가 오랜 곳이다. 마을 서쪽에 뾰족바위를 곤지바위로 부른데서
이름이 붙은 곤지암은 봉화로를 기반으로 실촌면은 물론 이 일대의 상업요지로 기능해
왔으며, 최근에는 중부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건설되면서 중심성이 더욱 높아졌다. 넋고개
로도 불리는 광현(실촌면 신촌리)은 경안천과 복하천의 분수령이 되면서 동시에 광주와
이천의 경계점이 된다. 장등점은 여주군 가남면 태평리 섬배(蟾背, 섬비)마을로 추정된다.
음죽은 청미천 유역에 위치한다. 1914년 이천으로 편입되면서 청미면이 되어 군으로서의
이름을 잃었다. 장해원은 오늘날의 장호원으로, 음죽의 치소가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장호원은 전국의 시장 정보가 최초로 수록된 자료인 '동국문헌비고'(1770) 때부터
지금까지 5일장이 개시되는 곳으로서 음죽의 전통적인 상업요지이다.
장호원은 일찍이 1941년에 읍으로 승격된다.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사지리학자〉
□ 연무관(演武館)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0-1
연무관은 문무관 시험을 보는 공개적인 시험 장소였으며
특히 무기 시연은 물론 주조(晝操)·야조(夜操) 등의 군사훈련을 거행했던 장소였다.
2009년에 연무관 해체보수 중 어칸 종도리 하부의 중수기와 외목도리에서 상량문 수습됐다.
상량문이 기록돼 있는 외목도리는 전에 종도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인조 3년(1625)에 창건해 숙종28년(1702)에 대대적으로 중수해 입주상량한 기록이 돼 있고,
종도리 안에 봉안돼 있던 중수기에는 영조 39년(1763)의 중수기록과
고종 10년(1873)의 중수기록이 돼 있어 대략 60년 간격으로 수리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잦은 수리가 이뤄져서 그런지 근래 보수 전 연무관의 평면이 독특했다.
정면은 5칸 인데 반해 후면은 6칸으로 후면 중앙에 기둥을 덧달아 사용한 것인데
해체 후 발굴결과 연무관지는 고려시대 문화층부터 근현대까지 5차례에 걸친 층위가
중복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2009년 보수 시 후면 중앙에 덧달았던 기둥을 없애고
5칸으로 다시 고쳤다. 연무관은 수어장대와 같이 팔각의 주초 위에 원형의 기둥을 사용했고,
공포는 초익공으로 장식했다. 후면의 퇴칸은 마루를 깔지 않고 강회다짐한 흙바닥으로
돼 있는데 건물 내부에서 끝부분 여닫이 판문을 통해 나갈 수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으로 건물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고종 4권, 4년(1867 정묘 / 청 동치(同治) 6년) 9월 11일(신유)
서장대와 남장대를 돌아보다, 서장대(西將臺)와 남장대(南將臺)를 두루 보았다.
이어 연무관(演武館)에 나아가 야조(夜操)를 보고 돌아와 행궁(行宮)에서 경숙(經宿)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 6) 9월11일 (신유) 맑음
남장대에 친림한 뒤 연무관으로 가서 야조를 거행할 것이라는 하교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남장대(南將臺)에 친림한 다음 그대로 연무관(演武館)으로 가서
야조(夜操)를 거행할 것이니, 해방은 그리 알라.”했다.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 6) 9월11일 (신유) 맑음
대가가 서장대와 남장대에 나아갔다가
연무관에 임해 야조를 거행할 때 겸도승지 김병지 등이 입시했다.
□ 일성록(日省錄)
-정조3년 기해(1779,건륭 44) 7월 8일(경인)
남한산성의 성조(城操)를 한 방면에서 거행하라고 명했다.
좌의정 서명선이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 연석에서 삼가 연병관(鍊兵館) 앞에서 군병을
시열(試閱)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므로 물러나 그곳의 지형과 규모를 물어보았더니,
좌작진퇴(坐作進退)를 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군대가 좌작진퇴를 하지 못한다면
군용(軍容)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의 성조를 빠뜨리고 행하지 않은 지가
2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이번에 만일 한 방면에서 조련을 행한다면 광주(廣州) 위아래
지역에 있는 아병(牙兵) 2초(哨), 남한산성 안의 승군(僧軍) 1초, 과거에 응시한 무사 가운데
수첩군관(守堞軍官) 200명, 그 나머지 남한산성 안의 표하군(標下軍)과 잡색군(雜色軍)을
통틀어 계산해 보면 족히 1000명은 됩니다. 길을 닦는 등의 잡역(雜役)을 제외하고
서남쪽 한 방면에 배열해 성조를 거행하되, 성상께서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그 절주(節奏)를 내려다보신다면 좋을 듯합니다.”해, 그대로 따랐다.
□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경영진식(京營陣式) 수어청(守禦廳)남한수성(南漢守城) 전영의 전·좌·중·우·후사 각 5초는
남문에서 동문까지 벌려 서며, 좌영의 전·좌·우·후사 각 4초는 남문에서 서문까지 벌려 서며,
중영의 전·좌·중·우·후사 각 5초는 서문에서 북문으로 향해 장경암문(長慶暗門)까지
벌려 서며, 우영의 전·좌·우·후사 각 4초는 장겸암문에서 동문까지 벌려서며,
후영의 전·좌·중·우·후사 각 5초는 봉암(蜂巖)에서 한봉(汗峰)까지 벌려 서며,
친아병인 중사 5초는 연병관(練兵.) 앞에 진을 치고, 좌사의 5초는 동돈(東墩)에 벌려 서며,
우사의 5초는 서돈(西墩)에 벌려 서며, 좌영 마병의 좌초 및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전초는
남문 통로의 유병(遊兵)이 되며, 마병의 중초 및 훈영과 어영의 좌초는
서문 통로의 유병이 되며, 마병의 우초 및 훈영·어영의 중초는 북문 통로의 유병이 되며,
우영 마병의 좌·중초 및 훈영·어영의 우초는 동문 통로의 유병이 되며,
마병의 우초 및 훈영·어영의 후초는 봉암 통로의 유병이 되며,
난후마병의 1초는 서장대(西將臺)의 뒤에 진을 친다.
□ 관련 문화재연무관 상량문(演武館 上樑文)
‘숭정기원후삼계미오월초육일상량’으로 시작되는 연무관 상량문이다.
숭정(崇禎,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의 연호를 쓴 때부터 계미년이 세 번째로
돌아온 해인 영조 39년(1763)에 연무관을 중수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연무관중수(演武館重修)’로 시작되는 상량문이다. 상량문 첫 부분에
‘숭정기원후사계유(崇禎紀元後四癸酉)’의 연대가 순조 13년(1813)으로 계산되나,
상량문 내용 중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曺錫雨)는 1873년에 유수를 역임했고,
판관 조희석(趙熙奭) 역시 1873년에 판관을 역임했으므로 상량문의 연대는
고종 10년(1873)으로 추정된다. 연무관 중수에 참여한 유수, 판관 등의
관리와 목수 등 기술자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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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cence 순결 / Nikos Ignatia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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