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산성길8(광주향교길1, 20/11/07, Take my hand / Omar Akram)

이름없는풀뿌리 2020. 11. 16. 21:44
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 갔었던 한 장 歷史 왔었던 거친 바람 아무런 저항 없이 휩쓸려 흘러가고 어떠한 그림 그리려 長鋒筆 붓 들었나?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장봉필 붓 : 모양에 따른 붓에는 장봉필(長鋒筆), 단봉필(短鋒筆), 면상필(面相筆), 작두필(雀頭筆)등이 있는데 장봉필(長鋒筆) 붓은 털이 긴 붓으로, 편지를 쓰거나 긴 선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데 털이 긴 만큼 사용자의 기량이 요구되며 큰 글씨를 쓰는 데 적합하다. 산성길8(광주향교길1) (1) 탐방계획 산성 근처에 살며, 산성에 오른다는 것은 幸福. 좋아하는 야생화의 寶庫이다보니 더더욱 애정이 가고, 산성의 歷史를 공부하며 재미를 붙이다 보니 산성 주변에 대한 호기심으로 번져가고 급기야는 그 궁금증에 직접 답사하는 주말로 이어진다. 연금이능선(산성 - 연주봉 - 금암산 – 이성산성)과 벌객샘능선(산성 - 벌봉 - 객산 – 샘재)을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교산신도시 개발로 곧 사라진다는 그 고골을 관통하는 광주향교길을 가보기로 하고 지도를 보고 탐방 계획을 세워 본다. 행궁에서 현절사 앞을 지나 북문으로 가서 고골길을 경유 상사창동으로 내려간 후 다시 벌봉 방향으로 올라 연자방아를 둘러보고 법화사지까지 올라간 후 다시 내려와 덕풍천변 향교길과 춘궁로로 연결되는 마을길을 가로질러 선법사 마애불, 광주향교, 동사지등을 둘러보고 지난 번 연금이 종주시 이성산 정상과 동문지만 보았기에 이성산성을 한 바퀴 일주하기로 대략 계획을 세우고 20/11/07 토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다. (2) 행궁-演武館-顯節祠-북문(全勝門) (+43=43분(08:17-09:00), +1.5=1.5km) 먼 길이 예상되어 해장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채우고 가을 속으로 깊숙이 침몰해가는 행궁 앞을 출발하여 산성 종로거리를 지나노라니 왼편에 30여 년 전 암사동 살 때 얘 엄마와 다투고 큰 애와 버스를 타고 고분다리에서 산성에 들어와 놀았던 연무관이 보인다. 그 앞은 옛 한양으로 집결되던 조선 6대로 중 봉화로(봉화-한양)가 지나는 길목으로 산성 내에만도 1,000여 호가 살았으므로 온갖 물산이 모여드는 장터였다고 하지만 이제는 빈 마당에 이른 아침 가을 낙엽만 뒹굴고 있다. 길 가에 신기전화차, 중포, 대장군포등 옛 무기들의 모형품을 전시하여 놓았는데 남옹성이 인조16년(1638년) 축성되었으며 호란의 결정적 패인인 홍이포가 영조7년(1731) 시제품이 제작되었으므로 이런 대장군포 정도가 남옹성에 배치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산성센터 맞은편에서 왼 쪽 알림목대로 따라가니 단풍이 절정인 경건한 계단 위의 현절사 지붕이 숙연하다. 병자호란(1636) 주요 관련자들의 호란 당시의 나이를 정리하여 보았다. 청태종(홍타이지, 1592 ∼ 1643) 45세 용골대(잉굴다이, 1596 ∼ 1648) 41세 인조 (1595 ∼ 1649) 42세 최명길(1586 ∼ 1647) 51세 홍익한(1586 ∼ 1637) 51세 윤집 (1606 ∼ 1637) 31세 오달제(1609 ∼ 1637) 28세 김상헌(1570 ∼ 1652) 67세 정온 (1569 ∼ 1641) 70세 이서 (1580 ∼ 1637) 57세 김류 (1571 ∼ 1648) 66세 김자점(1588 ∼ 1651) 49세 나만갑(1592 ∼ 1642) 46세 원두표(1593 ∼ 1646) 45세 김준룡(1586 ∼ 1642) 51세 임경업(1594 ∼ 1646) 43세 정두원(1581 ∼ ?) 56세 윤집과 오달제는 척화를 주장하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심양에 끌려가 죽었으나 호란 52년 후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산성 현절사에 배향되어 김상헌, 정온과 함께 대대로 존숭 받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만 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역의 북풍한설 속 타국에서 효수되었다니 참으로 애석타. 삼학사에 대하여 신흥강대국 청나라의 시대에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고지식하게 斥和만을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고 하지만 明의 인구가 1억5천만, 朝鮮 인구가 1천만, 後金은 겨우 30만이었고 그들 침략군이 10만 군대였다고 하지만 여진, 몽고, 한족등 연합군이었고 조선만 하더라도 14만 정도의 군대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결사의 항전을 주장할 수 있는 당위성이 있었고, 항복으로 인한 삼배고구두례의 치욕은 차지하고라도 호란 후 60만명(전인구의 6%)이나 되는 포로가 끌려가고, 그리고 패전국으로서 각종 조공품 상납, 명과의 전쟁 지원, 쇄환 포로로 인한 사회문제, 이혼, 고아들에 대한 문제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회 붕괴 현상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결사항전을 주장한 그들이 전혀 터무니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만일 정규군 14만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고 임진왜란 때와 같이 세자로 하여금 分朝활동을 하고 점점 일어나고 있던 후방의 의병들을 잘 활용했더라면 백마산성등 많은 성을 우회하여 한양과 임금 생포라는 목표만으로 고립무원으로 진격한 그들에 대하여 충분히 승산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더구나 그들 군영 내에는 북방에서 경험하지 못한 천연두가 발생하여 오로지 한시바삐 전쟁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슴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북문으로 향하여 가니 고즈넉한 오솔길에 단풍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유난히 스산한 바람과 더불어 현절사에 봉안된 우국지사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쨋튼 겨우 한번 전쟁에 쓰려고 이런 성곽을 쌓고 중수했는지 평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만사 유비무환이란 말이 실감나며 산성이야말로 그러한 정신을 대변한다고 절실히 느끼다. 이윽고 북쪽 성곽이 나타나 오늘 가야할 산성 너머의 고골계곡 아래 상사창리를 내려다보니 남한산성 입성 후 최초의 승리를 거둔 북문 담당 원두표 장군이 생각나고 승첩 11일만에 체찰사 김류의 대책없는 법화골 출천으로 몰살당한 8명의 지휘관과 300명의 사졸들의 넋이 생각나고 청군이 망월봉에서 홍이포를 쏘아대는 포탄에 상사창리의 司倉 지붕이 날아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호란 140여년이 지난 1779년 정조는 이곳에 들려 김류의 대참패를 상기하면서 다시는 이런 참혹한 패배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북문을 최초로 全勝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3) 북문-연자방아-법화사지왕복-연자방아입구 (+140=183분(09:00-11:20), +4.8=6.3km) 북문에서 남문 구간은 여전히 공사로 인한 펜스 통제. 원두표 장군이 내려간 그 길, 광주목의 읍치가 춘궁동 일원에서 산성으로 옮겨 감에 따라 한강에서 운반되던 각종 세곡 물품 임시 보관소인 司倉이 있었다 해서 상사창리, 하사창리란 地名으로 남아 있다하며 그래서 춘궁동에서 북문까지의 길을 稅米길이라 한다고 한다. 한양으로 집결되던 6대로의 하나인 그 봉화로를 오가던 마방과 마패, 마차에 대한 알림글을 읽고 있노라니 꼬불꼬불한 산길을 등짐 가득지고 힘겹게 오르던 牛馬들의 워낭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산비탈길을 내려가니 긴 목제 계단 登路가 보였는데 계단의 하단부가 고골계곡의 반딧불서식지인 것 같은데 이정표에는 그 지명이 보였지만 막상 그 지점에는 어디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고 수풀만 우거져 있다. 고골은 상사창동, 하사창동, 춘궁동, 항동, 교산동을 아우르는 지역명칭이라는데 광주읍치(관아)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읍(古邑)으로 불리다가 “고고을”을 거쳐 “고골”로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광주부 혹은 광주목은 현재 광주시 만이 아니고 예전에는 서울 강남, 송파. 강동, 경기 하남, 성남을 포괄할 정도로 방대한 지역이었는데 1960년대에 서울 강남, 송파, 강동에 이어 1970년대에 경기 하남, 성남이 떨어져 나갔다하며 그 읍치는 현재의 이 곳 춘궁동, 송파 가락리 등에 있다가 산성내로 옮겼다하며 한 때는 경기 관찰사도 그 治所에 주재했다고 한다. 그러한 유래를 생각하면서 고골계곡을 지나니 앞에 덕풍천 한강합류점 8.5km란 표지판이 보인다. 덕풍천 호안을 잘 살펴보니 성벽돌 같은 네모난 돌들로 잘 쌓아 놓았다. 예전의 치수 사업의 흔적인 듯 돌 색깔이 고색창연한데 신도시 개발자들이 이런 호안벽은 잘 살렸으면 좋겠다. 이윽고 연자방아 입구를 지나 오른편 벌봉 가는 길목에 접어드니 단독주택이 들어선 상사창동 마을인데 집 앞의 채전을 만든 돌담 등이 오래된 성벽돌 같다. 춘궁동, 궁안마을 등 유래에서 보듯 이곳에 백제 궁궐터가 존재했다는 설화가 있고 실재 객산 중턱에서 성터를 발굴했다는데 발굴유물이 고려시대 것이어서 백제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해 백제의 연관성은 섣불리 단정하지 못한다는데 이는 이성산성도 마찬가지라 한다. 이성산성은 백제의 두 왕자가 지킨 성이라는 설화가 있는데 정작 발굴 유물은 신라시대의 유물이어서 신라의 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잘 못이라고 본다. 발굴 유물의 정확성, 발굴지 이하의 층의 조사, 주변 설화조사, 사료조사등 모든 것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한다고 본다. 동네 골목을 돌고 돌아 들어가니 연자방아가 팔각지붕 아래에 시간을 멈추고 갇혀있다. 이런 연자방아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아 상당한 기대를 했는데 조금 실망. 상량문을 보니 병자년이라 했는데 1936년(병자년)에 방앗간집을 지은 듯... 따져보니 공교롭게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난 300주년에 지은 셈. 우연일까? 상사창리 주민들이 역사의식을 갖고 지은 걸까? 안내문에도 193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898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로 동력이용 정미소가 설치되고 1930년대 후반에 일제에 의해 수탈용으로 전국에 2,000여개의 도정공장 설치하였다고 하니 이러한 연자방아가 거의 우리나라 마지막 모습이 아닌가 생각. 연자방아를 보고 법화사지 이정목을 찾아보아도 보이질 않아 왼편 능선을 타면 될 거라 생각되어 동네 골목을 돌아가니 웬 전통한옥이 보이고 텃밭들이 즐비하다. 텃밭 사이 오솔길을 지나니 예상대로 법화사지 1.1km란 이정목 출현. 제대로 오긴 온 것 같은데 1.1km라면 거의 벌봉 근처일 것 같은데... 500여m의 표고를 치고 오르면 지치지는 않을까 생각되어 법화사지를 다음으로 미룰까 고민하다가 지금까지 산행하면서 계획을 미룬 적이 없기에 계획대로 법화사지를 보고 내려와 선법사, 동사지, 광주향교, 이성산성을 강행하기로 마음을 다잡다. 법화천을 끼고 오르는 길이 처음엔 밋밋했지만 예상대로 가팔라지며 다리 힘이 점점 빠지지만 1시간여 이를 악물고 오르니 그 유명한 법화사 부도 출현. 내가 여기를 기필코 오르려 했던 이유는 지난번 벌객샘 능선 종주시 벌봉 근처에서 이곳 법화사지가 『법화장군(法華將軍』이라 불린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인 양고리(楊古利)가 조선의 원두표(元斗杓) 장군의 계략으로 이곳에서 전사하자 훗날 청 태종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법화사라는 절을 지었다』라는 안내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백양고리는 청의 서열 11번째 장수로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김준룡 장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각종 史書에 나오는데 왜 이곳에 양고리의 유적이 있는냐의 의문이 일었다. 또한 유래를 소개하면 전북 고창에서 전남 장성으로 넘어가는 방장산 아래 양고살재란 고개가 있는데 광교산 전투에서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 휘하에 복무한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사살하였는데 인조가 항복을 함에 따라 淸을 두려워하여 그런 사실을 숨기었으므로 박의장군은 낙향하여 살았다고 하며 그것을 기념하여 양고살재라 하였다고 박씨 종중에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확인하여 볼 일이다. 2011년 발굴조사에서 법화사지의 유물이 고려 초에서 조선말까지 다양하게 발견되었고 중창과 폐사가 반복되었다는 설명. 양고리와 법화사지 관련성에 대한 필자의 추론은 1) 양고리가 광교산에서 박의인지, 무명의 조총병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전라병사 김준룡 장군 병력에의해 1637/1/7 즈음에 피격된 것으로 보임 2) 청태종이 탄천에 진을 친 날 황산을 쓰고 망월봉(벌봉)에서 행궁을 내려다보았고 그곳에서 행궁과 사창을 향하여 홍이포를 발사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 법화골, 벌봉 근처는 청군이 진주한 것으로 보여져 3) 파격 당한 양고리가 다친 몸 혹은 주검으로 청군 진영인 벌봉 근처로 이동되어 4) 이곳에서 죽자 청 제국 서열 11위로 누르하찌의 사위이자 홍타이지의 매부인 그의 죽음에 대하여 청태종은 식음을 전폐하고 애도했다고 하며 5) 이곳에 고려초부터 존재했던 법화사에 양고리를 화장하고 안식처를 두었다고 짐작 6) 여기에 설명된 원두표장군에게 이 근처에서 사살되었다는 설명은 원두표 장군의 북문에서 남한산성 입성후 첫 승첩(1636/12/18)의 사실과 결합된 가설로 보임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온 길을 되짚어 늦가을 법화골 풍광을 즐기며 다시 연자방아를 들여다 보고 덕풍천까지 내려와 덕풍천 주차장을 지나 덕풍천을 따라 향교길을 걷다. (4) 연자방아입구-덕풍천 광주향교길-선법사 (+150=333분(11:20-13:50), +5.8=12.1km) 연자방아 입구로 내려와 광주향교로 가는 이정목이 군데군데 설치된 덕풍천을 하염없이 따라가니 곧 교산시도시로 개발될 예정이라는 온갖 현수막이 걸려있다. 결사반대. 개발회사들의 회유 – 이런 현수막을 보니 곧 철거작업이 임박한 것 같다. 선진국들이야 국민들의 의사를 하나하나 존중하여 개발되기에 한국 같은 신도시가 들어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데 OECD에 진입한 우리는 아직도 개발도상국 시절의 토지수용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위정자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역사고 주민의사고 뭐고 다 뭉개고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이곳이 유서 깊은 동네라 기대했지만 가만 살펴보니 옛 냄새는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고 온갖 조립식 가내 공장이 난립하고 쓰레기가 골목마다 엉켜있다. 하지만 건축물을 받치고 있는 토대의 돌들을 살펴보니 춘궁동 객산 아래 있었다는 성터에서 날아온 돌인 듯 성벽돌들이 줄지어 쌓여진 모습이 간혹 눈에 띈다. 경기도, 충청도등 수도권 시골 동네 어디를 가 봐도 하늘에 난무하는 전깃줄과 철탑과 조립식 공장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옛 시골의 아기자기한 골목에 어우러진 촌집들과 전답이 어우러진 그런 시골은 강원도나 충청권 이남의 평지가 아닌 산골을 찾아야 겨우 눈에 띌 정도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지만 그러한 현실이 서글픈 것은 사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신도시로 개발된다고 무작정 반대할 일은 아니지만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와 설화가 녹아있는 곳이기에 그러한 역사와 설화와 유물을 철저히 고증하고 조사하여 신도시의 공간과 지명과 시설에 반영하여 예쁜 도시로 만들어주길 도시설계 입안자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그렇게 공장들과 주택과 전답이 뒤엉킨 덕풍천변 고골길의 춘궁로(상사창동, 하사창동, 춘궁동, 항동, 교산동)를 지나오니 어느덧 객산 아래에 도착했는데 뒤엉킨 공장들과 주택들의 막다른 길이다. 동네 아주머니에 선법사 가는 길을 물으니 휴대폰 길찾기를 보라는 쉬운 대답. 휴대폰 길찾기로 보니 숲 하나만 가로지르면 될 거리. 숲을 헤집고 나아가니 송아지만한 고라니가 놀라 달아나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선법사라 짐작되는 사찰의 추녀가 보이다. (5) 선법사-광주향교-황골마을-동사지 (+50=383분(13:50-14:40), +3.1=15.2km) 선법사 유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객산 아래 바위벽에 새겨진 태평2년銘 『太平二年 丁丑 七月九日 古石佛在如賜乙 重脩爲今上 皇帝萬歲願』 (太平 2년 정축 7월9일에 ‘如賜乙’에 있는 옛 석불을 임금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황제여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으로 유명. 마애약사여래좌상이 불상이 만들어 진 것은 고려 초 5대 경종(景宗 : 太平은 경종의 연호) 때(997년)로 백성들이 임금을 황제라 칭하고 황제의 만세를 기원하여 세운 불상이란다. 곳곳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다른 마애불과 달리 이 불상은 규모는 작지만 조성된 시기와 만들게 된 동기 등을 명시하고 있으며, 조형미가 뛰어나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마애약사여래좌상 옆에는 온조왕이 마셨다하여 어용샘으로 부르고 있는 약수가 있어 한 잔 마셔보고 선법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만 어디에고 사찰에 대한 기록은 없고 백제시대의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하기도 한다는데 그러나 지금은 선법사의 모든 것이 세월에 묻히고 역사는 흩어져 버려 신축한 극락보전과 삼성각이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는데 높은 계단 위의 극락보전이 오래전 가 보았던 덕유산 백련사 대웅전을 연상케 한다. 극락보전 계단 아래를 돌아 나오니 객산과 선법사 갈림목이 나오는 광주 향교로 가는 서하남로인데 大路 옆에 강릉막국수가 있어서 먹어보니 별미. 잠시 휴식 후 서하남로를 건너 드넓은 덕풍천 하류의 물결을 바라봄. 연금이능선과 벌객샘능선에서 모아지는 모든 물들이 흘러들어 아리수까지 실어 나르는 덕풍천이 드넓어 제법 하천의 위용을 지녔다. 바로 덕풍천 옆에 자리한 광주 향교 공원. 향교(鄕校)는 각 지역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보통교육을 담당하였던 국립학교였단다. 이곳에서 수학한 우수한 학생 중에 선발하여 고등교육 기관인 한양의 성균관으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광주향교는 원래 고읍 서쪽(현 향여고개 아래로 짐작)에 있었는데 1703(숙종29)년에 이 곳에 있던 광주 읍치는 산성 안으로 이전하고 그 읍치가 소재했던 장소로 향교가 이전 했다는데 외삼문을 들어서서 유생의 숙소였던 동재와 서재를 바라보며 뒤꼍의 시종들 숙소인 수복사도 들여다보고 전사청과 제기고터도 눈 맞춤을 하고 講論을 하던 明倫堂을 경건히 바라보다 내삼문을 지나 東廡와 西廡를 좌우에 거느린 大成殿에 모셔진 儒祖를 생각하며 대성전 뒤편 오랜 연륜의 향나무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건물 하나하나에 인사드리고 사오백 년 된 광주향교 주변의 고목들은 이곳에 소재했던 읍치와 객사와 청풍루와 동경주, 휘달려가던 마방들의 역사를 알고 있겠다는 생각. 향교를 나와 전번 연금이 능선 종주시 덜미재에서 보았던 황골마을을 길찾기로 찾아갔으나 찾긴 찾았으되 현대식 주택단지만 자리했고 황금물결 넘실댔다던 들판은 도무지 보이지 않다. 궁안마을 이라는 지명이 살아있는 마을회관과 당산목 아래 大同祭란 토주신께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제단 보임. 그러나 이런 것들도 신도시 개발로 철거가 분명한데 제발 저런 지명, 유물이 유적공원을 만들어 보존되길 빌어본다. 다시 길찾기로 텃밭촌을 지나 구릉지의 길 없는 산속을 헤치고 나오니 저 멀리 잘 생긴 탑들이 보이는 桐寺址인 듯 정갈한 2기의 탑파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6) 동사지(桐寺址)-이성산성 한바퀴-이성산성입구 (+100=583분(14:40-16:20), +3.2=18.4km) 드넓은 桐寺址의 마당에 낙엽이 수북히 쌓여 뒹구는데 탐방객 하나 없다. 지난번 연금이 능선 종주시 桐寺址를 꼭 가 보리라 다짐했는데 그 때 기대했던 오동 숲은 물론 오동나무 한그루도 없다. 세워진 사찰도 동사(桐寺)가 아닌 다보사(多寶寺)이다. 보물급 문화재 3층석탑과 5층석탑 2기만이 그 이력을 말해주고 있다. 안내문에는 발굴지 규모로 보아 이 곳 동사가 신라 황룡사와 맞먹는 규모로 큰 사찰이었다 한다. 남한산성 북쪽 춘궁천 골짜기 고골지역에는 동, 서쪽 산줄기를 따라서 10여기의 절터 들이 발견되고 있다는데 특히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왕궁 터 또는 邑治였던 고골일대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말해준다 하겠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교산동 선법사(善法寺)와 춘궁동 동사(桐寺)를 꼽고 있다는데... 춘궁동 궁말에 자리한 옛 절 동사(桐寺)는 고려초(광종~경종)에 백제의 옛 절터에다 대규모로 증축한 절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 초인 961~978년 사이 동쪽 객산 아래 선법사와 여기서 2km정도 거리의 서쪽 桐寺에서 동시에 역사에 남을 불사(佛事)가 이루어 졌다는데 고려 초 이곳 춘궁동, 교산동 지역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짐작해 보건데 이 시기와 관련되는 인물로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관여한 왕규(王規 ? ~ 945년)라는 호족과 관련이 있다 한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왕규는 이곳 광주(하남) 출신으로 그의 두 딸을 태조 왕건의 15, 16번 째 왕비로 출가시켰다. 16번째 왕비가 된 딸 소광주원부인은 아들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출산했고 왕규는 왕건의 최 측근 신하가 되어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고 한다. 왕건은 임종 시에 왕규에게 태자(혜종)를 보필할 것을 당부하고 눈을 감았고 이에 왕규는 태자를 보필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딸을 혜종의 제2부인으로 출가시킴으로써 2대에 걸쳐 3명의 딸들을 왕실에 출가 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고 한다. 고려 초기 이 지역의 거대 사찰 천왕사에서 활발한 불교활동이 있었던 사실이 고려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는데 아마도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였던 호족세력 왕규의 지원을 받아 이들 사찰에서 크고 작은 불사들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을까? 桐寺를 나와 외곽순환도로 아래 토끼굴을 지나니 휴일의 강태공들이 열 지어 앉은 고골낚시터. 이렇게 열 지어 앉아 낚시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일부러 고기를 풀어놓고 입장료를 받고 영업하는 낚시터가 아닌가 의심. 별로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고개를 외면하고 다시 만난 서하남로를 가로질러 정이 든 이성산성입구로 向. 오전 8시경 산성을 출발하여 이제 오후 3시. 탐방 7시간이 접어드니 피곤해야 할 텐데 전혀 피곤치 않다. 오히려 지난 번 향여고개에서 이성산 정상으로 갔다가 동문지로 바로 하산했던 아쉬움에 이성산성을 일주하겠다는 설렘에 발걸음이 가볍기까지 하다. 성벽을 겸하고 있는 제2저수지 발치에 다다라 왼편으로 방향을 잡고 숲 속 군데군데 성벽 흔적이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발아래 쏟아지는 낙엽이 마지막 가을을 장식하는데 안내판에서 보았던 서문지, 북분지는 흔적은 물론 안내문도 없고 외부를 감시했다는 이성산성에서 제일 큰 바위라는 신선바위 만이 덩그렇게 자리했다. 그래도 무분별한 복원보다는 옛 흔적이 얼핏 보이는 이런 이성산성이 좋다. 그렇게 노란 단풍 숲을 헤집고 나오니 8, 9각 건물지이다. 이성산성의 최고 조망처 동문지 상단에 다다라 멀리 아리수 너머 아차산 줄기, 그 아래 풍납, 천호동 그리고 예봉, 검단산을 조망하며 二聖山의 전설을 생각한다. 백제의 두 왕자 들이 살았다 하여 二聖山이라 했다는데 과연 2명의 백제 왕자는 누구였을까? 지난번 연금이 능선 종주 글에서 유리를 피하여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한 온조와 비류가 아닐까 생각하였지만 나만의 추론일 뿐. 역사의 세월 속에 무너져 내린 산성은 말이 없다. 학계에서도 오래전부터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과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설화이외의 아직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데... 백제는 BC18년에 건국하여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678년을 존속한 나라였다. 백제의 도읍지 변천사를 일별하면, 한성백제(1대 온조 : BC18- 475, 493년) 웅진백제(22대 문주 : 475- 538, 63년) 사비백제(26대 성왕 : 538- 660, 122년) 으로 한성백제 시대는 493년으로 백제의 존속기간 중 무려 3/4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길고 긴 한성백제의 흔적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신라 1,000년의 도읍이었던 경주는 어느 곳을 파도 유물유적들이 발견되어 하나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성백제도 어딘가에 그 절반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삼국사기에는 『溫祖가 漢水 남쪽을 돌아보고 漢山 아래 柵을 세워 慰禮城의 民戶를 옮겼다』라 하였으며,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한강에 인접한 땅 광주고읍(지금의 하남 춘궁동) 지역을 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위례성을 하남지역으로 주장하고 있어 이곳 하남 고골지역이 한성백제의 옛 도읍 터 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게 한다. 그나마 인근에 있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심증이 갈만한 유적들이 발굴되어 한성백제의 모습들이 보이는 듯 하였지만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이곳 고골지역에서 땅 속에 묻혀 잃어버린 500여년 백제가 찬란하게 솟아오르기를 기원 해 보지만 곧 개발될 교산신도시 공사로 영원히 사라질까 염려된다. 이성산성에는 모두 3개의 인공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 저수지는 1986년부터 20년간 11차례에 걸쳐 발굴하였는데 그 과정에 저수지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다. 발굴 과정에 고구려의 자(木尺)와 장구의 몸통(腰鼓) 등이 나와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발견 되었으며, 특히 부러진 목간(木簡)에서 戊辰年이란 글자를 해독해 내었다고 한다. 戊辰年(608년)은 신라 진평왕 30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그동안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신라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남 춘궁동 일대, 이성산성지역이 과연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맞는 것일까? 그 동안 백제의 고성(古城)으로 믿었던 이성산성은 신라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쌓은 한산성(漢山城)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아! 한성백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까지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 결과 백제의 흔적은 아무것도 발견 되지 않다고 하지만 필자는 『저수지는 신라와 고구려 유물이라 하여도 백제에만 있었던 8, 9, 12각 건물지들의 흔적으로 보아 백제의 토성 위에 신라가 석성으로 중수하고, 저수지를 파고 고구려와 몇 번 주인이 바뀌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고찰과 아직 아무런 발굴을 하지 않은 석성 이전의 토성 전체를 살펴보고 춘장, 춘궁, 궁말, 궁안, 이성등 설화를 주시하여야 한다고 본다. 삼국시대에는 영토싸움으로 한지역이 여러 번 주인이 바뀌길 반복했다. 그러한 점에 유의하여 종합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한성백제시대의 하남위례성에 대한 실체의 미스터리에 아쉬움을 안고 남문지 좌측 출입구를 따라 산성지를 나선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연 수로도 있고 샘도 있었다. 곳곳에 남아 있는 城 돌들이 마치 옥수수 알이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하다. 비스듬히 쌓아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으니 쉽게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산성 아래 춘궁동(春宮洞)은 春長里의 春자와 궁말(宮마을)의 宮자를 붙여 이름 지어진 행정동명이란다. 춘장(春長)과 궁말 모두 백제 때의 궁궐이 있었던 마을이라 안내하고 있다. 향교가 자리한 교산동(校山洞) 마을은 춘궁동 내의 법정동으로 광주향교(廣州鄕校)의 校자와 객산(客山)의 山자를 따서 부쳐진 이름이라 한다. (7) 산행후기 산행기를 쓰면서 필자의 글은 청색으로 표시하고 보조 자료들을 검은 글로 덧붙여 놓았다. 특히 조선왕조 실록 관련 자료를 많이 하였는데 실록의 서술을 읽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그 생생함을 전해드리기 위함이다. 특히 淸측의 자료들을 잘 정리해 놓으신 길공구님의 자료를 허락없이 인용하였음을 용서해주시길 길공구님에게 요청드립니다. 또한 교산신도시 개발로 이곳 고골 일대의 지형이 많이 변화 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담당 입안자들에게 몇 가지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1) 산성을 중심으로 연금이능선, 벌객샘능선 사이로 고골계곡에서 발원한 덕풍천, 법화천 사이사이 스민 설화와 전설들이 있습니다. 이제 곧 신도시 개발로 유서 깊은 이곳은 포클레인에 파 뒤집혀질 것이고 거기 건설될 아파트 숲에 매몰돼 버릴 능선과 촌락을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을 비롯한 지명과 흔적들을 잘 조사하고 연구하여 설계도에 반영하여 주십시오. 2) 아파트 숲에 곧 함몰될 이 고골 향교길 주변의 고골, 세미길, 상사창, 하사창, 궁안마을, 춘궁동, 춘장리, 연자방아, 항동, 황골, 읍치, 청풍루, 동경주, 마방... 이런 지명들이라도 동네 이름 등을 세밀히 조사하여 새 거리 이름에 반영하여주시고 포클레인으로 굴착하기 전에 철저하게 문화재 사전조사를 시행하여 유적공원이라도 만들어 고골의 유적관이라도 지어 보존하여 주길 요청드립니다. 고골 세미길, 법화사지와 양고리, 연자방아, 향교길, 광주향교, 선법사와 동사지에 관련된 왕유 이야기 그리고 이성산성과 궁안, 춘장에 얽힌 백제 이야기를 반추하면서 18km, 10시간여의 늦가을 탐방길이었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Take my hand 내 손을 잡아요 / Omar Akram 山行 산행 / 杜牧 두목 遠上寒山石徑斜 원상한산석경사 아득한 한산 비탈진 돌 길 오르니 白雲生處有人家 백운생처유인가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인가가 있네 停車坐愛楓林晩 정거좌애풍림만 수레 멈추고 저녁 단풍 숲을 보니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서리에 물든 잎 봄꽃보다 더 붉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