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8(광주향교길1 ③북문(全勝門), The Sounds of Silence / Bandari)
이름없는풀뿌리2020. 11. 23. 05:01
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③북문(全勝門) –- 북문(全勝門) -
胡亂의 첫 勝捷地 며칠 만에 大慘敗地
그 날을 잊지 말자 正祖께서 내린 현판
아직도 메아리치는 법화골의 비명소리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산성길8(광주향교길1)(2) 행궁-演武館-顯節祠-북문(全勝門)
(+43=43분(08:17-09:00), +1.5=1.5km)
그러한 생각을 하며 북문으로 향하여 가니
고즈넉한 오솔길에 단풍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유난히 스산한 바람과 더불어 현절사에 봉안된 우국지사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쨋튼 겨우 한번 전쟁에 쓰려고 이런 성곽을 쌓고 중수했는지
평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만사 유비무환이란 말이 실감나며
산성이야말로 그러한 정신을 대변한다고 절실히 느끼다.
이윽고 북쪽 성곽이 나타나 오늘 가야할
산성 너머의 고골계곡 아래 상사창리를 내려다보니
남한산성 입성 후 최초의 승리를 거둔 북문 담당 원두표 장군이 생각나고
승첩 11일만에 체찰사 김류의 대책없는 법화골 출전으로
몰살당한 8명의 지휘관과 300명의 사졸들 넋이 생각나고
청군이 망월봉에서 홍이포를 쏘아대는 포탄에
상사창리의 司倉 지붕이 날아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호란 140여년이 지난 1779년 정조는 이곳에 들려 김류의 대참패를 상기하면서
다시는 이런 참혹한 패배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북문을 최초로 全勝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북문앞(09:00, 종로0.3k, 서문1.0k, 수어장대1.7k, 벌봉2.1k, 고골(먹촌)1.3k, 법화골2.2k, 상사창동3.5k)
[북문-서문-남문] 구간은 공사중
2) 북문뒤(09:03, 벌봉2.1k, 서문1.1k, 먹거리촌(고골)1.3k, 법화골2.2k, 광주향교5.8k)
3) 뒤돌아 본 북문
4) 司倉에서 稅米를 등짐을 져 山城으로 날랐다는 세미길
5) [행궁-연무관-현절사-북문] 상세도
□ 북문(全勝門)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全勝門)이라고 한다.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동으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칭하였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본래는 서문인데 정조3년(1779년) 성곽보수공사를 끝내고 전승문(全勝門)이라 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인조14년(1636년) 12월 29일 왕조실록을 보자.
병자호란으로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던 때였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장차 저물려 하니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철군하여 성으로 올라오라고 전령했다.
그 때 적이 뒤에서 엄습해 별장 신성립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하니, 임금께서 위유했다.
(是日, 出兵北門外, 陣于平地, 賊不與之戰. 日且暮, 體察使金瑬在城上, 傳令收軍上城,
賊自後掩之, 別將申誠立等八人皆死, 士卒死傷甚多. 瑬以覆軍、債事待罪, 上慰諭之.)”
이 기록의 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인조반정 일등공신이며 영의정인 김류는
청군이 파논 계략에 빠져 8명의 지휘관과 300여명의 장졸을 순식간에 잃는 참패를 당했다.
청군은 가파른 북문(北門) 아래 법화골 평지에다 가축과 조선인 포로를
미끼로 놓아두었는데 김류가 구출 명령을 내렸다.
장졸들이 함정일지 모른다고 살피자 했건만 비장 유호(柳瑚)에게 칼을 주어 휘둘러
장졸들을 언덕 아래로 내려가게 했다. 이 때 매복한 청군이 급습하니
본인은 성 위에서 초관(哨官)에게 퇴각명령을 전달케 했다.
그러나 때는 늦어 300여명이 몰살당하는 치욕의 법화골전투로 남게 됐다.
그 뒤 어떻게 됐을까? 실록의 기록처럼 김류는 위유(慰諭)를 받고,
엉뚱하게 초관에게 명령전달의 책임을 물어 참수했으며
북성장(北城將) 원두표가 처형 직전까지 몰리는 상황이 전개됐다.
□ 羅萬甲 著丙子, 尹在瑛 譯, 明文堂, 1987, 35쪽
나만갑이 管糧使에 임명되어 창고의 군량을 점검하면서
李曙가 일찍이 남한산성 수어사가 되어 갖은 애를 써서 군량을 비축했었는데,
그가 병으로 물러나고 韓明勖이 광주목사가 된 후로는 민폐라 하여
양식을 산성 안으로 옮기지 않고 갑사창을 한강 가에 지어 모두 이 창고에 저장하고,
일부는 古邑의 창고에 나누어 저장해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 그 양식을 모두 적병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갑사창의 위치는 송파이고, 고읍의 창고는
지금의 하남시 上司倉, 下司倉으로 생각된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병술 7번째기사 1636년
원두표를 어영 부사로 삼다
원두표(元斗杓)를 어영 부사(御營副使)로 삼았는데,
대장 이서(李曙)의 병이 심하기 때문이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8일 무자 4번째기사 1636년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을 베길 청하다. 하교하여 전승의 결의를 다지다
상이 행궁의 남문에 거둥하여 백관을 교유(敎諭)하였다.
전 참봉 심광수(沈光洙)가 땅에 엎드려, 한 사람을 목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그 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최명길입니다."하자,
상이 유시하기를, "너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반열(班列)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자리를 피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이 같은 비운(否運)을 만나 노로(奴虜)가 침략하였다.
정묘년에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달게 받아들였으나
이는 부득이한 계책으로서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다.
이번에 오랑캐가 대호(大號)를 참칭하고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화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지금 군신 상하가 함께 한 성을 지키고 있는데,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싸워서 이기면 상하가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니,
오직 죽음 가운데에서 삶을 구하고 위험에 처함으로써 안녕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떨치고 일어나 적을 상대한다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군(孤軍)은 아무리 강해도 쉽게 약화될 것이고,
사방의 원병이 계속하여 올 것이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아, 같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 서로 도와주고
같은 병을 잃는 사람이 서로 돌보아 주는 것은 이웃끼리도 그런 법인데,
더구나 부자와 같은 군신이며 한 성을 함께 지키며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겠는가.
나는 그대들이 이 혹한 속에서 어려움을 함께 하며
허술한 옷과 보잘것 없는 음식으로 추위에 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음을 생각하고,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오직 바라건대 그대들은 각자 충의심을 분발하고 함께 맹세하여
기어코 이 오랑캐를 물리쳐 함께 큰 복을 도모하라.
그러면 훗날 작상(爵賞)을 어찌 조금이라도 아끼겠는가." 하였다.
□ 최초의 전투상황(12/18 - 12/24)
산성에 입성했을 때 조선군은 12,000여명이었으며
도체찰사(총사령관) 김류의 지휘하에
협수사(사대부 규율, 북문 지원) 유백증, 관향사(군량 지원)는 나만갑이었다.
동문은 대장 신경진, 부장 이영달,
서문은 대장 이시백, 부장 이직,
남문은 대장 구굉, 부장 구인후,
북문은 대장 이서, 부장 원두표 각각 맡아 수비에 임하였는 바
12월 18일 화의 교섭을 단념한 조선군은
이서의 병환으로 북문 부장 원두표가 북문 수비대장 임무를 맡은 후
정예 50명으로 출격하여 방심하고 있는 법화골 청군을 급습하여
청군 6명을 사살하는 입성 최초의 작은 승리를 거두었고(중정남한지, 산성일기)
12월 19일 남문 수비대장 구굉과 군관 이성익(李成翼)이
역시 성문을 나가 청군 2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2월 21일 어영별장 이기축이 청병 10여명을 사살하고
동문대장 신경진도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2월 22일 북문 어영군이 청군 10여명을,
동문대장 신경진이 청군 3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상 산성일기 기록)
이렇게 12월 22일까지 소규모 전투가 있었고 조선군의 승리가 있었다.
그러나 곧 청군 좌익군 24,000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하여
산성 주변을 빈틈없이 포위해버렸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8일 무자 5번째기사 1636년
병사들을 승진시켜 위로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장사(將士)가 이 엄동 설한에 밤낮으로 성을 지키고 있으니 가상하기 그지없다.
참획(斬獲)한 공이 없더라도 내가 매우 기쁘니, 적을 이긴 후에는 논공 행상 하겠다.
중군(中軍) 이하로 아직 6품이 안 된 자는 우선 6품 실직에 올려 제수하고,
5품 이상은 순서대로 실직에 승진시키고, 당상과 가선(嘉善)은 실직을 제수하고,
군졸은 10년을 기한으로 1결(結)을 복호(復戶)하라."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3일 계사 4번째기사 1636년
성을 순시하고 호궤하다
자모군(自募軍) 등이 출전하여 50명 가까운 적을 죽였다.
상이 소여(小輿)를 타고 북성(北城)으로부터 순시하여 서성(西城)까지 이르렀다.
그 길로 정청(正廳)에 나아가 군사를 호궤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유시하였다.
"너희들이 힘을 합해 적을 죽였으니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산성에 물자가 부족하여 호궤 역시 넉넉하게 하지 못하니,
내가 한스럽게 여긴다. 너희들은 더욱 마음을 다하여 적을 초멸하도록 하라."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4일 갑오 4번째기사 1636년
출전한 군사들에게 상을 내리다
군사 4백여 명을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상이 몸소 나아가 호궤하였다. 어떤 병졸이 대열을 벗어나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비단옷 입은 사람을 장수로 정하면 자기는 성밑에 앉아 있으면서 고군(孤軍)만
나가 싸우게 하니, 대오 중의 사람을 장수로 정하여 출전하도록 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 대장에게 말해라."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에 어영청이 아뢰기를,
"오늘 출전하여 적을 죽인 수가 그들의 말대로 계산하면 1백 명이 넘습니다.
과장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방패(防牌) 아래에 둔친 적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흐른 피가 땅에 가득합니다. 전장에서 얻은 것은 호전(胡箭) 1백 4개, 호궁(胡弓) 4개,
검 1자루, 궁대(弓帒) 1부, 갑주(甲胄) 1부, 양구(羊裘) 1벌입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을미 6번째기사 1636년
사영 대장 신경진 등이 청대하고 한 번 싸울 것을 허락받다
사영 대장(四營大將) 신경진(申景禛)·구굉(具宏)·
원두표(元斗杓)·이시백(李時白)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체부가 사영에 전령하여 서로 의논해서 적을 섬멸하라고 하였습니다.
동문이나 남문으로 출병하고 싶은데, 어느 곳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자,
대답하기를, "망월봉(望月峯)과 동문 밖은 모두 형세가 불리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밤에 결사대를 보내어 적장이 있는 곳을 엄습하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경진이 아뢰기를, "적장이 반드시 진영 안에서 잔다고 볼 수도 없는데,
밤에 놀라게 하는 것도 난처합니다."하고,
시백이 아뢰기를, "적은 용병(用兵)에 뛰어나 신출 귀몰하니,
평야에서 접전하면 우리에게 불리할 것입니다. 다만 사졸을 쉬게 하면서
적이 올려다보고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초격(勦擊)하든가,
아니면 외부의 원병을 기다려 협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토록 지구전을 벌이다가 장차 어찌할 것인가.
형세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한 번 싸우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9일 기해 3번째기사 1636년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일 신축 3번째기사 1637년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 임인 3번째기사 1637년
완풍 부원군 이서의 졸기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5일 을사 3번째기사 1637년
전라 병사 김준룡이 치계하여 승전 소식을 전하다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광교산(光敎山)에 【경기의 수원(水原)과 용인(龍仁) 사이에 있다.】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남한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원병의 소식이 잇따라 이르렀으므로 성 안에서 이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계축 2번째기사 1637년
성을 순시하다가 장졸을 위로하다
상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다가 동성(東城)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다. 또 남격대(南格臺)에 이르러 총융사(憁戎使) 구굉(具宏)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 장졸(將卒)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두루 유시하게 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4일 갑인 2번째기사 1637년
얼어 죽은 군졸이 나오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기미 2번째기사 1637년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기미 3번째기사 1637년
이조 참판 정온의 최명길이 나라를 팔아 넘겼다는 내용의 차자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1일 신유 3번째기사 1637년
최명길이 국왕이 성에서 나와야 한다는 오랑캐의 말을 아뢰다
이홍주(李弘胄) 등이 국서를 전하고 온 뒤에 인견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난번의 글에 두 건의 일이 있었는데 듣고 싶다.’ 하기에
신이 먼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일을 대답하고,
성에서 나오는 한 건은 국서 내용을 해석하여 말했더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심양(瀋陽)에 있다면 문서(文書)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나왔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기필코 유인하여 성에서 나오게 하려는 것은 잡아서
북쪽으로 데려 가려는 계책이다. 경들은 대답을 우물쭈물하지 않았는가?"하자,
대답하기를, "준엄한 말로 끊었습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기사 1637년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4번째기사 1637년
서성과 동성을 습격한 적을 패퇴시키다
밤중에 적이 서성(西城)에 육박하였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힘을 다해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적이 무기를 버리고 물러갔다.
조금 뒤에 또 동성(東城)을 습격하였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갑자 1번째기사 1637년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인조 15년 1월 24일 상황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 십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5일 을축 1번째기사 1637년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5일 을축 2번째기사 1637년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청하고는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주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덕형(李德泂)·최명길(崔鳴吉)·이성구(李聖求) 등이 가서 그들을 보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황제가 내일 돌아갈 예정인데,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신은 절대로 다시 오지 말라."하고, 이어 그 동안의 국서를 모두 되돌려 주었으므로
최명길이 이야기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3번째기사 1637년
홍서봉·최명길 등이 강도의 함락을 아뢰다
상이 홍서봉 등을 인견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나라사람들이 매번 강도를 공격하겠다고 하더니, 지금 정말 그렇게 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천하 만고에 어찌 이와 같은 화란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윤방의 장계를 내어 보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빈궁(嬪宮) 이하에 대해서 매우 극진하게 예우하는데,
재상의 가속들도 많이 거느리고 왔다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큰 강으로 가로막힌 천연의 요새가 있다 하더라도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하였다. 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신이 강도의 장계를 보건대 네 사람의 서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혹시 필적을 모방해서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습니까?"하니,
윤구로 하여금 윤방의 서명을 살펴보도록 명하였으나, 윤구 역시 자세히 분변하지 못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5번째기사 1637년
삼사가 청대하여 성을 나가지 말 것을 아뢰다
삼사가 청대하여 통곡하며 아뢰기를,
"내일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하신다니, 사람이 생긴 이래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지난 역사를 두루 살펴 보아도 짐승 같은 나라에게
나가 항복하여 화를 면한 자가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성 안의 식량도 수십 일을
버티기에 충분한데, 내일 성을 나가신다니 이것이 무슨 계책입니까.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의
흉모는 헤아릴 수 없으니, 한번 나간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처음 생각에 이런 일은 결코
따를 수 없고 오직 성을 등지고서 한 바탕 싸워 사직과 함께 죽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군정(軍情)이 이미 변했고 사태도 크게 달라졌다. 밤낮으로 기대했던 것은 그래도 강도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자부(子婦)들이 모두 잡혔을 뿐만 아니라
백관의 족속들도 모두 결박당해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내가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다시 보겠는가."하자,
제신(諸臣)이 통곡하며 나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4번째기사 1637년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5번째기사 1637년
문서를 모아 태우다
제사(諸司)의 문서를 거두어 모아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6번째기사 1637년
이조 참판 정온과 예조 판서 김상헌이 자결 시도와 사론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9일 기사 1번째기사 1637년
윤집·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기사 1637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임신 1번째기사 1637년
철군하는 청의 한을 전송하다
청나라 한(汗)이 삼전도(三田渡)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전곶장(箭串場)에 나가 전송하였다. 한이 높은 언덕에 앉아
상을 제왕의 윗자리로 인도하여 앉게 하였는데, 도승지 이경직(李景稷)만 따라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5일 을해 3번째기사 1637년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8일 무인 1번째기사 1637년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6일 병술 1번째기사 1637년
남한 산성 장사들의 전공을 조사하여 자급을 더하여 주다
남한 산성 장사(將士)들의 전공(戰功)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는데,
서성(西城)에서 힘을 다해 싸운 자는 두 자급(資級)을 올리고,
전투를 도우며 계속 지원한 자는 한 자급을 올리도록 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0일 경인 1번째기사 1637년
남한 산성에 오거나 오지 않은 수령 등을 비국에게 조사하게 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남한 산성에 군사를 이끌고 온 수령, 주사(舟師)를 이끌고 먼저 달려 온 자,
태만하여 나중에 도착한 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지 않은 자를
모두 비국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9일 기해 2번째기사 1637년
백성 구휼과 호종한 자의 포상에 대해 대신과 논하다
상이 대신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오늘날의 시급한 업무를 모두 이미 거행하였는가?"하니,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감하여 덜어주는 일은 해조에 공안(貢案)이 없기 때문에 각도(各道)로 하여금
베껴서 보내도록 하였으니, 본안(本案)을 관찰한 뒤에 알맞게 감하여 반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굶주린 백성을 진구(賑救)하는 것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일인데 국가의 저축이
없으니, 각도의 곡식을 운반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제때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또 듣건대 청나라 군사가 장차 4월에 압록강을 건널 것이라고 하는데, 금년 농사도
앞으로 시기를 잃을 듯하니 애처로운 우리 백성이 거의 씨가 마를 것이다."하니,
좌의정 홍서봉이 아뢰기를,
"듣건대 저들이 몽고(蒙古)의 군사를 제대로 먹이지 않아 조선을 침략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머물러 지체하는 목적은 필시 모두 약탈해 가려고 하는 것으로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한 산성에 호종(扈從)한 자들의 노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녹훈(錄勳)하고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하니,
김류·홍서봉이 아뢰기를,
"신과 같은 무리야 죄만 있고 공은 없으니 어찌 감히 입을 놀리겠습니까. 성첩을 지킨
대장(大將)들은 혹 녹훈할 수도 있겠으나 어찌 호종했다고 하여 모두 녹훈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군이 돌아가지 않았으니 천천히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상(賞)은 시기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꼭 그들이 모두 돌아가기를 기다리겠는가. 사대부도 모두들 성첩을 지켰는데
늙고 병든 신하가 온갖 고통을 겪은 그 공는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하니,
김류·홍서봉이 아뢰기를,
"이는 모두 신하의 직분상 마땅히 할 일인데 어찌 감히 고통을 겪었다고 하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대부야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있다는 것을 아니, 당연한 이치라 하겠지만,
군졸들의 경우는 매우 어리석고 식견이 없는데도 한 번도 해이되지 않았으니,
그 공로는 참으로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급복(給復)하고 급첩(給帖)하는 일을 다시 거듭 밝혀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3월 16일 을묘 1번째기사 1637년
원두표·김종일·신익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원두표(元斗杓)를 전라 감사로, 김종일(金宗一)을 지평으로 삼고,
특명으로 신익량(申翊亮)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4월 19일 무자 3번째기사 1637년
윤집과 오달제가 문초 당하다 오달제가 죽은 일
□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8일 을사 2번째기사 1637년
심양에 배종한 재신이 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이 살해당한 정상을 치계하다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9일 경신 1번째기사 1779년
남한산성내 백성의 가장 큰 폐단인 보휼고의 빚을 탕척하다
임금이 남한(南漢)에 있었다.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성조(城操)를 행하였는데,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수어사(守禦使)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 경술년 행행(行幸) 때에 이 대(臺)에 들르셨고
오늘 내가 또 여기에 왔는데 산천이 옛날과 다름없어 사물에 접하면 감회를 일으키니,
내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슬프고 사모하게 된다.
병자년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 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하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때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꿈에 온조왕(溫祚王)이 와서
적병이 성에 오른다고 알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조(聖祖)께서 놀라 깨어 곧 명하여 정탐하게 하셨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아서
장사(將士)를 시켜 격퇴하게 하셨는데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으므로,
환도(還都)한 날에 특별히 명하여 온조묘(溫祚廟)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하게 하셨으니,
일이 매우 영이(靈異)합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와서 옛날을 우러러 생각하시니,
성심(聖心)이 느껴 사모하는 것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임금의 효도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거니와, 이것은 무왕(武王)이 잘 계술(繼述)하여
천하의 달효(達孝)가 된 까닭이니, 반드시 성조의 성덕(盛德)·지선(至善)을
오늘날에 본받아 계술하는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숙조(肅祖)·영고(英考)께서 효모(孝廟)의 지사(志事)를 뒤따르고
중화(中華)의 멸망을 개탄하여 모든 계술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으니,
이것은 후사(後嗣)가 본받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성조의 성덕을
닮기를 바랄 수 있으랴마는, 구구하게 스스로 힘쓰는 마음만은 늘 선지(先志)를
추술(追述)하고 영덕(令德)을 실추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 계술을 잘하는 방책은 참된 마음으로 참된 정사(政事)를 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고서야 내 오늘의 마음이 겉치레로 돌아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거니와,
경들도 내 이 마음을 몸받아 협찬(協贊)하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하였다.
성조(城操)의 예(禮)가 끝나자 여(輿)를 타고 서장대를 나가
서성(西城)에 이르러 주필(駐蹕)하여 성 안팎을 둘러보고 임금이 말하기를,
"천주봉(天柱峰) 아래 숲 사이에 은은히 나타나는 누각은 천주사(天柱寺)인가?"하매,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성 밖 산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곳은 조금 낮기는 하나 사면의 언덕 기슭이 험준하니,
이 성의 요해(要害)라 할 수 있다."하였다.
남성(南城)에 이르러 이현(梨峴)을 가리키며 하교하기를,
"병자년에 김신국(金藎國)·정온(鄭蘊) 등 여러 사람이
4백 명의 군사로 먼저 이곳에 웅거하여 삼남(三南)의 성식(聲息)을 통하기를 청하였으나
체부(體府)에서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빼앗겨
안팎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현 왼쪽 조금 남쪽으로 산성 가까운 곳 위에
돈대(墩臺)가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남격대(南格臺)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남격대인데, 이 대에 오르면 성안을 굽어볼 수 있고
동쪽으로 무갑산(武甲山)에 이르면 쌍령(雙嶺) 이내의 산골짜기가 멀리
돌아간 곳을 다 앉아서 볼 수 있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기진(李箕鎭)이 남격대를 수축(修築)하고
이현에 나무를 길렀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남문루(南門樓)에 이르러 주필하여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곳을 지나는 여느 사람도 모두 분완(憤惋)하고 강개하는데, 더구나 내 마음이겠는가?
이제 이 누각에 올라 남으로 오는 한길을 굽어보며 병자년을 상상하니
똑똑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때 김유(金瑬) 등이 강도(江都)로 이필(移蹕)하기를 청하여
성조께서 밤에 이 문을 나가다가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말을 버리고 걷기까지 하여 옥체(玉體)가 편찮으시므로
회가(回駕)하여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니 이곳은 읍(邑)보다 낫지 못하다. 예전부터 파천(播遷)하는 괴로움이
어느 세대엔들 없으랴마는, 어찌 병자년처럼 창황하여 어쩔 줄 모른 때가 있었겠는가?
이제 비록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어 나라 안이 안녕할지라도,
편안할 때에 위태한 때를 잊지 않는 도리로서는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척연(愓然)히 흥기(興起)하고 감분(感奮)하여
서로 경계하고 힘써야 할 바이다. 그때 제장(諸將)이 각각 사문(四門)을 지켰는데,
남문은 구굉(具宏)이 지키면서 혹 출병(出兵)하여 접전(接戰)하기도 하여
참획(斬擭)이 많이 있었다."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이제까지도 성 아래 골짜기 사이에서
혹 철환(鐵丸)·전촉(箭鏃)을 얻는다 합니다."하였다.
북성(北城)에 이르러 연주봉(連珠峰) 위에 주필하여 하교하기를,
"이 성 밖은 산비탈이 높고 가파르며 산골짜기가 멀리 돈 것이
남성 밖 보다 더욱 심하다. 이것이 호병(胡兵)이 매복하던 곳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金瑬)가 이 성에서 독전(督戰)할 때에 적에게 속아서
경솔히 먼저 출병(出兵)하였다가 전군이 패망하였다."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때 어영군(御營軍) 3백 인이 일제히 성에서 내려가
앞다투어 적에게 나아갈 즈음에 좌우의 복병이 일제히 일어나서 그들에게 섬멸되었고
또 주장(主將)이 화약(火藥)을 아껴 쓰므로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글을 보면 무릇 옛 싸움터를 지나는 자는
문득 옛일을 슬퍼하는 뜻을 금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더구나 내가 이곳에 친히 와 보니 마치 충혼(忠魂)·의백(毅魄)이
아직도 산골짜기 사이에 머물러 있는 듯하여 마음이 매우 슬프다.
내가 여기에서 또 느끼는 것이 있다. 싸움터를 한번 보고도 오히려 슬프고 상심되니,
궁벽한 마을 깊은 시골의 오두막에서 잔인할 정도로 몹시 고생하는 정상이
어찌 이곳에 와서 옛일을 생각하는 것만할 뿐이겠는가?
병자년에 청병(淸兵)이 다 이 곳에 둔쳤는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호병이 성밖 사면에 차서 조각만한 땅도 빈 곳이 없게 되었고
북문(北門) 밖으로 말하면 적병이 가장 많이 모여서
가파른 산기슭과 깊은 구덩이도 영루(營壘)의 옛터가 아닌 곳이 없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의 지명(地名)은 무엇이라 하는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성문 밖 한길의 왼편은 금암동(金巖洞)이고 오른편은 마근동(馬跟洞)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주(本州)의 고읍(故邑) 터는 어느 곳에 있는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산 북쪽의 조금 넓은 곳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느 곳이 검단산(黔丹山)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곧바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데에 있는
길게 굽고 깎아질러 선 산이 검단산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주 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正吉)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여기에 이르렀으나
적에게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봉화를 올려 서로 응하니,
성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원병(援兵)이 있음을 알고 모두 용동(聳動)하여 기뻐하였다 한다.
성 동쪽에 험준하게 높이 나온 것은 한봉(汗峰)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청사(國淸寺)라는 이름은 중 각성(覺性)이 이름지어서
먼저 알린 것이라 하는데, 참말인가?"하매, 서
유방이 말하기를,
"갑자년 성을 쌓을 때에 각성이 두 절을 창건하여
국청(國淸)·한흥(漢興)이라 이름지었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다가
병자년 이후에 비로소 한(漢)과 한(汗)이 같은 음이고
금(金)나라가 이 해에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것을 알았는데,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기이하게 여겨 각성에게 매우 후하게 물건을 내리셨다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명이 서로 부합된 것을 어찌 반드시 앞일을 예언한 말로 죄다 돌려야 하랴마는,
후세 사람으로서 보면 일이 우연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북문루(北門樓)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하교하기를,
"이 성의 형편을 이제야 비로소 두루 보았다.
성이 뭇 봉우리 꼭대기에 있고 좌우의 산골짜기가 언틀먼틀 가파르니
천험(天險)인 땅이라 하겠다. 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만하다마는,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決戰)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떨어지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역경(易經)》에 ‘왕공(王公)은 험조(險阻)를 베풀어 나라를 지킨다.’ 하였거니와,
지리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병을 걱정하였겠는가?"하였다.
침과정(枕戈亭)에 이르러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말하기를,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성을 쌓을 때에
덤불이 우거진 가운데에서 이 정자를 찾아냈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일이 본주의 읍지(邑誌)에 실려 있는데, 여기는 온조왕의 옛성이므로
사람들이 온조왕이 세운 것으로 여깁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명(明)나라 부총관(副摠管) 정용(程龍)이
벽에 난초 두어 떨기를 그리고 또 용을 그렸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 하면 구름과 바람이 늘 그 사이에서 나오고
혹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 한다. 지금도 옛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정두경(鄭斗卿)의 화란가(畵蘭歌)를 보면 정사(程使)가 벽에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벽이 무너져서 필적(筆跡)은 징험할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연병관(鍊兵館)에 환어(還御)하여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이번 동가(動駕)는 참으로 열성(列聖) 때에 행하신 전례를 따른 것이나,
길이 1백여 리에 가깝고 날짜가 일여드레가 되어
백관(百官)·군병(軍兵)이 달려온 노고가 참으로 가엾고 염려된다.
세 고을의 백성으로 말하면 그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이 심상한 것이 아니고
또 바라던 끝에 실혜(實惠)가 없다면 어떻게 백성의 뜻을 위로하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겠는가? 열성 때의 행행(行幸)에는 다 특별한 은혜가 있었으므로
나도 덕의(德意)를 우러러 따라서 올 가을의 대동(大同)을 모두 견감(蠲減)하라고 명하여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방도로 삼았으니, 산성(山城)의 백성에게는
더욱이 특별하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政事)가 없어서는 안된다.
경들은 이미 연석(筵席)에 입대(入對)하였으니,
무릇 폐단을 바로 잡을 방도를 함께 강구하여 품정(稟定)하라.
내일은 회란(回鑾)할 것이므로 내 마음이 연연(戀戀)하여 잊을 수 없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산성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것은 보휼고(保恤庫)의 빚돈만한 것이 없습니다.
당초 빚을 준 것은 비록 이식을 받아 보태어 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제는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본전은 이미 다하였는데
이식은 오히려 남아 있어서 이웃에서 거두고 겨레붙이에게서 거두기까지 하므로
온 경내(境內)가 소요합니다. 장교(將校)·서리(胥吏)로부터 아래로 군졸·평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이 폐단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탕척하여 몹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늦추어 주어야 하겠다."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백성을 돌보시는 성의(聖意)는 누구인들 흠양(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이를 전수 탕척한다면 경용(經用)이 줄어질 것이니, 민망스럽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숙묘(肅廟)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어찌 아까우랴?’ 하셨고,
선대왕(先大王)께서 번번이 이 하교를 사륜(絲綸) 사이에 일컬으셨다.
나 소자(小子)가 옆에서 듣고 지금까지도 배송(拜誦)하고
내가 사복(嗣服)하고부터는 이성(二聖)의 덕의를 우러러 몸받거니와,
무릇 백성을 편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어찌 피부가 아깝지 않을
뿐이겠는가? 국용(國用)이 줄어지는 것은 돌볼 것도 못된다."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거가(車駕)가 본부(本府)에 와서 먼저 민폐를 물었는데,
이른바 보휼고의 취리전(取利錢)을 가장 깊은 폐단이라 하니,
소생시키고 개혁하는 정사를 베풀어 부담을 벗는 방도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전후 성 안 백성의 빚돈을 탕척하고 문권(文券)을 불사르라."하고,
이어서 서명응에게 이르기를,
"이것을 탕척하고 나면 지방(支放)에 드는 것을 다른 데에서 옮겨
채워 주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보휼고의 빚돈 4천 냥을 탕척하라고 특별히 하교하신 것은
참으로 성안 백성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뼈에 살을 붙이는 듯한 은혜입니다마는,
유영(留營)의 지방 4백 냥은 구처(區處)할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신이 청하여 얻은 광주(廣州)의 결전(結錢) 1천 4백 냥을
보휼고에 획송(劃送)하여 지방 등의 수용(需用)에 충당하고 혹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해고(該庫)에 저축하여 두어 뜻밖의 비용에 대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행행(行幸)과
조련(操鍊) 때 신의 영문(營門)에서 책응(責應)하는 것이 많은 것을 염려하시어
관서(關西)의 좁쌀 2천 석을 획급(劃給)하셨습니다마는,
지난해 해서(海西)에서 관향(管餉)에 보탠 좁쌀도 값이 싸서 팔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과 도신(道臣)이 왕복하여 상의해서 그대로 황주(黃州)·봉산(鳳山) 두 고을에 두고
수어청(守禦廳)의 곡식으로 조적(糶糴)하게 하였거니와,
이번에 책응한 전곡(錢穀)은 모두 신의 청(廳)의 관향 전곡(管餉錢穀)에서
가져다 썼으므로 달리 빌린 일이 없는데,
또 저것을 팔아서 이것을 갚는다면 옮겨다가 바꿀 즈음에 절로 폐단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비용으로 든 것은 곧바로 사실에 의거하여 관향 전곡에서 회감(會減)하되,
성조(城操)를 15년 동안 행하지 않은 것은 비용으로 드는 것을 장만하기 어렵기
때문이였으니, 이번 관서의 좁쌀 2천석도 한결같이 해서 좁쌀의 전례에 따라
그대로 고을에 두고 조적하여 3천 석의 모곡(耗穀) 3백 석을 해마다 돈으로 바꾸어
유영에 저축하여 성조한 뒤에 시사(試射)·시방(試放)하고
호궤(犒饋)하고 상주는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산성에는 예전에 부정전(釜鼎錢)을 받아들인 2백 80냥이 있어서
한 해 걸러 숯을 사고 소금을 사서 혹 묻거나 구웠거나,
다 내영(內營)·외영(外營)의 장교·서리들이 경영하므로
이른바 탄염(炭鹽)이라는 것이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유영 별장(留營別將)에게 맡겨 숯은 전대로 묻어 두고
소금은 강화(江華)·황주(黃州)의 예(例)에 따라 염산(鹽山)을 만들면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에게 명하여
부로(父老)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 길공구님 홈페이지에서
청실록, 내국사원당, 만문노당, 이조실록, 승정원일기, 병자록. 산성일기, 심양장계 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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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루님의 부흥네이버대표 역사까페 “양고리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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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군12만명 (남한산성1.38만명, 속오군5.0만명, 근왕병4.2만명, 의병1.7만명)
2) 청군 대략 12만명(사료마다 4만-12만으로 다름)
3) 후금은 여진족, 몽고족, 한족등 연합체로 약 35만명의 인구로 명1.5억, 조선1천만 정복
(정규군 9만중 4.5만참전?)
4) 남한산성 주변 청군 배치도와 산성내 병력배치 현황 및 입성후 원두표 첫승전과 포상,
성내조선군 1.3만명, 36/12/18 원두표 첫 승, 36/12/29 김류 300전사 대패,
37/1/2 이서 병사, 37/1/7 양고리 전사,
5) 1637년 1월 10일 두두의 홍이포 34문 남한산성 도착
6) 청군 1636/12/27 5천-8천, 1637/1/10 1.1만, 16/1/23 3.5만(산성주변 1월하순 병력 증강)
청군 포위 병력이 소수였던 1636/12/18 원두표 잔군 승리등 약간의 승첩이 있었으며
청군내 천연두발생등으로 속히 항복 받으려고 점점 병력을 증강, 1/19부터는 집중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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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unds of Silence / Band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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