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길8(광주향교길1 ⑤덕풍천, 춘궁동, Solo hay una para mi / Semino Rossi)
이름없는풀뿌리2020. 11. 25. 06:20
요즈음 – 산성길8(광주향교길1 ⑤덕풍천, 춘궁동) –- 덕풍천 -
邑治가 옮겨간 자리 古邑이 新邑되어
稅米길 司倉이란 듯 뒤덮은 가내 공장
그마저 도시개발로 몸살 앓는 고골길
* 고골 : 고골은 남한산성 북문에서 광주향교까지 이르는 덕풍천 주변의 상사창동,
하사창동, 춘궁동, 항동, 교산동 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광주읍치가 있던 곳이라
는 의미에서 고읍(古邑)으로 불리다가 “고고을”을 거쳐 “고골”로 변천되었다고 함.
- 춘궁동(春宮洞) -
궁말에 召西奴님 모셔둔 沸流 溫祚
이성산 지키다가 제 갈길 갔었다고
地名에 살아 남아서 잃은 歷史 읽는다.
* 춘궁동(春宮洞)은 春長里의 春자와 궁말(宮마을)의 宮자를 붙여 이름 지어진
행정동명이며 춘장(春長)과 궁말 모두 백제 때의 궁궐이 있었던 마을이라 함.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4) 연자방아입구-덕풍천 광주향교길-선법사
(+150=333분(11:20-13:50), +5.8=12.1km)
연자방아 입구로 내려와 광주향교로 가는
이정목이 군데군데 설치된 덕풍천을 하염없이 따라가니
곧 교산시도시로 개발될 예정이라는 온갖 현수막이 걸려있다.
결사반대. 개발회사들의 회유 – 이런 현수막을 보니 곧 철거작업이 임박한 것 같다.
선진국들이야 국민들의 의사를 하나하나 존중하여 개발되기에
한국 같은 신도시가 들어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데
OECD에 진입한 우리는 아직도 개발도상국 시절의
토지수용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위정자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역사고 주민의사고 뭐고 다 뭉개고
도시를 건설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이곳이 유서 깊은 동네라 기대했지만
가만 살펴보니 옛 냄새는 어디에고 찾아 볼 수 없고
온갖 조립식 가내 공장이 난립하고 쓰레기가 골목마다 엉켜있다.
하지만 건축물을 받치고 있는 토대의 돌들을 살펴보니
춘궁동 객산 아래 있었다는 성터에서 날아온 돌인 듯
성벽돌들이 줄지어 쌓여진 모습이 간혹 눈에 띈다.
경기도, 충청도등 수도권 시골 동네 어디를 가 봐도
하늘에 난무하는 전깃줄과 철탑과 조립식 공장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옛 시골의 아기자기한 골목에 어우러진 촌집들과
전답이 어우러진 그런 시골은 강원도나 충청권 이남의
평지가 아닌 산골을 찾아야 겨우 눈에 띌 정도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지만 그러한 현실이 서글픈 것은 사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깨끗한 신도시로
개발된다고 무작정 반대할 일은 아니지만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와 설화가 녹아있는 곳이기에
그러한 역사와 설화와 유물을 철저히 고증하고 조사하여
신도시의 공간과 지명과 시설에 반영하여
예쁜 도시로 만들어주길 도시설계 입안자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그렇게 공장들과 주택과 전답이 뒤엉킨
덕풍천변 고골길의 춘궁로(상사창동, 하사창동, 춘궁동, 항동, 교산동)를 지나오니
어느덧 객산 아래에 도착했는데 뒤엉킨 공장들과 주택들의 막다른 길이다.
동네 아주머니에 선법사 가는 길을 물으니 휴대폰 길찾기를 보라는 쉬운 대답.
휴대폰 길찾기로 보니 숲 하나만 가로지르면 될 거리.
숲을 헤집고 나아가니 송아지만한 고라니가 놀라 달아나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선법사라 짐작되는 사찰의 추녀가 보이다.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1/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상사창동고골주차장(11:30)
2) 바로 오늘날 덕풍천변 광주향교길이라 불리우는 이 길이 稅米길이라 한 고골길
3) 고골의 유래와 고읍(古邑)의 위치
4) 사창(司倉)의 유래
5) 백제의 두 왕자가 살았던 설화를 가진 이성산(二聖山)
6) 백제 시대 궁궐이 있던 마을(春長里)의 궁말에서 유래한 춘궁동
7) 연자마에서 가내공장으로 뒤덮힌 하사창동, 하사창동의 춘궁로 골목길을 돌고돌아
숲에서 고라니도 만나며 객산을 바라보며 휴대폰 GPS로 선법사를 찾아 가는 길
□ 廣州邑治에 대한 硏究
김 세 민 - 하남역사박물관 관장 -
이상에서 중대면의 고읍, 동부면의 고읍,
그리고 광주객사의 위치, 이와 관련된 청풍루와 동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광주고읍은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던 동부면(춘궁동) 외에
중대면(송파)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의 인조 출성 기사에서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 수항단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고광주를 거쳐 갔기 때문에
이 코스로는 동부면 고광주를 지나갈 수 없으며,
승정원일기를 작성한 기록자가 송파 부근을
동부면 고읍 앞이라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의 기록대로 중대면에 읍치가 설치되었다면,
그 시기는 동부면 읍치보다 이전이거나, 아니면 동부면 읍치 설치 후
어떤 이유로 일시 읍치가 이동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동부면의 읍치 설치는 동국여지지나 허백당집에 관아나 객사 모두
고려 때 설치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 어느 때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그 구체적인 시기를 고려 태조 23년(940) 광주로 명칭이 개칭되었을 때 이거나,
또는 성종 2년(983) 목사가 파견되기 시작했을 때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산동 건물지의 출토유물 중 廣州客舍銘 기와가 출토되는 층이 여말선초 층이고,
광주향교 전사청, 제기고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의 중심연대도 고려 말기인 14세기경이다.
또한 수복사 부지 발굴에서도 泰定廣州, 二年客舍, 泰定二年銘 기와도 출토되었는데,
이 泰定二年은 원나라의 연호로 고려 충숙왕 12년(1325)이다.
따라서 동부면 읍치도 고려 초에 바로 설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동부면 읍치의 설치 이전에 중대면에 읍치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고려 초 중기 이전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동부면에 읍치가 설치된 후
읍치가 이동될 만한 사건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과 홍건적의 침입,
조선 연산군 12년의 광주 혁파 및 금표설치,
선조대의 임진왜란, 인조 4년 병자호란에 대비한 읍치 이전 등이 열거된다.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에는 이세화가 광주성(남한산성)에서 수성하였고,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 때에도 왕이 광주에 머물렀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가고 州官만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시 남한산성에서 수성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결국 인조대 남한산성으로 읍치를 이전하기 전에도 변란이 있을 때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였고, 읍치는 황폐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선조 35년(1602) 작성된 차천로의 광주향교중창모재문에도
섬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향교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고, 무성한 잡초와 덤불,
뚫어진 벽과 깨진 기와에는 참새와 까치의 소리만 처량하였다고 적고 있다.
전란을 겪은 지 10년이 지나 점차로 옛 모습이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읍치의 복구도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동부면 읍치 이후,
이동되었다면 아마 이런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인조대 읍치를 남한산성으로 옮긴 후에도
산성 안에는 행궁과 객사만 세웠을 뿐 나머지 관아 건물들,
즉 좌전, 제승헌, 수어영, 좌승당, 일장각 등은 모두 18~19세기에 지어진 것을 볼 때,
남한산성이 읍치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교산동 건물지 마지막 층인 3기층에서는 숙종대 이후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고,
광주향교 역시 고읍에 이건하는 시기 역시 숙종 이후인 것으로 보아
행정적인 업무는 고읍에서 어느 정도 계속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인조대 이후 광주지방 행정체제와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즉 인조 즉위 후 광주는 유수겸수어사체제가 되었다가
인조 8년(1630) 부윤체제로 복귀되고,
다시 숙종 16년(1690) 유수겸수어사 체제로 환원되었다가
숙종 25년(1699) 다시 부윤체제로 되돌아가는 등 변동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편, 연산군대의 광주혁파와 금표설치는 그 기간이 짧고,
광주가 혁파된 기간에도 금표를 관리하는 봉공문신, 검찰관등이 남아있으며,
또 중종 원년(1506) 11월까지 광주판관이 혁파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읍치가 이동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부면 읍치의 위치로는 문헌에서는 지금의 광주향교,
고고학적으로는 교산동 건물지, 광주향교, 서부농협 뒤편 등이 거론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읍치가 넓게 나타나는 것은
관아에 속한 부속건물들을 포함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고지도 등을 얹어
지리학적인 교통로까지 검토해도 결과는 거의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동부면의 읍치는 검단산을 주산으로 등지면서 서향을 하였고,
십자형의 도로에 인접한 접선형의 도로가 읍치를 지나가는
그런 곳에 위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읍의 터를 광주향교 일대, 또는 교산동 건물지 일대라고 보았을 때,
그 부근에서 객사의 터를 찾는다면 역시 지금의 교산동 건물지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특히 몇 가지 자료 중 虛白堂集의 淸風樓記는 客舍의 중건과 청풍루가
객사에 부속된 樓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그 외 다른 여러 자료들은
청풍루의 위치가 객사, 관사에서 북쪽, 동북쪽 방향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객사, 관사가 지금의 향교 또는 교산동 건물지 중 어느 쪽이든 간에
동북 방향은 동경주 방향이고, 읍치로 들어오는 길목에 해당한다.
만약 청풍루가 객사에 부속된 樓라면, 기록에서 말하는 客館 동북방향의 청풍루와
그 반대 방향, 즉 남서방향의 교산동 건물지가 기록과도 맞기 때문에
교산동 건물지가 객사지로서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풍루는 지금의 바깥샘재 또는 동경주에 있었다고 보여지는
東亭과 위치, 기능 등이 흡사하기 때문에 청풍루가 바로 東亭이었거나
아니면 같은 길목에 있었던 비슷한 기능의 樓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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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o hay una para mi 오직 나만을 위해 있어주오 / Semino Ros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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